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본관 여흥 민씨(驪興閔氏)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2:45 조회 1,848 댓글 0

본문

여흥 민씨(驪興閔氏)

 여흥은 경기도 남동단에 위치한 여주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內斤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황효현(黃驍縣)으로 개명하여 기천군(沂川郡)의 영현이 되었으며, 고려 초에 황려현(黃驪縣)으로 고치고 1018 년(현종 9) 원주에 속하였다가 고종 때 영의(永義)로 개칭되었다.
 1305년(충렬왕 31) 여흥군으로 승격한 후 조선 태종 때 음죽현(陰竹縣)을 북부를 편입하여 여흥부로 승격되면서 관할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변경되었다. 예종조에 천녕현(川寧縣)을  병합하여 여주목으로 하고 1501년 충주부의 관할하에 두었다가 1895년 충주부 여주군으로 칭하였으며 1914년 경기도 여주군이 되었다.
 민씨는 중국 농서현( 西縣:감숙성 난산도)에서 계출된 성씨로 성인 공자의 10제자 중 한 사람인 민 손(閔 損:자는 자건, 노나라 현인)의 후손 민칭도(閔稱道:상의봉어를 역임)가 고려 중엽에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여흥에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민씨의 시원(始源)이 된다.
 민씨의 본관은 여흥을 비롯하여 황려(黃驪)·영주(榮州)·여주(驪州)·대전(大田)·해남 등 32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여흥 민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하다.
 고려 말기에서부터 명문의 지위를 굳혀 온 민씨는 시조의 증손 영모(令謨)가 고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을 지내고 명종이 즉위하자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태자 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고, 신종조(神宗朝)에서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오른 아들 식(湜)과 판병부사(判兵部事)와 태자 소보(太子小保)를 지낸 공규(公珪) 형제를 낳아 가문의 양대 산맥을 이루어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두르러진 인맥을 살펴보면 상서공(尙書公) 식(湜)의 후손에서 그의 증손 지(漬)가 충렬왕과 충선왕조에 걸쳐 원나라와의 외교에 공을 세웠고 충숙왕 때 수정승(守政丞)으로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으며 문장이 탁월하여「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와「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저술했고, 아들 상정(祥正)과 상백(祥伯)이 뛰어났다.
 1301년(충렬왕 27) 문과에 급제한 상정(祥正)은 충숙왕 때 장령(掌令)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지냈으며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고려 말에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내고 조선 개국에 반기를 들었던 안부(安富)는 상서공(尙書公) 식(湜)의 6세손으로 두문동에 은거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고, 상정(祥正)의 손자 여익(汝翼:도평의사 현의 아들)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개국 3등공신에 올랐으며 태종 때 공조판서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세종조에 호조 판서로 여천부원군(驪川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한편 여흥군 지(漬)의 증손 안인(安仁:찬성사 선의 아들)은 공민왕 때 삼사 우윤(三司右尹)을 거쳐 조선이 개국된 후 왕명으로 악기(樂器)를 정리하고 제도를 바로잡아 대례(大禮)를 완성했으며 그의 아우 유의(由誼)는 판서(判書)를 지냈다.
 태자 소보(太子小保) 공규(公珪)의 증손 종유(宗儒)는 충렬왕 때 삼사 우윤(三司右尹)을 거쳐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역임했고 충혜왕 때 대제학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使)를 지냈으며 전고에 밝아 명망이 높았다.
 대사헌으로 여평군(驪平君)에 봉해졌던 적(종유의 아들)의 아들 사평은 일찍이 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던 공으로 공신의 호를 받고 첨의참리가 되었으며 시서를 즐기고 학문에 뛰어나 당대의 학자였던 이제현(李齊賢)·정자후(鄭子厚) 등과 함께 문명을 떨쳤다.
 특히 조선 초기에 가문을 드러낸 인물로는 여평군 적의 손자 제(霽 : 여원군 변의 아들)와 개(開)의 형제가 두드러진다. 공민왕 때 19세로 문과에 올랐던 제는 창왕 대 예문관 제학과 예조판서에 이러 한양부윤을 역임했고, 조선 태조 때 정당문학이 되어 여흥백에 봉해졌으며 태종의 국구로 잡신을 섬기는 음사를 지극히 미워하여 그가 거처하는 관청이나 집의 벽에는 화공을 시켜 몽둥이를 든 하인과 개가 무당과 중을 쫓는 모양의 그름을 그리게 하여 붙여 두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치와 오만을 배격하고 건강 양성에 힘을 쏟아 병자에게 약을 주는 방을 전국에 보내 보건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이와 같은 그의  관념으로 슬하의 아들 이름을 무구(참지승추부사·여강군)·무질(우군도총제·여성군)·무휼(한성윤)·무회(예문관 제학·여산군) 등으로 지었다.
 변의 막내아들 개(開)는 공양왕 때 한성부윤과 대사헌을 지내고 정도전 일파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이를 반대했다가 피살 직전에 방원의 저지로 위기를 넘겼으며 그의 둘째 아들 불탐이 세종 때 등과하여 경상도 감사와 이조 참판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어 명성을 얻었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음모에 완강히 거절했던 신(개의 손자, 불해의 아들)은 계유정난 때 현릉에 비를 세우는 공사를 감독하고 있다가 수양대군이 보낸 자객인 삼군진무 서 조에 의하여 다섯 아들과 함께 무참히 참살당했다.
 대제학 유의 7세손 제인(사간 수의 손자, 전적 귀손의 아들)은 중종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를 했으며 인종 때 위사이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명종이 어려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가 밀지를 내려 인종의 장인 윤 임과 류인숙·류 관 등을 제거하려 하자 그는 윤 임 일파의 처벌은 마땅하나 평지풍파를 일으켜 민심을 동요시키지 말 것을 건의했다.
