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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선씨(寶城宣氏)
보성(寶城)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남부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복홀군(伏忽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보성군(寶城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태조 (太祖)는 삼양군
(三陽郡)이라 하였으며, 996년(성종 15)에 패주(貝州)로 개칭하였다가 1668년(현종 9) 전라도에 소속되면서 다시 보성군이 되었다. 선씨(宣氏)는 중국(中國) 시평(始平:협서성 관중도 흥평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노(魯)나라 대부(大夫) 선백(宣伯)의 후예로 전한다. 우리나라 선씨는 명(明)나라 때 문연각 학사(文淵閣學士)인 선윤지(宣允祉)가 1382년(고려 우왕 8) 사신(使臣)으로 고려에 왔다가 귀화(歸化)하여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우거(寓居)하는 왜구를 섬멸하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보성(寶城)에 은거(隱居)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 후 선윤지(宣允祉)는 유교(儒敎)의 진흥에 앞장섰고 인재 양성에 진력하며 보성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보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관(本貫)을 같이 하면서 고려 말에 예의 판서(禮儀判書)와 우문각 대제학(右文閣 大提學)을 지낸 선원지(宣元祉)를 시조로 하는 계통(系統)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선천계(宣天桂)를 시조로 주장하는 계통이 있었는데, 모두가 동원(同源)으로 밝혀져서 1978년 합의에 의하여 동행(同行)으로 합보(合譜)를 하였다.조선조에서 충렬(忠烈)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진 보성 선씨는 시조의 아들 안혁(安赫)이 태종(太宗)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했고, 증손 화(和:호조 참판 광유의 아들)는 태종 때 여산 군수(礪山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의 진정(陳情)으로 두 번이나 고을 수령을 지냈다.
군수(郡守) 화의 아들 형(炯)은 1451년(문종 1) 17세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안주 목사(安州牧使)과 경성 부사(鏡城府使)를 거쳐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올라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하는 데 공(功)을 세워 적개삼등공신(敵愾三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성종(成宗)이 즉위할 때 무공(武功)을 세워 좌리사등공신(左理四等功臣)으로 유성군(楡城君)에 봉해졌다. 뒤에 영안북도 수군절도사(永安北道水軍節度使)로 북면의 야인 정벌에 유공하여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고, 시조를 비롯하여 거이(居怡:형의 증손)·세강(世綱:시조의 9세손)·약해(若海:시조의 10세손)와 더불어 <선씨오충신(宣氏五忠臣)>으로 일컬어졌다. 문종(文宗)때 순무사(巡撫使)를 지낸 청유(淸裕)의 아들 국충(國忠)은 세조(世祖) 때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형(炯)의 증손 거이(居怡:도사 상의 아들)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비장(飛將) >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특히 지략(智略)이 뛰어났던 거이는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녹둔도(鹿屯島)에서 여진족(女眞族)을 격퇴시키는데 무용(武勇)을 떨쳤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에 부원수(副元帥)를 겸하여 도원수(都元帥) 권 율(權慄)과 함께 행주산성(幸州山城)과 운봉(雲峰) 싸움에서 큰 공(功)을 세웠으며, 7도의 병마사(兵馬使)를 겸하여 이순신(李舜臣)의 수군 함대에 종군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울산(蔚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 從功臣)에 책록되고 정문(旌門) 이 세워졌다. 부사(府使) 의문(義問)의 아들 약해(若海)는 선조(宣祖)와 인조대(仁祖代)에 문·무(文·武)양과에 급제하여 사신(使臣)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와 「심양일기(瀋陽日記)」를 남겼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롭게 순절하여 가문을 더욱 빛냈다. 사기(史記)에는 약해(若海)의 마지막 전투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643년(인조 21) 1월 3일 이른 아침에 적의 선봉 33명이 목방패(木防牌)를 가지고 고기 떼와 같이 행진해 오는 것을 보고 아군이 맞이하여 한바탕 쏘아서 적병의 용감한 자가 탄환에 맞아 죽고 탔던 말이 뛰어서 진중에 들어가니 적이 두려워하여 감히 핍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포수가 총을 함부로 쏘아 화약이 이미 다 되었으므로 포수들은 화약을 더 보내라고 연달아 소리쳤다. 적이 이 말을 알아듣고 다시 독전하여 앞으로 나
