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본관 행주 기씨(幸州 奇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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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1:42 조회 1,89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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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幸州)는 경기도(京畿道) 고양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을 신라에서 우왕(遇王) 또는 왕봉(王逢)이라 하였고, 고려초에 행주로 개칭하여  성종 때는 고봉(高峰)·덕양(德陽) 등으로 불리우다가 1413년(조선 태종 13) 고양군이 되었다.
 기씨(奇氏)는 중국 하남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고대 기자조선(箕子朝鮮)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다.
 기원전 1122년 중국 3대의 하나인 은나라가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되자 은나라 주왕의 숙부인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건너와 나라를 세운 것이 기자조선인데, 기자의 41세손 기준(箕準)에 이르러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겨, 기준이 배를 타고 금마군(金馬郡 : 지금의  익산군)으로 내려가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개칭한 후 50 여 소국(小國)을 통합하여  다스리며 한왕(韓王)이 되었다. 
 기준의 7세손 기훈(箕勳)은 아들 3현제를  두었는데 우성(友誠)이 덕양(德陽 : 행주)  기씨(奇氏), 우량(友諒)은 상당(上黨 : 청주) 한씨(韓氏), 우평(友平)은 북원(北原 :  평양)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고 한다.
 우성(友誠)은 백제 온조왕조에서 시중(侍中)을 지냈고, 후손들이  백제와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도록 크게 번성하였다. 
  그러나 행주 기씨(幸州奇氏)는
  1688년(숙종 14) 「무진보(戊辰譜)」를 시작할 때 득성조(得姓祖) 이하의 계대(系代)를 알 수 없어 고려 인종조에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된 순우(純祐)를 일세조로 하였다. 
  기씨의 본관(本貫)은 행주와  개성을 비롯하여  풍양(豊壤 : 양주지방)·서원(西原 : 청주의  별호)· 단양(丹陽) 등 21 본(本)까지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전하고 있으나 모두가 행주 기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씨(奇氏)는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명문의 기틀을 다지며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역사를 수(繡) 놓았다. 명문의 전통을 이어온 훌륭한 인맥을 살펴보면 중시조 순우의  10 세손 건(虔)이 뛰어났다. 
 공조 전서(工曹典書) 면(勉)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포의(布衣)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발탁되어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어 청렴으로 명망이 높았다. 특히 지방관(地方官)으로 있을 때 치적(治績)이 훌륭해서 이도(吏道 : 관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수범을 보였다.
  그가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 곳에 붕어가 나는 큰 못이 있는데 관리들이 공사간(公私間)에 백성들로 하여금 그 붕어를 잡아 바치라고 하여 민폐가 막심하자 그 못을 붕어 무덤이라고 조롱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가 말하기를 “어찌 내 입맛 때문에 염치를 상할 수 있는가”하며 자신도 먹지 않고 잔치가 아니면 그물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평생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는데, 일찍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  백성들이 전복 상납으로 괴로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제주에는 부모가 죽으면 언덕이나 구렁에 버리는 풍속이 있었는데, 그가 부임하기 전에 먼저 고을에 영을 내려 관(棺)을 갖추고 염습하여 장사지내도록 가르쳤다.
  하루는 꿈 속에 삼백여명이 뜰 아래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공의 은덕으로 해골이 폭록되는 것을 면하였는데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응당 금년에 손자를 보실 것입니다.”하였다. 
  그때까지 그의 아들 3형제가 모두 자식이 없었는데 과연 이 해에 장령(掌令) 축(軸)이 아들 찬을 낳아 뒤에 찬의 벼슬이 응교(應敎)에 이르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의하면 단종조에 수양대군의 야심을 낌새 챈 그가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두문불출하자,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청파 만리현(萬里峴)에 있던 그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아갔으나 청맹(靑盲: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실지는 조금도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핑계대고 나가 맞지도 않았다. 
 세조는 바늘을 가지고 눈을 찌를 것 같이하여 시험하매 그는 눈을 딱 뜨고 보면서도 깜짝하지 않자 세조는 마침내 그를 자신의 정권에 이용하지 못하겠다는 것을 알고 돌아갔다고 한다.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진 준(遵)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건(虔)의 증손이자 응교(應敎) 찬의 아들로서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다가 기묘사화로 아산에 귀양, 온성으로 옮겨져 사사(賜死)되었다,
  준이 어느날 궐내에서 숙직할 때 관외(關外)로 여행하는 꿈을 꾸었는데, 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 등 기구한 노정을 전전하면서 율시(律詩)  한 수를 읊되,
「낯선 땅  산과 물은 고향과도 같은데, 하늘 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높은 봉우리에 기대었네.  아득한 검은 구름에  강가 관문이 닫히었고, 고목 나무 잎 지는 소리에 빈 성곽이 쓸쓸하다.  들길은 가을 풀 밖으로  가늘게 뻗치었고, 인가는 멀리 석양 속에 있구나. 
 가는 배 만리에 돌아오는 돛대  없으니 망망한 벽해에 소식 통하지 못하네」하였다. 
 홀연히 깨어나 벽에다 꿈 속의 시를 썼다. 얼마  되지 않아서 기묘당적에 관련되어 아산으로 귀양갔다가 온성으로 옮겼는데, 도중에 보이는 것이 모두 시에 읊은 경치  그대로였다. 
 말을 멈추고 전일의 꿈 속의 시를 읊을 때 처량하게 흐느끼니 따라 가던 노비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시는 그가 죽은 후에도 선비들간에 크게 애송되었고, 특히 유배지의 선비들을 무척 감상적으로 달래고 울려주는 명시가 되었다고 한다.
  선조 때의 명현 대승(大升)은  준(遵)의 조카이며 영상(領相) 자헌(自獻)의  삼촌이다. 그는 어릴 때 시골 서당에 나가 글을 읽었다.  
 어느날 손님이 연귀(聯句)로서 그의 재주를  시험하려고 밥식(食)자를 넣어 글을 지으라고 하니 「배부르도록 먹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
 (食無求飽君子道)」하니 손님이 “너의 끝의 삼촌이 사림의 영수가 되었으니 가업을 이을 사람은 너로구나”하였다.
  그는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 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히고 이조 정랑과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며 광국삼등공신(光國三等功臣)으로 덕원군(德原君)에 추봉되었다. 
 특히 스승인 퇴계 이 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8년동안이나 서신논쟁(書信論爭)을 벌인 일화가 유명하다.
 그외 응세(應世)의 아들 자헌(自獻 : 광해군 때 영의정을 역임)과  윤헌(允獻 : 안악군수를 역임)이 유명했고, 정묘호란 때 선천  부사(宣川府事)로 남한산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협과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켜 토산(兎山) 전투에서 전사란 효일(孝一)은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진 정진(正鎭)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한말에 와서는 삼연(參衍)이 장성(長城)의 수록산(隨綠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였고, 우만(宇萬)은 조부의 학문을 계승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고종 때 김평묵(金平默)  등과 함꼐 유생을 이끌고 정부의 행정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소수(湖南疏首)」로 일컬어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 오대신(賣國五大臣)을 저격한 산도(山度)는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근섭(近燮)과 함께 충절과 도학을 가통으로 이어온 행주 기씨(幸州奇氏)를 더욱 빛냈다. 

