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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연안 차씨(延安車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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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6:35 조회 2,12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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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 차씨(延安車氏)

 연안(延安)은 황해도(黃海道)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동음홀(冬音忽) 또는 고염성(고鹽城)이라 부르다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해고군(海皐郡), 고려(高麗)에서는 염주(염州)·영웅현(永鷹縣)·복주(復州)·석주(碩州)·온주(溫州) 등으로 고쳐 불렀고, 충선왕(忠宣王:제26대 왕, 재위기간 : 1309 ∼1314) 때 연안부(延安部)로 고쳤다.
 1895년 군(郡)이 되었으며, 1914년 백천군(白川郡)과 합하여 연배군(延白郡)이 되었다. 연안(延安)을  단본(單本)으로 하는 차씨(車氏)는 고대(古代) 중국(中國)의 명군(名君)인 황제(黃帝: 姓은 姬, 諱는 軒轅)의 후예이다.
 우리나라 차씨(車氏)의 연원(淵源)은 황제의 후손 사신갑(似辛甲)이 중국에서 고대조선(古代朝鮮)으로 망명하여 평양(平壤)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정착하여 살며 왕조명(王祖明)으로 변성명하였고, 그 후손 왕 몽(王 蒙)이 정치적 화(禍)를 피하기 위하여 전(田)·신(申) 등으로 개성(改姓)하였다가 후에 차무일(車無一)로 변성명하여 차씨(車氏)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신라(新羅) 초기에 승상(承相)을 지냈던 차무일(車無一)의 아들 8형제중 일곱째 차신을(車神乙 : 본명 주림)이 차씨(車氏)의 성(姓)을 계승하여, 후손대에서 25명의 승상(承相)이 배출되어 명문대가(名門大家)의 기틀을 다졌으며, 차무일(車無一)의 32세손 차건신(車建申)의 아들 차승색(車承穡)은 신라 애장왕(哀莊王 : 제40대왕, 재위기간 : 800∼809)의 서삼촌(庶三寸) 김언승(金彦昇 : 헌덕왕)이 난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아들 공숙(恭叔)과 함께 전왕(前王)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헌덕왕(憲德王)을 암살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자, 황해도 유주(黃海道儒州 : 현 신천군 문화면)로 달아나 숨어 살며 조모(祖母 : 조부는 승상 儉夫)의 성(姓)인  양씨(楊氏)를 모방하여 류씨(柳氏)로 변정하고 자기 이름을 류 환(柳 桓)으로, 아들 공숙(恭叔)은 류 숙(柳 淑)으로 개명하였고, 그의 6세원 류차달(柳車達)의 아들 대(代)에서 류씨(柳氏)와 차씨(車氏)로 갈라졌다.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 : 본명은 柳海)은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남정(南征)하여 후백제(後百濟)를 칠 때 부호로서 그가 수레 천 대를 만들고 창고에 있던 양곡을 실어 군량미로 보급하여 줌으로서 왕건이 후삼국(後三國) 통일(統一)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하여 태조(太祖) 왕건이 그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며 벽상2등공신(壁上二等功臣)으로 대승(大承)에 봉착하고 이름도 차달(車達)로 하사(下賜)하였다.
 그 후 대승공 차달의 아들 형제 중 장남 효전(孝全)에게는 <차씨(車氏)의 홍렬은 잊을 수 없다>하며 상조(上祖)의 본성(本姓)인 차씨(車氏)의 성(姓)을 잇게 하고 식읍(食邑)을 하사하면서 대광백(大匡伯) 연안군(延安君)에 봉했으며, 차남 효금(孝金)은 소윤(少尹)의 벼슬과 문화군(文化君)에 봉하여 류씨(柳氏)의 성을 계전하도록 하였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직사관(直史館) 거수(擧首)의 아들 약송(若松)이 고려 신종(神宗) 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내고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으며, 병마사(兵馬使) 덕위(德威)의 아들 척(倜)이 고종(高宗) 때 어사대부(御史大夫)와 참지정사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원부(院  : 지방어사 종로의 아들)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목은(牧隱)이 색(李  穡), 포은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당대에 명유(名儒)로 일컬어졌으며, 고려 말에 정국이 혼란해지자 평산(平山)의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隱居)하였다. 「운암실기(雲巖實記)」에 의하면 원부가 은거하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찾아와 그의 혁명 계략을 상의하였다.
 이에 원부는 부당하다고 극구 만류했으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여 정권을 잡은 다음 조 준(趙 浚) 등을 차례로 보내어 벼슬과 녹권(錄券)을 하사(下賜)하면서 정치에 참여할 것을 수차례 원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거절했다가 정도전(鄭道傳)·하 윤(河 崙) 등이 보낸 병력(兵力)에 의하여 추살(椎殺)되고 내외 당족 80여 명이 함께 참살당했다.
 한편 원부(原 )의 조카 운혁(云革)은 경성(鏡城)에 살다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정휴명(鄭休明)·박성장(朴成章)·조 두(曺  ) 등과 더불어 이시애 납치 작전을 수행하다가 적에게 잡혀 단천(端川)에서 살해당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되고 「삼강행실록」에 기록되었으며, 교수(敎授) 광운(廣運)의 아들 식(軾)은 중종(中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평해 군수(平海郡守)를 역임했고, 경사(經史)와 학문이 뛰어났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천로(天輅 : 식의 아들)는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개성 교수(開城敎授)를 지내고 정자(正字)가 되어 고향 사람인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 주어 장원급제를 시킨 일로 명천(明川)에 유비되었으나 문재(文才)가있어 풀려 나와 명(明) 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하여 <동방문사(東方文士)>로 일컬어졌다. 