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

상기내용을 모두 옳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역사를 찾아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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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시는 세계 최초로 동이(東夷)가 세운 무(巫)의 나라였다
    신시는 세계 최초로 동이(東夷)가 세운 무(巫)의 나라였다 글. 고담중평 세계무속신문 주간역사천문학회 부회장 소설가 우리의 화려했던 상고시대의 역사는기원전 238년 47대고열가 단제께서 2096년간 지속되어온 조선을 폐관하고왕위를 버리고 입산하여 신선이 되신 이래 암흑세계로 들어가는데 그후 우리문화는 무속으로 흘러들어간다.그래서 잃어버린 역사의 숨결을 무속에서 많이 느낄수 있다.무속을 연구하는 분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잃어버린 우리역사를 복원하는 지름길이 될수 있다고 여겨 이글을 싣는다.미신으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상고사에 관한한 무속연구가들이 훨씬 고단수이다. -<운영자>-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곧 소멸하고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가 인류를 강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전 세계를 통일 할 것처럼 기승을 부리던 사회주의가 1백년의 수명을 다하고 멸망했듯이민주주의도 수명이 다 되어 멸망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이다.민주주의가 세상에 나온 지가 어언 2백년, 사회주의 보다 1백년이나 더 살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처럼 멸망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그 이유는 민주주의가 인류를 제어할 수 있는 완벽한 주의주장이 아니라 아직까지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주의주장이 세상에 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가 기다리지 않는다고 해도 멀지 않은 장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민주주의를 대체할 신시주의(神市主義)라는 것이 세상에 나오게 될 것이다.그것이 우리가 맞아야 할 역사적인 현실이다.신시는 인류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국가형태이다.우리의 조상 마고 할머니가 삼신산이 있는 봉래, 방장, 영주에 세우신 인류최초의 사이버국가였다.그 뒤를 이어 한인 할아버지가 한국(桓國)라는 이름의 신시국가를 계승하였고,다음에 한웅 할아버지가 나와서 사이버 국가와 현실국가를 통합한 형태의 발전된 신시국을 태백산과 흑수 사이에 건설하였다.마지막으로 단군 할아버지가 조선을 백산 아래에 세우면서 10년마다 한번씩 신시를 열었다.신시국은 요새 말로 영토의 개념을 초월한 사이버국가이다. 마고 할머니가 신시국을 세울 때,후손을 하나로 결속시킨 주의주장이 해혹복본(解惑復本)이었다.<해혹복본>이란 "의혹 을 풀고 원래대로 돌아가라"는 주의주장이었다.마고 할머니는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에 사셨던 분이다.천문학자에 따르면 그때 지구에는 기상재해가 일어나서 인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당시에 태평양에 있었던 뮤대륙과 대서양에 있었던 아틀란티스가 덮쳐오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이때 살아 남아서 인류의 조상으로 기록된 분이 태평양쪽에서는 마고 할머니였고, 대서양쪽에서는 멜키지덱이었다.마고 할머니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부도지(符都誌)에 있다.멜키지덱에 대한 기록은 성경의 창세기에 있다. 천문학자에 따르면, 당시에 지구가 당한 재해의 원인은지구의 세차운동(歲差運動)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세차운동이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자전하면서 공전하는데,지구의 중심에서 보면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동북쪽으로 23.5도 기울어져팽이처럼 돌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북극성이 지구가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준다.지구는 23.5도에서부터 서서히 일어나 반대편으로 기우러지기 시작하여 23.5도까지 기우러진다.이때 직녀성이 지구가 쓰러지지 않게 잡아준다.황도북극에서 북극성 쪽으로 쓰러지는 기간을 12500년으로 보고,반대편에 있는 직녀성 쪽으로 쓰러지는 기간을 12500년으로 본다고 한다.도합 25000년 동안 지구 중력의 회전축은 지구의 중심에서 보았을 때,동북쪽과 서북쪽을 왔다갔다 한다.이렇게 회전축의 방향이 변하는 때에 지구가 뒤집어져 천재지변이 일어나 생물이 멸망한다.종교에서 말하는 말세나 상법시대가 이때이다. <종말론>의 근거는 여기에서 찾아진다.그러나 북극성과 직녀성이 지구가 쓰러지는 것을 잡아주므로 매번 뒤집어진다고는 볼 수 없다.2000년을 시작하는 금년 춘분날인 3월 20일은 북극성을 향하고 있던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직녀성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날이라고 한다.이제부터 바야흐로 직녀성시대로 가기 시작한 것이다.일부 몰상식한 종교가들이 지구 멸망의 날로 잡은 날이 사실상 금년 3월 20일 이다.이를 알지 못하는 종교가들이 이날 이전에도 여러 번 지구 멸망의 날을 잡았다.그러나 지구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지금은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북극성을 향하고 있는 시대이다.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직녀 성을 향하고 있었던 때를 선천(先天)이라고 하고,북극성을 향하고 있는 때를 후천(後天)이라고 한다.마고 할머니는 왜 지구가 쓰러져 선천과 후천이 생기는지 그 의혹을 밝히라고 하였고,후손이 그가 떠나온 직녀성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이런 의미를 함축한 말이 <해혹복본 >이다. 그가 그 징표로 제시한 것이 북두칠성과 해와 달을 돌에 새긴 신체(神體)인 천부삼 인(天符三印)이다.천부삼인을 그대로 거울에 옮긴 것이 신당에 걸어 두는 명두이다.명두를 걸어두는 신당을 지었는데, 사방 한 장(丈, 10尺, 3.3m)의 규모 지은 전각이었다.이 전각을 방장(方丈)이라고 하였고, 방장이 있는 곳을 소도(솟대를 세우는 곳)라고 하였다.굿을 할 때 쓰는 신장대는 방장에 세운 솟대에서 나온 것이다.굿상에 올리는 시루에 신대를 꽂는 것은 방장에서 나온 것이다. 시루는 신시를 의미한다.그래서 시루가 나라를 상징한다고 보았고,나라에서 제사지내는 산을 시루산(烝山, 증산은 임금님 산이라는 뜻이다)이라고 하였다.안택굿에서 무당이 신대를 꽂은 시루를 들고 춤을 추는 것을 볼 수 있는데,이는 옛날에 상고시대에 임금이 제관이 되어 굿을 할 때 행했던 의식이 그대로 굿에 남아서 전해 오는 것이다. 안택이라는 말이 지금은 한 집안의 평안함을 비는 굿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지만,상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단군왕검이 마고 할머니에게서 전수한 삼신신앙과 한웅 할아버지에게서 전수한 태백진교를 발전시켜 덕교(德敎, 덕사상)를 만들어 선포하시고나라의 사대문 안에서 안택을 빌었다는 의미가 있다.안택(安宅)이란 나라의 서울을 정하기 위하여 방위를 잡는 일이다.당시에는 북두칠성이 떠오르는 동북간방(東北艮方)을 대단히 중요시하였다.동북간방에 잡은 터를 서사태방위(西四宅方位)라고 한다.동북간방에 터를 잡고 사대문을 내는데, 이때 올린 굿이 안택굿이다.성주거리에 나오는 성조는 당시에 처음 집을 짓고 궁궐을 지은 성조 할아버지이다.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무당내력>이라는 책에 보면,성조거리는 반드시 단군왕검을 먼저 청배하여 굿을 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왜냐하면 단군왕검 때 서울 백산 아래에서 처음 안택한 감격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던 것이다.한웅 할아버지는 신시를 세우고 태백진교(太白眞敎, 참사상) 선포하면서두 가지 신시나라의 국정지표를 내세웠다.정치는 화백(和白)으로 하고, 자연재해에 대한 책임은 책화(責禍)로 한다는 것이었다. 화백은 100% 찬성을 도출하는 의회제도이다.책화는 국가적인 재난을 당했을 때 나라의 최고 책임자인 임금이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는 제도이다.앞으로 전 세계는 사이버국가를 창설하자는 논의를 하게 될 것이다.사이버시대엔 한 국가가 크게 힘을 쓰지 못한다.사이버시대엔 어느 나라든 IMF와 같은 국가적인 재난을 당할 수 있다.주식시장을 통하여 일시에 자본을 빼내 가면 하루아침에 나라가 거덜난다.우리는 IMF라는 이런 쓰라린 경험을 한 바가 있다.그래서 모든 나라가 참여하여 단 하나의 사이버국가를 만들어 자국이 당하게 될 피해를 예방할 필요가 있다.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법률과 제도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사이버국가 의회에는 사이버인간을 대표로 참석시킨다.이 의회에서는 다수결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오로지 100% 찬성의 화백제도로 운영이 된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9-07 조회 1377 댓글 1
  • 한국천문 우리하늘 우리별자리
    한국천문 우리하늘 우리별자리  전문을 보면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수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8-25 조회 1353
  • 팔만사천제대신장
