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온양 방씨(溫陽方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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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 방씨(溫陽方氏)
온양(溫陽)은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을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주(州)로 승격시켜 총관(摠管)을두었다가 후에 군(郡)으로 삼았으며, 고려 초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 천안부(天安府)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2) 현(縣)으로 강등되고 조선 태종(太宗) 때 신창현(新昌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다가 다시 온수현(溫水縣)이라 하였으며, 세종(世宗) 때 온양군(溫陽郡)이 되었고, 19 13년 아산군(牙山郡)에 속한 온양면(溫陽面)이 된 후 지금의 온양읍에 이르고 있다. 방씨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주(周)나라 때 대부(大夫) 방 숙(方叔)의 후예로 전한다. 남양 방씨(南陽方氏)는 중국 산동(山東) 사람인 방 지(方智)가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서기 669년(당고종 총장2, 신라 문무왕9)에 나당동맹(羅唐同盟)의 문화사절(文化使節)로 동래(東來)하여 설총(薛聰)과 함께 '구경(九經)'의 <회통(會統)>을 국역하여 불교의 전성시대인 신라에서 유학(儒學)의 체계를 수립하였고, 장씨(張氏)와 혼인하여 가유현(嘉猷縣: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 뿌리를 내렸다. 그후 그의 6세손으로 전하는 방 운(方雲)이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정벌하는데 무공을 떨쳤고, 고려 창업에서부터 성종대(981∼997)에 이르기까지 60여 년 간 6대의 왕을 섬기면서 무훈을 세워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지고 온양(溫陽), 신창(新昌), 아산(牙山) 3읍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으며, 그가 살고 있던 온양군 팔동리(八東里) 과안산(過雁山)은 <방씨를 우러러 본다>는 뜻으로 배방산(裵方山)으로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누대(累代)로 사패지(賜牌地)인 온양지방에 살면서 방지(方 智)를 시조(始祖)로 하고 운(雲)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온양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였다. 방씨의 본관은 온양을 비롯하여 상주(尙州), 군위(軍威), 신창(新昌), 개성(開城), 강화(江華) 등 26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이며 근대에 와서는 온양으로 단일화하고 있다. 그후 온양 방씨는 12세에 이르러 문정공(文定公) 우선(于宣 )과 그의 아우 우번(于番), 목사(牧使) 득세(得世)의 아들 대에서 장암공(壯岩公) 서(曙)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와 간의대부(諫議大夫) 현(縣)을 파조로 하는 간의공파(諫議公派), 안렴사(按廉使) 훤(暄)을 파조로 하는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군위군(軍威君) 적( 迪)을 파조로 하는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 우번(于番)을 파조로 하는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 평장사(平章事) 신제(臣悌)를 파조로 하는 광록대부공파(光祿大夫公派),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신우(臣佑)를 파조로 하는 상락부원군파(上洛府院君派)로 분파되었으나, 안렴사공파 훤(暄)과 상락부원군파 신우(臣佑)는 절손되었고 현재는 다섯 파만 세계가 이어진다.
방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목종(穆宗) 때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을 지낸 중탁(仲鐸:운의 아들)과 현종(顯宗)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휘하에서 무공을 떨쳐 온양군(溫陽君)에 봉해진 휴(休:운의손자, 중탁의 아들)가 유명했으며, 휴의 증손 유(裕)는 숙종(肅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이르러,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아들 재(宰), 대제학(大提學)에 오른 증손희진(曦進) 등과 함께 가통을 이었다. 조선조의 인물로는 성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한 유영(有寧)이 중종조(中宗朝)에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참판(參判),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우고(祐固)과 옹(翁)은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여러 전투에서 무공을 떨쳤다. 순조조(純祖朝)에서 홍경래(洪景來)가 난을 일으키자 서정군(西征軍)의 좌초관(左哨官)으로 정주성(定州城)함락에 공을 세웠던 우정(禹鼎)이 홍경래의 난을 평정할 때 쓴 '서정일기(西征日記)'는 역사적인 사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기전(基典)은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이주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은양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년 육성에 공헌했다.
