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

상기내용을 모두 옳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역사를 찾아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주 제주시 북제주군 추자면 대서리 거리제와 최영장군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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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1-27 12:03 조회 36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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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시 북제주군 추자면 대서리 거리제와 최영장군사당

 
 
 
 
 
 
 
 
 
 
 
 
 
 

제명 : 거리제/장군제
신격 : 사해용왕/祖國都統大將崔將軍神位(조국도통대장최장군신위)
제당 : 마을 주변/최영장군사당
일시 : 음력 섣달 그믐

제주시 북제주군 추자면
대서리 최영장군사당

지역 : 제주시 북제주군 추자면 대서리 155번지 최영장군사당

제명 : 장군제

제신 : 祖國都統大將崔將軍神位

제당 : 최영장군사당

위치 : 최영(崔瑩. 고려 충숙왕 3년 약 1316년 ∼ 우왕 14년 약 1388년)장군 사당은 상추자도에 있는 대서초등학교 북서쪽 벼랑 위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 입구에는 「최영사당금표(崔瑩祠堂禁標)」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의 앞면에는 「신묘금지비(神廟禁地碑)」라 음각되어 있으나 측면의 글자는 많이 마멸되어 있으며 사당 안에는 「조국군통대장최영장군(朝國郡統大將崔瑩將軍)」이라 한 신위가 안치되어 있다.

형태 : 현재의 사당은 1974년에 복원된 건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이고 평면과 전면칸은 퇴칸처럼 좁게 나눈 것이다. 원뿔형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납도리를 돌렸으나 중도리, 종도리는 굴도리이다. 보아지는 곡면으로 장식되고 겹처마에 합각지붕이다. 심벽에다 외부로 돌로 쌓은 벽은 노출된 전면 외진주 밖까지 돌출시켜 기둥을 보호하게 했다. 전면에는 세살문을 달아 개방시켰고 내부 주칸에는 신위가 설치되어 있다. 바닥은 콘크리트 바닥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모로단청이 되어 있다. 사당 밖으로는 자연석으로 높은 담장을 둘렀다.

좌정된 신격 : 사당 내에는 최영장군의 신위와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최영장군사당이 추자도에 세워지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고려 공민왕 23년 탐라에서 제주도에 머물고 있던 몽고인 목자들이 고려 말 대륙의 정세 변화에 따른 불안감으로 횡포를 부리자 정부에서는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케 하였는데 이 때, 장군은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도중 심한 풍랑으로 공민왕 23년 8월 24일부터 28일까지 추자도에서 후풍(候風)하였으며, 목자들을 토벌하고 돌아갈 때에도 같은 해 9월 23일부터 10월 10일 까지 추자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 때에 추자도 금산곶에서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추자도 백성들에게 어망을 만들어서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생활에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으므로 이곳 주민들이 이러한 장군의 은덕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지어 매년 백중일과 음력 12월 그믐에 제사를 지내며 모시게 되었다는 배경과 한편으로 추자도는 고려 말 이래 왜구의 침입을 자주 받아 그 고통이 컸기 때문에, 고려 말 왜구 토벌에 공로가 많았던 장군의 사당을 지어 모심으로써 왜구로부터의 환란을 면해보려는 국토수호신적 의미에서 세워졌으리라는 것이다.

특징 : 대서리(大西里)는 김상헌의 남사록에 신도(身島)라고 기록한 상추자에 동남향으로 앉아 있는 포구마을로 지금도 뒷산에 최영장군의 사당이 자리 잡고 있지만, 조선시대의 기록에 이미 여기에 토당(土堂)이 있어 후풍하던 뱃사람들이 바람 자기를 이 당에 빌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최영장군사당이 장군신으로서의 영웅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최영장군이 아닌 국토수호적인 의미와 마을 주민들의 바다에서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존재로 신격화되어 있다.

제의 소멸과 변천 :추자도에 1950년대부터 교회가 들어서기 시작해서 지금은 매 마을마다 교회가 서 있고, 천주교 공소도 세워져 있으나 아직도 이 섬 사람들의 의식은 다분히 다신적(多神的)이다. 이는 이곳 사람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하고, 딴 지방에 비해 무속의례에 대해서도 관대한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이 섬의 자연이 대단히 험난하고, 죽고 사는 것을 자연(바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을 오랫동안 겪으면서 터득하였을 것이다. 현재 추자 각 마을마다의 유식, 무식 의례는 거의 자취만 남고, 그 중 뚜렷하게 남아 있는 제는 최영장군 사당에서 거의 해마다 드리는 풍어제와 장군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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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에서는 마을단위로 정초에 고기부르기를 한다. 이른 거리제라고도 부른다. 이때 마을 뒷산 절벽에 올라가서 고기를 부르는 소리를 한다.

개괄

음력 섣달 그믐날, 정월 대보름 두 차례 '고기불러온다' 라고 칭하는 바다 갯제를 모시며 이는 풍물과 함께 거릿제, 걸궁이라고 한다. 또한 정월 초하루날 오후 2시 정도에는 마을의 평안과 풍어, 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신밟기'를 하고 있다.

