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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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씨(姓氏)의 의의

      성씨란 혈통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부호로서 혈연 중심으로 모여 살았던 씨족사회가 부족사회로 발전하여 복잡하게 되어 감에 따라 서로 간의 가통을 호칭하기 위한 방법으로 등장했다 할 수 있다. 혈연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우리민족은 어느 누구나 부계를 중심으로 한 각자의 성씨를 갖고 있으며, 각 성씨 별로 씨족의 역사를 갖고 서로 융화하며 협동, 발전하여 왔다. 즉 성명(姓名)에 대해 알아 보면 성(姓)과 본관(本貫)은 가문을 , 명(名)은 가문과 대수(代數)를 나타내는 항렬(行列)과 개인을 구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있어 개인 구분은 물론 가문의 세대까지 나타나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독특한 체계를 갖고 변천하여 왔다. 특히, 조상숭배사상과 애족사상이 강한 우리들은 성씨를 통해 선조들의 유현한 여운을 느끼고, 면면히 내려오는 가통의 맥락을 더듬으며 조상의 얼과 체취를 느끼는 동시에 가문에 대한 긍지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성씨의 성장과정은 문명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사회적, 심리적, 정치적 역할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87
  • 우리나라 성씨의 역사


     우리 나라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한 뒤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산, 강 등을 성으로 삼았다.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姜)씨라고,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었으므로 성을 요(姚)씨로 한 것은 이것을 실증한다.

      <삼국시대>

     고구려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인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賜姓)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 하였으며, 장수왕 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백제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신라 - 박(朴), 석(昔), 김(金) 삼성(蔘姓)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 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을 사용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 7세기 이전 건립된 신라 진흥왕의  네곳의 순수비,  
     -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 신라 진평왕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때 인명에 성을 사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예를 들어 추정해보면,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삼국 시대의 성은 
       고구려 :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               (明臨), 을지(乙支)
       백 제 :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등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치 
       신 라 :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 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               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 많았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다.

      <고려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이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9년(1055)에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 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이 성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조선시대, 현대>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아졌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52
  • 성씨(姓氏)의 성장 과정

      성씨의 수와 종류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역사의 흥망성쇠를 대변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 보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256성이, 1486년(성종)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21대)에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숫자가 많은 것은 고문헌에 있는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으로 되어 있으나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최근의 조사인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씨로 보고 되었다.
      이와같이 시대별 또는 자료별로 차이가 큰 것은 대개 실제조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옛 문헌에 산재해 있는 것을 조사한 것이기 때문이며, 가구주와 호적별의 조사 차이로 나타났다. 1975년도 인구조사에 의한 성씨분포도를 살펴보면, 김씨가 전체인구의 21.9%, 이 씨가 14.9%, 박씨가 8.5%, 최씨가 4.8%로 4대성이 총인구의 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순위 20위안에 드는 성이 80%를 차지하고 35여개 성이 90%, 90여개 성이 전체의 99%를 차지하여, 실제적으로 우리나라에는 274개 성중에 90여 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나머지 180여개 성은 총인구의 1%에도 못 미치는데 심지어는 1가구뿐인 성씨도 있다.
      제식민 통치하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며 1939년에 시행한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이름을 다시 찾을 때 까지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 큰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96
  • 외국의 성씨 제도


       외국에서는 여자가 시집을 가면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 미국,영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독일,스위스,브라질 등도 원칙적으로 아내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통례다. 그러나 법률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여자는 결혼전의 성을 그대로 가질 수도 있고 남편의 성을 사용할 수도 있다.

       러시아의 경우는 여자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통례이나, 법률로는 부부가 서로 의논하여 어느 한쪽의 성을 사용하거나 각자의 성을 사용할 수도 있다. 중국에서는 부부는 각자의 성명을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만의 경우는 아내는 자기의 성 위에 남편의 성을 합하여 사용하는 복성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결혼한 여자의 성은 두 글자 성씨가 된다.

       또한 지구상에는 성이 없는 국가도 많다. 동남아시아의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이 한 예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름만 가지고 있는데 다만 개인적으로 필요하거나 취미로 이름 위에 이것 저것 덧붙여 사용한다고 한다. 미얀마에서는 이름 위에 '우'나 '몽'을 붙이는 경우가 많아서 '우 와 '몽'이 우리나라의 김씨나 이씨 만큼 많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그러나 '우'자는 나이가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붙이는 경칭이며 '몽'자는 미혼의 젊은 이에게 붙이는 것으로 영어의 미스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성씨는 매우 복잡하고 그 숫자로도 13만 2천여 성씨로 세계에서 제일 많은 민족 중의 하나다. 일본의 성씨는 두 글자 성씨가 제일 많고 한 글자나 세 글자 성씨도 많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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