한편 소파(小波) 정환(定煥)은 일제 압정기에 민족사상 혁명의 선구자로서 짧은 일생을 나라를 위해 바쳤다. 특히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신문'을 인쇄하여 빨래 광주리에 숨겨 돌리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고,일본으로 유학하여 아동문학에 전심, '사랑의 선물', '어린이' 등의 잡지를 창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색동회>를 조직하여 아동문학의 정수를 이루었다.그외 윤명(允明)과 천용(天鏞), 한익(漢翼), 건홍(建洪), 무길(戊吉) 등이 서화(書畵)로 명성을 떨쳐 문무의 전통을 이은 온양 방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19,317가구, 81,41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온양(溫陽)은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을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주(州)로 승격시켜 총관(摠管)을두었다가 후에 군(郡)으로 삼았으며, 고려 초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 천안부(天安府)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2) 현(縣)으로 강등되고 조선 태종(太宗) 때 신창현(新昌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다가 다시 온수현(溫水縣)이라 하였으며, 세종(世宗) 때 온양군(溫陽郡)이 되었고, 19 13년 아산군(牙山郡)에 속한 온양면(溫陽面)이 된 후 지금의 온양읍에 이르고 있다. 방씨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주(周)나라 때 대부(大夫) 방 숙(方叔)의 후예로 전한다. 남양 방씨(南陽方氏)는 중국 산동(山東) 사람인 방 지(方智)가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서기 669년(당고종 총장2, 신라 문무왕9)에 나당동맹(羅唐同盟)의 문화사절(文化使節)로 동래(東來)하여 설총(薛聰)과 함께 '구경(九經)'의 <회통(會統)>을 국역하여 불교의 전성시대인 신라에서 유학(儒學)의 체계를 수립하였고, 장씨(張氏)와 혼인하여 가유현(嘉猷縣: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 뿌리를 내렸다. 그후 그의 6세손으로 전하는 방 운(方雲)이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정벌하는데 무공을 떨쳤고, 고려 창업에서부터 성종대(981∼997)에 이르기까지 60여 년 간 6대의 왕을 섬기면서 무훈을 세워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지고 온양(溫陽), 신창(新昌), 아산(牙山) 3읍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으며, 그가 살고 있던 온양군 팔동리(八東里) 과안산(過雁山)은 <방씨를 우러러 본다>는 뜻으로 배방산(裵方山)으로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누대(累代)로 사패지(賜牌地)인 온양지방에 살면서 방지(方 智)를 시조(始祖)로 하고 운(雲)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온양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였다. 방씨의 본관은 온양을 비롯하여 상주(尙州), 군위(軍威), 신창(新昌), 개성(開城), 강화(江華) 등 26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이며 근대에 와서는 온양으로 단일화하고 있다. 그후 온양 방씨는 12세에 이르러 문정공(文定公) 우선(于宣 )과 그의 아우 우번(于番), 목사(牧使) 득세(得世)의 아들 대에서 장암공(壯岩公) 서(曙)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와 간의대부(諫議大夫) 현(縣)을 파조로 하는 간의공파(諫議公派), 안렴사(按廉使) 훤(暄)을 파조로 하는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군위군(軍威君) 적( 迪)을 파조로 하는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 우번(于番)을 파조로 하는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 평장사(平章事) 신제(臣悌)를 파조로 하는 광록대부공파(光祿大夫公派),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신우(臣佑)를 파조로 하는 상락부원군파(上洛府院君派)로 분파되었으나, 안렴사공파 훤(暄)과 상락부원군파 신우(臣佑)는 절손되었고 현재는 다섯 파만 세계가 이어진다.
방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목종(穆宗) 때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을 지낸 중탁(仲鐸:운의 아들)과 현종(顯宗)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휘하에서 무공을 떨쳐 온양군(溫陽君)에 봉해진 휴(休:운의손자, 중탁의 아들)가 유명했으며, 휴의 증손 유(裕)는 숙종(肅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이르러,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아들 재(宰), 대제학(大提學)에 오른 증손희진(曦進) 등과 함께 가통을 이었다. 조선조의 인물로는 성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한 유영(有寧)이 중종조(中宗朝)에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참판(參判),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우고(祐固)과 옹(翁)은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여러 전투에서 무공을 떨쳤다. 순조조(純祖朝)에서 홍경래(洪景來)가 난을 일으키자 서정군(西征軍)의 좌초관(左哨官)으로 정주성(定州城)함락에 공을 세웠던 우정(禹鼎)이 홍경래의 난을 평정할 때 쓴 '서정일기(西征日記)'는 역사적인 사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기전(基典)은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이주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은양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년 육성에 공헌했다.
한편 소파(小波) 정환(定煥)은 일제 압정기에 민족사상 혁명의 선구자로서 짧은 일생을 나라를 위해 바쳤다. 특히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신문'을 인쇄하여 빨래 광주리에 숨겨 돌리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고,일본으로 유학하여 아동문학에 전심, '사랑의 선물', '어린이' 등의 잡지를 창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색동회>를 조직하여 아동문학의 정수를 이루었다.그외 윤명(允明)과 천용(天鏞), 한익(漢翼), 건홍(建洪), 무길(戊吉) 등이 서화(書畵)로 명성을 떨쳐 문무의 전통을 이은 온양 방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19,317가구, 81,41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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