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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5.10. 학인 또데이야의 질문에 대한 경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번에도 질문드려볼께요. 순서 상관없이 질문해도 괜찮겠습니까?
10. 학인 또데이야의 질문에 대한 경
1. [존자 또떼이야] “모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머물지 않고, 갈애가 없어 온갖 의혹을 뛰어넘은 사람, 그는 어떤 해탈을 구하면 좋겠습니까?
2. [세존] “또떼이야여, 모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머물지 않고, 갈애가 없어 온갖 의혹을 뛰어넘은 사람, 그에게는 따로 해탈이 없습니다.
3. [존자 또떼이야] “그에게 원하는 바가 없습니까? 아니면, 아직 원하는 바가 있습니까? 지혜가 있는 것입니까? 또는 지혜로운 체하는 것입니까? 싸끼야여, 그가 성자임을 제가 알 수 있도록 널리 보는 눈을 지닌 님이여, 설명해주십시오.
“그에게는 원하는 바가 없지, 원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있는 것이지, 지혜로운 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떼이야여, 성자의 삶을 사는 자는 이와 같다고 알아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없어, 감각적 쾌락의 존재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 학인 또데이야의 질문에 대한 경이 끝났다. -
제가 두세번 읽어보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경은 해탈열반한 아라한은 어떤 해탈을 구하느냐라는 질문같습니다. 만약 제가 생각하는 질문이 맞다면은 이 경은 정말로 심각한 질문을 담고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바로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아라한이 해탈열반에서 멈추는 것이 바른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근데 이것이 논사의 말이 아니라 경... 그것도 숫타니파타의 경이니 말을 하는게 멈춰집니다... 따로 해탈이 없다는 것은 대승에서 말하는 보살행 성불에 대한 반대말이란 생각이듭니다. 그리고 마지막게송인 4번게송에 원하는 바가 없다는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짧은 게송인데 의미는 짧지않게 느껴집니다. 경에 대한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donrs219 답변]
질문자인사 감사합니다. 한분은 원어를 해석해주셨고 한분은 보살도입장에서 말씀하셨고 한분은 법화 유마경의 비유를 들어 말씀해주셨고 한분은 초기불교입장에 서서 말씀해주셨군요. 저는 모두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공부중이니 초기불교입장을선택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대로 감히 적어보겠습니다. 이런 생각도 하는구나 하고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경은 질문자님 생각대로 해탈 열반한 아라한은 또 어떤 해탈을 구하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감각적 욕망을 멀리하고, 갈애가 없어 의혹을 뛰어넘는 것이 해탈인데도 또떼이야는 해탈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해탈을 이룬 뒤에 또 어떤 해탈을 더 구해야 하는지를 세존께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고 사는 것이 과연 최고의 행복인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시대도 우리는 그런 의문을 가지고 삽니다. 최고의 행복이 즐거운 느낌을 느끼며 사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지혜 수준에서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아닌 최고의 행복이 영원히 보장되는 어떤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하여 감각적 욕망에서 떠난 사람이 그런 세계에 가기 위해 무엇을 더 닦아야 하는지를 세존께 물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갈애를 소멸한 것이 외에 더 이상 추구해야 할 해탈이 없다는 말씀을 "그에게는 따로 해탈이 없습니다" 는 말씀으로 답을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려 제어한 뒤에 느끼는 평온함 안정감, 그 문제로부터 벗어난 그런 느낌을 경험하지 못하면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손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욕망을 내고 그것을 성취해서 느끼는 행복감은 찰나이며 즉시 그 다음 순간부터는 그것이 사라질까 불안해하고 또 실제로 행복했던 요소들이 변해서 사라질 때 느끼는 불행한 느낌은 심각한 괴로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갈애가, 즐거운 느낌이 결코 행복이 아님을 통찰하게 되는 것이 부처님 법의 해탈열반, 윤회를 끊는 것을 받아들이는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가 없을 때는 또떼이야 같은 질문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4번 게송에서 “그에게는 원하는 바가 없지, 원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게송으로 원하는 바가 없는 것, 즉 갈애가 소멸한 것이 바로 지혜이며, 이런 지혜로 아무 것도 없어, 감각적 쾌락의 존재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성자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아라한의 도과를 이룬 뒤에 원력으로 다시 생을 받아 보살행을 완성하여 마지막 성불을 이루겠다는 이론은 세존의 원음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해탈을 탐진치의 소멸과 동의어로 봅니다. 탐진치가 남아있는 한 재생이 있으며, 그 결과로 생사윤회의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탐진치가 완전 소멸되면 재생이 없는 것, 그것이 해탈이고 그런 상태가 열반 입니다.
