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

상기내용을 모두 옳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역사를 찾아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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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신안군 안좌면 방월리 당제
    전남 신안군 안좌면 방월리 당제제명 : 당제신격 : 상당(당할매, 당하납씨), 하당(칠성암과 당산나무)제당 : 상당(뒷산 중턱의 자연돌담), 하당(마을 가운데 당산나무와 지석묘)일시 : 음력 1월 15일개괄方月里는 322명(남 162, 여 160)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방월리는 전에 목화, 담배 농사로 소득이 높았으며 현재는 마늘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제를 지내는 장소는 두 군데인데 할매ㆍ하납씨가 거처한다고 믿는 상당과 칠성신인 지석묘(支石墓)로 이루어진 하당이 있다. 이중 상당은 동네에서 동북방향에 있는 뒷산 중텩 굴바위로 가는 당바우(높이 4.5m, 폭 15~18m) 정상에 있다.제의내용가) 제당 구성과 신격方月里는 322명(남 162, 여 160)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방월리는 전에 목화, 담배 농사로 소득이 높았으며 현재는 마늘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제를 지내는 장소는 두 군데인데 할매ㆍ하납씨가 거처한다고 믿는 상당과 칠성신인 지석묘(支石墓)로 이루어진 하당이 있다. 이중 상당은 동네에서 동북방향에 있는 뒷산 중텩 굴바위로 가는 당바우(높이 4.5m, 폭 15~18m) 정상에 있다. 여기에는 자연석의 돌담이 쌓여 있었으며(돌담 직경 약 300~440㎝, 높이 55~110㎝, 담폭 40~65㎝) 돌담안 북쪽에는 토석제단(土石祭壇) (가로 170㎝, 세로 130㎝, 높이 31㎝)이 있었다(현재는 부서져 있음). 돌담 주변에는 10~30년생 소나무가 세그루 있고 돌담안은 흙다짐 흔적이 있다. 이 뒷산너머에는 폐허가 된 절터가 있고 방월리 경주정씨들의 선영이 있었다. 하당에는 칠성바우(七星岩)라 불리우는 7개의 지석묘가 있었다. 이 칠성암인 지석묘가 하당신체(下堂神體)이다. 上堂에는 堂할머니를 모시고 下堂에는 堂할아버지와 七星神인 支石墓를 모셨었다. 下堂에는 神木인 팽나무가 있으며 神木의 근처에는 4개의 고인돌이 있는데 七星岩이라 하며, 下堂祭를 지낼 때 같이 祭밥을 차려 部落의 消災新福과 子息發願을 빈다. 바로 七星岩인 지석묘가 하당신이다. 祭日은 정월 15일이다.나) 당제 준비방월리에서는 제를 진행하는 제관을 “제주(祭主)”라 부른다. 제주는 마음 착하고 산고(産故)나 상고(喪故)가 없는 깨끗한 사람을 이장이 선정했다. 제주로 선정된 집앞에는 황토흙을 깔고 검줄을 치고 모든 것을 조심한다.제는 당샘과 지당 주위에 검줄을 치고 제주로 선정된 부부가 목욕재계하고 꼬사리, 도랏, 콩나물, 녹두나물, 술, 냉수, 소금(?) 메 두 그릇을 차려 놓고 지낸다. 축문은 없고 다만 당할매ㆍ하랍씨(하납씨)께 부락 사고 없고 부정(不淨), 돌진(호녁, 손님) 없이 마을 잘 보아 주시고 농사ㆍ면화 잘 되게 해 달라고 빈다.다) 당제 진행상당의 할매ㆍ하납씨에게 제를 지낸 후에는 마을 앞 동네 우물 바로 뒤 칠성바우에도 지(祭)를 올렸다. 여기에는 지석묘가 2기 있는데 작은 것에는 성혈(性穴;cup-mark)이 여러개 뚫려 있다. 이곳을 웃사장이라하고 지석묘를 공알바우라고도 불렀으며 만지면 사고가 난다고 했다. 웃사장에는 황토흙과 외로 꼰 새끼로 검줄을 둘러 쳐 놓았다.방월리로 들어오는 입구, 즉 하누(閑雲)로 들어오고 나가는 길목에 예전에는 둘레가 세아름이나 되는 팽나무가 있었다. 그러나 20년 전에 고사했고 여기에는 꼰, 말꼰, 육말꼰, 윷판을 새겨 놓았던 큰바위가 있었는데 이곳을 아랫사장(?)이라 불렀다.라) 제후 행사 및 전승현황제를 지내는데 필요한 제비용은 제주가 부담한다(대동회 기금으로 충당한다는 보고도 있음). 지(祭) 후에는 징, 꽹쇄, 장구, 방구(북), 소고 등으로 굿물(군물, 농악)을 쳤고 마을희의나 줄다리기는 없었다. 이러한 방월리의 당지는 1970년대부터 지내지 않고 있다 한다.마) 영험담支石神인 칠성암은 영험이 있어 함부로 옮길 수 없다 한다. 방월리 정욱진(67세)씨 부친 정내살씨가 고인돌 한 쪽을 떨어뜨린 후 허리를 쓰지 못하고 死亡하였으며, 길을 造成하기 위해 고인돌을 옮기었는데, 부락에 憂患이 있었고 우물물이 나오지 않아 원 位置에 옮겨 놓았다.방월리를 마을 뒷산에서 보면 집이 모여진 모양이 말(馬)이 달리는 형상으로 말대긋박(말머리)이나 꼭지(꼬리)쪽에 집을 지으면 좋지 않고 꼭 집이 뜯기게 된다고 한다.□ 참고문헌<최덕원, ??다도해의 당제??, 학문사, 1983년, 4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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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신안군 압해면 학교리 학동 도제
    전남 신안군 압해면 학교리 학동 도제 제명 : 도제신격 : 당산할머니제당 : 마을 중앙 당산나무일시 : 음력 1월 3일개괄이 마을의 도제는 30여년 전에 중단되었다가 1992년부터 부활되어 다시 모시고 있다. 학교리의 마을제사는 도제라고 하며 당산제라고도 부른다. 제일시는 1월 3일날 저녁 11시 무렵이다. 제당은 마을 중앙에 있는 당산나무이며, 당신(堂神)은 당산할머니다. 당산나무의 수종은 느티나무이며, 몸통이 5.5m인 노거수다.제의내용① 제당 구성 및 신격이 마을의 도제는 30여년 전에 중단되었다가 1992년부터 부활되어 다시 모시고 있다. 학교리의 마을제사는 도제라고 하며 당산제라고도 부른다. 제일시는 1월 3일날 저녁 11시 무렵이다. 제당은 마을 중앙에 있는 당산나무이며, 당신(堂神)은 당산할머니다. 당산나무의 수종은 느티나무이며, 몸통이 5.5m인 노거수다.② 도제 준비도제 준비는 1주일 전에 제관을 선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제관은 한 명이고 그를 도와주는 보조원이 3명 더 있다. 제관은 깨끗한 사람을 가려 뽑는데, 집안에 초상이 났거나 산고가 든 사람은 안 되며, 심지어 가족 중에 피부에 부스럼이 있는 사람도 안 된다. 보조원도 비슷한 조건을 갖춰야 했다. 과거에는 마을회의에서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을 선정했는데, 지금은 도제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사람 5-6명이 제관의 역할을 맡는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초상난 데 출입해서는 안 되며, 개고기같은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 요즘의 제관들도 이런 금기를 지키며 정결하게 제를 준비한다.제사 비용은, 과거에는 집집마다 가족수만큼 돈을 걷는 ‘인구전’으로 돈을 걷었다. 지금은, 1992년 이후 조금씩 모아진 기금과 매년 들어오는 찬조금과 물품으로 제를 모신다. 1999년 2월 현재의 ‘도제 자산’은 214,451원이다.제물 구입하러 나가는 것을 ‘당짐 나간다’고 하며, 정초 연휴를 피해 섣달 그믐에 나간다. 구입시에 물건값을 깍으면 제물이 안 된다고 해서 달라는 대로 주고 사왔다. 제물은 숭어, 농어, 제주, 감, 밤, 대추, 곶감, 사과, 배, 산나물, 마른 명태, 두부, 떡시루 등이다. 지금은 숭어, 농어가 빠지며, 또 나물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찬조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따로 구입하지 않는다.③ 도제 진행1월 3일날 아침이 되면 금줄을 치고 금토를 놓는다. 금줄은 왼새끼로 꼰 것이며 중간 중간에 창오지를 매달아 펄럭이게 한다. 과거에는 당산나무 주위에 대나무를 세우고 빙 둘러 쳤으나 지금은 바닥이 시멘트로 포장이 됐기 때문에 대나무를 세울 수 없어 그냥 당산나무에 서너 번 돌려 감는다. 또한 당산나무 근처에 있는 당샘에도 금줄을 치고 금토를 놓았는데, 이렇게 되면 일반 주민들의 샘물 사용이 금지된다. 제관은 이 물을 길어다 제수 장만을 하고 또 제를 모시기 전에 샘에서 찬물로 목욕을 했다. 지금은 이 샘이 메워지고 개인집에 수도시설이 되어 있으므로 제관 집에서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도제를 지내는 순서는 진설-헌작-재배-독축-재배-소지 순이다. 메는 2그릇을 차리는데, 당신(堂神)이 당할머니 한 분이지만 ‘할아버지가 있어야 할머니도 있을 것 아니냐.’는 생각에 따라 2그릇을 차린다. 술을 따르는 횟수는 특별히 정해지지 않아 참여한 사람 수만큼 하고 있다. 축문은 옛날 것이 남아 있지 않고 도제가 부활한 후에 사용했던 것이 남아 있다. 제보자가 보관하고 있는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자 옆에는 한글이 병기되어 있다. 한편 요즘에는 한자를 읽을 수 없어 아예 한글 축문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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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신안군 흑산면 읍동 당제
    전남 신안군 흑산면 읍동 당제 개괄흑산 진리 면소재지에서 1km 떨어진 곳에 읍동이 있다. 44가구에 198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옛날의 흑산 읍지로 가장 큰 마을이었다 한다. 마을 뒷산에 있는 산정을 향해 반월형으로 쌓아 축성되어 있어 반월성이라 부르고 있다. 산성에서 500m 아래 평지에 읍동의 탑당이 있다. 탑당에는 암당과 숫당이 있으며, 그 앞에 당신위를 모신 당집이 있다. 섣달 그믐날 밤에 당에 올라가서 정월 초하루 자시 경에 제사를 지낸다.제의내용① 제당 구성 및 신격흑산 진리 면소재지에서 1km 떨어진 곳에 읍동이 있다. 44가구에 198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옛날의 흑산 읍지로 가장 큰 마을이었다 한다. 마을 뒷산에 있는 산정을 향해 반월형으로 쌓아 축성되어 있어 반월성이라 부르고 있다. 성의 길이는 300m 가량이며, 석축의 높이는 2m로 중앙에는 망망대해를 바라볼 수 있는 200평 가량의 광장이 있으며 서북쪽에는 바다에 접한 단애 적벽을 이루고 있다. 석성은 신명의 영험이 있어 출입을 삼가며, 석성의 돌덩이를 임의로 사용하지 못한다.반월성은 방위성도 아니며 봉화대가 있었던 곳도 아니다. 이 성은 비금도의 성치산성과 장산도의 대성산성, 화의 상태도 서리의 대성산성과 더불어 고대의 산상제성인 천제제단으로 볼 수도 있다.산성에서 500m 아래 평지에 읍동의 탑당이 있다. 탑당에는 암당과 숫당이 있으며, 그 앞에 당신위를 모신 당집이 있다. 산성과 탑당이 조성된 설화는 다음과 같다.아주 옛날에 불심이 강하고 의리에 밝은 장사가 살고 있었다. 역사는 늘 선심을 쓰며 주민들을 위해 궂은 일을 도맡아 봉사하는 장사였다. 그런데 이 고장에 해적이 있어 주민을 괴롭히고 지나는 배를 약탈하며, 모진 악행을 하므로 장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해적굴에 들어가 두목을 만나 다른 지역으로 나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해적을 말도록 권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내기를 하여 지면 생명을 내놓기로 하였다. 제한된 시간에 인원수가 가장 많은 해적은 산성을 쌓고 장사는 큰 바위를 헐어 3층탑을 조성하기로 하였다. 인원수가 많은 해적이 거의 성을 완성하였을 때 역사는 이미 탑을 쌓아 올렸다. 역사가 이긴 것이다. 언약대로 해적은 산정 해벽에서 목을 베었다. 그때의 선혈로 절벽의 암석은 지금도 붉게 물들어 있다. 의리에 강한 장사가 만들었던 암탑과 숫탑 양탑은 영험이 있어 이를 마을수호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한다.마을 뒤편 평지에 위치한 탑당은 반월성 산 밑에 있다. 높이 80cm의 돌담이 4각형으로 축조되어 있다. 그 중앙에 300여년이 된 팽나무의 당목이 있으며, 팽나무 밑 동북방에 암탑과 숫탑이 서 있다.암탑의 높이는 165cm, 숫탑의 높이는 185cm이며 3층탑이다. 각 탑 앞에는 높이 83cm, 폭 87cm의 콘크리트 당집이 있다. 그 속에는 당걸이가 있어 매년 새로운 신베를 걸어 놓는다. 당목 서쪽에 또 하나의 돌담이 있고, 그 속에 높이가 83cm, 폭이 87cm인 콘크리트 당집이 있는데 여기에 산신을 모시고 있다.읍동 마을 박동언(54세)씨가 탑당 안에서 중원 갑진(中元甲辰)이라 새겨진 기와장을 취득본 바 있다고 하나, 그 연대가 B.C 147년이므로 믿기 어렵다. 이와 같은 유물이 나온 것으로 보아 고사찰이 있었거나 규모가 큰 당집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탑과 석등의 조성연대는 탑형태와 구조 등으로 보아 통일 신라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② 당제 준비10월의 마을회의에서 생기를 보고 부정이 없는 2인의 제관이 선정되며, 이들은 2개월 동안 부정한 곳의 출입을 삼가고 각자의 집에서 3일간 재계한 후 당제를 지내게 된다. 화톳불을 피우며 탑 양위인 암탑과 숫탑, 산신에게 메 3상과 흰떡, 해물로 장만한 제물을 올린다. 제상에는 육물은 놓지 않는다.③ 당제 진행섣달 그믐날 밤에 당에 올라가서 정월 초하루 자시 경에 제사를 지낸다.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구축한 후 각호의 소지를 올리며 농악군이 당에 올라와 당굿을 치면 동네 각호에서도 성주님께 제상을 차린다.④ 제후 행사 및 전승현황당굿을 치고 당샘과 동네 샘에 이르러 샘굿을 한다. 이어 해변에서 용왕제인 갯제를 모실 때 갯굿을 친 다음 각호를 돌아다니면서 마당밟기를 한다. 온 동네는 농악과 춤과 제물로 풍요한 축제를 맞이한다.□ 참고문헌<최덕원, ??다도해의 당제??, 학문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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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여수시 남면 유송리 송고 당제
