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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경주 김씨(慶州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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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1:50 조회 1,96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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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김씨(慶州金氏)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村)이 연합하여 고대 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라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여 국명(國名)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 김알지(金謁智)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고쳐 삼았다가 307년(기림왕 10)에 신라(新羅)로 하였으며,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慶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 (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여 지방제도의 개편, 통치 지역의 변동 등으로 명칭의 변화가 많았으나 영남지방(嶺南地方)의 행정중심지로서의 지위에는 변동이 없다가 1413년(태종 13)에 와서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였다. 우리나라 성씨(姓氏) 중에서도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일컬어진 김씨(金氏)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 1 신라본기(新羅本記)에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기 65년(탈해왕 9) 3월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金櫃)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탈해왕(脫解王)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두어 기르니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姓)을 김(金)으로 하사(下賜)하였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이렇게 웅기(雄起)한 김씨(金氏)는 김알지(金閼智)의 7세손 미추(味鄒)가 왕위(王位)에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慶順王 : 알지의 28세손)까지 38명의 왕을 배출하여 587년 동안 신라(新羅)를 지배해 오면서 왕족(王族)의 지위를 지켰으며 경주(慶州)를 비롯한 600여 관향(貫鄕)으로 분적(分籍)되었다.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알지계통(閼智系統)의 김씨(金氏)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혈족으로 경순왕(慶順王)의 셋째 아들인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과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을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系代)하는 계통(系統)이 대표적이며, 상계(上系)는 미상(未詳)하나 경순왕의 후예로 전하는 장유(將有 : 판도판서공파), 인관(仁琯 : 태사공파), 순웅(順雄 : 대장군공파)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 등 크게 5파로 갈라져 후대로 내려오면서 10여 개의 지파(支派)가 생겨났다. 영분공파조(永芬公派祖)인 명종(鳴鍾)은 경순왕(慶順王)이 손국(遜國)한 후 고려조(高麗朝)에서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8세손 의진(義珍)은 유학(儒學)의 종주(宗主)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고, 12세손 인경(仁鏡)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고려의 명신(名臣)으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시(詩)와 글씨로 명성을 떨쳤다. 대안군파조(大安君派祖)인 은열(殷說)은 공부 시랑(工部侍郞)을 거쳐 대안군(大安君)에 봉군되고 그의 후손들이 여러 관향(貫鄕)으로 분적되었으며, 판도판서공파조(版圖判書公派祖) 장유(將有)는 고려말(高麗末)에 정국(政局)이 혼란하자 충청도(忠淸道) 보은(報恩) 땅에 은거(隱居)하여 그곳에서 일생(一生)을 마쳤다. 한편 태사공파조(太師公派祖) 인관(仁琯)은 고려 예종(睿宗)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지내고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에 올랐으며, 대장군파조(大將軍派祖) 순웅(順雄)은 고려 초에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그외 병판공파조(兵判公派祖) 덕재(德載)는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12세손으로 조선(朝鮮) 창업에 공(功)을 세워 보좌공신(補佐功臣)에 책록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후 함경도(咸鏡道)정평(定平)으로 은거(隱居)하였으며, 장사랑공파조(將士郞公派祖) 존일(存一)은 대안군(大安君) 은열의 16세손으로 고려말에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조선창업(朝鮮創業)에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좌명개국공신(佐命開國功臣)에 녹훈된 균은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지내고 계림군(鷄林君)에 봉군되어 계림군파(鷄林君派)의 일문(一門)을 이루었다. 이렇게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가문(家門)의 성세(盛勢)를 지켜온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역사(歷史)의 흐름 속에서 훌륭한 인재(人才)들을 대거 배출시켜 신라(新羅)와 근대(近代)를 잇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김씨(金氏)들의 입김이 닿지 않은 일들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가문(家門)의 기백(氣魄)을 지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영분공 명종(鳴鍾)의 6세손 예겸(禮謙)이 고려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내중령(內中令)을 지냈고, 예겸의 손자(孫子) 의진(義珍)은 고려사학(私學)12공도(公徒)의 하나인 양신공도(良愼公徒)를 육성하였으며 문종조(文宗朝)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여 인재등용에 공헌했다.
의진의 증손(曾孫) 영고(永固)는 무신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을 제거하려 했던 인물이며, 영고(永固)의 아들 인경(仁鏡)은 문무겸재(文武兼才)의 현신(賢臣)으로 고종(高宗) 때 조 충(趙 沖)과 함께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 평정에 공(功)을 세우고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과 예서(隸書)로 명망이 높았다.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8세손 봉모(鳳毛)는 외국어(外國語)에 능하여 사신이 오면 관반사(館伴使 :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한 정3품 벼슬)로 천거되었으며 나라의 큰 일에는 항상 전례(典禮)의 일을 맡아보았다.
