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본관 성주 도씨(星州都氏)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2:35 조회 1,659 댓글 0

본문

성주 도씨(星州都氏)

 성주(星州)는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대 육가야국(六伽倻國)의 하나인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인데 신라(新羅)가 멸망시켜 본피현(本彼縣)이라 하다가 757년(경덕왕 16) 산안현(新案縣)으로 개칭하여 성산군(星山郡)에 속하였다. 그후 벽진군(碧珍郡)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 경산부(京山府)로 개칭하였다가 경종(景宗)이 강등하여 광평군(廣平郡)이 되었으나, 995년(성종 14) 대주도단련사(岱州都團練使)를 두었으며 현종(顯宗) 때 다시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하여 1군 14현을 영속하였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와서는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격한 후 성주(星州)로 고쳐 목(牧)을 두었고, 충선왕(忠宣王)이 다시 경산부로 강등하였으나 조선 태종(太宗)이 어태(御胎)를 이 곳의 조곡산(祖谷山)에 봉안(奉安)하고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인조(仁祖) 때 성산현(星山縣)으로 강등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성주군(星州郡)으로 개칭되었다.
 도씨(都氏)는 중국 여양(黎陽 : 지금의 직예성 대명도) 사람인 도 계(都稽)가 한무제(漢武帝)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여가(呂嘉)의 반란을 평정하여 도씨(都氏)로 수성(受姓)한 것이 시초가 된다고 하며, 우리나라 도씨(都氏)는 도 계(都稽)의 후손 도 조(都祖)가 성제(成帝 : 중국 전한 제11대 황제, 제위기간 ; BC 32 ~ BC 7) 때 고구려(高句麗)에 건너와서, 동명왕(東明王)의 맏아들 유리(琉璃)가 이복동생인 비류(沸流), 온조(溫祚)와 왕권쟁탈을 벌일 때 크게 활약하여 유리를 왕위(王位)에 오르게 하였으며,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공헌한 후 우리나라에 살게 되면서부터 문호(門戶)가 열렸다. 그러나 [전고대방(典故大方)]과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문헌에는 백제(百濟) 개루왕(蓋婁王) 때의 정승(政丞) 도 미(都彌)를 도씨(都氏)의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이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도 미는 본래 백제 사람인데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정결하기로 소문 났었다. 왕이 그 소문을 듣고 그의 아내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하자 도 미의 두 눈을 도려낸 다음 배를 태워 멀리 추방해 버렸다.
 그후 도 미는 고구려 땅에 가서 나물과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살다가 그를 쫓아온 아내와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일찌기 성주(星州) 고을에서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가문으로 알려져 온 도씨(都氏)는 고려 창업에 공훈을 세웠던 도 진(都 陳)이 정승(政丞)의 벼슬에 올라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성주(星州)에 세거(世居)하여 후손들이 성주를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성주도씨족보(星州都氏族譜)]에 의하면 고려 원종(元宗) 때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지낸 도 순(都順)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전서공파(典書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중랑장공파(中郞 將公派), 시승공파(侍丞公派), 찬성공파(贊成公派), 시중공파(市中公派), 봉차령공파(奉車令公派)등 크게 7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고려조에서 도씨(都氏)의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일세조(一世祖) 순(順)의 아들 충박(忠朴)이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역임했고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유도(有道)와, 종부시 판사(宗簿寺判事)에 추증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진 유덕(有德)을 아들로 두어 이들이 성주 도씨(星州都氏)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특히 순(順)의 현손(玄孫)인 홍정(洪正)은 고려 말에 도씨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人物)로서, 동양창 판관(東陽倉判官)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고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에 봉해진 효안(孝安)의 세째 아들로 출생하여 공민왕(恭愍王) 때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 문하시중(三重大匡輔國門下侍中)에 오르고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의 아들 길부(吉敷)도 우왕(禑王)때 이성계(李成桂)의 부장(副將)으로 충청과 전라도(全羅道)에 침입한 왜구를 황산(荒山)과 운봉(雲峰)에서 격퇴시켜 대광보국숭록대부로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에 오르고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88년(우왕 14) 1월에 일어난 이인임(李仁任)의 축출사건에 연루되어 화(禍)를 당했다. 한편 두문동(杜門洞) 72현의 중심인물인 응(膺)은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를 지냈으나 기사화변(己巳禍變)으로 아버지가 화를 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홍주의 노은동(魯隱洞)에 은거하였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창업하고 왕위에 오른 후 어릴적 친구인 그에게 옛 정을 못잊어 다섯 차례나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고려의 산하임을 고집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절의에감복한 태조(太祖)는 청송당(靑松堂)이란 호(號)를 내려 치하했고, 운천서원(雲川書院)과 경양사(景良祠)에 제향되었다. 봉차령(奉車令) 천우(千遇)의 아들 흥(興)은 공민왕(恭愍王) 때 무신(武臣)으로 왜구(倭寇)의 침입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벼슬은 상원수(上元帥)에 올랐고,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李芳遠)에게 피살되자 그의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중종(中宗)때 효행(孝行)으로 유명했던 형(衡)이 현량과(賢良科)에 올라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을 지냈으나 조광조(趙光祖)와 교유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당한 후 향리에서 학문으로 여생을 마쳤으며, 순조(純祖)때 효자명정(孝子命旌)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624년(인조 2) 이 괄 (李适)의 난에 공을 세운 응유(應兪)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했으며, [오현예설(五賢禮說)]을 편찬했다. 그의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성유(聖兪)와 평양서윤(平壤庶尹) 경유(慶兪)가 유명했으며, 신수(愼修)는 함흥 부사(咸興府使)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대구(大邱)의 용호서원(龍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성리학(性理學)으로 유림(儒林)의 존망을 받았던 신징(愼徵)은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仁宣王后 : 효종의 비)가 별세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 :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고 주부(主簿)를 거쳐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나가 많은 치적(治績)을 쌓아,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낸 영성(永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한 석훈(錫壎), 한성우윤(漢城右尹) 원결(元結)과 함께 가문(家門)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성주 도씨(星州都氏)는 남한에 총 11,191가구, 46,5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물 검색
전체 588건 1 페이지
  •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가賈


