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

상기내용을 모두 옳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역사를 찾아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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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별자리 개요
    천문(天文)은 하늘의 글월이자, 하늘의 무늬이다.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은 하늘에 새겨진 글월과 무늬를 통해 하늘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읽으려고 노력해 왔다. 점성술(占星術)은 바로 천체현상을 관찰하여 인간의 운명이나 장래를 점치는 방법이며, 이를 통해 인간사의 길흉을 예측하고 경험을 쌓고자 노력해 왔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천지인 합일 사상에 따라 하늘의 이치에 따라야 인간다운 삶이 이루어지고 다시 죽어서는 하늘로 올라간다고 여겼던 것이다.우리 별자리는 서양 별자리와 비교해도 그 개(삭제)수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 고대 서양은 하늘을 48개의 별자리로 바라보았지만, 고대 동양에서는 이미 300여개나 되는 별자리들로 하늘을 촘촘하게 엮었다. 우리 별자리는 북쪽 하늘의 중심에 하늘나라 임금이 사는 곳인 자미원, 신하들이 임금을 보좌하며 정사를 펼치는 태미원, 백성들의 시장이 있는 천시원 등 3원(三垣)이 있다. 또 하늘의 지방에 해당하는 28수(宿)는 각각 동방, 서방, 남방, 북방으로 7개씩 별자리가 속해 있다. 중국과 함께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장 체계적인 천문관측기록을 남겨온 천문의 나라. 이제 우리에게 있어 고천문(古天文)은 단순히 별자리가 아니다. 천문은 바로 그 시대의 사상과 문화의 총화이자 핵심이기 때문에 그 속에 담겨진 우리 조상의 숨결을 느끼고, 잊혀졌던 우리 하늘과 천문에 대한 관심을 키우는 일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성호사설 천지문(天地門)조선 후기의 학자인 성호 이익(李瀷)의 대표적 저술이자 사성서는 바로 성호사설이다. 이 책은 <천지문(天地門)>, <만물문(萬物門)>, <인사문(人事門)>, [경사문(經史門)], [시문문(詩文門)] 등이 실려 있는데 그 중 천지문에는 태미원과 천시원을 설명하는 곳이 있다. 우리 선조들이 하늘을 바라보는 생각과 기준을 잘 엿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하늘의 성좌에는 세 곳의 원(垣)이 있다. 자미원 이외에 태미와 천시가 있어 이들이 한 곳에 나열되어 이를 삼원(三垣)이라 한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생각해 보면 자미는 임금의 궁중, 태미는 행정을 담당하는 정부, 북두는 그 중간을 가로질러 명령을 출납하는 임무를 맡는데, 삼태가 이를 보좌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 쓰임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세상에서 이용도의 빈번과 물자의 출입은 시장(市)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시장이란 물자가 모여드는 곳이다. 존귀한 천자도 부(富)는 물자에 의존하는 것이요, 국가의 성쇠와 인간의 죽고 삶이 모두 여기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성문(星文)이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면 사람들은 힘써 재물이 모일 것을 알게 된다.현천 충효재 상량문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야목1리에는 현천 충효재가 있다. 이 건물은 창녕조씨의 현천종회에 해당하는 건물이며, 삼문(三門)을 들어서면 9층 계단 위에 드높이 자리한 충효재가 다가선다. 정당이라는 건물의 정면에는 상량문(上樑文)이 걸려 있는데, 상량문이란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칠 때의 내력과 이유, 공사한 날짜와 시간 등을 적어놓은 글이다. 그런데 이 현천 충효재 상량문에는 천문의 이치를 담은 명당에 건물을 지어 자손만대로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현천충효재 상량문어기여차 들보를 동으로 던지니칠보산 동쪽에 서광이 비치네옥녀탄금(玉女彈琴) 장부혈(場浮穴)은우리나라 제일가는 만산 중 대지로세어기여차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천마같은 청룡이요 서쪽은 백호로다산형을 살펴보고 풍수설 들어보소왕양(汪洋)한 조수가 서쪽에 왕래하네어기여차 들보를 남으로 던지니혁혁(奕奕)한 문필봉이 남쪽에 솟았네일월과 삼태성이 안산처럼 비추었는데봉황이 남쪽에서 상서를 드리네어기여차 들보를 북으로 던지니자미성 북쪽으로 뭇별이 공수(拱手)하네경천위지 삼백도에천축과 지축이 북쪽에 중심이라어기여차 들보를 우으로 던지니일월과 성신이 저 위에 있도다인간의 오복(五福)을 어찌 다 갖추리천상의 삼광(三光)이 위에서 비취네어기여차 들보를 아래로 던지니돈목(敦睦)한 여러 친척 한자리에 모였네천추만세 오래도록 봉제향 하는 날엔수많은 자손이 단란하게 모여 앉으리라대들보는 건물을 세우는데 가장 중요한 기둥이 된다. 그 대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서광이 비치는 곳이요, 서쪽으로 던지니 청룡과 백호가 있는 풍수의 명당이다. 그리고 다시 대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일월과 삼태성의 기운이 비치는 곳이요, 북으로 던지니 북쪽 하늘 자미성의 축원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대들보를 위로 던지니 일월 성신이 빛나고 아래로 던지니 온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곳에서 오래도록 제사를 지낸다면 자손 대대로 번창하리라는 내용을 담았다. 이 상량문을 통해 하늘과 땅과 사람의 조화를 이루려는 의미를 엿볼 수 있다.천지서상지(天地瑞祥志)를 둘러싼 견해천지서상지는 현재 일본 존경각 문고에 소장된 당나라 때의 희귀한 서적이다.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각종 상서로운 현상들을 인간사에 대응시켜 해석한 일종의 천문지리서에 해당한다. 그런데 얼마 전 이 책을 둘러싸고 신라 문무왕 대에 활약했던 설수진(薛守眞)이 편찬한 천문서다 아니다라는 견해가 활발히 제기돼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천지서상지는 신라의 설수진이 편찬한 천문서일본 학자들은 이 책이 “당 고종 인덕(麟德) 3년에 천문과 역술을 담당하던 살수진(薩守眞)이 왕명에 의해 편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는 ‘천지서상지 편찬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란 논문에서 천지서상지의 실제 저자는 신라시대의 설수진(薛守眞)이라고 밝히고 있다.그 이유로는 7세기 중엽 신라 문무왕 대에 병법과 천문지리에 밝았던 설수진이라는 인물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 책이 쓰일 무렵, 당나라는 ‘건봉(乾封)’이란 연호를 사용했는데, 이미 폐지된 지 1년이 지난 ‘인덕’이라는 연호가 쓰였다는 점이다. 이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떨어진 신라에서 ‘인덕’이란 연호를 여전히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말해준다. 또한 신라 문무왕과 부여 융과의 사이에 맺은 ‘취리산맹문’이 소개되어 있고, 삼국시대에는 살(薩)과 설(薛)이라는 한자를 바꿔 쓴 사례도 종종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천지서상지’라는 천문서는 신라시대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천지서상지는 당나라 살수진이 편찬한 천문서정신문화연구원의 김일권 교수는 [천지서상지의 역사적 의미와 사료적 가치 : 찬자(撰者)에 대한 재검토와「고려사」소인(所引) 기사 검토]라는 논문에서 위 논문에 반박 내용을 밝히고 있다. 천지서상지는 당 고종 건봉(乾封) 원년(666), 천문과 역(曆) 등을 담당하던 태사(太史)인 살수진(薩守眞)의 저작이라는 것이다.그 이유는 천지서상지에 인용된 다양한 상서나 재이, 의례, 문헌 등을 살펴볼 때 당나라 태사국(太史局)과 같이 방대한 천문 자료를 접할 수 있는 자만이 쓸 수 있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신라시대의 병법 전문가에 불과한 설수진이 천지서상지와 같은 대저작을 편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물론 설수진이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고, 고대 사회에서 병법가와 천문가가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고 해도 천지서상지의 저자로 보기에는 무리라는 것이다. 또한 신라 문무왕과 부여 융과의 사이에 맺었다는 ‘취리산맹문’의 자세한 주석 또한 각종 의례자료를 직접 접할 수 있는 당나라 태사의 신분에서 접하기 어려운 자료는 아니라고 전한다.천지서상지가 당나라 시기에 출현한 것은 당나라 건국의 정통성을 천문으로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며, 남북조의 대 혼란기를 겪으면서 흩어지고 혼란스러웠던 천문, 역법, 상서, 재이에 대한 총정리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김일권 교수는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천지서상지는 우리와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일까? 고려사 정종 6년(1040)과 인종 8년(1130)의 기록에는 바로 이 천지서상지가 언급되어 있다. 또한 고대 고려와 일본에 천지서상지가 유통되었다면 통일신라 시기에 한반도에 유입되었던 것이 고려나 일본으로 전해진가 아닌가 하는 설정도 해보고 있다.이처럼 천지서상지와 관련한 다양한 의견은 앞으로도 계속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는 우리나라 천문 연구에도 새로운 시사점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들이 하나하나 모였을 때 우리 하늘을 우리 시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좀더 확실히 세워질 수 있을 것이다.- 노중평, [유적에 나타난 북두칠성], 1997, 백영사- http://cdalbum.wo.to/cho/위대한조상/1충효재상량문.htm- 네이버 백과- 연합뉴스, [일본에 있는 고대 천문책은 신라 작품], 1999.07.13- 이순지 저, 김수길·윤상철 공역, [天文類抄], 1998, 대유학당, p.2~6-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2002, 김영사, p.183- 김일권, [天地瑞祥志의 역사적 의미와 사료적 가치 : 撰者에 대한 재검토와 「高麗史」所引 記事 검토], 2002. 6「한국고대사연구」26집, 한국고대사학회, p.221-268…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15