    팔만사천제대신장팔만사천제대신장1. 신장신앙(神將信仰)의 역사우리나라 신장신앙은 삼국시대의 신라에서는 진평왕(579 ~632년)에 제석천을 호국, 호법의 선신으로 신앙하여 제석궁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종류의 신장에 대한 신앙과 조상(造像)활동이 활발했고, 본격화 된 것은 문무왕(661~681)에 사천왕사가 건립된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제에서는 무왕(600~641)때 제석사룰 건립했다는 기록, 의자왕 21년(660) 풍우로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의 탑이 진동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어, 제석․사천왕 등 신장에 대한 신앙이 백제에서도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도 신장신앙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현재 기록으로는 확인할 만한 것이 없는 실정이다.통일신라시대에는 감은사 사리기(682)의 사천왕상, 8부 중상을 비롯하여 석탑과 부도 등에 인왕, 사천왕, 8부중, 12지 등이 부조된 예가 많이 남아 있으며, 석굴암 내부에 여러 신장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불교가 국가와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신앙으로 수용됨에 따라, 법회와 도량 등이 크게 유행하였고 사찰안에도 많은 신장 탱화와 상이 모셔졌으나, 현재 남아있는 신장상의 예는 그리 많지 않다.조선시대에 신장은 단지 가람수호 또는 호법이라고 하는 신장본래의 기능에 의한 신앙의 대상으로서만 믿어졌다. 그래서 천왕문이나 명부전 등에 인왕상, 사천왕상 등의 탱화가 많이 조성되었다. 즉, 조선후기에는 신장이 갖고 있던 외호적 기능이 불전 안의 불보살 수호라고 하는 내호적 신앙으로 탈바꿈하면서 신중탱화가 크게 유행하였던 것이다. 결국 신장신앙은 시대적인 성격에 따라 호국호법(護國護法)이라는 외호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고, 때로는 개인의 신앙을 위한 기능을 하면서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2. 신장의 정의와 신장굿신장(神將)은 무당과 장님(盲覡)이 모시는 신으로서 용맹스러운 장군의 신격이다. 때로는 무당이 몸주신(수호신)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신장할머니라 부르기도 하는데 장님이 신장신을 모시고 경문을 읽는다고 하여도 그 신을 거느리는 것이지 몸주신은 아니다.원래 이 신은 도교의 신으로서 오방오제설(五方五帝說)을 기초로 한 전설적 성격이 있으며, 이것이 무속과 민간신앙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흔히 오방신장(五方神將)이라 하면 집이나 동네의 동서남북과 중앙의 오방을 막아주는 수호신으로 모셔진다. 즉, 오방신장은 다섯 방위를 지키는 방위신(方位神)인 것이다. 달리 오방신, 오방장군으로 일컫기도 한다. 오방신의 내력은 오래되어서 분명하게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오방신장은 제왕의 명칭, 상징적 동물, 색채, 고유신앙과 서로 얽혀있다.오방의 신들은 각각 부인을 거느린 신으로 나타나고 장군, 원수의 위엄을 가진 신으로 무가에 구전되고 있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보이는 오방신장의 명칭은 태호(太昊), 염제(炎帝), 소호(少昊), 전욱(蔘頊), 황제(黃帝)이며, 제왕의 명칭은 복희(伏羲), 신농(神農), 금천(金天), 고양(高陽), 헌원(軒轅)으로, 여기에서 태호, 복희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오방신장이 상징적인 동물로 등장할 경우에는 흔히 방위를 상징하는 색채와 결부되는 것이 흔하다. 주작(朱雀), 백호(白虎), 현무(玄武), 청룡(靑龍)이 곧 그러한 사례이다. 오방을 지킨다는 장군도 동의 청제(靑帝), 서의 백제(白帝), 남의 적제(赤帝), 북의 흑제(黑帝), 중앙의 황제(黃帝)로 나타나며, 『악학궤범』이나 현재의 처용무(處容舞)를 보면 오방처용(五方處容)이 나타나서 동서남북의 오방잡귀를 쫓고 있다.이러한 오방처용의 변형이 중부지방의 굿거리인 신장거리에서 동일하게 발견된다. 오방신장은 중국의 도교사상, 역사상(易思想)과 긴밀한 관련을 보이기도 하지만, 원래의 무속신앙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처용신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무신도를 보면, 붉은 옷에 언월도(偃月刀)를 든 신장이 오방신장으로 되어 있어서 무속신앙의 중요한 대상임을 알 수 있다.오방신장은 동에는 청제신장, 서에는 백제신장, 남에는 적제신장, 북에는 백제신장, 중앙에는 황제신장이라는 다섯 신장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신격으로 인식되는 것이 무속신앙의 일반이다. 무신도(巫神圖)에 다섯의 신장이 함께 하나의 화폭에 그려진 것처럼 하나의 신격으로 신앙된다. 때로는 그 중에서 황제신장이 대표적인 신격이 되어 집을 수호하여주는 신으로 풀이되기도 한다.예를 들어, ‘황제풀이’ 라는 무가는 일명 ‘성주풀이’ 라 하는데 이것은 황제를 중심으로 집을 지키는 기능을 말하고 있는 구전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신화는 무속에서 오장신장을 지역 수호신으로 모시는 것보다는 집의 가옥을 수호하는 신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성주풀이’ 가 바로 가택수호신인데 오방신장의 하나인 황제가 이 기능을 맡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여기서 황제를 제외한 사제(四帝)가 방위를 수호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은 분명하다. 장님이 경문을 읽을 때에 신장대(서낭대)를 사용한다. 대개 마른 버드나무나 참나무 가지에 백지의 술을 매어서 쥐고 흔들기 적당한 40∼50㎝ 정도의 신간(神竿)이다. 병을 치료하는 의례를 행할 때 무당과 다른 것은 무당은 신장기를 가지고 굿을 하였을 때에 무당 자신의 몸에 신장이 내리지만 장님의 경우는 내리지 않고 신장대에 실린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님은 신장을 부린다고 할 수 있다. 즉 장님의 제삼자인 물체에 신을 내리게 하는 것이 다르다. 이 신장은 수호신도 아니고 장님이 부리는 신이 된다.장님은 『신장경(神將經)』 등을 읽으면서 신장대에 신장을 내리게 하여 이 신으로 하여금 잡귀를 쫓아서 병을 치료하는 의례를 한다. ‘신장경(神將經)’은 독경무(讀經巫, 판수)의 무의(無儀)에서 잡귀나 악령을 쫓을 때 읽는 경문으로 ‘신장편(神將篇)’이라고도 한다. 신장은 신을 호위하며 신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신의 장수들인데 경객들이 축사(逐邪)를 목적으로 하는 병굿이나 신굿에서 잡귀나 악령을 쫓기 위하여 이 경을 읽는다.『신장편(神將篇)』 중에는 신장을 집합시키는 기문신장편(起門神將篇)이 있고 또 잡귀나 악령을 포위하게 명령하는 팔문대진경(八門大陣經), 팔진도(八陣圖), 철망경(鐵網經) 등도 있으며 잡귀나 악령을 섬멸하게 하는 박살경(撲殺經)과 신장을 물러가게 하는 신장퇴문경(神將退門經)도 있다. 그런데 신장은 『옥추경(玉樞經)』에는 교주(敎主), 천사(天師), 천군(天君), 원군(元君), 조사(祖師), 진군(眞君), 진인(眞人), 진선(眞仙), 원군(元君), 원수(元帥), 부수(副帥) 등 48신장만 있으나 다른 『신장편』에는 하늘에는 구천신장(九天神將), 지상에는 동서남북과 중앙을 지키는 오방신장(五方神將), 일년을 지키는 간지신장(干支神將), 바다를 지키는 사해신장(四海神將), 다섯 산을 지키는 오악신장(五岳神將) 등 하늘과 땅, 지하에 많은 신장을 열거하고 있다.신장굿은 서울, 경기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과 황해도 일대의 굿에서 신장신을 모시는 굿거리를 말한다. 흔히 ‘신장거리’로 불리는데 신장거리는 대개 이 지역의 전통 천신굿에서 전안거리와 작두거리(또는 장수거리) 사이에 자리하고 또 안당사경맞이에서는 별상거리와 대감거리 사이에 행하여진다. 서울 새남굿에서 ‘신장거리’를 할 때 불렀던 노래가 남아있는데 그것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뛰는동안)얼쑤나 얼쑤 얼쑤 얼쑤나 얼쑤 얼쑤나 후루루 어허허 허허허 좋다내 전안신장님 상산신장님동갑신장 육갑신장 의술신장오냐 신자야 대신신장그거나 상품도당신장너 이것만 벌어줘 이것만 챙겼니이것도 콩깍이 허니오냐 봄이 되면 가을 바랐다가을되면 봄을 바라기다리고 바란 정성기다리고 바란 정성이 정성을 받으시고소원대로 도와주마성추대로 도와주구그저 남매 수명장수허고그저 산을 넘고 물을 건너동서사방 댕겨두거기 흥액없고모진 인간 악한 인간 험한 인간내가 죄 젖혀주구너 벼슬 돋아주마 공명 돋아주마부위대군 업이 되게 해주마한국에 이름나게 해주마외국타국에 이름나서 칭찬듣구 자랑나구높이 되구 귀히 되서벼슬돋아 줄테니이 담에 만만이 다량해라신장님 수위해서 이렇게 노시니 좋다(신장타령)사철두 좋겄은 덩길덩덩일상에 좋으면 닐니리어떤 신장이 내 신장이냐전안신장은 동갑신장육갑신장은 의술신장상산신장도 내 신장님□씨에 가중은 진안으루우청룡은 좌백호며좌청룡은 우백호이며청룡은 백호 나린줄기도당신장은 살륭신장부군신장두 내 신장님쇠기자에 말문신장육갑신장 육갑을 베풀고의술신장은 의술부려서소상남고둔을 젖혀주마해꾸진 거뚜는 물려두고우리 신장님을 거동봐라우분삼수는 쾌자전복안울림벙거지 니라파야아니라 오시지 못하리라일상에 좋은건 닐닐닐닐평상에 좋은건 끼강따강 닛디리리리 닛디리리리평상에 좋은건 닝강닝강 강강 릿디리리리 릿디리리어경문 취태 가경문 세악수사아 풍류를 줄을 늘여서기자에 소맷길 여난으루 이렇게 노시구(아무)가중에 가는 재수를 손을 쥐구오는 제수를 후여디려안 디려주마 저디려주마먹구두 남구 쓰구남구흐르게 넘치게 생겨주며은이 되거든 불려쓰고금이 되거든 달어쓰게내 그렇게 생겨주마재수 열어주마신장거리에는 오방신장을 위시한 여러 신령이 모셔진다. 이 신령은 중부지역의 무(巫)에서 관성제군(關聖帝君), 유비, 장비, 와룡선생(제갈량), 옥천대사, 오호대장(五虎大將) 등 이른바 전내(殿內) 계급의 신령에 속한다. 이들은 중국 도교 계통의 신령으로서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 군대에 의해 조선왕조에 도입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동관묘(東關廟), 남관묘(南關廟) 등의 관제(關帝)신앙으로 정착되고 그것이 이후 중부지역 무(巫)에 편입되었던 것이니, 신장거리는 17세기 중엽 경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장은 수명장수와 입신출세를 도와주고 사회활동에서 나쁜 인간과 기운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주는 신령으로 믿어진다.19세기 말경에 작성된 난곡(蘭谷)의 『무당내력(巫堂來歷)』에는 신장거리가 축귀(逐鬼)거리라는 제목으로 표현되어 있고 “오색기(五色旗)로 지휘하는 오방신장은 일체 잡귀잡신과 제반 살(殺)을 물리친다. 근래에는 병 치성에서 많이 행하여진다.” 설명하였다. 잡귀잡신과 살의 제거 및 치병도 신장이 담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전통 천신굿에서는 무당이 신장거리에 협수(夾袖:동달이)와 전복을 차려 입고 벙거지를 쓴다. 오른손에는 적색, 황색, 청색의 기(旗), 왼손에는 백색과 흑색의 기 등 오방신장기(五方神將旗)를 나누어 들고 춤을 추다가 신령이 내리면 공수를 준다. 그 공수에 전안신장, 상산(上山)신장, 동갑신장, 육갑신장, 의술신장, 대신신장, 도당신장, 부군신장 등의 신장계 신령이 언급된다.무당들은 이 신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장군의 복장을 하고 작두를 타거나 사슬세우기(청룡도라는 신칼을 상위에 세우는 것)를 하며 강원도, 경상도지방에서는 군웅굿(軍雄祭)이라 하여 놋동이(놋쇠로 만든 동이)를 입에 물고 춤을 추어 위엄을 나타낸다. 