선조(宣祖) 때의 일이었다.명나라에서 중국 강남(江南)의 쟁쟁한 문사인 주지번(朱之蕃)을 사신으로 보내왔을 때 조정에서는 이정귀(李廷龜)를 반접사(伴接使)로 하고 이안눌(李安訥)을 연위사(延慰使)로 하여 대접케 하였다. 그런데 주지번이 평양(平壤)에 이르던 저녁에 기도회고(箕都懷古) 오율(五律) 백운(百韻)을 내어서 빈막(貧幕)에 보내고 다음날 새벽까지 지어 보내라고 하였다. 이정귀가 몸이 달아 사람들을 모아 그 대책을 물으니 모두가 밤이 짧아 한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니 운을 나누어 지어서 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정귀는 "사람마다 명의(命意)가 같지 않으니 한 사람에게 위촉함만 같지 못하다. 이는 차천로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천로는 "술 한 동이와 큰 병풍 하나에다 한석봉(韓石蜂)의 글씨를 얻지 못한다면 될 수 없다."고 하자 이정귀는 곧 갖추어 주었다. 천로가 큰 병풍을 대청(大聽) 위에 두르고 술 수십 사발을 마신 뒤에 병풍 안에 들어가 앉고, 한석봉은 병풍 밖에서 화전지(花箋紙)를 펴놓고 붓과 먹을 갖추어 대기하였다.
 천로는 병풍 안에서 철서진(鐵書鎭 : 책장 또는 종이 쪽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누르는 물건)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시상(詩想)을 고르다가 높은 소리로 "한석봉아 나의 일귀(逸句) 준어(駿語)를 받아 쓸지어다."하며 글귀를 부르자 한석봉의 속필로서도 받아 쓰기가 바빴다.
 밤이 깊지 않아서 벌써 오언백율(五言百律)이 이루어지자 천로는 크게 한 소리를 외치고 취도
하였다. 특히 천로는 뛰어난 문장력과 활달한 성품을 갖추어 당대 제일의 문사(文士)로서 한석봉의 글씨, 최 입(崔  )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컬어졌으며, 가사(歌辭)와 글씨에 뛰어났다.천로의 아우 운로(雲輅)는 1583년(선조 16) 알성문과에 장원하여 전의 현감(全義縣監)과 봉상시 판관(奉常侍判官)을 거쳐 교리(敎理)를 지냈고,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문장(文章)이 탁월하여 형 천로(天輅)와 더불어 당대의 명사(名士)였던 마상원(馬尙遠)과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로 불리웠다.
 천로(天輅)의 아들 전곤(轉坤 : 군수를 지냄)과 서곤(瑞坤)도 모두 시서화(詩書畵)로 이름났으며, 소근의 5세손 좌일(佐一)이 명문장가(名文章家)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좌일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노고산(老故山) 밑에서 그를 잉태할 때 꿈에 당(唐)나라 하지장(賀知章 : 당나라 산음 사람으로 문사와 초예에 뛰어났음)을 보고 낳았다고 하여 호(號)를 사명자(四名子)라 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따를 사람이 없었고, 정성하면서 경사(經史)와 시화(詩畵)에 정통하여 당시의 문장가로  손꼽았던 홍양호(洪良浩)·윤행임(尹行恁)·윤사국(尹師國)·정약용(丁若鏞) 등이 자리를 비워 좌일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는 학문이 우수하나 벼슬이 높지 못해 항상 세상을 불평하며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울분을 술과 시(詩)로 달랬다. 어떤 사람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충고하자, 그는 시로서 답하기를 <내 살아서는 취향백이 되고, 죽어서는 수문랑이 되리라.(生爲취鄕伯 死作修文郞)>라고 했다.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최 북(崔 北)·천수경(千壽慶)·장 혼(張 混)·왕 태(王 太) 등과 더불어 성(城) 서쪽에다 시사(詩社)를 지어 <송석원(松石圓)>이라 이름하고 시문(詩文)으로 여생을 보내며,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노라>고 외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아우 예량(禮亮)과 함께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충량(忠亮)이 화의(和議)가 성립됨을 통탄하여청태종(淸太宗)을 죽이고 원수를 갚겠다고 최효일(崔孝一)을 중국에 보내고 아우 예량을 심양(瀋陽)에 보내는 계획을 하다가 거사 전에 탄로나서 남별궁(南別宮) 밖에서 살해당했다.
 그의 아우 예량(禮良)은 형이 죽자 청나라 태종을 암살하겠다고 만주땅을 누볐던 사명척화
(事明斥和)의 골수분자였는데 전답을 팔고 가산을 털어 큰 배를 만들어 심양에 갔다가 정보를 입수한 청태종의 계략에 말려 거사전에 참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차씨와 최씨의 가족 수십명이 의주(義州)에 연행되어 참형을 당했고, 선천(宣川)에 살고 있던 예량의 종제(從弟) 원철(元轍)도 연좌되어 잡혀갔다.
 그런데 당시 조선 형관(刑官)들은 이 음모가 조선을 괴롭혔던 청국 황제를 암살하려는 음모였기에 가급적 죄인들을 두둔하고 사건을 축소하려고 노력하였기에 청인(청人) 형관들이 둘러앉은 재판정에 차원철(車元轍)이 들어서자, 조선의  형관이 "아니 원씨(元氏)가 무슨 죄로 잡혀들었는가?" 하며 차씨라는 성(姓)을 빼고 두자 성명인 원 철(元轍)로 조작해서 석방시킬 내심이었다.
 이에 원철은 "나의 성은 원씨가 아니라 엄연한 차씨이다. 나라를 위해 두 번도 아닌 단 한번 죽는데 성을 속여가며 살고 싶지 않다."하고는 참형을 당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항일단체인 <포우단(砲牛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도선(道善)과 <대동공보(大同共報)>를 창간하여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을 앙양하고 애국지사의 독립투쟁을 배후에서 후원했던 석보(錫甫)가 유명했으며, 희식(喜植)은 화성군 쌍봉산(華城郡雙峰山) 만세시위의 총지휘자로 일본 경찰을 살해하여 서대문 형무소에서 9년 2개월간이나 복역했고, 이석(利錫)은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한 후 임시정부 비서장(秘書長)을 역임하여 충절(忠節)의 전통가문인 연안 차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안 차씨(延安車氏)는 남한(南韓)에 총 37,092가구, 154,6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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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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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賈


