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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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鄭
    정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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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점씨(占氏)
    점씨(占氏)

     점씨(占氏)의 본관(本貫)은 한산(韓山)과 괴산(槐山) 두 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를 살펴보면 중국(中國) 진유(陳留)에서 계출(系出)한 1본이 있고, 다른 1본인 괴산 점씨(槐山占氏)는 일본인(日本人) 투화인(投化人)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상고(詳考)할 자료 부족으로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다. 점씨(占氏)는 주로 김제(金堤),옥구(沃溝), 익산(益山) 등지에 산거(散居)해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연구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40가구, 1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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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錢
    전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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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田
    전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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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全
    전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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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씨(莊氏)

    장씨(莊氏)

       장씨(莊氏)는 중국 천수에서 계출된 성시로 초나라 장왕(莊王)의 후예로 전해지며, 본관은 금천(衿川)과 장연(長連) 두 본이다.
      금천 장씨(衿川莊氏)의 시조 장 숙(莊 淑)은 조선 세종 때 문과에 그베하여 토산 현감(兎山縣監)을 지냈으며, 근세에 와서는 고종 때 석황(錫滉)이 문과에 올랐다는 기록이 전한다.
      근대에 와서 장시는 주로 황해도 송화(黃海道松禾) 지방과 안악(安岳), 장연(長淵)을 비롯한 재령(載寧), 대동(大同), 진남(鎭南) 등지와 전국에 100여 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씨는 남한에 총 77가구, 3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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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창 장씨(居昌 章氏)

    거창 장씨(居昌 章氏)

     거창(居昌)은 경상남도 북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거열군(居烈郡)인데 통일신라때 경덕왕(景德王)이 거창으로 고쳤고, 1018 년(현종 9) 합주(陜州:합천)에 속하였다가 조선 태종 때 거제현(巨濟縣)과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이 되었다.
     후에 다시 거창이 되어 성종 때 군(郡)이 되었다가 중종때 현으로 강등, 1659년(효종 9) 안음(安陰)에 편입시켰으며 여러차례 변화를 거쳐 1895년(고종 32) 거창군(巨昌郡)이 되었다.

     장씨(章氏)는 중국 하간(河間:지금의 직예성 진해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문헌에 전해지는 본관은 거창과 복성(福城:보성 지방)이었으나 오늘날에는 거창 단본으로 알려져 있다.
     거창 장씨의 시조 장종행(章宗行)의 선대는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으므로 고려 충렬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겸 춘추관사(春秋館事)를 지낸 그를 시조로하고 그의 아들 두민(斗民)이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홍건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아림(娥林:거창의 별호)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거창으로 하게 되었다.
     그 후 두민(斗民)의 아들 영순(永巡)이 고려의 절신(節臣) 이양중(李養中)의 사위로 공임왕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등을 지냈으며, 후손 참장(參莊)은 공양왕 때 돈령부 부정(敦寧府副正)을 지내고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거창군 웅양면 한현촌으로 퇴거(退居)하여 그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외 선조 때 훈련원정(訓鍊院正)으로 임진왜란 때 장렬하게 순절한 헌휘(獻輝)와 판관(判官)을 지낸 헌서(獻瑞)가 유명했으며, 석규(錫奎)는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거창 장씨는 남한에 총 1,039가구, 4,2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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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산 장씨(牙山 蔣氏)

    아산 장씨(牙山 蔣氏)

