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본관 신창 맹씨(新昌孟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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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2:42 조회 2,03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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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 맹씨(新昌孟氏)

 신창(新昌)은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굴직현(屈直縣)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 王)이 기량현(祁糧縣)으로 고쳐 온정군(溫井郡:온양)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高麗) 초에 신창현(新昌縣)으로 개칭히여 1018 년(현종 9)에 천안부(天安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그후 조선조에 와서는 태조(太祖)가 만호(萬戶)를 없애고 1414년(태종 14)에 온수현(溫水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신창현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 1914년 행정구역 개칭에 따라 아산군(牙山郡)에 속하여 지금의 아산군 신창면이 있다. 맹씨(孟氏)는 중국 평릉(平陵:협서성 관중 도)에 연원(淵源)을 두고,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나라 15대 임금인 환공(桓公)의 아들 경부(慶父)의 호(號)가 맹손(孟孫)이라서 맹(孟) 자(字)를 따서 성(姓)으로 삼았다고 하며, 아성(亞聖) 맹자(孟子)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진다. 기원전 372년 경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에 있었던 추(趨)에서 태어난 맹자(孟子)는 공자(孔子)의 사상을 발전시켜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인간(人間)의 본성(本性)이라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으며, 제(齊), 양(梁) 등의 제후(諸侯)에게 왕도(王道)를 바탕으로 한 인의(仁義)의 정치를 권하다가 고향에 돌아와서 제자와 토론하였고, 유학(儒學)의 정통(正統)으로 숭앙(崇仰)되어 불후(不朽)의 이름을 날렸다. 어릴 때 현모(賢母) 장씨의 밑에서 자라면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아들의 면학을 위하여 세 번을 이사함)>와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공부를 중단하고 돌아온 아들을 꾸짖으며 짜던 베틀의 씨 날을 칼로 자름)>의 유명한 고사(故事)를 남겼다. 우리나라 맹씨(孟氏)는 맹자(孟子)의 40세손 맹승훈(孟承訓)이 888년(신라 진성왕 2) 당(唐)나라 한림원(翰林院)의 오경박사(五經博士)로 유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경전(經典)을 가지고 동래(東來)한 것 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하나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맹씨의 본관(本貫)은 신창(新昌)을 비롯하여 온양(溫陽), 파주(坡州), 양주(楊州), 청주(淸州), 안읍(安邑:옥천지방), 천안(天安), 전주(全州) 등 32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거나 신창과 온양을 제외한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신창 맹씨(新昌孟氏)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거쳐 예부 전서(禮部典書)에 오른 맹 의(孟義)를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당대에 학자로서도 유명했던 의(儀)는 역신 조 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충선왕(忠宣王) 때 신창백(新昌伯)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本貫)을 신창(新昌)으로 하게 되었다. 신창 맹씨의 역대 인물을 살펴보면 일세조의(儀)의 아들 유(裕)가 고려(高麗)에 이부 상서(吏部尙書)와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역임했고, 고려가 망하자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등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충절(忠節)을 지켰다.유의 아들 희도(希道)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어사(翰林御史), 수문전 제학(修文殿提學), 한성윤(漢城尹) 등을 지내며 길 재(吉再), 정몽주(鄭夢周)와 교유했고, 공양왕(恭讓王) 때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를 받았으나 어지러운 정계(政界)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온양(溫陽) 오봉산(五峯山)에서 은거(隱居)하면서 호(號)를 동포( 東浦)라 하였다.
 희도(希道)의 아들이 조선조의 대표적인 명상(名相)으로 손꼽히는 고불(古佛) 사성(思誠)이다. 고려 말의 명장 최 영(崔瑩)의 손녀사위이기도 한 그는 천성(天性)이 효도하고 청백(淸白)하여 정승의 벼슬 에서도 권세(權勢)를 철저히 배제했고, 청결하고 간고(簡古)하여 늘 상민차림으로 소(牛)를 타고 나들이를 하여 보는 이들은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뵈러 온양에 오가는 때에 각 고을의 관가에 들리지 않고 늘 간소한 행차를 하였는데, 어느날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 원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長好院)에서 기다렸더니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 그가 하인더러 이르기를 "네,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그 하인이 돌아와 고했더니 두 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 밑 깊은 못에 인(印)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후일 사람들은 그 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세종조상신편(世宗朝相臣編)>에 보면 그에 대한 유명한 <공당문답(公堂問答)>의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그가 온양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龍仁) 여원(旅院)에 들렸더니, 행차를 성하게 꾸민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그는 아래층에 앉았었다. 누상에 오른 자는 영남(嶺南)에 사는 사람으로서 의정부 녹사(議政府錄事) 시험에 응하러 가는 자였다. 그 선비는 맹정승을 보고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으로 문답하는 말 끝에 반드시 '공' '당'하는 토를 넣기로 하였다.
 맹정승이 먼저 "무엇하러 서울에 올라가는 공"하였더니,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하였다. 다시 "무슨 벼슬인공"하니 "녹사 시험보러 간당" 하자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하니 그 사람은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하였다. 후일 맹정승이 의정부에 앉아있는데 그 사람이 시험을 치러 들어왔다.
 그 사람은 눈앞의 정승이 전날에 장기를 두며 농담하던 그 노인인줄 알지 못했으나 맹정승은 그를 알아보고 "어떠한공" 하니, 그 사람이 비로서 깨닫고 갑자기 말하기를 "죽었지당"하니 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김으로 맹정승이 그 까닭을 애기하자 모든 재상이 크게 웃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고, 맹정승의 추천으로 여러 차례 고을의 수령을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던 맹정승은 죽어서  곁에 남긴 것이 한 자루의 피리뿐이었다고 하며, 유명한 황 희(黃喜) 정승과 함께 조선 초기의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여 후세의 신망받는 명상으로 일컬어졌다.
 사성(思誠)의 아들 귀미(歸美)와 득미(得美)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증손(曾孫) 석흠(碩欽)이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平定)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신창군(新昌君)에 봉해졌고, 후손  세형(世衡)은 김장생(金長生)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워 1623년(인조 1) 문과에 급제하고 호조 정랑(戶曹正郞), 선산(善山), 장흥(長興)의 부사(府使)를 거쳐 6차례나 시정(侍正)을 지냈다.
 그외 세형의 아들 주서(胄瑞)가 황해(黃海)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내고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주서의 아들 만택(萬澤)은 관찰사와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고 지리(地理)에 글씨에 능했다.
 근대에 와서는 고종(高宗) 때 의병(義兵)을 모아 동학난(東學亂)으로 혼란해진 치안(治安)을 유지하고, 민비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군(日本軍)과 항전하다가 순절한 영재(英在)가 유명했다.
 신창 맹씨는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11,000명, 1975년에는 2,928가구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3,926가구, 16,4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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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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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賈


