인류사

상기내용을 모두 옳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역사를 찾아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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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 절기표







    24절기 [ 二十四節氣 ]         태양의 황도상 위치에 따라 계절적 구분을 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황도에서 춘분점을 기점으로 15° 간격으로 점을 찍어 총 24개의 절기로 나타낸다. 














    명칭의미대표 음식태양  날짜일출정남일몰춘분밤낮
    길이 같음 6:3512:3918:44춘분(春分) 2017년 3월 20일 청명농사
    준비하는 날찬밥6:1212:3518:58청명(淸明) 2017년 4월 4일 한식동지에서
    105일 되는 날찬밥6:1112:3518:59곡우농사비
    오기 바라는 날곡우차5:5112:3119:12곡우(穀雨) 2017년 4월 20일 입하여름의
    시작쑥떡5:3312:2919:25입하(立夏) 2017년 5월 5일 소만농사의
    시작냉이국5:1912:2919:39소만(小滿) 2017년 5월 21일 단오음력
    5월 5일쑥떡5:1212:3019:48 망종씨
    뿌리는 날보리밥5:1112:3119:50망종(芒種) 2017년 6월 5일 하지해가
    가장 긴 날감자전5:1112:3419:57하지(夏至) 2017년 6월 21일 소서더위의
    시작수제비5:1712:3719:56소서(小暑) 2017년 7월 7일 초복하지에서
    3번째 경일삼계탕5:2412:3819:52 대서가장
    더운 때 5:2712:3819:50대서(大暑) 2017년 7월 23일 중복하지에서
    4번째 경일삼계탕5:3212:3919:44 입추가을의
    시작 5:4112:3819:35입추(立秋) 2017년 8월 7일말복입추에서
    1번째 경일삼계탕   처서일교차
    커짐 5:5412:3519:15처서(處暑) 2017년 8월 23일 백로이슬이
    내림포도6:0812:3018:51백로(白露) 2017년 9월 7일 추석음력
    8월 15일 보름날송편   추분밤낯
    길이 같음 6:2012:2518:28추분(秋分) 2017년 9월 23일 한로찬
    이슬이 내림국화전6:3312:2018:06한로(寒露) 2017년10월 8일 상강서리가
    내림 6:4712:1617:45상강(霜降) 2017년10월 23일 입동겨울의
    시작김장김치7:0312:1617:28입동(立冬) 2017년11월 7일 소설얼름이
    언다 7:2012:1818:17소설(小雪) 2017년11월 22일 대설큰
    눈이 온다 7:3312:2317:13대설(大雪) 2017년12월 7일 동지밤이
    제일 길다팥죽7:4312:3017:17동지(冬至) 2017년12월 22일 소한가장
    춥다 7:4712:3817:28소한(小寒) 2017년 1월 5일 대한매우
    춥다 7:4412:4317:42대한(大寒) 2017년 1월 20일 입춘봄의
    시작탕평채7:3412:4617:58 입춘(立春) 2017년 2월 4일 우수비오고
    싹이 튼다 7:1812:4618:15우수(雨水) 2017년 2월 18일설음력
    1월 1일떡국   경칩동물이
    겨울잠에서 깬다 6:5812:4318:30경칩(驚蟄) 2017년 3월 5일 춘분밤낮 길이 같음 6:3512:3918:44춘분(春分) 2017년 3월 20일         동지가 지났는데도, 평소 출근 때 보다 해가 확실히 더 늦게뜨길래 궁금해서 찾아봤어요.​그저 바쁜일상 때문에 '겨울철 출근길은 어둡고, 여름철 출근길은 밝구나.' 정도로만 느꼈었는데, 이런것도 찾아보고, 여유가 생기긴 했나봅니다.​  일출,일몰은 2015년기준이므로 대략적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만 하세요. ​출처 : http://astro.kasi.re.kr/Main/MainPage.aspx[네이버 지식백과] 24절기 [二十四節氣] (두산백과)천문우주지식포털astro.kasi.re.kr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9 조회 368
  •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에 대한 '한' '맥' '예' 3부족결합설
    한국민족 형성에 관한 종래 학설들은 각각 바이칼, 카프카스, 알타이, 몽골, 시베
    리아, 古중국 북부지방 등에서 형성된 한국민족이 古한반도에 이동 이입해 들어왔
    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한국 ‘민족’ 형성의 선행 ‘부족’에 대해서도 북방으로부터
    의 이동 이입을 전제로 ①‘예’1부족설 ②‘예맥’ 1부족설 ③‘예’와 ‘맥’ 2부족 결합설이
    제시되었다. 기존 학설들은 모두 유라시아대륙 북방에서 형성된 한국 원민족이 한
    반도에 이동 이입해 들어올 때까지 古한반도는 빈 ‘공간’으로 전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날학파를 비롯한 세계 사회사학파의 최신방법론을 적용하여 검증해 보
    면 기존학설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약 5만년 전~1만5천년 전 ‘최후의 빙기’에 북위 약 40도(한반도의 신의주
    통과선) 이북의 유라시아대륙은 凍土가 되어, 그 이남의 ‘동굴’ 지대로 피한해 들어
    간 소수 구석기인 외에는 거의 모두 사멸하였다. 북위 40도 이하의 동아시아에서
    석회암 동굴이 가장 많은 古한반도의 동굴지대에는 기존 구석기인들과 피한해 온
    구석기인들이 합류하였다.  …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02 조회 213
  • 동양 별자리 개요
    동양과 서양은 하늘을 바라보는 기준이 서로 달랐다. 서양은 태양을 중심으로 별자리를 구분했고, 동양은 북극성과 달을 중심으로 별자리를 나눴다. 또한 동양에서는 천구의 적도를 12등분하여 12차(次)라 했고, 서양에서는 황도를 12등분하여 황도 12궁이라고 했다. 이렇듯 동,서양은 하늘의 큰 원이라고 하는 ‘주천(周天)’의 구분방식이 달랐다. 이것은 서양이 양력을 사용하고 동양이 음력을 쓰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동,서양의 별자리 특징은 무엇인지 이제부터 살펴보자.구분서양동양하늘을 보는 기준태양북극성과 달좌표계황도 좌표계적도 좌표계달력태양력태음태양력주천(周天) 구분방식황도 12궁적도 12차(次)서양 사람들은 태양을 신성한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에게 태양이 지나다니는 길은 매우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늘에서 태양이 지나가는 길을 황도라고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이 황도를 기준으로 별자리를 구분했다.황도 12궁은 태양이 한 달간 머무르는 하늘 위의 12 거처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태양은 한 달에 평균 한 궁씩 옮겨져서 12달 만에 한바퀴를 돌게 된다. 각 궁은 춘분점을 기점으로 황도의 원을 12등분한 것이므로 대략 30도의 간격을 지니고 있다.별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의 기준점이 되는 춘분점이다. 춘분점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태양이 위치하는 곳을 말하는데 현재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양자리에 춘분점이 있었으나, 세차운동 때문에 현재는 물고기자리에 위치한다. 춘분점은 25,800년을 주기로 한 바퀴를 돌게 되며, 지금으로부터 다시 6백년 정도 지나면 물병자리로 옮겨진다.서양에서는 바로 이 황도 12궁으로 별점을 쳤다. 태어난 날에 태양이 위치한 별자리가 바로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별빛에 의존해 소망을 빌고 인간의 운세를 점치는 것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으나, 이제는 성격과 운세 등을 재미삼아 보는 수준에 그치게 되었다.동양의 하늘은 북극과 적도가 별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북극을 중심으로, 적도 기준선을 따라 28수를 나누고, 12차(次)도 나누었다. 28수란 달이 지구를 도는 공전주기인 28일에 맞춰 적도 주위에 늘어서 있는 별자리 를 나눈 것이며, 12차란 12년 마다 한번씩 하늘을 도는 목성(세성)의 움직임에 따라 적도 부근을 12개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동양의 별자리는 적도좌표계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은 해, 달, 행성의 운행에 의해 점을 치는 점성술의 발달로 황도좌표계가 중심이 되었던 반면, 동양은 북극을 위주로 한 적도좌표계 중심의 별자리가 발달했던 것이다. 자,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서양의 황도 12궁 별자리와 동양의 별자리를 비교해 보자.​…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0-05 조회 238
  • 마고지나
    고대사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있습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8-27 조회 296
  • 桓國歷史 반영한 '천상열차지도'의 태미원
     노중평의 우리 별 이야기<20> 마고=직녀=견우의 부인=천제의 딸태미원은 가장 오래되고 먼 울타리...한인천제가 세운 한국의 다른 말 노중평천문에서 마고의 시대와 황궁의 시대는 직녀성의 시대이다. 직녀성시대는 <조디악 12궁도>에서 쌍여궁시대에 해당하므로 1만2000년 전의 시대가 된다. 이 시대를 모계시대라 한다. 마고麻姑는 옷감을 짜는 여신이라는 뜻이다. 마고라는 문자에 삼에서 실을 뽑아 옷감을 짠다는 의미가 있다. 천문에서 옷감을 짜는 여신의 별자리가 직녀성이다. 직녀성은 마고별이다. 견우와 직녀 신화에서 직녀는 견우의 부인이다. 마고와 직녀가 같은 분이므로 마고는 견우의 부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신화에 따르면 직녀는 천제의 딸이다. 천제가 하나님이므로 직녀는 하나님의 딸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태미원도太微垣圖. 태미원이란 가장 오래되어 가장 멀리 있는 울타리라는 말이다. 태미는 한인천제가 세운 한국의 다른 말로 보인다. 태미원 안에는 한국의 방위신인 오제五帝가 있고, 한인천제가 즉위한 즉위별자리도 있다. 한인천제가 즉위할 때 천제를 식장에 모신 의전관인 알자도 있다. 천문에서 우두성牛斗星을 천제의 아들이라 하였다. 우두성은 견우성과 칠성이라는 뜻이다. 직녀는 하나님의 두 아들과 사는 마고이다. 천제의 자식인 마고, 우성, 두성 3남매가 직녀(마고)가 부인이 되고 우성과 두성이 남편이 되는 공동부부가 된 것이다. 상고시대의 이러한 혼인풍습을 푸날루아라 하였다. 천제의 아들과 딸이 공동부부로 묶여 살았던 마고시대가 지나가고 황궁黃穹시대가 왔다. 황궁은 자미원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황궁은 마고의 자식이었다. 황궁시대가 지나고 나서, 한인천제의 시대가 왔다. 한인천제는 북두칠성에서 하강한 분이라 북두칠성이 고향이 된다. 마고의 둘째 남편인 북두칠성에서 한인천제가 온 것이다. 한인이란 빛의 씨앗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북두칠성의 자식으로 볼 수 있다. 종교적인 명칭, 과학적인 명칭이다. 상고시대에 우리와 동근동족이었던 인디언의 구전 신화에 드락안이 나오는데 드락안은 두락안斗落安으로 볼 수 있어서 한인천제로 유추할 수 있다. 한인천제가 기묘년에 풍주風州 배곡倍谷에 세운 한국(<부소보서>에 기록된 한국의 시조)의 하늘은 태미원(<천상열차분야지도>에 그려진 3원垣의 하나)에 속한 하늘이다. 태미원엔 어떠한 별들이 배치되어 있을까?오제五帝:태미원의 중심에는 오제라는 별자리가 있다.청제靑帝 적제赤帝 백제白帝 흑제黑帝 황제黃帝의 별자리로 구성되어 있다.한국桓國의 방위신인 오방신五方神을 뜻한다.우리 굿거리인「군웅거리」에는 무당이 오방신인 오제를 청배하는 사설이 나온다.동에 청제 들어오는 군웅남에 적제 들어오는 군웅서에 백제 들어오는 군웅북에 흑제 들어오는 군웅오제가 이렇게 군웅이 되어 굿판에 「군웅신장」으로 나타난다.무당이 오제신을 청배하기 때문이다.양수陽數인 5가 겹치는 날인 수릿날 수릿제를 지내는 것도 오제에게 제사지내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조선왕조시대의 군기軍旗인 오방기五方旗. 오방기는 5개의 방위를 지키는 오방군五方軍을 표시한 군기이다. 오방진五方陣에서는 중군장中軍將이 오방기를 가지고 오방군을 지휘한다. 왼쪽에서부터 청제신장靑帝神將 청룡기靑龍旗, 적제신장赤帝神將 주작기朱雀旗, 흑제신장黑帝神將 현무기玄武旗, 오른쪽은 백제신장白帝神將 백호기白虎旗이다. 오제에게 제사를 지내야만 하는 이유는 천중살天中煞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천중살은 시간과 공간의 불일치에서 오는 천기의 악살惡煞인데,악살을 맞아 죽은 사람,예컨대 비명횡사非命橫死한 사람이의 혼백이 군웅이 되어 떠돌아다니지 못하게 좌정하도록 도와주는 굿이「군웅거리」이다.악살을 맞은 혼백이 오제 밑에 좌정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고 도와주는 분들이 오제이다.태미원에 오방신으로 모신 오제는 오가五加에서 모시던 신이다.◇즉위卽位: 오제가 음우陰佑하고,오가(필자 주, 「천상열차분야지도」에서는 오제후로 나타난다.)가 화백회의에서 선출하여 즉위하게 되는 분이 한인천제이다.한인천제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천제로 즉위한 분이므로 그가 즉위한 사실을 특별히 별자리에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좌집법左執法 ․ 우집법右執法:오제가 계신 태미원의 출입구에는 왼쪽에서 법을 집행하는 집행관인 ‘좌집법’과 오른쪽에서 법을 집행하는 집행관인 ‘우집법’이 지키고 있다.이들이 집행하는 법은 지상의 법이 아니라 하늘의 법이다. 하늘의 법은 우주가 운행하는 원리를 말한다.  ◇단문端門:좌집법과 우집법이 지키는 태미원의 문을 ‘단문’이라 한다. ‘단문’은 단오端午날 수릿제를 지낼 때 굿판에 청배된 오제가 통과하여 나가는 문이다. 또한 태미원에 좌정하게 된 군웅들이 통과하여 들어가는 문이 되기도 한다. ◇상상上相 ․ 상장上將:단문 왼쪽에 ‘상상’이, 오른쪽에 ‘상장’이 지키고 있다.‘상상’은 태미원의 최고 재상이고, ‘상장’은 태미원의 최고 장군이다.◇차상次相 ․ 차장次長:상상과 상장 뒤쪽으로 왼쪽에 ‘차상’이,오른쪽에 ‘차장’이 지키고 있다. ‘차상’은 상상의 다음 번 자리에 있는 재상이고, 차장은 상장의 다음 번 자리에 있는 관장이다.  ◇차장次將 ․ 차상次相:사상과 차장 뒤쪽으로 왼쪽에 ‘차장’이,오른쪽에 ‘차상’이 지키고 있다. ‘차장’은 상장의 다음 자리이고, ‘차상’은 상상의 다음 자리이다.◇상장上將 ․ 상상上相:단문을 호위하고 법을 집행는 역할을 수행하는 별이 좌집법의 뒤쪽으로 왼쪽에 ‘상장’이,오른쪽에 ‘상상’이 지키고 있다.좌집법 쪽에 5주主의 신장이,우집법 쪽에 5주의 신장이,좌집법과 우집법을 포함하여 도합 12주의 신장이 태미원을 지키고 있다.이는 12시간의 신명이 지켜주는 우주의 공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인천제는 풍이風夷 출신이고,그의 부인 항영은 조이鳥夷(烏夷) 출신이라,좌집법이 거느리는 상상 ․ 차상 ․ 차장 ․ 상장은 풍이의 관직으로 볼 수 있고,우집법이 거느리는 상장 ․ 차장 ․ 차상 ․ 상상은 조이의 관직으로 볼 수 있다.태미원 별자리는 한인천제가 즉위할 때의 별자리이다.그래서 즉위식의 별자리가 오제좌의 왼쪽 상단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모두 15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국을 다스린 한인천제의 재위연수在位年數 15년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태자太子 ․ 행신幸臣 ․ 종관從官:즉위식 때 식장에 참석한 사람이 1개의 별자리로 이루어진 한인천제의 ‘태자’ ․ ‘행신’ ․ ‘종관’이다. ◇오제후五諸侯:5개의 별로 이루어진 ‘오제후’는 오가이다. ◇구경九卿 ․ 삼공내좌三公內坐:3개의 별로 이루어진 ‘구경’과 ‘삼공내좌’는 즉위식에 하객으로 모인 사람들이다.구경이 3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구경이 3인이라는 뜻이다. ◇병屛:오제의 앞쪽에는 4개의 별로 이루어진 병풍‘屛’을 둘렀다.식장을 나타낸다.  ◇낭장郎將:즉위식장의 배후를 ‘낭장’이 지킨다.낭장은 즉위식장의 경호를 맡은 풍이족의 장군으로 볼 수 있다. ◇상진常陳:낭장의 뒤쪽에는 7개의 별로 이루어진 군대가 늘어서 지킨다. 언제나 군대가 지키므로 ‘상진’이라 한 것이다. ◇호분虎賁:종관의 뒤쪽에는 한 개의 별 ‘호분’이 있다.‘호분’은 한인천제를 경호하기 위하여 호랑이가 지키는 곳이다. 후대에 와선 한웅천왕과 단군왕검도 지켰다. 지금도 성황당이나 산신각이나 칠성각으로 불리는 당집에 걸리는「산신도」에 호분을 그리는데, 호랑이 두 마리는 한웅천왕을 지키는 그림이고, 한 마리는 단군왕검을 지키는 그림이다. 그렇다면 한인천제를 지키는 호랑이는 3마리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호랑이 3마리를 그린 산신도는 발견되지 않았다.  ◇상태上台 ․ 중태中台 ․ 하태下台:6개의 별로 이루어진 ‘상태’와 ‘중태’와 ‘하태’는 한인천제의 즉위식을 관망하는 자리이다.‘하태’에는 백성과 선비가 있고,‘중태’에는 대부 삼공 제후가 있고, ‘상태’에는 황후와 태자가 있다.또한 이 3개의 태는 한인천제가 즉위식을 마치고 부인 항영과 함께 비상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바라보는 관망대이기도 하다.한인천제가 항영과 비상하는 그림이 고구려고분에 남아 있다.한인천제는 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있고,항영은 달을 머리위로 들어올리고 있다.◇소미少微:호분의 바깥쪽에 4개의 별로 된 ‘소미’는 태미원의 축소판이다.한인천제가 생활하는 곳,정사를 펴는 곳으로 볼 수 있다. ◇처사處士 ․ 의사義士 ․ 박사博士 ․ 대부大夫:네 별은 아래 첫 별은 ‘처사’,두 번째 별은 ‘의사’,세 번째 별은 ‘박사’,네 번째 별은 ‘대부’이다. 한국의 관직이다.  ◇장원長垣:4개의 별로 이루어진 ‘장원’은 한인천제가 생활하는 곳의 울타리이다.따라서 궁궐의 담장을 나타낸다. 별이 동서남북에 흩어져 있으므로,동궁과 서궁,남궁과 북궁의 울타리가 된다.◇영대靈臺:장원 아래쪽에 있는 3개의 별로 이루어진 ‘영대’는 제사할 때위패를 모시는 제단이다.  ◇명당明堂:장원 아래쪽에 3개의 별로 이루어진 ‘명당’은 한국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3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으므로,삼신을 모신 자리가 된다.◇알자謁者:한인천제 즉위식에서 천제를 인도하는 사람이다. 무당이 오제를 청배하면 12주의 신장이 함께 강림하여 굿판에서 모시는 신명이 된다.알자는 제사를 지낼 때 천제를 제단에 인도하는 향관이다. [노중평 역사천문학회 회장]  …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8-22 조회 324
