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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역사를 찾아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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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1-27 11:32 조회 16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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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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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
1. 사신사상(四神思想)과 현무
1.1. 사신사상
사신은 청룡(靑龍, 東), 백호(白虎, 西), 주작(朱雀, 南), 현무(玄武, 北)의 오방신(五方神)을 말한다. 사신사상은 전국시대 말에 발달한 천문오행사상(天文五行思想)에 의해서 체계화되었으며, 사신을 사방에 배치함으로써 우주를 형성시키는 한편, 어떤 특정 공간(예를 들면 건축물이나 무덤 등)을 보호하는 보호신을 구성할 목적으로 만들어져 육조시대에 유행하였다.
사신은 원래 고대 중국에서 사방(四方)의 성좌(星座)를 각각 동물형으로서 나타낸 것이다. 즉, 칠수(七宿, 7개의 별)씩으로 구성된 사방 성좌의 모습이 동물(즉, 사신의 네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 착안하여 각 방위마다 상상속의 동물을 배치한 것이다. 그래서 동방 7수가 배열된 모습은 청룡을, 북방 7수가 배열된 모습은 현무를, 서방 7수가 배열된 모습은 백호를, 그리고 남방 7수가 배열된 모습은 주작을 닮아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천상동물(天上動物)을 오방(五方)에 배치하고 다섯 가지 색(靑, 白, 黃, 黑, 赤)으로써 각 동물의 색을 삼은 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오행사상(五行思想)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행사상은 음양사상과 더불어 전국시대에 발달했던 학설로 제(齊)나라의 추연(鄒衍, 기원전 350~기원전 278년)이 정립했다고 한다. 오행은 자연계를 구성하는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5종류의 쉬지 않는 강한 순환운동을 말하며, 고대 중국에서는 하늘의 주된 성좌도 이 오행으로 이뤄졌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신은 도교의 바탕을 이루는 신선사상(神仙思想)과도 관련이 깊다. 신선사상은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일어났으며, 특히 진시황제와 한무제 때에 크게 부흥하였다. 전국시대, 초나라의 굴원(屈原), 송옥(宋玉) 등이 지었다고 전하는 『초사(楚辭)』 권 5 원유편(遠遊篇)과 권 8 구변편(九辯篇) 등에는 굴원이 신선이 되어서 사신을 거느리고 행렬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후한서(後漢書)』권 28 풍연전(馮衍傳)에는 사신이 신선의 풍류를 즐기는 동물로 표현되고 있다. 한대(漢代)의 동경에는 신선상과 사신도가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사신사상과 신선사상이 혼합된 결과이다. 고구려 통구 4호분과 5호분에도 사신을 타고 가는 신선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처럼 사신은 천문오행사상에서 유래하여 각각 7별씩을 주관하는 사방성좌(四方星座)의 모습이었으나, 방위신이나 사신상응(四神相應)의 산의 형세를 나타내는 뜻으로 혹은 신선의 품격을 지닌 고아한 동물로 그 뜻이 발전하였다. 그 의미의 발전에 따라서 한나라와 육조시대에는 도상으로 널리 유행하였으며, 고구려에서도 이를 무덤의 수호신으로 적극 수용하였다.
1.2. 현무의 형태와 유래
현무(玄武)는 거북이와 뱀이 합친 것이며, 현(玄)은 검은색을 뜻하고 무(武)는 거북의 딱딱한 갑의(甲衣)와 뱀의 날카로운 이를 뜻하여 현무만이 동물명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초사(楚辭)》 원유(遠遊) 보주(補注)에는 다음의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는 현무의 모양과 그 이름을 붙인 까닭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현무는 거북과 뱀이 모인 것을 이른다. 북방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현(玄)이라고 이르고, 몸에 비늘과 두꺼운 껍질이 있으므로 무(武)라고 한다
현무는 또한 북쪽 방위를 맡고 있으면서 수기(水氣)를 맡은 태음신(太陰神)이기도 하다.
