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성주 도씨(星州都氏)
페이지 정보
본문
성주 도씨(星州都氏)
성주(星州)는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대 육가야국(六伽倻國)의 하나인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인데 신라(新羅)가 멸망시켜 본피현(本彼縣)이라 하다가 757년(경덕왕 16) 산안현(新案縣)으로 개칭하여 성산군(星山郡)에 속하였다. 그후 벽진군(碧珍郡)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 경산부(京山府)로 개칭하였다가 경종(景宗)이 강등하여 광평군(廣平郡)이 되었으나, 995년(성종 14) 대주도단련사(岱州都團練使)를 두었으며 현종(顯宗) 때 다시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하여 1군 14현을 영속하였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와서는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격한 후 성주(星州)로 고쳐 목(牧)을 두었고, 충선왕(忠宣王)이 다시 경산부로 강등하였으나 조선 태종(太宗)이 어태(御胎)를 이 곳의 조곡산(祖谷山)에 봉안(奉安)하고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인조(仁祖) 때 성산현(星山縣)으로 강등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성주군(星州郡)으로 개칭되었다.
도씨(都氏)는 중국 여양(黎陽 : 지금의 직예성 대명도) 사람인 도 계(都稽)가 한무제(漢武帝)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여가(呂嘉)의 반란을 평정하여 도씨(都氏)로 수성(受姓)한 것이 시초가 된다고 하며, 우리나라 도씨(都氏)는 도 계(都稽)의 후손 도 조(都祖)가 성제(成帝 : 중국 전한 제11대 황제, 제위기간 ; BC 32 ~ BC 7) 때 고구려(高句麗)에 건너와서, 동명왕(東明王)의 맏아들 유리(琉璃)가 이복동생인 비류(沸流), 온조(溫祚)와 왕권쟁탈을 벌일 때 크게 활약하여 유리를 왕위(王位)에 오르게 하였으며,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공헌한 후 우리나라에 살게 되면서부터 문호(門戶)가 열렸다. 그러나 [전고대방(典故大方)]과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문헌에는 백제(百濟) 개루왕(蓋婁王) 때의 정승(政丞) 도 미(都彌)를 도씨(都氏)의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이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도 미는 본래 백제 사람인데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정결하기로 소문 났었다. 왕이 그 소문을 듣고 그의 아내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하자 도 미의 두 눈을 도려낸 다음 배를 태워 멀리 추방해 버렸다.
그후 도 미는 고구려 땅에 가서 나물과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살다가 그를 쫓아온 아내와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일찌기 성주(星州) 고을에서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가문으로 알려져 온 도씨(都氏)는 고려 창업에 공훈을 세웠던 도 진(都 陳)이 정승(政丞)의 벼슬에 올라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성주(星州)에 세거(世居)하여 후손들이 성주를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성주도씨족보(星州都氏族譜)]에 의하면 고려 원종(元宗) 때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지낸 도 순(都順)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전서공파(典書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중랑장공파(中郞 將公派), 시승공파(侍丞公派), 찬성공파(贊成公派), 시중공파(市中公派), 봉차령공파(奉車令公派)등 크게 7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고려조에서 도씨(都氏)의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일세조(一世祖) 순(順)의 아들 충박(忠朴)이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역임했고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유도(有道)와, 종부시 판사(宗簿寺判事)에 추증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진 유덕(有德)을 아들로 두어 이들이 성주 도씨(星州都氏)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특히 순(順)의 현손(玄孫)인 홍정(洪正)은 고려 말에 도씨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人物)로서, 동양창 판관(東陽倉判官)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고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에 봉해진 효안(孝安)의 세째 아들로 출생하여 공민왕(恭愍王) 때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 문하시중(三重大匡輔國門下侍中)에 오르고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의 아들 길부(吉敷)도 우왕(禑王)때 이성계(李成桂)의 부장(副將)으로 충청과 전라도(全羅道)에 침입한 왜구를 황산(荒山)과 운봉(雲峰)에서 격퇴시켜 대광보국숭록대부로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에 오르고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88년(우왕 14) 1월에 일어난 이인임(李仁任)의 축출사건에 연루되어 화(禍)를 당했다. 