서울지방 굿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오방신장기(五方神將旗)를 가지고 춤을 추고 신점(神占)을 친다.신장거리의 중요한 무구인 오방신장기의 각 기는 본래 색깔에 따른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흑색은 죽을 운수를, 청색은 우환을, 황색은 조상을, 백색은 천신(天神)을 상징하고 적색은 큰 재수로 여겨진다. 무당은 흑, 청, 황, 백, 적의 다섯 개의 기를 가지고 춤을 추고 나서 깃대를 한데 모아 기폭으로 감아쥐고 의뢰자나 손님에게 내밀어서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 이를 ‘기뽑기’라고 하며 뽑은 기를 보아서 운수를 점친다. 적기가 가장 좋고 흑기가 가장 나쁘다. 흑기를 뽑았을 때에는 무당은 주술적으로 잡귀를 쫓은 다음에 다시 뽑게 하여 적기가 나오도록 한다.도교적인 의미로는 사방을 의미하는 흑, 청, 백, 적보다 중앙을 상징하는 황색이 가장 중요하고 이를 강조하는 황제신앙(黃帝信仰)이 있으나 무당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붉은 색이 가장 길(吉)한 색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것은 원래 무속이 가지고 있는 색을 보는 관점에 의한 것이라 생각된다.3. 팔만사천 제대신장신장(神將)에는 천문신장, 동갑신장, 육갑신장, 의술신장, 대신신장, 상품도당신장, 상산신장, 전안신장, 제안신장, 말문신장, 도당신장, 살륭신장, 의술신장, 부군신장 등 수 많은 신장들이 있다. 그 중, 팔만사천 제대신장도 있는데 8만 4천이라는 단어는 불교용어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8만 4천 갈래가 된다는 것으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번뇌의 수도 8만 4천이고, 그것을 다스리는 법문도 8만 4천이라는 것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를 나타낼 때 8만 4천이라고 하기도 한다.불교용어에는 ‘8’과 관계된 것들이 유난히 많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비롯하여 팔부정견(八不正見), 팔부중(八部衆), 팔부중도(八不中道), 팔양경(八陽經), 팔열지옥(八熱地獄), 팔정도(八正道) 등이 그것이다. 팔만사천번뇌(八萬四千煩惱)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많은 번뇌를 모두 나타내는 말로서 8만 4천의 의미는 정확한 숫자의 수치라기 보다는 많음을 뜻한다. 중생에게는 8만 4천의 번뇌가 있으므로 이를 위해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도 생겼는데 이는 부처님의 모든 교법을 이르는 말이다. 8만 4천 제대신장도 이러한 불교용어에서 나온 듯 하다.8만 4천 제대신장은 칠성신이 관장하는 신이다. 칠성신앙은 한국 민속신앙의 중요한 현상 중 하나로 인간의 수명, 자녀의 장수를 바라는 인간의 공통된 염원과 함께 불교나 도교의 신앙에서만 아니라 민간신앙에서도 줄기차게 신앙되어 왔던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안치하는 판을 칠성판이라 하여 옛날에는 널빤지에 7개의 구멍을 뚫어 사용하였으나 오늘날은 구멍을 뚫지 않더라도 시신을 안치하는 판자 등을 칠성판이라 한다. 또한 민속에서 신을 불러들이고, 강림(降臨)한 신을 즐겁게 해주는 신화적 제례라고 할 수 있는 굿에 있어서 열두거리 가운데 핵심 부분인 제석거리는 인간의 수명을 기원하는 부분인데 이 가운데 칠성님께 자녀의 수명을 기원하는 내용이 활용되고 있다.참고문헌 및 도판▒ 참고 문헌赤松智城·秋葉隆, 朝鮮巫俗の硏究 下, 大阪屋號書店, 1938秋葉隆, 韓國巫俗の現地硏究, 養德社, 1950金榮振, 忠淸道巫歌, 螢雪出版社, 1976民間信仰·宗敎, 韓國民俗大觀 3,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2조흥윤, 한국의 巫, 정음사, 1983張籌根, 韓國民俗論攷, 啓蒙社, 1986서울새남굿보존회, 서울새남굿 신가집, 문덕사, 1996蘭谷, 巫堂來歷, 서울대학교 奎章閣, 1996조흥윤, 한국의 샤머니즘,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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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신안군 흑산면 천촌리 당제
    전남 신안군 흑산면 천촌리 당제제명 : 당제신격 : 당할아버지-할머니, 산신제당 : 기와집 형태의 당집(돌담으로 둘러져 있음), 당집 옆 암굴(산신당)일시 : 음력 1월 1일개괄천촌리는 흑산도의 제일 큰 마을인 예리 1구에서 7.2km 떨어진 마을로 선편으로 40~50분 소요되며, 도보로는 60분의 거리에 있다. 당의 조성은 4백년 전에 이루어졌다고 하며, 이웃 마을인 청촌리와 소사리 당들이 이 당에서 분당되었다고 한다.제의내용① 제당 구성 및 신격천촌리는 흑산도의 제일 큰 마을인 예리 1구에서 7.2km 떨어진 마을로 선편으로 40~50분 소요되며, 도보로는 60분의 거리에 있다. 당의 조성은 4백년 전에 이루어졌다고 하며, 이웃 마을인 청촌리와 소사리 당들이 이 당에서 분당되었다고 한다.천촌마을이 굽어 보이는 옆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당집은 돌담으로 쌓여 있다. 돌담의 높이는 80cm, 앞담의 길이 8m, 옆담의 길이 5m, 당의 높이는 2m, 앞의 길이 4m, 옆길이 2m이며 와당으로 당향을 하고 있다. 북편간에는 호수대로 보수배와 지전이 걸려 있고 좌측 남방의 간에는 제기가 있으며 신당 밖의 좌측에는 떡판과 절구가 놓여있다. 우측 10m 거리에 큰 바위가 있으며 그 바위 밑에 산신 동굴이 있는데 여기에다 산신에게 바칠 제기를 놓아 둔다.원래는 이런 와가의 당집이 아니어서 마을 호수대로 띠짚을 가지고 와서 생기 좋은 날에 지붕을 이어 당집을 조성했으나 1919년에 와가 당집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현 당집은 1919년에 신축한 것으로 이 근방 당사 중 그 규모가 훌륭한 기와집 신당이다.상당에는 당할아버지와 할머니 양위를 모시며 신베를 신위로 모시고 있다. 당집 옆 암굴에서는 산신을 모신다.② 당제 준비섣달에 탈이 없으면 섣달 그믐에 생기가 맞는 화주가 당에 들어간다. 화주가 당에 들어가게 되면 마을민들의 통행이 금지되고 누구도 집 밖에 나오지 못한다. 제주들이 당샘으로 물을 길르러 갈 때에 혹시 부정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을에 우환이 있게 되므로 통행을 금한다.정월 초하루의 자시에 제사를 올리는데 화주가 먼저 올라가 제물을 준비하고 설상하면 무녀가 당에 올라온다. 무녀는 당에 오르기 직전에 당샘에서 목욕재계하고 새 옷을 입은 후에 징과 북을 치며 당굿을 한다.③ 당제 진행축문은 없고 제물은 마른명태와 찐밥과 나물 등을 차리며 마음 속으로 소재기복(消災祈福)을 축원하고 소지를 올린다. 새벽에 내려와 하당제와 장승제를 올리는데 하당에는 300여년이 넘는 두 그루의 신목인 동백나무가 있다. 이 신목 앞에 메 두 상을 올리고 옆에 있는 영감장승과 각시장승에게 한지를 펴놓고 제물을 바친다.④ 제후 행사 및 전승 현황모든 제가 끝나면 각호에 찐밥과 제물을 돌려 음복하게 한다. 이어 동네회의를 한 다음 조용하게 하루를 보낸다. 장승은 3년마다 만들어 모시는데 목장승의 크기는 영감의 높이가 125cm, 각시는 160cm 정도였다. 지금은 이 장승이 없다.□ 참고문헌최덕원, <<다도해의 당제>>, 학문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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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天狼 1성 천랑 하늘이리별
    天狼 1성 천랑 하늘이리별천랑은 하늘이리별로 주로 침략하는 것을 주관하는 별이다. 아마도 성질이 사납고 남을 잘 해치기 때문에 별의 성격도 침략하는 것을 주관한다고 본 게 아닌가 싶다. 한 개의 별로 이루어진 천랑성은 군시 별자리 바로 위에 위치한다.역사 : 천랑성(天狼星)과 왜란의 예언청학집은 조선 중기 조여적(趙汝籍)이 찬술한 선가서(仙家書)이다. 바로 이 책에 천랑성과 왜란의 예언과 관련한 글이 실려 있다. 계엽자는 당시 수련을 하던 도인의 이름이거나 혹은 가공의 인물일 것이다. 이 내용에서 천랑성이 하나는 서북으로, 또 다른 하나는 동남으로 내려왔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왜란을 이야기하기 위해 동원한 점성술적인 해석이라 여겨진다. 실제 천랑성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서양 : 큰개자리 시리우스천랑성은 서양 별자리로는 큰개자리의 시리우스에 해당한다. 시리우스는 우리가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밝은 별이다. -1.5등성으로 1등성보다 거의 10배나 밝은, 별 중의 별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겨울철 하늘, 시리우스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만약 찾는데 익숙치 않다면 오리온자리의 왼쪽 아래를 보면 빛나는 시리우스를 만날 수 있다. 시리우스는 큰 개의 입 부분에서 빛나기 때문에 큰 개가 입에 보석을 문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15. 天狼 1성 천랑 하늘이리별 큰개 α 시리우스 Sirius[조선왕조실록]《 단어 검색 - 天狼星[전체]...6 》광해 14년 .... 1 건(1622년) 인조 7년 .... 1 건(1630년)영조 19년 .... 1 건(1642년) 영조 20년 .... 3 건(1643년)관련이야기북극별을 지키는 사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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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雷電 6성 뇌전 천둥번개별자리
    雷電 6성 뇌전 천둥번개별자리뇌전은 천둥번개 별자리로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는 것을 주관한다. 하늘의 천신 중에 천둥신인 뇌신(雷神)이 큰 북을 치면 천둥번개가 되었고 숨을 내쉬면 바람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뇌전은 벌레들을 움직이게 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 별이 밝거나 움직이면 천둥번개가 크게 울린다고 보았다. 여섯 개의 별로 이루어진 뇌전은 실수의 아래쪽에 위치한다.[조선왕조실록]성종 21년 1 건(1480년)인조 3년 1 건(1626년)관련이야기태양의 아들 박혁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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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성태 교수)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 민족이다(上)