  • 부도지 징심록 등 고대사서
    우리역사의 진실 http://coo2.net/bbs2/history.htm?bo_table=bmap&bo_cate=4&wr_id=40 …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2 조회 349
  • 신시는 세계 최초로 동이(東夷)가 세운 무(巫)의 나라였다
    신시는 세계 최초로 동이(東夷)가 세운 무(巫)의 나라였다 글. 고담중평 세계무속신문 주간역사천문학회 부회장 소설가 우리의 화려했던 상고시대의 역사는기원전 238년 47대고열가 단제께서 2096년간 지속되어온 조선을 폐관하고왕위를 버리고 입산하여 신선이 되신 이래 암흑세계로 들어가는데 그후 우리문화는 무속으로 흘러들어간다.그래서 잃어버린 역사의 숨결을 무속에서 많이 느낄수 있다.무속을 연구하는 분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잃어버린 우리역사를 복원하는 지름길이 될수 있다고 여겨 이글을 싣는다.미신으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상고사에 관한한 무속연구가들이 훨씬 고단수이다. -<운영자>-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곧 소멸하고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가 인류를 강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전 세계를 통일 할 것처럼 기승을 부리던 사회주의가 1백년의 수명을 다하고 멸망했듯이민주주의도 수명이 다 되어 멸망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이다.민주주의가 세상에 나온 지가 어언 2백년, 사회주의 보다 1백년이나 더 살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처럼 멸망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그 이유는 민주주의가 인류를 제어할 수 있는 완벽한 주의주장이 아니라 아직까지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주의주장이 세상에 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가 기다리지 않는다고 해도 멀지 않은 장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민주주의를 대체할 신시주의(神市主義)라는 것이 세상에 나오게 될 것이다.그것이 우리가 맞아야 할 역사적인 현실이다.신시는 인류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국가형태이다.우리의 조상 마고 할머니가 삼신산이 있는 봉래, 방장, 영주에 세우신 인류최초의 사이버국가였다.그 뒤를 이어 한인 할아버지가 한국(桓國)라는 이름의 신시국가를 계승하였고,다음에 한웅 할아버지가 나와서 사이버 국가와 현실국가를 통합한 형태의 발전된 신시국을 태백산과 흑수 사이에 건설하였다.마지막으로 단군 할아버지가 조선을 백산 아래에 세우면서 10년마다 한번씩 신시를 열었다.신시국은 요새 말로 영토의 개념을 초월한 사이버국가이다. 마고 할머니가 신시국을 세울 때,후손을 하나로 결속시킨 주의주장이 해혹복본(解惑復本)이었다.<해혹복본>이란 "의혹 을 풀고 원래대로 돌아가라"는 주의주장이었다.마고 할머니는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에 사셨던 분이다.천문학자에 따르면 그때 지구에는 기상재해가 일어나서 인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당시에 태평양에 있었던 뮤대륙과 대서양에 있었던 아틀란티스가 덮쳐오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이때 살아 남아서 인류의 조상으로 기록된 분이 태평양쪽에서는 마고 할머니였고, 대서양쪽에서는 멜키지덱이었다.마고 할머니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부도지(符都誌)에 있다.멜키지덱에 대한 기록은 성경의 창세기에 있다. 천문학자에 따르면, 당시에 지구가 당한 재해의 원인은지구의 세차운동(歲差運動)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세차운동이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자전하면서 공전하는데,지구의 중심에서 보면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동북쪽으로 23.5도 기울어져팽이처럼 돌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북극성이 지구가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준다.지구는 23.5도에서부터 서서히 일어나 반대편으로 기우러지기 시작하여 23.5도까지 기우러진다.이때 직녀성이 지구가 쓰러지지 않게 잡아준다.황도북극에서 북극성 쪽으로 쓰러지는 기간을 12500년으로 보고,반대편에 있는 직녀성 쪽으로 쓰러지는 기간을 12500년으로 본다고 한다.도합 25000년 동안 지구 중력의 회전축은 지구의 중심에서 보았을 때,동북쪽과 서북쪽을 왔다갔다 한다.이렇게 회전축의 방향이 변하는 때에 지구가 뒤집어져 천재지변이 일어나 생물이 멸망한다.종교에서 말하는 말세나 상법시대가 이때이다. <종말론>의 근거는 여기에서 찾아진다.그러나 북극성과 직녀성이 지구가 쓰러지는 것을 잡아주므로 매번 뒤집어진다고는 볼 수 없다.2000년을 시작하는 금년 춘분날인 3월 20일은 북극성을 향하고 있던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직녀성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날이라고 한다.이제부터 바야흐로 직녀성시대로 가기 시작한 것이다.일부 몰상식한 종교가들이 지구 멸망의 날로 잡은 날이 사실상 금년 3월 20일 이다.이를 알지 못하는 종교가들이 이날 이전에도 여러 번 지구 멸망의 날을 잡았다.그러나 지구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지금은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북극성을 향하고 있는 시대이다.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직녀 성을 향하고 있었던 때를 선천(先天)이라고 하고,북극성을 향하고 있는 때를 후천(後天)이라고 한다.마고 할머니는 왜 지구가 쓰러져 선천과 후천이 생기는지 그 의혹을 밝히라고 하였고,후손이 그가 떠나온 직녀성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이런 의미를 함축한 말이 <해혹복본 >이다. 그가 그 징표로 제시한 것이 북두칠성과 해와 달을 돌에 새긴 신체(神體)인 천부삼 인(天符三印)이다.천부삼인을 그대로 거울에 옮긴 것이 신당에 걸어 두는 명두이다.명두를 걸어두는 신당을 지었는데, 사방 한 장(丈, 10尺, 3.3m)의 규모 지은 전각이었다.이 전각을 방장(方丈)이라고 하였고, 방장이 있는 곳을 소도(솟대를 세우는 곳)라고 하였다.굿을 할 때 쓰는 신장대는 방장에 세운 솟대에서 나온 것이다.굿상에 올리는 시루에 신대를 꽂는 것은 방장에서 나온 것이다. 시루는 신시를 의미한다.그래서 시루가 나라를 상징한다고 보았고,나라에서 제사지내는 산을 시루산(烝山, 증산은 임금님 산이라는 뜻이다)이라고 하였다.안택굿에서 무당이 신대를 꽂은 시루를 들고 춤을 추는 것을 볼 수 있는데,이는 옛날에 상고시대에 임금이 제관이 되어 굿을 할 때 행했던 의식이 그대로 굿에 남아서 전해 오는 것이다. 안택이라는 말이 지금은 한 집안의 평안함을 비는 굿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지만,상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단군왕검이 마고 할머니에게서 전수한 삼신신앙과 한웅 할아버지에게서 전수한 태백진교를 발전시켜 덕교(德敎, 덕사상)를 만들어 선포하시고나라의 사대문 안에서 안택을 빌었다는 의미가 있다.안택(安宅)이란 나라의 서울을 정하기 위하여 방위를 잡는 일이다.당시에는 북두칠성이 떠오르는 동북간방(東北艮方)을 대단히 중요시하였다.동북간방에 잡은 터를 서사태방위(西四宅方位)라고 한다.동북간방에 터를 잡고 사대문을 내는데, 이때 올린 굿이 안택굿이다.성주거리에 나오는 성조는 당시에 처음 집을 짓고 궁궐을 지은 성조 할아버지이다.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무당내력>이라는 책에 보면,성조거리는 반드시 단군왕검을 먼저 청배하여 굿을 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왜냐하면 단군왕검 때 서울 백산 아래에서 처음 안택한 감격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던 것이다.한웅 할아버지는 신시를 세우고 태백진교(太白眞敎, 참사상) 선포하면서두 가지 신시나라의 국정지표를 내세웠다.정치는 화백(和白)으로 하고, 자연재해에 대한 책임은 책화(責禍)로 한다는 것이었다. 화백은 100% 찬성을 도출하는 의회제도이다.책화는 국가적인 재난을 당했을 때 나라의 최고 책임자인 임금이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는 제도이다.앞으로 전 세계는 사이버국가를 창설하자는 논의를 하게 될 것이다.사이버시대엔 한 국가가 크게 힘을 쓰지 못한다.사이버시대엔 어느 나라든 IMF와 같은 국가적인 재난을 당할 수 있다.주식시장을 통하여 일시에 자본을 빼내 가면 하루아침에 나라가 거덜난다.우리는 IMF라는 이런 쓰라린 경험을 한 바가 있다.그래서 모든 나라가 참여하여 단 하나의 사이버국가를 만들어 자국이 당하게 될 피해를 예방할 필요가 있다.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법률과 제도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사이버국가 의회에는 사이버인간을 대표로 참석시킨다.이 의회에서는 다수결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오로지 100% 찬성의 화백제도로 운영이 된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9-07 조회 340 댓글 1
  • 고대 북방의 고유문자
    세조의 상고사서 수거령과 훈민정음 (13)​  ​지금으로부터 9000~5000년 전에 홍산문화가 있었고, 홍산문화를 누리며 살았던 삶의 주인공들이 삶의 모습을 기록한 것이 고대 환단사서 즉 상고사서들입니다.​홍산문화 주인공들의 삶을 기록한 책이 조선시대 세조의 수거령이 내려진 환단사서이며, 그들의 철학이 놀랍게도 훈민정음 창제의 배경이 되었습니다.​훈민정음 서문에서 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의 글자는 '자방고전'이라고 해서 옛날의 글자를 본떠서 만들었다는 문구가 분명히 있습니다.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문구를 유령 취급을 합니다. 한글은 100% 창작이라면서 '자방고전'에 대해 전혀 연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최만리도 세종대왕과 논쟁을 하면서 '한글은 천한 민간의 언문을 끌어다가 만든 것이다'라는 그런 뜻의 말을 분명히 합니다.그것을 볼 때 세종 시대까지도 고대부터 써오던 한글과 비슷한 문자가 민간에서도 발견됐다는 것을 보여줍니다.​교육부의 특별 연구 사업으로 만주지역의 고문자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그 때 제보를 받고 수원의 한 수집가의 집을 갔어요.그 수집가가 대동강 유역의 전돌 즉 무덤에 들어가는 벽돌에 한자와 한자가 아닌 한글과 비슷한 문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을 가서 확인을 해봤는데요, 현장에서 봤을때 분명히 한글하고 흡사했습니다.3세 가륵단군 때 삼랑 을보륵이 만들었다고 하는 정음 38자와 분명히 유사한 모양의 글자들이 있더라고요.그래서 그 벽돌들의 수집가에게 깨진 벽돌 하나를 받아냈어요.​연대측정을 해봤더니 1500년전 전후의 것이라는 시대 측정이 나왔습니다.그것은 고구려 시대죠, 대동강 유역이기도 하니까요.그렇다면 그 문자들은 분명히 한글 이전에 존재했다는 거예요.​이런 얘기를 사람들에게 해도 믿고 싶어하지 않고 이런 사실을 회피하려고만 하더라고요.​​Q 홍산문화에서도 한자와 관련이 없는 독특한 문자가 발견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A 융합고고학과가 생기고 나서 홍산유적을 연구하는 유일한 학과이다 보니까 홍산문화의 유물을 수집하는 수집가들이 먼저 연락을 해옵니다, 자기 유물 좀 와서 봐달라고요.​ 재미있는 것은 여러 유물들에서 한자가 분명히 아니고 아주 고유한 부호와 문자가 나옵니다.부조 형태로 나오거든요.그 패턴들이 상당히 여러 다른 종류의 다른 수집가들의 옥기 유물인데도 불구하고 비슷한게 나와요.​그런 것에서 한자나 갑골문이 아닌 고유 문자가 존재했다고 보는 것입니다.환단고기에 보면 인류 최초의 문자가 '녹도문'이었다고 나옵니다.​​Q 녹도문은 지금 전해지지 않고 있거든요, 방금 말씀하신게 바로 그 흔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A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에 보면 홍산문화에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든 녹도문이 있고 그 이후에도 우서, 화서, 투전문, 용서, 신전 등 다양한 문자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정식 발굴 절차를 거쳐서 확인하고 싶지만 정확한 수집 경로와 사연을 알 수 없는 많은 홍산문화 유물들이 수집가들에 의해서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습니다.​​옥기 유물 뿐만 아니라 주나라 시대 서주 다음의 동주 시대 특히 춘추전국 시대의 명문이 많이 나오는데요.단군조선의 번조선 지역이라고 알려져 있는 요서 지역 그리고 난하 유역, 조양 인근 지역에서 청동기 유물도 나옵니다.그 청동기에 보면 한자가 아니고 갑골문도 아니고 주나라의 명문도 아닌 아주 이상한 고유의 문자들이 나와요.​그런 것들을 국내에 청동기 명문을 전공한 학자들, 여러 분들에게 사진을 보내서 해독을 의뢰하면 해독을 못한다고 해요.왜냐하면 못보던 글자들이기 때문에 해독을 못한다는 것입니다.그 중에서 일부는 해독할 수 있는 글자도 있기는 합니다.일부 학자들은 그것이 '고죽국'의 글자라고 하는데요, 고죽국은 고조선의 제후국이었습니다.분명히 한글 이전에 한자가 아닌 북방 고유문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우리 역사는 역사적인 사실의 연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자, 언어 등도 깊이 연구될 때 우리 역사를 완전히 회복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8-30 조회 337
  • 일본어 기원 부여한어 반도한어 열도한어