 봉모의 아들 태서(台瑞)는 고종(高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특히 그의 아들 약선(若先 : 공부 시랑), 기손(起 孫 : 평장사), 경손(慶孫 : 추밀원 부사) 3형제가 유명했다. 판도판서(版圖判書) 장유(將有)의 후손에서는 정랑(正郞) 효정(孝貞)의 아들인 조선(朝鮮) 중종(中宗) 때의 명신(名臣) 정(淨)이 뛰어났다. 그는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중종조(中宗朝)에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하여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서른 여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졸도하였다. 그에 대한 일화가 [당적보(黨籍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가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정언(正言) 등을 거쳐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나가 있을때 그의 옛 글벗인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 이 항(李 沆)이 청탁편지를 부쳐왔다. 그 편지는 직함을 갖추어 쓰고 도장을 찍었으며 우정(友情)있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마치 높은 자리서 하명하는 듯 한 글투였다. 이에 정(淨)은 거절의 뜻을 밝히고 아래와 같은 시(詩)를 써 넣었다. "서당에서 같이 배우고, 옥당에서 같이 있다가 남녘 시골로 흘러내린 병든 이 한 몸이라 천상에서 화려한 직함인 승지 이씨(李氏)여 편지 쓸 즈음에 옛 벗 생각을 했는가." 이 시(詩)에 앙심을 품은 이 항(李 沆)은 후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정(淨)의 죄를 추론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그외에도 그가 제주도(濟州道)로 귀양가다가 해남(海南) 바닷가 노송(老松) 아래서 회포를 달래며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적은 시가 전하며, 36세로 사사(賜死)당할 때 남긴 절명사(絶命詞)가 유명하다.태사공(太師公) 인관(仁瓘)의 9세손 자수(自粹)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한(恨)을 안고 안동(安東)에 은거(隱居)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왕위(王位)에 올라 그의 둘째 형인 구에게 영결(永訣)하는 시(詩)를 지어 보냈는데 <병오년 8월 10일 아우는 형님과 멀리 하직합니다. 서쪽과 남쪽은 천리 길이어서 양쪽이 모두 연락할 길 없으니 사생간에 뒷 일을 부탁해야 되겠습니다. 장가든지 벌써 스물 두 해인데도 자식이 없는 외로운 몸입니다. 형님은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쓸 만하온 바, 둘째가 벌써 자랐기로 .........(중략)> 하며 형의 둘째 아들 여경(餘慶)을 동서 성공(成公)의 딸과 혼인시켜 양자로 삼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끝부분에 <이 글을 두고 나 본듯이 여기소서. 갈 길이 바빠 여러 말 할 수 없고, 글도 제대로 되지 아니하여 몽땅붓끝 가는 대로 써 올립니다.>라 하였다. 그가 사사(賜死)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세필(世弼)이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옥중에서 입던 피묻은 옷을 가지고 나와서 통곡하며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화를 당하여도 오히려 위에 성군(聖君)이 계셨기 때문에 다행히 살게 되었지만, 지금 임금께서는 나이가 겨우 십여 살이고 간신들이 꼭 너를 죽이려 하니, 네가 어찌 죽음을 면할 것이냐"하였다. 한편 자수(自粹)의 9세손 홍익(弘翼)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쟁에서 순절하였고, 아우 홍욱(弘郁)은 효종(孝宗)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앞서 인조(仁祖) 때 사사(賜死)된 민희빈 강씨(姜氏)와 그녀의 어린 아들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효종(孝宗)의 노여움을 사 친국(親鞠)중에 장사(杖死) 되었다. 홍욱(弘郁)의 손자(孫子) 흥경(興慶)은 영조조(英祖朝)의 상신(相臣)이었고, 흥경의 아들 한신(漢藎)은 영조(英祖)의 부마(駙馬 :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이면서도 겨우 두 칸 집에 살면서 비단은 걸쳐 본 일도 없고 가마를 타는 법도 없이 청빈하게 살다가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인 이주를 양자로 삼았다. 참찬(參贊) 이주의 손자인 정희(正喜)는 학문(學問)에 있어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書藝)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켜 특히 예서(隸書)와 행서(行書)에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호장(戶長) 위영(魏英)의 증손(曾孫) 부필(富弼)·부일(富佾 : 수태위를 역임)·부식(富軾)·부의(富儀 : 지추밀원사를 역임)가 유명했다. 고려 문종(文宗)과 의종대(毅宗代)에 걸쳐 문무(文武)를 겸한 명신(名臣)으로 유명한 부식(富軾)은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왕실외척임을 빙자하여 권세를 쥐고 군신의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일삼던 이자겸(李資謙)의 방자함을 충고하여 이를 시정하게 하였고, 42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1145년(인종 23) 왕명(王命)을 받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완성하여 바치는 등 이름난 문장가(文章家)로 송(宋)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이렇게 역사를 수(繡)놓은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한말(韓末)에 와서도 그 가통(家統)을 이어 훌륭한 인재(人才)가 많이 배출되었다. 고종(高宗) 때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낸 영작(永爵)의 아들 홍집(弘集)은 한말 외세와 개화의 부수 틈에서 처참하게 희생당한 인물(人物)이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정집(鼎集)의 아들 창희(昌熙)는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으며, 철희(喆熙)는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재직중 1885년(고종 22) 황해도(黃海道) 토산(兎山)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을 진압하여 승녕부 종장(承寧府從長)을 지낸 춘희(春熙)와 자산으로 도서관(圖書館)을 설립한 인정(仁貞), 중국 원세개(袁世凱 : 중화민국의 초대 대통령)의 옥새를 새겼던 서예고문(書藝顧問) 태석(台錫),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를 개설한 영제(寧濟), 청성곡(淸聲曲)의 명수 계선(桂善) 등과 함께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이었으며, 용원(庸源)과 도태(道泰)는 조국의 자유수호와 광복을 위하여 몸바쳐 헌신하였으므로 신라 왕성(新羅王姓)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361,189가구, 1,523,4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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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賈