  • 해 (태양)
    태양은 우리 지구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별이다.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평균 약 1억 4960만km로, 빛의 속도(초속 30만km)로 갈 때 태양까지 걸리는 시간이 8분 19초이다. 로켓을 타고(초속 11.2km) 간다면 156일 6시간 정도가 걸리고, 만약 걸어서 간다면(시속 4km) 약 4300년이나 걸린다.우리 하늘의 해해는 태양의 정수이고 모든 양의 우두머리이다. 적도의 앞 뒤로 각각 24도를 간다. 해는 나고 자라는 것과 은덕을 주관하므로, 임금의 상이다.해가 다니는 길 황도 (낮과 밤이 시간이 같은 춘분 추분점)하늘의 천구에는 적도와 황도가 있다. 적도는 지구의 적도를 무한히 확장했을 때 천구와 만나는 선이고, 황도는 천구상에서 해가 지나는 길이다. 적도와 황도는 1년에 두 번 만나는데, 해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할 때 적도와 만나는 점을 춘분점이라고 하며, 북쪽에서 남쪽에서 지나갈 때 만나는 지점을 추분점이라고 한다. 해가 춘분점과 추분점을 지날 때에는 낮의 길이와 밤의 길이가 같다. 해가 북쪽으로 나아가면 낮이 길고 밤이 짧아지며, 양이 이기게 되어 따뜻하다가 더워진다.역사에 나타난 해동서양을 떠나 자연의 무한한 생명의 에너지인 태양에 대한 숭배사상은 고대역사의 여러 유물 유적에서 나타난다. 이집트에는 태양신의 상징인 고대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가 있고 태양신 라를 모시는 오벨리스크가 있었다. 인도의 코나라크에는 태양신 사원이 있다면 우리는 고인돌이나 고구려 고분벽화에 태양의 그림이 크게 그려져 있다. 영원의 절대적인 태양은 절대 권력의 임금과 왕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태양을 향한 제천 행사 뿐만 아니라 고대역사로부터 태양에 대한 많은 기록해가 북쪽으로 나아가면 낮이 길고 밤이 짧아지며, 양이 이기게 되어 따뜻하다가 더워진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23
  • 태양계
    태양계의 구성태양계는 크게 태양과 8개의 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지구, 천왕성, 해왕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거의 같은 평면 위에서 같은 방향으로 태양 중심의 공전 운동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44개의 위성, 수천 개의 소행성, 약 1,000억 개의 혜성, 무수한 우주먼지, 기체 분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동양에서 본 태양계옛날에는 땅이 고정되어 있고 하늘 전체가 땅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규칙적인 행성들 때문에 땅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변화가 왔다. 현대에 들어 별들은 우주의 아주 멀리 있는 것들이고 행성은 우리 태양계에 속하는 것들임을 알게 된 것이다. 동양에서는 태양과 달, 오행성을 합쳐 [칠요(七曜)]라고 부르며...태양계의 나이태양계의 나이는 가스와 먼지의 구름으로부터 약 45억년 전에 생겨났다. 태양계 질량의 99.9%를 차지하는 것은 태양이며, 나머지는 대부분 빈 공간이다.태양계의 크기처음 연구된 것으론 태양과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행성인 명왕성(현재는 행성의 지위를 잃고 왜소행성으로 분류됨) 사이의 거리인 약 59억km로 생각했다. 그러나 1989년 8월 태양계 외곽의 해왕성을 탐사한 보이저 1, 2호를 통해 태양계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태양계의 경계태양계의 끝에는 태양이 발산하는 태양풍과 다른 외부에서 밀려오는 태양풍이 맞부딪히는 지역이 생긴다. 태양계 경계 지역에서는 상당한 충격파가 발생하는데 3단계로 구분한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09
  • 우리 역사에서 본 하늘
    1) 고대아직 문명의 기틀이 세워지기 전 먼 옛날 사람들은 수렵, 채취의 원시경제의 생활은 하늘의 변화에 따라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하늘을 두려워하고 신격화하였다. 인류문명의 조금씩 진화하면서 씨족사회의 형성과 더불어 하늘의 움직임과 해, 달 등의 변화에 따라 농사나 유목, 어업 등의 모든 일상생활이 크게 달라졌다.2) 삼국 시대고대에 하늘을 섬기는 것은 민간신앙에 가까웠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도교가 들어오면서부터 정식으로 종교적인 발달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도교의 신선사상은 삼국시대에 널리 퍼진 종교이며, 하늘의 뜻을 따르고 지키는 종교이기도 하다.3) 고려시대고려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여러 가지 세계관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늘을 표현하는 말만 해도 상제, 상천, 황천, 천황상제, 태일, 천황 등 여러 가지이고 도교적인 천문관도 크게 대두되었다. 하늘이 종교적인 힘을 가장 크게 가진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특히 고려 말엽에 유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화랑 등의 선교와 불교, 그리고 기타 무속이 혼합되어 있었는데, 특이한 점은 그들이 모두 하늘과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혼합된 세계관의 영향으로 불교적 그림인 탱화에도 북두칠성, 오행성 등을 비유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불교 의례서인 [작법구감(作法龜鑑)] 등에서도 산신, 칠성 등에 대한 불교 의식이 들어 있다. 이렇게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중심으로 나라가 하늘을 섬기고 여러 가지 제천행사를 했다.4) 조선시대고려시대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한 곳이 여럿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모두 폐지하고 송도에 있는 소격전 하나만 남겨두었다.태조 이성계는 아직 왕이 되기 전에 도련포에 단을 쌓고 태백성에 제사하였으며, 그 후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르자 도읍을 옮기는 일을 소격전에서 결정하였다. 조선 초기의 천문학은 서운관의 설치와, 태조 4년(1395) 12월에 완성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제작에서 시작되었다.조선 중기에 이르러 중종 때를 전후하여 성리학이 득세하면서 모든 도교 행사를 미신으로 몰고 말살하는 정책이 펼쳐졌다. 초제를 올리는 소격서를 없애는 문제만으로도 조정이 조용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15
  • 우리 하늘의 의미
    1) 하늘과 땅(天地)옛날 동양에서 하늘과 땅이 생긴 모양을 크게 네 가지로 인식하였다.첫번째로, 하늘은 원, 땅은 사각형의 평면으로 보며, 하늘과 땅이 서로 평행하다고 생각하였다.두번째로는, 하늘은 원형의 곡면, 땅은 사각형의 평면으로 보아 하늘이 땅을 덮고 있다고 인식하였다. 이것을 1차 개천설(蓋天說)이라고 한다.세번째, 하늘과 땅이 모두 곡면 형태이며, 하늘이 땅을 덮고 있다고 보았다.네째, 우주의 모습이 새의 알처럼 하늘을 빙 둘러싼 안과 밖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혼천설(渾天設)이다. 혼천설의 우주 구조 모형은 혼천의 등의 천체 관측 도구나 천문 시계에 응용되어 왔다.2) 일월성신우주의 대부분은 진공이다. 우주 공간에 드물게 하나씩 떠 있는 항성이나 행성, 소행성 등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아무 것도 없는 공간, 간신히 빛만이 통과하는 진공이다. 이렇게 하늘에서 빛나지 않고 텅 비어 있는 넓은 공간에 대한 관심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예로부터 있어 왔다. 우리의 하늘에는 일월성신이 있다. 즉, 해와 달과 별과 신이다.해는 뜨거운 양의 정수(精髓)이고, 달은 차가운 음의 정수이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35
  • 우리 하늘
