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경주 섭씨(慶州葉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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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섭씨(慶州葉氏)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 )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 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섭씨(葉氏)는 중국(中國) 남양(南陽 : 하남성 여남도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송(宋)나라 고종(高宗) 때 간의대부(諫議大夫)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섭공제(葉公濟)가 장차정란(政亂)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주 잠(朱潛)·조 창(趙昶)·진조순(陳祖舜)·주세현(周世顯 )·유응규(劉應奎)·두행수(杜行秀)·도성하(陶成河) 등 7학사(七學士)와 더불어 동래(東來)하여 전라도 금성(全羅道錦城)으로 들어와 능주(綾州)를 거쳐 담양(潭陽)에 이거(移居)한 것이 우리나라 섭씨(葉氏)의 시초(始初)가 된다. 그후 고려 고종(高宗)이 그에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의 벼슬을 내렸으나 불취했고, 원(元)나라 사신(使臣)이 그의 종적을 탐색하므로 화(禍)를 피하여 경상도 경주 연해(慶尙道 慶州沿海)를 지나 강원도 강릉 인계(江原道江陵仁溪)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진력하니 세인들은 그를 만오선생(晩悟先生)이라 일컬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始祖) 공제(公濟)가 처음 들어온 담양(潭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선조(先祖)들의 직첩(職牒)과 예조(禮曹)에 제출한 입안(立案) 등 모든 문서(文書)에 관향(貫鄕)이 경주(慶州)로 기록되어 있어 본관을 경주(慶州)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섭씨의 본관은 경주 외에도 공촌(公村 : 수원지방)·처인(處仁 : 용인지방)·회미 (澮尾 : 옥구지방)·인의(仁義 : 태인지방)·니파산(泥波山 : 만경지방)·해평(海平 : 선산지방)·충주(忠州) 등 7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경주 섭씨의 세거 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이렇게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섭씨는 시조의 아들 근실(根實)이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지종성군사(知鍾城郡事)를 역임했고, 손자 후춘(後春)은 충선왕(忠宣王) 때 등과(登科)하여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가세(家勢)가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한편 충숙왕조(忠肅王朝)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일장(日長 : 사헌부 규정 후춘의 아들)은 함주 별장(咸州別將)이 되어 말갈(靺鞨)의 침입을 토벌하는 데 선봉장(先鋒將)으로 나아가 성무산(城茂山)에서 대첩(大捷)을 거두고 정순대부 (正順大夫)로 의흥위 대호군(義興衛大護軍)에 올라 정난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의 칭호와 함께 담양(潭陽)과 강양(江陽)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아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민수(敏秀)는 충목왕(忠穆王) 때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려 말에 판전객시사(判典客시事)를 지냈던 기량(起良 : 민수의 맏아들)은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자 이를 개탄하여 김용장(金用莊) 등 7인과 함께 성거산(聖居山)으로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키니 후세 사람들이 그 곳을 <팔판사동(八判事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기량(起良)의 현손 평중(平仲 : 공주 판관 찬의 아들)이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가 단종(端宗)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같이 오대산(五臺山)에 올라가 영월(寧越)을 향해 망배(望拜)하며 통곡했다고 하며, 그의 아들 천지(千枝)는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등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연산군(燕山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大司諫) 겸