    간簡


     


    갈葛


    감甘


     


    강姜


    강康


    강强


    강彊


     


    강剛




    개介


     


    견堅


    견甄


    경慶


    경景


    계桂


    고高


    곡曲


    공孔


    공公


    곽郭




    구具


    구丘


     


    국國


    국菊


    군君


    궁弓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나羅


    남궁南宮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단段


    단端


    당唐


    대大


    도都


    도陶


    도道




    독고獨孤


    돈頓


    돈敦


    동董


    동방東方


    두杜


     


    류柳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명明


    모牟


    모毛


    목睦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方


    방房


    방龐


    방邦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빈彬


    빈賓





    사史




    사謝


     


    사공司空


    사씨舍氏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서문西門




    석石


    석昔


    선宣


    선우鮮于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舜


    순淳


    순荀


    순順


    승承




    승昇


    시施


    시柴


     


    신申


    신辛


    신愼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양楊


    양樑


    양襄


    어魚


    엄嚴


    여呂


    여余


    여汝


    연延


    연燕




    연連


    염廉


    염閻


    영影


    영永


    예芮


    오吳


    오伍


     


    옥玉


    온溫


    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芸


    운雲


    원元


    원袁


    위韋




    위魏


    유劉


    유兪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은恩


    음陰


    응應


     




    이李


    이伊


    이異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蔣


    장章


    장莊


    전全




    전田


    전錢


    점占


    정鄭


    정丁


    정程


    제諸


    제갈諸葛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623
  • 황주황보씨(黃州黃甫氏)
    황주황보씨(黃州黃甫氏)

     黃州는 본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다. 주요성씨로 황보(皇甫)·황(黃)·동(董)·변(邊)·최(崔)씨 등이 있었다. 黃州黃甫氏는 영천황보(永川皇甫)에서 분적(分籍)하여 黃州를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시조는 충의공(忠義公) 황보제공(皇甫悌恭)으로 태위(太尉)를 지냈다.
     이들의 1930년대 분포사항을 보면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인제리에 12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23
  • 황보皇甫
    황보皇甫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65
  • 황黃
    황黃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174
  • 후씨(后氏)
    후씨(后氏)