현무가 거북과 뱀의 얽혀 있는 형상으로 표현된 까닭은 고대 중국인들이 거북의 종류는 수컷이 없다고 생각하여 머리의 모양이 유사한 뱀으로써 짝을 짓고, 그들이 서로 마주보면 곧 기(氣)가 통하여 잉태하게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거북과 뱀이 얽혀 있는 형태는 비단 고대 중국에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인도의 우주상징도(宇宙象徵圖)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도의 현무도도 뱀이 거북의 몸체를 감고 그 꼬리와 머리가 서로 합치되어 원을 형성하고 있어서 두 나라 현무의 형태는 거의 유사하나, 인도의 현무는 재생과 불멸, 영원과 시간 등을 상징하기 때문에 중국의 것과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현무는 그 모습의 독특함 때문에 다른 동물에 비해 형태가 쉽게 구별되며 그 의미도 또한 중국인의 독특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무에서 가장 중요한 거북에 대한 사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거북은 그 모습이 위는 하늘처럼 둥글고, 아래는 땅처럼 편편하여 우주의 축도와 같고, 수명 또한 매우 길기 때문에, 거북은 용, 기린, 봉황과 함께 예부터 사령(四靈)으로 여겨졌다. 중국에서는 여와씨가 거북의 네다리를 잘라 하늘을 떠받치게 했다는 신화가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거북은 물의 신이나, 용왕으로 상징되며 서수로서 인식되었다. 고구려의 주몽이 도망쳐 남쪽으로 갈 때 다리를 놓아 도운 것이 거북이었고, 『삼국유사』「가락국기」에서 신성한 군주의 출현을 요구하는 백성의 뜻을 신들에게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을 했던 것도 거북이었다.
『물명고』에서는 십귀(十龜)라 하여 열 가지 거북의 종류를 말하고 있는데, 십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신귀(神龜)로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으며 변화가 무상하고, 둘째는 영귀(靈龜)로 산에 있고 울 수 있으며, 셋째는 섭귀(攝龜)로 작고 뱀을 먹으며, 넷째는 보귀(寶龜)로 물 속에 있고, 다섯째는 문귀(文龜)로 갑에 그림과 글이 있고, 여섯째는 서귀(筮龜)로 시총(蓍叢)아래에 있고, 일곱째는 산귀(山龜), 여덟째는 택귀(澤龜), 아홉째는 수귀(水龜), 열 번째는 화귀(火龜)라 했다.
2. 회화로 표현된 사신도와 현무
2.1. 중국의 사신도
2.1.1. 한(漢)시대
사신사상(四神) 사상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기는 전국시대 말부터이나, 그 도상(圖像)은 한대(漢代)에 이르러서 고분벽화나 화상석(畵像石), 석관, 석비, 와전(瓦塼), 동경 등에 나타나고 있다. 즉 한대인들은 사신도상을 고분이나 건축물 등에 사용함으로써 정확한 방위개념과 벽사의 의미를 상징했다고 추측된다.
그려진 연대가 비교적 정확한 가장 최초의 사신도로는 호남성 장사시 마왕퇴 1호분(기원전 168년경)에서 출토된 “T자형 백화(帛畵)”에 그려진 것이 있다. 이 백화는 관을 덮었던 것으로 화면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상부에는 천상계(天上界), 중앙에는 현세계(現世界), 하단에는 지하계(地下界)를 그렸으며 적갈색 바탕에 붉은 안료나 푸른 빛 안료 그리고 흰 색 안료를 칠해 화려한 느낌을 준다. 천상계에는 5마리의 주작과 쌍룡, 쌍호가, 현세계에는 쌍봉황과 쌍호가, 지하계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는데, 이러한 동물들은 양쪽에 대립되어 위치했다. 그러나 이 백화에 그려진 사신들은 윤관선 안에 채색을 칠해 넣은 지극히 간략하게 표현된 상징에 불과하며 공예품의 도안화(圖案畵)적인 성격이 강하다. 즉, 동물이 지니고 있는 부피감이나 깊이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오직 평면적인 동물의 형상이 초보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전한(前漢) 말기로 추정되는 협서성 장안성지 사신와당(四神瓦當)은 비록 석면에 조각된 공예화이긴 하나, 앞에 보이던 상징에 불과한 초보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제대로 동물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단독상으로 표현된 각 동물들은 U자형에 가까운 자세인데 필선과 구도가 매우 유연하며 역동적이다. 이 사신와당은 한대(漢代) 사신도의 전형적인 형태로서, 사천성 여산에서 출토된 왕휘석관(王暉石棺, 212년)의 사신도 역시 그 전형적 모습을 갖추고 있다. 왕휘석관의 청룡과 백호는 간결한 필치와 불필요한 부분이 생략된 단순한 형태로 장안성지의 사신와당에 비해 훨씬 정리된 느낌을 준다. 이들은 길고 가는 몸체를 약간 앞으로 구부리고 등을 들어 올려 거의 S자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으며, 어색하게 놓인 다리 사이에 약간의 공간감과 깊이감이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한대의 사신도는 낙랑, 대방을 거쳐 고구려 사신도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낙랑, 대방 지역은 일찍이 한나라 문화의 영향을 직접 받은 곳으로 이들 지역의 문화는 곧 고구려의 문화형성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낙랑 오야리십호분(五野理十號墳) 출토의 목관 금구(金具)에 새겨진 사신도는 낙랑지방에서 출토된 유일한 사신도이며, 후한 말 사신도의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것은 형태면에서 한대에 그려진 사신도들과 거의 흡사하나 세부의 묘사에 있어서, 보다 장식적이며 배경을 여러 가지 문양으로 처리하여 번잡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것은 청룡과 백호의 얼굴표현이나 거북의 일직선적인 복부(腹部) 처리, 뱀의 모습 등이 고구려 전기의 사신도와 매우 유사하여 고구려 사신도에 낙랑의 사신도가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약수리 고분, 대안리 1호분, 매산리 사신총에 그려진 사신도가 그 대표적 예들이다.
