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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원 진씨(南原晋氏)





    남원 진씨(南原晋氏)

     남원(南原)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고룡군(古龍郡)인데 후에 대방군(帶方郡)으로 고쳤고,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 때 소경(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남원소경(南原小京)으로 개칭하였다.
     고려(高麗) 태조조(太祖朝)에 남원부로 삼았다가 다시 대방군으로 하였으며, 후에 남원군으로 고치고 1360년(공민왕 9) 부(府)로 승격, 1739년(영조 15)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고 다시 부로  복구, 1895년(고종 32) 남원군이 되었다.
     진씨(晋氏)는 중국(中國) 괵군( 郡 : 지금의 하남성 하락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당(唐)나라 희종(僖宗) 때 사람인 진휘자(晋暉者)의 후손으로 전한다. 우리나라 진씨는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한 진함조(晋含祚)를 시조로 하는데 그는 역학(易學)과 술수(術數)에 정통하여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도참설(圖讖設)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그 후 고려 고종조(高宗朝)에 와서 후손(後孫) 석(錫)이 거란군의 침입을 토평하는데 공(功)을 세워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고 남원(南原)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곳에서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면서 남원(南原)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진씨(晋氏)의 본관(本貫)은 남원(南原)을 비롯하여 13본(本)이 전(傳)하고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남원(南原) 단본(單本)으로 알려진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 말에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를 지낸 우란(于蘭)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버리고 두류산(頭流山)에 은거(隱居)하여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선조(宣祖) 때 좌승지(左承旨)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한 벽(壁)은 여러 곳에서 왜군(倭軍)을 맞아 싸워서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운 후 금산(錦山) 전투에서 순절(殉節)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한편 인조(仁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종립(宗立)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김준용(金俊龍)의 휘하에서 수원 광교(水原廣橋) 전투에 참전하여 적장(敵將)을 사살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창복(昌復)은 박사(博士)를 지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 진씨(南原晋氏)는 남한(南韓)에 총 1,849가구, 7,8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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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陳
    진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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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산·봉주 지씨(鳳山·鳳州智氏)
    봉산·봉주 지씨(鳳山·鳳州智氏)

     봉산은 황해도 중앙 북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때 휴암군 또는 조파의·휴류성 등으로 불리우다가 통일신라 때 서암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봉주(鳳州)로 개칭하여 방서사를 두었으나 현종 때 폐하고 황주(黃州)에 속하게 하였다. 그 후 충렬왕 때 봉양군으로 고쳐 지사를 두었다가 후에 다시 봉주로 개칭하였으며, 조선조에 와서 태종이 봉산군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봉산 지씨의 시조 지채문(智蔡文)은 고려 때의 명장인데,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히 상고할 수 없다.
     그는 1010년(고려 현종 원년) 거란군이 내침했을 때 많은 전공을 세웠고, 또 왕의 피난길을 호종하여 신변의 위기를 막아 난이 평정된 후 공으로 토지를 하사받고 무관으로서 우상시(右常侍)를 겸직했다.
     후에 상장군(上將軍)·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덕종이 즉위하자 일등공신에 추록되었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봉산(鳳山 : 봉주의 별호)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에는 지씨의 본관을 13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봉주 단본으로 전한다. 시조 채문의 증손 녹연(祿延)은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음보로 벼슬에 올라 동북면 병마판관(兵馬判官)을 지냈고 1104년(숙종 9)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전중사어사(殿中寺御史)가 되었으며, 예종 때 내시지후를 거쳐 경상도 안무사(按撫事)·동북면 병마사(兵馬使) 등을 역임한 후 1125년(인조 3) 동지중추밀원사(同知中樞密院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득남(得男)은 선천 부사(宣川府使) 기 현의 별장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능한산성에 들어간 뒤 전세록·김여간·계숭로·임여택 등과 함께 선천의 월봉에서 천 여명의 의병을 모아 적을 대파하였으므로 이름이 후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봉산·봉주 지씨는 남한에 총 1,158가구, 4,9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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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池
    지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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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준씨(俊氏)





    준씨(俊氏)

     준씨의 본관은 청주(淸州)가 단본이며, 역사에 나타난 두드러진 인물로는 936년(태조 19) 왕 건이 후백제의 신검과 이천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일 때 우익장(右翼將)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던 준 량(俊 良) 장군과 대상(大相)을 지낸 준 홍(俊 弘), 신종 때 장군이 준존비(俊存庇)등이 대표적이다.
     1930년도 국제조사 당시 준씨는 충남 서천군 종천면 석촌리에 1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38가구, 1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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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周
    주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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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좌씨(淸州左氏)
    청주 좌씨(淸州左氏)