     后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났으며 본관(本貫)은〈唐寅〉단본이다.
     1930년 당시 강원도에 3가구가 있었는데, 회양군 상북면 오랑리(淮陽郡 上北面 五郞里)에 살던 후춘성씨(后春成氏)는 그의 11代祖가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후씨(后氏)는 나타나지 않아 정확한 가구와 인구수는 알 수 없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04
  •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은 진주의 고호로 경상남도의 남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며,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문무왕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고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로 고쳤다.
     그 뒤 혜공왕 때에 정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시대에는 한때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진주목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으며 1910년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 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1949년에 부(府) 시(市)로 개칭되었다. 진양 화씨는 중국 낭야 사람인 화명신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명신은 본성이 화씨로서, 조상 대대로 명나라에서 벼슬하던 교목세가의 후손으로 낭야의 화촌대에 살다가 오랑캐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개탄하며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
     조선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화씨(花氏)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향화의 의리다"하며 명신을 예우하고 화씨의 성을 하사하고, 경성군에 봉했다. 그러나 상계의 실전으로 계대를 밝히지 못하여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진주에 세거한 후손 섭(燮)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선대부에 오른 섭(燮)의 아들 봉상(奉祥)과 영조 때 무관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올랐으며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일취가 유명했다.
     그외 절충장군 동휘와 정릉 참봉 덕봉(德鳳), 통덕랑 윤택(允澤)은 오우장을 지낸 정한·응한, 참판 석한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 화씨는 남한에 총 400가구, 1,5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92
  • 홍洪
    홍洪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43
  •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 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定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京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 온 옛 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중국(中國) 안정(安定)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호안국(胡安國)의 16세손 호극기(胡克己)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극기(克己)는 명(明)나라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라 1643년(인조 21) 답례사(答禮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 멸망되자 "내가
    천조(天朝)에 복명(復命)치 못하고, 조종(祖宗)의 땅이 전란(戰亂)에 짓밝히니 창천(蒼天)도 무심(無心)하다. 차라리 동해(東海)에서 죽을지언정 고국(故國)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하고 경기도(京畿道) 가평군(加平郡) 대명연(大明淵)에 은거(隱居)했다가, 함경도(咸鏡道) 북청군(北靑郡) 덕성면(德城面) 중장내(中庄內)에 초가(草家)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라 이름짓고 여생(餘生)을 보내니, 조선(朝鮮)의 효종(孝宗)이 그의 충성심(忠誠心)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租稅)로 녹(祿)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극기(克己)의 본향지(本鄕地)인 중국(中國)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기(克己)의 맏아들 제백(濟伯)이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고, 후손 사룡(士龍)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녹사(綠事)를 지낸 태기(泰起), 충찬위(忠贊衛)에 오른 시악(時악)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가구, 7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27
  •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保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扶安)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희안(喜安)으로 고쳐 고부(古阜)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부령현(扶寧縣)의 겸임을 삼았다. 우왕(禑王) 때 보안현(保安縣)을 설치하였으며 1415년(태종 15)에 부안(扶安)에 편입시켰다.
     호씨(扈氏)는 고려(高麗) 창업(創業)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호의(扈義)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侯伯濟) 견훤군(甄萱軍)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왕(王 :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보안 호씨(保安扈氏)는 의(義)의 맏아들 호은열(扈殷說)이 광익효절정난안사공신(匡翼效節定難安社功臣)으로 보안군(保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보안(保安)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
     전주 호씨(全州扈氏)는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明)나라 장군(將軍)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난(亂) 후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호준(扈浚)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가구, 1,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67
  •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진주 형씨(晋州邢氏)의 시조(始祖)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인 형옹(邢 )으로 전(傳)한다.
    옹( )은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옹(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3세손 방(昉)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慶南) 진주(晋州) 반성(班城)에서 살았다. 방(昉)의 손자(孫子) 공미(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280년 (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征伐)하는 데 공(功)을 세워 지밀직사사(知 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방(昉)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방(昉)의 현손(玄孫) 찬(贊)이 조선조(朝鮮朝)에서 판도판소(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 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 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忠淸道兵馬使)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외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學問)으로 이름 났으며, 협(浹)은 효종(孝宗) 때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933
  • 현玄
    현玄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089
  • 허許
    허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181
  • 해씨(海氏)
    해씨(海氏)

     해씨(海氏)는 중국(中國) 설군(薛郡 : 산동성 제령도에 있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오계(五季 : 중국 고대 다섯 왕조를 달리 일컫던 말) 때 사람인 해진명(海眞明)과 인종(仁宗) 때 중궁(中宮)이었던 해수자(海壽者)란 사람이 사기(史記)에 등장된 인물이다.
     우리 나라 해씨(海氏)의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靈巖)과 목포·나주(羅州)를 비롯한 경남 김해(金海) 등지에 7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0가구, 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21
  • 함咸
    함咸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31
  • 한漢
    한漢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10

회원로그인

Copyright © 2001-2016 ITNANU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