    한 中南美연구자의 이색 주장 -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 민족이다(上)

    멕시코는 ‘맥이족의 땅’이라는 뜻

     



    글 : 孫成泰 배재대 스페인어과 교수 









     


    ⊙ 스페인 정복자들의 기록에 아스텍 원주민들은 820년경 아스땅(아사달)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어
    ⊙ 아기를 업어 키우며 젖 줄 때는 ‘찌찌’라고 해
    ⊙ 상투·갓, 가체·쪽진 머리, 사주와 점, 정한수 등 풍속 유사

    孫成泰
    ⊙ 53세. 한국외국어대 졸업,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언어학 박사.
    ⊙ 배재대 스페인어·중남미학과 교수, 同 외국어교실 실장, 한국외국어교육학회 부회장.
    ⊙ 논문 : <아스테카인의 탄생, 육아 및 장례 문화> <아스텍의 역사, 제도, 풍습 및 지명에 나타나는
    우리말 연구> <아스텍제국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풍습> 등.







    <그림1> 벽화 속에 나타난 아스텍인들. 이들은 5~10세기 만주에서 사라진 고리족과 맥이족의 후예로 보인다.



    우리 민족은 일찍이 만주(滿洲)와 요동(遼東) 지역에 부여(扶餘)와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하고, 이 지역을 호령했던 동북아(東北亞)의 강자(强者)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이 지역의 강자였던 우리 민족은 소수(少數)로 전락하고, 고구려와 부여에 복속했던 숙신(肅愼)족의 후예인 말갈족(후의 여진족)이 만주의 주인이 되었다. 만주를 호령하던 우리 민족은 과연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흔적을 멀리 중남미(中南美)의 멕시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라져 버린 우리 민족 

    3세기 후반에 쓰인 《삼국지》 〈위지동이전(魏誌東夷傳)〉은 우리 민족의 고대(古代) 역사와 풍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비록 중국의 관점에서 부족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그 시대 우리 선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사료다.

    우리 민족은 동북아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만주와 요동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 왔다. 만주 북쪽의 길림, 장춘 일대는 부여가 있었고, 만주 남쪽의 집안 일대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오랫동안 고조선(古朝鮮)이 존재했던 요동 일대는, 비록 중국 한(漢)나라 후예인 공손(公孫)씨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고조선의 후예가 살았다. 그 당시 만주 일대에 살던 우리 선조들의 숫자는 얼마였을까?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부여가 8만호(戶), 고구려가 3만호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요동의 공손씨 치하에 있던 선조들도 대략 3만호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부여와 숙신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3세기 만주에는 우리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 한 그룹 있었다. 그들은 숙신(肅愼)족이었다. 그들은 두만강 북쪽 연해주(沿海州)의 작은 지역에 살던, 근원을 알 수 없는 종족이었다. 그들은 부여-고구려를 건국한 우리 선조 고리족과 언어와 풍습에서 완전히 달랐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그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고, 3세기 초에는 당시 만주 일대에서 가장 강국이었던 부여에 찾아와서 스스로 신하가 되었으며, 매년 무거운 공물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壤(위략왈 기국은부 자선세이래 미상파양)

    “위략왈,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적이 없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가구 수 8만호를 거느린 부여는 매우 부강하여 다른 민족으로부터 파괴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쪽의 숙신족은 스스로 부여를 찾아와서 굴복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自漢己來, 臣屬夫餘 夫餘責其租賦重, 以黃初中叛之 夫餘數伐之, 其人衆雖少 (자한기래 신속부여 부여책기조부중 이황초중반지 부여수벌지 기인중수소)

    “(숙신은) 한나라 때에 자연스럽게 부여의 신하가 되었다. 부여는 그들을 꾸짖고 조세를 무겁게 부과했다. 그래서 황초년 중에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부여는 그들을 여러 차례 정벌하였다. 그 사람의 수는 적었다.”>

    삼국(三國) 시대의 국력은 인구 수에 좌우되었다. 인구가 적은 숙신은 약소국(弱小國)으로 8만호의 부여에 굴복했다. 부여는 그들을 맞이해 후하게 대접한 후에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그들을 혼내고 무거운 공물을 바치도록 명령했으며,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황초(黃初·삼국시대 위나라의 연호. 220~226년) 연간에 여러 차례 정벌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숙신의 인구 수는 얼마였을까? 숙신의 인구 수는 3만호 미만이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가 3만호였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부여에 강력하게 대응하던 국가였다. 이 사실과 숙신이 스스로 찾아와 굴복하고 부여가 엄하게 혼냈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해 보면, 숙신의 당시 인구 수는 고구려에도 한참 못 미쳤을 것이다. 아무리 많이 추정해도 2만호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3세기 초 만주와 요동 일대 우리 민족의 숫자는 대략 14만호, 숙신은 2만호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숙신보다 7배나 많은 북방의 강자였고, 최대 집단이었던 것이다.