      아산(牙山)은 충청남도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는  백제 시대에 아술현(牙述縣)이었는데 신라시대에 음봉(陰蜂:일명 음잠)또는 온정군령(溫井郡嶺)이라 하였고,  고려 초기에 인주(仁州)로 고쳤다가 1018 년(현종 9) 천안부에  속하였으며 그 후  아주로 고쳐 다시  설치하였다.
     1413(태종 13) 아산으로 개칭하였고, 1459년(세조 5) 온양(溫陽), 신창(新昌), 아산(牙山)의 3읍으로 분속되었다가 1476년(성종 7) 아산현(牙山縣)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었다.
     1914년  온양, 신창(新昌)의 두 군(郡)을 편입하였다. 장씨(蔣氏)의 득성(得姓) 근원은  중국 춘추시대의 나라 이름으로 주나라 주공(周公)의 세째 아들 백령(伯齡)이 하남성(河南省) 기사현(期思縣)을 장국(蔣國)으로 하사 받아 국명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장씨(蔣氏)의 본관은 문헌에 아산, 청송, 김포 등 여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현존(現存)하는 장씨는 아산 장씨로 단일화하고 있다.
     아산 장씨의 시조인 장 서(蔣 壻)는  중국 송조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신경위 대장군(神慶衛大將軍)을 지냈으며 고려 예종 때 금나라가 송을  침입하자 상서(尙書)이 강(李 綱)과 함께 항전(抗戰), 적에게 한치라도 빼앗겨서는 안되며  끝까지 사수(死守)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의론(議論)이 불합(不合)하여, 자기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배를 타고 동으로 망명, 우리나라의  충남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에  표착(漂着)하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예종이 중국에 탐문(探問)한 바 후히 대접하라는  전달을 받았다.
     예종은 서(壻)에게 식읍을 하사하고 아산군(牙山君)에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서(壻)를 시조로 하고 아산을 관적으로 하여 누대에 걸쳐 세거하면서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을 살펴보면 서의  증손 숭(崇)이 고려조에 정록대부(正祿大夫)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겸 도총사(都摠事)를 역임하였고, 숭의 아들 득분(得芬)은 정순대부(正順大夫)로 서운관사(書雲觀事) 겸 도총사(都摠事)를 거쳐  판군기시사 (判軍器侍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서의 6세손  균(均)이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올랐으며 균의 아들 자방(自芳)이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삼사  부사(三司副使) 겸 검교 예빈경(檢校禮賓卿)을 역임하였다.
     자방(自芳)은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성길(成吉)이  판도판서(版圖判書), 평장사(平章事)를, 둘째 아들 성발(成發)은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전공 전서(典工典書)를 역임하였으며, 세째 아들 성휘(成暉)가 전서(典書)를,  네째 아들 성호(成昊)는 전법 전서(典法判書)를, 다섯째 아들 성미(成美)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는 등 모두 전서를 역임하였으므로 그들의 출생지인 경북 의성군  점곡면 교동은 5전서로 전해지고  있다.
     그 외 인물로는 상서 우복야(尙書右僕揶)를 지낸 극맹(劇孟)과 장사랑(將士郞)으로 동정(同正)을  지낸 모(耗)가 유명하다. 조선조에 와서는 서(壻)의 9세손이며 전서(全書)를 지낸 성휘(成暉)의 아들인 영실(英實)이 있다.
      그는 1423년(세종 5) 상의원 별좌(尙衣院別坐), 사직(司直)을 지내고 1432년(세종 14) 천문기상기기(天文氣象機器)를 발명, 1438년부터 몇 년동안 대소간의 천구의(大小簡儀天毬儀), 혼천의(渾天儀), 일귀(日晷), 자격루(自擊漏)를 완성하였다.
     그 외  동활자주조(銅活字鑄造), 채광제련(採鑛製鍊)을 감독하였고 1442년 세계 최초로 천문측우기(天文測雨器)를 발명하였다.  
     그 후 관직은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으나 선생의 업적이  세월이 흐를수록 높이 평가되어  1983년 전국의 후손과 각계각층(各界各層)의 인사들이 모여 과학선현의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선생의  뜻을 담아 충남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에 있는  동래시조 서(壻)의 표착지(漂着地)에 추모 기념비를  세워 유지를 기리고 있다.
     이 밖에도 조선 성조조에  경기 병사(京畿兵使)를 지낸 처용(處勇)과 선조조(宣祖朝)에 옥포 만호(玉浦萬戶)를 거쳐 부사(府使)에 이르고, 임진왜란  때 울산 소모대장(蔚山召募大將)으로 전공을 세워 칠공신의 한 사람이 된 후완(後腕)이  유명했으며 희양(希陽)은 원종3등공신(原從三等功臣)에, 언기(彦起)는 호종3등공신(扈從三等功臣)에 올랐고, 희춘(希春)의 재종형(再從兄) 계현(啓賢)은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화왕산토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아산 장시의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아산 장씨는 남한에 총 3,937가구, 16,1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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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張
    장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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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양 자씨(遼陽慈氏)
    요양 자씨(遼陽慈氏)