    일본어 기원 부여한어 반도한어 열도한어…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8-25 조회 308
  • 제석굿에서 팽개중의 농간으로 칠성님을 덮어 쓰는 제석
    노중평우리 굿의 특징은 1인 전속으로 주무가 굿을 진행한다는 점이다.장구재비가 주무를 도와서 조무역할을 한다.주무와 조무가 주고받는 무가사설을 이해하지 못하면, 주무와 조주가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그러므로 굿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첫째, 굿을 이해하기 위하여 공부를 하려면, 굿에 나오는 무가사설에 나오는 많은 용어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해 주어야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하겠다.굿을 접하는 사람들이 굿에 쓰이는 용어의 의미를 알고 나면, 굿을 이해하는 데에 훨씬 수월해 질 것이다.  둘째, 굿에는 종류가 많으므로 국민교육용으로 대표성이 있는 텍스트를 하나 정할 필요가 있다.필자가 굿 중에서 대표성있는 굿을 하나 들라면 황해도굿의 철무리굿을 들고 싶다.이 굿 하나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 굿에 대한 인식이 확 달라지리라고 본다.이 굿에는 마고에서부터 시작하여 단군왕검에 이르는 1만년역사에서 생산된 종교적 산물이 그대로 망라되어있다. 우리는 굿을 멀리한 탓에 지금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셋째, 외국의 인류학자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멸망하게 될 것으로 예언되어지고 있는 기독교의 대체종교를찾기 위하여 샤머니즘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우리의 굿이 절대로 샤머니즘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며,인류가 생산해 낸 종교들 가운데에 최고(最古, 最高)의 종교임을 가르쳐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필자가 철무리굿을 대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비교적 쉽게 분석하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하다. 넷째, 우리 무당과 무속종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굿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편견과 오류를 시정하지않으면, 굿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이 우리 굿에서 무엇을 알지 못하고, 무엇을오해하고,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가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 작업을 하고 있다.최고의 영능력을 타고난 무당들이, 오류에 기초한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결과는 본인을 불행으로 몰아갈 뿐만 아니라, 본인의 활동에 의지하고 있는 모든 신명들에게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하겠다. 이번에 인용하는 본문은 무당과 장구재비가 주고받으며 구연하는 무가사설의 주인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그냥 듣기만 해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무당과 장고재비가 장면전환을 해가며 전환된 장면 속에서 다른 주인공이 되어서 활동하기 때문이다.상황이 이러하니 만치, 정신을 집중하여 들어 볼 필요가 있다. 무당은 제석굿에서 종교의 근원을 밝혀주는 <천수타령>과 <천수 뿌리기>를 끝내고, 다음 단계인 <복주기와명주기>로 넘어간다.복을 주고 명을 주는 주체는 칠성님이다.그러나 제석이 팽개중에게 엎여 들어와 칠성님을 제치고 주인행세를 하려 든다.  이 대목이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무당 : 검으나 따에 희나백성은 잠들여 놓고, 약수弱水 삼천리를 잠깐 건너가서, 삼신산 불로초, 만수산가양초(취)를 구해다가, 이 댁 가중에 복이 적고 명이 짧다니,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겠구나(<거므나 따에 희나백성> 철무리굿 제석굿 87쪽) 위에 무당이 하는 말은 칠성님이 무당을 통하여 하는 말이다.칠성님이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칠성님만이 그의 백성을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이고, 또한‘거므나 따에 희나백성’이 오랜 세월을 칠성님을 하나님으로 섬겨왔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거므나 따’는 칠성을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단군왕검의 땅이고,‘희나백성’은 단군왕검이 다스리는 조선백성이다.약수를 건너가야 곤륜산이 있기 때문에 칠성님이 이 강은 건넌다는 것이다.칠성님이 이 강을 건너는 이유는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을 살려 명을 주고 복을 주기 위해서이다. 약수弱水는 곤륜산崑崙山에 있는 강인데, 물의 힘이 너무나 약한 강이라, 새털조차 갈라않지 않는다고 한다.(산해경) 이 강이 장성長城 수 천리 밖에 있다.(산해경)이 강은 인간으로서는 갈 수 없는 강을 의미한다. 하나님만이 가실 수 있는 강이라는 뜻이다.본문에 삼신산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곤륜산과 삼신산을 혼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신산과 곤륜산은 서로 위치가 다르다. 필자는 삼신산은 발해만에 있고, 곤륜산은 타클라칸사막과 천산산맥을 넘어가야 있는 산이기 때문에, 같은 산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그러나 이들 산에는 북두칠성이 떠서 조응하는 산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북두칠성이 관장하는 산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우리 조상은 이들 두 산을 성산으로 여기며 중요시해왔다.여기에서 불로초가 난다고 했으니, 칠성님을 믿는 사람들의 성산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만수산萬壽山은 개성에 있는 송악산이다.이곳에서 나는 가양취(마타리)는 9속 350여 종이나 있는 흔한 풀인데, 약재로 쓴다. 불로초는 구하기 힘든 약초이고, 가양취는 구하기 쉬운 약초이다.불로초와 가양취를 섞어 줌으로써 구하기 힘든 명과 복을 구하기 쉬운 명과 복으로 바꾸어준다는 의미가 있다. -제석공미로 바친 떡을 굿상에서 갱정과 제금에 담아 든다 -상교대야~ 상교대야~장고 : 네. 네.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 철무리굿 제석굿 87쪽)  제석공미는 칠성님에게 바치는 공양미이다. 그러므로 칠성님공양미로 바꾸어 불러야 할 것이다.이렇게 칠성님공양미로 바친 떡을 거두어 논아주기 위하여 갱정과 제금에 담는다.굿에서는 떡이 불로초와 가양취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무당은 상교대야~상교대야~하고 팽개중을 부른다. 무당이 칠성님을 대리하여 팽개중을 부르는 것이다.상교象敎가 불교를 의미하므로, 대隊를 붙여, 상교대象敎隊라고 하면 중의 무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장고재비가 팽개중이 되어 ‘네. 네.’하고 대답한다. 무당 : 삼신산 불로초를 구해 왔으니, 어디로 가서 누구를 찾아 주어야 하느냐?장고 : 제석님(실은 제석님이 아니라 칠성님이다. 팽게중이 칠성님을 제석님으로 바꿔치기 하기 위하여수작을 부리고 있다) 마음대로 돌아다녀 보시오.무당 : 예끼 이놈. 어른은 길러보고 아이는 섬겨 보았느냐?(칠성님이 팽개중의 얕은 술수를 알아차리고 책망한다) 칠성님보고 마음대로 돌아다녀  보라니.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 철무리굿 제석굿 87쪽)  무당과 장고재비의 대화가 묘하게 돌아간다.이때의 무당은 칠성님의 역할을 하고, 장고재비는 팽개중의 역할을 한다.칠성님이 불로초를 구해 와서, 팽개중에게 "이것을 누구네 집에 전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는다.팽개중은 자기에게 묻는 분이 칠성님임을 무시하고 제석님이라고 한다.“제석님, 마음대로 돌아다녀 보시오.”라고 하며 퉁명을 떠는 것이다.칠성님은 자신이 칠성님임을 상기시키며 책망한다. “예끼 이놈, 어른은 길러보고 아이는 섬겨보았느냐?칠성님보고 마음대로 돌아다녀 보라니. 어른은 길러 보고, 아이는 섬겨 보았느냐?”라는 말에서, 어른이 칠성님이고, 아이가 제석임을 알 수 있다. 이점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다.여기에서도 팽개중이 무교에게 무슨 악행을 저질렀는가 하는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장고 : 그러면 삼신산에 약을 사려, 삼신산에 명과 복을 사려, 불사약을 사려, 불사약을 사려  하며 외쳐 보슈. 무당 : (만복떡을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사려, 사려, 이 중하고 끼어서 불사약을 사려. 아무리 다녀 봐도사자는 사람 없네.장고 : 여보시오. 칠성님. 중 소리는 쑥 빼고 불사약만 사라고 해야지. 중하고 사라고 하면 불신천왕佛神天王이따라 들까봐 무서워 대답을 안해요.무당 : 옳지. 그렇겠구만. 그럼 이 중은 쑥 빼고 명과 복을 사시오.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 철무리굿 제석굿 87쪽)  이 무가사설은 주의해서 듣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게 된다.칠성님은 자기를 몰아내고 제석님을 칠성님의 자리에 앉히려고 술수를 부리는 팽개중을 불로초, 가양취와 함께팔아버리려고 한다.불로초와 가양취와 중을 함께 대려서 약으로 마셔버리라는 뜻인가?칠성님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씀을 하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희귀한 약재를 사는 사람이 없다. 굿을 해 달라고 청한 이 댁 가중조차도 사지 않는다.그 이유는 아무 쓸모없는 중을 불로초와 함께 사야 하기 때문이다.더 큰 이유가 있다. 불신대왕이 중을 따라 들어올까 보아 겁이 나는 것이다.이 부분에서, 불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민중들로부터 배척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고재비는 중을 빼고 “삼신산에서 캐 온 약 불로초사려! 삼신산에서 받아 온 명과 복 사려! 불사약을 사려!”하라고 정정해 준다. 칠성님은 장고재비가 시키는 대로 한다. -이 때 여주네는 새 바가지에 쌀을 담아 치마폭을 들고 나오며 대답한다-여주네 : 네. 네.무당 : 옳지.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 철무리굿 제석굿 87, 88쪽)  칠성님이 중을 빼고, 사라고 외치자, 여주네가 나서서, "사겠다"고 대답한다.무당이 "옳지" 하고 대답한다. 산다는 말은 물건을 산다는 말이지만, 또 사람이 산다는 말도 되는 묘한뉴앙스를 가지고 있다. 거래라는 말과 삶이라는 말이 함께 있다. -여주네가 12폭 치마를 쭉 벌리고 나오면, 만신은 “주인마님, 소승 무안 드리오” 하면서 여주네를 어루만지며, 치마폭에 복떡을 쏟아준다-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 철무리굿 제석굿 88쪽)  여주네는 12폭 치마를 쭉 벌리면서 칠성님이 파신다는 것을 받기를 원한다.그러나 무당은 돌연히 팽개승으로 변하여 “주인마님, 소승 문안드리오”하고 뚱딴지를 부린다.제석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칠성님을 덮어쓰는 것이다.그와 동시에, 여주네를 어루만지며, 치마폭에 복떡을 쏟아준다.세상에 이처럼 화가 나는 황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이 일로 인하여 칠성님이 제석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전통신앙인 칠성신앙이 외래종교인 불교에게 눈뜨고 당하게 되는 일을 제석굿에서는 무당과 장고재비가 구연하는 무가사설에서 역할을 바꾸어가며 보여주고 있다. 장고 : 여보시오. 스님인가, 중상(장승을 비꼬아 하는 말)인가, 또 검특한 마음을 먹고, 주인마님 손목을 왜만지며 흑숙학숙(흑죽학죽-어물어물) 합니까?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 철무리굿 제석굿 88쪽)  이 광경을 목도한 장고재비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한다.스님인가 중상인가 하고 비꼰다. 왜 또 흑심을 품고, 주인마님의 손을 어물어물 주무르느냐고 따진다.이때의 주인마님은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을 대표한다.장고재비가 하는 말은 "왜 조선백성을 농락하느냐"는 것이다.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서, 우리 굿의 명맥을 이어 온 사람들이 장구재비였다고 볼 수 있다. 무당 : 자라보고 놀란 놈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생각이 달라, 주인마님 손목을 어루만지는 게 아니고,이 정성을 드리고, 아들을 낳으면, 평양감사를 낳고, 딸을 낳으면 의주부인을 낳을 제, 마나님의 마음씨가어질어서 물을 아껴 쓰니, 용왕님이 돌보겠고, 나무를 아껴 때니, 산신님이 굽어보고, 이웃을 사촌처럼 사랑하니 자손이 복이 되고, 부모공경을 잘 하니 자손만대 부귀공명하리라. (하면서 떡을 치마폭에 쏟아주며)이 복을 받아 백모래 속에다가 묻어 두었다가 3년 후에 움이 돋고 싹이 나면 다시 오리라.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 철무리굿 제석굿 88쪽)  무당은 또 다시 팽개중으로 돌아가 능청을 떨며 사기 치는 무가사설을 늘어놓는다.팽개중으로선 가당치 않은 무가사설을 늘어놓는 것이다.이 정성을 드리고 나면, 삼신·용왕·산신이 도우실 것이요, 자손이 복이 되고, 자손만대 부귀공명을 누리겠다고 한다.그러나 팽개중의 협잡으로 그런 결과가 올지는 미지수이다."이 복을 받아, 백모래 속에다가 묻어 두었다가, 3년 후에 움이 돋고 싹이 나면 다시 온다"고 하였으니,사기의 실상이 들어난 셈이라, 팽개중이 끼어든 굿은 실현가능성이 없는 굿이라고 하겠다. (나무아미타불)명이 가요 복이 가요 삼신산 불로초가 가요 칠성님께(서) 가지(고 계신) 명복이 갑니다.오시는 길에 명이 가요, 가시는 길에 복이 가요. 이 복을 받으시면, 마음먹었던 일은 소원 이루리다.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 철무리굿 제석굿 88쪽) 그러나 칠성님이 돕는다면 팽개중의 사기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그렇게 된다면, 명이 가고, 복이 가고, 삼신산의 불로초가 가고, 칠성님께서 가지고 계신 명과 복이 가고,복을 받으면, 마음먹었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무당은 친척들과 구경꾼들에게 제금에 받쳐 든 복떡을 고루 주며 축원을 한다. 이때 떡을 받은 이들은 제금위에 돈을 놓는다-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 철무리굿 제석굿 88쪽)무당은 무가사설을 구연하면서, 구경꾼들에게 복덕을 나누어 준다.본문에는 불교가 너무 많이 침식되어 있어서 침식당한 부분을 드러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본다. (참고: 노중평저 「유적에 나타난 북두칠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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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천문 우리하늘 우리별자리
    한국천문 우리하늘 우리별자리  전문을 보면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수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8-25 조회 297
  • 김정민 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니며, 고조선의 풍속과 제도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도 발견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는 지난 18일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2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고대사 역사인식 공유를 위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 김정민 박사



