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본관 원주 변씨(原州邊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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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3:01 조회 1,88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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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변씨(原州邊氏)

 원주(原州)는 강원도 원성군(原城郡)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인데 신라시대에 북원소경(北原小京), 940년(고려 태조23)에 원주(原州)로 고쳤다.그후 일신현(一新縣), 정원 도호부(靖原都護府),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 등을 거쳐 원주목(原州牧)이 되었으나 1310년 성안부(成安府)로 강등, 1353년(공민왕 2) 치악산에 태(胎)를 안치하고 다시 원주목으로 하였다.1895년(고종 32) 원주군(原州郡)이 되었으며,1955년 일부가 원주시(原州市)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원성군(原城郡)이 되었다.  원주 변씨(原州邊氏)는 황주 변씨(黃州邊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고려 말의 절신(節臣)인 변안렬(邊安烈)을 시조(始祖)로 한다. '원주변씨족보(原州邊氏族譜)'에 의하면 그의 조부(祖父)인 변 순(邊 順)이 1268년(고려 원종9) 원(元)나라 사신(使臣) 탈타아(脫朶兒)를 수행하여 원나라에 가서 원세조(元世祖)를 알현(謁見)하고 심양(瀋陽)의 장수(將帥)로 있다가 천호후(千戶侯)에 봉작을 받았고 , 안렬(安烈)은 조카 숙(肅:안렬의 형인 안백의 아들)과 함께 공민왕(恭愍王)과 왕비(王妃)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하고 환국하여,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을 격퇴시켜 이등공신(二等功臣)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에 올랐으며 이듬해 경도(京都)를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추성보조일등공신(推誠輔祚一等功臣)에 책록,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376년(우왕 2)에는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輔祚功臣)의 호(號)을 받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겸 조전원수(助戰元帥)이 되어 나 세(羅 世), 조사민(趙思敏), 이성계(李成桂), 류 실(柳 實) 등과 함께 운봉(雲峰), 부령(扶寧) 등지에서 왜구를 크게 소탕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한방언(韓邦彦)과 함께 단양(丹陽)과 안동(安東)지역에 침입해 온 왜구를 격퇴시켜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왕을 폐립(廢立)한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제거하고 쫓겨난 우왕(禑王)을 복위(復位) 시키려다가 김 저(金 佇)와 함께 순절하였다.
 특히 그는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진 절신으로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부흥을 위하여 강인한 절개를 굽힐 줄 몰랐으며 원주 원씨(原州元氏) 원 이의 딸과 혼인하여 사적지(賜籍地 )인 원주(原州)에서 터를 잡아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은 원주(原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 )를 이어왔다. 조선이 개국한 후 이태조(李太祖)는 안렬의 충절(忠節)을 기리고 그의 아들 3형제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어 맏아들 현(顯)은 봉상시사(奉常寺事)를, 둘째 이는 도총제(都摠制)를, 막내 예(預)는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사(訓鍊院事)를 각각 역임하였고, 손자 상복(尙服:이의 아들)은 덕천옹주( 德川翁主)와 혼인하여 원주위(原州尉)에 봉해졌다.
 한편 예조 참판(禮曹參判) 상회(尙會)의 아들 수(修)는 호조 및 병조, 형조, 공조의 참의(參議)를 거쳐 충청, 경상, 함경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으며, 면천 군수(沔川郡守) 계윤(季胤)의 아들 협(協)은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이르렀고,주역(周易), 천문(天文), 지리(地理), 수학(數學)에도 정통하였으며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특히 협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호쾌하고 도량이 넓어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가 여섯살 때 샘에 빠진 일이 있었는데 우물 안에서 돌을 붙들고 밤새 버티고 있다가 새벽에 물을 길러온 아낙네들에게 큰 새끼를 빨리 가져오라고 호통쳤다고 하며, 1565년(명종 20)에는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귀양온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장살(杖殺)함으로써 백성들의 속을 후련하게 했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 때 난정을 개탄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있던 사촌 동생 희리(希李)와 함께 안동군(安東郡)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로 낙향했던 희예(希乂)의 아들 광(廣)은 학행(學行)으로 이름났고, 그의 아들 영청(永淸)은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명종(明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임금으로부터 표리(表裏:은사나 헌상하는 옷의 겉감과 안감)와 안마(鞍馬)를 하사 받았으며, 단아하면서 근엄한 성품으로 공직에 있으면서 대구 부사(大丘府使)로 재임중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데 성력을 다했고 부모 봉양을 잘 하는 사람에게 쌀과 고기를 지급하는 등 밝은 치적을 거두었다.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한 양걸(良傑)은 임진왜란 때 강화(江華)를 방비하는데 공을 세우고 명(明)나라 낙오병(落伍兵)들의 반란을 재치로 진압하여 훈련대장(訓鍊大將)이 되었으며, 왕자(王子)가 관련된 살인사건을 가차없이 다루다가 선조의 뜻에 거슬려 동래(東來)로 유배, 뒤에 수원 부사(水原府使)와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지냈다. 공조 좌랑(工曹佐郞) 열(悅)의 아들 응정(應井)은 임진왜란 때 조 헌(趙 憲), 정 담(鄭 湛) 등과 더불어 금산(錦山) 전투에서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자, 적장도 그의 충의에 감복하여 무덤을 크게 만들고 <조선국충간의담(朝鮮國忠肝義膽)>이라 쓴 푯말을 세웠고, 나라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문(旌門)을 고향에 내렸다.
 또한 만취당(晩翠堂) 영순(永淳)의 아들 경회(慶會)는 임진왜란 때 임 흘(任 訖), 금윤선(琴胤先) 등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여러 전투에서 많은 훈공을 세웠으며, 선조조(宣祖朝)에서 무과에 급제한 흡은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平定)하는데 공헌하여 진무이등공신(振武二等功臣)로 원흥군(原興君)에 봉군되어,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던 극태(克泰:경회의 현손)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그외 효종(孝宗) 때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출정하여 러시아군을 격파시켰던 급(급)과 경종(景宗) 때  통역관(通譯官)으로 '노걸대신석(老乞大新釋)'을 편찬한 헌(憲)이 유명했으며, 근대에 와서는 의병대장(義兵大將) 학기(鶴基)가 이강년(李康秊)의 휘하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 충절(忠節)의 전통가문( 傳統家門)인 원주 변씨를 더욱 빛냈다.
 근대에 와서는 면와(勉窩) 태균(台均)의 주관으로 1924년 경북 봉화읍 거촌리(慶北奉化邑巨村里)에 구양사(龜陽祠)를 세워 백산(栢山) 경회(慶會)와 봉은(鳳隱) 극태(克泰)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3월과 9월의 중정일(中丁日)에 제향(祭享)하여 왔다그후 1984년 후손 교우(敎雨)가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에 따라 강당(講堂)을 중수(重修)하고 그 규모를 확장하여 묘우(廟宇), 전사청(典祀廳), 장서각(藏書閣), 동서재(東西齋), 주사(廚舍), 삼문(三門), 문루(門樓)를 비롯한 기타 부속건물의 신축사업비를 전담하고 구양서원(龜陽書院)이라 이름하여 시조 대은공(大隱公), 백산공(栢山公), 봉은공(鳳隱公)을 향사(享祠)하고 있으며, 약국(藥局)을 세워 봉화군(奉化郡) 지역 영세민에 대한 의약품 무료지급과 사회자선사업가로서의 눈부신 활약으로 철탑산업훈장(鐵塔産業勳章)과 새마을 포장(褒章)을 수상했고 사회봉사 부분의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어 명문(名門) 원주 변씨의 전통을 살렸으며 문중단결(門中團結)을 위하여 전국에 산재(散在)한 증손(曾孫)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라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주 변씨(原州邊氏)는 남한에 총 9,698가구, 39,6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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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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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賈