    지구상에 인류가 처음 등장할 무렵, 자연은 그들의 모든 것이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등 모든 것이 자연에서 나왔다. 수렵, 채집 원시의 생활은 자연의 기본이 되는 태양이 주는 무한한 에너지였다. 그래서 태양을 숭배하는 사상이 세계적으로 많이 보이며, 우리나라의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해와 달과 별 등의 그림이 보인다.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가 대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도 하늘의 변화와 날씨가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영원성의 절대적인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초기의 인류에게 해는 가장 중요한 생명의 근원이었다.인류의 문명이 조금씩 진화하면서 주기적으로 해가 뜨고 지는 속에서 낮이 길어졌다가 짧아지는 계절의 변화를 점차 알게 되었다. 또한 밤하늘의 달의 모양이 변화하고 별이 이동하는 것도 무수한 경험과 세월의 축적으로 서서히 하늘의 규칙성과 변화를 알게되었다.문자가 발달하면서는 하늘의 규칙적인 움직임과 새로운 변화를 기록함으로써, 자연의 변화를 예측하고 일년과 달月과 날짜日 등의 인류의 기준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농사나 유목, 어업 등 뿐만 아니라 인류문명의 생활 깊숙이 자리를 잡은 하늘의 기록이 바로 천문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원시의 수렵, 채집의 생활을 엿 볼 수 있는 고인돌이나 동굴벽화에서, 인류문화의 발달을 볼 수 있는 유물 유적에서, 하늘에 대한 관찰된 기록을 통해 먼 옛날 하늘이 남아 있다. 초기 인류가 하늘의 움직임이 어떻게 변하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하늘을 기준으로 조금씩 예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점차적으로 문명이 발달하고 인류문화의 발전에 따라 서양의 천문학과 동양의 천문학은 조금 다른 식으로 발전했다.서양은 유목과 바다의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여 어느 곳에서든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지도를 그리기 위해 발달하였다. 망망대해에서 현재의 위치를 알기 위해 세계지도를 만들고 하늘에 있는 별들의 위치를 기록하고 별의 크기와 밝기의 등급 등을 구별하였다. 그에 따라 별자리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하나씩 별자리가 되었다.동양은 농사 중심의 경제를 바탕으로 정착된 문명의 발달로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도리를 하늘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하늘에 옮겨서 생각하고 하늘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통해 그 뜻을 보려 했다. 하늘의 기준이 되는 북극성을 옥황상제라고 생각하고 그 주변을 옥황상제가 사는 하늘궁궐인 자미궁, 신하와 임금이 만나는 태미원, 인간세상의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천시원 등 하늘의 모든 별들을 여러 가지 생명들과 건물들로 보아 3원 28수를 나누었다. 또한 해와 달, 그리고 별들 사이를 이동하는 다섯 행성을 합쳐서 칠정, 또는 칠요라고 불렀다.별자리 사이에는 해가 움직이는 길인 황도(黃道)가 있다. 해와 달은 물론 행성들도 황도를 따라 움직이므로, 동양에서는 하늘의 임금과 신하가 정책을 세우고 해와 달과 행성이 명령을 받아 여기 저기 그 명령을 전달한다고 생각했다. 각 행성은 각자의 의미와 맡은 방위가 있어서 그에 따라 하늘을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늘 전체를 땅 위와 닮은 또 하나의 세계로 보고 하늘의 변화에 따라 그 의미를 찾아내려 한 것이 동양 천문학의 특징이다.“우리하늘을 옛 선조들은 어떻게 보았는지, 현재의 태양계를 통해 우리의 하늘여행을 떠나자!!” …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19
  • 천문 고서
    천문유초천문유초제왕의 학문이라는 천문학. 천문학을 한다는 것은 하늘의 위엄을 다루는 일이기에 조선시대 관리 중에서도 최고 엘리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천문을 담당하는 곳이 바로 관상감이었는데, 그 위상에 걸맞게 철저한 시험을 통해 인재를 선발했다. 이 관상감의 관리를 뽑을 때 기준이 되는 책이 있었으니, 반드시 암기해야 했다는 천문유초(天文類秒)가 바로 그것이다. 천문유초는 관상감의 고시용 지정수험서였던 셈이며, 그만큼 천문의 내용이 잘 정리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천문서라고 할 수 있다. 1)천문유초는 세종 때의 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가 편찬한 책이다. 상권에는 사신(四神)과, 3원(垣) 28수(宿)를 별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으며, 별을 칠언율시로 노래한 중국의 보천가도 함께 실었다. 하권에는 천지와 일월, 행성, 그리고 기상현상 등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천문유초는 다양한 천문현상을 국가나 백성들의 생활과 깊이 연관시켜 바라보았다. 예를 들어 혜성이 나타나면 병란이 일어나거나 큰 홍수가 발생한다고 생각해서 사전에 이를 조심하고자 했던 것이다. 점성술적인 요소가 강하기도 하지만, 당시 하늘과 지상의 삶을 연관시켜 바라보던 우리 선조들의 세계관이 잘 드러나고 있다.성경‘별의 거울’이라는 뜻을 지닌 조선 말기의 천문서 성경(星鏡). 당시 하늘의 별을 거울처럼 반듯하게 비춰 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 아닐까. 성경은 서양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조선 철종 때 남병길이 편찬한 책으로, 서양 천문학자들이 중국에 와서 만든 별 목록을 좌표로 세차 보정하여 만든 것이다.이 책의 큰 특징은 천상열차분야지도에 기록되어 있는 별 중에서 실제 하늘에서 찾을 수 없는 별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대신 새로운 별과 남반구 별 등 모든 별들의 위치를 적도좌표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별의 밝기 또한 등급으로 표시해 놓았다.천문유초와 성경그렇다면 조선 전,후기를 대표하는 천문서인 천문유초와 성경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천문유초는 보천가를, 성경은 신법보천가를 따르기 때문에 별자리의 모양이나 위치가 다르게 나타나며, 천문유초는 각 별자리 현상에 따른 점성적 의미를 설명하는데 반해, 성경은 각 별의 좌표(적도 경위도)값을 나열하고 있다. 2)두 책을 비교해 보면 별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선 전기와 후기가 많이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점성술적인 성격이 강한 천문유초는 불안한 현실의 모습을 하늘의 변화와 이치에 대고 설명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이에 반해 성경에서는 서양 천문학의 도입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신화와 점성의 의미가 짙었던 하늘이 객관적인 연구대상이자 사실적인 대상으로 변화해 가고 있다. 두 책을 통해 신화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 변화했다는 차이가 잘 드러나는 것이다.1) 이순지 저, 김수길 윤상철 공역, [천문류초], 1998, 대유학당, (일러두기)2) 신법보천가는 과거시험에서 쓰는 구법보천가가 너무 오래 되어 실제와 맞지 않음을 알고 별자리는 새로 관측하고 노래는 옛것을 따라 엮어서 이준양이 펴낸 책이다.한국천문과학연구소 중 한국천문학사연구회 사이트 참조(http://210.115.168.50/)…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879
  • 조선의 신법 천문도
    조선의 신법 천문도조선 전기에 제작된 천문도는 구법 천문도(舊法 天文圖)라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서양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천문도가 제작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법 천문도(新法 天文圖)이다. 신법 천문도에는 남반구의 별자리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으며, 서양에서 들여온 망원경을 통해 관찰된 해와 달, 그리고 행성의 표면 등이 나타나 있다. 또 모든 별들을 1등급에서 6등급까지 크기 별로 구분해 놓았다.1)서양 천문학의 도입은 당시 천문학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동안 눈으로만 관찰하던 별들을 망원경이라는 과학기구를 통해 그 표면까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망원경을 통해 별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신비의 장막을 걷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신법 천문도는 밤하늘을 항해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가 되었다.<황도남북총성도 그림 : 1742년 제작, 가로 451cm,  세로 183cm  8폭 병풍 형식, 보물 848호 로 지정>조선의 대표적인 신법 천문도인 황도남북총성도(黃道南北總星圖). 1961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발견되었다는 이 천문도는 1723년 제작된 쾨글러의 황도총성도를 원본으로 조선 영조 때의 천문관인 김열서와 안국빈 등이 제작하였다. 특이한 것은 이 천문도가 거대한 8폭 병풍 형식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큰 규격의 그림을 세워두고 보기에 적절한 형식이 바로 병풍이었기 때문일 것이다.이 천문도의 제 1폭에는 망원경을 통해 알게 된 천문 지식, 그리고 해와 달, 오행성의 크기와 빛깔 등이 각기 다르게 담겨 있다. 제 2~4폭에는 북반구의 별자리 그림이, 제 5~7폭에는 남반구의 별자리가 담겨 있다. 제 8폭에는 이 병풍 천문도를 제작한 여섯 명의 관리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혼천전도 그림 : 길이 85.5cm, 폭 59cm, 영조 때 제작 추정>또 다른 신법 천문도로는 혼천전도(渾天全圖)가 있다. 