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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산 탁씨(光山卓氏)
    광산 탁씨(光山卓氏)

     광산(光山)은 전라남도(全羅南道)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던 곳으로 757년(신라 경덕왕 16) 무주(武州)로 개칭하고 940년(고려 태조23)에 현재의 명칭인 광주(光州)로 개칭하였다. 996년(성종15)에 강등하여 자사(刺使)를 두고, 후에 다시 해양현(海陽縣)으로 강등하여 현령(縣令)을 두었다. 1259년(고종46)에 승격하여 지익주사(知翼州事)를 두었다가 후에 다시 승격하여 광주목(光州牧)으로 하였다. 그 후 여러차례의 변천을 거쳐 1501년(연산군7)에 주(州)가 되고, 1895년(고종32)에 다시 광주군(光州郡)이 되었다가 1935년에 광주군 내의 광주읍(光州邑)이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광주군은 광산군으로 개칭되었다. 탁씨(卓氏)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광산(光山)을 비롯하여 광주(廣州), 남양(南陽), 안산(安山), 양근(楊根), 가평(加平), 용인(龍仁) 등 32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광산 탁씨(光山卓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현존하는 관향(貫鄕)은 광산(光山) 단본(單本)으로 알려져 있다. 광산 탁씨(光山卓氏)의 시조(始組) 탁지엽(卓之葉)은 고려 선종(宣宗)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고 뒤에 태사(太師)에 이르러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으며, 문성(文成)이란 시호(諡號)를 제수(除授)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광산(光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켰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지엽(之葉)의 맏아들 도민(道敏)이 선종(宣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둘째 도집(道集)은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여 크게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인종(仁宗) 때 문과에 급제한 원광(元光)은 대제학(大提學) 도민(道敏)의 아들로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고 선종(宣宗)의 부마(駙馬)가 되어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손자 종성(宗成)은 신종조(神宗朝)에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고 해양군(海陽君)에 추봉되어, 공민왕(恭愍王) 때 내서사인(內書舍人)을 거쳐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른 광무(光茂)와 함께 명성을 날렸다.
     조선조에 와서는 태종(太宗) 때 지신사(知申事),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내고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오른 신(愼)과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른 유진(惟進)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산 탁씨(光山卓氏)는 남한에 총 3,672가구, 15,1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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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씨(鄒氏)
    추씨(鄒氏)

     추씨(鄒氏)는 중국 범양(中國范陽:지금의 경조성 순의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한(漢)나라 헌제(獻帝:후한의 마지막 황제, 재위기간190-219) 때 어양 태수(漁陽太守)를 지낸 추 단(鄒丹)의 후예로 전한다.
     우리 나라 추씨(鄒氏)는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때 비류부장(沸流部長)을 지낸 추발소(鄒勃素)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으며,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의 부하 장수로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에게 사로잡힌 추허조(鄒許組)가 문헌에 전해진다.
     근대에 와서 추씨(鄒氏)는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경북 상주(慶北尙州)에 1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2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48
  • 추秋
    추秋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81
  • 최崔
    최崔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11
  • 파릉 초씨(巴陵楚氏)
    파릉 초씨(巴陵楚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庭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景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온 옛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초씨(楚氏)는 중국(中國) 강릉(江陵)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초씨(楚氏)의 연원(淵源)은 1644년(인조 22) 명(明)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초해창(楚海昌)이 명(明)나라가 망하고 청(淸)나라가 새로 일어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우리나라에 망명(亡命)하여 충의 장군(忠義將軍)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지고 성주(星州)에 정착(定着)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
     그 후 그의 아들 수명(壽命)이 청(淸)나라가 밀파(密波)한 자객(刺客)을 피하여 명(明)자가 붙은 고을을 찾아 함북(咸北) 명천(明川)에 은거(隱居)한 후 자손들이 번창하여 초해창(楚海昌)을 시조(始祖)로 하고 선조(先祖)의 옛 고향인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초씨(楚氏)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의 문헌(文獻)에 성주(星州)·청주(淸州)·강릉(江陵)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동원분파(同源分派)이며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파릉(巴陵) 단본(單本)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른 성씨(姓氏)와는 달리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초씨(楚氏)의 인물(人物)로는 조선(朝鮮) 순조(純祖) 때 효행(孝行)으로 명성을 날려 효자 정문(孝子旌門)이 세워진 중연(重燕)과 용안 현감(龍安縣監)을 지낸 각(珏)이 유명했고, 헌종(憲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병덕(秉悳)은 정평 군수(定平郡守)를 지낸 우섭(禹燮)과 함께 파릉 초씨(楚氏) 가문을 빛냈다.
     이밖에도 효자(孝子)로 칭송을 받았던 원명(原明)과 선(璿)이 유명했으며 통덕랑(通德郞)에 오른 갑( )이 당대에 뛰어났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초씨(巴陵楚氏)는 남한(南韓)에 총 47가구, 2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71
  • 제주 초씨(濟州肖氏)
    제주 초씨(濟州肖氏)