한편 두문동(杜門洞) 72현의 중심인물인 응(膺)은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를 지냈으나 기사화변(己巳禍變)으로 아버지가 화를 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홍주의 노은동(魯隱洞)에 은거하였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창업하고 왕위에 오른 후 어릴적 친구인 그에게 옛 정을 못잊어 다섯 차례나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고려의 산하임을 고집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절의에감복한 태조(太祖)는 청송당(靑松堂)이란 호(號)를 내려 치하했고, 운천서원(雲川書院)과 경양사(景良祠)에 제향되었다. 봉차령(奉車令) 천우(千遇)의 아들 흥(興)은 공민왕(恭愍王) 때 무신(武臣)으로 왜구(倭寇)의 침입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벼슬은 상원수(上元帥)에 올랐고,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李芳遠)에게 피살되자 그의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중종(中宗)때 효행(孝行)으로 유명했던 형(衡)이 현량과(賢良科)에 올라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을 지냈으나 조광조(趙光祖)와 교유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당한 후 향리에서 학문으로 여생을 마쳤으며, 순조(純祖)때 효자명정(孝子命旌)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624년(인조 2) 이 괄 (李适)의 난에 공을 세운 응유(應兪)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했으며, [오현예설(五賢禮說)]을 편찬했다. 그의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성유(聖兪)와 평양서윤(平壤庶尹) 경유(慶兪)가 유명했으며, 신수(愼修)는 함흥 부사(咸興府使)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대구(大邱)의 용호서원(龍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성리학(性理學)으로 유림(儒林)의 존망을 받았던 신징(愼徵)은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仁宣王后 : 효종의 비)가 별세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 :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고 주부(主簿)를 거쳐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나가 많은 치적(治績)을 쌓아,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낸 영성(永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한 석훈(錫壎), 한성우윤(漢城右尹) 원결(元結)과 함께 가문(家門)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성주 도씨(星州都氏)는 남한에 총 11,191가구, 46,5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주(星州)는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대 육가야국(六伽倻國)의 하나인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인데 신라(新羅)가 멸망시켜 본피현(本彼縣)이라 하다가 757년(경덕왕 16) 산안현(新案縣)으로 개칭하여 성산군(星山郡)에 속하였다. 그후 벽진군(碧珍郡)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 경산부(京山府)로 개칭하였다가 경종(景宗)이 강등하여 광평군(廣平郡)이 되었으나, 995년(성종 14) 대주도단련사(岱州都團練使)를 두었으며 현종(顯宗) 때 다시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하여 1군 14현을 영속하였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와서는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격한 후 성주(星州)로 고쳐 목(牧)을 두었고, 충선왕(忠宣王)이 다시 경산부로 강등하였으나 조선 태종(太宗)이 어태(御胎)를 이 곳의 조곡산(祖谷山)에 봉안(奉安)하고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인조(仁祖) 때 성산현(星山縣)으로 강등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성주군(星州郡)으로 개칭되었다.
도씨(都氏)는 중국 여양(黎陽 : 지금의 직예성 대명도) 사람인 도 계(都稽)가 한무제(漢武帝)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여가(呂嘉)의 반란을 평정하여 도씨(都氏)로 수성(受姓)한 것이 시초가 된다고 하며, 우리나라 도씨(都氏)는 도 계(都稽)의 후손 도 조(都祖)가 성제(成帝 : 중국 전한 제11대 황제, 제위기간 ; BC 32 ~ BC 7) 때 고구려(高句麗)에 건너와서, 동명왕(東明王)의 맏아들 유리(琉璃)가 이복동생인 비류(沸流), 온조(溫祚)와 왕권쟁탈을 벌일 때 크게 활약하여 유리를 왕위(王位)에 오르게 하였으며,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공헌한 후 우리나라에 살게 되면서부터 문호(門戶)가 열렸다. 그러나 [전고대방(典故大方)]과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문헌에는 백제(百濟) 개루왕(蓋婁王) 때의 정승(政丞) 도 미(都彌)를 도씨(都氏)의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이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도 미는 본래 백제 사람인데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정결하기로 소문 났었다. 왕이 그 소문을 듣고 그의 아내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하자 도 미의 두 눈을 도려낸 다음 배를 태워 멀리 추방해 버렸다.
