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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방씨(南陽房氏)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과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의 당성군(唐城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고, 1018 년 (고려 현종9) 수주(水州:수원)와 인주(仁州: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南陽府)가 되었다.
조선 말기에 남양군(南陽郡)이 되어 인천부(仁川府) 관할이 되었다가 1913년 군을 폐하고 그 땅을 나누어 영흥면, 대부면은 부평군(富平郡)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水原郡)에 합하였다. 그후 수원면이 수원읍(水原邑)으로 승격되었으며, 후에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華城郡)으로 수원읍은 수원시로 승격되었다.
방씨는 중국 청하(淸河)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요(堯)임금의 아들 단주(丹朱)가 방후(房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지명을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방씨는 당(唐)나라 양공(梁公) 방현령(房玄齡)이 634년(당태종 정관8, 고구려 영류왕17) 고구려의 주청(奏請)으로 동래(東來)하여 남양(南陽)에 사적(賜籍)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후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은 고려조에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공(三重大匡輔國公)에 오른 방계홍(房季弘)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선조(先祖)의 사적지(賜籍地)인 남양(南陽)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어왔다.
방씨의 관향(貫鄕)은 남양을 비롯하여 수원(水原), 남원(南原), 온양(溫陽), 밀양(密陽), 양산(梁山)등 23본까지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남양 방의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수원 방씨(水原房氏)의 시조(始祖)로 전하는 방정유(房貞儒:일명 지유)는 남양 방씨의 일세조 방계홍(房季弘)의 손자임이 밝혀졌다.
남양 방씨의 인물로는 계홍(季弘)의 아들 의강(儀康)이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손자 진유(珍儒)는 추밀원 부사(樞密院府使)를 거쳐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한편 상호군(上護軍) 주(柱)의 아들 사량(士良)은 공양왕(恭讓王)때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전의시승(典醫寺丞)을 지냈고, 그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구행(九行)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차남 구달(九達)은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을 역임하여 대를 이어 가세(家勢)를 일으켰고, 사량(士良)의 증손귀원(貴元:봉교를 지냄)과 옥정(玉精:세자시강원 문학)이 유명했다. 특히 계문(戒文)의 아들 귀온(貴溫)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중종조(中宗朝)에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과 사간(司諫院)의 정언(正言)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이 사사(賜死)되자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진력했으며, 남명(南溟) 조 식(曺植)에게 글을 배운 응현(應賢)은 선조(宣祖) 때 농사(農事)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실학자로 명망이 높았다.그외 응현의 손자 원진(元震)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광해군(光海郡) 때는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찰방(찰訪)에 천거되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김장생(金長生)의 휘하에서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했으며, 복령(復齡)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선조(宣祖)로부터 <가히 대장부>라는 칭찬을 받고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명성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방씨(房氏)는 남한에 총 5,371가구, 22,51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과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의 당성군(唐城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고, 1018 년 (고려 현종9) 수주(水州:수원)와 인주(仁州: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南陽府)가 되었다.
조선 말기에 남양군(南陽郡)이 되어 인천부(仁川府) 관할이 되었다가 1913년 군을 폐하고 그 땅을 나누어 영흥면, 대부면은 부평군(富平郡)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水原郡)에 합하였다. 그후 수원면이 수원읍(水原邑)으로 승격되었으며, 후에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華城郡)으로 수원읍은 수원시로 승격되었다.
방씨는 중국 청하(淸河)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요(堯)임금의 아들 단주(丹朱)가 방후(房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지명을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방씨는 당(唐)나라 양공(梁公) 방현령(房玄齡)이 634년(당태종 정관8, 고구려 영류왕17) 고구려의 주청(奏請)으로 동래(東來)하여 남양(南陽)에 사적(賜籍)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후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은 고려조에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공(三重大匡輔國公)에 오른 방계홍(房季弘)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선조(先祖)의 사적지(賜籍地)인 남양(南陽)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어왔다.
방씨의 관향(貫鄕)은 남양을 비롯하여 수원(水原), 남원(南原), 온양(溫陽), 밀양(密陽), 양산(梁山)등 23본까지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남양 방의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수원 방씨(水原房氏)의 시조(始祖)로 전하는 방정유(房貞儒:일명 지유)는 남양 방씨의 일세조 방계홍(房季弘)의 손자임이 밝혀졌다.
남양 방씨의 인물로는 계홍(季弘)의 아들 의강(儀康)이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손자 진유(珍儒)는 추밀원 부사(樞密院府使)를 거쳐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한편 상호군(上護軍) 주(柱)의 아들 사량(士良)은 공양왕(恭讓王)때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전의시승(典醫寺丞)을 지냈고, 그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구행(九行)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차남 구달(九達)은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을 역임하여 대를 이어 가세(家勢)를 일으켰고, 사량(士良)의 증손귀원(貴元:봉교를 지냄)과 옥정(玉精:세자시강원 문학)이 유명했다. 특히 계문(戒文)의 아들 귀온(貴溫)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중종조(中宗朝)에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과 사간(司諫院)의 정언(正言)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이 사사(賜死)되자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진력했으며, 남명(南溟) 조 식(曺植)에게 글을 배운 응현(應賢)은 선조(宣祖) 때 농사(農事)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실학자로 명망이 높았다.그외 응현의 손자 원진(元震)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광해군(光海郡) 때는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찰방(찰訪)에 천거되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김장생(金長生)의 휘하에서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했으며, 복령(復齡)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선조(宣祖)로부터 <가히 대장부>라는 칭찬을 받고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명성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방씨(房氏)는 남한에 총 5,371가구, 22,51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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