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

상기내용을 모두 옳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역사를 찾아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북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 일산진마을 성황제와 별신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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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1-27 12:09 조회 27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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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 일산진마을 성황제와 별신굿

 

 

 

 

 

 

 

제명 : 성황제와 별신굿
신격 :
제당 :
일시 : 매해 음력1월 15일, 10월 1일, 3년 1회 별신굿

개괄

동제는 준비과정, 제의과정에 있어 여느 동제와 크게 다른 점이 없으며, 정월과 10월에 지내는 동제도 동일하게 지내고 있었다. 동제를 지내기 며칠 전에 제관을 정하고 금기를 행하며 동제를 지낸 뒤에는 주민들이 모여 음복을 하면서 마을의 제반사항을 의논하고 집단적인 놀이를 행하고 있었다. 특히 정월의 동제는 대보름 밤에 일산진해수욕장의 모래사장에서 열리는 ‘달집태우기’로 이어져 마을 주민들은 물론 일산동과 동구지역 일대 주민의 축제로 거듭나고 있다. 그리고 10월의 동제는 격년으로 별신굿을 겸하고 있어 마을의 커다란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제의내용

일산진마을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과 음력 10월 초하루에동제를 지내고 있다. 이처럼 일산진마을에서 1년에 두 차례 동제를 지내는 유래에 대한 주민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조선 현종 때의 장적에 울산도호부의 동면에 곶포(串浦)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100여년 후인 영조 때의 호적대장에는 곶포가 사라진 것을 통해 현재 일산진마을 북동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던 고늘마을과 관련된 듯하다. 조선 현종 때의 장적에 의하면 일산진에는 47호 그리고 고늘마을에는 56호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고늘마을과 관련한 한가지 전설이 주민들 사이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옛날 큰 태풍으로 고늘마을이 많은 피해를 입게되면서 고늘마을 주민의 대부분이 일산진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늘마을 한 남성의 작은 부인이 큰 부인의 시샘을 피하여 이주하지 않고 홀로 고늘마을에 남아 여생을 마치게 되었고 이후부터 고늘할매를 모시는 동제를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현재 고늘할매를 모시는 제사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결국 두 마을이 하나로 합치면서 2개의 동제를 지내게 된 듯하다는 주민들의 제보가 설득력을 가진다.
어촌계장과 제관이 주관하는 동제는 준비과정, 제의과정에 있어 여느 동제와 크게 다른 점이 없으며, 정월과 10월에 지내는 동제도 동일하게 지내고 있었다. 동제를 지내기 며칠 전에 제관을 정하고 금기를 행하며 동제를 지낸 뒤에는 주민들이 모여 음복을 하면서 마을의 제반사항을 의논하고 집단적인 놀이를 행하고 있었다. 특히 정월의 동제는 대보름 밤에 일산진해수욕장의 모래사장에서 열리는 ‘달집태우기’로 이어져 마을 주민들은 물론 일산동과 동구지역 일대 주민의 축제로 거듭나고 있다. 그리고 10월의 동제는 격년으로 별신굿을 겸하고 있어 마을의 커다란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동제마다 소요되는 경비는 약 40만원 정도인데 주로 어촌계에서 경비를 충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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