     제주(濟州)는 한반도(韓半島)의 남서 해상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대의 섬(島)으로 명칭은 도이(島夷)·주호(州胡)·탐모라(耽牟羅)·섭라(涉羅)·탁라(탁羅)·탐라(眈羅)·제주(濟州) 등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려왔다.
     신라(新羅)의 속국이었던 탐라국(眈羅國)은 938년(태조 21) 고려의 속국이 되었고, 숙종(肅宗) 때는 군(郡)을 설치하여 직접 다스리다가 1153년(의종 7) 군을 현으로 고쳤으며 1211년(희종 7)에 탐라를 제주라고 개칭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오랫동안 전래되어 온 성주( 星主)·왕자(王子)의 칭호가 폐지되고 실질적인 행정력 속에 포함되어, 1416년 한라산을 경계로 산북(山北)을 제주, 산남(山南)을 양분하여 동쪽에 정의현(旌義縣), 서쪽에 대정현(大靜縣)을 설치하여 통치하다가 1864년(고종 1) 대정·정의 양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전라도 관찰사 관할하에 두었다.
     그 후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1910년(순종 4)에는 정의·대정 양현이 제주군으로 합군되는 동시에 추자면(楸子面)이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분리되어 제주군에 편입되었으며, 한일합방 후인 1915년 도사제(島司制)로 개편, 제주도(濟州道)가 되었고, 1946년 도제(道制) 실시로 전라남도 관할하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현재 2시 2군 6읍 5면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초씨(楚氏)의 연원(淵源)은 원(元)나라에서 투화(投化)했다고「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하고 있으며, 일설(一說)에는 시조(時調)인 초고도(肖古道)가 중국(中國) 한(漢)나라 사람으로 본성(本姓)은 조씨(趙氏)였는데 조자(趙字)의 주(走)를 떼어 버리고 초씨(肖氏)로 개성(改姓)하였다고 한다. 초씨(肖氏)의 본관(本貫)은 제주(濟州)가 단본(單本)이며, 역사상에 나타난 인물(人物)로는 조선조(朝鮮朝)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초성기(肖星起) 한 사람이다. 현재 초씨(肖氏)는 제주도 좌면(濟州道左面)에 몇 가구(家口)가 살고 있는 것으로만 전하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주 초씨(濟州肖氏)는 남한(南韓)에 총 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04
  • 천씨(天氏)





    천씨(天氏)

     천씨(千氏)의 연원(淵源)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 연안(延安) 지방에 한 기아(棄兒)가 있어 사람이 거두어 길렀는데, 그의 성(姓)을 알  수가 없으므로 만물지조(萬物之祖)인 천(千)으로써 성(姓)을 삼았다고 하며,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연안(延安)과 우봉(牛峯) 두 본이다.

