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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김씨(開城金氏)
개성(開城)은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하며, 고려(高麗)의 수도(首都)로서 처음에는 송악(松岳)·송도(松都)·개경(開京)·부소갑(扶蘇岬)·동비홀(冬比忽)·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웠다. 서기 919년(고려 태조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이곳 송악산(松岳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주(開州)라 불렀고, 처음으로 시전(市廛 : 관설 상점가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점포를 대여, 상업에 종사하게 하고, 점포세와 상세를 받음)을 설치하여 시가를 5부로 나누었으며, 서기 960년(광종 11)에 황도(皇都)로 고쳤다가 995년(성종 14) 개성으로 개칭, 1018 년(현종 9) 거란군의 침략으로 궁궐과 민가가 불에 타서 거의 없어지기도 하였다. 개성 김씨(開城金氏)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 錫)의 후손 충의공(忠毅公) 김용주(金龍珠)가 서기 1035년(정종 1)에 출생하여 1054년(문종 8)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누차 여진정벌(女眞征伐)에 공(功)을 세워 추충공신(推忠功臣)에 책록되고, 개성 부사(開城府使)와 평장사(平章事 : 내사 문하성의 정2품 벼슬)를 거쳐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의성 김씨(義城金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시조 용주(龍珠)의 손자 정신공(貞愼公) 준(晙)이 고려 예종(睿宗 : 제16대 왕, 재위기간 : 1106 ∼ 1122) 때 여진란(女眞亂)을 평정(平定)한 공(功)으로 병부(兵部)·예부(禮部)·이부(吏部) 의 상서(尙書 : 육부에 속한 정3품 벼슬)를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올랐으며, 그의 맏아들 지선(之宣)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을 차남 지경(之慶)은 상서(尙書)를 지냈고, 지선(之宣)의 맏아들 문원공(文元公) 원(源)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원(源)의 손자(孫子) 문민공(文敏公) 남보(南 寶)가 영상(領相 : 영의정의 별칭)에 증직(贈職)되었으며, 현덕(玄德)의 아들 무(茂)는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당대의 이름난 화가(畵家)로 상의원 별제(尙衣院別提)에 이른 응환(應煥)은 1788년(정조 12) 왕명(王命)으로 내·외 금강산(內外金剛山)을 유력(遊歷)하면서 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충장공(忠壯公) 절(節)은 일찍이 조 헌(趙 憲)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익혀 경학(經學)에 밝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 헌을 따라 고향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보은(報恩)·공주(公州)·청주(淸州) 등지의 전투에서 공(功)을 세웠으나 금산(錦山)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과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宣祖) 임금이 시호(諡號 : 경상·유현들이 죽은 뒤 그들의 행적을 칭송하여 임금이 추증하는 이름)와 함께 정려(旌閭)를 내려주어
그의 충절을 기렸다. 서기 1603년(선조 36)에 태어난 여량(汝亮)은 10세 때부터 김 집(金 集)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1633년(인조 11)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겸 승문원 박사를 거쳐 1640년 음성 현감(陰城縣監)을 시작으로 외직에 나가 1671년(현종 12)까지 32년 동안 해미(海美)·인제·재령·창원·영월 등 12읍의 군수(郡守)·현감·부사(府使) 등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다섯 고을에 <청백송덕동비(淸白頌德銅碑)>가 세워졌으며, 1672년에는 대사간(大司諫 : 사간원의 정3품 으뜸 벼슬)에 오르고 1682년(숙종 8) 승지(承旨)가 되어 3대에 걸쳐 가선대부(嘉善大夫 : 종2품하의 관계)의 영예를 추증받아, 현감(縣監)을 지낸 순룡(舜龍)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조사통계에 의하면 개성 김씨(開城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4,568가구, 18,7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성(開城)은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하며, 고려(高麗)의 수도(首都)로서 처음에는 송악(松岳)·송도(松都)·개경(開京)·부소갑(扶蘇岬)·동비홀(冬比忽)·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웠다. 서기 919년(고려 태조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이곳 송악산(松岳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주(開州)라 불렀고, 처음으로 시전(市廛 : 관설 상점가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점포를 대여, 상업에 종사하게 하고, 점포세와 상세를 받음)을 설치하여 시가를 5부로 나누었으며, 서기 960년(광종 11)에 황도(皇都)로 고쳤다가 995년(성종 14) 개성으로 개칭, 1018 년(현종 9) 거란군의 침략으로 궁궐과 민가가 불에 타서 거의 없어지기도 하였다. 개성 김씨(開城金氏)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 錫)의 후손 충의공(忠毅公) 김용주(金龍珠)가 서기 1035년(정종 1)에 출생하여 1054년(문종 8)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누차 여진정벌(女眞征伐)에 공(功)을 세워 추충공신(推忠功臣)에 책록되고, 개성 부사(開城府使)와 평장사(平章事 : 내사 문하성의 정2품 벼슬)를 거쳐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의성 김씨(義城金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시조 용주(龍珠)의 손자 정신공(貞愼公) 준(晙)이 고려 예종(睿宗 : 제16대 왕, 재위기간 : 1106 ∼ 1122) 때 여진란(女眞亂)을 평정(平定)한 공(功)으로 병부(兵部)·예부(禮部)·이부(吏部) 의 상서(尙書 : 육부에 속한 정3품 벼슬)를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올랐으며, 그의 맏아들 지선(之宣)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을 차남 지경(之慶)은 상서(尙書)를 지냈고, 지선(之宣)의 맏아들 문원공(文元公) 원(源)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원(源)의 손자(孫子) 문민공(文敏公) 남보(南 寶)가 영상(領相 : 영의정의 별칭)에 증직(贈職)되었으며, 현덕(玄德)의 아들 무(茂)는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당대의 이름난 화가(畵家)로 상의원 별제(尙衣院別提)에 이른 응환(應煥)은 1788년(정조 12) 왕명(王命)으로 내·외 금강산(內外金剛山)을 유력(遊歷)하면서 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충장공(忠壯公) 절(節)은 일찍이 조 헌(趙 憲)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익혀 경학(經學)에 밝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 헌을 따라 고향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보은(報恩)·공주(公州)·청주(淸州) 등지의 전투에서 공(功)을 세웠으나 금산(錦山)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과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宣祖) 임금이 시호(諡號 : 경상·유현들이 죽은 뒤 그들의 행적을 칭송하여 임금이 추증하는 이름)와 함께 정려(旌閭)를 내려주어
그의 충절을 기렸다. 서기 1603년(선조 36)에 태어난 여량(汝亮)은 10세 때부터 김 집(金 集)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1633년(인조 11)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겸 승문원 박사를 거쳐 1640년 음성 현감(陰城縣監)을 시작으로 외직에 나가 1671년(현종 12)까지 32년 동안 해미(海美)·인제·재령·창원·영월 등 12읍의 군수(郡守)·현감·부사(府使) 등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다섯 고을에 <청백송덕동비(淸白頌德銅碑)>가 세워졌으며, 1672년에는 대사간(大司諫 : 사간원의 정3품 으뜸 벼슬)에 오르고 1682년(숙종 8) 승지(承旨)가 되어 3대에 걸쳐 가선대부(嘉善大夫 : 종2품하의 관계)의 영예를 추증받아, 현감(縣監)을 지낸 순룡(舜龍)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조사통계에 의하면 개성 김씨(開城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4,568가구, 18,7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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