 오늘날 기씨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전남·북(全南北)에 집중세거(集中世居)하며, 1985년 11월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총 22,689명으로 전체 성씨 중 79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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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가賈


    간簡


     


    갈葛


    감甘


     


    강姜


    강康


    강强


    강彊


     


    강剛




    개介


     


    견堅


    견甄


    경慶


    경景


    계桂


    고高


    곡曲


    공孔


    공公


    곽郭




    구具


    구丘


     


    국國


    국菊


    군君


    궁弓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나羅


    남궁南宮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단段


    단端


    당唐


    대大


    도都


    도陶


    도道




    독고獨孤


    돈頓


    돈敦


    동董


    동방東方


    두杜


     


    류柳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명明


    모牟


    모毛


    목睦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方


    방房


    방龐


    방邦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빈彬


    빈賓





    사史




    사謝


     


    사공司空


    사씨舍氏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서문西門




    석石


    석昔


    선宣


    선우鮮于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舜


    순淳


    순荀


    순順


    승承




    승昇


    시施


    시柴


     


    신申


    신辛


    신愼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양楊


    양樑


    양襄


    어魚


    엄嚴


    여呂


    여余


    여汝


    연延


    연燕




    연連


    염廉


    염閻


    영影


    영永


    예芮


    오吳


    오伍


     


    옥玉


    온溫


    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芸


    운雲


    원元


    원袁


    위韋




    위魏


    유劉


    유兪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은恩


    음陰


    응應


     




    이李


    이伊


    이異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蔣


    장章


    장莊


    전全




    전田


    전錢


    점占


    정鄭


    정丁


    정程


    제諸


    제갈諸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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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의 1930년대 분포사항을 보면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인제리에 12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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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씨(后氏)