종이에 목판인쇄된 것으로 제작시기가 18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이 혼천전도는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체제를 고수하면서도 서양식 천문도의 흔적이 결합된 천문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와 같은 형식의 원 안에 남반구와 북반구의 별을 모두 집어넣었다. 총 1449개의 별 가운데 남쪽 하늘의 별이 121개 들어 있다. 이 천문도의 가장 큰 의의는 망원경으로 관측된 해와 달, 오행성, 즉 칠정(七政)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그 밖에도 일식과 월식의 원리, 티코 브라헤(Tycho Brahe)와 톨레미(Ptolemy)의 우주 구조 등 서양 천문학의 지식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2)※ 참고 ※● 해(일식) ● 달(월식) ● 오행성1)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2000, 서울대출판부, p.932)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신법 천문도 참고 자료한국 천문학회, [한국의 천문도], 1995, 천문우주기획한국과학문화재단, [우리의 과학문화재], 1997, 서해문집나일성, [한국 천문학사], 2000, 서울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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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상열차분야지도
    고구려의 천문도를 복원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 당시 하늘의 위엄이 담겨 있다는 이 천문도는 과연 어떻게 탄생된 것일까?천상열차분야지도 그림 : 국보 228호이 천문도 석각본은 옛날 평양성에 있었는데 전쟁 중에 강물에 빠져 없어졌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 탁본(印本)을 지닌 사람 또한 없어지고 말았다. 전하(태조 이성계)께서 (조선의) 임금이 된 초기에, 잃어버렸던 천문도를 바친 자가 있어 전하께서는 그것을 보물처럼 중히 여겼다.(右天文圖石本舊在平壤城因兵亂于江而失之歲月旣久其印本之在者亦絶無矣惟我殿下受命之初有以一本投進者殿下寶重之) - 권근의 [양촌집(陽村集)] 천문도시(天文圖詩), [대동야승(大東野乘)]-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와 개국공신들은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이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고구려 시대에 만들어진 천문도를 누군가 이성계에게 바친다는 것이다. 태조는 뛸 듯이 기뻤다. 그리고 새 왕조가 하늘의 뜻에 의해 세워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천문도의 제작을 서둘렀다. 그런데 탁본에 그려진 별자리의 위치가 당시와는 달랐기 때문에 새로운 관측이 필요했다. 그래서 권근, 유방택 등 여러 학자들이 수년간 노력한 끝에 드디어 1395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탄생되었다. 이 천문도는 중국의 순우천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천문도이다. 현재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에 가면 만날 수 있다.검은 돌판 위에 별자리를 새겨 넣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 높이만 해도 웬만한 농구선수보다 크며, 무게만도 1톤이 넘게 나간다. 이 거대한 돌판에 별자리를 새기는 것은 하늘의 체계를 조선왕실에 끌어들이는 작업이며, 그만큼 새기는 손길 하나하나에 세심한 정성이 더해졌을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총 1464개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원의 중심에는 북극성이 있고 바깥쪽에 작은 원이 있으며, 큰 원과 작은 원 사이에 적도와 황도가 그려져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천문도에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북반구의 거의 모든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그렇다면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무슨 뜻일까? 천상은 하늘을 말하고, 열차는 하늘을 12차로 나눈 것, 그리고 분야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늘의 구역을 28수로 나누고 이를 땅에도 적용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내용이 모두 그려진 그림이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인 것이다.종대부 그림 : 일본 천상열차지도<종대부 그림 : 조선 천상열차분야지도/중국 천문도>이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국의 천문도에는 없는 별자리 하나가 눈에 띈다. 네 개의 별로 이루어진 ‘종대부(宗大夫)’라는 별자리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 17세기 제작된 일본의 천문도에도 ‘종대부’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천상열차지도(天象列次之圖, 1670)’와 ‘천상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1677)’가 바로 그 흔적이다. 14세기에 이미 우리 고유의 별자리라고 기록되어진 ‘종대부’ 별자리는 바다를 건너 일본의 천문도에도 자취를 남겼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독창성과 함께 우리의 천문도가 일본의 천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숙종본 천상열차분야지도 그림 : 1687년 제작, 보물 837호, 세종대왕기념관>천상열차분야지도가 제작된 후로부터 어느덧 3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태조 때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점차 표면이 닳게 되었다. 이에 숙종은 하늘의 위엄이 점점 옅어지는 것을 우려하였고, 천문도를 다시 새기라고 명을 내렸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하늘을 갖고 싶었고, 하늘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믿음 또한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1687년 완성된 숙종 본은 태조 때의 것과 동일한데 단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이름이 위쪽에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태조 본과 숙종 본! 조선왕조는 이 천문도들의 보관에도 매우 심혈을 기울였다. 후에 관상감 내에 흠경각이라는 건물까지 따로 지어 보관할 정도로 매우 중시 여겼던 것이다.또한 천문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은 사대부 집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사대부 집안에서는 천문도를 보유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여겼으며,이것이 조선시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수많은 모사본과 필사본을 낳게 한 이유가 되었다. 사대부 집안에 전래되는 천문도는 종이에 필사된 것, 색을 칠한 것, 비단에 수놓은 것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심지어는 정자(亭子)의 천장에 그려진 것도 있다. 하늘의 상서로운 기운을 생활에까지 이어받으려고 했던 조상들의 마음이 다양한 유물과 유적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 ※● 12차 ● 28수 ● 종대부천문도는 크게 구법 천문도와 신법 천문도로 나뉜다. 18세기 이후 들어온 서양식 천문도를 신법 천문도라고 하며 구법 천문도는 동양의 전통사상에 바탕을 둔 천문도를 가리킨다. 두 천문도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구법은 북반구를 중심으로 원 하나로 그린 반면 신법은 북반구와 남반구 두 개의 원으로 나눠 그린 점이다. 구법 천문도의 역사는 고구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구려의 옛 서울인 통구(通溝)에 가면 무용총과 각저총 현실(玄室) 천장에 그려져 있는 고대의 천문도를 볼 수 있는데 이들은 4세기말에서 5세기 초 사이에 그려진 것이다. 자주색 원으로 그려진 별들이 3개씩 연결돼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다. 고작 해야 20개 남짓한 별이 그려진 원시적인 천문도지만 고구려천문도의 전통은 고려로 이어진다. 고려시대 천문도에 관해서는 전통은 고려사에 오윤부라는 사람이 제작했다는 기록이 나와있을 뿐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루퍼스는 「한국 천문학」에서 개성박물관에 고려인의 천문관이 담긴 동경(구리거울)이 남아 있다고 했으나 현존 여부는 알 수 없다. 1,000여개의 별들을 담고 있는 본격적인 천문도로 가장 오래된 것은 천상 열차 분야 지도이며 조선시대 이루 민간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천문도가 이를 모델로 그려졌다. 천문도는 종이에 필사된 후 갖가지 빛깔로 채색이 되었으며 때로는 비단에 수놓아 지거나 정자의 천장에 그려지기도 했다. 드물게는 구이원판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별자리를 표시한 것도 있다.밤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별들은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꿈을 일깨워주는 존재인 동시에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별들에 인간세상의 흥망성쇠를 주관하는 하늘의 뜻이 나타난다고 믿었다. 