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본관 영양,의령,고성 남씨(英陽,宜寧,固城南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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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2:25 조회 1,97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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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英陽)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의 고은현(古隱縣)을 신라 말(新羅末)에 영양(英陽) 또는 연양(延陽)이라 하였다가 940년(고려 태조 23) 영양현(英陽縣)으로 개칭하였다. 1018 년 예주(禮州)에 속하였다가 명종(明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고, 1413년(조선 태종 13)에 다시 영양으로 고쳐 숙종(肅宗) 때 현(縣)을 두었으며, 남면(南面), 동면(東面), 덕봉(德峰), 수비(首比)를 진보현(眞寶縣)에 청기(靑杞), 석보(石保)는 다시 영해현(寧海縣)으로 예속시켰다가 1895년(고종 32)에 군(郡)으로 승격될 때 활속되었다.
중국(中國)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인 김 충(金 忠)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신라 경덕왕 14)에 안렴사(按廉使)로 일본(日本)에 갔다가 귀로(歸路)에 태풍(颱風)을 만나서 신라(新羅)의 인근 지역인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동죽도(慶北盈德郡丑山面丑山洞竹島)에 표착(漂着)하였다.
 그는 신라에서 살기를 원하여 경덕왕(景德王)이 이러한 사실을 당천자(唐天子)에게 알리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당천자는 "십생구사지신(十生九死之臣)을 신례(臣禮)로 부를 수 없으니 소원(所願)대로 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 후 경덕왕은 그가 여남(汝南) 에서 왔다고 하여 <남씨(南氏)>로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민(敏)>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으며, 영양현(英陽縣)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고 후에 영의(英毅)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로 인하여 우리나라 남씨(南氏)가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혀왔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남씨(南氏)의 본관(本貫)은 60여 본(本)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이는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후손들이 전국(全國)에 흩어져, 살고 있는 지명(地名)에 불과하며,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3본이다.
 남 씨(南 氏)는 고려 중엽에 와서 시조(始祖)인 남 민(南 敏)의 후손 3형제가 각각 중시조(中始祖)로 갈라져서 맏형인 홍보(洪輔)가 선조(先祖)의 대(代)를 이어 영양(英陽)에, 둘째 군보(君甫)는 의령(宜寧)에, 막내 광보(匡甫)는 고성(固城)에 정착(定着)하여 살면서 세 계통으로 분관(分貫)하였다.
 가문(家門)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첫째 영양 남씨에서 홍보의 손자 숙손(淑孫)이 고려 고종(高宗)과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걸쳐 검교예빈시경(檢校禮賓寺卿)을 지냈고, 숙손의 현손(玄孫) 영번(永蕃)은 신호위 보승중랑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조선(朝鮮) 최고의 역술가로 유명했던 사고(師古)는 이조 좌랑(吏曹佐郞) 희백(希伯)의 아들로 풍수(風水), 천문(天文), 점복, 상법 등에 통달하여 그의 예언은 적중률이 높았다고 한다. 특히 그는 명종(明宗) 말년에 조정의 분당과 임진왜란을 예언했으며, 선조(宣祖)가 잠저(潛邸) 때 사직동(社稷洞)에 있다가 왕위(王位)를 이은 것을 사직동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예언으로 적중시켜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그외 임진왜란 때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로 경주(慶州)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된 의록(義祿)과 경훈(慶薰)의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무공(武功)을 세운 율(慄 : 감찰어사 수의 7세손)과 거창 부사(居昌府使) 노명(老明)은 [남종통기(南宗通記)]를 저술한 제명(濟明), [계 각촬요(溪刻撮要)]의 저자(著者) 공수(公壽)와 함께 가문을 대표했으며, 순천 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한 구명(九明)은 숙종(肅宗)이 그의 이름을 대궐 기둥에 적어 모범으로 과시했다고 한다.
 남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재(人財)를 배출한 의령(宜寧) 계통은 군보(君甫)의 증손 을번(乙蕃), 을진(乙珍), 을경(乙敬) 3형제가 유명했다. 고려조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던 을번은 조선개국 후에 입사(入仕)하여 익대보조찬화공신(翊戴補祚贊化功臣)으로 보국숭록대부 문하시중(輔國崇祿大夫門下侍中)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재(在)는 초명(初名)이 겸(謙)이었으나 공신(功臣)으로 봉해지는 것을 사면하려고 지방(地方)으로 피신하자 태조(太祖)가 그를 찾으려고 무척 애쓴 끝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와 이름을 재(在)로 사명(賜名)했다고 하며, 임금이 내려준 이름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자(字)를 경지(敬之)라 했다 한다. 특히 그는 술을 좋아하고 도량이 컸으며 정승 반열에 있으면서도 정사(政事)에는 항상 비판적이었다. 그가 손님이 오면 바둑 두기를 좋아하여 그 까닭을 물으니 "산 사람은 기운이 있으므로 반드시 말을 하게 되고, 말을 하게 되면 조정의 일에 말을 비치지 않기가 어렵기 때문에 바둑을 두면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말을 피할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아우 은(誾)은 성품이 호기롭고 뛰어나 어릴 때부터 기묘한 계책을 좋아하였다. 우왕(禑王) 때 사직단직(社稷壇直)으로 있었던 그는 왜적이 침입해오자 자청하여 지군사(知郡事 : 군수)로 나가 기병(騎兵) 10여 명으로 대파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을번의 아우 을진(乙珍)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사천(沙川 :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하패리)으로 은거(隱居)하여 조선이 개국된 후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의 절의에 감복한 태조가 사천백(沙川伯)에 봉하자 더 깊숙히 감악산(紺嶽山)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며 일생을 마치니 세상 사람들은 그가 거처한 자리를 남선굴(南仙窟)이라 불렀다.