제의내용

음력 섣달 그믐날, 정월 대보름 두 차례 '고기불러온다' 라고 칭하는 바다 갯제를 모시며 이는 풍물과 함께 거릿제, 걸궁이라고 한다. 또한 정월 초하루날 오후 2시 정도에는 마을의 평안과 풍어, 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신밟기'를 하고 있다. 고기부르는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음식은 하지 않고 제주가 올라가서 축문을 읊으며 포수의 음성 주관 하에 제를 지낸다. 그리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 마을굿을 한 다음에 해산한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정월 초 하루날 오후 2시경에 지신밟기를 한다.
음력 2월 1일 - 10일 사이 '최영장군사당제' 를 모시고 있으나 현재는 수협이 주관하는 '풍어제'를 양력 8월 초에 실시한다. 따로 지정은 되어 있지 않으며 어민들이 어장 일이 끝난 비수기 때 시행하고 있음. 그리고 '최영장군제'를 풍어제 전날 2005년도는 양력 7월 말일날 행함.

제당의 형태

위치 : 최영(崔瑩. 고려 충숙왕 3년 약 1316년 ∼ 우왕 14년 약 1388년)장군 사당은 상추자도에 있는 대서초등학교 북서쪽 벼랑 위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 입구에는 「최영사당금표(崔瑩祠堂禁標)」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의 앞면에는 「신묘금지비(神廟禁地碑)」라 음각되어 있으나 측면의 글자는 많이 마멸되어 있으며 사당 안에는 「조국군통대장최영장군(朝國郡統大將崔瑩將軍)」이라 한 신위가 안치되어 있다.
형태 : 현재의 사당은 1974년에 복원된 건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이고 평면과 전면칸은 퇴칸처럼 좁게 나눈 것이다. 원뿔형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납도리를 돌렸으나 중도리, 종도리는 굴도리이다. 보아지는 곡면으로 장식되고 겹처마에 합각지붕이다. 심벽에다 외부로 돌로 쌓은 벽은 노출된 전면 외진주 밖까지 돌출시켜 기둥을 보호하게 했다. 전면에는 세살문을 달아 개방시켰고 내부 주칸에는 신위가 설치되어 있다. 바닥은 콘크리트 바닥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모로단청이 되어 있다. 사당 밖으로는 자연석으로 높은 담장을 둘렀다.
좌정된 신격 : 사당 내에는 최영장군의 신위와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최영장군사당이 추자도에 세워지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고려 공민왕 23년 탐라에서 제주도에 머물고 있던 몽고인 목자들이 고려 말 대륙의 정세 변화에 따른 불안감으로 횡포를 부리자 정부에서는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케 하였는데 이 때, 장군은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도중 심한 풍랑으로 공민왕 23년 8월 24일부터 28일까지 추자도에서 후풍(候風)하였으며, 목자들을 토벌하고 돌아갈 때에도 같은 해 9월 23일부터 10월 10일 까지 추자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 때에 추자도 금산곶에서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추자도 백성들에게 어망을 만들어서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생활에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으므로 이곳 주민들이 이러한 장군의 은덕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지어 매년 백중일과 음력 12월 그믐에 제사를 지내며 모시게 되었다는 배경과 한편으로 추자도는 고려 말 이래 왜구의 침입을 자주 받아 그 고통이 컸기 때문에, 고려 말 왜구 토벌에 공로가 많았던 장군의 사당을 지어 모심으로써 왜구로부터의 환란을 면해보려는 국토수호신적 의미에서 세워졌으리라는 것이다.
특징 : 대서리(大西里)는 김상헌의 남사록에 신도(身島)라고 기록한 상추자에 동남향으로 앉아 있는 포구마을로 지금도 뒷산에 최영장군의 사당이 자리 잡고 있지만, 조선시대의 기록에 이미 여기에 토당(土堂)이 있어 후풍하던 뱃사람들이 바람 자기를 이 당에 빌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최영장군사당이 장군신으로서의 영웅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최영장군이 아닌 국토수호적인 의미와 마을 주민들의 바다에서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존재로 신격화되어 있다.
제의 소멸과 변천 :추자도에 1950년대부터 교회가 들어서기 시작해서 지금은 매 마을마다 교회가 서 있고, 천주교 공소도 세워져 있으나 아직도 이 섬 사람들의 의식은 다분히 다신적(多神的)이다. 이는 이곳 사람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하고, 딴 지방에 비해 무속의례에 대해서도 관대한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이 섬의 자연이 대단히 험난하고, 죽고 사는 것을 자연(바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을 오랫동안 겪으면서 터득하였을 것이다. 현재 추자 각 마을마다의 유식, 무식 의례는 거의 자취만 남고, 그 중 뚜렷하게 남아 있는 제는 최영장군 사당에서 거의 해마다 드리는 풍어제와 장군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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