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거제 반씨(巨濟潘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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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巨濟)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해안(南海岸)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소가야국(小伽倻國)의 일부였던 독로국(瀆盧國)에 속했다가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상군(裳郡)이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에 거제로 개칭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거창과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으로 불리다가, 1422년(세종4)에 거제현(巨濟縣)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1895년(고종32)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반씨(潘氏)는 중국 형양(滎陽:지금의 하남성 개봉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주(周)나라 문왕(文王:무왕의 아버지)의 여섯째 아들 필공(畢公) 고(高)의 아들 계손(季孫)이 반(潘) 땅에 봉해져서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은 땅이름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로 유학자(儒學者)와 재상을 많이 배출하여 명족(名族)으로 일컬어진 반씨는 송(宋)나라 출신인 반 부(潘 阜)가 이종(理宗) 때 문과에 장원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몽고정벌(蒙古征伐)을 간청했다.
그런데 간신(奸臣) 가사도(賈似道)가 그를 미워하여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어 은밀히 죽이게 하였으나, 원(元)의 세조(世祖:흘필렬)는 문무를 겸비한 그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죽이지 않고 벼슬을 내려 부하로 삼으려 하였다. 그는 사양한 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원재의 딸, 충렬왕비가 됨)를 배종(陪從)하고 동래(東來)하여 고려원종(元宗)과 충렬왕조(忠烈王朝)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일본정벌에 공을 세워 시중(侍中)에 오르고 기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65세에 벼슬을 사직하고 거제(巨濟)로 내려가 정사(精舍)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반씨(潘氏)의 문호가 열리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정(挺)과 유항(有抗)을 시작으로 가세(家勢)가 일어나 후손들이 전국 각지에 산거하며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따라 기성(岐城), 충주(忠州), 남평(南平), 결성(結城), 청도(淸道) 홍천(洪川), 광주(光州) 등 17본으로 갈리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거제반씨정미대봉보(巨濟潘氏丁未大同譜)'에는 거제 반씨로 합보(合譜)하였다. 가문을 중흥시킨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 부(阜)의 증손(曾孫) 익순(益淳)이 고려 우왕(禑王) 때 문하평리(門下評理)을 거쳐 좌시중(左侍中)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덕해(德海)와 복해(福海)이 현달하여 명문의 기틀을 마련했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신(名臣)으로 우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복해는 왕이 사냥을 나가 말에서 떨어져 멧돼지의 습격을 받게 될 순간 활을 쏘아 왕을 위기에서 해낸 일화가 전하며, 밀직부사(密直府使)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거쳐 추충양절익대좌명보리공신(推忠亮節翊戴佐命輔理功臣)에 올라 제성부원군(濟城府院君)에 봉해졌으나, 최 영(崔瑩)장군을 암살하려던 조 반, 임견미(林堅味)와의 관련 혐의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가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복권되었다.한편 복해의 아들 자건(自建)은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의 사위로 조선이 개국된 후 태종조(太宗朝)에서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고 영평군에 봉해졌으며, 손자 충(忠)도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좌명일등공신(開國原從佐命一等功臣)로 해양군(海陽君)에 봉해졌다가 광주백(光州伯)에 추봉되었다. 세칭 절효선생(節孝先生)으로 불리웠던 유(儒)는 판도판서(版圖判書) 덕해(德海)의 손자로서 부친상을 당하자 여막(廬幕)에서 3년동안 시묘(侍墓)하여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이조 정랑(吏曹正郞) 호(湖)의손자 효손(孝孫)은 세조(世祖) 때 황주 목사(黃州牧使)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회령 부사(會寧部事)로 나갔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한 우형(佑亨)은 당세의 석학(碩學)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4등공신(靖國四等功臣)으로 이성군(利城君)에 봉해졌으며, 대사헌(大司憲)과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내고 기성군(岐城君)에 개봉(改封)되었다.
청렴근엄(淸廉謹嚴)한 관리로 명성을 떨쳤던 석평(碩枰)은 1472년(성종 3) 부사과(副司果) 서린(瑞麟)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조광조(趙光祖)의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중종(中宗)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주요 내외직을 두루 역임한 후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그의 손자 인후(仁後)은 선조(宣祖) 때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학명(學名)을 떨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조령(鳥嶺:문경 새재)에서 공을 세워, 한산해전(閑山海戰)에서 순절한 중인(仲仁:공조 좌랑 응기의 아들), 중경(仲慶) 형제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병(淸兵)과 싸우다가 강화(江華)에서 전사한 일량(日良)이 유명했고, 한말에 와서는 고종(高宗) 때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비분으로 할복자결한 하경(夏慶:일명 학영)이 가문을 대표했다.