    발해의 少數민족이 된 고구려인들

    고구려 문자왕이 아버지 장수왕을 이어서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는 해(494년), 음력 2월에 북만주의 추운 겨울바람 속에서 부여의 마지막 왕은 800년을 이어 오던 왕조의 문을 스스로 닫고, 오직 가족들만 거느리고 참담한 심정으로 남쪽 고구려로 내려와서 스스로 신하가 되었다. 몇 달만 더 기다리면 따뜻한 봄이련만, 무슨 이유로 그는 추운 북방의 겨울바람 속에서 왕조의 문을 서둘러 닫아야 했을까?

    역사는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았다. 다만 왕은 가족들만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고, 백성들은 집단적으로 난하를 건넌 후에 북쪽 아무르강 쪽으로 떠났다고만 전하고 있다. 북쪽으로 떠난 그들은 잠시 두막루국(豆莫婁國)을 건설하여 살다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당시의 ‘사라졌다’는 의미는 중국 역사가들의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떠났음을 의미한다.

    삼국시대의 우리 민족에게는 숙명의 라이벌이 있었다. 만주 서쪽 대흥안령(大興安嶺) 일대에서 거주하던 선비(鮮卑)족이었다. 그들은 3세기경 중원(中原)으로 내려가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 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우리 민족의 최대 위협이 되었다.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했던 고리족은 선비족과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 선비족의 후예가 세운 당(唐)나라에 패망(敗亡)했다. 698년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大祚榮)은 북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발해를 건국했다. 당나라는 서쪽에서 쳐들어오는 토번족을 막아야 했고, 안으로는 각지의 반란으로 점차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발해는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진격하여, 마침내 옛 고구려 전성기의 영토를 능가하는 지역을 장악했다.

    그런데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 지배층과 대다수인 말갈족 백성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중국의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도, 일본의 《유취국사(類聚國史)》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796년 영충(永忠)이라는 일본 승려는 당나라에 불교를 공부하러 가던 길에 만주를 지나갔다. 그는 만주 곳곳을 둘러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마을마다 백성들은 말갈족(숙신의 후예)이었고, 고구려인은 소수였다.”

    여기서 고구려인이란 고구려 전성기의 백성들, 즉 3세기의 부여, 고구려, 요동에 살던 우리 선조들을 총칭한 호칭이었다. 3세기에는 우리 선조들이 7배나 많았다. 7분의 1에 불과했던 숙신족이 8세기에는 만주의 최대 집단이 되었고, 우리 민족은 소수집단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발해가 멸망한 10세기 이후에, 두 번 다시 우리 민족의 왕조가 그 땅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만주를 떠났던 것이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멕시코에서 발견된 우리 민족 

    1492년 스페인의 콜럼버스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인도로 가려다가 뜻밖에 신대륙을 발견했다. 그는 처음에는 그곳이 인도라고 착각했다.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을 영어로는 ‘인디언’, 스페인으로는 ‘인디오’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페인인들은 지금의 멕시코 수도인 멕시코시티 지역을 중심으로 멕시코와 유카탄 반도에 매우 발달된 문명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특히 멕시코시티 지역에 있던 도시는 30만평의 규모에 20여만명이 살고 있었는데, 도시 중심에는 큰 신전을 세우고, 그 주변은 동서남북의 네 구역으로 나누어, 씨족별로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흰 옷을 주로 입고, 흰색을 숭상하여 거의 모든 건물을 흰 흙으로 칠했고, 처음 찾아온 스페인인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융숭한 대접을 했다. “이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며,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타고난 듯하다”고 스페인인들은 기록했다.

    그들은 미개한 원주민이 아니었다. 왕과 큰무당을 중심으로 매우 체계적인 국가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왕과 큰무당, 귀족과 무당, 평민, 노예로 구별되는 사회조직도 갖추고 있었다. 정복한 땅에는 왕족을 통치자로 파견하고, 각 지역에서 매년 두 차례 공물(貢物)을 받았으며, 그것을 그림 문자로 책에 기록까지 하고 있었다. 그들도 나무껍질을 으깨어 하얀 종이까지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고리족과 맥이족의 후예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흥분했다. 유럽인들은 이들이 구약(舊約)성경에서 사라진 단 지파(支派)의 후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들이 각 지역으로 퍼져서 인류가 번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12명의 아들 중 11명의 후손들 이야기는 구약성경에 계속 나오지만, 단의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신대륙이 발견되고 아스텍제국이 발견되었을 때 유럽 국가들은, 드디어 사라져 버린 단의 후예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곧 단 지파가 아님을 알았지만, 영국의 킹스버그 남작 같은 사람은 19세기까지도 이들이 단 지파일 가능성을 연구했다.

    스페인 왕실은 1521년 아스텍제국을 정복한 직후부터 가톨릭 신부(神父)인 학자들을 멕시코에 파견하여, 그 원주민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언어를 말하며, 풍속은 어떠한지 등을 조사하고 기록하도록 했다.

    그들은 먼저, “너희들은 어떤 민족이냐”고 물었다. 원주민들은 “우리들은 고리족과 맥이족”이라고 대답했다. 고리족이 먼저 그곳에 왔고, 맥이족은 나중에 왔다고 했다.

    만주와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고리족이었고, 요동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맥족(貊族)이었다. 맥족은 5세기 이후부터는 맥이(貊耳)족이라고 불렸다.

    “너희들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원주민들은 “조상들은 원래 아스땅에서 살았고,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위가 평평한 피라미드가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또 “고리족은 원래 태양신을 믿던 고리족 땅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아스땅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아사달이다. 땅과 달은 같은 말이다. 아사달(阿斯達)의 원래 발음은 ‘아스다’이다. 만주에는 우리 선조들이 건축한 수만 기의 피라미드가 있다. 모든 피라미드는 위가 평평하다.


    “맥이족은 820년 경 이곳에 왔다”

    “너희들은 무슨 언어를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질문의 의미를 몰랐던 원주민들은 그저 “나와 다들이(‘모두가’라는 의미) 이렇게 말한다”고 대답했다. 원주민 언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던 스페인인들은 ‘나와 다들이’를 언어 명칭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오늘날 멕시코 원주민 언어를 ‘나와다들이어’라고 하고, 줄여서 ‘나와들어’ 또는 ‘나와어’라고 한다.

    “너희들은 언제 이곳으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원주민들은 “맥이족은 820년경 아스땅을 떠나서 이곳으로 왔고, 고리족은 그보다 수백 년 먼저 왔다”고 대답했다. 여기 나오는 연도는 나중에 스페인인들이 원주민의 달력을 서양력으로 해석한 것이다.

    스페인인들이 이렇게 원주민의 기원을 조사해 기록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 후에 아메리카에 온 프랑스와 포르투갈, 영국은 원주민의 역사, 풍습, 언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미국과 캐나다의 인디언에 대한 기록은, 그들이 이미 유럽의 언어와 풍습에 상당히 깊게 영향을 받아서, 그들 고유의 언어와 풍습이 상당히 변질되어 버린 18세기 말 또는 19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뿌리 깊은 연구는 주로 멕시코와 페루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아스텍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아스텍인들이 보관하고 있던 수많은 책들을 불태워 버렸고, 여러 가지 풍습도 금지했다. 그들은 그림으로 가득 찬 그 책들과 그들의 고유 풍습이 이교도적 풍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원주민들의 말과 풍습을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남겨 두었고, 극히 적은 숫자이지만 원주민들의 그림 문자로 된 책도 남았다. 바로 이러한 자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모습 

    멕시코의 원래 국명은 ‘맥이고(Mexico)’이다. 이 명칭은 스페인인들이 처음 멕시코에 왔을 때, 아스텍제국을 건설하고 살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는 곳을 ‘맥이곳’이라고 불렀고, ‘맥이가 사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 후에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 지배로부터 독립했을 때, 아스텍인들의 옛 명칭을 국명으로 채택했다. 오늘날 ‘멕시코’라고 함은 영어 발음으로 인한 것이고, 실제로 멕시코인들은 아직도 ‘맥이고’라고 말한다.


    남자들의 모습

    ▲상투
     






    <그림2> 그림 속의 아스텍인들은 한국인과 흡사한 상투를 하고 있다.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멕시코 원주민들은 상투를 하고 있었다. 상투는 붉은 천으로 묶어서 만들었고, 조선시대 우리가 사용하던 망건 같은 것이 없어서, 묶은 천이 헐거워지면 뒷머리는 밑으로 처지곤 했다.

    <그림2>는 1325년 맥이족이 아스텍제국을 건설하던 때의 역사를 그린 그림이다. 9명의 큰 부족의 족장들이 모두 상투를 하고 있다. 머리 위 양쪽으로 삐죽 나온 것은 상투를 묶은 천 자락이다.