    전남 여수시 남면 유송리 송고 당제            제명 : 당제, 하당제, 용왕제신격 : 산신, 지신, 용왕제당 : 상당(마을 뒤산 입구), 하당(마을 앞 언덕 석조물)일시 : 매해 음력 12월 그믐 ~ 1월 1일이 동영상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전남 여수 남면 유송리 송고 당제제명 : 당제일시 :송고마을의 당제는 섣달 그믐부터 정월 초하루까지 진행된다.내용 : 당제는 상당제와 하당제, 용왕제의 성격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다. 상당제는 제관 외에 누구도 참석할 수 없는 반면, 하당제는 풍물굿으로만 진행되고, 용왕제는 마을 개인집에서 각각 상을 차리고 나와서 풍물굿과 결합된 제를 지낸다.특징 : 당제는 상당제와 하당제, 용왕제의 성격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다.제작의도 : 본 영상은 어촌의 생태적 환경과 밀접히 연관된 용왕제에 주목하여 제작하였다.개괄송고마을의 당제는 섣달 그믐부터 정월 초하루까지 진행된다. 당제는 상당제와 하당제, 용왕제의 성격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다. 상당제는 제관 외에 누구도 참석할 수 없는 반면, 하당제는 풍물굿으로만 진행되고, 용왕제는 마을 개인집에서 각각 상을 차리고 나와서 풍물굿과 결합된 제를 지낸다.제의내용송고마을에서는 당제를 ‘제만모신다’라고 하기도 하고, 당제라고 하기도 한다. 당제는 크게 상당제, 하당제, 용왕제로 구분된다. 상당제는 마을 뒷산 입구에 있는 계곡 옆에서 지내고, 하당제는 마을 앞 언덕에 있는 밥무덤에서 지내고, 용왕제는 마을 회관 앞에서 지낸다. 신격에 대해서는 명확히 아는 사람이 없으나 상당의 신은 산신으로서 호랑이라는 설이 있고, 하당의 신은 지신이라는 설이 있다.제의 준비는 제관의 선정부터 시작된다. 제관은 생기복덕을 가려 1명을 정하고, 선정된 제관의 집과 우물에는 금줄을 친다.섣달 그믐날 밤에 제관은 상당제를 지낸다. 상당의 신이 익힌 음식을 싫어하기 때문에 맨쌀을 물에 불려 솥단지에 넣고 제를 지낸다. 제를 마친 후 하당에 마련된 밥무덤에 음식을 넣는다. 이후 정월 초하루가 되면 해가 뜨기 전에 마을 아주머니들이 각각의 상을 마련해 마을 회관으로 모인다. 마을회관 앞 공터에 각각 개인집의 상을 차리고 뚜껑을 덮어놓는다. 여기의 개인상은 용왕제를 지내는 상이다.해가 뜨기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이 매구 칠 준비를 한다. 준비가 다 되면 매구를 치면서 하당으로 이동해 하당굿을 치고, 연달아 샘굿을 친 후 마을회관으로 들어온다. 마을회관 앞에는 각각의 집에서 준비한 용왕상이 차려져 있고, 그 앞에서 용왕굿을 친다. 용왕굿을 마치면서 마을 사람들과 매구꾼들이 일렬로 바다를 향해 재배를 올리고 철상을 한다. 아주머니들은 철상을 하면서 잡신에게 올리는 거레밥을 놓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때 매구꾼들은 각각의 상에서 거레밥을 모아 매구를 치면서 방파제까지 이동한다. 방파제 앞에서 다시 굿을 치고 재배를 올린 후 거레밥을 바다에 던진다. 이렇게 해서 마을 당제를 마무리 짓는다. 이후 매구꾼들은 마을 집들을 돌아다니면 마당밟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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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여수시 화양면 세포리 당제
    전남 여수시 화양면 세포리 당제        제명 : 당제신격 : 당산할머니제당 : 마을 입구 야산일시 : 음력 1월 3일이 동영상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전남 여수 화양면 세포리 도제제명 : 도제위치 : 제장은 마을 앞 나지막한 산 꼭대기인데 소나무,귀목,잡목 등으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내용 : 堂祭을 올리는 날은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는 날이 없다. 다만 정월 보름 이내의 날이면 되지만 祭主의 生氣에 맞은 날이라야 한다.특징 : 제의 형태는 풍물굿과 유교식 제사가 결합된 형태이다.제작의도 : 본 영상은 풍물굿이 동반된 제의에 주목하여 제작하였다.개괄祭場은 마을 앞 나지막한 산 꼭대기인데 소나무?귀목?잡목 등으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堂祭을 올리는 날은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는 날이 없다. 다만 정월 보름 이내의 날이면 되지만 祭主의 生氣에 맞은 날이라야 한다.제의내용이 마을은 화양면의 육지가 남해를 향해 길게 뻗어 내려간 육지의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231호나 되는 大村인데 望海山을 등뒤로 하고 산등성이의 이쪽 저쪽에 집들이 촘촘이 들어서 있다. 주업은 농업이고 마을이 바다와 접해 있어 어업을 하는 집들도 있다.祭場은 마을 앞 나지막한 산 꼭대기인데 소나무,귀목,잡목 등으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堂祭을 올리는 날은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는 날이 없다. 다만 정월 보름 이내의 날이면 되지만 祭主의 生氣에 맞은 날이라야 한다.그러므로 그 해에 祭主가 누구로 결정 되느냐에 따라 祭日이 결정되는 것이다. 祭主는 보통 아들 낳기를 원하는 夫婦로 자원하는 사람이 하게 된다. 祭主 외에 祝官이 1명 선정된다. 祭主의 선정에 따라 祭日이 결정되면 祭場과 산밑 샘, 마을 입구 등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깐다. 祭主는 祭物을 준비하는데 忌祭祀 때와 같이 간소하게 된다. 즉 메,국,탕류와 나물,전류와 과실, 건어물 등이다. 祭主 夫婦는 당제 3일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출입을 삼가고 온 정성을 드린다. 제주 부부는 당산에서 제물을 요리하는데 입에 마스크를 쓰고 말을 삼가여 극히 엄숙하게 정신을 쓴다. 祭主 夫婦와 祝官은 祭日 밤중에 祭場으로 올라가 새벽 1시에 제를 올린다. 먼저 陳設을 하고 향불을 피워서 降神을 기다렸다가 祭酒를 올린 다음 讀祝을 하고 再拜를 한 다음 모든 음식은 祭場 옆 땅에 참종이로 쌓아서 묻고 下山한다.날이 밝으면 오전 9시경부터 都祭(祝神祭)를 따로 올린다. 마을 앞 넓은 공지에서 올리는데 각 가정에서 주부들이 음식 1상씩 차려 가지고 나와서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된 순서(入村 順序)대로 상을 나열해 놓고 술잔을 각기 올린 다음에 祈願을 하고 再拜한다. 이 때 祭主는 마을을 대표하여 告祝을 한다. 또 무당도 참여하여 祭主와 더불어 주재하는데 무당굿을 하고 마을의 평안과 풍농?풍어를 빌고 모든 잡귀?병마를 쫓아낸다. 만약 不淨한 몸이거나 不淨한 일을 본 主婦는 도제마당에 나오지 않고 자기 집 마당에 상을 차려 놓고 혼자 집안을 위해 기원을 한다.도제마당에서 의식이 진행될 때 매구를 치면서 진행하다가 마을 입구로 가서 무당과 더불어 잡신막이굿을 한다. 마을 入口에 수십 년 된 고목이 있었으나 지금을 枯死해 버리고 없다. 잡신막이굿이 끝나면 샘으로 가서 샘굿을 치고 그 다음 제주의 집으로 가서 마당굿을 친 다음 집집마다 매구를 치고 다니면서 마당밟기를 한다.아들 낳지 못하던 사람이 祭主가 되어 정성껏 당제를 모신 다음에 아들을 낳은 일이 몇 차례 있어서 당산할머니의 영험이 큰 것으로 믿고 마을 사람들의 당제에 대한 의식은 적극적이고 깊은 편이다.제당의 형태형태 : 여타 마을과는 달리 제당이나 당산나무가 따로 없으며 당숲(젯산)이 제장이 된다. 소나무, 귀목, 잡목 등으로 이루어진 숲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기능 : 마을의 평안과 풍농, 풍어를 빌고 모든 잡귀, 병마를 쫓아내는 기능을 하며 아들 낳지 못하던 사람이 제주가 되어 정성껏 당제를 모신 다음에 아들을 낳은 일이 몇 차례 있어서 당산할머니의 영험이 큰 것으로 믿고 마을 사람들의 당제에 대한 의식은 적극적이고 깊은 편이다.특징 : 여수 세포리 당제는 堂祭를 올리는 날이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정월 보름 이내의 날이면 되지만 祭主의 생기에 맞은 날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그 해에 제주가 누구로 결정 되느냐에 따라 제일이 결정되는 것이다. 제주는 보통 아들 낳기를 원하는 부부로 자원하는 사람이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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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완도군 고금면 상정리 헌석제
    전남 완도군 고금면 상정리 헌석제           제명 : 헌석제신격 :제당 :일시 :상정리의 헌석제는 매해 정월 초이튿날에 거행된다. 제의는 세 곳에서 진행되는데, 제의를 진행하는 내내 풍물굿이 연행된다. 단지, 축문을 고축할 때만 풍물굿이 중단된다. 본 음성자료는 상정리 헌석제에서 축문을 읽는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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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완도군 생일면 서성리 당제