옛사람들은 천문대를 만들어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별들의 지도인 천문도를 그리는 등 별들의 움직임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여왔다. 특히 역대왕조의 임금들은 천상계의 변화가 나라의 안녕과 직결된 것으로 여겨 자기의 통치행위를 반성하는 거울로 삼았다.세계 두 번째 오래돼조선 태조(1395)때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은 고구려여 고분벽화에 남아있는 천문도 이후 우리 천문학의 역량과 성과를 결집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천문도다.덕수궁 석조 전 내 궁중 유물전시관에 있는 이 천문도는 가로122cm, 세로221cm의 검은 대리석에 1.400여개의 별들을 새겨 놓은 것으로 중국의 순우천문도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石刻) 천문도다 .600년간 비바람에 시달린 탓에 돌의 표면은 반들반들하게 닳았지만 흐릿하게 남아있는 미세한 점과 선들은 당시 국내 천문학 수준이 세계적인 경지에 이르렀음을 짐작케 한다.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길고 알쏭 달쏭한 이름은 우리 나라 천문도만의 독특한 양식을 가리킨다. 천상을 커다란 원으로 표현해 이를 12개 구역으로 나누고 구역(列次)마다 그에 대응하는 지상의 12개 지역(分野) 명칭을 기록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76cm나 되는 원의 중심에는 북극성이 있고 원 둘레에는 옛사람들이 하늘을 나누는 기본 틀로 설정했던 28개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조선 태조는 자신이 하늘이 세운 나라의 임금임을 국내 외에 과시하기 위해 이 각석을 만들었다고 한다. 태조는 대동강에 수장된 것으로 전해지던 고구려의 석각천문도의 탁본을 우연히 입수한 뒤 권 근(1352~1409) 등에게 이를 토대로 새로운 천문도를 만들라는 명을 내렸다. 당시 천문 관측 기관이었던 서운관의 학자들은 700년이라는 시차에서 생길 수 있는 오차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이 천문도를 기준 삼아 별을 새로 관측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나 중국 것과는 다른 매우 정확한 천문도가 탄생했다. 천상 열차 분야 지도 각석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앞뒤 양면에 천문도를 새겼다는 점. 그 이유는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박성래 외국어대 교수 등은 조선왕조실록에 이 각석이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돼 있는 점으로 미뤄 태조 때 각석은 만든 뒤 세종 때 다시 뒷면에 천문도를 새긴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고구려 탁본 토대 권근등 제작또 다른 특징은 별의 밝기를 별의 크기로 표시했다는 점이다. 밝은 별은 크게, 희미한 별은 작게 그렸다. 중국 천문도에서 볼 수 없는 별자리를 새로 추가한 점도 독자적인 시도로 평가된다. 2,900여 한자의 글자체도 매우 정교해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뛰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심하게 훼손된 각석은 숙정 때 또 다른 대리석에 복각 돼 관상감(서운관의 추신)에 보관됐다. 영조 때는 관상감 내에 흠경각을 지어 두 각석은 함께 보관했다.그러나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일제식민통치가 시작되자 아무도 각석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1960년대에 이르러 각석이 다시 발견된 곳은 흠경각이 아니라 창경궁의 명정 전 추녀 밑이었다. 평범한 돌 덩어리가 돼버린 각석은 풀밭에 내 팽개쳐진 채 사람들의 발길에 이리저리 차이고 있었다. 고궁에 소풍을 나온 시민들은 각석 위에 도시락을 펼쳐놓고 밥은 먹었고 어린아이들은 모래를 뿌리고 벽돌을 굴리며 장난을 쳤다.각석이 중요한 문화재임을 처음 알아 본 전상운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과학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일천하던 때라 그같은 웃지 못할 일들이 많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은 83년 국보 제 228 호로 지정됐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진가를 맨 처음 알아본 사람도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학자. 1910~1930년대 평양 숭실 학교에서 근무했던 WC 루퍼스는 1936년 출간한「한국 천문학」이란 책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동양의 천문관이 집약된 섬세하고도 정확한 천문도』라고 격찬했다.1960년 창경궁 풀밭서 발견천상열차분야지도는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의 천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세종 때 만들어진 한국 고유의 역법인 칠정산(七政算)이 일본 정향력(貞享曆)의 모태가 됐다는 기록을 남겼던 일본의 유명한 천문학자 시부카와 하루미(1639~1715)는 그의 문집에 『조선의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일본의 천문도 제작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적고 있다. 이 같은 주상을 처음 제기한 박성래 교수는 『이는 일본의 대표적인 천문도 2개의 이름이 각각「천상열차지도」와「천상분야지도」인데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박창범 서울대 교수 등 다른 천문학자들도 한·일 천문도의 상관관계를 밝히기 위한 비교 연구를 진행 중이다.-1997년 4월 26일 경향 신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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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치성광불여래왕림도'
    고려시대는 활발하게 천문관측을 벌였고 주기적으로 별자리에 제를 올리렸다. 또한 천문관측이나 역법 제작 등이 국가제도 속에 포함되어 왕성하게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거란·몽고·왜구의 침입 등 많은 외침 속에서도 천문관측을 중단하지 않고 하늘을 해석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그러나, 이처럼 활발한 천문활동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의 천문도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천문학자인 오윤부가 천문도를 제작했다고 하나 이마저도 남아 있지 않은 안타까운 실정이다. 이러한 가운데 별자리와 천문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불화(천문성수도, 天文星宿圖)가 발견되어 천문학계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치성광불여래왕림도(熾盛光佛如來往臨圖)’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현재 미국 보스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불화로, 고려시대의 천문사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려 치성광불여래왕림도 그림 : 고려시대의 천문불화, 14세기 제작‘치성광여래’는 북극성을 말한다. ‘치성광불여래왕림도’는 북극성인 치성광여래를 한복판에 두고, 그 주변의 보살들에게 각기 별자리 이름을 붙여 배치한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치성광여래 양 옆으로 해를 상징하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달을 상징하는 월광보살(月光菩薩)이 있다.치성광여래는 소가 이끄는 수레에 올라타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삶이 수레바퀴처럼 돌고 돈다는 불교의 윤회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가운데 위치한 치성광여래를 28명의 보살로 표현된 별자리(28宿)가 둘러싸고 있으며, 그 28수는 또 동물과 연관시켜 표현하기도 했다.그림의 오른쪽 위에는 북두칠성 외에 2개 별자리를 더한 북두구진(北斗九辰)이 한데 모여 있고, 제일 위쪽에는 일년 열두 달을 상징하는 12궁(宮) 별자리가 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서양의 황도 12궁 별자리가 고려시대의 불화 안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흔적을 통해 서양의 별자리가 고려시대에 전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치성광불여래왕림도’의 불화에서 고려시대 천문의 흔적은 물론 동서양 교류의 흔적까지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화의 근간은 조선 선조 2년작인 '치성광제성강림도(熾盛光諸星往臨圖)'로 이어지고 있다.이 선조본에서 특이한 점은 고려본과는 다르게 북두칠성이 머리를 길게 내려뜨린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조선시대 치성광불화 그림 : 1569년작, 일본 교토 고려 미술관 소장-김일권, [고려 치성광불화의 도상분석과 도불교섭적 천문사상연구], 천태학 연구, 2002,2003년(제 4집) 대한 불교천태종 천대불교문화연구원- http://ruby.kisti.re.kr/~anastro/sub_index.htm-나일성, [한국천문학사], 2000, 서울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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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 고분 벽화에 담긴 천문의 흔적