    가운데 머리를 풀고 귀 위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은 무당이다. 신(神)에게 나라 건설을 알리는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 먼저 스스로 피를 흘리고 있다. 보통은 새의 피를 뿌렸지만, 중요한 제사에서는 무당이 스스로 피를 흘렸다. 그 제사를 그들도 ‘굿(cu)’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무속인들은 아직도 굿을 할 때 닭이나 돼지의 피를 먼저 주변에 뿌린다.

    ▲갓과 두루마기
     






    <그림3> 17세기 멕시코 원주민 족장의 외출 모습(왼쪽)과 20세기 초 우리나라 사람의 복장(오른쪽).



    <그림3>은 아스텍제국의 노인들이 외출을 할 때의 모습이다. 검은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었다. 우리 민족의 외출복인 흰 두루마기의 특징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넓어진다. 오른쪽의 20세기 초 우리 모습과 비교해도,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까지 같다.


    여자들의 모습

    ▲한복과 加髢



    <그림4>의 아스텍제국 여인들은 한복을 입었고, 머리는 가체(加髢)를 했다. <그림5>는 신분이 높은 여인들이 머리는 가체를 하고, 화려한 한복을 입은 모습이다. 이 그림은 특히 스페인과 아스텍제국이 전쟁을 시작한 후, 몇 달 후에 제국이 멸망당할 운명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부인들이 높은 건물 옥상에올라가 멀리 해안가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구경하는 장면이다.

    한복은 우리 민족의 고유 의상이고 가체도 이미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져 왔던 우리 민족의 풍습이었다. 

    가체를 만들기 위하여 빠지거나 자른 머리를 버리지 않고 모아 땋아서 머리에 덧대었다. 아스텍제국 여인들도 그렇게 머리카락을 모았다. 또 가체를 머리에 붙이기 위해 천 조각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림5>에서는 아스텍제국 여인들이 붉은 천으로 가체를 덧댔다. 다음 18세기 신윤복의 그림에도 천으로 가체를 묶은 모습이 나온다<그림6>.

    ▲비녀와 쪽진 머리



    <그림7>은 우리 민족 여인의 머리 모습이고, <그림8>은 1521년경의 아스텍 여인들이 통곡하는 모습이다. 모두 머리 뒤의 목 부분에 머리를 뭉쳐서 쪽을 짓고 비녀를 꽂았다.

    아스텍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 가운데 원 안의 여인의 소매를 보면, 우리 한복의 소매의 특징이 그대로 보인다. 한복 소매는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부드러운 곡선으로 통이 넓어지다가 손목 부분에서 좁아진다.

    머리 부분에서 특이한 점은 이마 윗부분에 머리를 뭉쳐서 두 개의 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도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우리 민족에게 있었다. 이런 모습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나온다.

    ▲머리꽂이와 봉잠


     







    명성황후 초상화<그림9>와 20세기 중반 멕시코 여인의 모습<그림10>.



    우리 민족의 여인들은 머리를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가체뿐 아니라 다양한 머리꽂이를 머리에 꽂아서 장식했다. <그림9>는 19세기 말의 머리꽂이와 명성황후 초상화이고, <그림10>은 20세기 중반의 멕시코의 머리꽂이와 여인이 전통 머리꽂이를 한 사진이다.

    머리꽂이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봉잠(鳳簪)이다. 봉잠은 봉황새 모양으로 만든 비녀를 말한다. <그림11>은 조선왕조 말 영왕비의 소립봉잠(小立鳳簪)과 멕시코 유물로 발견된 봉잠이다. 새가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있고, 꽁지는 뒤로 들고 있으며, 발을 길게 내려서 꽂는 부분으로 만든 모습이 모두 같다.
     






    <그림11>영왕비의 소립봉잠(왼쪽)과 멕시코의 봉잠(오른쪽).



    ▲붉은 볼연지

    우리 민족 여인들이 볼에 붉은 연지를 찍는 풍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아래는 고구려 쌍영총의 세 여인의 그림이다. 모두 붉은 볼연지를 찍은 모습이고, 머리엔 천을 두른 모습이 가체를 덧댄 것으로 보인다.

    <그림12>는 멕시코의 태오티와칸 문명(기원전 1세기~기원후 8세기)의 벽화에 나온 여인의 모습, <그림13>은 미국 남부 애리조나주의 인디언들 그림과 도자기, 그리고 <그림14>는 19세기 미국 수(Soiux)족 인디언 추장 부부의 초상화이다. 수족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인디언 집단으로서, 그들도 우리 민족의 후예라는 증거가 있다. 수족 남자들도 원래는 상투를 했었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자의 상투와 함께 여인들의 붉은 볼연지 풍습은 우리 민족의 이동루트인 알류산열도(列島)와 캐나다 서해안 지역, 그리고 우리 민족의 후예가 퍼진 아메리카 전 지역에서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남자의 상투와 여자의 볼연지 풍습은 아메리카 거의 모든 인디언들 사이에 19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그림12> 멕시코 태오티와칸 벽화 속 여인은 붉은 볼연지를 하고 있다.
    <그림13> 애리조나 인디언의 모습을 형상화한 도자기.
    <그림14> 미국 수족 추장 부부도 볼연지를 하고 있다.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풍습 

    창포에 머리 감고
     






    <그림15> 아스텍 벽화에 나오는 지게를 진 장사꾼의 모습.
    <그림16> 반란 용의자를 고문하는 모습. 가운데에 지게를 세워 놓은 것이 보인다.



    우리 민족 여인들은 옛날부터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곧 풍성하고 아름다운 머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체를 하거나 각종 장식을 머리에 꽂기도 했고, 머릿결을 촉촉하게 빛나게 하기 위해서 창포(菖蒲)라는 풀을 물에 으깨어, 그 물로 머리를 감아 윤이 나게 했다. 멕시코의 여인들도 히어끼리들이라는 푸른 풀을 창포처럼 사용했다.

    아메리카 여인들도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녔고, 무거운 것을 일 때는 따배(똬리)를 사용했다.

    <그림15>는 1540년대 그려진 아스텍제국의 그림 역사서에 나오는 장면이다. 물건을 지게에 얹어서 진 모습과 지게를 지게막대기로 세워 놓은 모습이다. <그림16>은 아직 상투를 틀지 않은 젊은이 두 명이 상투를 튼 어른 두 명을 창으로 고문하는 장면이다.

    아스텍제국에서는 상품을 지고 먼 지방으로 무역(물물거래)을 하러 다녔던 장사꾼들이 있었다. 이들은 제국이 정복한 속국(屬國)이나 마을의 감시자 역할도 했다. 반란의 기미가 보이면 중앙 정부에 보고도 하고, 그림에서 보듯이 직접 반란 용의자를 심문하기도 했다.

    그림상의 심문 대상자도 상투를 한 모습이다. 신대륙 발견 이전에 멕시코 전역에 퍼져 살았던 사람들은 부여-고구려를 건국했던 고리족이었고, 이 사람들은 씨족별로 혹은 원래 만주에서 살 때부터 조상들이 이웃하여 살던 사람들과 같은 곳에 정착하여 수많은 마을과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의 멕시코시티 지역에 뒤늦게 도착한 맥이족(아스텍족)이 그곳에 살던 고리족과 힘을 합하여 아스텍제국을 세우고, 그 당시의 전국 각지에 산재한 씨족별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지게의 특징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지게와 약간 다르다. 우선 지게끈을 어깨에 메지 않았고, 지겟가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고대 풍습을 기록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우리 민족의 초기 지게 모양이 바로 이런 모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관가에서 성곽을 쌓는데, 젊은이들이 등에 1장 길이의 나무를 대고 짐을 나르는데, 온 종일 일하면서도 힘든 줄을 모르더라”는 내용이다. 그림상의 아스텍제국 지게와 같다.


    금줄과 정한수
     






    <그림17> 산파가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치는 모습.
    <그림18> 금줄을 친 신령한 나무 아래서 연주하는 무당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아이를 낳으면 집 앞에 금줄을 쳐서 잡인의 방문을 금했다. 이는 그 아이의 운명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소위 ‘액(厄), 즉 나쁜 기운’이 방문객을 통하여 묻어 들어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금줄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걷혔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방문을 허용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금줄은 아이를 낳은 경우에만 친 것이 아니고, 성황당이나 산신제를 지내는, 소위 신성한 곳에도 쳤다. 금줄에는 원형 금줄과 줄형 금줄이 있었다. 멕시코에도 이와 똑같은 풍습이 있었다. 스페인 출신 가톨릭 신부인 사하군(Sahagun)의 책에 남겨진 기록과 그림에 따르면, 멕시코 원주민들도 원형 금줄과 줄형 금줄을 쳤다.

    <그림17>은 아기가 태어나자, 산파가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집 앞에 칠 원형 금줄을 받고, 아기의 운명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점쟁이를 ‘다마틴이(tlamatini)’라고 불렀다. 우리말 ‘다 마친 이(다 맞히는 이)’의 고어(古語)이다.

    <그림18>은 산위에 있는 산신제를 올리는 곳이다. 줄형 금줄을 치고, 신령한 나무 아래서 무당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줄형 금줄에 대한 설명에는 “새끼줄을 꼬아서 만들었고, 같은 풀로 만든 술이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멕시코 원주민들은 태어난 아이에게 복을 빌어 주기 위하여, 집 동쪽에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아이를 안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후에, 복을 빌어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정한수를 떠놓고 빌던 풍습이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악기들도 우리 민족의 것과 같은 것이 많다. 그중에 하나만 공개하면, 징이다. 그들은 징을 ‘태질라가틀(신성한 질라가틀)’이라고 불렀다.


