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본관 해평 길씨(海平 吉氏)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1:42 조회 2,099 댓글 0

본문

  해평(海平) 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선산군(善山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파징(波澄)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신라(新羅) 때의 병정현(竝井懸)을 초려초에 해평군(海平郡고)으로 쳐서 복주(福州:안동의 옛 지명)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상주(尙州)와 선산(善山)으로 이속되었다가 1415년(태종 15)에 해평현(海平縣)으로 강등된 후 선산군(善散郡) 해평면(海平面)이 되었다.

 길씨(吉氏)의 중국(中國) 풍익(馮翊)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으며, 당(唐) 나라에서 귀화(歸化) 해온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인 길 당(吉  )이  고려(高麗) 문종(文宗)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져 우리나라 길씨(吉氏)의 본관(本貫)은 해평(海平)과 개성(開城)을 비롯하여 하음(河陰:강화지방)과 여주(驪州)등 28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傳)하나 모두가 해평 길씨(海平 吉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므로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해평(海平) 단본(單本)으로 알려졌다.
 해평 길씨는 해평백(海平伯) 길 당(吉  )의 후손에서 1백여년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래 때의 성균진사(成均進士)인 길시우(吉時遇)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일찌기 낙동강변(洛東江邊)에 터를 잡아 고려말에서부터 충절(忠節)과 도덕가문(道德家門)으로 일컬어진 해평 길씨(海平 吉氏)는 해동(海東)의 절신(絶信) 길 재(吉 再)가 더욱 빛냈다.   고려가 기울기 시작한 1353년(공민왕 2) 지금주사(知錦州事) 원진(元進)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박 분(朴  :상산 박씨)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이 색(李 穡)·정몽주(鄭夢周)·권 근(權 近)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도학(道學)을 밝혔다. 
  그가 여덟 살 때의 일이다. 아버지 원진(元進)이 보성 대판(寶城 大判)으로 임지(任地)에 나갈 때 어머니 김씨(金氏:토산 김씨 희적의 딸)가 따라가면서 박봉으로 생활이 어려우므로 재(再)를 외가에 맡겨두고 갔다. 
  그는 하루종일 어머니를 사모하여 눈물을 흐리며 남계(南溪)에서 놀다가 석별가(石鱉歌)를 지었다. "자라야 자라야 너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느냐, 나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도다. 
 내가 너를 삻아 먹을 줄 알건만. 어머니 잃은 것이 나와 같으므로 너를 놓아 준다"하고 물에다 던져주며 울고 있으니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쫓아와서 끌어안고 감동하여 울었다고 한다.   1386년(우왕 12)에 사마(司馬)에 합격하고 3년 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창왕(昌王) 때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니 향리 사람들이 그 효도를 칭찬하였다. 
  조선(朝鮮)이 개국(開國) 한 후 태종(太宗)은 일찌기 태학관(太學館)에서 시경(詩經)을 읽었던 동문(同門)인 관계로 그를 불러 정종(定宗)에게 아뢰어서 봉상박사(奉常博士)의 벼슬을 주었으나, 그는 사은숙배(謝恩肅拜)하지 않고 말하기를 "옛 정(情)으로 부르시니 왔을 뿐 벼슬하는 것은 재(再)의 뜻이 아닙니다."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자네의 말은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불역지도(不易之道)이니 그 뜻을 빼앗기기 어려우나 자네를 부른 사람은 나요. 
 