    전남 완도군 생일면 서성리 당제                  제명 : 당제신격 : 당할머니(마고할미)제당 : 마을 뒤 당숲 내의 당집일시 : 음력 1월 7~8일이 동영상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전남 완도군 생일면 서성리 당제제명 : 동제의 명칭을 당제 또는 당할머니 제사라고 한다.위치 : 제당은 마을 동쪽 면사무소를 기점으로 조금 올라간 백운산 끝자락의 당숲이다.내용 : 제사 외에도 12당산굿이 중요한 의례로 작용한다.제작의도 : 본 영상은 엄숙학 제의와 축제적 신명을 분출하는 풍물굿, 두 가지에 주목하여 제작하였다.완도군 생일면 서성리 마고할미지역 : 전남 완도군 생일면명칭 : 마고할미신격 : 마고할머니는 말을 키우던 할머니였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당집 안에 말 모양의 조각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또한 백운산에 올라가 보면 말을 기르던 곳이 남아 있고 성처럼 돌이 쌓여있는데, 그것은 마고할머니가 치마에다 돌을 싸서 청산도로 건너가려고 하다가 치마에서 흘러내린 돌들의 흔적이라고 한다.개괄동제의 명칭을 당제 또는 당할머니 제사라고 한다. 제당은 마을 동쪽 면사무소를 기점으로 조금 올라간 백운산 끝자락의 당숲이다. 당숲안에는 제를 모시는 당집과 제물 준비를 하고 제를 지내기 위해 집사들이 기거하는 건물이 있다. 당집은 한 칸 슬라브지붕으로 된 건물이다. 예전에는 기와였으나 다시 개축을 하면서 슬라브지붕으로 지었다. 당제에서 모셔지는 분은 당할머니다. 당할머니를 마구할머니라고도 한다. 마구할머니는 말을 키우던 할머니였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당집 안에 말 모양의 조각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또한 백운산에 올라가 보면 말을 기르던 곳이 남아 있고 성처럼 돌이 쌓여있는데, 그것은 마구할머니가 치마에다 돌을 싸서 청산도로 건너가려고 하다가 치마에서 흘러내린 돌들의 흔적이라고 한다.제의내용당제의 준비당제는 음력 정월 9일날 새벽 4시경에 지낸다. 당제의 준비는 음력 섣달 그믐날 마을회의에서 제관을 선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제를 지내는 사람을 당주, 집사라고 부른다. 당주는 제물 만드는 일을 담당하고 집사들은 제를 진행하는 역할을 한다. 당주는 1명을 선출하는데 유고가 없고 생기복덕이 맞는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한다. 당조로 선정된 집을 당주집이라 하고 정월 초하루부터 금줄을 치고 치토(황토)를 놓아 잡인의 출입을 통제한다. 집사 역시 깨끗하고, 유고가 없는 사람으로 생기복덕을 보게된다.‘당제모실 회의’는 이장, 어촌계장, 3명의 주비장이 모여서 한다. 주비장은 동 ? 서 ? 중주비장이다. 당제모실 회의에서 당주와 집사가 결정이 되면 당사자를 찾아가 부탁을 한다. 올해 당주는 김석심(여, 59세), 집사는 이장석(남, 64세), 이훈우(남, 61세) 2명을 선정했다.당주집에는 왼새끼에 창지를 꽂아 금줄을 사립문에 치고, 영기를 사립문 양쪽에 세워놓는다. 그리고 치토(황토)를 양쪽으로 서너 곳에 놓아 잡귀와 잡인의 통행을 금한다. 그리고 큰 샘으로 가서 물을 퍼내고 청소를 한 후 금줄을 치고 그곳 역시 치토를 놓는다.제물은 당제 지내기 3일 전쯤 구입한다. 제물 구입은 마을 유지 중 깨끗한 사람이 해서 회관에 보관해 두었다가 당주가 제물 준비를 위해 당으로 올라갈 때 가져다 준다. 올해 제수는 당주가 직접 마량 장에서 3일전에 봐왔다. 제물을 사러 갈 때는 목욕재계를 하고 가서 가게 주인에게 목록을 주고 그것에 맞게 받아온다. 물건값을 달라는 대로 주고 오지만, 대부분 가게의 주인들은 제수라고 하면 자기 가게에 재수가 들어온다고 하여 더 좋은 것을 주고, 더 많이 주게 된다고 한다.제물은 과일 종류인 사과, 배, 대추, 밤, 은행, 곶감과 세 가지 과자, 고사리, 도라지, 숙주나물, 해초류 김, 생선 갈치, 동태를 사게 된다. 갈치와 동태는 당할머니 상에 진설할 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당할머니는 비린 생선과 육고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제상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제물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미역이다. 미역은 사지 않고 바다에서 직접 채취해 와서 사용한다. 미역은 주비장들이 당제 지내기 며칠 전에 당주집에 베어다 준다. 미역은 생으로 사용하지 않으므로 당주는 미역을 깨끗하게 손질하여 말려서 쓴다. 예전에는 당할머니 제사를 모신 후가 아니면 갯가의 해초류를 베어다 먹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전에 해다 먹은 사람은 혈변을 보거나 배앓이를 했다고 한다.-당제의 진행정월 9일 새벽 4시경 당제에 앞서 산제(산신제)를 먼저 지낸다. 당위 북서쪽에 ‘산신바구’가 있는데 그곳에서 산제를 지낸다. 집사는 당제를 지낼 제물에서 조금씩 덜어 함지박에 담고 다른 한 사람은 손전등을 들고 간다. 올해 산제는 두 명의 집사와 어촌계장이 지냈다. 산제를 먼저 지내는 것은 당할머니를 모시기 이전부터 존재한 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산제 후에 당할머니 제사를 지낸다. 당주가 마련해 놓은 제물을 가지고 나오면 집사들은 제물을 들고 당으로 올라간다. 당주는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마스크로 입을 가려 말을 하지 않는다. 당집 안에서는 상 하나에 제물을 진설하고 메는 2그릇을 올린다. 당할머니와 당할아버지에게 드리는 메라고 한다.당제를 지내는 순서는, 홀기 집사가 홀기를 들고 읽으면 다른 집사는 그대로 따라하는 방법으로 한다. 홀기의 순서대로 당제를 지내고 나면 소지를 올린다. 맨 처음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위해 올리고, 다음은 제물 준비를 하느라 고생한 당주, 집사, 마을 유지들 순으로 소지를 올린다. 올해는 조사자들의 소지까지 올려주었다.소지를 한 다음 음복을 하고 집사가 당집을 나오면 헌석을 하게 된다. 헌석은 따로 준비해둔 제물로 한다. 헌석하는 곳을 ‘헌석바탕’이라고 하는데 여러 곳에 해야 하기 때문에 몇 년 전부터 사람을 사서 하고 있다. 헌석바탕은 1곳인데 현재는 9곳만 하고 있다. 하지 않는 3곳은 고물샘, 용홀래고랑가샘, 또박 끝과 선창 끝 사이 팽나무 밑이다. 헌석을 하는 곳은 당 바로 밑에 있는 밭, 등너메, 마을 앞 바닷가, 어촌샘, 수협 앞, 팔팔선창, 느티나무, 짝지 사장나무, 독샘, 큰샘이다. 헌석을 할 때는 짚을 열십자로 놓고 그 위에 밥과 갈치 3도막, 미역 튀긴 것 등을 놓는다. 헌석을 하면서 매구를 친다.신격마부할미 : 마고할미, 마부할미라고도 부른다. 말을 기르는 할머니였다고도 한다. 키가 얼마나 크고 장사였던지 산 정상에 올라가면 마고할미가 모래를 치마에 쌓서 청산도로 가려다가 흘린 모래가 큰 바위 덩어리 만하게 성처럼 쌓아져 있다고 한다. 청산도로 가는 바다 밑에도 징검다리처럼 바위들이 있다고 전한다. 마을을 수호하고 풍요를 관장하며 해난사고가 나지 않도록 돌보는 해신이다.마신 : 신성시되는 동물이다. 놋쇠 만들어진 말이 한 쌍이 있다. 예전 말은 쇠가 삭아 현재는 조각만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은 조각을 말 새끼라고 한다.신화당제에서 모셔지는 분은 당할머니다. 당할머니를 마구할머니라고도 한다. 마구할머니는 말을 키우던 할머니였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당집 안에 말 모양의 조각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또한 백운산에 올라가 보면 말을 기르던 곳이 남아 있고 성처럼 돌이 쌓여있는데, 그것은 마구할머니가 치마에다 돌을 싸서 청산도로 건너가려고 하다가 치마에서 흘러내린 돌들의 흔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다 밑에도 청산도까지 큰 돌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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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당제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당제                 제명 : 당제신격 : 장보고대사(송징장군), 정연장군, 혜일대사제당 : 장좌리에는 두 개의 당이 있는데 하나는 장도의 당집이며, 다른 한 곳의 당은 귀목나무가 서 있는 사장거리이다.일시 : 음력 1월 15일이 동영상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당제제명 : 당제내용 : 장좌리의 당제는 풍물굿과 제사가 결합된 형태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의례적 특징을 보인다.제작의도 : 본 영상은 <풍물굿 +유교식제사>의 특징에 주목하여 제작하였다.전남 완도 장좌리 송징장군지역 : 전남 완도 장좌리명칭 : 송징장군특징 : 아직도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새벽 6시 정도에 장도에서 당제를 지내며 지금은 당제 중심의 축제로 발전하여 좋은 문화상품의 본보기가 되고 있으며 고려의 장보고 장군 및 삼별초 항쟁 때 완도에 머물면서 항쟁운동을 벌이며 지방민을 보살폈던 송징(宋徵) 장군 등을 추모하고 있다.이 동영상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당집지역 :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장좌리제명 : 당제제당 : 장좌리에는 두 개의 당이 있는데 하나는 장도의 당집이며, 다른 한 곳의 당은 귀목나무가 서 있는 사장거리이다.위치 : 장도는 해발 33m, 넓이 29,991평의 조그만 섬으로 당집은 마을 앞 2-300m 거리에 위치하며 섬의 정상에 후박나무와 동백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룬 속에 자리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마을 안 射場의 귀목나무거리로 堂樹로 불리운다.형태 : 장도의 당집은 동향으로 앉아 마을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다. 본래는 초가였으나 기와로 지붕을 바꾸고 크게 수리를 했다. 상량문이 皇紀 2600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는 일제시대인 1940년에 새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단칸 맞배기와집이며 바닥은 대청형이다. 다른 하나는 마을 안 사장의 귀목나무거리.좌정된 신격 : 판자로 짠 상이 세 개 놓여 있는데 가운데는 주신인 宋徵將軍, 우측은 鄭年將軍, 좌측은 혜일대사를 모시는 제상이다. 역사적인 인물을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당집은 오히려 성격상 儒式의 祠宇와 같다. 다른 하나 특기할만한 사실은 1982년부터 이곳에 새로 張保皐를 추가하여 모시고 있는 것이다. 당시 남도문화제에 이곳 堂祭가 출연하면서 이곳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로 그를 추배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후 계속해서 張保皐까지 4위의 당신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특징 : 전남의 당제는 역사적 인물 보다는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를 모시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나 장좌리의 당제는 특정의 역사적 인물을 당신으로 모신다는 데 특색이 있다. 宋徵將軍을 主神으로 하고, 鄭年과 慧日大師를 副神으로 하여 모시는데, 소위 祠堂格인 당집에서 매년 정월 보름에 合祭形式으로 제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문제는 부신인 鄭年과 慧日大師는 분명히 역사상의 실존 인물로 찾아지는 것에 반해서, 오히려 주신인 宋徵將軍의 경우는 역사 속에 감추어져 그 실체를 확인하기가 여간 어렵다는 것이다. 장좌리 당제에서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제당의 二重構造라 할 것이다. 宋徵을 비롯한 인물신을 모시는 당집이 하나의 제당이라면, 마을에 있는 堂樹들이 다른 하나의 신체로서 모셔지고 있어 제당의 편성이 복합적이다. 또 제를 모실 때 행하는 농악은 1차굿부터 12차굿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옛날의 군대의 진법 형식을 띠고 있어 軍鼓樂이라고도 불리운다.제의 소멸과 변천 : 아직도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새벽 6시 정도에 장도에서 당제를 지내며 지금은 당제 중심의 축제로 발전하여 좋은 문화상품의 본보기가 되고 있으며 고려의 장보고 장군 및 삼별초 항쟁 때 완도에 머물면서 항쟁운동을 벌이며 지방민을 보살폈던 송징(宋徵) 장군 등을 추모하고 있다.제작의도 : 단칸 맞배기와집이며 바닥은 대청형이다. 그 속에는 판자로 짠 상이 세 개 놓여 있는데 가운데는 주신인 宋徵將軍, 우측은 鄭年將軍, 좌측은 혜일대사를 모시는 제상이다.위치도 그렇고 건물의 이미지가 독립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데 그러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기둥을 받치고 있는 돌 이외에는 거의 곡선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음원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 이 음원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 이 음원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장좌리의 당제는 주신인 송징장군이 청해진 대사 장보고와 같은 인물로 추정되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본 음성자료는 당제를 마치고 소지를 올리면서 장군님께 소원을 비는 소리이다.