    四柱와 占
     






    <그림19> 가운데 사람 얼굴을 한 태양은 태양신을 상징한다. 점쟁이가 들고 있는 것이 《토날보왈리(신성한 날을 보아서)》라는 책임을 나타낸다. 점쟁이 얼굴 앞에 있는 짧은 지팡이 같은 그림은 ‘굽어진 혀’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말한다’는 기호이다. 즉 점쟁이가 사주풀이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말한다’는 이 기호는 경주의 신라시대 고분인 천마총의 천마 입 앞에도 그려져 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운명을 알기 위하여 사주(四柱)를 봤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달력은 두 종류로서, 각각 히의보왈리(Hiuhpohualli)와 토날보왈리(Tonalpohualli)이다. 각각 ‘해를 보아서’와 ‘신성한 날을 보아서’라는 우리말이다. 달력 명칭에 사용된 ‘히’와 ‘날’은 오늘날의 우리말 ‘해’와 ‘날’이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주풀이와 점치는 데 사용한 달력은 토날보왈리였다. 이 달력은 우리 민족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음력 달력과 기본 체제가 같다. 우리 민족도 사주풀이나 점을 칠 때에는 음력 달력을 아직도 사용한다.

    <그림19>는 멕시코 원주민이 아이를 데리고 점쟁이를 찾아가서 아이의 운명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그림 설명에 따르면, 점쟁이는 먼저 아이의 태어난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를 물어보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토날보왈리를 펼쳐서, 그날과 그 시각에 해당하는 각종 그림 기호를 보고서, 아이의 평생의 운명을 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또 사주를 바탕으로 운이 좋은 남녀가 결혼했는데, 이것도 우리 민족의 옛 풍습과 같다.

    이 달력을 이용하여, 멕시코 원주민들은 점을 매우 많이 쳤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항상 먼저 점을 치고 날을 받았다. 장사하기 위하여 먼 길을 갈 때도 점을 쳐서 날을 받았고, 이사하거나 새로운 집을 지을 때도, 결혼을 할 때에도 역시 점을 치고 길일(吉日)을 받아서 행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모두 아기를 업고 다녔다. 아스텍제국이 정복된 지 20여년 후에 스페인 신부 고마라(Gomara)가 쓴 문헌에는 멕시코 원주민들의 육아(育兒) 풍습이 자세히 나와 있다. 


    아기를 업고 다니며 젖을 줄 때는 ‘찌찌(tzitzi)’라고 말해
     






    <그림20> 멕시코 여인의 아이 업은 모습(왼쪽)과 20세기 중엽의 우리나라 여인이 아기를 업은 채로 젖을 먹이는 모습.



    고마라에 의하면, “원주민들은 아기를 등에 업고 포대기로 둘렀는데, 포대기 양쪽 끝을 젖가슴 위에서 동여매었고, 등에 업힌 아기의 머리는 엄마의 목까지 왔다”고 한다. 그는 또 “등에 업은 아기에게 젖을 줄 때에는 머리를 겨드랑이 밑으로 돌려서, 젖을 물렸으며, 그때 ‘찌찌(tzitzi)’라고 자주 말했다”면서 “‘찌찌’는 아마도 ‘젖’이나 ‘젖주다’를 뜻하는 말인 것 같다”는 해석까지 덧붙였다. 