     요양(遼陽)은 중국 랴오닝성의 도시로 랴오허강(遼河)의 지류 타이쯔강(太子河) 좌안에 위치한다. 동북(東北)지방에서는 일찍이 한인(漢人)이 입식(入植)한 곳으로, 진(秦), 한대(漢代)를 통하여 요동군(遼東郡)이라고 불렀다. 당(唐)의 태종( 太宗)이 이 땅을 공략하여 요주(遼州)라 개칭하고, 요(遼)가 발해국(渤海國)의 유민(遺民)을 다스리기 위해 이 곳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웠으나, 뒤에 오경(五京)의 하나로 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를 두었는데, 그것이 현 지명의 기원이다. 자씨(慈氏)는 중국(中國) 형주현(荊州縣) 동주(憧州) 사람인 자호상(慈好祥)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요양자씨세보(遼陽 慈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1557년(명나라 가정 36) 영군부장(領軍副將)으로 몽고 정벌(蒙古征伐)때 순절(殉節)하였고, 그의 아들(弘善)이 요양(遼陽)으로 이거(移居)하여 살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자씨(慈氏)의 시원(始源)은 홍선(弘善)의 아들 경보(慶輔), 순직(順直), 순희(順熙), 경조(慶祖) 4형제가 명나라 신종(神宗)때 전란(戰亂)을 피해 동래(東來)하여 길주(吉州) 남쪽 설봉산(雪峯山) 밑에 정착(定着)하여 살먼서 부터이다.
     후손들은 전세거지(前世居地)인 요양(遼陽)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자씨(慈氏)의 본관(本貫)은 요양(遼陽) 외에도 해주(海州)와 중원 자씨(中原慈氏)가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으나, 시조(始祖) 및 계대(系代)에 대해서는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상고(詳考)할 수 없다.
     요양 자씨(遼陽慈氏)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조선조(朝鮮朝)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 樞府事)를 지낸 충국(忠國)과 만선(萬先)이 유명했으며, 취덕(就悳)과 석항(碩恒), 만찬(萬贊) 등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하였으며 만흘(萬屹)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은강(銀綱)과 명은(明殷)은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요양 자씨(遼陽慈氏)는 남한(南韓)에 총24가구, 13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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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任
    임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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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林
    임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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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印
    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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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 이씨(密陽異氏)
    밀양 이씨(密陽異氏)

     밀양(密陽)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원래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하였으며, 신라 법흥왕(法興王 : 제23대 왕, 재위기간 : 514 ∼ 540) 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에 와서는 995년(성종 16)에 밀주(密州)로 하였고, 1390년(공양왕 2) 밀양부로 승격, 그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듭하였다가 1895년 밀양군으로 개칭하였다. 이씨(異氏)는 중국 당나라 덕종(德宗 : 제9대 왕, 재위기간 780 ∼ 804) 때 운남왕(雲南王) 이모심(異牟尋)의 후손으로 전(傳)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이씨(異氏)의 본관(本貫)은 밀양(密陽) 외에 동성(童城 : 통진지방)·청양(靑陽)·남원(南原)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시조(始祖)와  연원(淵源)에 대한 설명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밀양 이씨(密陽異氏)는 고려 현종(顯宗) 때 좌복야를 지낸 이응보(異膺甫)와 그의 후손으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한 이유충(異惟忠), 문종(文宗) 때 형부상서(刑部尙書)와 안서 도호부사(安西都護府使)를 지낸 이선정(異善貞) 등이 대표적인 인물(人物)로 전해지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밀양 이씨(密陽異氏)는 남한(南韓)에 총 91가구, 3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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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씨(伊氏)
    이씨(伊氏)

     이씨(伊氏)는 태원(太原 : 충주)과 은천(銀川 : 배천) 2본이 전한다. 은천 이씨(銀川伊氏)의 시조(始祖)는 알 수 없고, 태원 이씨(太原伊氏)의 시조(始祖)는 이단취(伊丹取)라는 이름만 전할 뿐 시대나 사적(事蹟)은 미상이다.
     이씨(伊氏)는 원래 중국 성씨(姓氏)로서 상(商)나라 탕왕(湯王) 때 이씨(伊氏)가 있었고, 한나라 성제(成帝) 때 가(嘉)라는 사람이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지냈다.
     이씨(伊氏)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 당시 초산군(楚山郡)에 살던 이일보(伊日甫)에 의하면 조상이 본래 중국 파계 사람으로 고려시대에 귀화(歸化)하여 경주에 살았다고 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씨(伊氏)는 남한(南韓)에 총 82가구, 24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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