지제교(知製敎)에 특별히 기용되었다. 그 외 문정왕후(文貞王后)의 수렴청정(垂廉聽政)으로 권신들의 전횡이 심해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산수(山水)를 편력했던 죽림거사(竹林居士) 취영(翠永)과 아버지의 병환 때 손가락을 깨물어 간호했던 장권(章權)이 유명했고, 방화(芳華)는 순조(純祖) 때 용양위 부호군(龍 衛副護軍) 겸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여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농기(濃起)·비서원승(秘書院丞) 농환(濃煥) 등과 함께 경주 섭씨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섭씨(葉氏)는 남한(南韓)에 총 152가구, 6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 )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 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섭씨(葉氏)는 중국(中國) 남양(南陽 : 하남성 여남도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송(宋)나라 고종(高宗) 때 간의대부(諫議大夫)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섭공제(葉公濟)가 장차정란(政亂)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주 잠(朱潛)·조 창(趙昶)·진조순(陳祖舜)·주세현(周世顯 )·유응규(劉應奎)·두행수(杜行秀)·도성하(陶成河) 등 7학사(七學士)와 더불어 동래(東來)하여 전라도 금성(全羅道錦城)으로 들어와 능주(綾州)를 거쳐 담양(潭陽)에 이거(移居)한 것이 우리나라 섭씨(葉氏)의 시초(始初)가 된다. 그후 고려 고종(高宗)이 그에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의 벼슬을 내렸으나 불취했고, 원(元)나라 사신(使臣)이 그의 종적을 탐색하므로 화(禍)를 피하여 경상도 경주 연해(慶尙道 慶州沿海)를 지나 강원도 강릉 인계(江原道江陵仁溪)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진력하니 세인들은 그를 만오선생(晩悟先生)이라 일컬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始祖) 공제(公濟)가 처음 들어온 담양(潭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선조(先祖)들의 직첩(職牒)과 예조(禮曹)에 제출한 입안(立案) 등 모든 문서(文書)에 관향(貫鄕)이 경주(慶州)로 기록되어 있어 본관을 경주(慶州)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섭씨의 본관은 경주 외에도 공촌(公村 : 수원지방)·처인(處仁 : 용인지방)·회미 (澮尾 : 옥구지방)·인의(仁義 : 태인지방)·니파산(泥波山 : 만경지방)·해평(海平 : 선산지방)·충주(忠州) 등 7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경주 섭씨의 세거 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이렇게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섭씨는 시조의 아들 근실(根實)이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지종성군사(知鍾城郡事)를 역임했고, 손자 후춘(後春)은 충선왕(忠宣王) 때 등과(登科)하여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가세(家勢)가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한편 충숙왕조(忠肅王朝)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일장(日長 : 사헌부 규정 후춘의 아들)은 함주 별장(咸州別將)이 되어 말갈(靺鞨)의 침입을 토벌하는 데 선봉장(先鋒將)으로 나아가 성무산(城茂山)에서 대첩(大捷)을 거두고 정순대부 (正順大夫)로 의흥위 대호군(義興衛大護軍)에 올라 정난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의 칭호와 함께 담양(潭陽)과 강양(江陽)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아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민수(敏秀)는 충목왕(忠穆王) 때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려 말에 판전객시사(判典客시事)를 지냈던 기량(起良 : 민수의 맏아들)은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자 이를 개탄하여 김용장(金用莊) 등 7인과 함께 성거산(聖居山)으로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키니 후세 사람들이 그 곳을 <팔판사동(八判事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기량(起良)의 현손 평중(平仲 : 공주 판관 찬의 아들)이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가 단종(端宗)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같이 오대산(五臺山)에 올라가 영월(寧越)을 향해 망배(望拜)하며 통곡했다고 하며, 그의 아들 천지(千枝)는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등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연산군(燕山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大司諫) 겸
지제교(知製敎)에 특별히 기용되었다. 그 외 문정왕후(文貞王后)의 수렴청정(垂廉聽政)으로 권신들의 전횡이 심해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산수(山水)를 편력했던 죽림거사(竹林居士) 취영(翠永)과 아버지의 병환 때 손가락을 깨물어 간호했던 장권(章權)이 유명했고, 방화(芳華)는 순조(純祖) 때 용양위 부호군(龍 衛副護軍) 겸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여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농기(濃起)·비서원승(秘書院丞) 농환(濃煥) 등과 함께 경주 섭씨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섭씨(葉氏)는 남한(南韓)에 총 152가구, 6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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