    이날 김정민 카자흐스탄 까즈구대학 국제관계학 박사는 '한국의 고조선과 카자흐스탄의 공통점과 역사적 연계성'이라는 주제에서 편두풍습과 언어 등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니다. 한단고기에 따르면 고대 한국인들은 자신을 색족(色族)이라고 불렀다. 색족은 황부인(黃部人), 백부인(白部人), 적부인(赤部人), 청부인(靑部人)으로 분류했다.”

    김 박사는 "고대 한국인이 색족이라면 고대 카자흐족 최초의 민족은 '삭족'이었다"며 "카자흐족은 한국의 색족처럼 신분을 색깔로 구별해서 옷을 입었는데, 적색의상은 왕족, 귀족이 입었고, 백색의상은 종교를 담당하는 신관계급들이, 목동은 푸른색, 농민은 황색 옷을 입었다"고 밝혔다.

    『한단고기』에 따르면 적부인과 황부인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피부가 구리색에 코가 낮다. 적부인과 황부인의 차이는 바로 적부인의 경우 이마가 넓고 뒤로 길게 기울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 기록에 대한 의문의 해답은 카자흐족의 삭족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삭족의 지배계급이었던 적색계급은 몽골계 인종으로 이들은 편두를 했었다. 즉 한단고기에서 언급했던 적부인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고대인들은 왜 편두풍습을 만들었을까?

    김정민 박사는 "고대 샤머니즘에서 최고의 신은 태양신이고 불은 바로 태양의 화신 또는 태양의 아들로 인식이 되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번개가 나무에 치면 불이 붙으므로 사람들은 불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따라서 지상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머리 모양을 불의 형상으로 가꾸어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이에 불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머리를 편두로 만들어 길게 한 다음에 곱슬머리를 만들어 머리모양을 불로 만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 높은 관심을 나타낸 청중들



    흥미로운 것은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의 머리 모양도 이와 같다는 주장이다.

     

    "고타마의 출신이 왕족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깨달음을 얻고 얻은 석가모니라는 이름도 의미는 ‘사카족의 승려’라는 뜻으로 고타마의 혈통은 사카족 즉 색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타마도 삭족의 전통을 따라 편두를 하고 곱슬머리를 해서 머리를 불의 형상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한국의 지도자, 국가명, 위성국가, 수도 등에서 언어적 유사성이 제기됐다.

    첫째 한국의 지도자가 ‘단군’이라면 카자흐스탄은 '탱크리'였다. 둘째 국가명에서 우리는 '조선'인데 카자흐스탄은 ‘주스 또는 주잔’ 이라고 했다. 셋째 조선의 수도가 '아사달'인 것에 대해 카자흐스탄은 ‘아스타나’라고 한 점이다. 마지막으로 단군조선이 마한, 진한, 변한이라고 삼조선을 나타낸 것과 마찬가지로 카자흐스탄 또한 오르타, 크스, 울루라는 3개의 위성국가로 나타낸 점이다.

    김 박사는 "조선, 주잔, 주스는 하나의 어원에서 나온 파생어이다"며 "몽골에서는 주잔, 만주족의 주천, 카자흐족의 주스, 헝가리인의 구스, 우즈벡인들의 우즈이라고 했다. 이들 모두 북방민족들이 연방정부를 수립하고 지역을 크게 삼분할하여 통치하고 중대한 사항을 쿠릴타이라는 화백제도를 통해서 결정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유라시아에 ‘대형고분’이 사라진 이유는?

    한편,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펼쳐진 대형 고분을 직접 답사한 연구결과가 발표돼 주목을 받았다.

     




     

     



    ▲ 하야시 토시오 일본 창가대학 교수가 18일 '유라시아초원 북망기마민족의 생성과 발전, 고분문화의 흥망성쇠'를 주제로 발표했다. 





     

    하야시 토시오 일본 창가대학 교수는 "카라수크 (Karasuk) 시대 동안 기원전 2,000년에서 1,000년 사이 몽골 초원에는 최초로 군사적, 정치적 힘을 가진 집단이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유목민족의 영향력은 몽골초원에서부터 급속도로 유라시아 초원을 지나 우크라이나까지 뻗었다. 유목민족을 하나로 통합한 거대한 부족의 최초 지배자는 그의 권력과 힘을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표현수단으로서 대량의 희생제물을 함께 부장한 거대 고분을 권력의 상징으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하야시 교수는 유목민족의 지도자들이 세운 거대한 고분은 몇 세기 후에 사라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첫째, 초원 지배자들의 막강한 권력과 힘이 이미 전 세계에 알려졌으므로 그 힘을 과시하기 위해 초원에 거대한 고분을 지을 필요가 없어졌고, 둘째로 지도자들은 자신과 조상의 무덤이 도굴꾼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이밖에 나비잔 무카메타눌리 카자흐스탄 까즈구대학 역사학 교수는 "고대 카자흐족과 한민족의 천신관념사상에 대한 공통성에 대한 고찰"을, 주채혁 전 세종대 교수는 "조선, 선비의 선과 스키타이: 순록, 양, 유목의 기원문제"를 발표했다.

     




     

     


    ▲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고대사 역사인식 공유를 위한 국제학술회의 종합토론.




     

    이성민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대표는 "최근 중국의 만리장성 부풀리기, 일본의 독도 문제 등 역사 갈등 등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는 일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같은 문명을 지닌 동일한 의식을 찾는 일이다"며 "고대 민족에 대해 연구해온 동북 아시아 역사학자들의 발표가 그 시작이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행사는 동북아역사재단과 서울국학원이 후원했다.  행사를 주최한 '국학운동시민연합'은 지난 2001년에 발족, 2004년에 문화관광부 비영리 민간단체로 승인받았다. 그동안 동북공정 반대 100만 서명운동, 고구려 학술회의, 일본교과서 개악 저지를 위한 일본대사관 앞 집회, 한민족 역사문화 청소년 글짓기 대회 등 공익활동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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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9-09 조회 328
  • (손성태 교수)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 민족이다(上)

    한 中南美연구자의 이색 주장 -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 민족이다(上)

    멕시코는 ‘맥이족의 땅’이라는 뜻

     



    글 : 孫成泰 배재대 스페인어과 교수 









     


    ⊙ 스페인 정복자들의 기록에 아스텍 원주민들은 820년경 아스땅(아사달)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어
    ⊙ 아기를 업어 키우며 젖 줄 때는 ‘찌찌’라고 해
    ⊙ 상투·갓, 가체·쪽진 머리, 사주와 점, 정한수 등 풍속 유사

    孫成泰
    ⊙ 53세. 한국외국어대 졸업,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언어학 박사.
    ⊙ 배재대 스페인어·중남미학과 교수, 同 외국어교실 실장, 한국외국어교육학회 부회장.
    ⊙ 논문 : <아스테카인의 탄생, 육아 및 장례 문화> <아스텍의 역사, 제도, 풍습 및 지명에 나타나는
    우리말 연구> <아스텍제국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풍습> 등.







    <그림1> 벽화 속에 나타난 아스텍인들. 이들은 5~10세기 만주에서 사라진 고리족과 맥이족의 후예로 보인다.



    우리 민족은 일찍이 만주(滿洲)와 요동(遼東) 지역에 부여(扶餘)와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하고, 이 지역을 호령했던 동북아(東北亞)의 강자(强者)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이 지역의 강자였던 우리 민족은 소수(少數)로 전락하고, 고구려와 부여에 복속했던 숙신(肅愼)족의 후예인 말갈족(후의 여진족)이 만주의 주인이 되었다. 만주를 호령하던 우리 민족은 과연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흔적을 멀리 중남미(中南美)의 멕시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라져 버린 우리 민족 

    3세기 후반에 쓰인 《삼국지》 〈위지동이전(魏誌東夷傳)〉은 우리 민족의 고대(古代) 역사와 풍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비록 중국의 관점에서 부족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그 시대 우리 선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사료다.

