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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방씨(開城龐氏)
개성(開城)은 경기도(京畿道)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려의 수도였으며 처음에는 송악군(松岳郡), 송도(松都), 개경(開京), 부소갑(扶蘇岬), 동비홀(冬比忽), 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웠다.
919년(고려 태조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이 곳 송악산(松岳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성(開城)과 송악(松岳)을 합쳐 개주(開州)라 불렀고, 960년(광종 11) 황도(皇都)로, 995년(성종14)에는 개성부(開城府)로 고쳤다.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06년 개성군이 되고,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개성시(開城市)가 되었다.
방씨(龐氏)는 중국 시평(始平:섬서성 관중도 흥평현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개성 방씨의 시조(始祖)는 주(周)나라 현왕(顯王:기원전 368-321) 때 장군(將軍)인 방연위(龐涓魏)의 원손(遠孫) 방두현(龐斗賢)으로 전한다. 문헌에 의하면 그가 원(元)나라에서 직성사인(直省舍人)으로 학사(學士)에 이르러, 1351년(충정왕 3) 고려 공민왕비(恭愍王妃)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행(陪行)하고 동래(東來)하여 개성(開城)에 정착(定着)한 것이 개성 방씨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고 한다.가맥(家脈)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증손(曾孫) 천룡(天龍)이 조선조에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했고, 그의 맏아들 예남(禮楠)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지낸 영내(永奈:천룡의 차남)와 함께 가통을 이었다.
그밖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낸 대건(大建)과 종일(宗逸) 부자가 유명했으며, 세진(世珍:종일의 차남)은 한성좌윤(漢城左尹)을, 도명(道明)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개성 방씨(開城龐氏)는 남한에 총 179가구, 6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성(開城)은 경기도(京畿道)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려의 수도였으며 처음에는 송악군(松岳郡), 송도(松都), 개경(開京), 부소갑(扶蘇岬), 동비홀(冬比忽), 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웠다.
919년(고려 태조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이 곳 송악산(松岳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성(開城)과 송악(松岳)을 합쳐 개주(開州)라 불렀고, 960년(광종 11) 황도(皇都)로, 995년(성종14)에는 개성부(開城府)로 고쳤다.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06년 개성군이 되고,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개성시(開城市)가 되었다.
방씨(龐氏)는 중국 시평(始平:섬서성 관중도 흥평현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개성 방씨의 시조(始祖)는 주(周)나라 현왕(顯王:기원전 368-321) 때 장군(將軍)인 방연위(龐涓魏)의 원손(遠孫) 방두현(龐斗賢)으로 전한다. 문헌에 의하면 그가 원(元)나라에서 직성사인(直省舍人)으로 학사(學士)에 이르러, 1351년(충정왕 3) 고려 공민왕비(恭愍王妃)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행(陪行)하고 동래(東來)하여 개성(開城)에 정착(定着)한 것이 개성 방씨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고 한다.가맥(家脈)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증손(曾孫) 천룡(天龍)이 조선조에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했고, 그의 맏아들 예남(禮楠)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지낸 영내(永奈:천룡의 차남)와 함께 가통을 이었다.
그밖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낸 대건(大建)과 종일(宗逸) 부자가 유명했으며, 세진(世珍:종일의 차남)은 한성좌윤(漢城左尹)을, 도명(道明)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개성 방씨(開城龐氏)는 남한에 총 179가구, 6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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