반씨(潘氏)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12,881명, 1975년에는 3,548 가구로 집계되었고,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5,149가구, 21,5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씨(潘氏)는 중국 형양(滎陽:지금의 하남성 개봉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주(周)나라 문왕(文王:무왕의 아버지)의 여섯째 아들 필공(畢公) 고(高)의 아들 계손(季孫)이 반(潘) 땅에 봉해져서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은 땅이름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로 유학자(儒學者)와 재상을 많이 배출하여 명족(名族)으로 일컬어진 반씨는 송(宋)나라 출신인 반 부(潘 阜)가 이종(理宗) 때 문과에 장원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몽고정벌(蒙古征伐)을 간청했다.
그런데 간신(奸臣) 가사도(賈似道)가 그를 미워하여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어 은밀히 죽이게 하였으나, 원(元)의 세조(世祖:흘필렬)는 문무를 겸비한 그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죽이지 않고 벼슬을 내려 부하로 삼으려 하였다. 그는 사양한 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원재의 딸, 충렬왕비가 됨)를 배종(陪從)하고 동래(東來)하여 고려원종(元宗)과 충렬왕조(忠烈王朝)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일본정벌에 공을 세워 시중(侍中)에 오르고 기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65세에 벼슬을 사직하고 거제(巨濟)로 내려가 정사(精舍)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반씨(潘氏)의 문호가 열리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정(挺)과 유항(有抗)을 시작으로 가세(家勢)가 일어나 후손들이 전국 각지에 산거하며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따라 기성(岐城), 충주(忠州), 남평(南平), 결성(結城), 청도(淸道) 홍천(洪川), 광주(光州) 등 17본으로 갈리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거제반씨정미대봉보(巨濟潘氏丁未大同譜)'에는 거제 반씨로 합보(合譜)하였다. 가문을 중흥시킨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 부(阜)의 증손(曾孫) 익순(益淳)이 고려 우왕(禑王) 때 문하평리(門下評理)을 거쳐 좌시중(左侍中)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덕해(德海)와 복해(福海)이 현달하여 명문의 기틀을 마련했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신(名臣)으로 우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복해는 왕이 사냥을 나가 말에서 떨어져 멧돼지의 습격을 받게 될 순간 활을 쏘아 왕을 위기에서 해낸 일화가 전하며, 밀직부사(密直府使)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거쳐 추충양절익대좌명보리공신(推忠亮節翊戴佐命輔理功臣)에 올라 제성부원군(濟城府院君)에 봉해졌으나, 최 영(崔瑩)장군을 암살하려던 조 반, 임견미(林堅味)와의 관련 혐의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가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복권되었다.한편 복해의 아들 자건(自建)은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의 사위로 조선이 개국된 후 태종조(太宗朝)에서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고 영평군에 봉해졌으며, 손자 충(忠)도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좌명일등공신(開國原從佐命一等功臣)로 해양군(海陽君)에 봉해졌다가 광주백(光州伯)에 추봉되었다. 세칭 절효선생(節孝先生)으로 불리웠던 유(儒)는 판도판서(版圖判書) 덕해(德海)의 손자로서 부친상을 당하자 여막(廬幕)에서 3년동안 시묘(侍墓)하여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이조 정랑(吏曹正郞) 호(湖)의손자 효손(孝孫)은 세조(世祖) 때 황주 목사(黃州牧使)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회령 부사(會寧部事)로 나갔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한 우형(佑亨)은 당세의 석학(碩學)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4등공신(靖國四等功臣)으로 이성군(利城君)에 봉해졌으며, 대사헌(大司憲)과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내고 기성군(岐城君)에 개봉(改封)되었다.
청렴근엄(淸廉謹嚴)한 관리로 명성을 떨쳤던 석평(碩枰)은 1472년(성종 3) 부사과(副司果) 서린(瑞麟)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조광조(趙光祖)의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중종(中宗)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주요 내외직을 두루 역임한 후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그의 손자 인후(仁後)은 선조(宣祖) 때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학명(學名)을 떨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조령(鳥嶺:문경 새재)에서 공을 세워, 한산해전(閑山海戰)에서 순절한 중인(仲仁:공조 좌랑 응기의 아들), 중경(仲慶) 형제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병(淸兵)과 싸우다가 강화(江華)에서 전사한 일량(日良)이 유명했고, 한말에 와서는 고종(高宗) 때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비분으로 할복자결한 하경(夏慶:일명 학영)이 가문을 대표했다.
반씨(潘氏)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12,881명, 1975년에는 3,548 가구로 집계되었고,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5,149가구, 21,5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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