그래서 한 분의 부처님이 출현하려면 우주가 10의 140승 번 성주괴공이 반복되는 동안 우주 안의 셀수 없는 중생 가운데 딱 한 분, 부처님이 되실 분이 나고 죽음을 반복하면서 10바라밀을 완성하여 , 그 결과로 무상정등정각자,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분, 일체지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때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됨과 동시에 윤회가 끝나는 아라한이 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은 동시에 완성되는 것이며, 보살은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우고 바라밀행을 닦는 수행자라는 뜻입니다.
만일 집착을 끊어 아라한이 되었다면 윤회가 끝나는 것을 의미하여 보살이나 부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다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가 될 원을 세운 경우에는 계속 윤회를 해야하며, 10가지 바라밀행만 닦고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여 오온에 대한 집착을 끊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생사 윤회를 끊고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해탈을 원하면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오온에 대한 갈애를 완전하게 소멸하여 다시는 오온이 일어나지 않는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아라한의 도과를 얻어 괴로움의 윤회로부터 해탈하며 이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4번 게송에서 원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갈애가 소멸된 상태인 해탈이며, 만일 원하는 바가 있다면 해탈 열반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승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과 성불의 원력은 바로 원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아직 해탈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어, 감각적 쾌락의 존재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 중 '아무 것도' 라는 것은 오온, 바로 물질과 정신입니다.
원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바로 물질과 정신, 오온을 원하는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매순간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에 대한 집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몸의 통증이 내가 느끼는 괴로움이다 그래서 괴롭다 라고 그 느낌에 화내지 않는 것이며, 지금 느끼는 행복한 느낌이 내 느낌이다라고 집착하여 즐기지 않는 것이며, 지금 어떤 대상에 대하여 이것은 무엇이다. 이것은 옳은 것이다. 또는 틀린것이다하고 결정하는 마음에도 그것만이 옳다고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근사한 행동이나, 후회가 되는 행동 등 어떤 행동도 내가 한 것이라고 이미 지난 것을 붙들고 좋아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각적 쾌락의 기반이 되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글은 저의 짧은 소견으로 적은 것입니다. 만일 잘못 된 부분이 있다면 다른 법우님께서 다시 정정해주시길 바랍니다.
b: 법화경에 아라한이 된 사리불 마하가섭등 제자들에게 ... 성불수기를 준것은 대승경전이 아닌가봐요? 언제 마하가섭이 초발심에 성불수기를 했데요? 유마경에 마하가섭은 성불의 종자가 끊어졌다고 하던데... 법화에서는 또 성불수기주고... 대승경전에 대한 무지가 아니라... 대승이 워낙 입장이 다양해서 a님도 다 모르시는 것이 문제요. ^^ 그리고 이런 석가모니부처님원음을 읽고 대승경전을 변호할 생각을 하십니까? 숫타니파타에서 말한 석가모니부처님의 원음을 대승경전에서 스님들이 부처님 말씀을 왜곡한것을 바르게 봐야지요. 그리고 a님이 말한 대승경전이론은 숫타니파타같은 경전을 보더라도 순전히 만들어진 이론이란것을 증명하는것이지요. 그렇지 안하요? 그리고 염화시중경에서 아라한이 된 마하가섭이 보살도를 닦아 일체종지를 이루고 ... 그런것 보셨지요? 그것은 뭡니까? 숫타니파타에서 부처님은 이미 더 닦을것이 없다라고 하시는데 그런 아라한인 마하가섭을 보살도를 닦고 일체종지를 얻고 드디어 조사선의 도리를 깨치게 픽션을 만들어내잖아요. 그러니 a님이 대승경전이 너무 많고 자세히 모른것이 문제지요. ^^ 08.08.24 02:51
2. [세존] “또떼이야여, 모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머물지 않고, 갈애가 없어 온갖 의혹을 뛰어넘은 사람, 그에게는 따로 해탈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따로(달리, 다른) 해탈이 없습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머물지 않고, 갈애가 없고, 온갖 의혹을 뛰어 넘은 것] 이것이
이미 해탈 이라는 의미, 이것 말고 달리 말해지는 해탈은 없다는 의미, 탐진치의 소멸이 열반이라는 의미와 같은 뜻.
4. [세존] “그에게는 원하는 바가 없지, 원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있는 것이지, 지혜로운 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떼이야여, 성자의 삶을 사는 자는 이와 같다고 알아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없어, 감각적 쾌락의 존재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바가 없는 지혜로운 사람, 그를 성자라고 한다네
성자(muni)와 붓다(buddha)란 어떤 사람들인가를 간단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는 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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