    고구려 고분 벽화에 담긴 천문의 흔적무덤에 별을 새겨 죽은 자의 영혼을 기리는 풍습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나타난다. 현재까지 발견된 총 91기의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 별자리 그림이 발견된 곳은 모두 22군데이다. 우리는 벽화에 나타난 수많은 별자리 흔적을 통해 고구려인들의 하늘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해와 달해와 달을 숭상했던 고구려인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朱蒙)은 곧 해와 달의 아들이었다.건국신화에 의하면, 주몽의 외할아버지인 하백(河伯)은 ‘태양의 광명’이란 뜻으로 태양신을 뜻하며, 아버지인 해모수(解慕漱)의 해(解) 또한 해와 통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이처럼 해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등장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상징이었다.해 그림 : 오회분 4호묘, 각저층그렇다면 고구려 고분벽화 안의 해는 어떻게 등장하고 있을까? 벽화의 해 안에는 새 한 마리가 들어 있다. 그 새가 바로 까마귀인데, 이 까마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발이 세 개나 달려 있다. 그래서 이 새를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라고 하는데, 여기에 한 이야기가 전한다.태평성대의 시대로 알려진 중국 요임금 때의 일이다. 하늘도 태평성대를 시기했는지 하늘에는 열 개의 해가 동시에 떠올랐다. 강물은 타들어가고 온 곡식이 말라붙는 등 세상은 그야말로 불덩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자 요임금은 동이족 출신인 예를 불러 해를 쏘아 떨어뜨리게 했다. 활쏘기의 명수 예가 정확하게 목표를 맞추자 해가 떨어진 자리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가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세 발 달린 까마귀는 해의 정령이었던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안의 세발 달린 까마귀는 바로 이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달 그림 : 계수나무와 토끼 있는 벽화, 절구질하는 토끼와 두꺼비 [개마총]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우리가 어릴 적 흔히 불렀던 ‘반달’ 노래의 가사 속에는 달 속에 계수나무 와 절구질을 하고 있는 토끼가 나온다. 바로 이 모습을 고구려 고분벽화 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벽화 안의 달에는 입에서 화염을 내뿜는 두꺼비가 등장하기도 한다. 여기에도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아홉 개의 해를 쏘아 맞췄던 예의 부인 항아의 이야기이다.원래 하늘의 신이었는데 해를 너무 많이 쏘아 없애자 하늘의 분노를 사 지상의 인간이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천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던 예는 서왕모의 도움으로 간신히 불사약을 구해 와서 부인인 항아(姮娥)와 함께 마시려고 하였다. 욕심이 많았던 항아는 남편 몰래 불사약 두 알을 다 먹고 하늘로 오르려고 했으나, 아직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고 달 속으로 피하게 되었다. 이에 화가 난 서왕모는 그녀를 흉측하게 생긴 두꺼비로 둔갑을 시켜 버렸다.바로 이 두꺼비의 모습이 고구려 고분벽화 안에 그대로 담겨 있으며, 종종 옥토끼와 같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돌절구에 불사약을 찧고 있는 토끼 옆에서 두꺼비인 항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자신의 잘못에 대한 회한과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해와 달의 자손이라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 그리고 우리에게 친근한 옥토끼와 두꺼비가 사는 달 등 고분벽화에 나타난 해와 달은 바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고분벽화에 그려진 해와 달을 관찰하다 보면 일정한 유형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해는 항상 동쪽에, 달은 서쪽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벽화의 천장에 있는 해와 달은 각각 동과 서를 나타내는 방위 표시이기도 했다.북두칠성과 남두육성중국은 북극성을 중요시했던 반면, 고구려는 북두칠성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별자리는 바로 북두칠성이다. 이 북두칠성의 맞은편에는 대체로 남두육성이 그려진다. 여름밤 남쪽 하늘에서 볼 수 있다는 남두육성. 서양에서는 궁수자리에 속하는 이 여섯 개의 별을 중국에서는 28수 중의 하나인 두수(斗宿)로 보았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남두육성에 더 큰 의미를 두어 북쪽의 북두칠성과 대칭되는 남쪽의 별로 생각했다. 고구려인들이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을 마주 보게 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단순히 남과 북을 상징하는 방위의 개념도 있지만, 북두칠성은 죽음을, 남두육성은 삶을 주관한다는 고대 동양인들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다.사신(四神)<강서대묘 사신 그림 : 청룡 백호 주작 현무>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갔을 때 찾았다는 평안남도 남포시의 강서대묘.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 사신도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는 그 고분 안으로 잠시 들어가 보자. 천년의 잠을 자고 있는 무덤의 널길을 따라 들어가면 주인 부부를 모신 네모난 방 하나가 나온다. 바로 이 곳에 화려하고 신비스러운 사신이 사방을 둘러 무덤을 수호하고 있다. 푸르고 붉은 빛깔의 기운이 살아 있는 듯 느껴지는 청룡. 동쪽을 담당하는 수호신이다. 청룡의 화려하면서도 웅혼한 기상은 지금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하다. 무덤의 서쪽에서 용맹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한 백호! 장중한 맛이 잘 살아 있다.그리고 퍼덕이는 날갯짓으로 천상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르는 듯한 주작은 남쪽의 방위를 담당한다.거북과 뱀이 어우러진 곡선미로 화려한 회화미의 극치를 달리는 현무! 북쪽을 담당하는 수호신이다.역동적이고도 신비로운 기운으로 표현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四神).이렇듯 사신은 무덤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쉬고 싶어 하는 고구려인들의 혼을 표현했다.그리고 무덤벽화를 통해 동서남북의 방위를 책임졌으며,고대 밤하늘을 네영역으로 나누어 지키는 수호신이기도 했다.견우와 직녀<덕흥리 고분 견우와 직녀 그림>하늘의 별자리 중에 견우성과 직녀성만큼 슬픈 전설을 가진 별자리가 있을까? 일년에 한번 칠월칠석날 만난다는 견우 직녀의 생생한 모습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덕흥리 벽화 고분에서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소를 몰고 가는 견우와 이를 애타게 지켜보는 직녀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까지 알려진 견우와 직녀의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약수리 고분벽화 안칸 사방벽면의 사신도 1 2 3 4 와 일월성수도>고분벽화에 나타난 별자리들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치된다. 남북으로 위치한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동서로 배치된 해와 달, 그리고 동서남북 네 방향을 수호하는 사신(四神)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하늘은 일월(日月)과 성수(星宿), 사신(四神)이 각각의 방향에서 삼중으로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중국의 고분벽화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은 형식으로 고구려 천문의 독창성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 1992 G52,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p.93-101(모두루묘지명)- 두산 엔사이버 대백과- 전호태, [고분벽화로 본 고구려 이야기], 1999, 풀빛출판사, p.61~65-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2000, 서울대출판부, p.72- 김일권, [한국고대인의 천문우주관],2002, 강좌 한국고대사 제 8권(재)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p.64…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863