개괄장좌리는 매해 음력 1월 15일 새벽 장보고 대사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당제의 주신이 장보고인 것으로 인해 전국적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다. 당제는 마을 앞에 있는 장도 정상에 있는 당집에서 지내는데, 건너갈 때는 물이 빠져 걸어서 올라가고, 마을로 돌아올 때는 밀물이 들어 배를 타고 건너온다. 장좌리의 당제와 당굿은 1995년 전남무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제의내용장좌리의 당제 준비는 정월 초사흗날부터 시작된다. 정월 초사흗날 마을 대동공회(大同公會)를 열어 제관과 제비, 당굿 칠 사람들을 선정한다. 이 회의에는 마을 어르신들과 책임자들이 참여하고,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그대로 시행한다.당주는 집사와 달리 매해 새로 선정한다. 이는 선정 기준이 매우 까다롭고 엄격하기 때문이다. 당주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친가는 물론 처가까지도 부정과 유고가 없어야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어린애가 있어도 안 된다. 또한 부인이 생리를 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주로 나이가 연만한 집의 부부를 선정한다.당굿 칠 사람에 대해서는 비교적 규제가 덜한 편이나 초상이나 출산 등의 유고가 있는 사람은 제외한다. 집안의 큰 유고가 있는 사람이 아닌 경우 참가할 수 있는데, 스스로 유고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굿을 칠 때 당집의 금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제비는 당공(堂貢)이라고 하며, 그 해 당제에 필요한 경비를 산출하여 호구전으로 걷는다.제일 새벽이 되면 당제를 지낼 사람들과 당굿을 칠 군중들은 갯벌위를 걸어서 장도로 이동한다. 당제는 해가 막 떠오르는 시각을 맞추어 제례가 시작된다. 당집이 동편을 향하고 있어서 멀리서 해가 뜨는 광경이 보였다. 당주와 집사, 이장이 당에 들어가 제례를 시작한다.제차는 유교식으로 진행되며, 가제(家祭)의 순서에 준해서 지낸다. 전체적인 제차를 보면, ‘設床 - 焚香 - 降神盃 - 讀祝 - 初獻 - 亞獻 - 終獻 - 燒紙 - 飮福 - 獻食 - 撤床’의 순이다.진설을 할 때까지 밖에서 쉬고 있던 군중들이 제를 시작할려면서부터 당집 앞마당에 도열하여 상쇠의 지시에 따라 당산굿을 치기 시작한다. 독축과 소지를 할 때만 굿을 잠시 그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제관들이 당신(堂神) 에게 절을 올릴 때는 굿을 치면서 서서 함께 目禮로 절을 올린다.음복이 끝난 후 철상을 하면서 각 상에서 음식을 조금씩 떼어 축문에 싸서 당집 옆 나무 그루터기 위에 놓았다. 여기서 헌식을 하고 절을 하는 사람은 군중의 대포수다. 헌식이 끝나면 당집 앞마당에 식판을 줄줄이 늘어놓고 거기에 갖가지 음식을 차례로 담는다. 장보고장군 부하인 군사들에게 거리밥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당제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올 때는 밀물이 들어 마을과 장도가 바다로 가로막힌다. 따라서 마을로 돌아올 때는 배를 타고 건너온다. 배를 타고 건너오면서 뱃굿을 친다. 마을로 돌아와서는 샘굿과 사장굿(당산굿), 마당밟이 등을 진행하고 마지막으로 파장굿을 치면서 모든 일정을 마무리 짓는다.제당의 형태위치 : 장도는 해발 33m, 넓이 29,991평의 조그만 섬으로 당집은 마을 앞 2-300m 거리에 위치하며 섬의 정상에 후박나무와 동백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룬 속에 자리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마을 안 射場의 귀목나무거리로 堂樹로 불리운다.형태 : 장도의 당집은 동향으로 앉아 마을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다. 본래는 초가였으나 기와로 지붕을 바꾸고 크게 수리를 했다. 상량문이 皇紀 2600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는 일제시대인 1940년에 새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단칸 맞배기와집이며 바닥은 대청형이다.다른 하나는 마을 안 사장의 귀목나무거리.좌정된 신격 : 판자로 짠 상이 세 개 놓여 있는데 가운데는 주신인 宋徵將軍, 우측은 鄭年將軍, 좌측은 혜일대사를 모시는 제상이다. 역사적인 인물을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당집은 오히려 성격상 儒式의 祠宇와 같다. 다른 하나 특기할만한 사실은 1982년부터 이곳에 새로 張保皐를 추가하여 모시고 있는 것이다. 당시 남도문화제에 이곳 堂祭가 출연하면서 이곳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로 그를 추배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후 계속해서 張保皐까지 4위의 당신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특징 : 전남의 당제는 역사적 인물 보다는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를 모시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나 장좌리의 당제는 특정의 역사적 인물을 당신으로 모신다는 데 특색이 있다. 宋徵將軍을 主神으로 하고, 鄭年과 慧日大師를 副神으로 하여 모시는데, 소위 祠堂格인 당집에서 매년 정월 보름에 合祭形式으로 제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문제는 부신인 鄭年과 慧日大師는 분명히 역사상의 실존 인물로 찾아지는 것에 반해서, 오히려 주신인 宋徵將軍의 경우는 역사 속에 감추어져 그 실체를 확인하기가 여간 어렵다는 것이다. 장좌리 당제에서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제당의 二重構造라 할 것이다. 宋徵을 비롯한 인물신을 모시는 당집이 하나의 제당이라면, 마을에 있는 堂樹들이 다른 하나의 신체로서 모셔지고 있어 제당의 편성이 복합적이다. 또 제를 모실 때 행하는 농악은 1차굿부터 12차굿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옛날의 군대의 진법 형식을 띠고 있어 軍鼓樂이라고도 불리운다.제의 소멸과 변천 : 아직도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새벽 6시 정도에 장도에서 당제를 지내며 지금은 당제 중심의 축제로 발전하여 좋은 문화상품의 본보기가 되고 있으며 고려의 장보고 장군 및 삼별초 항쟁 때 완도에 머물면서 항쟁운동을 벌이며 지방민을 보살폈던 송징(宋徵) 장군 등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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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해남군 황산면 징의마을 산신제
    전남 해남군 황산면 징의마을 산신제            제명 : 산신제(거리제), 용왕제신격 : 산신제(산신), 용왕제(용왕)제당 : 마을 입구, 마을 바닷가일시 : 음력 1월 14~15일이 동영상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해남 황산면 한자리 징의마을산신제제명 : 거리제일시 :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위치 : 특별한 제당이 없고 마을 산을 향해 제를 지낸다.내용 : 마을의 안녕을 위하고 家庭의 所望之事를 위한 거릿제를 모셔오고 있다. 특별한 제당이나 신격이 없어 거릿제라고도 하고, 마을 산을 향해서 제를 지내기 때문에 산신제라고도 한다.특징 : 최근 몇 년 전부터는 바닷가에서 용왕제도 지내고 있다. 특별한 제당이나 신격이 없어 거릿제라고도 하고, 마을 산을 향해서 제를 지내기 때문에 산신제라고도 한다. 마을에서 喪故가 있을 때는 마을을 위한 祭祀인지라 새로운 날을 택일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祭日이 가까워질 무렵에 짐승을 사냥하는 行爲까지도 금지시킨다.제작의도 : 본 영상은 풍물굿과 함께 진행되는 서남해 어촌의 의례적 특징에 주목하여 제작하였다.개괄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이면 마을의 안녕을 위하고 家庭의 所望之事를 위한 거릿제를 모셔오고 있다. 최근 몇 년 전부터는 바닷가에서 용왕제도 지내고 있다. 특별한 제당이나 신격이 없어 거릿제라고도 하고, 마을 산을 향해서 제를 지내기 때문에 산신제라고도 한다. 마을에서 喪故가 있을 때는 마을을 위한 祭祀인지라 새로운 날을 택일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祭日이 가까워질 무렵에 짐승을 사냥하는 行爲까지도 금지시킨다.제의내용거릿제를 주관하게 될 祭官은 祭日로부터 7일 전에 2人(큰제관, 작은제관)을 선출하게 된다. 이들 祭官들은 엄격하게 禁忌하는 것은 없으나 대소변시에는 반드시 목욕정성을 드려야 한다.祭官宅(큰제관)은 여타 다른 宅과 구별하기 위해서 旗(빨강, 파랑, 노란색의 천)를 세워 두어 깨끗지 못한 者들의 出入을 경계한다.실제로 祭祀(거릿제)가 시작되는 것은 자정부터인데 한두시간 전부터 동네 어른 4~5人이 큰제관댁으로 모여 祭官의 安否를 묻고 잠시 후 자정부터 지내게 될 祭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제관은 매우 착잡한 표정이었으며 問安次 들린 洞民들과는 비교적 대화를 꺼리는 느낌이 들었다.이윽고 밤 11시경에 祭官(큰제관)과 洞民들은 장구, 북, 꽹과리를 치며 작은제관대으로 가 역시 궁고를 치면서 작은제관을 위문하였다.제관댁에서의 농악이 모두 끝난 후 마을 里長과 큰제관은 이미 준비된 令旗 (가로 90cm×세로 50cm의 청색천에 적색띠를 한 旗를 4m의 竹竿에 달고 상부에는 함석의 枝槍을 부착한 旗)를 마을회관 좌우에 세웠는데 이때가 바로 자정이 되기 바로 전이었다. 令旗를 세워두는 것은 제사가 시작됨을 알릴 뿐만 아니라 祭場의 雜鬼 접근을 막는 의미도 있다한다. 그래서인지 令旗가 넘어지는 것은 마을에 좋지 못한 것으로 여겨 매우 견고하게 세워둔다. 한편 令旗뿐만 아니라 마을入口에는 ×字형으로 통나무를 세워 外部人의 出入을 삼가시킨다.모든 제사준비가 끝나면 자정부터 큰제관과 작은제관은 床을 차려 令旗를 세워둔 마을회관 앞 祭場에서 제를 모시게 된다. 이때 마을의 여러 다른 宅에서도 床을 차려 祭場에 진설하는데 이는 자신들의 가정을 위해서라고 한다. 물론 조금이라도 깨끗지 못하다고 생각될때는 상차림을 하지 않는다.제사는 큰제관과 작은제관에 의해서 실시되지만 진설되는 음식은 다양하며 또한 매년 진설되는 床의 數도 다르다. 이 마을 鄭福在(35)氏에 의하면 많을 때는 15~20床, 적을 때는 10床 내외라고 한다. 마을을 위한 제사라고 하지만 작게는 자신만을 위한 생각이 앞서기에 남보다 먼저 祭場에 상을 내놓는 것을 매우 흐뭇해하며 조금이라도 남보다 늦을 경우는 무척 서운해 한다. 이렇게 다투어 陳床되는 가운데 제사는 자정부터 이루어진다.祭儀는 엄격한 가운데 진행되며 두 분의 제관 외에는 일체 접근을 금한다. 그러기에 직접참여관찰을 하려했던 조사자도 祭儀과정만은 볼 수 없었다. 제의순서는 비교적 간단하여 제관댁의 진설음식을 중앙에, 일반 가정의 상차림은 좌우에 陳床된다. 큰제관에 의해 ?爵이 되고 祝文이 讀祝된다.그리고는 燒紙를 올리는데 맨처음 洞中소지, 洞長님소지, 中?靑年?小兒소지, 제관소지 順이다. 소지가 끝나면 자부어 올리고 제관의 拜로서 제사는 모두 끝이 난다.제사를 마친 제관은 진설했던 음식을 그대로 놔두고 歸家한다. 이는 다음날 아침부터 있게 될 ?食祭를 위해서이다. 2004년에 각 가정에서 내놓은 床은 6床이었다.지난밤 제관에 의해 마을의 거릿제는 끝이 나고 마을민들은 제관댁에 모여 ?食祭를 위해 복장을 통일하여 갈아입고 궁고를 치기 시작했다. 머리에는 고깔을 썼으며 몸에는 3색(빨강, 파랑, 노랑)띠를 둘렀다. 놀이를 하는 人員은 20여人으로 창부2人, 깽쇠2人, 징2人, 북2人, 장고2人, 나머지는 소고를 들었다. 궁고의 선두에 서게 될 창부는 허름한 검정옷에 자루를 등에 졌으며 궁고를 리더하는 설쇠(꽹쇠)는 상모를 쓰고 꽹과리를 쳤다. 상모를 착용한 자는 설쇠외에도 북과 장고를 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헌식제를 위한 준비가 완료되자 제관을 상징하는 旗를 앞세우고 제장으로 향하는데 골목길을 지날때도 계속하여 궁고를 친다. 궁고는 때와 장소에 따라 박자가 변화되는데 거리에서 行하는 굿을 질(길)굿이라 한다.오전 10시 궁고를 치는 마을민 20여人은 지난밤에 거릿제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헌식하게 된다. 처음에 1열 횡대로 늘어선 20여人의 궁고 놀이패들은 2拜를 올린 후 곧바로 헌식을 하였다. 헌식도 거릿제를 지냈던 제관(큰제관)과 창부2人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볏짚을 깔고 陳床했던 음식을 짚위에 부어 놓으며 음식 가운데에서도 과일이나 마른음식, 돼지고기는 창부가 지고 다니는 자루에 담았다.祭場에서의 헌식제를 마친 궁고 놀이패들은 마을 앞 속칭 짓산(젯산)에 올라가 한바탕 뛰어논 후 용왕님에게 두 번 절을 하고 下山하여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샘굿을 치며 호별방문을 하여 마당밟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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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 고창군 해리면 구동호마을 당산제와 영신당제(용왕제)
