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신창 노씨(新昌盧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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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新昌)은 충청남도 아산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굴직현(屈直縣)을 신라 경덕왕이 기량현(祁梁縣)으로 고쳐 온정군(溫井郡:온양)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 초에 신창현(新昌縣)으로 개칭하여 1018 년(헌종 9)에 천안부(天安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그후 조선조에 와서는 태조가 만호(萬戶)를 없애고 1414년(태종 14)에 온수형(溫水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신창현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아산군(牙山郡)에 속하여 지금의 아산군 신창면이 되었다.
신창 노씨(新昌盧氏)는 교하 노씨(交河盧氏)의 일세조(一世祖) 노강필(盧康弼)의 증손(曾孫) 지유(智儒:평장사 영순의 둘째 아들)가 고려 공민왕 때 검교장군(檢校將軍)으로 나라에 무공을 세워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오르고 신창군(新昌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교하 노씨에서 분적(分籍)하여 지유(智儒)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신창(新昌)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일세조 지유(智儒)의 아들 후(珝)가 고려조에서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으며, 후의 손자 순(純)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에만 진력하여 저서(著書)로 일생을 마쳤다.
한편 선조(宣祖) 때 무명(武名)을 떨친 순(錞)을 당세에 유명한 성리학자 남 명(南冥) 조 식(曺 植)에게서 글을 배우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 보급을 담당했으며, 이듬해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정(鋌)은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역임하여 용양위 부호군을 지낸 천익(天翼), 참의(參議) 희창(喜昌)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신찬 노씨(新昌盧氏)는 남한에 총 474가구, 1,97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창 노씨(新昌盧氏)는 교하 노씨(交河盧氏)의 일세조(一世祖) 노강필(盧康弼)의 증손(曾孫) 지유(智儒:평장사 영순의 둘째 아들)가 고려 공민왕 때 검교장군(檢校將軍)으로 나라에 무공을 세워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오르고 신창군(新昌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교하 노씨에서 분적(分籍)하여 지유(智儒)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신창(新昌)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일세조 지유(智儒)의 아들 후(珝)가 고려조에서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으며, 후의 손자 순(純)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에만 진력하여 저서(著書)로 일생을 마쳤다.
한편 선조(宣祖) 때 무명(武名)을 떨친 순(錞)을 당세에 유명한 성리학자 남 명(南冥) 조 식(曺 植)에게서 글을 배우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 보급을 담당했으며, 이듬해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정(鋌)은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역임하여 용양위 부호군을 지낸 천익(天翼), 참의(參議) 희창(喜昌)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신찬 노씨(新昌盧氏)는 남한에 총 474가구, 1,97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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