  
자네에게 벼슬을 준 분은 상(上:정종)이니 상에게 사의를 표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정종(定宗)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우대하여 보내주고 그 집에 대해서는 납세(納稅)와 부역(賦役)을 면제하여 주었다.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태종(太宗)은 "길 재에게 이들이 있다 하니 불러서 등용 시켜 길 재의 충성을 드러내도록 하라"하니 사순(師舜)을 불러 종묘부승(宗廟副丞)에 제수하였다.
  사순이 조정에 불려갈 적에 재(再)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에게 먼저 예의를 베푸는 것은 삼대(三代:하·은·주나라) 이후에 드문 일이다.
  네가 초야에 있는데 임금이 먼저 부르니 그 은의(恩義)가 범연(泛然)한데 비할 것이 아니다. 네가 마땅히 나의 고려에 향하는 마음을 본받아서 너의 조선임금을 섬겨라." 하였다. 
  특히 그는 김숙자(金叔滋)에게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쳐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 등으로 하여금 학통(學統)을 잇게 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친수를 이루었으며, 「야은집(冶隱集)」을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67살에 임종이 가가와지자 부인 신씨(申氏)가 벼슬을 하고 있는 아들 사순(師舜)을 불러 올 것을 권하자 "아비는 임금과 같은 것이다. 
  임금 옆에 있으면 아비 옆에 있는 것과 같다. 아들은 없어도 있는 것이다."하며 쓸쓸히 일생을 마치고 경북 칠곡군 복삼면 오태동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묻혔다. 
  그의 묘소 앞 강변의 단애(斷崖: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에는 지주비(砥柱碑)가 서있는데, 중국 황하(黃河)의 탁류를 이겨내는 지주비를 탁본떠와 그대로 전면(前面)에 시기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뒷면의 글을 지어 1587년(선조 20)에 세운 것이다. 
  그 외 해평 길시를 빛낸 인물(人物)로는 송당(松當) 박 영(朴 英)의 문인(文人)으로 이름난 면지(勉之)의 아들 겸(謙:현감을 역임)과 회(誨)가 유명했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회(誨)는 임진왜란 때 피난가는 대가(大駕) 앞에 길을 막고 엎드려 변방에 왜적의 염탐군이 있어 해침을 받을가 염려되오니 가마대신 말을 타시도록 진언했고, 뒤에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추록되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3·1운동의 주역인 선주(善宙)가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  평양지부(平壤支部)를 조직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침으로서 충절(忠節)의 가문(家門) 해평 길씨(海平 吉氏)를 더욱 빛냈다.
  오늘날 해평 길씨는 경북(慶北) 선산(善山)과 충남(忠南) 금산(錦山)지방에 집중 세거하며 1985년 인구조사 결과 총 7,360가구에 30,390명으로 전체 성씨 중 73위로 나타났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물 검색
전체 588건 1 페이지
  •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가賈


    간簡


     


    갈葛


    감甘


     


    강姜


    강康


    강强


    강彊


     


    강剛




    개介


     


    견堅


    견甄


    경慶


    경景


    계桂


    고高


    곡曲


    공孔


    공公


    곽郭




    구具


    구丘


     


    국國


    국菊


    군君


    궁弓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나羅


    남궁南宮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단段


    단端


    당唐


    대大


    도都


    도陶


    도道




    독고獨孤


    돈頓


    돈敦


    동董


    동방東方


    두杜


     


    류柳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명明


    모牟


    모毛


    목睦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方


    방房


    방龐


    방邦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빈彬


    빈賓





    사史




    사謝


     


    사공司空


    사씨舍氏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서문西門




    석石


    석昔


    선宣


    선우鮮于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舜


    순淳


    순荀


    순順


    승承




    승昇


    시施


    시柴


     


    신申


    신辛


    신愼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양楊


    양樑


    양襄


    어魚


    엄嚴


    여呂


    여余


    여汝


    연延


    연燕




    연連


    염廉


    염閻


    영影


    영永


    예芮


    오吳


    오伍


     


    옥玉


    온溫


    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芸


    운雲


    원元


    원袁


    위韋




    위魏


    유劉


    유兪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은恩


    음陰


    응應


     




    이李


    이伊


    이異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蔣


    장章


    장莊


    전全




    전田


    전錢


    점占


    정鄭


    정丁


    정程


    제諸


    제갈諸葛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624
  • 황주황보씨(黃州黃甫氏)
    황주황보씨(黃州黃甫氏)

     黃州는 본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다. 주요성씨로 황보(皇甫)·황(黃)·동(董)·변(邊)·최(崔)씨 등이 있었다. 黃州黃甫氏는 영천황보(永川皇甫)에서 분적(分籍)하여 黃州를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시조는 충의공(忠義公) 황보제공(皇甫悌恭)으로 태위(太尉)를 지냈다.
     이들의 1930년대 분포사항을 보면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인제리에 12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23
  • 황보皇甫
    황보皇甫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65
  • 황黃
    황黃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174
  • 후씨(后氏)
    후씨(后氏)