     역사상에 나타난 인물(人物)로는 1780년(정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천명익(千命翊)이 「사마방목(司馬榜目)」에 기록되어 있으며, 근세에는 193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황해도 봉산(黃海道鳳山)과 서흥(瑞興) 지방에  14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경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97가구, 1,3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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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千
    천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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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씨(采氏)
    채씨(采氏)

     우리나라 채씨(蔡氏)는 여산(礪山) 단본(單本)이며, 선계(先系)와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광주(光州)에 1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55가구, 27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92
  • 채씨(菜氏)
    채씨(菜氏)

     채씨(蔡氏)는 옛 문헌(文獻)에 나타나 있지 않은 성씨(姓氏)로서 성원(姓源)과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자료가 없어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한다.
     우리나라 채씨(蔡氏)의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단본(單本)으로 알려졌으며, 1930연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경남 통영(慶南統營)에 1가구(家口)가 살고 있었고, 1960년도에는 전국에 50여 명이 분포되어 있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채씨(蔡氏)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京畿道)와 인천(仁川) 지방에 2,108명이 세거(世居)하며, 남한(南韓) 전역에는 총 1,159가구, 5,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47
  • 채蔡
    채蔡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82
  • 창씨(昌氏)
    창씨(昌氏)

     창씨(昌氏)는 중국(中國) 여남(汝南 : 지금의 하남성 여양도에 있는 현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서 황제(皇帝)의 아들 창혜(昌蕙)의 후예(後裔)로 남북조(南北朝) 때 자사(刺史)를 지낸 창 의(昌 義)와 양오강인(陽烏江人)으로 당(唐)나라 중종(中宗 : 제4대 왕, 재위기간 : 684 ∼709) 때 낙양령(洛陽令)을 지낸 창 의(昌儀)가 대표적인 인맥(人脈)이다.
     우리나라 창씨(昌氏)의 본관(本貫)은 공주(公州)·아산(牙山)·여산(礖山)·장성(長城)·강릉(江陵) 등 5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나타나 있으나 시조(始祖)와 선계(先系)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창씨(昌氏)는 전북 전주(全北全州)를 비롯한 진안(鎭安)·익산(益山) 등지에 50여 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184가구, 7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47
  • 창씨(倉氏)
    창씨(倉氏)

     창씨(倉氏)는 중국(中國) 태원(太原)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주(周)나라 양왕(襄王) 때 사람인 창갈양(倉葛陽)의 후손으로 전(傳)한다. 우리나라 창씨(倉氏)의 본관(本貫)은 아산(牙山)·여산(礖山)·장성(長城) 등 3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선계(先系)와 소목(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창씨(倉氏)는 경기도(京畿道)를 비롯하여 전국에 15가구가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63가구, 25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77
  • 연안 차씨(延安車氏)
    연안 차씨(延安車氏)

