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밀양 노씨(密陽魯氏)
페이지 정보
본문
밀양 노씨(密陽魯氏)
밀양(密陽)은 경상남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원래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하였으며,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제23대 왕, 재위기간: 514 ~ 540) 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때 와서는 995년(성종 16)에 밀주(密州)로 하였고,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고 양왕(恭讓王: 제34대 왕, 제위기간: 1389-1392) 때 밀양(密陽)으로 개칭되었다. 밀양 노씨(密陽魯氏)의 선계(先系)는 전국시대 제(薺)나라 사람인 노중연(魯仲連)으로 전한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노중연은 위(魏)나라와 조(趙)나라가 진시황(秦始皇)을 제(帝)로 모시려 할 때 "차라리 동해(東海)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진(秦)을 제(帝)로 모신다는 말은 듣기를 원치 않는다" 하며 반대하여 진시황을 축출(逐出)하는데 공을 세웠다 한다. 우리나라 노씨는 노중연의 손자 노 계(魯啓)가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함께 조선에 들어와 강화(江華)에 정착(定着)하여 연원(淵源)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그의 원손(遠孫)인 노형권(魯衡權)이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홍건적(紅巾賊)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밀산(密山: 밀양의 옛 지명)군(軍)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始祖)를 노중연(魯仲連)으로 하고, 형권(衡權)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관향(貫鄕)을 밀양(密陽)으로 삼아 세계(世界)를 계승하여 왔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형권의 아들 서(恕)가 조선조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서의 손자 복(馥)은 외직인 군수(郡守)를 역임하여 참의(參議)를 지낸 요좌(堯佐: 군수 복의 아들), 참판(參判) 식(植: 참의 요좌의 아들)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그밖에 사재판사(司宰板事) 천보(天輔)의 아들 의(誼)가 밀직사(密直使)를 지냈고, 오위장(五衛將) 공보(公輔)의 아들 3형제 중 장자 겸(謙)은 통훈대보(通訓大夫)에 올랐으며, 차남 찬(讚)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통(家統)을 살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밀양 노씨(密陽魯氏)는 남한에 총 423가구, 1,92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밀양(密陽)은 경상남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원래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하였으며,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제23대 왕, 재위기간: 514 ~ 540) 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때 와서는 995년(성종 16)에 밀주(密州)로 하였고,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고 양왕(恭讓王: 제34대 왕, 제위기간: 1389-1392) 때 밀양(密陽)으로 개칭되었다. 밀양 노씨(密陽魯氏)의 선계(先系)는 전국시대 제(薺)나라 사람인 노중연(魯仲連)으로 전한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노중연은 위(魏)나라와 조(趙)나라가 진시황(秦始皇)을 제(帝)로 모시려 할 때 "차라리 동해(東海)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진(秦)을 제(帝)로 모신다는 말은 듣기를 원치 않는다" 하며 반대하여 진시황을 축출(逐出)하는데 공을 세웠다 한다. 우리나라 노씨는 노중연의 손자 노 계(魯啓)가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함께 조선에 들어와 강화(江華)에 정착(定着)하여 연원(淵源)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그의 원손(遠孫)인 노형권(魯衡權)이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홍건적(紅巾賊)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밀산(密山: 밀양의 옛 지명)군(軍)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始祖)를 노중연(魯仲連)으로 하고, 형권(衡權)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관향(貫鄕)을 밀양(密陽)으로 삼아 세계(世界)를 계승하여 왔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형권의 아들 서(恕)가 조선조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서의 손자 복(馥)은 외직인 군수(郡守)를 역임하여 참의(參議)를 지낸 요좌(堯佐: 군수 복의 아들), 참판(參判) 식(植: 참의 요좌의 아들)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그밖에 사재판사(司宰板事) 천보(天輔)의 아들 의(誼)가 밀직사(密直使)를 지냈고, 오위장(五衛將) 공보(公輔)의 아들 3형제 중 장자 겸(謙)은 통훈대보(通訓大夫)에 올랐으며, 차남 찬(讚)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통(家統)을 살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밀양 노씨(密陽魯氏)는 남한에 총 423가구, 1,92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