     后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났으며 본관(本貫)은〈唐寅〉단본이다.
     1930년 당시 강원도에 3가구가 있었는데, 회양군 상북면 오랑리(淮陽郡 上北面 五郞里)에 살던 후춘성씨(后春成氏)는 그의 11代祖가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후씨(后氏)는 나타나지 않아 정확한 가구와 인구수는 알 수 없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04
  •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은 진주의 고호로 경상남도의 남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며,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문무왕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고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로 고쳤다.
     그 뒤 혜공왕 때에 정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시대에는 한때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진주목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으며 1910년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 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1949년에 부(府) 시(市)로 개칭되었다. 진양 화씨는 중국 낭야 사람인 화명신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명신은 본성이 화씨로서, 조상 대대로 명나라에서 벼슬하던 교목세가의 후손으로 낭야의 화촌대에 살다가 오랑캐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개탄하며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
     조선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화씨(花氏)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향화의 의리다"하며 명신을 예우하고 화씨의 성을 하사하고, 경성군에 봉했다. 그러나 상계의 실전으로 계대를 밝히지 못하여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진주에 세거한 후손 섭(燮)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선대부에 오른 섭(燮)의 아들 봉상(奉祥)과 영조 때 무관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올랐으며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일취가 유명했다.
     그외 절충장군 동휘와 정릉 참봉 덕봉(德鳳), 통덕랑 윤택(允澤)은 오우장을 지낸 정한·응한, 참판 석한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 화씨는 남한에 총 400가구, 1,5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92
  • 홍洪
    홍洪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43
  •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 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定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京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 온 옛 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중국(中國) 안정(安定)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호안국(胡安國)의 16세손 호극기(胡克己)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극기(克己)는 명(明)나라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라 1643년(인조 21) 답례사(答禮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 멸망되자 "내가
    천조(天朝)에 복명(復命)치 못하고, 조종(祖宗)의 땅이 전란(戰亂)에 짓밝히니 창천(蒼天)도 무심(無心)하다. 차라리 동해(東海)에서 죽을지언정 고국(故國)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하고 경기도(京畿道) 가평군(加平郡) 대명연(大明淵)에 은거(隱居)했다가, 함경도(咸鏡道) 북청군(北靑郡) 덕성면(德城面) 중장내(中庄內)에 초가(草家)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라 이름짓고 여생(餘生)을 보내니, 조선(朝鮮)의 효종(孝宗)이 그의 충성심(忠誠心)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租稅)로 녹(祿)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극기(克己)의 본향지(本鄕地)인 중국(中國)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기(克己)의 맏아들 제백(濟伯)이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고, 후손 사룡(士龍)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녹사(綠事)를 지낸 태기(泰起), 충찬위(忠贊衛)에 오른 시악(時악)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가구, 7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27
  •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保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扶安)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희안(喜安)으로 고쳐 고부(古阜)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부령현(扶寧縣)의 겸임을 삼았다. 우왕(禑王) 때 보안현(保安縣)을 설치하였으며 1415년(태종 15)에 부안(扶安)에 편입시켰다.
     호씨(扈氏)는 고려(高麗) 창업(創業)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호의(扈義)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侯伯濟) 견훤군(甄萱軍)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왕(王 :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보안 호씨(保安扈氏)는 의(義)의 맏아들 호은열(扈殷說)이 광익효절정난안사공신(匡翼效節定難安社功臣)으로 보안군(保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보안(保安)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
     전주 호씨(全州扈氏)는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明)나라 장군(將軍)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난(亂) 후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호준(扈浚)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가구, 1,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67
  •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진주 형씨(晋州邢氏)의 시조(始祖)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인 형옹(邢 )으로 전(傳)한다.
    옹( )은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옹(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3세손 방(昉)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慶南) 진주(晋州) 반성(班城)에서 살았다. 방(昉)의 손자(孫子) 공미(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280년 (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征伐)하는 데 공(功)을 세워 지밀직사사(知 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방(昉)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방(昉)의 현손(玄孫) 찬(贊)이 조선조(朝鮮朝)에서 판도판소(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 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 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忠淸道兵馬使)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외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學問)으로 이름 났으며, 협(浹)은 효종(孝宗) 때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933
  • 현玄
    현玄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089
  • 허許
    허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181
  • 해씨(海氏)
    해씨(海氏)

     해씨(海氏)는 중국(中國) 설군(薛郡 : 산동성 제령도에 있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오계(五季 : 중국 고대 다섯 왕조를 달리 일컫던 말) 때 사람인 해진명(海眞明)과 인종(仁宗) 때 중궁(中宮)이었던 해수자(海壽者)란 사람이 사기(史記)에 등장된 인물이다.
     우리 나라 해씨(海氏)의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靈巖)과 목포·나주(羅州)를 비롯한 경남 김해(金海) 등지에 7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0가구, 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21
  • 함咸
    함咸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31
  • 한漢
    한漢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10

회원로그인

Copyright © 2001-2016 ITNANU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