와 아군의 목책(木柵)에 다 가왔다. 이 때 안동 영장(安東營將) 선약해(宣若海)가 홀로 적의 칼날을 감 당하며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방패에 맞았고 화살은 이미 다 되니 자기 자리에 딱 버티고 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약해와 함께 충절(忠節)로 가세(家勢)를 드높인 세강(世綱 : 봉장의아들)은 1603년(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광해군(光海君) 때 경기 중군(京畿中軍)이 되어 영평산성(永平山城)을 감축(監築)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광주 쌍령(廣州雙嶺)에서 적과 대전중 장렬하게 순절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선조 4위와 더불어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그의 9세손 극례(克禮)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무용(武勇 )을 떨쳐 명망이 높았으며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왜군 섬멸에 전공을 세웠으나 잔적을 소탕하다가 아깝게 전사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해수(海壽)는 판관(判官)으로 전장에서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을 계승하였다. 세강의 아우 세휘(世徽)는 문신(文臣)으로 유명했는데, 전적(典籍)과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거쳐 장령(掌令)을 지냈으나 대북파(大北派)에 가담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는 데 가담했다가 화(禍)를 입었다.
여경은 임진왜란 때 선전관(宣傳官)으로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 였고 평양(平壤) 전투에서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한 여룡(汝龍), 호조 참의(戶曹參議) 중의(仲義 ), 좌랑(佐郞) 경백(敬伯), 군수(郡守) 의경(義卿) 등과 함께 보성 선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선씨(宣氏)는 남한(南韓)에 총 7,754 가구, 33,6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성(寶城)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남부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복홀군(伏忽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보성군(寶城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태조 (太祖)는 삼양군
(三陽郡)이라 하였으며, 996년(성종 15)에 패주(貝州)로 개칭하였다가 1668년(현종 9) 전라도에 소속되면서 다시 보성군이 되었다. 선씨(宣氏)는 중국(中國) 시평(始平:협서성 관중도 흥평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노(魯)나라 대부(大夫) 선백(宣伯)의 후예로 전한다. 우리나라 선씨는 명(明)나라 때 문연각 학사(文淵閣學士)인 선윤지(宣允祉)가 1382년(고려 우왕 8) 사신(使臣)으로 고려에 왔다가 귀화(歸化)하여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우거(寓居)하는 왜구를 섬멸하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보성(寶城)에 은거(隱居)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 후 선윤지(宣允祉)는 유교(儒敎)의 진흥에 앞장섰고 인재 양성에 진력하며 보성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보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관(本貫)을 같이 하면서 고려 말에 예의 판서(禮儀判書)와 우문각 대제학(右文閣 大提學)을 지낸 선원지(宣元祉)를 시조로 하는 계통(系統)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선천계(宣天桂)를 시조로 주장하는 계통이 있었는데, 모두가 동원(同源)으로 밝혀져서 1978년 합의에 의하여 동행(同行)으로 합보(合譜)를 하였다.조선조에서 충렬(忠烈)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진 보성 선씨는 시조의 아들 안혁(安赫)이 태종(太宗)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했고, 증손 화(和:호조 참판 광유의 아들)는 태종 때 여산 군수(礪山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의 진정(陳情)으로 두 번이나 고을 수령을 지냈다.