한대(漢代)의 사신도는 전한 말에서 후한초에 걸쳐서 방위에 맞는 사신도 세트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후한대에 이르러서 그 형태가 정립되고 정형화되고 있다. 물론 시간이나 거리상 이러한 후한대의 사신도 양식이 고구려에 직접 들어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오히려 후한대의 사신도 양식이 낙랑․대방 등지를 통하여 고구려에 전해 졌을 가능성은 상정할 수 있다. 어쨌든 이러한 후한대의 사신도 양식이 고구려에 들어와 전기의 사신도 양식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분명한 듯 하다.
2.1,2. 육조시대의 사신도
이 시기에는 한대(漢代)의 사신도 양식이 계속 이어지다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걸쳐서 역동감이 강한 새로운 사신도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하남성 등현 학장묘(남조, 500년경)의 사신도가 있다. 이 그림은 화상석을 조각하고 그 위해 홍색, 황색, 녹색, 자색 등을 칠한 것으로서 한대(漢代)에는 보이지 않던 연화문(蓮花文)이나 구름무늬나 당초문(唐草文) 등이 그려져 있다.
이 중 백호는 바람에 날리는 듯한 약간의 구름무늬를 배경으로 서 있는 자세인데, 하늘로 승천하려는 순간을 포착한 듯 하다. 힘차게 부풀은 S자형의 동체(胴體), 그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가볍게 날리는 구름과 연꽃 등은 역동감 있는 청룡의 모습을 표출해 내고 있다. 이 백호도는 필치가 매우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네 발을 길게 그려 안정감이 있다. 또한 다리의 골절을 표시하여 몸체의 유기적인 연결을 실제감 있게 나타내고자 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점은 이 묘의 주작과 현무에서도 입증이 된다. 주작은 인동당초(忍冬唐草)를 물고 구름 사이로 살포시 내려앉은 모습으로, 날개가 위로 치솟아 역동감에 넘친다. 또한 현무도 거북과 뱀이 이루는 형태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고 뱀의 꼬임도 전대에 비해서 복잡해졌다. 그런데 이 그림들의 구성법은 모두 물체를 양쪽에 배치하고 그 사이에 중요한 소재를 묘사하는 식의 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법은 육조시대 미술의 특색이기도 하다.
이렇게 긴장감에 넘치는 역동적인 모습의 사신도는 북위(北魏)의 미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예로는 북위 원휘묘(元暉墓, 519년)의 사신도나 북위석관각화(北魏石棺刻畵, 6세기 전반) 등이 있다. 이러한 사신도들은 배경을 역동적인 운문으로 가득 채워 요란하고 장식적이며 필선의 세련된 맛이 등현의 사신도에 비해 덜하다. 따라서 그림의 품격도 앞의 것보다 훨씬 떨어진다.
5세기말에서 6세기초에 걸쳐 육조시대의 완성된 새로운 사신도 양식은 고구려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후기의 대표적인 고분인 강서대묘나 사신총의 사신도는 이들 육조시대 사신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특히 당시 빈번했던 북조 국가들과의 교류 상황을 볼 때, 이러한 사실은 더욱 명백해진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단지 중국의 사신도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더 새롭고 역동적인 양식의 사신도를 창출해 내었다.
