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본관 진주 소씨(晋州蘇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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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3:21 조회 2,15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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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소씨(晋州蘇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리웠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가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康州)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소씨(蘇氏)는 풍이(風夷)의 후손(後孫) 적제축융(赤帝祝融)이 기원전 4241년 풍주 배곡(風州倍谷)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전국토에 무궁화(蘇:부소나무)를 심어 소(蘇)를 성(姓)으로 삼고,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 그 후 복해(復解)의 61세손 소 풍(蘇 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지금의 길림성)의 하백(河伯:하백)에 봉해졌고, 그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신 유(申 有), 진 기(陳 岐) 등과 더불어 진한(辰韓)을 세웠으며, 백손(伯孫)의 29세손 알천은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 상대등(上大等)을 지내고 660년(태종 무열왕 7) 3월 진주 구시동(九枾洞:지금의 상대동)에 이거(移居), 경(慶)으로 개명(改名)하고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문호(門戶)를 열었다. 소씨(蘇氏)의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남원(南原), 진강(鎭江:강화지방) 등 12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세거 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시조의 손자 복서(福瑞)가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 청주 총관(靑州摠管)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억자(億滋)는 성덕왕(聖德王) 때 한주 총관(漢州摠管)을 역임했고, 11세손 격달(格達)이 고려 초에 대장군(大將軍)에 오르는 등 직계(直系)로 구세구장군(九世九將軍)이 배출되어 크케 무명(武名)을 떨쳤다. 한편 청주 도독(靑州都督)을  지낸 목(穆:시조의 8세손)은 문장이 뛰어나 「역대제왕고(歷代帝王考)」, 「유소국사(有蘇國史)」,  「유당견문기(有唐見聞記)」, 「동이씨족원류(東夷氏族源流)」를 저술(著述)했고, 그의 아들 은(恩)은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웅주 도독(熊州都督)을 지내고 저서(著書)로 「진한세가(辰韓世家)」와  「삼소변설(三蘇辨說)」 등을 남겨 문(汶:은의 아들)과 함께 「소씨삼대문장(蘇氏三代文章)」으로 일컬어졌다. 고려 문종(文宗) 때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과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올랐던 계령(繼 :격달의 현손)은 헌종(獻宗)이 즉위하여 딸이 회순왕후(懷純王后:헌종의 비)로 간택되자 국구(國舅)가 되어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광보(光輔)와 경보(景輔)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했고, 경보의 아들 세린(世麟)은 인종(仁宗)에게 <선무팔조(先務八條)>를 상소하여 백성들에게 충신효제(忠信孝悌)와 예의렴치(禮義廉恥)를 가르치도록 건의했다.
 그 외 고려 때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라 무신정치(武臣政治)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던 경손(慶遜:세린의 손자)과 고종(高宗) 때 몽고병(蒙古兵)과 싸우다가 순절한 함이 뛰어났으며, 정의대부(政議大夫)로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에 올랐던 희철(希哲)과 정당문학(政堂文學) 문철(文哲)의 형제가 유명했다.
 공민왕(恭愍王) 때 개성윤(開城尹)을 지내며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했던 을경(乙卿:희철의 증손, 판도판서 약우의 맏아들)과 정몽주(鄭夢周)의 고제(高弟)로 사재감 소윤(司宰監少尹)을 지낸 천(遷)은 고려말에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손자 현손(玄孫)은 성종(成宗) 때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지냈다. 한편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낸 자파(自坡)의 일곱 아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크게 위세(威勢)를 떨쳤다. 1507년(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둘째 아들 세량(世良)은 용담 현령(龍潭縣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고 이도(吏道)를 쇄신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으며, 삼사(三司)의 벼슬을 두루역임한 후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나 부모(父母)의 봉양을 위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내려갔다. 그의 아우 세양(世讓:자파의 다섯째 아들)은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주서(注書), 정언(正言) 등을 거쳐 수찬(修撰)에 올라 단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하여 현릉(顯陵)에 이장(移葬)케 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이조 정랑(吏曹正郞), 사인(舍人), 교리(校理), 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치고 사성(司成)이 되어 영접사(迎接使) 이 행(李 荇)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명(明)나라 사신(使臣)을 맞아 시문(詩文)으로 응답하여 문명(文名 )을 떨쳤다. 그후 병조(兵曹)와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우찬성(右贊成)이 되어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겸하여 성주(星州)의 사고(史庫)가 불타자 왕명으로 춘추관(春秋館)의 실록(實錄)을 등사해서 봉안했으며, 인종(仁宗)이 즉위하여 대윤(大尹)인 윤 임(尹任) 일파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가 명종(明宗)이 즉위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윤 임 등이 제거된 후 다시 기용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지내다가 전라도 익산(全羅道益山)에 은거했다. 특히 그는 신용개(申用漑), 남 곤(南 袞) 등과 더불어 중종조의 7대 문형(文衡)인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이 높고 율시(律詩)가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상원 군수(祥原郡守)로 부임하여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던 세영(世榮 : 자언의 아들)은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으며, 상진(尙眞)은 임진왜란 때 성주(星州)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진주성(晋州城)에서 순절한 제(濟)와 함께 의절(義節)의 가통(家統)을 세웠고, 행진(行震 : 진산의 이현 싸움에서 순절)의 아들 동(仝)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부제학(副堤學) 봉(逢)의 손자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진력했던 영복(永福)이 천문(天文), 지리(地理), 경사(經史), 병법(兵法), 의약(醫藥) 등에 정통하여 명성(名聲)을 떨쳤으며, 만선(萬善 : 세공의손자) 의 아들 동도(東道)는 청북어사(淸北御史)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효종(孝宗)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순절한 응무(應武)와 함께 이름을 날렸고, 송시열(宋時烈)의 고제(高弟)로 바른말을 잘 했던 두산(斗山)은 권신들의 비위에 거슬려 외직으로만 전전하다가 숙종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나갔으나 기사환국 (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배척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 외 수구(洙 ), 여유(汝由), 휘식(輝植), 휘면(輝冕), 승규(昇奎) 등이 문장과  도학(道學)으로 조선의 학문을 빛냈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는 휘태(輝泰)와 천술(千述), 진형(鎭亨), 진우(鎭佑), 휘옥(輝玉), 병원(秉元) 등이 구국의 충정(忠貞 )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진주 소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소씨(晋州蘇氏)는 남한(南韓)에 총 9,191가구, 38,8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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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가賈