    전북 고창군 해리면 구동호마을 당산제와 영신당제(용왕제)                   제명 : 당산제, 영신당제(용왕제)신격 : 당산, 당할머니, 장군(임장군)제당 : 마을 내 세 곳의 당산(나무1, 입석2), 영신당(마을 서남쪽 바닷가)일시 : 음력 1월 3일, 2월 1일이 동영상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고창 구동호 영신당제제명 : 영신당제, 용왕제일시 : 일년에 두 번 마을 공동 제사를 지내는데 음력 정월 초사흘이면 당산제를, 음력 이월 초하룻날에는 용왕제(당할머니제사, 수리제, 수륙제, 용왕님네 제사)를 지낸다.위치 : 구동호마을의 당산은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큰 당산, 작은 당산으로 네 군데이다.내용 : 1970년 무렵 새마을 사업으로 인해 할머니 당산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건물이 들어 서 있다.제작의도 : 본 영상은 풍물굿과 함께 진행되는 당제의 의례적 특징과 선 상 헌석에 주목하여 제작하였다.고창 해리면 구동호 영신당 할머니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구동호마을명칭 : 영신당 할머니제명 : 당산제, 철륭제제당 : 영신당(고창에서 유일한 당집), 당산은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큰 당산, 작은 당산으로 네 군데였으나 현재 할머니 당산은 없어진 상태이다.신격 : 당집 안에는 들어가는 문 맞은편에 무신도 화상이 걸려 있다. 지금의 화상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중간에 분실되어 그 후 마을 사람이 다시 그려 놓은 것이라 한다. 현재 걸려있는 화상도에는 당할머니와 세 명의 딸이 그려져 있는데, 당할머니는 가운데 앉아 있고 딸들은 서 있다. 대체로 무섭기보다는 온화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따로 떨어져 있는 당할아버지 화상이 있다.이 동영상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구동호 영신당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구동호마을제명 : 당산제, 철륭제제당 : 영신당(고창에서 유일한 당집), 당산은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큰 당산, 작은 당산으로 네 군데였으나 현재 할머니 당산은 없어진 상태이다.위치 : 당집은 마을 한쪽으로 높다란 산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당집 앞으로 초소가 서 있고 그 주위로 철조망이 둘러져 있으며 당산은 마을 들어오는 입구 좌우로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이 있으며 마을 노인회관 안쪽으로는 큰 당산(철륭당산)과 선착장 쪽으로 언덕 위에 작은 당산이 위치한다.형태 : 당집은 세 칸 크기의 기와집으로 되어 있고 당집 주위로 담이 둘러져 있다. 당산의 형태는 나무와 입석이 한데 어우러진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나무는 팽나무이여 나무 앞에 1m 정도 높이의 입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큰 당산에는 팽나무만 있으며 입석은 없다. 그리고 작은 당산의 나무는 조그마한데 이는 그 전의 나무가 죽자 그 자리에서 다시 자란 나무이다.좌정된 신격 : 당집 안에는 들어가는 문 맞은편에 무신도 화상이 걸려 있다. 지금의 화상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중간에 분실되어 그 후 마을 사람이 다시 그려 놓은 것이라 한다. 당할머니와 세 명의 딸이 그려져 있는 화상 한 점과 따로 떨어져 있는 당할아버지 화상이 있다.제작의도 : 영신당은 세 칸 크기의 기와집으로 되어 있는 간결한 건물이다. 그래서 건물의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였고, 내부의 그림을 표현하였다.전라북도 고창군 구동호마을 당집제명 : 당산제, 철륭제제당 : 영신당(고창에서 유일한 당집), 당산은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큰 당산, 작은 당산으로 네 군데였으나 현재 할머니 당산은 없어진 상태이다.위치 : 당집은 마을 한쪽으로 높다란 산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당집 앞으로 초소가 서 있고 그 주위로 철조망이 둘러져 있으며 당산은 마을 들어오는 입구 좌우로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이 있으며 마을 노인회관 안쪽으로는 큰 당산(철륭당산)과 선착장 쪽으로 언덕 위에 작은 당산이 위치한다.형태 : 당집은 세 칸 크기의 기와집으로 되어 있고 당집 주위로 담이 둘러져 있다. 당산의 형태는 나무와 입석이 한데 어우러진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나무는 팽나무이여 나무 앞에 1m 정도 높이의 입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큰 당산에는 팽나무만 있으며 입석은 없다. 그리고 작은 당산의 나무는 조그마한데 이는 그 전의 나무가 죽자 그 자리에서 다시 자란 나무이다.좌정된 신격 : 당집 안에는 들어가는 문 맞은편에 무신도 화상이 걸려 있다. 지금의 화상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중간에 분실되어 그 후 마을 사람이 다시 그려 놓은 것이라 한다. 당할머니와 세 명의 딸이 그려져 있는 화상 한 점과 따로 떨어져 있는 당할아버지 화상이 있다. 이 음원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개괄구동호마을은 일년에 두 번 마을 공동 제사를 모신다. 음력 정월 초사흘이면 당산제를 모시고, 음력 이월 초하룻날에는 용왕제(당할머니 제사, 수리제, 수륙제, 용왕님네 제사)를 모신다. 구동호마을의 당산은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큰 당산, 작은 당산으로 네 군데이다. 그러나 1970년 무렵 새마을 사업으로 인해 할머니 당산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건물이 들어 서 있다.제의내용제신(祭神)과 제당(祭堂)당산의 위치는 마을 들어오는 입구 좌우로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이 있으며 마을 안쪽으로 큰 당산과 작은 당산이 위치한다. 큰 당산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 노인회관 뒤쪽에 자리하며 ‘철륭당산’이라고 부른다. 큰 당산이라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나무가 오래되고 가장 큰 나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작은 당산은 선착장 쪽으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당산의 형태는 나무와 입석이 한데 어우러진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나무는 팽나무이며 나무 앞에 1m 정도 높이의 입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큰 당산에는 팽나무만 있으며 입석은 없다. 그리고 작은 당산의 나무는 조그마한데 이는 그 전의 나무가 죽자 그 자리에서 다시 자란 나무라 한다.한편 구동호마을은 고창에서 유일하게 당집이 있으며 위치는 마을 한쪽으로 높다란 산 위에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당집에서 바라보면 칠산바다가 한눈에 펼쳐졌으나, 지금은 당집 앞으로 초소가 서 있고 초소 주위로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그래서 당집에서 바라본 칠산바다는 반쯤 가려져 보인다.당집은 세 칸 크기의 기와집으로 되어 있고, 당집 주위로 담이 둘러쳐져 있다. 당집 뒤편으로는 널따란 공터가 있는데, 용왕제 모실 때 공터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놀던 곳이기도 하다. 당집 내부 천정에는 ‘崇禎紀元後四周辛酉 八月 二十七日 癸夫年時 上樑’이라는 상량문이 적혀 있다.당집 안에는 들어가는 문 맞은편에 무신도 화상이 걸려 있다. 지금의 화상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중간에 분실되어 그 후 마을 사람이 다시 그려 놓은 것이라 한다. 최사자 제보자에 따르면, 전라남도 사람이 풍랑을 만나 피신해 왔다가 화상을 훔쳐갔다고 한다. 그리고 화상에는 당할머니와 딸이 함께 그려져 있고, 당할아버지는 따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현재 걸려있는 화상도에는 당할머니와 세 명의 딸이 그려져 있는데, 당할머니는 가운데 앉아 있고 딸들은 서 있다. 대체로 무섭기보다는 온화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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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제주시 북제주군 추자면 대서리 거리제와 최영장군사당
    제주 제주시 북제주군 추자면 대서리 거리제와 최영장군사당              제명 : 거리제/장군제신격 : 사해용왕/祖國都統大將崔將軍神位(조국도통대장최장군신위)제당 : 마을 주변/최영장군사당일시 : 음력 섣달 그믐제주시 북제주군 추자면대서리 최영장군사당지역 : 제주시 북제주군 추자면 대서리 155번지 최영장군사당제명 : 장군제제신 : 祖國都統大將崔將軍神位제당 : 최영장군사당위치 : 최영(崔瑩. 고려 충숙왕 3년 약 1316년 ∼ 우왕 14년 약 1388년)장군 사당은 상추자도에 있는 대서초등학교 북서쪽 벼랑 위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 입구에는 「최영사당금표(崔瑩祠堂禁標)」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의 앞면에는 「신묘금지비(神廟禁地碑)」라 음각되어 있으나 측면의 글자는 많이 마멸되어 있으며 사당 안에는 「조국군통대장최영장군(朝國郡統大將崔瑩將軍)」이라 한 신위가 안치되어 있다.형태 : 현재의 사당은 1974년에 복원된 건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이고 평면과 전면칸은 퇴칸처럼 좁게 나눈 것이다. 원뿔형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납도리를 돌렸으나 중도리, 종도리는 굴도리이다. 보아지는 곡면으로 장식되고 겹처마에 합각지붕이다. 심벽에다 외부로 돌로 쌓은 벽은 노출된 전면 외진주 밖까지 돌출시켜 기둥을 보호하게 했다. 전면에는 세살문을 달아 개방시켰고 내부 주칸에는 신위가 설치되어 있다. 바닥은 콘크리트 바닥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모로단청이 되어 있다. 사당 밖으로는 자연석으로 높은 담장을 둘렀다.