    간簡


     


    갈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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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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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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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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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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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君


    궁弓





    권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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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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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金


    나羅


    남궁南宮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단段


    단端


    당唐


    대大


    도都


    도陶


    도道




    독고獨孤


    돈頓


    돈敦


    동董


    동방東方


    두杜


     


    류柳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명明


    모牟


    모毛


    목睦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方


    방房


    방龐


    방邦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빈彬


    빈賓





    사史




    사謝


     


    사공司空


    사씨舍氏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서문西門




    석石


    석昔


    선宣


    선우鮮于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舜


    순淳


    순荀


    순順


    승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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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申


    신辛


    신愼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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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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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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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芸


    운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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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袁


    위韋




    위魏


    유劉


    유兪


    유庾


     


    육陸


    윤尹


    은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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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陰


    응應


     




    이李


    이伊


    이異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蔣


    장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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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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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黃州는 본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다. 주요성씨로 황보(皇甫)·황(黃)·동(董)·변(邊)·최(崔)씨 등이 있었다. 黃州黃甫氏는 영천황보(永川皇甫)에서 분적(分籍)하여 黃州를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시조는 충의공(忠義公) 황보제공(皇甫悌恭)으로 태위(太尉)를 지냈다.
     이들의 1930년대 분포사항을 보면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인제리에 12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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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씨(后氏)
    후씨(后氏)