 을진의 후손에 서는 곡산군수(谷山郡守)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치신(致信 : 을진의 손자)의 아들 포(褒)와 곤(袞)이 유명했다.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청맹(靑盲)으로 행세하며 벼슬을 버리고 적성(積城)의 감악산(紺嶽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던포 는 항상 무명베갓에 떨어진 옷을 입고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스스로 창랑거사(滄浪居士) 또는 소요자(逍遙子)라 일컬었고 가는 곳마다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세상에서는 그의 얼굴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고 [연려실기술]에 전한다. 그가 병이 나서 감파동(紺波洞) 재사(齋舍)로 돌아와 아들 정진에게 경계하며 말하기를 "네가 여덟 번 고을 벼슬을 제수받아 세 번을 사양하고 다섯 번을 나간 것은 노부모가 있으므로 뜻을 굽힌 것이나 우리집에는 선대의 토지와 집이 있어 족히 바람과 비를 가릴만 하고 토지는 죽이나 밥을 이어 먹을 만하니 나 죽은 뒤로는 다시 벼슬에 나갈 생각은 말라"고 하였다. 태종(太宗)의 넷째 딸 정선공주(貞善公主)와 혼인하여 부마(駙馬)가 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진 휘(暉)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도승지(都承旨) 조서로(趙瑞老)의 친족간음(親族姦淫)을 탄핵했던 지(智)는 재(在)의 손자로서 이들의 후손에서 많은 인재(人財)가 배출되어 가문(家門)을 크게 일으켰다. 휘(暉)의 손자(孫子)로 명장(名將)의 웅지(雄志)를 펴보지도 못하고 비명의 죽음에 그쳤는 이(怡)는 태종(太宗)의 외손(外孫)이며 좌의정(左議政) 권 남의 사위로 17세 때 무과(武科)에 장원하고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서북방으로 건주위(建州衛 : 남만주 지역에 살던 여진족의 하나)를 토평하여 27세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랐으나 역모를 꾸몄다는 유자광(柳子光)의 모함으로 예종(睿宗) 즉위년에 주살(誅殺)되어 시기와 질투로 점철된 조선의 역사 속에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아까운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그외 지(智)의 증손으로 성종(成宗)의 부마(駙馬)였던 섭원(燮元 : 성종의 딸 취정옹주와 혼인하여 선천위에 봉해짐)과 치원(致元 : 성종의 딸 경순옹주와 혼인하여 선성위에 봉해짐)이 유명했고, 목사(牧使) 치욱의 아들 언경(彦經)은 서경덕(徐慶德)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한 수(韓 脩)와 더불어 조선조(朝鮮朝)  경학(經學)의 쌍벽으로 일컬어졌으며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거쳐 양근(楊根) 영천동(靈川洞)으로 돌아와 67세로 세상을 마쳤다.
 조선 세조(世祖)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효온(孝溫)은 사림(士 林)의 추앙받는 인물(人物)로 세조에게 물가에 이장된 소릉(昭陵 : 단종 모 현덕왕후의 능)의 복위를 상소했으나 도승지(都承旨) 임사홍(任士洪)과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상달되지 못하자 이로부터 세상을 등지고 유랑생활로 일생을 마쳤다.그가 만년에 [육신전(六臣傳)]을 지었는데 그의 문인(門人)들이 화(禍)가 두려워 말리자 "어찌 죽기를 두려워 대현 (大賢)의 이름을 영원히 잃게 할 수 있으리오 "하며 야사(野史)로 완성했으나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숙종 때 비로소 간행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선조(宣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이웅(以雄 : 참판 응운의 손자)과 인조조에서 대사헌(大司憲)과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이흥(以興)이 뛰어났으며, 숙종조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던 이성(二星 : 현감 식의 아들)과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내고 문장(文章)과 글씨에 뛰어났던 용익(龍翼)은 약천(藥泉) 구만(九萬)과 함께 조선말에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1629년(인조 7) 현령(縣令) 일성(一星)의 아들로 태어난 구만은 효종(孝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문장과 서화로 이름을 떨쳤고, 숙종조에 소론(小論)의 영수가 되어 대제학(大提學)과 영의정을 지내며 당파싸움이 격렬했던 당시 정계(政界)를 주름잡은 명신(名臣)이었다.
 대제학 용익의 증손 유용(有容)은 영조(英祖)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과 예조 참판을 지냈으며, 1764년(영조 40) 우빈객(右賓客)이 되어 치사(致仕)한 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그의 아들 공철(公轍)은 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당세의 명문장가로 손꼽혔다.
 고성(固城) 계통의 인맥(人脈)으로는 고려에서 은청광록대부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지낸 도정(途庭 : 광보의 증손)과 7 세손 금(琴)이 뛰어났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기(奇)의 아들로 태어난 금은 조선조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5형제 중 넷째 수문(秀文)은 세종 때 최초로 호당(湖堂)에 뽑힌 인물이다. 금의 손자 세주(世周)는 연산군의 황음(荒淫 :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을 직간(直諫)하다가 화(禍)를 입었고, 계신(繼身)의 아들 추는 중종(中宗) 때 장원급제하여 글재주로 명성이 높았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삼계(森溪)로 물러가 시작(詩作)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외 임진왜란 창의(倡義)하여 선무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던 수일(守一)과 정난공신(靖亂功臣)에 책록되었던 치공(致恭)이 대표적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 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씨는 남한에 총 53,011 가구, 222,246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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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賈


