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곡산 노씨(谷山盧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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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산(谷山)은 황해도(黃海道) 북동단(北東端)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십곡성(十谷城)이라 불리웠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진서(鎭瑞)라 개칭하여 영풍군(永豊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高麗) 초에 곡주 (谷州)로 고쳐 성종(成宗) 때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태조(太祖)가 현비강씨(顯妃康氏)의 고향이라고 하여 곡산(谷山)으로 개칭하고 부(府)로 승격하였으며, 태종(太宗)은 다시 군(郡)으로 격하, 1669년(현종 10) 부(府)로 승격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곡산군(谷山郡)이 되어 개성부(開城府)에 속하였다. 1914년 황해도에 속한 군(郡)이 되었으며, 별칭(別稱)으로는 덕둔홀·고곡(古谷)·욕천(浴川)·곡성(谷城)·진서(鎭瑞)·상산(象山) 등으로 불리웠다. 곡산 노씨(谷山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 수(盧 穗 : 한림학사)의 아홉째 아들 노 원(盧 垣)이 고려 초기에 입사(入仕)하여 곡산백(谷山伯)에 봉해지고, 그의 후손 조(兆)가 충숙왕(忠肅王)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곡산(谷山)으로 삼아 원(垣)을 득관조(得貫祖)로 하고, 조(兆)를 일세조(一世祖)로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3세손 인철(仁哲)이 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을 역임했고, 그의 손자 중례(重禮)는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지냈다.
한편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경린(慶麟)은 부사과(副司果) 적(績)의 아들로 학유(學諭)를 거쳐 지평(持平)에 올랐으나 사감(私感)을 품었던 진복창(陳復昌)의 탄핵으로 좌천되었으며,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나가 서원(書院)을 세워 유학(儒學)을 장려했고, 숙천 부사(肅川府使)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성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내금위장(內禁衛將) 오(澳)와 판관(判官) 진, 감찰(監察) 발(潑), 훈련원정(訓鍊院正) 극제(克悌), 부사과(副司果) 극겸(克謙) 등이 대표적이며, 성린(成鱗)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여 도정(都正)을 지낸 병준(秉俊)·우현(禹鉉) 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곡산 노씨(谷山盧氏)는 남한(南韓)에 총 1,704가구, 7,4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경린(慶麟)은 부사과(副司果) 적(績)의 아들로 학유(學諭)를 거쳐 지평(持平)에 올랐으나 사감(私感)을 품었던 진복창(陳復昌)의 탄핵으로 좌천되었으며,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나가 서원(書院)을 세워 유학(儒學)을 장려했고, 숙천 부사(肅川府使)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성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내금위장(內禁衛將) 오(澳)와 판관(判官) 진, 감찰(監察) 발(潑), 훈련원정(訓鍊院正) 극제(克悌), 부사과(副司果) 극겸(克謙) 등이 대표적이며, 성린(成鱗)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여 도정(都正)을 지낸 병준(秉俊)·우현(禹鉉) 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곡산 노씨(谷山盧氏)는 남한(南韓)에 총 1,704가구, 7,4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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