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황간 견씨(黃磵 甄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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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간(黃磵)은 충청북도(忠淸北道) 최남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소라현(召羅縣)이라 불리우다가 경덕왕(景德王 : 제35대 왕,742~765) 때 와서 황간(黃磵)으로 고쳐 영동군(永同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견씨(甄氏)는 중국(中國) 중산(中山 : 광동성 남부의 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한(漢)나라 때 사람인 견풍(甄豊)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견씨(甄氏)는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을 시조(始祖)로 하는 황간견씨(黃磵甄氏)와 아자개(阿慈介)를 시조로하는 상주 견씨(尙州甄氏)가 있으며, 그외에도 남양(南陽), 청양(靑陽), 전주(全州) 등 9본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견훤이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본성(本姓)이
이씨(李氏)이며 아자개(阿慈介)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동일혈족(同一血族)이 된다.
견훤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뜰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밥을 가져다 주느라고 아이를 숲 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고 하며, 고기(古記)에는 그의 출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 광주(光州) 북촌(北村)에 한 부자(富者)가 살았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자태가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일 밤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저의 침실을 찾아옵니다.”라고 하니 아버지가 딸에게 이르기를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하여 딸은 그 말을 따랐다.
날이 밝자 실을 따라 찾아가 보니 북쪽 담장 밑의 큰 지렁이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그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甄萱)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오늘날 견씨(甄氏)는 보첩(譜牒)이 전하지 않아 계대(系代)를 상고(詳考)할 수 없고,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 전국에 90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60년 인구조사 때는 446명,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는 남한에 235가구, 990명이 세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견씨(甄氏)는 중국(中國) 중산(中山 : 광동성 남부의 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한(漢)나라 때 사람인 견풍(甄豊)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견씨(甄氏)는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을 시조(始祖)로 하는 황간견씨(黃磵甄氏)와 아자개(阿慈介)를 시조로하는 상주 견씨(尙州甄氏)가 있으며, 그외에도 남양(南陽), 청양(靑陽), 전주(全州) 등 9본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견훤이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본성(本姓)이
이씨(李氏)이며 아자개(阿慈介)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동일혈족(同一血族)이 된다.
견훤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뜰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밥을 가져다 주느라고 아이를 숲 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고 하며, 고기(古記)에는 그의 출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 광주(光州) 북촌(北村)에 한 부자(富者)가 살았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자태가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일 밤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저의 침실을 찾아옵니다.”라고 하니 아버지가 딸에게 이르기를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하여 딸은 그 말을 따랐다.
날이 밝자 실을 따라 찾아가 보니 북쪽 담장 밑의 큰 지렁이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그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甄萱)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오늘날 견씨(甄氏)는 보첩(譜牒)이 전하지 않아 계대(系代)를 상고(詳考)할 수 없고,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 전국에 90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60년 인구조사 때는 446명,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는 남한에 235가구, 990명이 세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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