    간簡


     


    갈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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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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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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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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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高


    곡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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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公


    곽郭




    구具


    구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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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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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弓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나羅


    남궁南宮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단段


    단端


    당唐


    대大


    도都


    도陶


    도道




    독고獨孤


    돈頓


    돈敦


    동董


    동방東方


    두杜


     


    류柳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명明


    모牟


    모毛


    목睦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方


    방房


    방龐


    방邦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빈彬


    빈賓





    사史




    사謝


     


    사공司空


    사씨舍氏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서문西門




    석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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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鮮于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舜


    순淳


    순荀


    순順


    승承




    승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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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柴


     


    신申


    신辛


    신愼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양楊


    양樑


    양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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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呂


    여余


    여汝


    연延


    연燕




    연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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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影


    영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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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吳


    오伍


     


    옥玉


    온溫


    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芸


    운雲


    원元


    원袁


    위韋




    위魏


    유劉


    유兪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은恩


    음陰


    응應


     




    이李


    이伊


    이異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蔣


    장章


    장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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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黃州는 본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다. 주요성씨로 황보(皇甫)·황(黃)·동(董)·변(邊)·최(崔)씨 등이 있었다. 黃州黃甫氏는 영천황보(永川皇甫)에서 분적(分籍)하여 黃州를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시조는 충의공(忠義公) 황보제공(皇甫悌恭)으로 태위(太尉)를 지냈다.
     이들의 1930년대 분포사항을 보면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인제리에 12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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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씨(后氏)

