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본관 강릉김씨(江陵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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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1:45 조회 1,88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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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김씨(江陵金氏)

 
강릉(江陵)은 본래 예국(濊國 : 1세기 초에 임둔 옛 땅에서 자립한 부족국가)의 도성지(都城地)로서 상고시대에 창해(滄海)와 임둔(臨屯)에 속했으며, 서기 313년(고구려 미천왕 14)에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河瑟羅)라 하였다. 서기 550년(신라 진흥왕 11) 신라(新羅)의 영토가 되어 639년(선덕여왕 8) 2월 소경(小京)으로 삼았다가 685년(태종무열왕 5)하서주(河西州)로 개편, 서기 776년(경덕왕 16) 다시 명주(溟州)로 개편하였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인 936년(태조 19)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臨瀛館)을 세웠다. 그후 우계(羽谿)·연곡의 두 현(縣)을 두었다가,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인 1675년(숙종 1)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강릉김씨(江陵金氏)의 시조(始祖)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1세손 김주원(金周元)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는 신라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6세손으로, 서기 777년(신라 혜공왕 13) 이찬(신라 17등 관계중 두번째 관위)으로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785년 (선덕왕 6) 선덕왕(宣德王)이 죽고 그의 후사(後嗣)가 없어 군신(群臣)들의 회의(會議) 끝에 왕(王)으로 추대되었으나 갑자기 그때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 현재 경주부근의 하천)의 물이 불어나 건널 수 없어 입궐(入闕)을 못하게 되자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며 즉위를 포기하였다 한다. 이에 냇물왕(柰勿王)의 11세손
경신(敬信: 원성왕)이 왕으로 추대되었고, 비가 개인 후 원성왕(元聖王)은 그에게 즉위를 권유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강릉(江陵)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원성왕 (元聖王)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封)하고 명주(溟州)·익령(翼嶺: 지금의 양양)·근을어(斤乙於: 지금의 평해) 등 다섯 군(郡)을 다스리게 하여 그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강릉(江陵)으로 하게 되었으며, 고려(高麗)와 조선조(朝鮮朝)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이 배출되어 명문(名門)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주원(周元)의 9세손 상기(上琦)가 고려 예종(睿宗: 제16대 왕, 재위기간: 1105 ∼ 1122) 때 평장사(平章事: 내사 문하성의 정2품 벼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인존(仁存)은 문하평장사 상주국(門下平章事上柱國)으로 인종(仁宗) 때 익성
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에 책록되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중요한 국사(國事)가 있을 때마다 왕이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명문의 전통을 이은 인물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시습(時習)이 대표적이다. 서기 1435년(세종 17) 성균관 부근에서 일성(日省)의 아들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신동(神童), 신재(神才)로 불리워진 그는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은 시(詩)를 읊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無雨雷聲何處動)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黃雲片片四方分)"
 그가 5세 때[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여 이 소식을 접한 세종대왕이 그를 불러 총애했다고 하며, 대사성 김 반(金 泮)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사범지종(師範之宗)으로 일컬어진 윤 상(尹 詳)에게 [예서(禮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웠다. 21세 때인 1455년(단종 3)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내몰고 왕위를 찬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으로 고친 후 방랑의 길을 떠났다. 특히 그는 세조(世祖)의 패륜에 통분하고 저항하여 매서운 절개를 지키며, 고고한 지성으로 불교와 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思想)과 탁월한 문장으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理想)의 세계를 문학(文學)에서 찾으며 외롭게 살다간 불행한 천재였다. 북(北)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東)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南)으로는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 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탕유관동록]·[탕유호남록]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으며, 서기 1463년(세조 9) 책을 구하러 한양(漢陽)에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 태종의 2남, 세종의 형)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경주(慶州)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다시 입산하였다. 
 그후 누차에 걸쳐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금오산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와 1468년(세조 13)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다. 서기 1481년(성종 12) 환속(還俗)하여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2년 뒤 다시 한양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애를 끝마쳤다. 한편 사예(司藝) 충정(忠貞)의 아들 첨경(添慶)은 1549년(명종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어사(御史)·부수찬(副修撰)·지평(持平) 등을 거쳐 1561년(명종 16)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정(僉正)을 지내고 강릉부사(江陵府史)로 나갔다가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그외 감찰(監察) 종윤(宗胤)의 아들 충렬(忠烈)이 중종(中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한성부 판관, 경기 도사를 거쳐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館: 시정을 기록하는 관청의 정3품 벼슬)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국평(國坪)의 아들 행(行)은 선조(宣祖) 때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되어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셋째 아들)의 증도가(證道歌)를 간행하고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
 예조 판서 첨경(添慶)의 현손(玄孫)인 시혁은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랐으며, 시환(始煥)과 시형(始炯)도 예조(禮曹) 및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우참찬(右參贊)·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낸 계락(啓洛)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618 년(광해군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한 기종(起宗)은 철명(哲命)의 아들로 이 괄(李 适)의 난 때 도원수 장 만(張  晩)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무훈을 세워 진무2등공신(振武二等功臣)으로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호조 판서를 지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대사간(大司諫)·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예·호조(吏禮戶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상성(尙星)과 영조(英祖) 때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 조선 때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 들어가서 봉조하(奉朝賀)가 된 상익(尙翼), 예조(禮曹) 및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한 상적(尙迪)이 유명했다. 시현(始炫)의 아들 상중(尙重)은 영조(英祖) 때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러,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상집(尙集)과 학자(學者)로 유명한 홍운(鴻運), 형조 판서(刑曹判書) 화진(華鎭) 등과 함께 명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상철은 1775년(영조 51)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학덕으로 왕의 신임을 받았고, 일찍이 우의정(右議政) 때 편집청을 두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많은 편의를 가져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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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가賈