    간簡


     


    갈葛


    감甘


     


    강姜


    강康


    강强


    강彊


     


    강剛




    개介


     


    견堅


    견甄


    경慶


    경景


    계桂


    고高


    곡曲


    공孔


    공公


    곽郭




    구具


    구丘


     


    국國


    국菊


    군君


    궁弓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나羅


    남궁南宮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단段


    단端


    당唐


    대大


    도都


    도陶


    도道




    독고獨孤


    돈頓


    돈敦


    동董


    동방東方


    두杜


     


    류柳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명明


    모牟


    모毛


    목睦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方


    방房


    방龐


    방邦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빈彬


    빈賓





    사史




    사謝


     


    사공司空


    사씨舍氏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서문西門




    석石


    석昔


    선宣


    선우鮮于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舜


    순淳


    순荀


    순順


    승承




    승昇


    시施


    시柴


     


    신申


    신辛


    신愼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양楊


    양樑


    양襄


    어魚


    엄嚴


    여呂


    여余


    여汝


    연延


    연燕




    연連


    염廉


    염閻


    영影


    영永


    예芮


    오吳


    오伍


     


    옥玉


    온溫


    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芸


    운雲


    원元


    원袁


    위韋




    위魏


    유劉


    유兪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은恩


    음陰


    응應


     




    이李


    이伊


    이異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蔣


    장章


    장莊


    전全




    전田


    전錢


    점占


    정鄭


    정丁


    정程


    제諸


    제갈諸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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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황보씨(黃州黃甫氏)

     黃州는 본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다. 주요성씨로 황보(皇甫)·황(黃)·동(董)·변(邊)·최(崔)씨 등이 있었다. 黃州黃甫氏는 영천황보(永川皇甫)에서 분적(分籍)하여 黃州를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시조는 충의공(忠義公) 황보제공(皇甫悌恭)으로 태위(太尉)를 지냈다.
     이들의 1930년대 분포사항을 보면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인제리에 12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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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보皇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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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黃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184
  • 후씨(后氏)
    후씨(后氏)