     后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났으며 본관(本貫)은〈唐寅〉단본이다.
     1930년 당시 강원도에 3가구가 있었는데, 회양군 상북면 오랑리(淮陽郡 上北面 五郞里)에 살던 후춘성씨(后春成氏)는 그의 11代祖가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후씨(后氏)는 나타나지 않아 정확한 가구와 인구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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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은 진주의 고호로 경상남도의 남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며,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문무왕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고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로 고쳤다.
     그 뒤 혜공왕 때에 정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시대에는 한때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진주목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으며 1910년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 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1949년에 부(府) 시(市)로 개칭되었다. 진양 화씨는 중국 낭야 사람인 화명신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명신은 본성이 화씨로서, 조상 대대로 명나라에서 벼슬하던 교목세가의 후손으로 낭야의 화촌대에 살다가 오랑캐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개탄하며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
     조선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화씨(花氏)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향화의 의리다"하며 명신을 예우하고 화씨의 성을 하사하고, 경성군에 봉했다. 그러나 상계의 실전으로 계대를 밝히지 못하여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진주에 세거한 후손 섭(燮)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선대부에 오른 섭(燮)의 아들 봉상(奉祥)과 영조 때 무관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올랐으며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일취가 유명했다.
     그외 절충장군 동휘와 정릉 참봉 덕봉(德鳳), 통덕랑 윤택(允澤)은 오우장을 지낸 정한·응한, 참판 석한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 화씨는 남한에 총 400가구, 1,5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404
  • 홍洪
    홍洪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57
  •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 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定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京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 온 옛 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중국(中國) 안정(安定)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호안국(胡安國)의 16세손 호극기(胡克己)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극기(克己)는 명(明)나라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라 1643년(인조 21) 답례사(答禮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 멸망되자 "내가
    천조(天朝)에 복명(復命)치 못하고, 조종(祖宗)의 땅이 전란(戰亂)에 짓밝히니 창천(蒼天)도 무심(無心)하다. 차라리 동해(東海)에서 죽을지언정 고국(故國)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하고 경기도(京畿道) 가평군(加平郡) 대명연(大明淵)에 은거(隱居)했다가, 함경도(咸鏡道) 북청군(北靑郡) 덕성면(德城面) 중장내(中庄內)에 초가(草家)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라 이름짓고 여생(餘生)을 보내니, 조선(朝鮮)의 효종(孝宗)이 그의 충성심(忠誠心)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租稅)로 녹(祿)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극기(克己)의 본향지(本鄕地)인 중국(中國)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기(克己)의 맏아들 제백(濟伯)이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고, 후손 사룡(士龍)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녹사(綠事)를 지낸 태기(泰起), 충찬위(忠贊衛)에 오른 시악(時악)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가구, 7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40
  •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保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扶安)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희안(喜安)으로 고쳐 고부(古阜)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부령현(扶寧縣)의 겸임을 삼았다. 우왕(禑王) 때 보안현(保安縣)을 설치하였으며 1415년(태종 15)에 부안(扶安)에 편입시켰다.
     호씨(扈氏)는 고려(高麗) 창업(創業)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호의(扈義)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侯伯濟) 견훤군(甄萱軍)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왕(王 :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보안 호씨(保安扈氏)는 의(義)의 맏아들 호은열(扈殷說)이 광익효절정난안사공신(匡翼效節定難安社功臣)으로 보안군(保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보안(保安)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
     전주 호씨(全州扈氏)는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明)나라 장군(將軍)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난(亂) 후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호준(扈浚)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가구, 1,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84
  •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진주 형씨(晋州邢氏)의 시조(始祖)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인 형옹(邢 )으로 전(傳)한다.
    옹( )은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옹(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3세손 방(昉)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慶南) 진주(晋州) 반성(班城)에서 살았다. 방(昉)의 손자(孫子) 공미(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280년 (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征伐)하는 데 공(功)을 세워 지밀직사사(知 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방(昉)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방(昉)의 현손(玄孫) 찬(贊)이 조선조(朝鮮朝)에서 판도판소(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 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 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忠淸道兵馬使)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외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學問)으로 이름 났으며, 협(浹)은 효종(孝宗) 때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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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玄
    현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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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許
    허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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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씨(海氏)
    해씨(海氏)

     해씨(海氏)는 중국(中國) 설군(薛郡 : 산동성 제령도에 있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오계(五季 : 중국 고대 다섯 왕조를 달리 일컫던 말) 때 사람인 해진명(海眞明)과 인종(仁宗) 때 중궁(中宮)이었던 해수자(海壽者)란 사람이 사기(史記)에 등장된 인물이다.
     우리 나라 해씨(海氏)의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靈巖)과 목포·나주(羅州)를 비롯한 경남 김해(金海) 등지에 7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0가구, 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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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咸
    함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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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漢
    한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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