    간簡


     


    갈葛


    감甘


     


    강姜


    강康


    강强


    강彊


     


    강剛




    개介


     


    견堅


    견甄


    경慶


    경景


    계桂


    고高


    곡曲


    공孔


    공公


    곽郭




    구具


    구丘


     


    국國


    국菊


    군君


    궁弓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나羅


    남궁南宮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단段


    단端


    당唐


    대大


    도都


    도陶


    도道




    독고獨孤


    돈頓


    돈敦


    동董


    동방東方


    두杜


     


    류柳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명明


    모牟


    모毛


    목睦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方


    방房


    방龐


    방邦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빈彬


    빈賓





    사史




    사謝


     


    사공司空


    사씨舍氏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서문西門




    석石


    석昔


    선宣


    선우鮮于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舜


    순淳


    순荀


    순順


    승承




    승昇


    시施


    시柴


     


    신申


    신辛


    신愼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양楊


    양樑


    양襄


    어魚


    엄嚴


    여呂


    여余


    여汝


    연延


    연燕




    연連


    염廉


    염閻


    영影


    영永


    예芮


    오吳


    오伍


     


    옥玉


    온溫


    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芸


    운雲


    원元


    원袁


    위韋




    위魏


    유劉


    유兪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은恩


    음陰


    응應


     




    이李


    이伊


    이異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蔣


    장章


    장莊


    전全




    전田


    전錢


    점占


    정鄭


    정丁


    정程


    제諸


    제갈諸葛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633
  • 황주황보씨(黃州黃甫氏)
    황주황보씨(黃州黃甫氏)

     黃州는 본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다. 주요성씨로 황보(皇甫)·황(黃)·동(董)·변(邊)·최(崔)씨 등이 있었다. 黃州黃甫氏는 영천황보(永川皇甫)에서 분적(分籍)하여 黃州를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시조는 충의공(忠義公) 황보제공(皇甫悌恭)으로 태위(太尉)를 지냈다.
     이들의 1930년대 분포사항을 보면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인제리에 12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28
  • 황보皇甫
    황보皇甫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70
  • 황黃
    황黃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177
  • 후씨(后氏)
    후씨(后氏)