2.2. 고구려의 사신도와 현무
2.2.1. 고구려 고분벽화의 개괄
고구려의 벽화고분들은 지금까지 80여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분포지역은 평양을 중심으로 강서군(江西郡), 대동군(大同郡), 중화군(中和郡) 등지의 평양지방과 길림성 집안현의 통구지방이다. 이러한 고분들이 거의 대부분 수도를 중심으로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고분들은 대부분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으로 이루어져 고구려에서 가장 초기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적석총(積石塚)과는 다른 형식이며 그 위치나 규모, 벽화 내용으로 보아 당시의 왕족이나 귀족의 묘로 생각된다. 이러한 벽화고분은 낙랑, 요동 등지에 남아 있던 한대(漢代) 벽화고분의 영향을 받아 4세기 경에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고분 벽화는 지역적 특성을 지니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천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변천에 따라 고구려 고분 벽화는 대개 초기(4~5세기), 중기(5~6세기), 후기(6~7세기)로 크게 구분하여 살필 수 있다.
벽화는 큰 벽돌처럼 다듬어진 돌들을 쌓아서 만든 석실의 내부 벽면에 회칠을 한 후에 먹과 채색을 사용하여 그려진 것이 보편적이나, 벽돌 모양의 돌 대신에 넓적한 대형의 판석을 짜 맞춘 벽면에 회를 칠하지 않고 직접 표현한 것들도 있다. 벽화는 묘실의 벽면과 천정에 모두 그리는 것이 상례였는데 대체로 초기와 중기의 경우 벽면에는 무덤의 주인공 초상화 및 주인공과 관계가 깊었던 현실세계의 일들을 기록적, 서사적으로 표현하는 인물풍속이 주를 이루었으나 후기에는 무덤을 지켜 주는 사신(四神)을 그려 넣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천정에는 죽은 묘주의 영혼이 향하게 되는 내세, 즉 천상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일월성신(日月星辰)․신선(神仙)․신수(神獸)․서조(瑞鳥)․영초(靈草)․비운(飛雲) 등을 그려 넣어 하늘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무덤의 내부는 현실을 나타낸 벽면과 내세 혹은 천상의 세계를 표현한 천정이 어우러져 일종의 소우주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안악 3호분의 예에서 확인되듯이 아무리 늦어도 서기 357년부터는 제작되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며 그 이전으로 올라갈 가능성도 매우 높다고 믿어진다. 무덤의 벽면에 벽화를 그려 넣는 이러한 풍조는 고구려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벽화를 그렸던 이유는 아마도 현세에서서의 권세와 부귀영화가 내세에서도 계속된다고 믿었던 계세사상(繼世思想)과 관계가 깊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벽화의 내용이나 주제면에서 그 시대적 변화 양상을 살펴보면, 먼저 초기에는 안악 3호분, 덕흥리 벽화고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초상화가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조금 시대가 흐르면 약수리 벽화고분, 쌍영총이나, 각저총 등의 예들에서 보이듯 부부병좌상(夫婦竝坐像)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초상화와 더불어 초기나 중기의 벽화들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주인공과 관계가 깊은 인물풍속이다. 주인공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경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벽화들은 따라서 서사적, 기록적, 풍속화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 유명한 무용총의 벽화는 이러한 유형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러한 인물풍속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사신(四神)이다. 사신은 천정부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차차 벽면으로 내려오다가 후기에 이르러서는 아예 벽면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초, 중기에 지배적이던 불교의 영향이 감소하고 그 대신 도교가 득세하기 되었던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실제로 연개소문이 전권을 휘두르던 보장왕(재위, 642~668) 때에 국가적 차원에서 도교가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던 것이 분명한데 이러한 시대적 풍조가 벽화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사신도가 벽면 전체에 표현되는 것은 초, 중기의 불교 강세적 경향이 후기의 도교 득세의 풍조로 종교적 측면에서 큰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하게 한다.
어쨌든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주제면에서 ‘인물풍속→인물풍속과 사신→사신’으로 변화했음이 확인된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행렬도나 수렵도가 5세기 이후에는 사라지게 된 점도 괄목할 만하다. 이러한 사신들에 의거하여 보면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주제나 내용면에서 점차 번거로운 것을 피하고 단순화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표현 방법이나 화풍은 초기의 고졸한 것으로부터 점차 세련되고 능숙한 것으로 발전되어 갔으며 이와 함께 힘차고 동적이며 긴장감이 감도는 고구려적인 특성도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채색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더욱 선명하고 화려한 것으로 발전되었다.