     연안(延安)은 황해도(黃海道)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동음홀(冬音忽) 또는 고염성(고鹽城)이라 부르다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해고군(海皐郡), 고려(高麗)에서는 염주(염州)·영웅현(永鷹縣)·복주(復州)·석주(碩州)·온주(溫州) 등으로 고쳐 불렀고, 충선왕(忠宣王:제26대 왕, 재위기간 : 1309 ∼1314) 때 연안부(延安部)로 고쳤다.
     1895년 군(郡)이 되었으며, 1914년 백천군(白川郡)과 합하여 연배군(延白郡)이 되었다. 연안(延安)을  단본(單本)으로 하는 차씨(車氏)는 고대(古代) 중국(中國)의 명군(名君)인 황제(黃帝: 姓은 姬, 諱는 軒轅)의 후예이다.
     우리나라 차씨(車氏)의 연원(淵源)은 황제의 후손 사신갑(似辛甲)이 중국에서 고대조선(古代朝鮮)으로 망명하여 평양(平壤)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정착하여 살며 왕조명(王祖明)으로 변성명하였고, 그 후손 왕 몽(王 蒙)이 정치적 화(禍)를 피하기 위하여 전(田)·신(申) 등으로 개성(改姓)하였다가 후에 차무일(車無一)로 변성명하여 차씨(車氏)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신라(新羅) 초기에 승상(承相)을 지냈던 차무일(車無一)의 아들 8형제중 일곱째 차신을(車神乙 : 본명 주림)이 차씨(車氏)의 성(姓)을 계승하여, 후손대에서 25명의 승상(承相)이 배출되어 명문대가(名門大家)의 기틀을 다졌으며, 차무일(車無一)의 32세손 차건신(車建申)의 아들 차승색(車承穡)은 신라 애장왕(哀莊王 : 제40대왕, 재위기간 : 800∼809)의 서삼촌(庶三寸) 김언승(金彦昇 : 헌덕왕)이 난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아들 공숙(恭叔)과 함께 전왕(前王)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헌덕왕(憲德王)을 암살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자, 황해도 유주(黃海道儒州 : 현 신천군 문화면)로 달아나 숨어 살며 조모(祖母 : 조부는 승상 儉夫)의 성(姓)인  양씨(楊氏)를 모방하여 류씨(柳氏)로 변정하고 자기 이름을 류 환(柳 桓)으로, 아들 공숙(恭叔)은 류 숙(柳 淑)으로 개명하였고, 그의 6세원 류차달(柳車達)의 아들 대(代)에서 류씨(柳氏)와 차씨(車氏)로 갈라졌다.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 : 본명은 柳海)은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남정(南征)하여 후백제(後百濟)를 칠 때 부호로서 그가 수레 천 대를 만들고 창고에 있던 양곡을 실어 군량미로 보급하여 줌으로서 왕건이 후삼국(後三國) 통일(統一)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하여 태조(太祖) 왕건이 그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며 벽상2등공신(壁上二等功臣)으로 대승(大承)에 봉착하고 이름도 차달(車達)로 하사(下賜)하였다.
     그 후 대승공 차달의 아들 형제 중 장남 효전(孝全)에게는 <차씨(車氏)의 홍렬은 잊을 수 없다>하며 상조(上祖)의 본성(本姓)인 차씨(車氏)의 성(姓)을 잇게 하고 식읍(食邑)을 하사하면서 대광백(大匡伯) 연안군(延安君)에 봉했으며, 차남 효금(孝金)은 소윤(少尹)의 벼슬과 문화군(文化君)에 봉하여 류씨(柳氏)의 성을 계전하도록 하였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직사관(直史館) 거수(擧首)의 아들 약송(若松)이 고려 신종(神宗) 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내고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으며, 병마사(兵馬使) 덕위(德威)의 아들 척(倜)이 고종(高宗) 때 어사대부(御史大夫)와 참지정사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원부(院  : 지방어사 종로의 아들)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목은(牧隱)이 색(李  穡), 포은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당대에 명유(名儒)로 일컬어졌으며, 고려 말에 정국이 혼란해지자 평산(平山)의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隱居)하였다. 「운암실기(雲巖實記)」에 의하면 원부가 은거하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찾아와 그의 혁명 계략을 상의하였다.