    우리 민족은 동북아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만주와 요동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 왔다. 만주 북쪽의 길림, 장춘 일대는 부여가 있었고, 만주 남쪽의 집안 일대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오랫동안 고조선(古朝鮮)이 존재했던 요동 일대는, 비록 중국 한(漢)나라 후예인 공손(公孫)씨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고조선의 후예가 살았다. 그 당시 만주 일대에 살던 우리 선조들의 숫자는 얼마였을까?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부여가 8만호(戶), 고구려가 3만호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요동의 공손씨 치하에 있던 선조들도 대략 3만호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부여와 숙신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3세기 만주에는 우리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 한 그룹 있었다. 그들은 숙신(肅愼)족이었다. 그들은 두만강 북쪽 연해주(沿海州)의 작은 지역에 살던, 근원을 알 수 없는 종족이었다. 그들은 부여-고구려를 건국한 우리 선조 고리족과 언어와 풍습에서 완전히 달랐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그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고, 3세기 초에는 당시 만주 일대에서 가장 강국이었던 부여에 찾아와서 스스로 신하가 되었으며, 매년 무거운 공물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壤(위략왈 기국은부 자선세이래 미상파양)

    “위략왈,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적이 없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가구 수 8만호를 거느린 부여는 매우 부강하여 다른 민족으로부터 파괴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쪽의 숙신족은 스스로 부여를 찾아와서 굴복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自漢己來, 臣屬夫餘 夫餘責其租賦重, 以黃初中叛之 夫餘數伐之, 其人衆雖少 (자한기래 신속부여 부여책기조부중 이황초중반지 부여수벌지 기인중수소)

    “(숙신은) 한나라 때에 자연스럽게 부여의 신하가 되었다. 부여는 그들을 꾸짖고 조세를 무겁게 부과했다. 그래서 황초년 중에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부여는 그들을 여러 차례 정벌하였다. 그 사람의 수는 적었다.”>

    삼국(三國) 시대의 국력은 인구 수에 좌우되었다. 인구가 적은 숙신은 약소국(弱小國)으로 8만호의 부여에 굴복했다. 부여는 그들을 맞이해 후하게 대접한 후에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그들을 혼내고 무거운 공물을 바치도록 명령했으며,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황초(黃初·삼국시대 위나라의 연호. 220~226년) 연간에 여러 차례 정벌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숙신의 인구 수는 얼마였을까? 숙신의 인구 수는 3만호 미만이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가 3만호였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부여에 강력하게 대응하던 국가였다. 이 사실과 숙신이 스스로 찾아와 굴복하고 부여가 엄하게 혼냈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해 보면, 숙신의 당시 인구 수는 고구려에도 한참 못 미쳤을 것이다. 아무리 많이 추정해도 2만호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3세기 초 만주와 요동 일대 우리 민족의 숫자는 대략 14만호, 숙신은 2만호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숙신보다 7배나 많은 북방의 강자였고, 최대 집단이었던 것이다.


    발해의 少數민족이 된 고구려인들

    고구려 문자왕이 아버지 장수왕을 이어서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는 해(494년), 음력 2월에 북만주의 추운 겨울바람 속에서 부여의 마지막 왕은 800년을 이어 오던 왕조의 문을 스스로 닫고, 오직 가족들만 거느리고 참담한 심정으로 남쪽 고구려로 내려와서 스스로 신하가 되었다. 몇 달만 더 기다리면 따뜻한 봄이련만, 무슨 이유로 그는 추운 북방의 겨울바람 속에서 왕조의 문을 서둘러 닫아야 했을까?

    역사는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았다. 다만 왕은 가족들만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고, 백성들은 집단적으로 난하를 건넌 후에 북쪽 아무르강 쪽으로 떠났다고만 전하고 있다. 북쪽으로 떠난 그들은 잠시 두막루국(豆莫婁國)을 건설하여 살다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당시의 ‘사라졌다’는 의미는 중국 역사가들의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떠났음을 의미한다.

    삼국시대의 우리 민족에게는 숙명의 라이벌이 있었다. 만주 서쪽 대흥안령(大興安嶺) 일대에서 거주하던 선비(鮮卑)족이었다. 그들은 3세기경 중원(中原)으로 내려가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 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우리 민족의 최대 위협이 되었다.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했던 고리족은 선비족과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 선비족의 후예가 세운 당(唐)나라에 패망(敗亡)했다. 698년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大祚榮)은 북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발해를 건국했다. 당나라는 서쪽에서 쳐들어오는 토번족을 막아야 했고, 안으로는 각지의 반란으로 점차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발해는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진격하여, 마침내 옛 고구려 전성기의 영토를 능가하는 지역을 장악했다.

    그런데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 지배층과 대다수인 말갈족 백성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중국의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도, 일본의 《유취국사(類聚國史)》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796년 영충(永忠)이라는 일본 승려는 당나라에 불교를 공부하러 가던 길에 만주를 지나갔다. 그는 만주 곳곳을 둘러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마을마다 백성들은 말갈족(숙신의 후예)이었고, 고구려인은 소수였다.”

    여기서 고구려인이란 고구려 전성기의 백성들, 즉 3세기의 부여, 고구려, 요동에 살던 우리 선조들을 총칭한 호칭이었다. 3세기에는 우리 선조들이 7배나 많았다. 7분의 1에 불과했던 숙신족이 8세기에는 만주의 최대 집단이 되었고, 우리 민족은 소수집단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발해가 멸망한 10세기 이후에, 두 번 다시 우리 민족의 왕조가 그 땅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만주를 떠났던 것이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멕시코에서 발견된 우리 민족 

    1492년 스페인의 콜럼버스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인도로 가려다가 뜻밖에 신대륙을 발견했다. 그는 처음에는 그곳이 인도라고 착각했다.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을 영어로는 ‘인디언’, 스페인으로는 ‘인디오’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페인인들은 지금의 멕시코 수도인 멕시코시티 지역을 중심으로 멕시코와 유카탄 반도에 매우 발달된 문명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특히 멕시코시티 지역에 있던 도시는 30만평의 규모에 20여만명이 살고 있었는데, 도시 중심에는 큰 신전을 세우고, 그 주변은 동서남북의 네 구역으로 나누어, 씨족별로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흰 옷을 주로 입고, 흰색을 숭상하여 거의 모든 건물을 흰 흙으로 칠했고, 처음 찾아온 스페인인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융숭한 대접을 했다. “이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며,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타고난 듯하다”고 스페인인들은 기록했다.

    그들은 미개한 원주민이 아니었다. 왕과 큰무당을 중심으로 매우 체계적인 국가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왕과 큰무당, 귀족과 무당, 평민, 노예로 구별되는 사회조직도 갖추고 있었다. 정복한 땅에는 왕족을 통치자로 파견하고, 각 지역에서 매년 두 차례 공물(貢物)을 받았으며, 그것을 그림 문자로 책에 기록까지 하고 있었다. 그들도 나무껍질을 으깨어 하얀 종이까지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고리족과 맥이족의 후예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흥분했다. 유럽인들은 이들이 구약(舊約)성경에서 사라진 단 지파(支派)의 후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들이 각 지역으로 퍼져서 인류가 번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12명의 아들 중 11명의 후손들 이야기는 구약성경에 계속 나오지만, 단의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신대륙이 발견되고 아스텍제국이 발견되었을 때 유럽 국가들은, 드디어 사라져 버린 단의 후예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곧 단 지파가 아님을 알았지만, 영국의 킹스버그 남작 같은 사람은 19세기까지도 이들이 단 지파일 가능성을 연구했다.

    스페인 왕실은 1521년 아스텍제국을 정복한 직후부터 가톨릭 신부(神父)인 학자들을 멕시코에 파견하여, 그 원주민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언어를 말하며, 풍속은 어떠한지 등을 조사하고 기록하도록 했다.

    그들은 먼저, “너희들은 어떤 민족이냐”고 물었다. 원주민들은 “우리들은 고리족과 맥이족”이라고 대답했다. 고리족이 먼저 그곳에 왔고, 맥이족은 나중에 왔다고 했다.

    만주와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고리족이었고, 요동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맥족(貊族)이었다. 맥족은 5세기 이후부터는 맥이(貊耳)족이라고 불렸다.

    “너희들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원주민들은 “조상들은 원래 아스땅에서 살았고,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위가 평평한 피라미드가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또 “고리족은 원래 태양신을 믿던 고리족 땅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아스땅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아사달이다. 땅과 달은 같은 말이다. 아사달(阿斯達)의 원래 발음은 ‘아스다’이다. 만주에는 우리 선조들이 건축한 수만 기의 피라미드가 있다. 모든 피라미드는 위가 평평하다.


    “맥이족은 820년 경 이곳에 왔다”

    “너희들은 무슨 언어를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질문의 의미를 몰랐던 원주민들은 그저 “나와 다들이(‘모두가’라는 의미) 이렇게 말한다”고 대답했다. 원주민 언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던 스페인인들은 ‘나와 다들이’를 언어 명칭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오늘날 멕시코 원주민 언어를 ‘나와다들이어’라고 하고, 줄여서 ‘나와들어’ 또는 ‘나와어’라고 한다.

    “너희들은 언제 이곳으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원주민들은 “맥이족은 820년경 아스땅을 떠나서 이곳으로 왔고, 고리족은 그보다 수백 년 먼저 왔다”고 대답했다. 여기 나오는 연도는 나중에 스페인인들이 원주민의 달력을 서양력으로 해석한 것이다.

    스페인인들이 이렇게 원주민의 기원을 조사해 기록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 후에 아메리카에 온 프랑스와 포르투갈, 영국은 원주민의 역사, 풍습, 언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미국과 캐나다의 인디언에 대한 기록은, 그들이 이미 유럽의 언어와 풍습에 상당히 깊게 영향을 받아서, 그들 고유의 언어와 풍습이 상당히 변질되어 버린 18세기 말 또는 19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뿌리 깊은 연구는 주로 멕시코와 페루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아스텍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아스텍인들이 보관하고 있던 수많은 책들을 불태워 버렸고, 여러 가지 풍습도 금지했다. 그들은 그림으로 가득 찬 그 책들과 그들의 고유 풍습이 이교도적 풍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원주민들의 말과 풍습을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남겨 두었고, 극히 적은 숫자이지만 원주민들의 그림 문자로 된 책도 남았다. 바로 이러한 자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모습 

    멕시코의 원래 국명은 ‘맥이고(Mexico)’이다. 이 명칭은 스페인인들이 처음 멕시코에 왔을 때, 아스텍제국을 건설하고 살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는 곳을 ‘맥이곳’이라고 불렀고, ‘맥이가 사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 후에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 지배로부터 독립했을 때, 아스텍인들의 옛 명칭을 국명으로 채택했다. 오늘날 ‘멕시코’라고 함은 영어 발음으로 인한 것이고, 실제로 멕시코인들은 아직도 ‘맥이고’라고 말한다.


    남자들의 모습

    ▲상투
     






    <그림2> 그림 속의 아스텍인들은 한국인과 흡사한 상투를 하고 있다.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멕시코 원주민들은 상투를 하고 있었다. 상투는 붉은 천으로 묶어서 만들었고, 조선시대 우리가 사용하던 망건 같은 것이 없어서, 묶은 천이 헐거워지면 뒷머리는 밑으로 처지곤 했다.

    <그림2>는 1325년 맥이족이 아스텍제국을 건설하던 때의 역사를 그린 그림이다. 9명의 큰 부족의 족장들이 모두 상투를 하고 있다. 머리 위 양쪽으로 삐죽 나온 것은 상투를 묶은 천 자락이다.

    가운데 머리를 풀고 귀 위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은 무당이다. 신(神)에게 나라 건설을 알리는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 먼저 스스로 피를 흘리고 있다. 보통은 새의 피를 뿌렸지만, 중요한 제사에서는 무당이 스스로 피를 흘렸다. 그 제사를 그들도 ‘굿(cu)’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무속인들은 아직도 굿을 할 때 닭이나 돼지의 피를 먼저 주변에 뿌린다.

    ▲갓과 두루마기
     






    <그림3> 17세기 멕시코 원주민 족장의 외출 모습(왼쪽)과 20세기 초 우리나라 사람의 복장(오른쪽).



    <그림3>은 아스텍제국의 노인들이 외출을 할 때의 모습이다. 검은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었다. 우리 민족의 외출복인 흰 두루마기의 특징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넓어진다. 오른쪽의 20세기 초 우리 모습과 비교해도,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까지 같다.


    여자들의 모습

    ▲한복과 加髢



    <그림4>의 아스텍제국 여인들은 한복을 입었고, 머리는 가체(加髢)를 했다. <그림5>는 신분이 높은 여인들이 머리는 가체를 하고, 화려한 한복을 입은 모습이다. 이 그림은 특히 스페인과 아스텍제국이 전쟁을 시작한 후, 몇 달 후에 제국이 멸망당할 운명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부인들이 높은 건물 옥상에올라가 멀리 해안가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구경하는 장면이다.

    한복은 우리 민족의 고유 의상이고 가체도 이미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져 왔던 우리 민족의 풍습이었다. 

    가체를 만들기 위하여 빠지거나 자른 머리를 버리지 않고 모아 땋아서 머리에 덧대었다. 아스텍제국 여인들도 그렇게 머리카락을 모았다. 또 가체를 머리에 붙이기 위해 천 조각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림5>에서는 아스텍제국 여인들이 붉은 천으로 가체를 덧댔다. 다음 18세기 신윤복의 그림에도 천으로 가체를 묶은 모습이 나온다<그림6>.

    ▲비녀와 쪽진 머리



    <그림7>은 우리 민족 여인의 머리 모습이고, <그림8>은 1521년경의 아스텍 여인들이 통곡하는 모습이다. 모두 머리 뒤의 목 부분에 머리를 뭉쳐서 쪽을 짓고 비녀를 꽂았다.

    아스텍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 가운데 원 안의 여인의 소매를 보면, 우리 한복의 소매의 특징이 그대로 보인다. 한복 소매는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부드러운 곡선으로 통이 넓어지다가 손목 부분에서 좁아진다.

    머리 부분에서 특이한 점은 이마 윗부분에 머리를 뭉쳐서 두 개의 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도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우리 민족에게 있었다. 이런 모습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나온다.

    ▲머리꽂이와 봉잠


     







    명성황후 초상화<그림9>와 20세기 중반 멕시코 여인의 모습<그림10>.



    우리 민족의 여인들은 머리를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가체뿐 아니라 다양한 머리꽂이를 머리에 꽂아서 장식했다. <그림9>는 19세기 말의 머리꽂이와 명성황후 초상화이고, <그림10>은 20세기 중반의 멕시코의 머리꽂이와 여인이 전통 머리꽂이를 한 사진이다.

    머리꽂이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봉잠(鳳簪)이다. 봉잠은 봉황새 모양으로 만든 비녀를 말한다. <그림11>은 조선왕조 말 영왕비의 소립봉잠(小立鳳簪)과 멕시코 유물로 발견된 봉잠이다. 새가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있고, 꽁지는 뒤로 들고 있으며, 발을 길게 내려서 꽂는 부분으로 만든 모습이 모두 같다.
     