    간簡


     


    갈葛


    감甘


     


    강姜


    강康


    강强


    강彊


     


    강剛




    개介


     


    견堅


    견甄


    경慶


    경景


    계桂


    고高


    곡曲


    공孔


    공公


    곽郭




    구具


    구丘


     


    국國


    국菊


    군君


    궁弓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나羅


    남궁南宮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단段


    단端


    당唐


    대大


    도都


    도陶


    도道




    독고獨孤


    돈頓


    돈敦


    동董


    동방東方


    두杜


     


    류柳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명明


    모牟


    모毛


    목睦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方


    방房


    방龐


    방邦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빈彬


    빈賓





    사史




    사謝


     


    사공司空


    사씨舍氏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서문西門




    석石


    석昔


    선宣


    선우鮮于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舜


    순淳


    순荀


    순順


    승承




    승昇


    시施


    시柴


     


    신申


    신辛


    신愼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양楊


    양樑


    양襄


    어魚


    엄嚴


    여呂


    여余


    여汝


    연延


    연燕




    연連


    염廉


    염閻


    영影


    영永


    예芮


    오吳


    오伍


     


    옥玉


    온溫


    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芸


    운雲


    원元


    원袁


    위韋




    위魏


    유劉


    유兪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은恩


    음陰


    응應


     




    이李


    이伊


    이異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蔣


    장章


    장莊


    전全




    전田


    전錢


    점占


    정鄭


    정丁


    정程


    제諸


    제갈諸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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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黃州는 본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다. 주요성씨로 황보(皇甫)·황(黃)·동(董)·변(邊)·최(崔)씨 등이 있었다. 黃州黃甫氏는 영천황보(永川皇甫)에서 분적(分籍)하여 黃州를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시조는 충의공(忠義公) 황보제공(皇甫悌恭)으로 태위(太尉)를 지냈다.
     이들의 1930년대 분포사항을 보면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인제리에 12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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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씨(后氏)

