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진주 소씨(晋州蘇氏)
페이지 정보
본문
진주 소씨(晋州蘇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리웠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가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康州)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소씨(蘇氏)는 풍이(風夷)의 후손(後孫) 적제축융(赤帝祝融)이 기원전 4241년 풍주 배곡(風州倍谷)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전국토에 무궁화(蘇:부소나무)를 심어 소(蘇)를 성(姓)으로 삼고,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 그 후 복해(復解)의 61세손 소 풍(蘇 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지금의 길림성)의 하백(河伯:하백)에 봉해졌고, 그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신 유(申 有), 진 기(陳 岐) 등과 더불어 진한(辰韓)을 세웠으며, 백손(伯孫)의 29세손 알천은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 상대등(上大等)을 지내고 660년(태종 무열왕 7) 3월 진주 구시동(九枾洞:지금의 상대동)에 이거(移居), 경(慶)으로 개명(改名)하고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문호(門戶)를 열었다. 소씨(蘇氏)의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남원(南原), 진강(鎭江:강화지방) 등 12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세거 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시조의 손자 복서(福瑞)가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 청주 총관(靑州摠管)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억자(億滋)는 성덕왕(聖德王) 때 한주 총관(漢州摠管)을 역임했고, 11세손 격달(格達)이 고려 초에 대장군(大將軍)에 오르는 등 직계(直系)로 구세구장군(九世九將軍)이 배출되어 크케 무명(武名)을 떨쳤다. 한편 청주 도독(靑州都督)을 지낸 목(穆:시조의 8세손)은 문장이 뛰어나 「역대제왕고(歷代帝王考)」, 「유소국사(有蘇國史)」, 「유당견문기(有唐見聞記)」, 「동이씨족원류(東夷氏族源流)」를 저술(著述)했고, 그의 아들 은(恩)은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웅주 도독(熊州都督)을 지내고 저서(著書)로 「진한세가(辰韓世家)」와 「삼소변설(三蘇辨說)」 등을 남겨 문(汶:은의 아들)과 함께 「소씨삼대문장(蘇氏三代文章)」으로 일컬어졌다. 고려 문종(文宗) 때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과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올랐던 계령(繼 :격달의 현손)은 헌종(獻宗)이 즉위하여 딸이 회순왕후(懷純王后:헌종의 비)로 간택되자 국구(國舅)가 되어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광보(光輔)와 경보(景輔)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했고, 경보의 아들 세린(世麟)은 인종(仁宗)에게 <선무팔조(先務八條)>를 상소하여 백성들에게 충신효제(忠信孝悌)와 예의렴치(禮義廉恥)를 가르치도록 건의했다.
그 외 고려 때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라 무신정치(武臣政治)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던 경손(慶遜:세린의 손자)과 고종(高宗) 때 몽고병(蒙古兵)과 싸우다가 순절한 함이 뛰어났으며, 정의대부(政議大夫)로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에 올랐던 희철(希哲)과 정당문학(政堂文學) 문철(文哲)의 형제가 유명했다.