     이에 원부는 부당하다고 극구 만류했으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여 정권을 잡은 다음 조 준(趙 浚) 등을 차례로 보내어 벼슬과 녹권(錄券)을 하사(下賜)하면서 정치에 참여할 것을 수차례 원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거절했다가 정도전(鄭道傳)·하 윤(河 崙) 등이 보낸 병력(兵力)에 의하여 추살(椎殺)되고 내외 당족 80여 명이 함께 참살당했다.
     한편 원부(原 )의 조카 운혁(云革)은 경성(鏡城)에 살다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정휴명(鄭休明)·박성장(朴成章)·조 두(曺  ) 등과 더불어 이시애 납치 작전을 수행하다가 적에게 잡혀 단천(端川)에서 살해당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되고 「삼강행실록」에 기록되었으며, 교수(敎授) 광운(廣運)의 아들 식(軾)은 중종(中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평해 군수(平海郡守)를 역임했고, 경사(經史)와 학문이 뛰어났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천로(天輅 : 식의 아들)는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개성 교수(開城敎授)를 지내고 정자(正字)가 되어 고향 사람인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 주어 장원급제를 시킨 일로 명천(明川)에 유비되었으나 문재(文才)가있어 풀려 나와 명(明) 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하여 <동방문사(東方文士)>로 일컬어졌다. 선조(宣祖) 때의 일이었다.명나라에서 중국 강남(江南)의 쟁쟁한 문사인 주지번(朱之蕃)을 사신으로 보내왔을 때 조정에서는 이정귀(李廷龜)를 반접사(伴接使)로 하고 이안눌(李安訥)을 연위사(延慰使)로 하여 대접케 하였다. 그런데 주지번이 평양(平壤)에 이르던 저녁에 기도회고(箕都懷古) 오율(五律) 백운(百韻)을 내어서 빈막(貧幕)에 보내고 다음날 새벽까지 지어 보내라고 하였다. 이정귀가 몸이 달아 사람들을 모아 그 대책을 물으니 모두가 밤이 짧아 한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니 운을 나누어 지어서 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정귀는 "사람마다 명의(命意)가 같지 않으니 한 사람에게 위촉함만 같지 못하다. 이는 차천로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천로는 "술 한 동이와 큰 병풍 하나에다 한석봉(韓石蜂)의 글씨를 얻지 못한다면 될 수 없다."고 하자 이정귀는 곧 갖추어 주었다. 천로가 큰 병풍을 대청(大聽) 위에 두르고 술 수십 사발을 마신 뒤에 병풍 안에 들어가 앉고, 한석봉은 병풍 밖에서 화전지(花箋紙)를 펴놓고 붓과 먹을 갖추어 대기하였다.
     천로는 병풍 안에서 철서진(鐵書鎭 : 책장 또는 종이 쪽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누르는 물건)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시상(詩想)을 고르다가 높은 소리로 "한석봉아 나의 일귀(逸句) 준어(駿語)를 받아 쓸지어다."하며 글귀를 부르자 한석봉의 속필로서도 받아 쓰기가 바빴다.
     밤이 깊지 않아서 벌써 오언백율(五言百律)이 이루어지자 천로는 크게 한 소리를 외치고 취도
    하였다. 특히 천로는 뛰어난 문장력과 활달한 성품을 갖추어 당대 제일의 문사(文士)로서 한석봉의 글씨, 최 입(崔  )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컬어졌으며, 가사(歌辭)와 글씨에 뛰어났다.천로의 아우 운로(雲輅)는 1583년(선조 16) 알성문과에 장원하여 전의 현감(全義縣監)과 봉상시 판관(奉常侍判官)을 거쳐 교리(敎理)를 지냈고,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문장(文章)이 탁월하여 형 천로(天輅)와 더불어 당대의 명사(名士)였던 마상원(馬尙遠)과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로 불리웠다.
     천로(天輅)의 아들 전곤(轉坤 : 군수를 지냄)과 서곤(瑞坤)도 모두 시서화(詩書畵)로 이름났으며, 소근의 5세손 좌일(佐一)이 명문장가(名文章家)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좌일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노고산(老故山) 밑에서 그를 잉태할 때 꿈에 당(唐)나라 하지장(賀知章 : 당나라 산음 사람으로 문사와 초예에 뛰어났음)을 보고 낳았다고 하여 호(號)를 사명자(四名子)라 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따를 사람이 없었고, 정성하면서 경사(經史)와 시화(詩畵)에 정통하여 당시의 문장가로  손꼽았던 홍양호(洪良浩)·윤행임(尹行恁)·윤사국(尹師國)·정약용(丁若鏞) 등이 자리를 비워 좌일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는 학문이 우수하나 벼슬이 높지 못해 항상 세상을 불평하며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울분을 술과 시(詩)로 달랬다. 