     后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났으며 본관(本貫)은〈唐寅〉단본이다.
     1930년 당시 강원도에 3가구가 있었는데, 회양군 상북면 오랑리(淮陽郡 上北面 五郞里)에 살던 후춘성씨(后春成氏)는 그의 11代祖가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후씨(后氏)는 나타나지 않아 정확한 가구와 인구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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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은 진주의 고호로 경상남도의 남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며,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문무왕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고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로 고쳤다.
     그 뒤 혜공왕 때에 정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시대에는 한때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진주목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으며 1910년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 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1949년에 부(府) 시(市)로 개칭되었다. 진양 화씨는 중국 낭야 사람인 화명신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명신은 본성이 화씨로서, 조상 대대로 명나라에서 벼슬하던 교목세가의 후손으로 낭야의 화촌대에 살다가 오랑캐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개탄하며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
     조선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화씨(花氏)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향화의 의리다"하며 명신을 예우하고 화씨의 성을 하사하고, 경성군에 봉했다. 그러나 상계의 실전으로 계대를 밝히지 못하여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진주에 세거한 후손 섭(燮)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선대부에 오른 섭(燮)의 아들 봉상(奉祥)과 영조 때 무관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올랐으며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일취가 유명했다.
     그외 절충장군 동휘와 정릉 참봉 덕봉(德鳳), 통덕랑 윤택(允澤)은 오우장을 지낸 정한·응한, 참판 석한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 화씨는 남한에 총 400가구, 1,5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90
  • 홍洪
    홍洪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473
  •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 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定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京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 온 옛 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중국(中國) 안정(安定)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호안국(胡安國)의 16세손 호극기(胡克己)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극기(克己)는 명(明)나라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라 1643년(인조 21) 답례사(答禮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 멸망되자 "내가
    천조(天朝)에 복명(復命)치 못하고, 조종(祖宗)의 땅이 전란(戰亂)에 짓밝히니 창천(蒼天)도 무심(無心)하다. 차라리 동해(東海)에서 죽을지언정 고국(故國)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하고 경기도(京畿道) 가평군(加平郡) 대명연(大明淵)에 은거(隱居)했다가, 함경도(咸鏡道) 북청군(北靑郡) 덕성면(德城面) 중장내(中庄內)에 초가(草家)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라 이름짓고 여생(餘生)을 보내니, 조선(朝鮮)의 효종(孝宗)이 그의 충성심(忠誠心)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租稅)로 녹(祿)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극기(克己)의 본향지(本鄕地)인 중국(中國)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기(克己)의 맏아들 제백(濟伯)이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고, 후손 사룡(士龍)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녹사(綠事)를 지낸 태기(泰起), 충찬위(忠贊衛)에 오른 시악(時악)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가구, 7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738
  •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保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扶安)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희안(喜安)으로 고쳐 고부(古阜)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부령현(扶寧縣)의 겸임을 삼았다. 우왕(禑王) 때 보안현(保安縣)을 설치하였으며 1415년(태종 15)에 부안(扶安)에 편입시켰다.
     호씨(扈氏)는 고려(高麗) 창업(創業)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호의(扈義)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侯伯濟) 견훤군(甄萱軍)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왕(王 :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보안 호씨(保安扈氏)는 의(義)의 맏아들 호은열(扈殷說)이 광익효절정난안사공신(匡翼效節定難安社功臣)으로 보안군(保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보안(保安)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
     전주 호씨(全州扈氏)는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明)나라 장군(將軍)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난(亂) 후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호준(扈浚)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가구, 1,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607
  •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진주 형씨(晋州邢氏)의 시조(始祖)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인 형옹(邢 )으로 전(傳)한다.
    옹( )은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옹(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3세손 방(昉)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慶南) 진주(晋州) 반성(班城)에서 살았다. 방(昉)의 손자(孫子) 공미(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280년 (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征伐)하는 데 공(功)을 세워 지밀직사사(知 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방(昉)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방(昉)의 현손(玄孫) 찬(贊)이 조선조(朝鮮朝)에서 판도판소(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 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 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忠淸道兵馬使)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외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學問)으로 이름 났으며, 협(浹)은 효종(孝宗) 때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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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玄
    현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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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許
    허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91
  • 해씨(海氏)
    해씨(海氏)

     해씨(海氏)는 중국(中國) 설군(薛郡 : 산동성 제령도에 있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오계(五季 : 중국 고대 다섯 왕조를 달리 일컫던 말) 때 사람인 해진명(海眞明)과 인종(仁宗) 때 중궁(中宮)이었던 해수자(海壽者)란 사람이 사기(史記)에 등장된 인물이다.
     우리 나라 해씨(海氏)의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靈巖)과 목포·나주(羅州)를 비롯한 경남 김해(金海) 등지에 7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0가구, 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46
  • 함咸
    함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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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漢
    한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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