공민왕(恭愍王) 때 개성윤(開城尹)을 지내며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했던 을경(乙卿:희철의 증손, 판도판서 약우의 맏아들)과 정몽주(鄭夢周)의 고제(高弟)로 사재감 소윤(司宰監少尹)을 지낸 천(遷)은 고려말에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손자 현손(玄孫)은 성종(成宗) 때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지냈다. 한편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낸 자파(自坡)의 일곱 아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크게 위세(威勢)를 떨쳤다. 1507년(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둘째 아들 세량(世良)은 용담 현령(龍潭縣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고 이도(吏道)를 쇄신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으며, 삼사(三司)의 벼슬을 두루역임한 후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나 부모(父母)의 봉양을 위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내려갔다. 그의 아우 세양(世讓:자파의 다섯째 아들)은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주서(注書), 정언(正言) 등을 거쳐 수찬(修撰)에 올라 단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하여 현릉(顯陵)에 이장(移葬)케 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이조 정랑(吏曹正郞), 사인(舍人), 교리(校理), 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치고 사성(司成)이 되어 영접사(迎接使) 이 행(李 荇)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명(明)나라 사신(使臣)을 맞아 시문(詩文)으로 응답하여 문명(文名 )을 떨쳤다. 그후 병조(兵曹)와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우찬성(右贊成)이 되어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겸하여 성주(星州)의 사고(史庫)가 불타자 왕명으로 춘추관(春秋館)의 실록(實錄)을 등사해서 봉안했으며, 인종(仁宗)이 즉위하여 대윤(大尹)인 윤 임(尹任) 일파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가 명종(明宗)이 즉위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윤 임 등이 제거된 후 다시 기용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지내다가 전라도 익산(全羅道益山)에 은거했다. 특히 그는 신용개(申用漑), 남 곤(南 袞) 등과 더불어 중종조의 7대 문형(文衡)인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이 높고 율시(律詩)가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상원 군수(祥原郡守)로 부임하여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던 세영(世榮 : 자언의 아들)은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으며, 상진(尙眞)은 임진왜란 때 성주(星州)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진주성(晋州城)에서 순절한 제(濟)와 함께 의절(義節)의 가통(家統)을 세웠고, 행진(行震 : 진산의 이현 싸움에서 순절)의 아들 동(仝)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부제학(副堤學) 봉(逢)의 손자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진력했던 영복(永福)이 천문(天文), 지리(地理), 경사(經史), 병법(兵法), 의약(醫藥) 등에 정통하여 명성(名聲)을 떨쳤으며, 만선(萬善 : 세공의손자) 의 아들 동도(東道)는 청북어사(淸北御史)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효종(孝宗)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순절한 응무(應武)와 함께 이름을 날렸고, 송시열(宋時烈)의 고제(高弟)로 바른말을 잘 했던 두산(斗山)은 권신들의 비위에 거슬려 외직으로만 전전하다가 숙종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나갔으나 기사환국 (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배척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 외 수구(洙 ), 여유(汝由), 휘식(輝植), 휘면(輝冕), 승규(昇奎) 등이 문장과 도학(道學)으로 조선의 학문을 빛냈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는 휘태(輝泰)와 천술(千述), 진형(鎭亨), 진우(鎭佑), 휘옥(輝玉), 병원(秉元) 등이 구국의 충정(忠貞 )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진주 소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소씨(晋州蘇氏)는 남한(南韓)에 총 9,191가구, 38,8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리웠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가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康州)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소씨(蘇氏)는 풍이(風夷)의 후손(後孫) 적제축융(赤帝祝融)이 기원전 4241년 풍주 배곡(風州倍谷)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전국토에 무궁화(蘇:부소나무)를 심어 소(蘇)를 성(姓)으로 삼고,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 그 후 복해(復解)의 61세손 소 풍(蘇 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지금의 길림성)의 하백(河伯:하백)에 봉해졌고, 그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신 유(申 有), 진 기(陳 岐) 등과 더불어 진한(辰韓)을 세웠으며, 백손(伯孫)의 29세손 알천은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 상대등(上大等)을 지내고 660년(태종 무열왕 7) 3월 진주 구시동(九枾洞:지금의 상대동)에 이거(移居), 경(慶)으로 개명(改名)하고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문호(門戶)를 열었다. 소씨(蘇氏)의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남원(南原), 진강(鎭江:강화지방) 등 12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세거 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시조의 손자 복서(福瑞)가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 청주 총관(靑州摠管)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억자(億滋)는 성덕왕(聖德王) 때 한주 총관(漢州摠管)을 역임했고, 11세손 격달(格達)이 고려 초에 대장군(大將軍)에 오르는 등 직계(直系)로 구세구장군(九世九將軍)이 배출되어 크케 무명(武名)을 떨쳤다. 한편 청주 도독(靑州都督)을 지낸 목(穆:시조의 8세손)은 문장이 뛰어나 「역대제왕고(歷代帝王考)」, 「유소국사(有蘇國史)」, 「유당견문기(有唐見聞記)」, 「동이씨족원류(東夷氏族源流)」를 저술(著述)했고, 그의 아들 은(恩)은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웅주 도독(熊州都督)을 지내고 저서(著書)로 「진한세가(辰韓世家)」와 「삼소변설(三蘇辨說)」 등을 남겨 문(汶:은의 아들)과 함께 「소씨삼대문장(蘇氏三代文章)」으로 일컬어졌다. 고려 문종(文宗) 때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과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올랐던 계령(繼 :격달의 현손)은 헌종(獻宗)이 즉위하여 딸이 회순왕후(懷純王后:헌종의 비)로 간택되자 국구(國舅)가 되어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광보(光輔)와 경보(景輔)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했고, 경보의 아들 세린(世麟)은 인종(仁宗)에게 <선무팔조(先務八條)>를 상소하여 백성들에게 충신효제(忠信孝悌)와 예의렴치(禮義廉恥)를 가르치도록 건의했다.
