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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제주 고씨(濟州 高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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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1:34 조회 2,27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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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고씨(濟州 高氏)

  제주(濟州)는 한반도(韓半島)의 남서(南西) 해상(海上)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대의 섬으로 일찍이 신라시대(新羅時代)부터 탐라국(耽羅國) 또는 탁라( 羅), 탐모라(耽牟羅), 주호(州胡), 섭라(涉羅) 등으로 불리우다가 1211년(희종 7) 제주(濟州)로 개칭(改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誌)>와 <영주지(瀛州誌)>의 [탐라개벽설화(耽羅開闢說話)]에 의하면 제주(濟州)에는 태초(太初)에 사람이 없었는데 한라산(漢拏山)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삼신인(三神人)인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가 용출(湧出)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짐승의 고기만을 먹으며 살았는데 하루는 동(東)쪽으로부터 목함(木函)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여 함께 열어 보니 용모(容貌)가 미려(美麗)한 세 여자와 망아지, 송아지, 오곡(五穀)의 종자(種子)가 들어있었다. 
 삼신인(三神人)은 각각 세 미녀(美女)를 배필로 맞이하고 활을 쏘아 고을나(高乙那)가 제일도(第一都)인 제주목(濟州牧)을, 양을나(良乙那)는 제이도(第二都)인 대정현(大靜縣)을 부을나(夫乙那)는 제삼도(第三都)인 정의현(旌義縣)을 차지하여 목축(牧畜)과 농사(農事)를 지으며 살아 비로소 인간세계(人間世界)가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는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世孫)인 고 후(高 厚), 고 청(高淸)고 계(高 季) 등 세 사람이 신라(新羅)에 입조(入朝)하여 신라왕(新羅王)으로 부터 국호(國號)와 벼슬을 받아와서 탐라국(耽羅國)이 개국(開國)된 것으로 전한다.
 
 
고씨(高氏)는 고을나(高乙那)를 시조(始祖)로 하여 45세손(世孫) 자견왕(自堅王)까지 탐라군주(耽羅郡主)로 세습(世襲)해 오다가 서기 938년(고려 태조 21) 자견왕(自堅王)의 태자(太子) 말로(末老)가 고려(高麗)에 내조(來朝)하여 그가 곧 우리나라 고씨(高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 유(維), 강(綱), 소(紹) 형제가 모두 고려(高麗)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지냄으로써 본토(本土 : 육지)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말로(末老)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시조(始祖)의 발원지(發源地)인 제주(濟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가문(家門)을 크게 번창시켰다. 

 고씨(高氏)의 본관(本貫)은 문헌에 제주(濟州)를 비롯하여 장흥(長興), 개성(開城), 횡성(橫城), 연안(延安), 용담(龍潭), 담양(潭陽), 의령(宜寧), 고봉(高峰), 옥구(沃溝), 상당(上黨), 김화(金花), 면산(免山), 회령(會寧), 안동(安東) 등 122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傳)하고 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오늘날에는 제주(濟州)를 단본(單本)으로 하여 중시조(中始祖) 말로(末老)의 15세손(世孫) 인단(仁旦)을 파조(派祖)로 하는 성주공파(星州公派), 13세손(世孫) 신걸(臣傑)을 파조(派祖)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15세손(世孫) 득종(得宗)을 파조(派祖)로 하는 영곡공파(靈谷公派), 11세손(世孫) 경(慶)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 10세손(世孫) 중연을 파조(派祖)로 하는 장흥백파(長興伯派), 11세손(世孫) 인비(仁庇)를 파조(派祖)로 하는 화전군파(花田君派), 13세손(世孫) 택(澤)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정공파(文禎公派), 4세손(世孫) 공익(恭益)을 파조(派祖)로 하는 상당군파(上黨君派), 4세손(世孫) 영신(令臣)을 파조(派祖)로 하는 양경공파(良敬公派) 등 아홉파(派)로 갈리었다.
 그러나 제주 고씨(濟州高氏)가 내륙(內陸)에 진출(進出)하여 명성(名聲)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성주공(星主公) 말로(末老)의 맏아들 유(維)가 처음이다. 