  •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별자리 천문도는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보통 1247년 제작된 중국의 ‘순우천문도(順祐天文圖)’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된 고대 천문도가 전해지고 있다.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 흔적이 바로 그것이다.충북 청원군 아득이 돌판경북 영일군 칠포리 돌판<영일군 신흥리 돌판>충북 청원군 아득이 돌판에는 북두칠성을 기준으로 용자리, 작은 곰자리, 북극성, 케페우스, 카시오페아자리 등이 발견되고 있고, 경북 영일 칠포리 농발재 고인돌에는 북두칠성 별자리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또 인근의 경북 영일 신흥리 오줌바위에는 W자, Y자형 별자리 그림이 나타난다. 이는 한반도의 고대인들이 북극성 근방에 보이는 북두칠성 등의 별자리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또한 중국 천문학이 들어오던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나라에도 독자적인 천문 체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다.옛사람들은 왜 고인돌에 별자리를 새겨 넣은 것일까? 아마도 죽은 사람의 영혼이 별처럼 빛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그러나 고대 천문의 흔적은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에 해당하는 윷놀이. 바로 이 윷놀이를 하던 윷판에 하늘의 별자리가 들어있고 우주를 상징하는 체계가 담겨 있다.경북 영일군 신흥리 야산의 자연암반을 살펴보면 별자리 그림과 함께 수많은 윷판도가 새겨져 있다. 윷판 그림은 최소한 삼국시대 이전 선사시대의 문화로 추정된다. 이 윷판은 별들이 하늘을 한바퀴 도는 천문의 운행 원리를 윷판 도형에 담고 있는데 후대의 사람들이 이를 놀이화해서 하늘의 천문을 우리의 삶에 투영시키려 했던 게 아닌가 싶다.그래서 옛사람들은 윷판이 우주를 상징한다고 여겼다. 윷판은 현재 네모난 형태를 띠지만 옛날에는 둥근 원의 형태였다. 윷판 안에는 점이 모두 29개가 찍혀 있는데, 그 중 가운데 점이 북극성에 해당하고 나머지 28개의 점이 이를 중심으로 도는 하늘의 28수 별자리라는 것이다. 이는 조선 선조 때의 김문표가 남긴『중경지(中京誌)』권10 부록을 보면 알 수 있다.「윷판의 바깥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고, 안이 모진 것은 땅을 본뜬 것이니, 즉 하늘이 땅바닥까지 둘러 싼 것이요, 별의 가운데에 있는 것은 28수(宿)를 본뜬 것이니, 즉 북진(北辰)이 그 자리에 있으매 뭇별이 둘러싼 것이요, 해가 가는 것이 북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들어가 중앙으로 거쳐 도루 북으로 나오는 것은 동지(冬至)의 해가 짧은 것이요, 북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들어가 서쪽까지 갔다가 또 다시 북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춘분(春分)에 해가 고른 것이요, 북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지나 남쪽으로 들어갔다가 곧 바로 북으로 나오는 것은 추분(秋分)의 밤이 고른 것이요, 북에서 시작하여 동을 지나고 남을 지나고 서를 지나 또다시 북으로 나오는 것은 하지(夏至)의 해가 긴 것이니, 즉 한 물건(윷판)이로되 지극한 이치의 포함된 것이 이러하도다.」위의 글에서도 드러나듯 옛 선조들은 윷판에 윷을 던져 춘분과 추분, 동지와 하지를 따져보고 이를 통해 농사의 길흉을 점쳤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윷놀이판 하나에도 천지와 우주를 담고 있었다.1)1) 박창범, [청원 아득이 고인돌 유적에서 발굴된 별자리판 연구], 한국과학사학회, 제23권, 제1호(2001)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2002, 김영사, p.105김일권, [한국 고대인의 천문우주관], 2002, 강좌 한국고대사 제 8권(재)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5-9-7-1-4.html…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70
  • 한국천문의 과거 현재, 미래를 위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푸르고 원대한 하늘에 대해 외경심을 가지고 섬겨 왔다. 임금은 하늘의 뜻을 대신해서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하늘의 뜻에 순응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하늘의 주기적인 변화와 이치를 살펴 농사와 치수, 그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일식이 일어날 경우 국가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는 하늘의 징조라 여기고 그 예보에 힘을 다 하였으며, 만약 예보가 틀리는 경우 천문관을 문책하기도 할 정도로 하늘의 현상을 읽고 이해하는데 힘썼다.우리의 하늘은 나라가 어려울 때 임금을 각성시키는 통로이자, 지상의 사람들에게 올바른 도리를 지키고 평화를 지키게 하는 든든한 나침반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는 인간과 천체는 하나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늘을 해석했던 것이다.천상열차분야지도 그림우리 선조들이 남긴 위대한 천문 유산 중에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가 있다. 이것은 고구려 때 만들어진 천문도를 조선시대에 재현한 것인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천문도이다.이에 [한국 천문, 우리 하늘 우리 별자리]에서는 이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컴퓨터 그래픽 혼상으로 복원하고자 한다. 혼상(渾象)은 하늘의 별들을 보이는 위치 그대로 둥근 구면에 표시한 천문기기를 말한다. 혼상을 하루에 한번씩 회전시켜 보면, 별이 뜨고 지는 것을 알 수 있고,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도 측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컴퓨터 그래픽 혼상으로 복원하는 과정은 어떻게 진행된 것일까?먼저, 우리는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나타난 별자리가 지금의 별자리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천상열차분야지도 제작 이후,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어난 세차운동1) 때문이다. 수백 년 전의 천문도에 나타난 별자리의 복원은 정확한 좌표 값을 찾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에 현대 천문학자들에 의해서 정확한 좌표 값이 밝혀진 조선 말기의 천문서 [성경(星鏡)]이 활용되었다. 21세기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복원은 [성경]의 별자리 좌표 값을 기본 바탕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를 비교 분석해 제작하였다. 새롭게 태어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하늘은 북반구와 남반구 별자리까지 아우르고 있으며, 현대 별자리와도 비교 접목해 볼 수 있다. 아울러 별의 명칭에 있어서도 한 개로 이루어진 것은 ‘별’이라 이름 붙였고, 두 개 이상의 별에 대해서는 ‘별자리’라고 명칭하였다.잃어버렸던 우리 하늘의 별자리를 첨단기술과 접목하는 일! 이는 우리 별자리의 참 모습을 누구나 쉽고 빠르게 접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오천년 역사 동안 우리 민족이 향유해왔던 진정한 우리의 하늘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1) 세차운동 : 회전체의 회전축이 일정한 부동축(不動軸)의 둘레를 도는 현상. (약간 기울어져 돌고 있는 팽이의 축이 연직축(鉛直軸)을 기준으로 회전하는 운동, 인공위성의 궤도면의 축이 지구 자전축을 회전하는 운동, 지구의 세차 현상 따위를 말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817
  • 우리 하늘의 별자리를 찾아서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동요 ‘반달’이다. 노래 속의 하얀 쪽배는 바로 반달을 뜻한다. 검푸른 하늘에는 은하수가 있고, 계수나무 옆에서 토끼가 방아를 찧는 반달이 샛별을 등대 삼아 밤 항해 길을 나아가고 있다. 바로 그 밤하늘은 우리가 신나게 뛰어 놀던 어린 시절, 가는 곳마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달이 있는 하늘이기도 하며, 깊어 가는 여름밤 대청마루에 누워 별 하나, 별 둘, 별 셋 등을 헤아렸던 하늘이기도 하다. 이처럼 밤하늘은 우리에게 푸근하고도 친숙한 정서와 기억을 제공하는 곳이었다.그러나, 지금의 밤하늘은 어떠한가. 어둠을 밝히는 조명에 밤조차 대낮과 같아졌고, 뿌연 대기층이 하늘을 가로막아 아름다운 별빛을 쳐다볼 수가 없다. 또한 밤하늘을 쳐다보지 못할 만큼 삶이 바빠지기도 했다. 더욱이 그 하늘에는 서양의 별자리들이 남아 우리 밤하늘의 정서를 대신해 왔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그의 아들 에로스가 변해 만들어졌다는 물고기자리, 서양의 힘센 장사인 헤라클레스자리, 제우스가 헤라 몰래 바람을 피우려고 우아한 백조로 변신했다는 백조자리 등 서양 별자리의 주인공들이 서로에 대한 질투와 음모, 그리고 난투로 가득 찬 하늘을 만드는 동안, 우리의 푸근하고 친숙한 하늘은 그 자취를 서서히 잃어갔던 것이다.그렇다면 우리 하늘의 별자리, 동양 하늘의 별자리는 없는 것일까?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밤하늘이 있었고, 하늘을 수놓은 별자리와 이야기들이 있었다.떡장수인 엄마를 잡아먹고 아이들까지 잡아먹으려는 호랑이를 피해 하늘에서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나, 해마다 칠월칠석이면 오작교를 건너 아쉬운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는 견우별과 직녀별 이야기가 있다. 