     后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났으며 본관(本貫)은〈唐寅〉단본이다.
     1930년 당시 강원도에 3가구가 있었는데, 회양군 상북면 오랑리(淮陽郡 上北面 五郞里)에 살던 후춘성씨(后春成氏)는 그의 11代祖가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후씨(后氏)는 나타나지 않아 정확한 가구와 인구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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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은 진주의 고호로 경상남도의 남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며,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문무왕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고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로 고쳤다.
     그 뒤 혜공왕 때에 정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시대에는 한때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진주목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으며 1910년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 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1949년에 부(府) 시(市)로 개칭되었다. 진양 화씨는 중국 낭야 사람인 화명신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명신은 본성이 화씨로서, 조상 대대로 명나라에서 벼슬하던 교목세가의 후손으로 낭야의 화촌대에 살다가 오랑캐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개탄하며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
     조선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화씨(花氏)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향화의 의리다"하며 명신을 예우하고 화씨의 성을 하사하고, 경성군에 봉했다. 그러나 상계의 실전으로 계대를 밝히지 못하여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진주에 세거한 후손 섭(燮)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선대부에 오른 섭(燮)의 아들 봉상(奉祥)과 영조 때 무관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올랐으며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일취가 유명했다.
     그외 절충장군 동휘와 정릉 참봉 덕봉(德鳳), 통덕랑 윤택(允澤)은 오우장을 지낸 정한·응한, 참판 석한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 화씨는 남한에 총 400가구, 1,5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97
  • 홍洪
    홍洪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50
  •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 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定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京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 온 옛 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중국(中國) 안정(安定)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호안국(胡安國)의 16세손 호극기(胡克己)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극기(克己)는 명(明)나라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라 1643년(인조 21) 답례사(答禮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 멸망되자 "내가
    천조(天朝)에 복명(復命)치 못하고, 조종(祖宗)의 땅이 전란(戰亂)에 짓밝히니 창천(蒼天)도 무심(無心)하다. 차라리 동해(東海)에서 죽을지언정 고국(故國)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하고 경기도(京畿道) 가평군(加平郡) 대명연(大明淵)에 은거(隱居)했다가, 함경도(咸鏡道) 북청군(北靑郡) 덕성면(德城面) 중장내(中庄內)에 초가(草家)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라 이름짓고 여생(餘生)을 보내니, 조선(朝鮮)의 효종(孝宗)이 그의 충성심(忠誠心)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租稅)로 녹(祿)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극기(克己)의 본향지(本鄕地)인 중국(中國)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기(克己)의 맏아들 제백(濟伯)이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고, 후손 사룡(士龍)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녹사(綠事)를 지낸 태기(泰起), 충찬위(忠贊衛)에 오른 시악(時악)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가구, 7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33
  •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保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扶安)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희안(喜安)으로 고쳐 고부(古阜)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부령현(扶寧縣)의 겸임을 삼았다. 우왕(禑王) 때 보안현(保安縣)을 설치하였으며 1415년(태종 15)에 부안(扶安)에 편입시켰다.
     호씨(扈氏)는 고려(高麗) 창업(創業)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호의(扈義)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侯伯濟) 견훤군(甄萱軍)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왕(王 :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보안 호씨(保安扈氏)는 의(義)의 맏아들 호은열(扈殷說)이 광익효절정난안사공신(匡翼效節定難安社功臣)으로 보안군(保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보안(保安)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
     전주 호씨(全州扈氏)는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明)나라 장군(將軍)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난(亂) 후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호준(扈浚)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가구, 1,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76
  •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진주 형씨(晋州邢氏)의 시조(始祖)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인 형옹(邢 )으로 전(傳)한다.
    옹( )은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옹(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3세손 방(昉)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慶南) 진주(晋州) 반성(班城)에서 살았다. 방(昉)의 손자(孫子) 공미(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280년 (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征伐)하는 데 공(功)을 세워 지밀직사사(知 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방(昉)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방(昉)의 현손(玄孫) 찬(贊)이 조선조(朝鮮朝)에서 판도판소(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 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 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忠淸道兵馬使)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외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學問)으로 이름 났으며, 협(浹)은 효종(孝宗) 때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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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玄
    현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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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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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씨(海氏)
    해씨(海氏)

     해씨(海氏)는 중국(中國) 설군(薛郡 : 산동성 제령도에 있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오계(五季 : 중국 고대 다섯 왕조를 달리 일컫던 말) 때 사람인 해진명(海眞明)과 인종(仁宗) 때 중궁(中宮)이었던 해수자(海壽者)란 사람이 사기(史記)에 등장된 인물이다.
     우리 나라 해씨(海氏)의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靈巖)과 목포·나주(羅州)를 비롯한 경남 김해(金海) 등지에 7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0가구, 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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