 유(維)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남성시(南省試)에 장원(壯元)하여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 우복야(右僕射 : 상서도성에 속한 정2품 벼슬)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조기(兆基)는 예종조(睿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인종(仁宗)때 시어사(侍御史)에 올라 이자겸(李資謙)의 일파(一派)로서 환관(宦官)과 결탁하여 권세(權勢)를 누리던 봉우(奉佑)를 탄핵하고 의종(毅宗)이 등극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과 판호부사(判戶府事)를 거쳐 1149년(의종 3)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 중서 문하성의 정2품 벼슬)에 올랐으며 시문(詩文)에 능하여 오언시(五言詩)의 신인(神人)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로부터 제주 고씨(濟州高氏)는 고려조(高麗朝)에서 9상서(尙書) 12한림(翰林)의 명현(名賢)을 배출하였고, 조선조(朝鮮朝)에서도 수많은 인재(人才)를 낳아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또는 학행(學行)과 충효(忠孝), 의열(義烈) 등으로 역사를 수(繡) 놓아 탐라왕족(耽羅王族)으로서의 긍지(矜持)를 세습(世襲)하며 명문(名文)의 기틀을 다져왔다. 

 조선초기(朝鮮初基)에 제주 고씨(濟州高氏)를 빛낸 인물(人物)인 영곡공파조(靈谷公派祖) 득종(得宗)은 전서공(典書公) 신걸(臣傑)의 손자(孫子)이며 상장군(上將軍) 봉지(鳳智)의 아들로 1414년(태종 1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대호군(大護軍)과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 외국사절의 연향과 종실
 , 재신의 음식 공괘를 관장하던 종5품 벼슬)을 거쳐 1427년(세종 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올랐다.
 1438(세종 20)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오른 그는 사신(使臣)으로 두차례 명(明)나라에 다녀왔고 통신사(通信使)로 일본(日本)에 가서는 천황의 서계(書契 : 일본 정부와 교섭하던 문서)를 가지고 돌아오는 등 외교적인 공적을 쌓았으며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고 문장(文章)과 서예(書藝)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한편 득종(得宗)의 아들 태필(台弼), 태정(台鼎), 태보(台輔), 태익(台翼) 4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으며, 조선개국공신(朝鮮開國功臣) 여(呂)는 나라에 공(功)을 세워 고성부원군(高城府院君)에 봉해졌고, 화전군(花田君) 인비(仁庇)의 8세손(世孫)이며 사신(思信)의 아들 형산(荊山)은 연산조(燕山朝)에 해주 목사(海州牧使), 와 병마절도사를 거쳐 중종반정 후 형조, 호조,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했으며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국난(國亂)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 가문(家門)의 의맥(義脈)을 살려 충렬(忠烈)로 전쟁에 공을 세운 충렬공(忠烈公) 경명(敬命)은 제주 고씨(濟州高氏)가 자랑하는 인물(人物)이다. 

 중종(中宗) 때 남화풍(南畵風 : 당나라 왕유를 비조로 하는 문인 화파의 화풍)으로 호랑이 그림을 잘 그린 하천(霞川) 운(雲)의 손자(孫子)인 경명(敬命)은 부친(父親) 맹영(孟英)이 명종조(明宗朝)에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가 이 양(李 樑)의 일파로 몰려 유배당하는 불운을 맞고 담양(潭陽)에 옮겨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고 병든 몸으로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나라 운수가 중도에 비색(丕塞)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개떼 덤비듯 한다.”로 시작되는 거의(擧義)의 격문(檄文)을 팔도(八道)에 돌려 구국(救國)의 염원으로 일어난 의병(義兵)을 이끌고 왜병(倭兵)과 싸우다 금산(錦山)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도망가자는 참모의 말을 뿌리치고 차남 인후(因厚)와 함께 의열(義烈)로 죽음을 맞이했다.