이밖에도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총괄하여 보면, 한대(漢代)부터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이르는 중국문화 및 서역문화와의 교류가 엿보이고 아울러 백제, 신라, 가야, 일본에 미친 영향도 확인된다.
2.2.2. 고구려 전기의 사신도와 현무
고구려 전기의 고분벽화에는 사신도가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으며, 간헐적으로 나타나는데, 한대(漢代) 사신도의 형태를 빌어다 그것을 수용했던 단계로 정의내릴 수 있다. 몸체의 비례가 전혀 맞지 않은 점, 동물이 지니고 있는 부피나 깊이감이 고려되지 않은 점, 철묘선법(鐵線描法, 굵기가 균일한 약간 딱딱한 선)으로 그려진 매우 딱딱하고 긴장된 필선 등은 이 시기의 사신도가 아직도 상징적인 동물표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전기 사신도는 대부분 현실(玄室)의 벽면을 기둥을 그려 넣어 나눈 뒤 그 상단에 주로 표현되는데, 기둥 아래에 그려진 주제 그림에 비해 작게 그려져 종속적인 부수물로 취급되었다. 또한 회칠한 벽면 위에 검은 선과 채색을 사용하여 그렸으며, 갈색이 주조색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색이 그다지 선명하지 못하다. 약수리고분, 대안리 1호분, 매산리사신총, 삼실총 등의 고분벽화에 표현된 사신이 이러한 전기 사신도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 고분벽화들 중에서 약수리 고분에 그려진 사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그림에선 북쪽의 현무가 부부병좌상 바로 옆에 그려져 있는 특이한 형식을 이루고 있으나, 나머지 동물들은 모두 단독형태로 표현되었다. 사신은 벽면을 크게 이등분하고 있는 갈색의 기둥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하늘을 상징하는 운문 그리고 별자리 혹은 달과 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기둥 아래의 현실 세계에 대비되는 천상의 세계 혹은 사후의 세계를 상징하는 상징물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약간의 철선묘법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엷은 담채를 표현하여 그렸으나, 동물의 부피감이나 무게감을 전혀 살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필력이 거칠고 조잡한 편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북쪽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는데, 이 현무는 채색이 가해지지 않고 선묘만으로 표현된 거북이를, 선묘에 붉을 채색이 진하게 가해져 표현된 뱀이 휘감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런데 거북이는 등에 갑(甲)이 없어 일반적인 거북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호랑이 비슷한 맹수를 표현한 듯 보인다. 그리고 뱀 역시 짙은 붉은 색 안료로 채색을 가하여 비늘이 표현되어야 할 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으며, 거북을 휘감은 형태에선 후기 고분벽화의 사신도에서 느낄 수 있는 동세(動勢)를 전혀 느낄 수 없다.
2.2.3. 중기의 사신도와 현무
중기는 사신도가 상징적인 표현에 불과했던 단계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동물의 모습을 보이는 단계이다. 동물 몸체의 비례가 어느 정도 들어맞아 구도상 안정감을 보이며, 생기 있고 율동적인 형태, 약간의 비수(肥瘦)가 있는 유연한 필선, 세밀한 세부묘사 등 전대에서보다 진전된 회화 수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벽화 주제에 비해 사신은 여전히 작게 그려져 종속적인 부수물로 취급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회칠한 벽면 위에 그려진 점 등으로 미루어 전대의 화법에서 아직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중기에 속하는 사신도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통구 무용총의 사신도가 있다. 이것은 삼실총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신도가 천정(天井)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고분에서는 구체적으로 현실(玄室, 곧 主室)의 동, 서벽 제 3층 천정 받침에 사신이 표현되어 있다. 무용총 사신도에 사용된 필선은 약수리 사신도에서 사용된 철선묘법에서 벗어나 약간의 비수(肥瘦, 균일한 굵기가 아니라 때로는 굵게 때로는 얇게 윤곽선을 그리는 것)가 섞여 있는 것으로서 생기가 돌고 율동미에 넘친다. 이러한 율동미는 고구려적인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북쪽 벽의 현무를 살펴보면, 그 전체적인 모습 특히 뱀이 현무를 휘감고 있는 모양은 앞서 보았던 약수리 고분 벽화에 그려진 현무와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무용총에 그려진 현무는 거북이처럼 등갑이 표현되어 있고 뱀도 비늘이 조밀하게 표현되어 있는 등 그 이전 현무보다 훨씬 사실적이고 현실감 있게 표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거북이의 얼굴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모호하고, 네 개의 다리는 모두 J자 모양으로 비슷하게 처리하여 회화적인 미숙함이 드러난다.