     청주는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하는 도청 소재지로서, 원래는 마한의 땅이었는데 백제가 상당현(上黨縣)이라 하였고, 일명 낭비성 또는 낭자곡으로 불리우다가  685년(통일신라 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 때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고려 태조조에 청주로 고치고 그 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한 후 1895년(고종 32) 청주군이 되었으며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시가 되었다.
     좌씨는 중국 노나라 때의 태사 좌구명(左丘明)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유명한「春秋左氏傳」을 주석한 대학자이자 유학자로 후배인 공자도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청주 좌씨는 원나라때 중국 변경( 京)에 살다가 고려 말 탐라 목마장의 감목관(監牧官)으로 건너와 정착하게 된 좌형소(左亨蘇)를 시조로 한다.
     제주도가 발상지인 좌씨는 형소(亨蘇)가 죽음에 이르러 "사람은 그 뿌리를 잊어서는 안된다." 하며 대대로 살아오던 중국 산동성 청주(淸州)를 본관으로 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후손들이 청주를 관향으로 삼았으나, 1922년 조선 호적령에 따라 청주라는 지명이 한국에 없어 음이 이같은 청주(淸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 후 후손들은 제주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며, 고려 때의 명의 자이(自以)는 고려 왕후의 중병을 완쾌시켜 이에 탄복한 왕으로부터 그가 살던 한동리(漢東里) 일대의 토지를 하사 받았는데 지금도 그 곳은 <좌가장(左哥場)>으로 불리운다.
     후손 시우(時祐)는 한말의 철종(哲宗)과 고종대(高宗代)에 걸쳐 유학으로 학명을 떨쳤으며, 향교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훌륭한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 좌씨는 남한에 총 455가구, 1,7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38
  • 종씨(鍾氏)
    종씨(鍾氏)

     종씨는 중국 영천(潁川 : 지금의 안휘성 고양현의 진나라 때 명칭)에서 계출된 성씨로 송나라 환공의 아들이 종(鍾) 땅에 봉해져서 식읍으로 하사받은 고을 이름을 성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
     우리나라 종씨의 연원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없어 상고할 수 없으나 전해지는 본관은 하음(河陰 : 강화 속현)과 풍덕(豊德)·통진(通津)·천안(天安)을 비롯한 영암(靈岩)·두원(荳原 : 흥양 속현)·정의(旌義)등이 있는 것으로「조선씨족통보」에 기록되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종씨(鍾氏)는 남한에 총 157가구, 62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94
  • 종씨(宗氏)
    종씨(宗氏)

     종씨는 중국 경조(京兆)에서 계출된 성씨이며, 주나라 대부 종 백의 후예로 전한다.
     신라 문무왕 때 아찬으로서 대야성의 도독이었던 종 정(宗 貞)과 918 년(고려 태조 원년)에 대장군(大將軍)으로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했던 종 희(宗  熙) 등의 이름이「고려사」에서 보이나, 오늘날의 종씨와의 관련에 대해서는 상고하기 어렵다.
     문헌에 전해지는 본관은 임진(臨津)을 비롯하여 통진(通津)·모압(毛押 : 괴산 지방)·니파(泥波 : 만경지방)·인의(仁義  : 태인지방)·황원(黃原 : 해남 지방)등이 있으며, 1930년 국세조사 때 황해도 서흥과 곡산(谷山) 등지에 3가구가 살고 있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종씨(宗氏)는 남한에 총 26가구, 13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37
  • 조趙
    조趙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68
  • 조曺
    조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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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양 제갈씨(南陽諸葛氏)
    남양 제갈씨(南陽諸葛氏)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과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의 당성군(唐城郡)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다가 고려(高麗) 초에 다시 당성군으로 고쳤고, 1018 년(현종 9) 수주(水州 : 수원)와 인주(仁州 : 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南陽府)가 되었다.
     조선조(朝鮮朝) 말기에 남양군이 되어 인천부(仁川府) 관할이 되었다가 1913년 군을 폐하고 그 땅을 나누어 영흥면·대부면은 부평군(富平郡)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水原郡)에 합하였다.
     그 후 수원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었으며, 후에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華城郡)으로 수원읍은 수원시(水原市)로 승격되었다.
     제갈씨(諸葛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남양제갈씨세보(南陽諸葛氏世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제갈 규(諸葛 珪)는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유명한 제갈 량(諸葛亮 : 제갈공명)의 아버지라 한다. 우리나라 제갈씨는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때 제갈 규(諸葛 珪)의 20대 손으로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우리나라에 건너온 것이 시조가 된다. 고려(高麗) 고종대(高宗代)에 와서 후손(後孫) 제갈 홍(諸葛 泓)·제갈 형(諸葛 瀅) 두 형제가 복성(復姓)을 서로 한 자씩 나누어 쓰기로 하여 형 홍(泓)은 제씨(諸氏)로, 아우 형(瀅)은 갈씨(葛氏)로 분종(分宗)하였다가, 구한말(舊韓末)에 이르러 성씨 환원운동(姓氏還元運動)이 일어나자 일부가 제갈씨(諸葛氏)로 복성(復姓) 했다고 한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은(殷)이 고려에서 시랑(侍郞)을 지냈고, 훤(萱)이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했으며, 의병장(義兵將) 제갈 윤신(諸渴允信)은 한말(韓末)에 연기우(延基羽)의 부장(副將)이 되어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철원(鐵原)·평강(平康) 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과 접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戰死)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양 제갈씨(南陽諸葛氏)는 남한(南韓)에 총 830가구, 3,4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68
  • 칠원 제씨(漆原諸氏)
    칠원 제씨(漆原諸氏)