좌정된 신격 : 사당 내에는 최영장군의 신위와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최영장군사당이 추자도에 세워지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고려 공민왕 23년 탐라에서 제주도에 머물고 있던 몽고인 목자들이 고려 말 대륙의 정세 변화에 따른 불안감으로 횡포를 부리자 정부에서는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케 하였는데 이 때, 장군은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도중 심한 풍랑으로 공민왕 23년 8월 24일부터 28일까지 추자도에서 후풍(候風)하였으며, 목자들을 토벌하고 돌아갈 때에도 같은 해 9월 23일부터 10월 10일 까지 추자도에 머물러 있었다.그런데 이 때에 추자도 금산곶에서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추자도 백성들에게 어망을 만들어서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생활에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으므로 이곳 주민들이 이러한 장군의 은덕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지어 매년 백중일과 음력 12월 그믐에 제사를 지내며 모시게 되었다는 배경과 한편으로 추자도는 고려 말 이래 왜구의 침입을 자주 받아 그 고통이 컸기 때문에, 고려 말 왜구 토벌에 공로가 많았던 장군의 사당을 지어 모심으로써 왜구로부터의 환란을 면해보려는 국토수호신적 의미에서 세워졌으리라는 것이다.특징 : 대서리(大西里)는 김상헌의 남사록에 신도(身島)라고 기록한 상추자에 동남향으로 앉아 있는 포구마을로 지금도 뒷산에 최영장군의 사당이 자리 잡고 있지만, 조선시대의 기록에 이미 여기에 토당(土堂)이 있어 후풍하던 뱃사람들이 바람 자기를 이 당에 빌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최영장군사당이 장군신으로서의 영웅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최영장군이 아닌 국토수호적인 의미와 마을 주민들의 바다에서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존재로 신격화되어 있다.제의 소멸과 변천 :추자도에 1950년대부터 교회가 들어서기 시작해서 지금은 매 마을마다 교회가 서 있고, 천주교 공소도 세워져 있으나 아직도 이 섬 사람들의 의식은 다분히 다신적(多神的)이다. 이는 이곳 사람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하고, 딴 지방에 비해 무속의례에 대해서도 관대한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이 같은 현상은 이 섬의 자연이 대단히 험난하고, 죽고 사는 것을 자연(바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을 오랫동안 겪으면서 터득하였을 것이다. 현재 추자 각 마을마다의 유식, 무식 의례는 거의 자취만 남고, 그 중 뚜렷하게 남아 있는 제는 최영장군 사당에서 거의 해마다 드리는 풍어제와 장군제 뿐이다. 이 음원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추자도에서는 마을단위로 정초에 고기부르기를 한다. 이른 거리제라고도 부른다. 이때 마을 뒷산 절벽에 올라가서 고기를 부르는 소리를 한다.개괄음력 섣달 그믐날, 정월 대보름 두 차례 '고기불러온다' 라고 칭하는 바다 갯제를 모시며 이는 풍물과 함께 거릿제, 걸궁이라고 한다. 또한 정월 초하루날 오후 2시 정도에는 마을의 평안과 풍어, 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신밟기'를 하고 있다.제의내용음력 섣달 그믐날, 정월 대보름 두 차례 '고기불러온다' 라고 칭하는 바다 갯제를 모시며 이는 풍물과 함께 거릿제, 걸궁이라고 한다. 또한 정월 초하루날 오후 2시 정도에는 마을의 평안과 풍어, 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신밟기'를 하고 있다. 고기부르는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음식은 하지 않고 제주가 올라가서 축문을 읊으며 포수의 음성 주관 하에 제를 지낸다. 그리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 마을굿을 한 다음에 해산한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정월 초 하루날 오후 2시경에 지신밟기를 한다.음력 2월 1일 - 10일 사이 '최영장군사당제' 를 모시고 있으나 현재는 수협이 주관하는 '풍어제'를 양력 8월 초에 실시한다. 따로 지정은 되어 있지 않으며 어민들이 어장 일이 끝난 비수기 때 시행하고 있음. 그리고 '최영장군제'를 풍어제 전날 2005년도는 양력 7월 말일날 행함.제당의 형태위치 : 최영(崔瑩. 고려 충숙왕 3년 약 1316년 ∼ 우왕 14년 약 1388년)장군 사당은 상추자도에 있는 대서초등학교 북서쪽 벼랑 위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 입구에는 「최영사당금표(崔瑩祠堂禁標)」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의 앞면에는 「신묘금지비(神廟禁地碑)」라 음각되어 있으나 측면의 글자는 많이 마멸되어 있으며 사당 안에는 「조국군통대장최영장군(朝國郡統大將崔瑩將軍)」이라 한 신위가 안치되어 있다.형태 : 현재의 사당은 1974년에 복원된 건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이고 평면과 전면칸은 퇴칸처럼 좁게 나눈 것이다. 원뿔형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납도리를 돌렸으나 중도리, 종도리는 굴도리이다. 보아지는 곡면으로 장식되고 겹처마에 합각지붕이다. 심벽에다 외부로 돌로 쌓은 벽은 노출된 전면 외진주 밖까지 돌출시켜 기둥을 보호하게 했다. 전면에는 세살문을 달아 개방시켰고 내부 주칸에는 신위가 설치되어 있다. 바닥은 콘크리트 바닥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모로단청이 되어 있다. 사당 밖으로는 자연석으로 높은 담장을 둘렀다.좌정된 신격 : 사당 내에는 최영장군의 신위와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최영장군사당이 추자도에 세워지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고려 공민왕 23년 탐라에서 제주도에 머물고 있던 몽고인 목자들이 고려 말 대륙의 정세 변화에 따른 불안감으로 횡포를 부리자 정부에서는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케 하였는데 이 때, 장군은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도중 심한 풍랑으로 공민왕 23년 8월 24일부터 28일까지 추자도에서 후풍(候風)하였으며, 목자들을 토벌하고 돌아갈 때에도 같은 해 9월 23일부터 10월 10일 까지 추자도에 머물러 있었다.그런데 이 때에 추자도 금산곶에서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추자도 백성들에게 어망을 만들어서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생활에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으므로 이곳 주민들이 이러한 장군의 은덕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지어 매년 백중일과 음력 12월 그믐에 제사를 지내며 모시게 되었다는 배경과 한편으로 추자도는 고려 말 이래 왜구의 침입을 자주 받아 그 고통이 컸기 때문에, 고려 말 왜구 토벌에 공로가 많았던 장군의 사당을 지어 모심으로써 왜구로부터의 환란을 면해보려는 국토수호신적 의미에서 세워졌으리라는 것이다.특징 : 대서리(大西里)는 김상헌의 남사록에 신도(身島)라고 기록한 상추자에 동남향으로 앉아 있는 포구마을로 지금도 뒷산에 최영장군의 사당이 자리 잡고 있지만, 조선시대의 기록에 이미 여기에 토당(土堂)이 있어 후풍하던 뱃사람들이 바람 자기를 이 당에 빌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최영장군사당이 장군신으로서의 영웅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최영장군이 아닌 국토수호적인 의미와 마을 주민들의 바다에서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존재로 신격화되어 있다.제의 소멸과 변천 :추자도에 1950년대부터 교회가 들어서기 시작해서 지금은 매 마을마다 교회가 서 있고, 천주교 공소도 세워져 있으나 아직도 이 섬 사람들의 의식은 다분히 다신적(多神的)이다. 이는 이곳 사람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하고, 딴 지방에 비해 무속의례에 대해서도 관대한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이 같은 현상은 이 섬의 자연이 대단히 험난하고, 죽고 사는 것을 자연(바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을 오랫동안 겪으면서 터득하였을 것이다. 현재 추자 각 마을마다의 유식, 무식 의례는 거의 자취만 남고, 그 중 뚜렷하게 남아 있는 제는 최영장군 사당에서 거의 해마다 드리는 풍어제와 장군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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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 삼척시 원덕읍 갈남2리 신남마을 성황제
    강원 삼척시 원덕읍 갈남2리 신남마을 성황제          제명 : 성황제신격 : 남성황(엄씨할아버지), 여성황(처녀)제당 : 남성황당(마을 입구 산자락), 여성황당(마을 뒤 산자락 끝부분)일시 : 음력 1월 14일~15강원 삼척 해신당 여성황(처녀)지역 : 강원도 삼척시 갈남리명칭 : 여성황제명 : 해신제신격 : 해신당의 주신격인 처녀에 대해서는 애바위와 관련된 전설이 전하는데 이 마을에 사는 처녀 총각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처녀는 매일 바다에 나가서 해초를 뜯어 왔는데 그 때마다 총각이 뗏목으로 애바위까지 태워주곤 하였다. 총각이 육지에 돌아와 있는 동안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 닥치고 파도가 거세게 일어나 처녀가 휩싸여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 바위를 애바위라고 하는데 이후에 고기가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관련설화 : 어느 날 마을 어부의 꿈에 처녀귀신이 바다 속에서 나타나기에 그 곳에 가니 처녀의 시체가 물에 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육지에서 장사를 지내 주었더니 풍어가 되었다 한다. 처녀의 시체를 건진 해변가 근처에 향나무가 있으므로 이 나무에 처녀의 신을 모셔 놓고 매년 제사를 지내다가 해신당을 짓고 제사를 올린다. 처녀의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낼 때 처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남자가 필요하므로 남자의 상징인 남근을 깎아 바치고 풍어와 안전을 기원한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매년 남자들이 정성껏 향나무로 남근을 깎아 바치는 것이 중요한 의례가 되었다.해신당에는 ‘옛날에 청춘남녀가 해신당 북쪽 애바위란 곳으로 놀러간 후 남자가 여자를 그곳에 내려놓고 잠시 집으로 와 일을 하다가 다시 애바위로 가려고 했다. 데리려 가려고 하자 마침 큰바람이 불어와 배를 띄우지 못하게 되었고, 처녀는 그곳에서 날 실으러 오라고 애를 쓰며 소리치다가 기진맥진하여 숨을 거두었다. 그 후 언젠가 어업이 잘 되지 않던 한 어부가 그곳에서 우연히 오줌을 갈긴 후 꿈에 한 여인이 나타나 현몽을 하여, “네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처녀신과 남근봉헌 이야기지역 : 강원도 삼척시 신남마을줄거리 : 애바위 전설은 마을에 사는 처녀 총각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로 처녀는 매일 바다에 나가 해초를 뜯는데 총각이 뗏목으로 애바위까지 데려다 주었다. 하루는 총각이 육지로 돌아오는 동안 폭풍우가 닥쳐 처녀가 그만 죽고 말았다. 그 후부터 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어느 날 어부의 꿈에 처녀귀신이 바다 속에 나타나 그 곳에 가보니 처녀의 시신이 떠올라 장사지내주니 풍어가 되었다. 매년 남자들이 향나무로 남근을 깎아 바쳤다.등장인물 소개* 처녀신 - 20대 섬 처녀. 생활력이 강하고 예쁜 얼굴. 한복을 입었음. 