    <그림11>영왕비의 소립봉잠(왼쪽)과 멕시코의 봉잠(오른쪽).



    ▲붉은 볼연지

    우리 민족 여인들이 볼에 붉은 연지를 찍는 풍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아래는 고구려 쌍영총의 세 여인의 그림이다. 모두 붉은 볼연지를 찍은 모습이고, 머리엔 천을 두른 모습이 가체를 덧댄 것으로 보인다.

    <그림12>는 멕시코의 태오티와칸 문명(기원전 1세기~기원후 8세기)의 벽화에 나온 여인의 모습, <그림13>은 미국 남부 애리조나주의 인디언들 그림과 도자기, 그리고 <그림14>는 19세기 미국 수(Soiux)족 인디언 추장 부부의 초상화이다. 수족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인디언 집단으로서, 그들도 우리 민족의 후예라는 증거가 있다. 수족 남자들도 원래는 상투를 했었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자의 상투와 함께 여인들의 붉은 볼연지 풍습은 우리 민족의 이동루트인 알류산열도(列島)와 캐나다 서해안 지역, 그리고 우리 민족의 후예가 퍼진 아메리카 전 지역에서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남자의 상투와 여자의 볼연지 풍습은 아메리카 거의 모든 인디언들 사이에 19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그림12> 멕시코 태오티와칸 벽화 속 여인은 붉은 볼연지를 하고 있다.
    <그림13> 애리조나 인디언의 모습을 형상화한 도자기.
    <그림14> 미국 수족 추장 부부도 볼연지를 하고 있다.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풍습 

    창포에 머리 감고
     






    <그림15> 아스텍 벽화에 나오는 지게를 진 장사꾼의 모습.
    <그림16> 반란 용의자를 고문하는 모습. 가운데에 지게를 세워 놓은 것이 보인다.



    우리 민족 여인들은 옛날부터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곧 풍성하고 아름다운 머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체를 하거나 각종 장식을 머리에 꽂기도 했고, 머릿결을 촉촉하게 빛나게 하기 위해서 창포(菖蒲)라는 풀을 물에 으깨어, 그 물로 머리를 감아 윤이 나게 했다. 멕시코의 여인들도 히어끼리들이라는 푸른 풀을 창포처럼 사용했다.

    아메리카 여인들도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녔고, 무거운 것을 일 때는 따배(똬리)를 사용했다.

    <그림15>는 1540년대 그려진 아스텍제국의 그림 역사서에 나오는 장면이다. 물건을 지게에 얹어서 진 모습과 지게를 지게막대기로 세워 놓은 모습이다. <그림16>은 아직 상투를 틀지 않은 젊은이 두 명이 상투를 튼 어른 두 명을 창으로 고문하는 장면이다.

    아스텍제국에서는 상품을 지고 먼 지방으로 무역(물물거래)을 하러 다녔던 장사꾼들이 있었다. 이들은 제국이 정복한 속국(屬國)이나 마을의 감시자 역할도 했다. 반란의 기미가 보이면 중앙 정부에 보고도 하고, 그림에서 보듯이 직접 반란 용의자를 심문하기도 했다.

    그림상의 심문 대상자도 상투를 한 모습이다. 신대륙 발견 이전에 멕시코 전역에 퍼져 살았던 사람들은 부여-고구려를 건국했던 고리족이었고, 이 사람들은 씨족별로 혹은 원래 만주에서 살 때부터 조상들이 이웃하여 살던 사람들과 같은 곳에 정착하여 수많은 마을과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의 멕시코시티 지역에 뒤늦게 도착한 맥이족(아스텍족)이 그곳에 살던 고리족과 힘을 합하여 아스텍제국을 세우고, 그 당시의 전국 각지에 산재한 씨족별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지게의 특징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지게와 약간 다르다. 우선 지게끈을 어깨에 메지 않았고, 지겟가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고대 풍습을 기록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우리 민족의 초기 지게 모양이 바로 이런 모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관가에서 성곽을 쌓는데, 젊은이들이 등에 1장 길이의 나무를 대고 짐을 나르는데, 온 종일 일하면서도 힘든 줄을 모르더라”는 내용이다. 그림상의 아스텍제국 지게와 같다.


    금줄과 정한수
     






    <그림17> 산파가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치는 모습.
    <그림18> 금줄을 친 신령한 나무 아래서 연주하는 무당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아이를 낳으면 집 앞에 금줄을 쳐서 잡인의 방문을 금했다. 이는 그 아이의 운명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소위 ‘액(厄), 즉 나쁜 기운’이 방문객을 통하여 묻어 들어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금줄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걷혔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방문을 허용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금줄은 아이를 낳은 경우에만 친 것이 아니고, 성황당이나 산신제를 지내는, 소위 신성한 곳에도 쳤다. 금줄에는 원형 금줄과 줄형 금줄이 있었다. 멕시코에도 이와 똑같은 풍습이 있었다. 스페인 출신 가톨릭 신부인 사하군(Sahagun)의 책에 남겨진 기록과 그림에 따르면, 멕시코 원주민들도 원형 금줄과 줄형 금줄을 쳤다.

    <그림17>은 아기가 태어나자, 산파가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집 앞에 칠 원형 금줄을 받고, 아기의 운명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점쟁이를 ‘다마틴이(tlamatini)’라고 불렀다. 우리말 ‘다 마친 이(다 맞히는 이)’의 고어(古語)이다.

    <그림18>은 산위에 있는 산신제를 올리는 곳이다. 줄형 금줄을 치고, 신령한 나무 아래서 무당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줄형 금줄에 대한 설명에는 “새끼줄을 꼬아서 만들었고, 같은 풀로 만든 술이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멕시코 원주민들은 태어난 아이에게 복을 빌어 주기 위하여, 집 동쪽에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아이를 안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후에, 복을 빌어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정한수를 떠놓고 빌던 풍습이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악기들도 우리 민족의 것과 같은 것이 많다. 그중에 하나만 공개하면, 징이다. 그들은 징을 ‘태질라가틀(신성한 질라가틀)’이라고 불렀다.


    四柱와 占
     






    <그림19> 가운데 사람 얼굴을 한 태양은 태양신을 상징한다. 점쟁이가 들고 있는 것이 《토날보왈리(신성한 날을 보아서)》라는 책임을 나타낸다. 점쟁이 얼굴 앞에 있는 짧은 지팡이 같은 그림은 ‘굽어진 혀’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말한다’는 기호이다. 즉 점쟁이가 사주풀이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말한다’는 이 기호는 경주의 신라시대 고분인 천마총의 천마 입 앞에도 그려져 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운명을 알기 위하여 사주(四柱)를 봤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달력은 두 종류로서, 각각 히의보왈리(Hiuhpohualli)와 토날보왈리(Tonalpohualli)이다. 각각 ‘해를 보아서’와 ‘신성한 날을 보아서’라는 우리말이다. 달력 명칭에 사용된 ‘히’와 ‘날’은 오늘날의 우리말 ‘해’와 ‘날’이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주풀이와 점치는 데 사용한 달력은 토날보왈리였다. 이 달력은 우리 민족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음력 달력과 기본 체제가 같다. 우리 민족도 사주풀이나 점을 칠 때에는 음력 달력을 아직도 사용한다.

    <그림19>는 멕시코 원주민이 아이를 데리고 점쟁이를 찾아가서 아이의 운명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그림 설명에 따르면, 점쟁이는 먼저 아이의 태어난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를 물어보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토날보왈리를 펼쳐서, 그날과 그 시각에 해당하는 각종 그림 기호를 보고서, 아이의 평생의 운명을 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또 사주를 바탕으로 운이 좋은 남녀가 결혼했는데, 이것도 우리 민족의 옛 풍습과 같다.

    이 달력을 이용하여, 멕시코 원주민들은 점을 매우 많이 쳤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항상 먼저 점을 치고 날을 받았다. 장사하기 위하여 먼 길을 갈 때도 점을 쳐서 날을 받았고, 이사하거나 새로운 집을 지을 때도, 결혼을 할 때에도 역시 점을 치고 길일(吉日)을 받아서 행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모두 아기를 업고 다녔다. 아스텍제국이 정복된 지 20여년 후에 스페인 신부 고마라(Gomara)가 쓴 문헌에는 멕시코 원주민들의 육아(育兒) 풍습이 자세히 나와 있다. 


    아기를 업고 다니며 젖을 줄 때는 ‘찌찌(tzitzi)’라고 말해
     






    <그림20> 멕시코 여인의 아이 업은 모습(왼쪽)과 20세기 중엽의 우리나라 여인이 아기를 업은 채로 젖을 먹이는 모습.



    고마라에 의하면, “원주민들은 아기를 등에 업고 포대기로 둘렀는데, 포대기 양쪽 끝을 젖가슴 위에서 동여매었고, 등에 업힌 아기의 머리는 엄마의 목까지 왔다”고 한다. 그는 또 “등에 업은 아기에게 젖을 줄 때에는 머리를 겨드랑이 밑으로 돌려서, 젖을 물렸으며, 그때 ‘찌찌(tzitzi)’라고 자주 말했다”면서 “‘찌찌’는 아마도 ‘젖’이나 ‘젖주다’를 뜻하는 말인 것 같다”는 해석까지 덧붙였다. 

    <그림20>은 멕시코 원주민의 아이를 업은 모습과 우리 민족 여인들이 등에 업힌 아이에게 젖을 줄 때의 사진이다. 겨드랑이 밑으로 머리를 돌린 모습이 고마라의 설명과 일치한다. 또 아이의 나이를 말할 때, 태어난 해를 한 살로 치고, 그 다음해에는 두 살로 말했는데, 이런 나이 계산법은 서양의 나이 계산법과 비교하면 심지어 두 살까지도 차이가 난다고 했다. 멕시코 원주민의 나이 계산법은 우리민족의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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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성태 교수)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 민족이다(下)



    한 中南美연구자의 이색 주장 -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 민족이다(下)

    아스텍제국은 맥이족과 고리족이 합작해서 세운 나라



    ⊙ 스페인 정복자들의 기록에 아스텍 원주민들은 820년경 아스땅(아사달)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어
    ⊙ 아기를 업어 키우며 젖 줄 때는 ‘찌찌’라고 해
    ⊙ 상투·갓, 가체·쪽진 머리, 사주와 점, 정한수 등 풍속 유사

    孫成泰
    ⊙ 53세. 한국외국어대 졸업,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언어학 박사.
    ⊙ 배재대 스페인어·중남미학과 교수, 同 외국어교실 실장, 한국외국어교육학회 부회장.
    ⊙ 논문 : <아스테카인의 탄생, 육아 및 장례 문화> <아스텍의 역사, 제도, 풍습 및 지명에 나타나는
    우리말 연구> <아스텍제국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풍습> 등.







    <그림1> 벽화 속에 나타난 아스텍인들. 이들은 5~10세기 만주에서 사라진 고리족과 맥이족의 후예로 보인다.



    우리 민족은 일찍이 만주(滿洲)와 요동(遼東) 지역에 부여(扶餘)와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하고, 이 지역을 호령했던 동북아(東北亞)의 강자(强者)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이 지역의 강자였던 우리 민족은 소수(少數)로 전락하고, 고구려와 부여에 복속했던 숙신(肅愼)족의 후예인 말갈족(후의 여진족)이 만주의 주인이 되었다. 만주를 호령하던 우리 민족은 과연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흔적을 멀리 중남미(中南美)의 멕시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라져 버린 우리 민족 

    3세기 후반에 쓰인 《삼국지》 〈위지동이전(魏誌東夷傳)〉은 우리 민족의 고대(古代) 역사와 풍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비록 중국의 관점에서 부족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그 시대 우리 선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사료다.

    우리 민족은 동북아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만주와 요동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 왔다. 만주 북쪽의 길림, 장춘 일대는 부여가 있었고, 만주 남쪽의 집안 일대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오랫동안 고조선(古朝鮮)이 존재했던 요동 일대는, 비록 중국 한(漢)나라 후예인 공손(公孫)씨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고조선의 후예가 살았다. 그 당시 만주 일대에 살던 우리 선조들의 숫자는 얼마였을까?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부여가 8만호(戶), 고구려가 3만호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요동의 공손씨 치하에 있던 선조들도 대략 3만호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부여와 숙신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3세기 만주에는 우리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 한 그룹 있었다. 그들은 숙신(肅愼)족이었다. 그들은 두만강 북쪽 연해주(沿海州)의 작은 지역에 살던, 근원을 알 수 없는 종족이었다. 그들은 부여-고구려를 건국한 우리 선조 고리족과 언어와 풍습에서 완전히 달랐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그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고, 3세기 초에는 당시 만주 일대에서 가장 강국이었던 부여에 찾아와서 스스로 신하가 되었으며, 매년 무거운 공물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壤(위략왈 기국은부 자선세이래 미상파양)

    “위략왈,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적이 없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가구 수 8만호를 거느린 부여는 매우 부강하여 다른 민족으로부터 파괴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쪽의 숙신족은 스스로 부여를 찾아와서 굴복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自漢己來, 臣屬夫餘 夫餘責其租賦重, 以黃初中叛之 夫餘數伐之, 其人衆雖少 (자한기래 신속부여 부여책기조부중 이황초중반지 부여수벌지 기인중수소)

    “(숙신은) 한나라 때에 자연스럽게 부여의 신하가 되었다. 부여는 그들을 꾸짖고 조세를 무겁게 부과했다. 그래서 황초년 중에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부여는 그들을 여러 차례 정벌하였다. 그 사람의 수는 적었다.”>

    삼국(三國) 시대의 국력은 인구 수에 좌우되었다. 인구가 적은 숙신은 약소국(弱小國)으로 8만호의 부여에 굴복했다. 부여는 그들을 맞이해 후하게 대접한 후에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그들을 혼내고 무거운 공물을 바치도록 명령했으며,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황초(黃初·삼국시대 위나라의 연호. 220~226년) 연간에 여러 차례 정벌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숙신의 인구 수는 얼마였을까? 숙신의 인구 수는 3만호 미만이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가 3만호였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부여에 강력하게 대응하던 국가였다. 이 사실과 숙신이 스스로 찾아와 굴복하고 부여가 엄하게 혼냈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해 보면, 숙신의 당시 인구 수는 고구려에도 한참 못 미쳤을 것이다. 아무리 많이 추정해도 2만호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3세기 초 만주와 요동 일대 우리 민족의 숫자는 대략 14만호, 숙신은 2만호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숙신보다 7배나 많은 북방의 강자였고, 최대 집단이었던 것이다.