군수(郡守) 화의 아들 형(炯)은 1451년(문종 1) 17세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안주 목사(安州牧使)과 경성 부사(鏡城府使)를 거쳐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올라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하는 데 공(功)을 세워 적개삼등공신(敵愾三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성종(成宗)이 즉위할 때 무공(武功)을 세워 좌리사등공신(左理四等功臣)으로 유성군(楡城君)에 봉해졌다. 뒤에 영안북도 수군절도사(永安北道水軍節度使)로 북면의 야인 정벌에 유공하여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고, 시조를 비롯하여 거이(居怡:형의 증손)·세강(世綱:시조의 9세손)·약해(若海:시조의 10세손)와 더불어 <선씨오충신(宣氏五忠臣)>으로 일컬어졌다. 문종(文宗)때 순무사(巡撫使)를 지낸 청유(淸裕)의 아들 국충(國忠)은 세조(世祖) 때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형(炯)의 증손 거이(居怡:도사 상의 아들)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비장(飛將) >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특히 지략(智略)이 뛰어났던 거이는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녹둔도(鹿屯島)에서 여진족(女眞族)을 격퇴시키는데 무용(武勇)을 떨쳤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에 부원수(副元帥)를 겸하여 도원수(都元帥) 권 율(權慄)과 함께 행주산성(幸州山城)과 운봉(雲峰) 싸움에서 큰 공(功)을 세웠으며, 7도의 병마사(兵馬使)를 겸하여 이순신(李舜臣)의 수군 함대에 종군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울산(蔚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 從功臣)에 책록되고 정문(旌門) 이 세워졌다. 부사(府使) 의문(義問)의 아들 약해(若海)는 선조(宣祖)와 인조대(仁祖代)에 문·무(文·武)양과에 급제하여 사신(使臣)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와 「심양일기(瀋陽日記)」를 남겼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롭게 순절하여 가문을 더욱 빛냈다. 사기(史記)에는 약해(若海)의 마지막 전투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643년(인조 21) 1월 3일 이른 아침에 적의 선봉 33명이 목방패(木防牌)를 가지고 고기 떼와 같이 행진해 오는 것을 보고 아군이 맞이하여 한바탕 쏘아서 적병의 용감한 자가 탄환에 맞아 죽고 탔던 말이 뛰어서 진중에 들어가니 적이 두려워하여 감히 핍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포수가 총을 함부로 쏘아 화약이 이미 다 되었으므로 포수들은 화약을 더 보내라고 연달아 소리쳤다. 적이 이 말을 알아듣고 다시 독전하여 앞으로 나
와 아군의 목책(木柵)에 다 가왔다. 이 때 안동 영장(安東營將) 선약해(宣若海)가 홀로 적의 칼날을 감 당하며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방패에 맞았고 화살은 이미 다 되니 자기 자리에 딱 버티고 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약해와 함께 충절(忠節)로 가세(家勢)를 드높인 세강(世綱 : 봉장의아들)은 1603년(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광해군(光海君) 때 경기 중군(京畿中軍)이 되어 영평산성(永平山城)을 감축(監築)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광주 쌍령(廣州雙嶺)에서 적과 대전중 장렬하게 순절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선조 4위와 더불어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그의 9세손 극례(克禮)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무용(武勇 )을 떨쳐 명망이 높았으며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왜군 섬멸에 전공을 세웠으나 잔적을 소탕하다가 아깝게 전사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해수(海壽)는 판관(判官)으로 전장에서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을 계승하였다. 세강의 아우 세휘(世徽)는 문신(文臣)으로 유명했는데, 전적(典籍)과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거쳐 장령(掌令)을 지냈으나 대북파(大北派)에 가담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는 데 가담했다가 화(禍)를 입었다.
여경은 임진왜란 때 선전관(宣傳官)으로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 였고 평양(平壤) 전투에서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한 여룡(汝龍), 호조 참의(戶曹參議) 중의(仲義 ), 좌랑(佐郞) 경백(敬伯), 군수(郡守) 의경(義卿) 등과 함께 보성 선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선씨(宣氏)는 남한(南韓)에 총 7,754 가구, 33,6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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