그후 도 미는 고구려 땅에 가서 나물과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살다가 그를 쫓아온 아내와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일찌기 성주(星州) 고을에서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가문으로 알려져 온 도씨(都氏)는 고려 창업에 공훈을 세웠던 도 진(都 陳)이 정승(政丞)의 벼슬에 올라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성주(星州)에 세거(世居)하여 후손들이 성주를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성주도씨족보(星州都氏族譜)]에 의하면 고려 원종(元宗) 때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지낸 도 순(都順)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전서공파(典書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중랑장공파(中郞 將公派), 시승공파(侍丞公派), 찬성공파(贊成公派), 시중공파(市中公派), 봉차령공파(奉車令公派)등 크게 7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고려조에서 도씨(都氏)의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일세조(一世祖) 순(順)의 아들 충박(忠朴)이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역임했고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유도(有道)와, 종부시 판사(宗簿寺判事)에 추증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진 유덕(有德)을 아들로 두어 이들이 성주 도씨(星州都氏)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특히 순(順)의 현손(玄孫)인 홍정(洪正)은 고려 말에 도씨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人物)로서, 동양창 판관(東陽倉判官)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고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에 봉해진 효안(孝安)의 세째 아들로 출생하여 공민왕(恭愍王) 때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 문하시중(三重大匡輔國門下侍中)에 오르고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의 아들 길부(吉敷)도 우왕(禑王)때 이성계(李成桂)의 부장(副將)으로 충청과 전라도(全羅道)에 침입한 왜구를 황산(荒山)과 운봉(雲峰)에서 격퇴시켜 대광보국숭록대부로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에 오르고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88년(우왕 14) 1월에 일어난 이인임(李仁任)의 축출사건에 연루되어 화(禍)를 당했다. 한편 두문동(杜門洞) 72현의 중심인물인 응(膺)은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를 지냈으나 기사화변(己巳禍變)으로 아버지가 화를 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홍주의 노은동(魯隱洞)에 은거하였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창업하고 왕위에 오른 후 어릴적 친구인 그에게 옛 정을 못잊어 다섯 차례나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고려의 산하임을 고집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절의에감복한 태조(太祖)는 청송당(靑松堂)이란 호(號)를 내려 치하했고, 운천서원(雲川書院)과 경양사(景良祠)에 제향되었다. 봉차령(奉車令) 천우(千遇)의 아들 흥(興)은 공민왕(恭愍王) 때 무신(武臣)으로 왜구(倭寇)의 침입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벼슬은 상원수(上元帥)에 올랐고,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李芳遠)에게 피살되자 그의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중종(中宗)때 효행(孝行)으로 유명했던 형(衡)이 현량과(賢良科)에 올라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을 지냈으나 조광조(趙光祖)와 교유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당한 후 향리에서 학문으로 여생을 마쳤으며, 순조(純祖)때 효자명정(孝子命旌)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624년(인조 2) 이 괄 (李适)의 난에 공을 세운 응유(應兪)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했으며, [오현예설(五賢禮說)]을 편찬했다. 그의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성유(聖兪)와 평양서윤(平壤庶尹) 경유(慶兪)가 유명했으며, 신수(愼修)는 함흥 부사(咸興府使)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대구(大邱)의 용호서원(龍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성리학(性理學)으로 유림(儒林)의 존망을 받았던 신징(愼徵)은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仁宣王后 : 효종의 비)가 별세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 :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고 주부(主簿)를 거쳐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나가 많은 치적(治績)을 쌓아,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낸 영성(永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한 석훈(錫壎), 한성우윤(漢城右尹) 원결(元結)과 함께 가문(家門)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성주 도씨(星州都氏)는 남한에 총 11,191가구, 46,5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