    간簡


     


    갈葛


    감甘


     


    강姜


    강康


    강强


    강彊


     


    강剛




    개介


     


    견堅


    견甄


    경慶


    경景


    계桂


    고高


    곡曲


    공孔


    공公


    곽郭




    구具


    구丘


     


    국國


    국菊


    군君


    궁弓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나羅


    남궁南宮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단段


    단端


    당唐


    대大


    도都


    도陶


    도道




    독고獨孤


    돈頓


    돈敦


    동董


    동방東方


    두杜


     


    류柳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명明


    모牟


    모毛


    목睦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方


    방房


    방龐


    방邦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빈彬


    빈賓





    사史




    사謝


     


    사공司空


    사씨舍氏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서문西門




    석石


    석昔


    선宣


    선우鮮于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舜


    순淳


    순荀


    순順


    승承




    승昇


    시施


    시柴


     


    신申


    신辛


    신愼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양楊


    양樑


    양襄


    어魚


    엄嚴


    여呂


    여余


    여汝


    연延


    연燕




    연連


    염廉


    염閻


    영影


    영永


    예芮


    오吳


    오伍


     


    옥玉


    온溫


    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芸


    운雲


    원元


    원袁


    위韋




    위魏


    유劉


    유兪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은恩


    음陰


    응應


     




    이李


    이伊


    이異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蔣


    장章


    장莊


    전全




    전田


    전錢


    점占


    정鄭


    정丁


    정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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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갈諸葛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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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황보씨(黃州黃甫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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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의 1930년대 분포사항을 보면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인제리에 12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23
  • 황보皇甫
    황보皇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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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黃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174
  • 후씨(后氏)
    후씨(后氏)