    발해의 少數민족이 된 고구려인들

    고구려 문자왕이 아버지 장수왕을 이어서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는 해(494년), 음력 2월에 북만주의 추운 겨울바람 속에서 부여의 마지막 왕은 800년을 이어 오던 왕조의 문을 스스로 닫고, 오직 가족들만 거느리고 참담한 심정으로 남쪽 고구려로 내려와서 스스로 신하가 되었다. 몇 달만 더 기다리면 따뜻한 봄이련만, 무슨 이유로 그는 추운 북방의 겨울바람 속에서 왕조의 문을 서둘러 닫아야 했을까?

    역사는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았다. 다만 왕은 가족들만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고, 백성들은 집단적으로 난하를 건넌 후에 북쪽 아무르강 쪽으로 떠났다고만 전하고 있다. 북쪽으로 떠난 그들은 잠시 두막루국(豆莫婁國)을 건설하여 살다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당시의 ‘사라졌다’는 의미는 중국 역사가들의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떠났음을 의미한다.

    삼국시대의 우리 민족에게는 숙명의 라이벌이 있었다. 만주 서쪽 대흥안령(大興安嶺) 일대에서 거주하던 선비(鮮卑)족이었다. 그들은 3세기경 중원(中原)으로 내려가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 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우리 민족의 최대 위협이 되었다.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했던 고리족은 선비족과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 선비족의 후예가 세운 당(唐)나라에 패망(敗亡)했다. 698년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大祚榮)은 북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발해를 건국했다. 당나라는 서쪽에서 쳐들어오는 토번족을 막아야 했고, 안으로는 각지의 반란으로 점차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발해는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진격하여, 마침내 옛 고구려 전성기의 영토를 능가하는 지역을 장악했다.

    그런데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 지배층과 대다수인 말갈족 백성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중국의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도, 일본의 《유취국사(類聚國史)》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796년 영충(永忠)이라는 일본 승려는 당나라에 불교를 공부하러 가던 길에 만주를 지나갔다. 그는 만주 곳곳을 둘러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마을마다 백성들은 말갈족(숙신의 후예)이었고, 고구려인은 소수였다.”

    여기서 고구려인이란 고구려 전성기의 백성들, 즉 3세기의 부여, 고구려, 요동에 살던 우리 선조들을 총칭한 호칭이었다. 3세기에는 우리 선조들이 7배나 많았다. 7분의 1에 불과했던 숙신족이 8세기에는 만주의 최대 집단이 되었고, 우리 민족은 소수집단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발해가 멸망한 10세기 이후에, 두 번 다시 우리 민족의 왕조가 그 땅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만주를 떠났던 것이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멕시코에서 발견된 우리 민족 

    1492년 스페인의 콜럼버스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인도로 가려다가 뜻밖에 신대륙을 발견했다. 그는 처음에는 그곳이 인도라고 착각했다.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을 영어로는 ‘인디언’, 스페인으로는 ‘인디오’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페인인들은 지금의 멕시코 수도인 멕시코시티 지역을 중심으로 멕시코와 유카탄 반도에 매우 발달된 문명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특히 멕시코시티 지역에 있던 도시는 30만평의 규모에 20여만명이 살고 있었는데, 도시 중심에는 큰 신전을 세우고, 그 주변은 동서남북의 네 구역으로 나누어, 씨족별로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흰 옷을 주로 입고, 흰색을 숭상하여 거의 모든 건물을 흰 흙으로 칠했고, 처음 찾아온 스페인인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융숭한 대접을 했다. “이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며,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타고난 듯하다”고 스페인인들은 기록했다.

    그들은 미개한 원주민이 아니었다. 왕과 큰무당을 중심으로 매우 체계적인 국가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왕과 큰무당, 귀족과 무당, 평민, 노예로 구별되는 사회조직도 갖추고 있었다. 정복한 땅에는 왕족을 통치자로 파견하고, 각 지역에서 매년 두 차례 공물(貢物)을 받았으며, 그것을 그림 문자로 책에 기록까지 하고 있었다. 그들도 나무껍질을 으깨어 하얀 종이까지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고리족과 맥이족의 후예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흥분했다. 유럽인들은 이들이 구약(舊約)성경에서 사라진 단 지파(支派)의 후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들이 각 지역으로 퍼져서 인류가 번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12명의 아들 중 11명의 후손들 이야기는 구약성경에 계속 나오지만, 단의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신대륙이 발견되고 아스텍제국이 발견되었을 때 유럽 국가들은, 드디어 사라져 버린 단의 후예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곧 단 지파가 아님을 알았지만, 영국의 킹스버그 남작 같은 사람은 19세기까지도 이들이 단 지파일 가능성을 연구했다.

    스페인 왕실은 1521년 아스텍제국을 정복한 직후부터 가톨릭 신부(神父)인 학자들을 멕시코에 파견하여, 그 원주민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언어를 말하며, 풍속은 어떠한지 등을 조사하고 기록하도록 했다.

    그들은 먼저, “너희들은 어떤 민족이냐”고 물었다. 원주민들은 “우리들은 고리족과 맥이족”이라고 대답했다. 고리족이 먼저 그곳에 왔고, 맥이족은 나중에 왔다고 했다.

    만주와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고리족이었고, 요동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맥족(貊族)이었다. 맥족은 5세기 이후부터는 맥이(貊耳)족이라고 불렸다.

    “너희들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원주민들은 “조상들은 원래 아스땅에서 살았고,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위가 평평한 피라미드가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또 “고리족은 원래 태양신을 믿던 고리족 땅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아스땅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아사달이다. 땅과 달은 같은 말이다. 아사달(阿斯達)의 원래 발음은 ‘아스다’이다. 만주에는 우리 선조들이 건축한 수만 기의 피라미드가 있다. 모든 피라미드는 위가 평평하다.


    “맥이족은 820년 경 이곳에 왔다”

    “너희들은 무슨 언어를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질문의 의미를 몰랐던 원주민들은 그저 “나와 다들이(‘모두가’라는 의미) 이렇게 말한다”고 대답했다. 원주민 언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던 스페인인들은 ‘나와 다들이’를 언어 명칭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오늘날 멕시코 원주민 언어를 ‘나와다들이어’라고 하고, 줄여서 ‘나와들어’ 또는 ‘나와어’라고 한다.

    “너희들은 언제 이곳으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원주민들은 “맥이족은 820년경 아스땅을 떠나서 이곳으로 왔고, 고리족은 그보다 수백 년 먼저 왔다”고 대답했다. 여기 나오는 연도는 나중에 스페인인들이 원주민의 달력을 서양력으로 해석한 것이다.

    스페인인들이 이렇게 원주민의 기원을 조사해 기록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 후에 아메리카에 온 프랑스와 포르투갈, 영국은 원주민의 역사, 풍습, 언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미국과 캐나다의 인디언에 대한 기록은, 그들이 이미 유럽의 언어와 풍습에 상당히 깊게 영향을 받아서, 그들 고유의 언어와 풍습이 상당히 변질되어 버린 18세기 말 또는 19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뿌리 깊은 연구는 주로 멕시코와 페루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아스텍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아스텍인들이 보관하고 있던 수많은 책들을 불태워 버렸고, 여러 가지 풍습도 금지했다. 그들은 그림으로 가득 찬 그 책들과 그들의 고유 풍습이 이교도적 풍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원주민들의 말과 풍습을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남겨 두었고, 극히 적은 숫자이지만 원주민들의 그림 문자로 된 책도 남았다. 바로 이러한 자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모습 

    멕시코의 원래 국명은 ‘맥이고(Mexico)’이다. 이 명칭은 스페인인들이 처음 멕시코에 왔을 때, 아스텍제국을 건설하고 살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는 곳을 ‘맥이곳’이라고 불렀고, ‘맥이가 사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 후에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 지배로부터 독립했을 때, 아스텍인들의 옛 명칭을 국명으로 채택했다. 오늘날 ‘멕시코’라고 함은 영어 발음으로 인한 것이고, 실제로 멕시코인들은 아직도 ‘맥이고’라고 말한다.


    남자들의 모습

    ▲상투
     






    <그림2> 그림 속의 아스텍인들은 한국인과 흡사한 상투를 하고 있다.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멕시코 원주민들은 상투를 하고 있었다. 상투는 붉은 천으로 묶어서 만들었고, 조선시대 우리가 사용하던 망건 같은 것이 없어서, 묶은 천이 헐거워지면 뒷머리는 밑으로 처지곤 했다.

    <그림2>는 1325년 맥이족이 아스텍제국을 건설하던 때의 역사를 그린 그림이다. 9명의 큰 부족의 족장들이 모두 상투를 하고 있다. 머리 위 양쪽으로 삐죽 나온 것은 상투를 묶은 천 자락이다.

    가운데 머리를 풀고 귀 위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은 무당이다. 신(神)에게 나라 건설을 알리는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 먼저 스스로 피를 흘리고 있다. 보통은 새의 피를 뿌렸지만, 중요한 제사에서는 무당이 스스로 피를 흘렸다. 그 제사를 그들도 ‘굿(cu)’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무속인들은 아직도 굿을 할 때 닭이나 돼지의 피를 먼저 주변에 뿌린다.

    ▲갓과 두루마기
     






    <그림3> 17세기 멕시코 원주민 족장의 외출 모습(왼쪽)과 20세기 초 우리나라 사람의 복장(오른쪽).



    <그림3>은 아스텍제국의 노인들이 외출을 할 때의 모습이다. 검은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었다. 우리 민족의 외출복인 흰 두루마기의 특징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넓어진다. 오른쪽의 20세기 초 우리 모습과 비교해도,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까지 같다.


    여자들의 모습

    ▲한복과 加髢



    <그림4>의 아스텍제국 여인들은 한복을 입었고, 머리는 가체(加髢)를 했다. <그림5>는 신분이 높은 여인들이 머리는 가체를 하고, 화려한 한복을 입은 모습이다. 이 그림은 특히 스페인과 아스텍제국이 전쟁을 시작한 후, 몇 달 후에 제국이 멸망당할 운명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부인들이 높은 건물 옥상에올라가 멀리 해안가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구경하는 장면이다.

    한복은 우리 민족의 고유 의상이고 가체도 이미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져 왔던 우리 민족의 풍습이었다. 

    가체를 만들기 위하여 빠지거나 자른 머리를 버리지 않고 모아 땋아서 머리에 덧대었다. 아스텍제국 여인들도 그렇게 머리카락을 모았다. 또 가체를 머리에 붙이기 위해 천 조각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림5>에서는 아스텍제국 여인들이 붉은 천으로 가체를 덧댔다. 다음 18세기 신윤복의 그림에도 천으로 가체를 묶은 모습이 나온다<그림6>.

    ▲비녀와 쪽진 머리



    <그림7>은 우리 민족 여인의 머리 모습이고, <그림8>은 1521년경의 아스텍 여인들이 통곡하는 모습이다. 모두 머리 뒤의 목 부분에 머리를 뭉쳐서 쪽을 짓고 비녀를 꽂았다.

    아스텍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 가운데 원 안의 여인의 소매를 보면, 우리 한복의 소매의 특징이 그대로 보인다. 한복 소매는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부드러운 곡선으로 통이 넓어지다가 손목 부분에서 좁아진다.

    머리 부분에서 특이한 점은 이마 윗부분에 머리를 뭉쳐서 두 개의 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도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우리 민족에게 있었다. 이런 모습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나온다.

    ▲머리꽂이와 봉잠









    명성황후 초상화<그림9>와 20세기 중반 멕시코 여인의 모습<그림10>.



    우리 민족의 여인들은 머리를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가체뿐 아니라 다양한 머리꽂이를 머리에 꽂아서 장식했다. <그림9>는 19세기 말의 머리꽂이와 명성황후 초상화이고, <그림10>은 20세기 중반의 멕시코의 머리꽂이와 여인이 전통 머리꽂이를 한 사진이다.

    머리꽂이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봉잠(鳳簪)이다. 봉잠은 봉황새 모양으로 만든 비녀를 말한다. <그림11>은 조선왕조 말 영왕비의 소립봉잠(小立鳳簪)과 멕시코 유물로 발견된 봉잠이다. 새가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있고, 꽁지는 뒤로 들고 있으며, 발을 길게 내려서 꽂는 부분으로 만든 모습이 모두 같다.
     






    <그림11>영왕비의 소립봉잠(왼쪽)과 멕시코의 봉잠(오른쪽).



    ▲붉은 볼연지

    우리 민족 여인들이 볼에 붉은 연지를 찍는 풍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아래는 고구려 쌍영총의 세 여인의 그림이다. 모두 붉은 볼연지를 찍은 모습이고, 머리엔 천을 두른 모습이 가체를 덧댄 것으로 보인다.

    <그림12>는 멕시코의 태오티와칸 문명(기원전 1세기~기원후 8세기)의 벽화에 나온 여인의 모습, <그림13>은 미국 남부 애리조나주의 인디언들 그림과 도자기, 그리고 <그림14>는 19세기 미국 수(Soiux)족 인디언 추장 부부의 초상화이다. 수족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인디언 집단으로서, 그들도 우리 민족의 후예라는 증거가 있다. 수족 남자들도 원래는 상투를 했었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자의 상투와 함께 여인들의 붉은 볼연지 풍습은 우리 민족의 이동루트인 알류산열도(列島)와 캐나다 서해안 지역, 그리고 우리 민족의 후예가 퍼진 아메리카 전 지역에서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남자의 상투와 여자의 볼연지 풍습은 아메리카 거의 모든 인디언들 사이에 19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그림12> 멕시코 태오티와칸 벽화 속 여인은 붉은 볼연지를 하고 있다.
    <그림13> 애리조나 인디언의 모습을 형상화한 도자기.
    <그림14> 미국 수족 추장 부부도 볼연지를 하고 있다.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풍습 

    창포에 머리 감고
     






    <그림15> 아스텍 벽화에 나오는 지게를 진 장사꾼의 모습.
    <그림16> 반란 용의자를 고문하는 모습. 가운데에 지게를 세워 놓은 것이 보인다.