또 북두칠성은 우리 겨레의 삶 곳곳에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우리는 북두칠성에 있는 삼신할머니로부터 명을 받아 태어나고, 죽어서는 관 속에 북두칠성을 그린 칠성판을 지고 간다. 또 우리나라의 절에 있는 칠성각은 북두칠성을 모신 곳으로 어디를 가나 쉽게 접할 수 있다. 이처럼 북두칠성은 우리의 삶과 죽음, 그리고 길흉을 주관하는 우리 민족의 별이었다. 그 밖에도 고분벽화 가득히 하늘의 세계를 그려 넣은 고구려인들의 해박한 천문지식과, 조선시대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 등 우리에게는 빛나는 천문학의 전통이 있었다.이 뿐만이 아니다. 밤하늘에는 우리말로 된 별자리 이름들이 있다. 금성을 지칭하는 샛별과 개밥바라기. 28수 중의 묘수와 플레이아데스 성단을 이르는 좀생이 별, 또 은하수를 지칭하는 미리내와 유성을 가리키는 별똥별 등등 우리 별 이름은 듣기만 해도 친숙한 느낌이 절로 일어나는 것 같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지방의 특성을 살리는 별자리 이름짓기가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강원도 영월에서는 사자자리의 1등성 레굴루스를 ‘단종별’이라 칭했고, 남원시는 처녀자리의 스피카와 목동자리의 아크투루스 별을 ‘춘향별’과 ‘몽룡별’로 이름을 정한 바 있다. 또 전남 무주군에서는 북쪽왕관자리를 ‘반딧불이 별자리’로 정하고 충북 증평에서는 인삼처럼 생긴 페르세우스자리를 ‘인삼별’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런 추세라면 우리의 밤하늘이 우리 별자리들로 채워지는 날도 그리 멀지는 않은 것 같다. 하늘과 인간은 하나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별빛에 의존해 소망을 빌고 화평을 기원했던 우리의 하늘, 지금 그 하늘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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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랑성(三郞城)
    강화도 삼랑성(三郞城) 강화도 마니산에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각 왕조마다 천제를 지내왔다. 마리산 참성단은 올림픽, 월드컵뿐 아니라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본 성지가 되고 있다. 일찍이 광개토열제도 말타고 순행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다강화도에는 마리산 참성단과 더불어  '삼랑성(三郞城)'이 있다.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에 위치하고 있는 성으로 종족산성이라고 했다가 2011년  '강화 삼랑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삼랑성 안내문에는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고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환단고기에 의하면 운사 배달신이 명을 받아 쌓은 것이다.  "재위 51년 무오(단기51,bce 2283)년에 왕검께서 운사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에 삼랑성을 건설하게 하시고 마리산에 제천단을 쌓게 하시니 지금의 참성단이 곧 그것이다" (단군세기) "지금 강화도 혈구에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성城은 삼랑三郞이 머물면서 호위하는 곳이요, 낭郞은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삼랑성은 말그대로 삼랑三郞이 머물면서 호위하는 곳이다. 그럼 삼랑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일까? 삼랑三郞은 삼시랑(三侍郞), 배달의 신하護守三神하야 以理人命者를 爲三侍郞이니 本三神侍從之郞이오 三郞은 本倍達臣이니 亦世襲三神護守之官也니라. 高麗八觀雜記에 亦曰「三郞(삼랑)은 倍達臣也(배달신야)라」 하니 主稼種財利者는 爲業이오 主敎化威福者는 爲郞이오 主聚衆願功者는 爲伯이니 卽古發神道也라 皆能降靈豫言하야 多神理屢中也라  (『태백일사』 「신시본기」)클릭하면 큰 이미지로 볼수 있습니다.큰 이미지 보기삼신을 수호하여 인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郞라 하는데, 본래 삼신을 시종侍從하는 벼슬이다. 삼랑三郞은 본래 배달倍達의 신하이며,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을 세습하였다.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도 역시 “삼랑은 배달국의 신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곡식 종자를 심어 가꾸고 재물을 다스리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업業이라 하고, 백성을 교화하고 형벌과 복을 주는 일을 맡은 자를 낭郞이라 하고, 백성을 모아 삼신께 공덕을 기원하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백伯이라 하니, 곧 옛날의 광명[發] 신도神道이다. 모두 영靈을 받아 예언을 하였는데 신이한 이치가 자주 적중하였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삼랑'은 '삼시랑(三侍郞)'의 준말이며, 삼시랑은 삼성밀기의 '삼신시종지랑(三神侍從之郞)'에서 나온 말이다. 삼신을 시종하는 벼슬이다. 삼랑들은 삼랑성에 기거하면서 단군이 마리산 참성단에 천제를 지낼 때 필요한 제물이나 의식 절차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다. 삼랑三郞이란 직책명이며 임금의 자문 역할을 하는 벼슬이지 ‘단군의 아들 셋’이란 뜻이 아니다.사무라이는 삼랑에서 유래 ‘사무라이’가 사실 한국어 ‘싸울아비’에서 유래했다고 아는 사람이 많다. 지금도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럴싸해보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싸울아비가 발음상으로도 사무라이로 바뀌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싸울아비는 서울 배화여고 등에서 국어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라디오 드라마 극본도 썼던 김영곤 작가(1926~1988)가 1960년대 만들어낸 표현이다. (2017-11-19 동아일보 참고) 사무라이는 삼랑에서 유래되었다. 삼랑은 '삼' + '랑'이다. '삼'은 일본말로는 '사무'라고 하고 '랑'은 '라이'로 발음한다.  삼(三)→사무, 랑(郞)→라이. 쉬운 예로 일본에서는 '맥도날드'를 '마그도나르도'라고 발음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 실제로 일본 맥도날드 TV 광고에서도 "마그도나르도"라 발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실생활에서는 줄여서 도쿄에서는 "마크"라고 부르고, 오카사에서는 "마크도"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므로 '삼랑'이 오랜 옛날 일본열도로 넘어가서 '사무라이'가 된다. 그러면서 '삼랑'이라는 이름은 '사무라이'로 남았으나 삼랑이 원래 맡았던 역할은 지역과 환경에 따라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로 볼수 있습니다.큰 이미지 보기일본인의 이름에 태랑太郞, 차랑次郞, 삼랑三郞 등, 랑郞자가 많이 쓰이고 있는 것도 삼랑이 넘어간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삼랑은  '삼시랑(三侍郞)'에서 왔다고 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그럼 삼시랑의 중간글자 모실시(侍)자는 어디로 간것일까? 이는 일본에 가면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모실시(侍) 한자 하나만 그려놓고서 '사무라이'라고 읽는다.  사무라이의 훈독인 '侍'는 '三侍郞'에서 나온 말이다. 큰 이미지 보기한자를 읽는 방법에는 두 가지, 음독과 훈독이란게 있다 즉 하나의 한자에는 두 가지 이상의 읽는 방법이 있다는 거다. 훈독 (訓読み) : - 한자의 의미를 따서 和語(일본어)의 발음으로 읽는 것으로 이것 만으로 의미를 알 수 있다 모실시(侍)가 그려진 사무라이 문화 상품도 일본에선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는 사무라이가 삼(시侍)랑에서 왔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가 된다.  이는 환단고기가 진서이며 사료가치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중 하나다  (환단고기 북콘서트 부경대 편 참고) 侍(SAMURAI) 티셔츠 이미지:筆文字&#12539;和文字 출처 : https://goods.skiyaki.tokyo/designs/9176삼랑에서 화랑으로환국 말기에 태동한 제세핵랑과 배달 시대의 삼랑은 그 후 고조선의 국자랑國子郞→ 북부여의 천왕랑天王郞 →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백제의 무절武節, 신라의 화랑花郞 → 고려의 재가화상在家和尙(선랑仙郞, 국선國仙) 등으로 계승되었다. 이들은 모두 평상시에는 삼신상제님의 진리를 공부하며 완전한 인격체의 길을 추구하고, 학문과 무예를 동시에 연마하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그러나 유사시에는 구국의 선봉에서 목숨을 바쳐 국난을 물리쳤다. 결론적으로 낭가는 신교의 구도자이며 또한 역사 개척의 선봉장으로서 한 시대의 구국청년단이었다.대혼돈의 시대, 초불확실성의 시대인, 지금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여 올바른 역사관,신관을 가진  21세기의 화랑, 삼랑이 필요한 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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