어떤 사람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충고하자, 그는 시로서 답하기를 <내 살아서는 취향백이 되고, 죽어서는 수문랑이 되리라.(生爲취鄕伯 死作修文郞)>라고 했다.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최 북(崔 北)·천수경(千壽慶)·장 혼(張 混)·왕 태(王 太) 등과 더불어 성(城) 서쪽에다 시사(詩社)를 지어 <송석원(松石圓)>이라 이름하고 시문(詩文)으로 여생을 보내며,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노라>고 외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아우 예량(禮亮)과 함께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충량(忠亮)이 화의(和議)가 성립됨을 통탄하여청태종(淸太宗)을 죽이고 원수를 갚겠다고 최효일(崔孝一)을 중국에 보내고 아우 예량을 심양(瀋陽)에 보내는 계획을 하다가 거사 전에 탄로나서 남별궁(南別宮) 밖에서 살해당했다.
     그의 아우 예량(禮良)은 형이 죽자 청나라 태종을 암살하겠다고 만주땅을 누볐던 사명척화
    (事明斥和)의 골수분자였는데 전답을 팔고 가산을 털어 큰 배를 만들어 심양에 갔다가 정보를 입수한 청태종의 계략에 말려 거사전에 참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차씨와 최씨의 가족 수십명이 의주(義州)에 연행되어 참형을 당했고, 선천(宣川)에 살고 있던 예량의 종제(從弟) 원철(元轍)도 연좌되어 잡혀갔다.
     그런데 당시 조선 형관(刑官)들은 이 음모가 조선을 괴롭혔던 청국 황제를 암살하려는 음모였기에 가급적 죄인들을 두둔하고 사건을 축소하려고 노력하였기에 청인(청人) 형관들이 둘러앉은 재판정에 차원철(車元轍)이 들어서자, 조선의  형관이 "아니 원씨(元氏)가 무슨 죄로 잡혀들었는가?" 하며 차씨라는 성(姓)을 빼고 두자 성명인 원 철(元轍)로 조작해서 석방시킬 내심이었다.
     이에 원철은 "나의 성은 원씨가 아니라 엄연한 차씨이다. 나라를 위해 두 번도 아닌 단 한번 죽는데 성을 속여가며 살고 싶지 않다."하고는 참형을 당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항일단체인 <포우단(砲牛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도선(道善)과 <대동공보(大同共報)>를 창간하여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을 앙양하고 애국지사의 독립투쟁을 배후에서 후원했던 석보(錫甫)가 유명했으며, 희식(喜植)은 화성군 쌍봉산(華城郡雙峰山) 만세시위의 총지휘자로 일본 경찰을 살해하여 서대문 형무소에서 9년 2개월간이나 복역했고, 이석(利錫)은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한 후 임시정부 비서장(秘書長)을 역임하여 충절(忠節)의 전통가문인 연안 차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안 차씨(延安車氏)는 남한(南韓)에 총 37,092가구, 154,6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51
  • 진씨(眞氏)
    진씨(眞氏)

     진씨(眞氏)는 중국(中國) 상곡(上谷)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우리 나라에서는 백제 8대 성의 하나로 알려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때 내두좌평(內頭佐平)을 지낸 진 가(眞 可)라는 사람과 동성왕(東城王) 때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오른 진 로(眞 老), 삼근왕(三斤王) 때의 좌평(佐平) 진 남(眞 男), 아신왕(阿莘王) 때의 병관좌평(兵官佐平) 진 무(眞 武),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조정좌평(朝廷佐平)을 역임한 진 정(眞 淨)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新羅) 때도 진 공(眞 功)이 신문왕(神文王) 때 대아찬(大阿 )을 지냈고, 진 복(眞 福)은 상대등(上大等)을 지냈다고 한다.
     고려(高麗) 때 와서는 925년(태조 8) 견훤(甄萱)이 진 호(眞 號)를 고려에 볼모로 보낸 사실이 문헌(文獻)에 나타나 있다. 진씨(眞氏)의 본관(本貫)은 서산(西山) 단본(單本)이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92가구, 1,5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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