     后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났으며 본관(本貫)은〈唐寅〉단본이다.
     1930년 당시 강원도에 3가구가 있었는데, 회양군 상북면 오랑리(淮陽郡 上北面 五郞里)에 살던 후춘성씨(后春成氏)는 그의 11代祖가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후씨(后氏)는 나타나지 않아 정확한 가구와 인구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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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은 진주의 고호로 경상남도의 남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며,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문무왕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고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로 고쳤다.
     그 뒤 혜공왕 때에 정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시대에는 한때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진주목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으며 1910년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 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1949년에 부(府) 시(市)로 개칭되었다. 진양 화씨는 중국 낭야 사람인 화명신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명신은 본성이 화씨로서, 조상 대대로 명나라에서 벼슬하던 교목세가의 후손으로 낭야의 화촌대에 살다가 오랑캐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개탄하며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
     조선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화씨(花氏)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향화의 의리다"하며 명신을 예우하고 화씨의 성을 하사하고, 경성군에 봉했다. 그러나 상계의 실전으로 계대를 밝히지 못하여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진주에 세거한 후손 섭(燮)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선대부에 오른 섭(燮)의 아들 봉상(奉祥)과 영조 때 무관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올랐으며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일취가 유명했다.
     그외 절충장군 동휘와 정릉 참봉 덕봉(德鳳), 통덕랑 윤택(允澤)은 오우장을 지낸 정한·응한, 참판 석한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 화씨는 남한에 총 400가구, 1,5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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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 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定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京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 온 옛 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중국(中國) 안정(安定)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호안국(胡安國)의 16세손 호극기(胡克己)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극기(克己)는 명(明)나라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라 1643년(인조 21) 답례사(答禮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 멸망되자 "내가
    천조(天朝)에 복명(復命)치 못하고, 조종(祖宗)의 땅이 전란(戰亂)에 짓밝히니 창천(蒼天)도 무심(無心)하다. 차라리 동해(東海)에서 죽을지언정 고국(故國)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하고 경기도(京畿道) 가평군(加平郡) 대명연(大明淵)에 은거(隱居)했다가, 함경도(咸鏡道) 북청군(北靑郡) 덕성면(德城面) 중장내(中庄內)에 초가(草家)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라 이름짓고 여생(餘生)을 보내니, 조선(朝鮮)의 효종(孝宗)이 그의 충성심(忠誠心)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租稅)로 녹(祿)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극기(克己)의 본향지(本鄕地)인 중국(中國)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기(克己)의 맏아들 제백(濟伯)이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고, 후손 사룡(士龍)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녹사(綠事)를 지낸 태기(泰起), 충찬위(忠贊衛)에 오른 시악(時악)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가구, 7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719
  •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保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扶安)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희안(喜安)으로 고쳐 고부(古阜)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부령현(扶寧縣)의 겸임을 삼았다. 우왕(禑王) 때 보안현(保安縣)을 설치하였으며 1415년(태종 15)에 부안(扶安)에 편입시켰다.
     호씨(扈氏)는 고려(高麗) 창업(創業)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호의(扈義)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侯伯濟) 견훤군(甄萱軍)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왕(王 :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보안 호씨(保安扈氏)는 의(義)의 맏아들 호은열(扈殷說)이 광익효절정난안사공신(匡翼效節定難安社功臣)으로 보안군(保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보안(保安)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
     전주 호씨(全州扈氏)는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明)나라 장군(將軍)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난(亂) 후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호준(扈浚)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가구, 1,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87
  •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진주 형씨(晋州邢氏)의 시조(始祖)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인 형옹(邢 )으로 전(傳)한다.
    옹( )은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옹(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3세손 방(昉)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慶南) 진주(晋州) 반성(班城)에서 살았다. 방(昉)의 손자(孫子) 공미(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280년 (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征伐)하는 데 공(功)을 세워 지밀직사사(知 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방(昉)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방(昉)의 현손(玄孫) 찬(贊)이 조선조(朝鮮朝)에서 판도판소(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 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 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忠淸道兵馬使)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외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學問)으로 이름 났으며, 협(浹)은 효종(孝宗) 때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4141
  • 현玄
    현玄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71
  • 허許
    허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373
  • 해씨(海氏)
    해씨(海氏)

     해씨(海氏)는 중국(中國) 설군(薛郡 : 산동성 제령도에 있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오계(五季 : 중국 고대 다섯 왕조를 달리 일컫던 말) 때 사람인 해진명(海眞明)과 인종(仁宗) 때 중궁(中宮)이었던 해수자(海壽者)란 사람이 사기(史記)에 등장된 인물이다.
     우리 나라 해씨(海氏)의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靈巖)과 목포·나주(羅州)를 비롯한 경남 김해(金海) 등지에 7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0가구, 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27
  • 함咸
    함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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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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