 시(詩)와 글씨, 그림에도 뛰어나 <호남파 5대시인(湖南派五代詩人)>으로 손꼽혔던 그의 맏아들 종후(從厚)도 복수군(復讐軍)을 기병(起兵)하여“불행한 때를 만나 집안의 화변이 망극하다. 
 불초고(不肖孤)는 초토(草土)에 앓고 누워 아직까지 이 왜적들과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아있는 것이 참을 수가 없다.(중략)”라는 통문을 돌리면서 여러 갈래로 흐트러진 의병(義兵)을 모아 영남(嶺南)으로 달려가 진주성(晋州城)을 지켰으나 성(城)이 왜병에게 함락당할 때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장사(三壯士)>라 일컬었다. 
 경명(敬命)의 두딸 노씨(盧氏) 부인과 안씨(安氏)부인도 정유재란 때 왜적을 꾸짖으며 칼을 안고 엎드려 순절하였으니 이들 일가(一家)의 절의(節義)는 높이 추앙되었다.
 선조(宣祖)는 경명(敬命) 일가(一家)의 죽음을 슬퍼하며 광주(光州)에 사당(祠堂)을 짓게하여 포충사(褒忠祠)로 사액(賜額)하고 경명(敬命)에게는 충렬공(忠烈公) 종후(從厚)에게는 효열공(孝烈公), 인후(因厚)에게는 의열공(義烈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 외 효륜(孝倫)의 아들로 최경희(崔慶會)의 부장(副將)이 되어 장수(長水), 무주(茂朱), 금산(錦山) 등지에서 왜병(倭兵)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晋州城)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고, 박 진(朴 晋), 황 진(黃 晋), 원 호(元 豪)와 더불어 임진왜란의 4대명장(四大名將)으로 손꼽히는 언백(彦伯)은 1604년(선조 37) 선무2등공신(宣武二等功臣)으로 제흥군(濟興君)에 봉해졌으나 광해군(光海君)에 의해 임해군(臨海君 : 선조의 첫째 서자)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이렇게 충효(忠孝)의 가통(家統)을 이어온 제주 고씨(濟州 高氏)는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뿌리깊은 의열사상(義烈思想)의 본질을 밝혀주었으며, 국난의 갈림길에서 서성거리다가 비겁하게 살다간 우둔한 자(者)들의 지표(指標)가 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씨(高氏)는 남한(南韓)에 총 91,384가구, 384,0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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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賈


    간簡


     


    갈葛


    감甘


     


    강姜


    강康


    강强


    강彊


     


    강剛




    개介


     


    견堅


    견甄


    경慶


    경景


    계桂


    고高


    곡曲


    공孔


    공公


    곽郭




    구具


    구丘


     


    국國


    국菊


    군君


    궁弓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나羅


    남궁南宮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단段


    단端


    당唐


    대大


    도都


    도陶


    도道




    독고獨孤


    돈頓


    돈敦


    동董


    동방東方


    두杜


     


    류柳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명明


    모牟


    모毛


    목睦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方


    방房


    방龐


    방邦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빈彬


    빈賓





    사史




    사謝


     


    사공司空


    사씨舍氏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서문西門




    석石


    석昔


    선宣


    선우鮮于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舜


    순淳


    순荀


    순順


    승承




    승昇


    시施


    시柴


     


    신申


    신辛


    신愼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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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呂


    여余


    여汝


    연延


    연燕




    연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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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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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吳


    오伍


     


    옥玉


    온溫


    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芸


    운雲


    원元


    원袁


    위韋




    위魏


    유劉


    유兪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은恩


    음陰


    응應


     




    이李


    이伊


    이異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蔣


    장章


    장莊


    전全




    전田


    전錢


    점占


    정鄭


    정丁


    정程


    제諸


    제갈諸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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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黃州는 본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다. 주요성씨로 황보(皇甫)·황(黃)·동(董)·변(邊)·최(崔)씨 등이 있었다. 黃州黃甫氏는 영천황보(永川皇甫)에서 분적(分籍)하여 黃州를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시조는 충의공(忠義公) 황보제공(皇甫悌恭)으로 태위(太尉)를 지냈다.
     이들의 1930년대 분포사항을 보면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인제리에 12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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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씨(后氏)