2.2.4. 고구려 후기의 사신도와 현무
고구려의 사신도 발달 중 가장 정점을 이루는 단계가 바로 고구려 후기이다. 절제되고 조화있는 완벽한 구도, 긴장감에 넘치는 역동적인 형태, 선명한 색채의 배합, 특히 다리 부분에 골절을 그려 넣어 몸체의 유기적인 연결이 실제감 있고 자연스러운 점 등 사신도 표현상 가장 완성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시기의 사신도는 종래에 보이던 생활풍속도를 밀어내고 주실(主室)의 주벽면을 전부 차지할 정도로 벽화의 주요 화제로 등장한다. 또한 사신도는 회칠을 하지 않고 석면 위에 직접 그려졌으며, 안료의 발달로 인해 다양하고 화려한 색감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구름무늬나 인동문(忍冬文), 수문(樹文), 산악 등으로 화면을 장식하고 그 위에 주제를 설정했으며, 이 모든 것이 한쪽 방향을 향하여 유연하게 움직인다. 이러한 양식을 대표하는 고분으로는 강서대묘와 중묘, 집안 사신총, 그리고 진파리 1호분, 집안 4호분․5회분 등이 있다.
이 시기의 현무도는 전대와 달리 단독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형태면에서 볼 때 거북이 목을 뒤로 돌려 뱀을 바라보는 모습과 타원형을 이루며 꼬여진 뱀의 형태 등(뱀머리 모양의 거북머리) 전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이 장에서 후기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회화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강서대묘의 사신도를 통해 고구려 후기 사신도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북쪽벽의 현무는 서쪽을 향해 나아가는 자세로 묘사되어 있다. 뱀은 거북의 몸 뒤편 두 다리 사이를 지나 귀갑을 한 번 휘감은 다음 앞의 두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 거북의 목 앞을 지나면서 반원을 이룬 뒤, 이미 한 번 꼬이면서 원을 이룬 자신의 꼬리 부분을 얽은 후 고개를 뒤로 돌린 거북의 머리 쪽으로 머리를 틀었다. 마주 보는 위치에서 비스듬히 허공을 쳐다보는 자세인 거북과 뱀의 크게 벌린 아가리에서는 불꽃이 뿜어 나온다. 거북이 자아낸 운동감과 뱀이 이루어낸 탄력성이 잘 어우러지면서 현무를 강한 기운을 뿜어내는 존재로 만들고 있으나, 뱀과 거북의 뒤틀림 묘사에서 발생된 부피감 표현의 실패는 환상적 신수(神獸)인 현무의 실재성을 크게 약화시키고 있다.
힘차고 동적인 고구려 미술의 특성이 후기에 이르러 더욱 뚜렷해졌다. 통구 사신총의 현무도를 한가지 예로 보아도 이를 쉽게 깨닫게 된다. 거북이와 뱀이 머리를 서로 마주하고 노려보는 모습, 거북이의 몸을 휘감은 뱀의 몸체가 마구 꼬이고 뒤틀린 모양, 두 동물들의 격렬한 동작에 따라 마구 튀는 듯한 주변의 그림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극도로 힘차고 폭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강서고분의 사신도가, 육조시대, 특히 등현(鄧縣)의 사신도 양식과 형태 표현상 매우 흡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500년을 전후로 해서 발달한 육조의 양식이 6세기 중엽 이후에는 고구려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강서대묘 등 후기 고분벽화의 사신도에 보이는 역동적이며 활달한 모습의 사신은 일찍이 중국에 없었던 고구려인들이 창출해낸 새로운 사신이라 할 만하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안휘준, 『한국 회화사 연구』(시공사, 2001)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사계절, 2000)
권선희, 『고구려 사신도의 연구』(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1984)
『특별기획전 고구려』(특별기획전 고구려 추진위원회편, 2003)
『민족문화대백과 사전』

▒ 참고 도판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 2000, 295~296면(그림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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