    간簡


     


    갈葛


    감甘


     


    강姜


    강康


    강强


    강彊


     


    강剛




    개介


     


    견堅


    견甄


    경慶


    경景


    계桂


    고高


    곡曲


    공孔


    공公


    곽郭




    구具


    구丘


     


    국國


    국菊


    군君


    궁弓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나羅


    남궁南宮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단段


    단端


    당唐


    대大


    도都


    도陶


    도道




    독고獨孤


    돈頓


    돈敦


    동董


    동방東方


    두杜


     


    류柳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명明


    모牟


    모毛


    목睦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方


    방房


    방龐


    방邦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빈彬


    빈賓





    사史




    사謝


     


    사공司空


    사씨舍氏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서문西門




    석石


    석昔


    선宣


    선우鮮于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舜


    순淳


    순荀


    순順


    승承




    승昇


    시施


    시柴


     


    신申


    신辛


    신愼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양楊


    양樑


    양襄


    어魚


    엄嚴


    여呂


    여余


    여汝


    연延


    연燕




    연連


    염廉


    염閻


    영影


    영永


    예芮


    오吳


    오伍


     


    옥玉


    온溫


    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芸


    운雲


    원元


    원袁


    위韋




    위魏


    유劉


    유兪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은恩


    음陰


    응應


     




    이李


    이伊


    이異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蔣


    장章


    장莊


    전全




    전田


    전錢


    점占


    정鄭


    정丁


    정程


    제諸


    제갈諸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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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황보씨(黃州黃甫氏)

     黃州는 본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다. 주요성씨로 황보(皇甫)·황(黃)·동(董)·변(邊)·최(崔)씨 등이 있었다. 黃州黃甫氏는 영천황보(永川皇甫)에서 분적(分籍)하여 黃州를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시조는 충의공(忠義公) 황보제공(皇甫悌恭)으로 태위(太尉)를 지냈다.
     이들의 1930년대 분포사항을 보면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인제리에 12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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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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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黃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174
  • 후씨(后氏)
    후씨(后氏)