     后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났으며 본관(本貫)은〈唐寅〉단본이다.
     1930년 당시 강원도에 3가구가 있었는데, 회양군 상북면 오랑리(淮陽郡 上北面 五郞里)에 살던 후춘성씨(后春成氏)는 그의 11代祖가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후씨(后氏)는 나타나지 않아 정확한 가구와 인구수는 알 수 없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07
  •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은 진주의 고호로 경상남도의 남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며,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문무왕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고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로 고쳤다.
     그 뒤 혜공왕 때에 정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시대에는 한때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진주목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으며 1910년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 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1949년에 부(府) 시(市)로 개칭되었다. 진양 화씨는 중국 낭야 사람인 화명신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명신은 본성이 화씨로서, 조상 대대로 명나라에서 벼슬하던 교목세가의 후손으로 낭야의 화촌대에 살다가 오랑캐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개탄하며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
     조선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화씨(花氏)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향화의 의리다"하며 명신을 예우하고 화씨의 성을 하사하고, 경성군에 봉했다. 그러나 상계의 실전으로 계대를 밝히지 못하여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진주에 세거한 후손 섭(燮)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선대부에 오른 섭(燮)의 아들 봉상(奉祥)과 영조 때 무관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올랐으며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일취가 유명했다.
     그외 절충장군 동휘와 정릉 참봉 덕봉(德鳳), 통덕랑 윤택(允澤)은 오우장을 지낸 정한·응한, 참판 석한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 화씨는 남한에 총 400가구, 1,5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97
  • 홍洪
    홍洪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50
  •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 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定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京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 온 옛 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중국(中國) 안정(安定)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호안국(胡安國)의 16세손 호극기(胡克己)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극기(克己)는 명(明)나라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라 1643년(인조 21) 답례사(答禮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 멸망되자 "내가
    천조(天朝)에 복명(復命)치 못하고, 조종(祖宗)의 땅이 전란(戰亂)에 짓밝히니 창천(蒼天)도 무심(無心)하다. 차라리 동해(東海)에서 죽을지언정 고국(故國)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하고 경기도(京畿道) 가평군(加平郡) 대명연(大明淵)에 은거(隱居)했다가, 함경도(咸鏡道) 북청군(北靑郡) 덕성면(德城面) 중장내(中庄內)에 초가(草家)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라 이름짓고 여생(餘生)을 보내니, 조선(朝鮮)의 효종(孝宗)이 그의 충성심(忠誠心)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租稅)로 녹(祿)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극기(克己)의 본향지(本鄕地)인 중국(中國)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기(克己)의 맏아들 제백(濟伯)이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고, 후손 사룡(士龍)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녹사(綠事)를 지낸 태기(泰起), 충찬위(忠贊衛)에 오른 시악(時악)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가구, 7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33
  •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保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扶安)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희안(喜安)으로 고쳐 고부(古阜)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부령현(扶寧縣)의 겸임을 삼았다. 우왕(禑王) 때 보안현(保安縣)을 설치하였으며 1415년(태종 15)에 부안(扶安)에 편입시켰다.
     호씨(扈氏)는 고려(高麗) 창업(創業)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호의(扈義)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侯伯濟) 견훤군(甄萱軍)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왕(王 :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보안 호씨(保安扈氏)는 의(義)의 맏아들 호은열(扈殷說)이 광익효절정난안사공신(匡翼效節定難安社功臣)으로 보안군(保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보안(保安)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
     전주 호씨(全州扈氏)는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明)나라 장군(將軍)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난(亂) 후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호준(扈浚)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가구, 1,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76
  •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진주 형씨(晋州邢氏)의 시조(始祖)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인 형옹(邢 )으로 전(傳)한다.
    옹( )은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옹(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3세손 방(昉)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慶南) 진주(晋州) 반성(班城)에서 살았다. 방(昉)의 손자(孫子) 공미(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280년 (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征伐)하는 데 공(功)을 세워 지밀직사사(知 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방(昉)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방(昉)의 현손(玄孫) 찬(贊)이 조선조(朝鮮朝)에서 판도판소(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 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 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忠淸道兵馬使)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외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學問)으로 이름 났으며, 협(浹)은 효종(孝宗) 때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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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玄
    현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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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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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씨(海氏)
    해씨(海氏)

     해씨(海氏)는 중국(中國) 설군(薛郡 : 산동성 제령도에 있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오계(五季 : 중국 고대 다섯 왕조를 달리 일컫던 말) 때 사람인 해진명(海眞明)과 인종(仁宗) 때 중궁(中宮)이었던 해수자(海壽者)란 사람이 사기(史記)에 등장된 인물이다.
     우리 나라 해씨(海氏)의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靈巖)과 목포·나주(羅州)를 비롯한 경남 김해(金海) 등지에 7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0가구, 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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