     后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났으며 본관(本貫)은〈唐寅〉단본이다.
     1930년 당시 강원도에 3가구가 있었는데, 회양군 상북면 오랑리(淮陽郡 上北面 五郞里)에 살던 후춘성씨(后春成氏)는 그의 11代祖가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후씨(后氏)는 나타나지 않아 정확한 가구와 인구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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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은 진주의 고호로 경상남도의 남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며,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문무왕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고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로 고쳤다.
     그 뒤 혜공왕 때에 정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시대에는 한때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진주목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으며 1910년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 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1949년에 부(府) 시(市)로 개칭되었다. 진양 화씨는 중국 낭야 사람인 화명신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명신은 본성이 화씨로서, 조상 대대로 명나라에서 벼슬하던 교목세가의 후손으로 낭야의 화촌대에 살다가 오랑캐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개탄하며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
     조선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화씨(花氏)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향화의 의리다"하며 명신을 예우하고 화씨의 성을 하사하고, 경성군에 봉했다. 그러나 상계의 실전으로 계대를 밝히지 못하여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진주에 세거한 후손 섭(燮)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선대부에 오른 섭(燮)의 아들 봉상(奉祥)과 영조 때 무관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올랐으며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일취가 유명했다.
     그외 절충장군 동휘와 정릉 참봉 덕봉(德鳳), 통덕랑 윤택(允澤)은 오우장을 지낸 정한·응한, 참판 석한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 화씨는 남한에 총 400가구, 1,5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97
  • 홍洪
    홍洪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50
  •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 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定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京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 온 옛 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중국(中國) 안정(安定)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호안국(胡安國)의 16세손 호극기(胡克己)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극기(克己)는 명(明)나라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라 1643년(인조 21) 답례사(答禮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 멸망되자 "내가
    천조(天朝)에 복명(復命)치 못하고, 조종(祖宗)의 땅이 전란(戰亂)에 짓밝히니 창천(蒼天)도 무심(無心)하다. 차라리 동해(東海)에서 죽을지언정 고국(故國)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하고 경기도(京畿道) 가평군(加平郡) 대명연(大明淵)에 은거(隱居)했다가, 함경도(咸鏡道) 북청군(北靑郡) 덕성면(德城面) 중장내(中庄內)에 초가(草家)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라 이름짓고 여생(餘生)을 보내니, 조선(朝鮮)의 효종(孝宗)이 그의 충성심(忠誠心)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租稅)로 녹(祿)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극기(克己)의 본향지(本鄕地)인 중국(中國)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기(克己)의 맏아들 제백(濟伯)이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고, 후손 사룡(士龍)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녹사(綠事)를 지낸 태기(泰起), 충찬위(忠贊衛)에 오른 시악(時악)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가구, 7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33
  •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保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扶安)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희안(喜安)으로 고쳐 고부(古阜)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부령현(扶寧縣)의 겸임을 삼았다. 우왕(禑王) 때 보안현(保安縣)을 설치하였으며 1415년(태종 15)에 부안(扶安)에 편입시켰다.
     호씨(扈氏)는 고려(高麗) 창업(創業)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호의(扈義)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侯伯濟) 견훤군(甄萱軍)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왕(王 :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보안 호씨(保安扈氏)는 의(義)의 맏아들 호은열(扈殷說)이 광익효절정난안사공신(匡翼效節定難安社功臣)으로 보안군(保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보안(保安)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
     전주 호씨(全州扈氏)는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明)나라 장군(將軍)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난(亂) 후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호준(扈浚)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가구, 1,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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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진주 형씨(晋州邢氏)의 시조(始祖)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인 형옹(邢 )으로 전(傳)한다.
    옹( )은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옹(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3세손 방(昉)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慶南) 진주(晋州) 반성(班城)에서 살았다. 방(昉)의 손자(孫子) 공미(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280년 (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征伐)하는 데 공(功)을 세워 지밀직사사(知 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방(昉)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방(昉)의 현손(玄孫) 찬(贊)이 조선조(朝鮮朝)에서 판도판소(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 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 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忠淸道兵馬使)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외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學問)으로 이름 났으며, 협(浹)은 효종(孝宗) 때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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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玄
    현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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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許
    허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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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씨(海氏)
    해씨(海氏)

     해씨(海氏)는 중국(中國) 설군(薛郡 : 산동성 제령도에 있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오계(五季 : 중국 고대 다섯 왕조를 달리 일컫던 말) 때 사람인 해진명(海眞明)과 인종(仁宗) 때 중궁(中宮)이었던 해수자(海壽者)란 사람이 사기(史記)에 등장된 인물이다.
     우리 나라 해씨(海氏)의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靈巖)과 목포·나주(羅州)를 비롯한 경남 김해(金海) 등지에 7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0가구, 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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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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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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