     칠원(漆原)은 경상남도(慶尙南道) 함안군(咸安郡)에 위치했던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 칠토현(漆吐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칠제(漆 )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 : 지금의 창원)에 예속시켰으며, 고려 초에 칠원(漆原)으로 고쳤고 1018 년(헌종 9) 김해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선조(宣祖) 때 창원(昌原)에 속하였다가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후에 함안군(咸安郡)에 병합되었다.
    「칠원제씨세보(漆原諸氏世譜)」에 의하면 칠원 제씨(漆原諸氏)의 원조(遠祖)는 제갈영(諸葛孀)으로 34세손 제갈 홍(諸葛泓)과 제갈 영형제 대(代) 에서 복성(復 )을 각각 한 자씩 나누어 쓰기로 하여 형(兄)인 홍(泓)은 제씨(諸氏)로 낭야군에 봉해졌으며, 아우인 영은 갈씨(葛氏)로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져 제씨(諸氏)와 갈씨(葛氏)로 분종(分宗)되었다.
     그 후 낭야군 홍(泓)의 9세손 제문유(諸文儒)가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토번(吐蕃)으로 유배될 때 호종(扈從)한 공(功)으로 벽상일등공신(壁上一等功臣)에 책록되어 평장사(平章事)에 올랐고 구산부원군(龜山府院君)에 봉(封)해 졌으므로 본관(本貫)을 칠원(漆原)으로 하여 세계(世溪)를 이어 오면서 가문(家門)의 번성을 누렸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말(沫)이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공(戰功)을 세워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었으며 정조(正祖)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낙(洛)은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倭敵)을 배둔역(背屯譯)에서 대파한 공(功)으로 참봉(參奉)을 지냈고 한성부 서윤(漢城付庶尹)에 추증되어 이름을 날렸다.
     그 외 선략장군(宣략將軍)에 오른 여원(汝元)은 인조(仁祖) 때의 학자(學者) 경창(慶昌), 호조 참의(戶曹參議) 달룡(達龍), 감찰(監察) 정로(廷魯), 방어사(防禦使) 경욱(景彧) 등과 함께 훌륭한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칠원 제씨(漆原諸氏)는 남한(南韓)에 총 3,927가구, 16,4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619
  • 하남 정씨(河南程氏)
    하남(河南)은 중국(中國) 화북지구(華北地區) 남부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북쪽은 하북(河北), 북동쪽은 산동(山東), 동쪽은 안휘(安徽), 남서쪽은 호북(湖北), 서쪽은 섬서(陝西), 북쪽은 산서(山西)의 각 성(省)과 접한다. 황하 중류 이남을 차지하며 북·서·남부는 산지로 쌓이고, 동방 평야에는 북에 황하, 남에 회하(淮河)가 흘러 수륙 교통이 편리하고 옛부터 한(漢) 민족의 활동 중심지였기 때문에 중원(中原)이라고도 한다.
     정씨(程氏)의 선계(先系)는 원래 중국(中國) 황제(皇帝)의 후손(後孫) 백부(伯符)에서 시작되며, 그의 45세손 원담(元潭)이 신안 정씨(新安程氏)로 분적(分籍)하였고, 원담의 31세손 우(羽 )는 하남 정씨(河南程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우(羽)의 18세손 사조(思祖)는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입국(入國)할 때 공한림(孔翰林)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고려 충정왕조(忠定王朝)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지냈고, 공민왕(恭愍王) 때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으며, 식읍(食邑)을 하사(下賜) 받았으므로 후손들은 사조(思祖)를 동래조(東來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조 헌(趙 憲)의 제자인 억강(億綱)이 당대에 뛰어났다. 그는 학문(學問)과 기절(氣節)이 뛰어난 선비로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충주(忠州) 달천(達川)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어 훌륭한 가문을 빛냈다.
     춘한(春漢)은 선조(宣祖) 때 문과에 급제하여 풍천 현감(豊川縣監)을 거쳐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올랐으며, 이복(履福)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또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연성(連城)과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낸 진발(振發)과 진록(振錄)·부쾌(敷快) 등이 당대에 뛰어나 이름을 떨쳤으며, 대홍(大泓)·계홍(桂泓)·처근 (處根) 등은 다같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여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낸 병우(炳宇)와 함께 하남 정씨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하남 정씨(河南程氏)는 남한(南韓)에 총 1,906가구, 8,0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08
  • 정丁
    정丁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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