 명종과 선조대의 명신 기(현령 세류의 아들)은 여흥 민씨의 중흥 인물이다. 다섯의 나이로 천자문을 배울 때 진(晋)·초(楚) 두 글자를 익힐 무렵 아버지에게 묻기를 "진나라와 초나라가 있기 전에는 이 글자의 뜻을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하여 아버지를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명종조에 좌의정 윤 개가 정치를 자기 주장대로 하는 독재성 때문에 조정이 모두 그를 싫어했을 때 기는 윤 개의 면전에서 "거만한 용이 후회함이 있다"라고 충고했으며 후에 윤 개가 왕의 미움을 받아 "대신에 합당치 않다"는 전교를 내렸을 때 기는 "대신을 예로써 대우해야 하며, 간하는 신하의 말을 받아들여 용납해야 합니다."하며 본인 앞에서는 대담하게 충고하고 또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제하는 데 힘써 그의 훌륭한 인격으로 선조가 즉위하자 우의정에 올랐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역리(易理)를 공부했던 순(純:대제학 유의 6대손)은 주정설(主靜說)을 생활을 철학으로 삼아 개성있는 일생을 살았으며, 제인(齊仁)의 현손 광훈(光勳)은 아들 정중(鼎重), 손자 진장(鎭長)과 함께 <삼세문장(三世文章)>으로 명성을 떨쳤다 1628년(인조 6) 알성문과에 장원했던 광훈은 정언과 지평을 거쳐 홍문관 교리와 사간을 지낸 후 효종 때 승지에 오르고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그의 맏아들 시중은 현종 때 대사헌을 역임하고 형조 참판으로 치사했으며 충후한 인품과 학행으로 유명했다.
 거유(巨儒)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정중(鼎重)은 인조 때 장원으로 등과하여 주요 관직을 역임한 후 참찬의정부사를 지냈으나 숙종이 즉위하자 남인의 득세로 장흥부에 유배되었다가 경신대출적으로 풀려나와 좌의정에 올랐다.
 숙종 때 노론(서인)의 증진으로 경서에 밝고 문장이 뛰어나 사림의 명망이 높았던 유중은 영돈령부사로 여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장흥의 연곡서원과 벽동의 구봉서원에 제향되었고, 그의 딸이 남인과 서인의 격렬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폐비의 비운을 겪었던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이다.
 광훈(光勳:할아버지)·정중(鼎重:아버지)에 이어 모두 과거에 장원했던 진장(鎭長)은 형조와 호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이 내려졌다.
 유중의 아들 진원(鎭遠)은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당시 누이인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검열로 등용되어 병조 정랑과 사복시정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 서원의 남설로 지방관철의 재정 소모가 심하고 당쟁의 원인이 된다고 상소하여 서원 건립을 줄이게 했고, 경종(景宗) 때 공조 판서로 실록청 총재관이 되어「숙종실록」편찬에 참여했으며 신임사화로 성주(星州)에 유배되었다가 1724년(경종 4) 풀려나와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영조 때는 판중추부사가 되어「가족제복론」을 찬진했으며 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소론의 영수 이광좌(李光佐)와 탕평을 기약했으나 끝까지 소론에 대한 반격을 멈추지 않고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기로소에 들어간 후 봉조하가 되었고 문장과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이조 판서 진주의 아들 응수(應洙)와 좌의정 진원(鎭遠)의 손자 백상(百祥)도 우의정을 역임하여 명문의 지위를 굳혔으며 첨지중추부사 단현(端顯)의 아들 치구(致九)는 흥선대원군의 장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하자 공조 판서를거쳐 판돈령부사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여양부원군 유중(維重)의 5대손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치록이 딸이 명성왕후(조선 제 26대왕 고종의 비)가 되자 여흥 민씨의 세도 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명성왕후는 16세 때 왕비로 뽑혀 한말의 격동기에 국내외의 정치적 거센 바람을 한 몸으로 감당하여 대원군고 권력 싸움으로 파란 많은 일생을 살았다.
 그밖의 인물로는 치록의 아들 승호(升鎬)가 여동생 명성왕후를 도와 국정 전반에 참여하여 민씨 일족의 거두로서 세도가 등등했으며, 겸호는 고종 때 판돈평부사를 지내고 정치제도의 개혁 후에 선혜청 당상관에 올라 영의정에 오른 규호(奎鎬)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한말의 순국열사 영환(泳煥:겸호의 아들, 태호에게 입양)은 여흥 민씨가 자랑하는 인물로 18 77년(고종 14) 문과에 급제, 동부승지와 대사성을 거쳐 예·형·병조의 판서를 비롯한 한성판윤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한 후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백관을 인솔하여 궁궐에 나가 이를 반대했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자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에 모여 상소를 의논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전동(典洞) 이완식(李完植)의 집에 가서 <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로 시작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했다. 그가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지하실에 간직하고 그 방을 봉했는데 이듬해 봄 그 자리에서 대가 솟아 올라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충절을 말하는 혈죽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외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상해로 망명한 영익(泳翊),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종식(판서 영상의 아들), 상해임시정부와의 연락을 담당했던 강( ), 의병장으로 강원·충청·경상도를 누비며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긍호(肯鎬), 대동단에 가입하여 사재를 털어 임시정부 군자금을 조달했던 치도(致道), 신민회 회원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형식(衡植), 대한민국청년단 재무부장 제호(濟鎬), 중국정부와 협의하여 무장 경위대를 조직하고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필호(弼鎬) 등이 국운이 기울어가는 구한말과 일제 암흑기에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서 겨레와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절의 가문인 여흥 민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민씨는 남한에 총 33, 706가구, 141,3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물 검색
전체 588건 1 페이지
  •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가賈