해초를 뜯으러 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죽었는데 신으로 좌정되었음.* 총각 - 20대 섬 총각. 처녀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 어부 - 40대.배 경(1) 시대 : 옛날(2) 공간 : 섬마을, 바다 가운데 있는 바위, 절벽에 있는 해신당(3) 지역 :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2리 신남마을분 류 : 풍어의 여신애니메이션 시나리오 :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오늘 출항을 합니다. 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십시오.”사람들이 오늘도 해신당에 향나무로 남근을 깎아 바치며 기원을 합니다.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2리 해신당에 남근을 봉헌하게 된 유래가 있답니다. 옛날 옛날에 이 마을에 서로 사랑하는 처녀와 총각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성실하고 누구보다 부지런했습니다. 처녀는 매일 바다 가운데 바위로 해초를 뜯으러 다녔습니다. 총각이 날마다 배로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했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아. 좋은 미역을 많이 뜯을 수 있겠어.”“그럼 오늘은 빨리 데리러 올게.”총각은 처녀를 바위에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점심때가 지나 총각은 처녀를 데리러 가려고 바닷가에 배를 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바람이 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가 큰일 나겠네. 빨리 가야겠군.”총각이 배에 오르려고 하자 바닷가에서 집으로 돌아가려던 사람들이 총각을 막았습니다.“지금은 안 되네. 조금 기다려 보세.”총각은 잠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한차례 몰려오다 그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빗줄기는 굵어지고 파도는 거칠어졌습니다.“이러다가는 정말 안 되겠어요. 절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가봐야겠어요.“안돼. 그러다 자네 큰일 나.”마을 사람들은 총각이 배를 타지 못하도록 붙들었습니다. “제발 가게 해주세요. 제가 가지 않으면 파도에 휩쓸러 죽게 될지도 몰라요. 가야 됩니다.”총각이 애걸을 했지만 마을 어른들은 막아섰습니다.비바람은 저녁이 되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날씨는 언제 그랬느냐싶게 화창하게 개었습니다. 총각은 얼른 배를 탔습니다. 처녀가 제발 무사하기를 빌었습니다.총각이 바위에 도착하자 처녀는 오간 곳이 없었습니다. 총각은 바위에서 목 놓아 처녀를 불렀습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총각은 힘없이 돌아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때부터 사람들은 처녀가 해초를 뜯다 파도에 휩쓸러간 바위를 애바위라 불렀습니다. 처녀가 죽고 난 다음부터는 마을사람들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면 고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배사고도 잦았습니다. 어느 날 한 어부의 꿈에 처녀가 나타나 향나무에서 자기를 위해 제사를 지내달라고 했습니다. 어부는 정성껏 제물을 장만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부는 실망하고 주막에 들러 술을 마셨습니다.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어부는 화가 나서 향나무에 대고 오줌을 쌌습니다.어부는 다음 날 고기가 잡히지 않지만 또 다시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어부는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다른 날과 별다른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향나무에 오줌을 쌌던 것이 생각났습니다.어부는 마을 사람들과 의논하여 해신당을 짓고 처녀의 원혼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향나무로 남근을 깎아 받쳤습니다. 그 뒤부터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배마다 만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아들 낳기를 바라면 남근을 깎아 처녀 신에게 받쳤습니다. 고기를 잡으러 갈 때도 남근을 깎아서 바쳤습니다.이 동영상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 해신당지역 :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신남마을제명 : 해신제제당 : 해신당 (죽은 처녀를 서낭으로 모시는 당), 본성황당 (마을의 남성황당)위치 : 신남마을(섶내미마을) 산기슭에 큰당이라 불리우는 ‘본서낭당’ 이 위치하며 해신당은 마을 뒤쪽을 북쪽에서 감싸고 있는 산의 끝자락에 그 모양이 마치 남근의 뿌리처럼 생긴 곳에 위치한다.형태 : 해신당은 기와지붕에 정면은 넉넉한 한 칸으로 약 3미터쯤 되며 측면은 두 칸이고 이 역시 3미터 정도로 충효각 형태의 건물이다.좌정된 신격 : 해신당의 주신격인 처녀(애바위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짐)와 마을시조인 엄씨할아버지를 모시는 남성황당특징 : 안인진리의 해랑당 설화, 주문진 진이서낭당 설화, 삼척 해신당 설화는 동해안의 서낭설화의 모체를 이루고 있으며 해신제는 동해안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제의로 지금도 남근봉헌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제사는 두 성황당에서 동시에 지내는데 5명의 제관 중 세 명은 남성황당으로 가고 두 명은 해신당에 가서 제를 올린다. 마을의 남성황당은 본성황당이라고 하는데 마을시조인 엄씨할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며 해신당은 죽은 처녀를 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향나무로 깎은 남근을 바치고 있다.제의 소멸과 변천 : 지금은 관광문화상품으로 발전하여 해신당 공원이 조성되어 해신당 이외에도 어촌민속전시관, 대형남근조각품들이 설치되어 있고 바다에는 애랑낭자가 재현되어 있어 흥미와 이색적인 볼거리가 되고 있으며 어촌민속전시관에는 성(性)을 소재로 한 성민속실이 눈길을 끈다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2리 해신당지역 :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2리 신남마을제명 : 해신제제당 : 해신당 (죽은 처녀를 서낭으로 모시는 당), 본성황당 (마을의 남성황당)위치 : 신남마을(섶내미마을) 산기슭에 큰당이라 불리우는 ‘본서낭당’ 이 위치하며 해신당은 마을 뒤쪽을 북쪽에서 감싸고 있는 산의 끝자락에 그 모양이 마치 남근의 뿌리처럼 생긴 곳에 위치한다.형태 : 해신당은 기와지붕에 정면은 넉넉한 한 칸으로 약 3미터쯤 되며 측면은 두 칸이고 이 역시 3미터 정도로 충효각 형태의 건물이다.좌정된 신격 : 해신당의 주신격인 처녀(애바위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짐)와 마을시조인 엄씨할아버지를 모시는 남성황당특징 : 안인진리의 해랑당 설화, 주문진 진이서낭당 설화, 삼척 해신당 설화는 동해안의 서낭설화의 모체를 이루고 있으며 해신제는 동해안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제의로 지금도 남근봉헌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제사는 두 성황당에서 동시에 지내는데 5명의 제관 중 세 명은 남성황당으로 가고 두 명은 해신당에 가서 제를 올린다. 마을의 남성황당은 본성황당이라고 하는데 마을시조인 엄씨할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며 해신당은 죽은 처녀를 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향나무로 깎은 남근을 바치고 있다.제의 소멸과 변천 : 지금은 관광문화상품으로 발전하여 해신당 공원이 조성되어 해신당 이외에도 어촌민속전시관, 대형남근조각품들이 설치되어 있고 바다에는 애랑낭자가 재현되어 있어 흥미와 이색적인 볼거리가 되고 있으며 어촌민속전시관에는 성(性)을 소재로 한 성민속실이 눈길을 끈다개괄신남리 해신제는 동해안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제의로 지금도 남근봉헌(phallicism)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을의 남성황당은 본성황당이라고 하는데 마을시조인 엄씨할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며 해신당은 미역을 따다가 죽은 처녀를 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향나무로 깎은 남근을 바치고 있다. 제사는 정월 대보름과 시월 첫 말날에 지낸다. 제사는 두 성황당에서 동시에 지내는데 5명의 제관 중 세 명은 남성황당으로 가고, 두 명은 해신당에서 가서 제를 올린다. 제물은 쇠고기와 어물을 주로 쓰고 어촌계에서 경비를 마련한다.제의내용해신제는 본당(엄씨 할아버지 서낭당)에 먼저 가 축을 읽으며 제를 올린다. 그 후 제물을 당주 집으로 철수한 후, 다시 제물을 차려 해신당 (작은당)으로 가서 제를 올린다(축이 없음). 걸리는 시간은 보통 4시간여가 소요된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당주 포함 제관은 7명이었고 남근도 7개를 깎았다. 정월대보름과 10월 첫 번째 말일(午日)에 해신제를 올리는데, 부정을 치기 위하여 금줄을 1주일 전부터 친다. 금줄에는 창호지 개수를 홀수로 하여 같이 묶고, 또 황토를 그 앞에 70㎝ 간격으로 놓는데 그것도 홀수로 놓는다. 제관은 생기를 보아 1주일 전쯤 선출하고, 선출된 제관 중에서 남녀 부부가 모두 생기에 맞는 부부 한 쌍을 선정하여 당주로 삼고 당주 집에서 제물을 장만한다.당주가 된 두 내외가 제물을 만지는데 여자는 메(밥)만 만질 수 있고, 나머지 제물은 모두 남자가 장만한다. 어물은 이 마을에서 잡히는 것은 모두 올리는데 어물의 꼬리는 다듬어 올린다. 제물은 풍성하게 하여 송아지도 한 마리 잡았다. 편(떡)은 서되 서 홉을 하는데 반드시 백설기만 사용했다. 제주는 금줄을 칠 때 본당 아래 쌀 3되와 누룩으로 담가 제사 당일 사용했다. 제가 끝나면 당주 집에 모여 음복을 한다. 아침이 되면 마을주민들이 당주 집으로 와서 아침을 같이한다. 제에 올렸던 소고기를 미역과 같이 국을 끓여 대접한다. 또 소고기는 꼬치를 만들어 집집마다 나눠주었다.신격처녀신 : 처녀신은 빨간 치마에 초록색 저고리를 입고 머리는 쪽을 지었다. 손은 앞에 모으듯이 되어 있는데 왼손은 약간 아래로 내려져 있고 오른손은 마치 무엇을 쥐고 있는 듯이 하고 있다. 처녀신은 해신당의 주신이며 재난을 막고 풍어를 관장하는 여신으로 남근을 봉헌 받고 있다.신화마을에 사는 처녀 총각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로 처녀는 매일 바다에 나가 해초를 뜯는데 총각이 뗏목으로 애바위까지 데려다 주었다. 하루는 총각이 육지로 돌아오는 동안 폭풍우가 닥쳐 처녀가 그만 죽고 말았다. 그 후부터 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어느 날 어부의 꿈에 처녀귀신이 바다 속에 나타나 그 곳에 가보니 처녀의 시신이 떠올라 장사지내주니 풍어가 되었다. 매년 남자들이 향나무로 남근을 깎아 바친다제당의 형태남근장승지금은 관광문화상품으로 발전하여 해신당 공원이 조성되어 해신당 이외에도 어촌민속전시관, 대형남근조각품들이 설치되어 있고 바다에는 애랑낭자가 재현되어 있어 흥미와 이색적인 볼거리가 되고 있으며 어촌민속전시관에는 성(性)을 소재로 한 성민속실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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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당고사