     后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났으며 본관(本貫)은〈唐寅〉단본이다.
     1930년 당시 강원도에 3가구가 있었는데, 회양군 상북면 오랑리(淮陽郡 上北面 五郞里)에 살던 후춘성씨(后春成氏)는 그의 11代祖가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후씨(后氏)는 나타나지 않아 정확한 가구와 인구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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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은 진주의 고호로 경상남도의 남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며,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문무왕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고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로 고쳤다.
     그 뒤 혜공왕 때에 정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시대에는 한때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진주목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으며 1910년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 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1949년에 부(府) 시(市)로 개칭되었다. 진양 화씨는 중국 낭야 사람인 화명신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명신은 본성이 화씨로서, 조상 대대로 명나라에서 벼슬하던 교목세가의 후손으로 낭야의 화촌대에 살다가 오랑캐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개탄하며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
     조선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화씨(花氏)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향화의 의리다"하며 명신을 예우하고 화씨의 성을 하사하고, 경성군에 봉했다. 그러나 상계의 실전으로 계대를 밝히지 못하여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진주에 세거한 후손 섭(燮)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선대부에 오른 섭(燮)의 아들 봉상(奉祥)과 영조 때 무관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올랐으며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일취가 유명했다.
     그외 절충장군 동휘와 정릉 참봉 덕봉(德鳳), 통덕랑 윤택(允澤)은 오우장을 지낸 정한·응한, 참판 석한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 화씨는 남한에 총 400가구, 1,5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92
  • 홍洪
    홍洪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43
  •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 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定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京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 온 옛 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중국(中國) 안정(安定)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호안국(胡安國)의 16세손 호극기(胡克己)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극기(克己)는 명(明)나라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라 1643년(인조 21) 답례사(答禮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 멸망되자 "내가
    천조(天朝)에 복명(復命)치 못하고, 조종(祖宗)의 땅이 전란(戰亂)에 짓밝히니 창천(蒼天)도 무심(無心)하다. 차라리 동해(東海)에서 죽을지언정 고국(故國)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하고 경기도(京畿道) 가평군(加平郡) 대명연(大明淵)에 은거(隱居)했다가, 함경도(咸鏡道) 북청군(北靑郡) 덕성면(德城面) 중장내(中庄內)에 초가(草家)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라 이름짓고 여생(餘生)을 보내니, 조선(朝鮮)의 효종(孝宗)이 그의 충성심(忠誠心)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租稅)로 녹(祿)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극기(克己)의 본향지(本鄕地)인 중국(中國)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기(克己)의 맏아들 제백(濟伯)이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고, 후손 사룡(士龍)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녹사(綠事)를 지낸 태기(泰起), 충찬위(忠贊衛)에 오른 시악(時악)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가구, 7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27
  •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保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扶安)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희안(喜安)으로 고쳐 고부(古阜)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부령현(扶寧縣)의 겸임을 삼았다. 우왕(禑王) 때 보안현(保安縣)을 설치하였으며 1415년(태종 15)에 부안(扶安)에 편입시켰다.
     호씨(扈氏)는 고려(高麗) 창업(創業)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호의(扈義)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侯伯濟) 견훤군(甄萱軍)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왕(王 :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보안 호씨(保安扈氏)는 의(義)의 맏아들 호은열(扈殷說)이 광익효절정난안사공신(匡翼效節定難安社功臣)으로 보안군(保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보안(保安)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
     전주 호씨(全州扈氏)는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明)나라 장군(將軍)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난(亂) 후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호준(扈浚)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가구, 1,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67
  •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진주 형씨(晋州邢氏)의 시조(始祖)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인 형옹(邢 )으로 전(傳)한다.
    옹( )은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옹(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3세손 방(昉)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慶南) 진주(晋州) 반성(班城)에서 살았다. 방(昉)의 손자(孫子) 공미(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280년 (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征伐)하는 데 공(功)을 세워 지밀직사사(知 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방(昉)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방(昉)의 현손(玄孫) 찬(贊)이 조선조(朝鮮朝)에서 판도판소(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 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 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忠淸道兵馬使)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외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學問)으로 이름 났으며, 협(浹)은 효종(孝宗) 때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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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玄
    현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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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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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씨(海氏)
    해씨(海氏)

     해씨(海氏)는 중국(中國) 설군(薛郡 : 산동성 제령도에 있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오계(五季 : 중국 고대 다섯 왕조를 달리 일컫던 말) 때 사람인 해진명(海眞明)과 인종(仁宗) 때 중궁(中宮)이었던 해수자(海壽者)란 사람이 사기(史記)에 등장된 인물이다.
     우리 나라 해씨(海氏)의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靈巖)과 목포·나주(羅州)를 비롯한 경남 김해(金海) 등지에 7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0가구, 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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