    우리 민족 여인들은 옛날부터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곧 풍성하고 아름다운 머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체를 하거나 각종 장식을 머리에 꽂기도 했고, 머릿결을 촉촉하게 빛나게 하기 위해서 창포(菖蒲)라는 풀을 물에 으깨어, 그 물로 머리를 감아 윤이 나게 했다. 멕시코의 여인들도 히어끼리들이라는 푸른 풀을 창포처럼 사용했다.

    아메리카 여인들도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녔고, 무거운 것을 일 때는 따배(똬리)를 사용했다.

    <그림15>는 1540년대 그려진 아스텍제국의 그림 역사서에 나오는 장면이다. 물건을 지게에 얹어서 진 모습과 지게를 지게막대기로 세워 놓은 모습이다. <그림16>은 아직 상투를 틀지 않은 젊은이 두 명이 상투를 튼 어른 두 명을 창으로 고문하는 장면이다.

    아스텍제국에서는 상품을 지고 먼 지방으로 무역(물물거래)을 하러 다녔던 장사꾼들이 있었다. 이들은 제국이 정복한 속국(屬國)이나 마을의 감시자 역할도 했다. 반란의 기미가 보이면 중앙 정부에 보고도 하고, 그림에서 보듯이 직접 반란 용의자를 심문하기도 했다.

    그림상의 심문 대상자도 상투를 한 모습이다. 신대륙 발견 이전에 멕시코 전역에 퍼져 살았던 사람들은 부여-고구려를 건국했던 고리족이었고, 이 사람들은 씨족별로 혹은 원래 만주에서 살 때부터 조상들이 이웃하여 살던 사람들과 같은 곳에 정착하여 수많은 마을과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의 멕시코시티 지역에 뒤늦게 도착한 맥이족(아스텍족)이 그곳에 살던 고리족과 힘을 합하여 아스텍제국을 세우고, 그 당시의 전국 각지에 산재한 씨족별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지게의 특징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지게와 약간 다르다. 우선 지게끈을 어깨에 메지 않았고, 지겟가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고대 풍습을 기록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우리 민족의 초기 지게 모양이 바로 이런 모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관가에서 성곽을 쌓는데, 젊은이들이 등에 1장 길이의 나무를 대고 짐을 나르는데, 온 종일 일하면서도 힘든 줄을 모르더라”는 내용이다. 그림상의 아스텍제국 지게와 같다.


    금줄과 정한수
     






    <그림17> 산파가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치는 모습.
    <그림18> 금줄을 친 신령한 나무 아래서 연주하는 무당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아이를 낳으면 집 앞에 금줄을 쳐서 잡인의 방문을 금했다. 이는 그 아이의 운명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소위 ‘액(厄), 즉 나쁜 기운’이 방문객을 통하여 묻어 들어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금줄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걷혔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방문을 허용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금줄은 아이를 낳은 경우에만 친 것이 아니고, 성황당이나 산신제를 지내는, 소위 신성한 곳에도 쳤다. 금줄에는 원형 금줄과 줄형 금줄이 있었다. 멕시코에도 이와 똑같은 풍습이 있었다. 스페인 출신 가톨릭 신부인 사하군(Sahagun)의 책에 남겨진 기록과 그림에 따르면, 멕시코 원주민들도 원형 금줄과 줄형 금줄을 쳤다.

    <그림17>은 아기가 태어나자, 산파가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집 앞에 칠 원형 금줄을 받고, 아기의 운명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점쟁이를 ‘다마틴이(tlamatini)’라고 불렀다. 우리말 ‘다 마친 이(다 맞히는 이)’의 고어(古語)이다.

    <그림18>은 산위에 있는 산신제를 올리는 곳이다. 줄형 금줄을 치고, 신령한 나무 아래서 무당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줄형 금줄에 대한 설명에는 “새끼줄을 꼬아서 만들었고, 같은 풀로 만든 술이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멕시코 원주민들은 태어난 아이에게 복을 빌어 주기 위하여, 집 동쪽에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아이를 안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후에, 복을 빌어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정한수를 떠놓고 빌던 풍습이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악기들도 우리 민족의 것과 같은 것이 많다. 그중에 하나만 공개하면, 징이다. 그들은 징을 ‘태질라가틀(신성한 질라가틀)’이라고 불렀다.


    四柱와 占
     






    <그림19> 가운데 사람 얼굴을 한 태양은 태양신을 상징한다. 점쟁이가 들고 있는 것이 《토날보왈리(신성한 날을 보아서)》라는 책임을 나타낸다. 점쟁이 얼굴 앞에 있는 짧은 지팡이 같은 그림은 ‘굽어진 혀’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말한다’는 기호이다. 즉 점쟁이가 사주풀이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말한다’는 이 기호는 경주의 신라시대 고분인 천마총의 천마 입 앞에도 그려져 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운명을 알기 위하여 사주(四柱)를 봤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달력은 두 종류로서, 각각 히의보왈리(Hiuhpohualli)와 토날보왈리(Tonalpohualli)이다. 각각 ‘해를 보아서’와 ‘신성한 날을 보아서’라는 우리말이다. 달력 명칭에 사용된 ‘히’와 ‘날’은 오늘날의 우리말 ‘해’와 ‘날’이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주풀이와 점치는 데 사용한 달력은 토날보왈리였다. 이 달력은 우리 민족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음력 달력과 기본 체제가 같다. 우리 민족도 사주풀이나 점을 칠 때에는 음력 달력을 아직도 사용한다.

    <그림19>는 멕시코 원주민이 아이를 데리고 점쟁이를 찾아가서 아이의 운명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그림 설명에 따르면, 점쟁이는 먼저 아이의 태어난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를 물어보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토날보왈리를 펼쳐서, 그날과 그 시각에 해당하는 각종 그림 기호를 보고서, 아이의 평생의 운명을 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또 사주를 바탕으로 운이 좋은 남녀가 결혼했는데, 이것도 우리 민족의 옛 풍습과 같다.

    이 달력을 이용하여, 멕시코 원주민들은 점을 매우 많이 쳤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항상 먼저 점을 치고 날을 받았다. 장사하기 위하여 먼 길을 갈 때도 점을 쳐서 날을 받았고, 이사하거나 새로운 집을 지을 때도, 결혼을 할 때에도 역시 점을 치고 길일(吉日)을 받아서 행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모두 아기를 업고 다녔다. 아스텍제국이 정복된 지 20여년 후에 스페인 신부 고마라(Gomara)가 쓴 문헌에는 멕시코 원주민들의 육아(育兒) 풍습이 자세히 나와 있다. 


    아기를 업고 다니며 젖을 줄 때는 ‘찌찌(tzitzi)’라고 말해
     






    <그림20> 멕시코 여인의 아이 업은 모습(왼쪽)과 20세기 중엽의 우리나라 여인이 아기를 업은 채로 젖을 먹이는 모습.



    고마라에 의하면, “원주민들은 아기를 등에 업고 포대기로 둘렀는데, 포대기 양쪽 끝을 젖가슴 위에서 동여매었고, 등에 업힌 아기의 머리는 엄마의 목까지 왔다”고 한다. 그는 또 “등에 업은 아기에게 젖을 줄 때에는 머리를 겨드랑이 밑으로 돌려서, 젖을 물렸으며, 그때 ‘찌찌(tzitzi)’라고 자주 말했다”면서 “‘찌찌’는 아마도 ‘젖’이나 ‘젖주다’를 뜻하는 말인 것 같다”는 해석까지 덧붙였다. 

    <그림20>은 멕시코 원주민의 아이를 업은 모습과 우리 민족 여인들이 등에 업힌 아이에게 젖을 줄 때의 사진이다. 겨드랑이 밑으로 머리를 돌린 모습이 고마라의 설명과 일치한다. 또 아이의 나이를 말할 때, 태어난 해를 한 살로 치고, 그 다음해에는 두 살로 말했는데, 이런 나이 계산법은 서양의 나이 계산법과 비교하면 심지어 두 살까지도 차이가 난다고 했다. 멕시코 원주민의 나이 계산법은 우리민족의 것과 같았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9-09 조회 288
  • 자미원국에 대한 소회
                                                   紫薇垣局에 대한 소회     북극성을 중심으로 紫薇垣局과 天市垣局 그리고 太薇垣局, 少薇垣局을 구성하는데 이러한 성운의 별자리가 땅에 그 기운을 드리운 곳을 말한다. 별자리 이름을 풍수에 도입한 계기는 천지인 삼합사상으로 대표되는 되는 동양사상에 근본한다. 楊筠松의 풍수이론도 九星을 비롯한 별자리의 이름을 끌어다 산의 형상으로 표시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별자리와 산천의 형세는 어떤 관련성을 가진 것일까!! 특징적인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당시 사람들의 별자리인식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별이 하늘에 떠있는 단순한 존재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길흉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곳 자미원은 우주의 중심으로써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는 곳으로 인식하였는데, 이곳에서 생명이 시작되어 죽어서 돌아가는 것도 자미원이라 인식했다. 특히 칠성판은 자미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목숨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숙명을 얘기한다. 여기에 더해서 천문관측을 통해 방위관념이나 계절, 일조량 등의 지식축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대사회에서 인간세상과 같은 궁궐이 하늘에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미원은 하늘의 왕궐이다. 이러한 사상적 바탕에 근거하여 중국의 자금성도 유래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미원국이 세인들에게 강하게 각인된 계기는 육관도사의『터』라는 책에 소개되면서 부터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 첫 번째 가는 자미원국에는 풍수지리에서 가장 좋다는 三吉六秀와 九星, 正體가 모조리 갖추어진 자리를 말한다. 이런 대명당은 지구상에서는 오직 한 자리밖에 없으며 절대 두 자리가 없는 천하 유일의 대명당이라고 일러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곳에 묘를 쓰면 세계를 지배하는 큰 인물이 태어난다고 하는 다소 과장된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자미원국을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한 책은『人子須知』이다.『인자수지』에는 육관도사의 주장과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여 자미원국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육관도사가 음택으로 설명하였다면,『人子須知』는 帝都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여 설명하였다. 다시 말해서 北幹龍과 中幹龍 그리고 南幹龍으로 대변되는 중국대륙의 대간룡에 결혈한 옛 왕조의 도읍지가 이루어진 곳으로 묘사하였다.   『人子須知』에는 황제의 도읍지는 星垣에 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대개 帝都는 天子의 京畿요, 萬方의 樞會이며 행정령이 이곳에서 나와 전국을 다스리고 四夷를 어루만지며 백관에 의지하여 만민을 거느리는 것이니 천하의 至尊地인 것이다. 따라서 지리의 大로 따져보면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위로는 天星垣局에 합하고 아래로는 正龍의 왕기를 모은 연후여야 帝都는 건립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서는 합당한 星局과 합하고 지상의 正龍의 지기가 결합한 곳이라야 帝都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미원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紫薇星垣은 천황의 辰極이니 太乙이 常居하는 곳이요 북극오성은 정히 亥地에 臨하였으니 天帝의 最尊이 된다”고 하여 자미원국이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것은 인정하였다. 또한, 역대 중국의 帝都들을 垣局과 결합된 곳으로 묘사하는데, 이러한 원국이 결합한 帝都로 북경과 서안, 낙양, 남경등을 들고 있다. 중국의 북, 남 중간룡으로 대표되는 삼대간룡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어 하늘의 성원과 땅의 정룡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북간룡으로 결혈한 곳으로 북경을 중간룡의 결혈지로 서안과 낙양을 그리고 남간룡의 결혈지로 남경을 들고 있다. 이러한 帝都들조차도 자마원과 천시원 그리고 태미원으로 대변되는 三垣天星의 기운을 받아서 이루어진 결혈이라 하였다.    한편,『疑龍經』「衛龍篇」에는 자미원국과 천시원과 태미원국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 “위룡에서 만들어진 명당수가 가로로 길게 혈처를 감싸 안으면 이는 太微垣이며, 혈처를 향해 곧장 쏘듯 들어오면 이곳은 紫微垣”이라고 하였다. “여러 곳에서 흘러 나온 물들이 달려들면 天市垣”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平洋 혹은 洛陽은 자미원의 땅기운이 완연하며 河中과 河曲은 천시원에 해당한다. 關中은 천시원에 해당되며 伊洛지방 역시 천시원에 부합한다. 燕山은 천시원의 기운을 잘 받아서 형성된 곳이며 역시 천시원이 碣石지방을 둘러 감싸고 있다. 長江이 굽이굽이 흐르는 물가에 도읍지가 될 만한 큰 혈처 3개가 맺혔는데 3개의 도읍지 혈처 앞에는 물이 가운데로 흐른다. 3원 가운데 중원에 해당하는 자미원은 이미 제왕이 거처했던 땅인데 다만 이 원성은 땅 기운이 새어나갔다”고 하여 자미원과 태미원국 그리고 천시원국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특징적인 모습도 제시하였다.    따라서 자미원국만을 논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미원국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또한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또한 자미원국이 어떤 특징적인 발복이 있는지에 대한 언급도 없다.     그러나 자칫 현실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잘못 알려지지는 않을지 염려도 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풍수가 현실에 바탕 둔 논리적 영역이 아닌 마치 신비한 영역처럼 묘사되는 것이 풍수를 이해시키는데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반면에 이러한 자미원국은 풍수를 통한 희망적인 메시지를 제시하였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바람을 표출하는 방편으로 활용하였다고 할 수도 있다. 자미원국, 박정해, 풍수, 정통풍수지리학회…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8-24 조회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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