     后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났으며 본관(本貫)은〈唐寅〉단본이다.
     1930년 당시 강원도에 3가구가 있었는데, 회양군 상북면 오랑리(淮陽郡 上北面 五郞里)에 살던 후춘성씨(后春成氏)는 그의 11代祖가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후씨(后氏)는 나타나지 않아 정확한 가구와 인구수는 알 수 없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04
  •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은 진주의 고호로 경상남도의 남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며,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문무왕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고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로 고쳤다.
     그 뒤 혜공왕 때에 정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시대에는 한때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진주목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으며 1910년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 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1949년에 부(府) 시(市)로 개칭되었다. 진양 화씨는 중국 낭야 사람인 화명신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명신은 본성이 화씨로서, 조상 대대로 명나라에서 벼슬하던 교목세가의 후손으로 낭야의 화촌대에 살다가 오랑캐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개탄하며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
     조선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화씨(花氏)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향화의 의리다"하며 명신을 예우하고 화씨의 성을 하사하고, 경성군에 봉했다. 그러나 상계의 실전으로 계대를 밝히지 못하여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진주에 세거한 후손 섭(燮)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선대부에 오른 섭(燮)의 아들 봉상(奉祥)과 영조 때 무관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올랐으며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일취가 유명했다.
     그외 절충장군 동휘와 정릉 참봉 덕봉(德鳳), 통덕랑 윤택(允澤)은 오우장을 지낸 정한·응한, 참판 석한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 화씨는 남한에 총 400가구, 1,5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94
  • 홍洪
    홍洪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43
  •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 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定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京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 온 옛 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중국(中國) 안정(安定)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호안국(胡安國)의 16세손 호극기(胡克己)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극기(克己)는 명(明)나라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라 1643년(인조 21) 답례사(答禮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 멸망되자 "내가
    천조(天朝)에 복명(復命)치 못하고, 조종(祖宗)의 땅이 전란(戰亂)에 짓밝히니 창천(蒼天)도 무심(無心)하다. 차라리 동해(東海)에서 죽을지언정 고국(故國)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하고 경기도(京畿道) 가평군(加平郡) 대명연(大明淵)에 은거(隱居)했다가, 함경도(咸鏡道) 북청군(北靑郡) 덕성면(德城面) 중장내(中庄內)에 초가(草家)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라 이름짓고 여생(餘生)을 보내니, 조선(朝鮮)의 효종(孝宗)이 그의 충성심(忠誠心)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租稅)로 녹(祿)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극기(克己)의 본향지(本鄕地)인 중국(中國)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기(克己)의 맏아들 제백(濟伯)이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고, 후손 사룡(士龍)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녹사(綠事)를 지낸 태기(泰起), 충찬위(忠贊衛)에 오른 시악(時악)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가구, 7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27
  •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保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扶安)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희안(喜安)으로 고쳐 고부(古阜)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부령현(扶寧縣)의 겸임을 삼았다. 우왕(禑王) 때 보안현(保安縣)을 설치하였으며 1415년(태종 15)에 부안(扶安)에 편입시켰다.
     호씨(扈氏)는 고려(高麗) 창업(創業)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호의(扈義)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侯伯濟) 견훤군(甄萱軍)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왕(王 :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보안 호씨(保安扈氏)는 의(義)의 맏아들 호은열(扈殷說)이 광익효절정난안사공신(匡翼效節定難安社功臣)으로 보안군(保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보안(保安)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
     전주 호씨(全州扈氏)는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明)나라 장군(將軍)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난(亂) 후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호준(扈浚)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가구, 1,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67
  •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진주 형씨(晋州邢氏)의 시조(始祖)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인 형옹(邢 )으로 전(傳)한다.
    옹( )은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옹(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3세손 방(昉)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慶南) 진주(晋州) 반성(班城)에서 살았다. 방(昉)의 손자(孫子) 공미(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280년 (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征伐)하는 데 공(功)을 세워 지밀직사사(知 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방(昉)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방(昉)의 현손(玄孫) 찬(贊)이 조선조(朝鮮朝)에서 판도판소(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 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 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忠淸道兵馬使)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외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學問)으로 이름 났으며, 협(浹)은 효종(孝宗) 때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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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玄
    현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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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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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씨(海氏)
    해씨(海氏)

     해씨(海氏)는 중국(中國) 설군(薛郡 : 산동성 제령도에 있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오계(五季 : 중국 고대 다섯 왕조를 달리 일컫던 말) 때 사람인 해진명(海眞明)과 인종(仁宗) 때 중궁(中宮)이었던 해수자(海壽者)란 사람이 사기(史記)에 등장된 인물이다.
     우리 나라 해씨(海氏)의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靈巖)과 목포·나주(羅州)를 비롯한 경남 김해(金海) 등지에 7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0가구, 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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