    간簡


     


    갈葛


    감甘


     


    강姜


    강康


    강强


    강彊


     


    강剛




    개介


     


    견堅


    견甄


    경慶


    경景


    계桂


    고高


    곡曲


    공孔


    공公


    곽郭




    구具


    구丘


     


    국國


    국菊


    군君


    궁弓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나羅


    남궁南宮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단段


    단端


    당唐


    대大


    도都


    도陶


    도道




    독고獨孤


    돈頓


    돈敦


    동董


    동방東方


    두杜


     


    류柳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명明


    모牟


    모毛


    목睦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方


    방房


    방龐


    방邦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빈彬


    빈賓





    사史




    사謝


     


    사공司空


    사씨舍氏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서문西門




    석石


    석昔


    선宣


    선우鮮于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舜


    순淳


    순荀


    순順


    승承




    승昇


    시施


    시柴


     


    신申


    신辛


    신愼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양楊


    양樑


    양襄


    어魚


    엄嚴


    여呂


    여余


    여汝


    연延


    연燕




    연連


    염廉


    염閻


    영影


    영永


    예芮


    오吳


    오伍


     


    옥玉


    온溫


    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芸


    운雲


    원元


    원袁


    위韋




    위魏


    유劉


    유兪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은恩


    음陰


    응應


     




    이李


    이伊


    이異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蔣


    장章


    장莊


    전全




    전田


    전錢


    점占


    정鄭


    정丁


    정程


    제諸


    제갈諸葛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855
  • 황주황보씨(黃州黃甫氏)
    황주황보씨(黃州黃甫氏)

     黃州는 본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다. 주요성씨로 황보(皇甫)·황(黃)·동(董)·변(邊)·최(崔)씨 등이 있었다. 黃州黃甫氏는 영천황보(永川皇甫)에서 분적(分籍)하여 黃州를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시조는 충의공(忠義公) 황보제공(皇甫悌恭)으로 태위(太尉)를 지냈다.
     이들의 1930년대 분포사항을 보면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인제리에 12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406
  • 황보皇甫
    황보皇甫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79
  • 황黃
    황黃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40
  • 후씨(后氏)
    후씨(后氏)