그 외 고려 때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라 무신정치(武臣政治)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던 경손(慶遜:세린의 손자)과 고종(高宗) 때 몽고병(蒙古兵)과 싸우다가 순절한 함이 뛰어났으며, 정의대부(政議大夫)로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에 올랐던 희철(希哲)과 정당문학(政堂文學) 문철(文哲)의 형제가 유명했다.
공민왕(恭愍王) 때 개성윤(開城尹)을 지내며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했던 을경(乙卿:희철의 증손, 판도판서 약우의 맏아들)과 정몽주(鄭夢周)의 고제(高弟)로 사재감 소윤(司宰監少尹)을 지낸 천(遷)은 고려말에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손자 현손(玄孫)은 성종(成宗) 때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지냈다. 한편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낸 자파(自坡)의 일곱 아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크게 위세(威勢)를 떨쳤다. 1507년(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둘째 아들 세량(世良)은 용담 현령(龍潭縣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고 이도(吏道)를 쇄신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으며, 삼사(三司)의 벼슬을 두루역임한 후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나 부모(父母)의 봉양을 위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내려갔다. 그의 아우 세양(世讓:자파의 다섯째 아들)은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주서(注書), 정언(正言) 등을 거쳐 수찬(修撰)에 올라 단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하여 현릉(顯陵)에 이장(移葬)케 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이조 정랑(吏曹正郞), 사인(舍人), 교리(校理), 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치고 사성(司成)이 되어 영접사(迎接使) 이 행(李 荇)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명(明)나라 사신(使臣)을 맞아 시문(詩文)으로 응답하여 문명(文名 )을 떨쳤다. 그후 병조(兵曹)와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우찬성(右贊成)이 되어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겸하여 성주(星州)의 사고(史庫)가 불타자 왕명으로 춘추관(春秋館)의 실록(實錄)을 등사해서 봉안했으며, 인종(仁宗)이 즉위하여 대윤(大尹)인 윤 임(尹任) 일파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가 명종(明宗)이 즉위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윤 임 등이 제거된 후 다시 기용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지내다가 전라도 익산(全羅道益山)에 은거했다. 특히 그는 신용개(申用漑), 남 곤(南 袞) 등과 더불어 중종조의 7대 문형(文衡)인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이 높고 율시(律詩)가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상원 군수(祥原郡守)로 부임하여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던 세영(世榮 : 자언의 아들)은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으며, 상진(尙眞)은 임진왜란 때 성주(星州)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진주성(晋州城)에서 순절한 제(濟)와 함께 의절(義節)의 가통(家統)을 세웠고, 행진(行震 : 진산의 이현 싸움에서 순절)의 아들 동(仝)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부제학(副堤學) 봉(逢)의 손자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진력했던 영복(永福)이 천문(天文), 지리(地理), 경사(經史), 병법(兵法), 의약(醫藥) 등에 정통하여 명성(名聲)을 떨쳤으며, 만선(萬善 : 세공의손자) 의 아들 동도(東道)는 청북어사(淸北御史)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효종(孝宗)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순절한 응무(應武)와 함께 이름을 날렸고, 송시열(宋時烈)의 고제(高弟)로 바른말을 잘 했던 두산(斗山)은 권신들의 비위에 거슬려 외직으로만 전전하다가 숙종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나갔으나 기사환국 (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배척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 외 수구(洙 ), 여유(汝由), 휘식(輝植), 휘면(輝冕), 승규(昇奎) 등이 문장과 도학(道學)으로 조선의 학문을 빛냈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는 휘태(輝泰)와 천술(千述), 진형(鎭亨), 진우(鎭佑), 휘옥(輝玉), 병원(秉元) 등이 구국의 충정(忠貞 )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진주 소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소씨(晋州蘇氏)는 남한(南韓)에 총 9,191가구, 38,8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