     后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났으며 본관(本貫)은〈唐寅〉단본이다.
     1930년 당시 강원도에 3가구가 있었는데, 회양군 상북면 오랑리(淮陽郡 上北面 五郞里)에 살던 후춘성씨(后春成氏)는 그의 11代祖가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후씨(后氏)는 나타나지 않아 정확한 가구와 인구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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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은 진주의 고호로 경상남도의 남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며,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문무왕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고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로 고쳤다.
     그 뒤 혜공왕 때에 정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시대에는 한때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진주목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으며 1910년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 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1949년에 부(府) 시(市)로 개칭되었다. 진양 화씨는 중국 낭야 사람인 화명신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명신은 본성이 화씨로서, 조상 대대로 명나라에서 벼슬하던 교목세가의 후손으로 낭야의 화촌대에 살다가 오랑캐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개탄하며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
     조선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화씨(花氏)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향화의 의리다"하며 명신을 예우하고 화씨의 성을 하사하고, 경성군에 봉했다. 그러나 상계의 실전으로 계대를 밝히지 못하여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진주에 세거한 후손 섭(燮)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선대부에 오른 섭(燮)의 아들 봉상(奉祥)과 영조 때 무관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올랐으며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일취가 유명했다.
     그외 절충장군 동휘와 정릉 참봉 덕봉(德鳳), 통덕랑 윤택(允澤)은 오우장을 지낸 정한·응한, 참판 석한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 화씨는 남한에 총 400가구, 1,5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404
  • 홍洪
    홍洪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57
  •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 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定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京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 온 옛 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중국(中國) 안정(安定)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호안국(胡安國)의 16세손 호극기(胡克己)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극기(克己)는 명(明)나라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라 1643년(인조 21) 답례사(答禮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 멸망되자 "내가
    천조(天朝)에 복명(復命)치 못하고, 조종(祖宗)의 땅이 전란(戰亂)에 짓밝히니 창천(蒼天)도 무심(無心)하다. 차라리 동해(東海)에서 죽을지언정 고국(故國)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하고 경기도(京畿道) 가평군(加平郡) 대명연(大明淵)에 은거(隱居)했다가, 함경도(咸鏡道) 북청군(北靑郡) 덕성면(德城面) 중장내(中庄內)에 초가(草家)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라 이름짓고 여생(餘生)을 보내니, 조선(朝鮮)의 효종(孝宗)이 그의 충성심(忠誠心)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租稅)로 녹(祿)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극기(克己)의 본향지(本鄕地)인 중국(中國)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기(克己)의 맏아들 제백(濟伯)이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고, 후손 사룡(士龍)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녹사(綠事)를 지낸 태기(泰起), 충찬위(忠贊衛)에 오른 시악(時악)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가구, 7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40
  •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保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扶安)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희안(喜安)으로 고쳐 고부(古阜)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부령현(扶寧縣)의 겸임을 삼았다. 우왕(禑王) 때 보안현(保安縣)을 설치하였으며 1415년(태종 15)에 부안(扶安)에 편입시켰다.
     호씨(扈氏)는 고려(高麗) 창업(創業)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호의(扈義)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侯伯濟) 견훤군(甄萱軍)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왕(王 :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보안 호씨(保安扈氏)는 의(義)의 맏아들 호은열(扈殷說)이 광익효절정난안사공신(匡翼效節定難安社功臣)으로 보안군(保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보안(保安)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
     전주 호씨(全州扈氏)는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明)나라 장군(將軍)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난(亂) 후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호준(扈浚)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가구, 1,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84
  •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진주 형씨(晋州邢氏)의 시조(始祖)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인 형옹(邢 )으로 전(傳)한다.
    옹( )은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옹(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3세손 방(昉)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慶南) 진주(晋州) 반성(班城)에서 살았다. 방(昉)의 손자(孫子) 공미(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280년 (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征伐)하는 데 공(功)을 세워 지밀직사사(知 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방(昉)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방(昉)의 현손(玄孫) 찬(贊)이 조선조(朝鮮朝)에서 판도판소(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 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 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忠淸道兵馬使)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외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學問)으로 이름 났으며, 협(浹)은 효종(孝宗) 때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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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玄
    현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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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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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씨(海氏)
    해씨(海氏)

     해씨(海氏)는 중국(中國) 설군(薛郡 : 산동성 제령도에 있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오계(五季 : 중국 고대 다섯 왕조를 달리 일컫던 말) 때 사람인 해진명(海眞明)과 인종(仁宗) 때 중궁(中宮)이었던 해수자(海壽者)란 사람이 사기(史記)에 등장된 인물이다.
     우리 나라 해씨(海氏)의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靈巖)과 목포·나주(羅州)를 비롯한 경남 김해(金海) 등지에 7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0가구, 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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