     后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났으며 본관(本貫)은〈唐寅〉단본이다.
     1930년 당시 강원도에 3가구가 있었는데, 회양군 상북면 오랑리(淮陽郡 上北面 五郞里)에 살던 후춘성씨(后春成氏)는 그의 11代祖가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후씨(后氏)는 나타나지 않아 정확한 가구와 인구수는 알 수 없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71
  •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은 진주의 고호로 경상남도의 남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며,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문무왕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고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로 고쳤다.
     그 뒤 혜공왕 때에 정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시대에는 한때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진주목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으며 1910년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 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1949년에 부(府) 시(市)로 개칭되었다. 진양 화씨는 중국 낭야 사람인 화명신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명신은 본성이 화씨로서, 조상 대대로 명나라에서 벼슬하던 교목세가의 후손으로 낭야의 화촌대에 살다가 오랑캐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개탄하며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
     조선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화씨(花氏)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향화의 의리다"하며 명신을 예우하고 화씨의 성을 하사하고, 경성군에 봉했다. 그러나 상계의 실전으로 계대를 밝히지 못하여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진주에 세거한 후손 섭(燮)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선대부에 오른 섭(燮)의 아들 봉상(奉祥)과 영조 때 무관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올랐으며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일취가 유명했다.
     그외 절충장군 동휘와 정릉 참봉 덕봉(德鳳), 통덕랑 윤택(允澤)은 오우장을 지낸 정한·응한, 참판 석한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 화씨는 남한에 총 400가구, 1,5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73
  • 홍洪
    홍洪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452
  •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 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定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京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 온 옛 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중국(中國) 안정(安定)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호안국(胡安國)의 16세손 호극기(胡克己)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극기(克己)는 명(明)나라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라 1643년(인조 21) 답례사(答禮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 멸망되자 "내가
    천조(天朝)에 복명(復命)치 못하고, 조종(祖宗)의 땅이 전란(戰亂)에 짓밝히니 창천(蒼天)도 무심(無心)하다. 차라리 동해(東海)에서 죽을지언정 고국(故國)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하고 경기도(京畿道) 가평군(加平郡) 대명연(大明淵)에 은거(隱居)했다가, 함경도(咸鏡道) 북청군(北靑郡) 덕성면(德城面) 중장내(中庄內)에 초가(草家)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라 이름짓고 여생(餘生)을 보내니, 조선(朝鮮)의 효종(孝宗)이 그의 충성심(忠誠心)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租稅)로 녹(祿)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극기(克己)의 본향지(本鄕地)인 중국(中國)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기(克己)의 맏아들 제백(濟伯)이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고, 후손 사룡(士龍)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녹사(綠事)를 지낸 태기(泰起), 충찬위(忠贊衛)에 오른 시악(時악)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가구, 7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719
  •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保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扶安)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희안(喜安)으로 고쳐 고부(古阜)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부령현(扶寧縣)의 겸임을 삼았다. 우왕(禑王) 때 보안현(保安縣)을 설치하였으며 1415년(태종 15)에 부안(扶安)에 편입시켰다.
     호씨(扈氏)는 고려(高麗) 창업(創業)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호의(扈義)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侯伯濟) 견훤군(甄萱軍)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왕(王 :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보안 호씨(保安扈氏)는 의(義)의 맏아들 호은열(扈殷說)이 광익효절정난안사공신(匡翼效節定難安社功臣)으로 보안군(保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보안(保安)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
     전주 호씨(全州扈氏)는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明)나라 장군(將軍)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난(亂) 후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호준(扈浚)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가구, 1,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87
  •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진주 형씨(晋州邢氏)의 시조(始祖)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인 형옹(邢 )으로 전(傳)한다.
    옹( )은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옹(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3세손 방(昉)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慶南) 진주(晋州) 반성(班城)에서 살았다. 방(昉)의 손자(孫子) 공미(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280년 (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征伐)하는 데 공(功)을 세워 지밀직사사(知 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방(昉)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방(昉)의 현손(玄孫) 찬(贊)이 조선조(朝鮮朝)에서 판도판소(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 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 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忠淸道兵馬使)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외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學問)으로 이름 났으며, 협(浹)은 효종(孝宗) 때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4141
  • 현玄
    현玄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71
  • 허許
    허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73
  • 해씨(海氏)
    해씨(海氏)

     해씨(海氏)는 중국(中國) 설군(薛郡 : 산동성 제령도에 있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오계(五季 : 중국 고대 다섯 왕조를 달리 일컫던 말) 때 사람인 해진명(海眞明)과 인종(仁宗) 때 중궁(中宮)이었던 해수자(海壽者)란 사람이 사기(史記)에 등장된 인물이다.
     우리 나라 해씨(海氏)의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靈巖)과 목포·나주(羅州)를 비롯한 경남 김해(金海) 등지에 7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0가구, 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27
  • 함咸
    함咸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429
  • 한漢
    한漢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95

회원로그인

Copyright © 2001-2016 ITNANU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