    경기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당고사  제명 : 당고사신격 : 서낭제당 : 당목(홰나무 고목군), 당집(터주가리형태)일시 : 음력 10월과 동짓달 중 택일개괄홰나무 고목군이 당목인데 터주가리형 당집이 바다가 보이는 동산 위에 서있다. 당집은 화성지역에서 발견된 매우 톡특한 귀틀집 형식의 터주가리형 당집으로 초가집 모습이다. 당집 안에는 길지가 모셔져있으며 신격은 서낭이라고 부른다.제의내용고온리는 매향리 포구가 있던 고온포로 삼괴반도의 끝이다. 어업이 활성화된 곳이었으나 미군부대 사격장이 들어서서 어업의 피해가 심한 곳이다. 수원백씨-천안김씨가 주성인 동족마을로 약 150여호다.① 제명: 당고사② 당명 및 신격홰나무 고목군이 당목인데 터주가리형 당집이 바다가 보이는 동산 위에 서있다. 당집은 화성지역에서 발견된 매우 톡특한 귀틀집 형식의 터주가리형 당집으로 초가집 모습이다. 당집 안에는 길지가 모셔져있으며 신격은 서낭이라고 부른다.③ 제일 및 제주음력 10월이나 동짓달에 길일을 택하여 지내며 사람이 죽거나 아기가 태어나는 등 부정이 생기면 연기한다. 제주는 당주 1인을 뽑으며 도와주는 이가 3~4인 선출된다.④ 제비 및 제물제비는 가가호호 갹출하며 일단 동네경비로 간단하게 쓰고 나서 뒤에 결산한다(예전에는 당주집에서 먼저 경비를 쓰고 셈을 보았다고 함). 제수거리는 당주집에서 준비한다. 소머리, 삼색실과, 떡(백설기), 북어를 올리며, 메는 없고 술은 농주로 올린다. 예전에는 소를 조암장에서 한 마리씩 잡아다 썼던 큰고사이나 차츰 쇠락하여 소머리를 쓰며 삼색실과,떡,북어 따위를 올린다.⑤ 제차미리 당집을 청소해두고 밤 10시경에 당주 외에 2~3인 정도 도와줄 사람과 깨끗한 노인네들을 모시고 산으로 간다. 제물은 진설하고 절을 한 후 백지소지를 올려줌으로써 끝난다. 축은 없으며 마을에서 배 부리는 사람들이 올릴 길지를 당집 안에 새롭게 걸어둔다. 이튿날 아침에 당주집에서 쇠고기를 집집마다 분배하며, 남은 고기로 국을 끓여 죽을 나누는데 예전에는 매우 큰 동네잔치였으며, 이를 ‘당잔치’라고 부른다.2002년 재조사에서 우물고사가 확인되었다. 당우물이 있어서 우물고사를 먼저 지낸다. 이 때는 쇠고기만 제물로 놓는데 주로 안심류를 사용하며 익히지 않고 생으로 놓는다. 술은 막걸리를 쓰고 당제 지내기 전에 절을 한다. 우물고사 때 썼던 제물은 음복할 때 나눠 먹고, 당제 지내는 제물은 새 제물을 들고 당으로 올라가서 당제를 지낸다. 터줏가리는 낮에 미리 만들어 둔다. 소지는 개인소지는 안하고 대동소지만 한다. 터줏가리 안에는 길지나 천 같은 걸 거는데 제를 모시기 전에 처음부터 미리 걸어둔다. 제는 12시안에 끝난다. 들고 내려와서는 동네분들이 다 당주 집에 모여서 음복한다. 고기는 낮에 잡아서 오후에 미리 다 나눠준다. 3시정도 되면 나눠주기 시작해서 해 있을 때 다 나눠준다. 이것을 “당잔치”라 한다. 동네 빠짐없이 호수대로 다 골고루 나눠준다. 마지막에 음복할 때는 소머리와 소꼬리로 쓴다. 우물고사 지낸 고기도 음복할 때 삶아서 쓰고, 술은 막걸리를 쓴다. 우물고사에는 안심과 막걸리만 쓴다. 다른 포 같은 것은 안 쓴다.⑥ 기타당집이 있는 위치에는 군부대 해안초소가 있다. 그러나 당고사 지내는데 큰 애로는 없다고 한다. 무엇보다 매향리 사격장 문제가 제일 중요한 사항이며, 생계의 직접적인 위협 때문에 주민들의 불만과 불안의식이 대단히 높다(1988년 조사).2002년 재조사 당시, 약 10년전까지는 황소 잡았는데, 근년에는 소머리 사다가 당제를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터줏가리는 당제 할 때마다 바꾸는데, 이것을 일러 “옷 입혀드린다”고 한다. 작년에는(2001) 못지냈는데 올해는 지낼 예정이다. 밤 10시 안에 올라간다. 각시서낭이다. 당목은 회나무인데 이 나무는 모시지 않고 그냥 당제만 지낸다. 현재 ‘매향리 굿모닝 회센타’(3층에는 ‘게르마늄 해수 사우나’도 들어설 예정)가 시공 중이어서 일개의 조경수로 덩그러니 남아있다. 당우물이 있어서 우물고사를 먼저 지낸다. 이 때는 쇠고기만 제물로 놓는데 주로 안심류를 사용하며 익히지 않고 생으로 놓는다. 술은 막걸리를 쓰고 당제 지내기 전에 절을 한다. 우물고사 때 썼던 제물은 음복할 때 나눠 먹고 당제 지내는 제물은 새 제물을 들고 당으로 올라가서 당제를 지낸다. 터줏가리는 낮에 미리 만들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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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가천마을 동제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가천마을 동제       제명 : 동제신격 : 암수바위, 미륵불제당 :일시 :제당의 형태위치 :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 오른편 동백나무 그늘 아래에 우리 나라에서 최고로 잘생겼다는 암수 미륵이 있다. 미륵은 마을신 가운데 가장 으뜸인 신으로형태와 재질 : 바위의 높이는 암바위 3.9m, 수바위 5.8m 이다. 암바위는 잉태한 여인의 배부른 형상이며, 수바위는 남근을 상징하고 있어 기자암 구실을 하는 한편, 어부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대상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특징 : 암수바위는 성기 숭배 신앙의 대상으로 속칭 미륵불이라고도 하며 미륵에 제사를 모실 때 제관은 깨끗하고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맡는다고 한다. 이는 미륵신앙이 성기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뜻하며, ‘아도 못 놓고 하는 사람들이 늘 아침, 저녁으로 치성을 드려 아이를 낳았다’ 고 한다. 또한 미륵(성근석)은 안전과 풍어를 담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풍어제 때 여기서 제사를 지내며 첫 번째 잡은 고기를 걸기도 한다. 그것을 동네 젊은이들이 떼어 먹을 때는 “미륵할아버지, 할머니 많이 빛을 봤으니 저희가 가서 먹을랍니다.” 라고 말하고 먹는다고 하며 가을에는 추수한 쌀을 미륵에 걸기도 한다고 한다. 이처럼 마을 사람들은 수시로 돈, 촛불 등을 놓고 비는데 암수바위는 마을을 지배하는 토속신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밥구덕(밥무덤)위치 : 밥구덕은 마을 중앙과 동, 서쪽 3군데에 있으며 매년 음력으로 10월 보름날 저녁 무렵에 주민들이 모여 동제를 지낸다.형태와 재질 : 밥구덕은 돌로 된 탑 안에 밥을 묻을 수 있도록 된 것으로 고사밥을 묻는 구멍에 올려진 돌은 길이 30cm, 폭 20cm 정도이다.특징 : 밥구덕은 돌탑 위나 돌담 사이 공간에 한지로 싼 밥을 묻고 동네의 무사 평안을 비는 것이다. 이는 다른 지역의 당산나무 동제를 대신하는 의례로 밥구덕은 남해 지방 일반적 풍습이나 지금까지 제의가 행해지는 곳은 흔치 않다고 하며 이는 조상신을 따라 온 잡신들을 위로하는 제사다. 이곳에는 마을 중앙 돌탑과 근처 돌담 등 세 곳에 밥구덕이 있는데 마을로 진입하는 길이 세 곳이어서, 세 길목에 잡신을 맞는 밥구덕이 위치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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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남해군 미조면 사항마을 최영장군 제사와 당산제
    경남 남해군 미조면 사항마을 최영장군 제사와 당산제             제명 : 최영장군제사, 당산제신격 : 최영장군, 당산, 산신제당 : 최영장군사당(마을 언덕의 무민사 내), 산신당(최영장군사당 뒤)일시 : 최영장군제사(음력 4월 20일), 당산제(음력 10월 15일)개괄사항마을에서는 최영장군제사와 당산제, 두 개의 제사를 지낸다. 최영장군제사는 음력 4월 20일에 지내고, 당산제는 음력 10월 15일에 지낸다. 사당제사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최영장군의 사당은 제당과 향교가 어우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당산 제사는 미조리 본동 사람들만 참석한다. 당산에는 우물이 있었으나 레이더기지가 생기면서 그곳에 지하수를 만들어 4~5년 전부터 물이 나오지 않는다. 당산나무의 제사는 10월 보름에 지낸다.제의내용<최영장군 제사>최영장군 제사는 마을 전체 주민이 참석하며, 음력 4월 20일에 지낸다. 제관은 3명을 뽑으며, 제사는 초헌-아헌-종헌-고축으로 이루어진다. 보통 제관은 최영장군유적보존회나 미조면 출신 사람 중 덕망 있는 사람들이 한다. 제물도 보존회에서 준비한다. 제물을 구입하는 일부 비용은 사당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다.사당제사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최영장군의 사당은 제당과 향교가 어우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당 앞의 건물은 향교로서 역할을 하고, 사당 안에는 최영장군의 영정과 칼이 있다. 한편 사당 안에는 돌로 만든 장군상이 있다.<당산제>당산 제사는 미조리 본동 사람들만 참석한다. 당산에는 우물이 있었으나 레이더기지가 생기면서 그곳에 지하수를 만들어 4~5년 전부터 물이 나오지 않는다. 당산나무의 제사는 10월 보름에 지낸다. 본래는 깨끗한 사람이 제관이 되었으나, 사람들이 원하지 않자 7~8년 전부터 이장이 제관이 되었다. 본래 스님을 모시고 제를 주관하려 하였으나 경비상의 문제를 들어 그만 두었다. 미조리 본동의 가구수는 120호이며, 집집마다 제사 경비로 3천원을 거둔다. 과거 제관이 되면 1년 동안 바다의 몰을 마을껏 떼어갈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그러나 몰은 1년 중 봄에만 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그리 길지 않다.제사를 지낼 때마다 제수 그릇을 새로 구입하고, 제사가 끝나면 제관은 그릇을 가지고 간다. 제물은 삼색과일, 흰떡, 돼지머리, 물고기(수어)를 놓으며, 술은 막걸리를 쓴다. 제물을 구입할 때는 값을 깍지 않는다.제관은 제사지내기 일주일 전에 당산에 올라갔으나, 지금은 집에서 3일동안 정성만 드린다. 당산에는 음식을 만들고 제관이 쉴 수 있도록 조립식 집을 만들어 놓았다. 제사가 끝난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은 이장집에 모여 음복을 한다.신격최영장군 : 고려말 장군으로 남해안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은 왜구를 물리진 장군이다. 최영장군의 이미지는 다양하다. 관복을 입고 좌정된 영정도 있고, 석인상을 최영장군이라 하기도 한다. 장군모를 쓰고 손을 앞으로 모아 도포 속에 숨기고 화상도는 화살통을 매고 칼을 옆에 세워 둔 것이다. 또 다른 화상도는 장군모를 쓰고 의자에 앉아 있는데 칼을 세워 들고 있다.산신 : 호랑이에 올라 앉아 호랑이의 귀를 잡고 왼 손은 앞으로 내밀고 있는 화상도 이다. 옆에 시중을 드는 여인이 연꽃을 그릇에 담아 들고 있다. 구체적인 기능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신화촌로가 꿈에 최영장군이 학을 타고 내려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런 후 바닷가에 하얀 단지가 흘러 들어왔다. 그 안에 최영장군의 영정이 있었다고 한다. 학이 내린 곳에 최영장군 사당을 짓게 되었다.제당의 형태석인(민불, 장군상)위치 : 미조면 미조초등학교 동편에 있는 무민사의 본당 건물 동쪽 편 축대 아래에 있는 돌부처상으로 투구를 쓰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마치 장군이 칼을 짚고 선 형상을 하고 있다.형태와 재질 : 투구를 쓰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마치 장군이 칼을 짚고 선 형상을 한 석인(石人)으로 가로 60㎝, 세로 84㎝, 높이 19㎝의 돌 제단 위에 높이 87㎝, 어깨 너비 37㎝의 크기이다.특징 : 조선조 후기에 와서 불상, 장승, 석인상의 여러 요소를 가미하여 만든 민불(民佛) 제작이 성행하게 되는데, 민속 신앙이 빚은 불상이라 하여 ‘민불’이라고 부른다. 너무나 소박하고 고졸(古拙)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무민사가 조선 성종 때 (1470~1494년) 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무민사 건립 후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며 현지 주민들의 주된 기도처가 되고 있는데, 이는 이 민불 앞에 촛대를 꽂을 수 있도록 아예 못까지 박아둔 사실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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