    <그림20>은 멕시코 원주민의 아이를 업은 모습과 우리 민족 여인들이 등에 업힌 아이에게 젖을 줄 때의 사진이다. 겨드랑이 밑으로 머리를 돌린 모습이 고마라의 설명과 일치한다. 또 아이의 나이를 말할 때, 태어난 해를 한 살로 치고, 그 다음해에는 두 살로 말했는데, 이런 나이 계산법은 서양의 나이 계산법과 비교하면 심지어 두 살까지도 차이가 난다고 했다. 멕시코 원주민의 나이 계산법은 우리민족의 것과 같았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9-09 조회 1283
  • 우리 무가에서 칠성님으로 나타나는 북두칠성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삼원의 우주공간노중평의 우리 별 이야기<24> 태미원·천시원·자미원에 기록된 한민족 역사 세가지 관점에서 하늘 바라본 우리 선조-'一析三極'이 유기적 관점 원리 노중평<천상열차분야지도>에 나타난 우주공간에서 태미원, 천시원, 자미원을 합쳐서 3원이라 한다. 태미원은 한국의 역사가 기록된 우주공간, 천시원은 배달나라의 역사가 기록된 우주공간, 자미원은 조선의 초기역사가 기록된 우주공간으로 하였다. 이로써 <천상열차분야지도>에 기록된 별자리나 별들이 상고시대 동이족의 역사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그런데 별이 아닌 수數로 우주의 원리를 유추할 수 있도록 만든 경문이 하나 있다. 81자 경문인데 이 경문을 <천부경>이라 하였다. 그냥 숫자로만 되어 있다면 굳이 <천부경>이라고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한자桓字를 수자에 추가하여 우주를 유추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름을 <천부경>이라 하였다. <천부경>의 천부天符는 하늘이 보여주는 부호符號를 의미하는 문자이다. 우주를 덮은 별들을 의미하기도 하고, 우주의 원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천부경>에서는 우주의 원리를 수리체계를 만들어 이 수리체계를 통하여 우주의 원리를 유추할 수 있게 하였다. 우리가 하늘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우주는 다양한 의미로 파악된다. 천문학적인 관점에서 우주를 파악하거나, 점성학적 관점에서 우주를 파악하거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우주를 파악하거나, 역사기록의 관점에서 파악하거나, 역易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관점 등 다양한 관점으로 파악한다. 이 모든 관점을 한 마디 말로 줄이면 ‘천부의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천부의 부符는 부호, 또는 符作이라는 뜻이다.  나는 역에서 우주를 바라보는 철학적인 관점을 선호한다. 이 관점은 특이하다. 우주를 눈에 보이는 하늘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 둘로 나누어 파악하기 때문이다. 첫째 역에서 보여주는 눈에 보이는 하늘은 천天이다. 천은 인간이 하늘을 무엇이라고 말하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가시적可視的인 태초의 하늘이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現象 그대로의 하늘을 말한다. 이 하늘엔 3원 28수가 <천상열차분야지도>안에 떠있다.둘째 인간이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하늘이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건乾이라는 이름의 하늘이다. 이 하늘은 인간이 전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생각을 발전시켜 볼 수 있는 하늘이다. 이 하늘을 볼 수 있게 하는 하늘로 들어가는 장치가 효爻와 괘卦이다. 셋째 북두칠성과 해와 달을 천부로 보는 철학적인 관점과 종교적인 관점의 하늘이 있다. 철학적인 관점은 천부를 정체성의 대표로 보는 관점이고, 종교적인 관점은 천부를 해혹복본이라는 종교적 메시지로 보는 관점이다. 우리의 선조는 대체로 이들 세 가지 관점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들 관점은 각각 독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어느 한쪽을 들어내면 줄줄이 따라 올라오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유기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원리를 일석삼극一析三極이라 말할 수 있다. 일一은 이理이고, 삼三은 기氣이고 석析은 기의 변화이다. 일이 삼으로 가면 우주를 생성하고 운행하며 지배한다. 이미 1만4천 년 전부터 삼신교三神敎가 이러한 논리 속에서 나왔다. <천부경>에서 일석삼극의 원리가 운삼사성환運三四成環하면 이를 <역易>에서 元亨利貞이라 하였다. 원형이정으로 가는 길이 도道이다. 도는 바로 하늘 길이다. 하늘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그러나 우주에 갈림길은 없다. 오로지 각 별들이 가는 제 길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뭇 별들이 제 길을 갈 수 있으므로 형통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치가 역시 원형이정이다. 하늘 길을 천도天道라고 한다. 해의 길을 황도黃道라고 하고, 달의 길을 백도白道라 한다. 이렇게 모든 별들이 가는 길이 하늘에 무수히 많다. 그래서 갈림길이 하늘에는 없다. 뭇 별들이 제 갈 길을 가는 것을 대행大行이라 하였다. 한국의 우주 태미원 동방창룡칠수東方蒼龍七宿의 첫 별인 각수角宿의 왼쪽에는 태미원太微垣이 자리 잡았고,오른쪽에는 천시원天市垣이 자리 잡았다.왼쪽이 오른쪽보다 우선하는 12진 방위이므로,동이의 선조인 풍이가 먼저 왼쪽에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태미원의 태太자는 수로 보면1로 볼 수 있는 문자이다. 태극이 ‘태극→양태극→삼태극’으로 확장하므로, 태극을 수로 바꾸면 ‘1→2→3’으로 확장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태극을 1로 보고, 양태극을 2로 보고, 3태극을 3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태太는 태일신太一神에서 보듯이 유일신唯一神의 의미가 있다. 패거리신들을 하나로 묶어서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오로지 유일한 신인 하나님을 의미한다. 태미원太微垣의 미微자에는 세밀하게 나눈다는 뜻이 있다.태太는 뜻이 ‘큰’ 또는 ‘하나’이므로, 미微자가 붙어서,‘큰 하나를 세밀하게 나누었다’는 뜻을 갖는다.‘동이’가 생기기 전에 ‘동이’의 전신인 구한九桓이 한桓을 아홉으로 나누었다. 한국桓國에 ‘구한’이 있었으므로, 태미원을 구한의 자리로 본다면, 세밀하게 나눈다는 뜻을 가진 태미원의 미微자는 구九로 볼 수 있는 문자이다.또한 태太를 1로,한桓을 1로 볼 수 있으므로,태미원을 수로 바꾸어 일구원一九垣으로 읽을 수 있다.一九는 一이 확장하여 九가 된다는 <천부경>적 논리체계이다. 태미원을 달리 읽는다면, 한구원桓九垣,한미원桓微垣이 된다. 하늘에 나라의 체제가 최초로 등재되는 태미원의 원垣에서 원시적인 경제체제를 읽을 수 있다.‘원’은 울타리로서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상고시대에 사람이 울타리를 만들고 모여서 할 수 있었던 일이란,공동체의식을 다지는 일이었다. 원垣을 풀이하면,‘원’은 땅과 하늘 사이에 해가 뜨는 곳에 토담을 쌓은 장소라는 뜻으로 풀린다. 그러니까 해가 뜨는 동쪽에 울타리를 쌓아 ‘원’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이 울타리가 사람이 모이는 시장이다. 위에서 태太를 한桓으로,미微를 구九로 풀었으므로,이 울타리에 구한九桓이 모였다고 볼 수 있다.한桓자와 원垣자를 비교해 보면,의미가 같다.두 곳이 다 하늘과 땅 사이에 해가 뜨는데,한桓은 구한九桓이라는 종족을 나타내고,원垣은 구한이 모이는 장소를 나타내었다.구한이 모이는 곳에 목木자를 써서 해가 뜨는 동쪽임을 표시하였다. 해가 뜰 때, 무슨 목적으로 구한이 원에 모였던 것일까? 그 첫째는 ‘해마지’라는 공동체 행사를 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인다.항姮이라는 문자가 있는데,‘해마지’하는 여자를 나타낸다.‘해마지’하는 여자는 오늘날에도 ‘일월마지’를 하는 무당이다.무당을 내세워 ‘해마지’의식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해를 의미하는 문자로 항恒이라는 문자가 있다. 해를 항성恒星이라고 한다.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는 나라를 세울 때 해마지를 한 분이다.桓因天帝라는 문자에 그 뜻이 들어있 다.한桓은 구한九桓이 ‘해마지’를 한다는 뜻을 가진 문자이다.인因은 나라국囗자 안에 임금을 의미하는 대大자가 들어있다는 뜻이다.나라국囗자는 울타리를 두른 나라를 의미한다. 원垣과 같은 뜻이라고 볼 수 있다. ‘원’ 즉 울타리를 둘러 ‘나라가 됨’을 국囗자로 표시하였다.대大자는 크다는 의미를 가진 문자인데,큰 하나를 의미한다. 하늘이 크다는 의미로 천天이라고 하고,나라가 크다는 의미로 인因이라고 하였다.천자는 하나 즉 一이 크다大는 뜻이다. 햇빛이 크게 빛나니 대旲라고 하였다. 한인천제는 ‘해마지’를 하고 큰 나라를 세워 한인천제로 불리었다.「부소보서」에는 이를 뒷받침해 주는 놀라운 기록이 있다.  ▲  한인천제와 항영의 비상을 그린 천문도. 한인천제가 기묘년에 한국을 개국하였는데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한인천제 부부가 뱀 형상의 UFO를 타고 축하비행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인천제가 나라를 개국한 해가 기묘己卯年이다.기묘년을 풀어 보면, “동쪽의 땅에 해가 뜬다.”는 뜻이다.기己는 땅,북두칠성,뱀의 의미를 가진 문자이다.사巳라는 문자에서 기己라는 문자가 나온다.인간의 성씨姓氏로 보면,최초의 성씨인 사씨巳氏에서 기씨己氏가 나온다고 볼 수 있다.오늘날의 소씨蘇氏가 사씨巳氏에서 기씨己氏로 변하고,기씨己氏가 소씨蘇氏를 사성함으로서 생겨난 성씨이다.‘사씨’는 풍이를 구성한다.풍이風夷의 풍風자에 사巳(虫)가 들어 있다.옛날에 사巳자와 충虫자는 같은 뜻으로 썼다. 사씨가 풍이를 구성하고 있다는 말이다. <부소보소>에서는 풍이가 정착한 곳을 풍주風州 배곡이라 하였다.풍주란 풍이가 정착한 주라는 뜻인데,주州라는 문자는 <천부경>의 수 9를 나타내는 문자이다.그러므로 한국시대에 이미 풍이가 사는 구주九州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한국의 국도가 풍주에 있었고,국도의 이름이 배곡倍谷이었다.배곡이란 ‘배골짜기’라는 뜻인데,인체의 배는 하늘에서 하늘을 의미한다. 이집트인들이 그들이 남긴 벽화에서 인간의 배를 하늘로 그린 예가 있다.이러한 예로 보아서,‘배 골짜기’는 곧 ‘하늘 골짜기’가 된다.따라서 풍주 배곡은 “구한인 풍이가 정착한 하늘 골짜기”로 해석된다.한인천제는 이곳에서 오이烏夷의 여자 항영姮英을 후后로 맞아들였다.‘오이’는 “해를 숭상하는 이족夷族”이다.항영姮英은 “해마지를 하는 여자 영英”이다. 영英은 열매가 열지 않는 꽃,즉 사람으로서는 처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한인천제는 ‘하늘골짜기’에서 해마지를 하는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그는 항영과의 사이에서 아홉 아들을 낳아 구주九州에 봉하였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태미원에는 한국의 개국신화가 숨어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한국의 개국조인 한인천제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밝혀주는 귀중한 별자리가 있다. 이 별자리가 자미원의 중심에 있는 북극오성에 속한 천제성天帝星이라는 별자리이다.그가 온 곳이 북극성 즉 천추성임을 북극오성이 말해 주고 있다. 배달나라의 정착지 천시원 동이가 발생한 각수의 오른쪽에는 천시원이 있다.한웅천왕은 배달나라를 세우고 경제체제를 신시神市로 하였다. 신시의 모델이 천시원天市垣에 있다. 하늘의 신시가 열리는 곳이 천시원이다.천天에서 신神이 나오기 때문에, ‘천시원’이 ‘신시원’이 된다고 본다.   한웅천왕은 BC38971년에 배달나라를 세웠다.그는 오가의 무리 3,000명을 이끌고 삼위태백三危太白이 조응하는 곳에 정착하였다.삼위태백은 삼위성三危星)과 태백성太白星이다.그러니까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면,위수삼성과 태백성이 보이는 곳,즉 삼위성과 태백성이 조응하는 곳에 정착한 것이다. 여기에 울타리를 치고 신시를 세웠다.이 곳의 머리 위에는 천시원이 있고,땅에는 신시가 있다. 한웅천왕이 세운 나라를 배달나라라고 하였는데,신시와 혼용하여, ‘신시’나 ‘배달나라’ 혹은 ‘신시배달나라’라고도 한다. ‘배달나라의 국도’ 또한 ‘한국의 국도’였던 “배곡의 다른 표현”임을 나타내는 문자이다.따라서 ‘배곡’ 즉 ‘배 골짜기’나 ‘하늘골짜기’에 나라의 국도를 정했다는 뜻의 말이라고 하겠다. <단군세기> 서문에 단군왕검을 “신인神人의 덕德이 있다”고 하고, “나라 사람들이 천제의 아들(天帝子)로 받들어 모셨다”고 하였다. ‘신인’은 인신人神이라는 뜻이다.인신은 지신地神 천신天神과 함께 삼신三神을 구성한다.삼신이 곧 천신 지신 인신인 것이다.이들 종교적인 의미의 신을 철학적인 의미의 신으로 개념화하려면,신을 빼어 천지인天地人만 남기고 경敬을 넣으면 된다.이렇게 하면 천경天敬 지경地敬 인경人敬이 되고, 이를 다시 바꿔 쓰면,경천敬天 경지敬地 경인敬人이 된다.이를 삼경三敬이라 말할 수 있다. 하늘에 속한 삼신은 하늘에 해당하고,땅에 속한 삼경은 땅에 해당한다.하늘에 울타리를 치고 삼신이 모이면 천시원이 되고,땅에 울타리를 치고 삼경이 모이면,신시원이 된다. 신시원을 줄이면 신시가 된다. 이리하여 천시원은 신시의 모델이 되는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보면,한웅천왕이 온 곳이 북극오성北極五星에 속한 서자성庶子星이다.그가 한인천제처럼 북극성 즉 천추성에서 왔음을 나타내는 별자리이다.조선을 완성한 곳 자미원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완벽하게 완성을 본 때는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운 조선조 초기로 보인다.필자는 가륵단군 때로 보고 있다. 먼저 마고시대에 천문이 태동하여,한인시대에 태미원과 태미원과 관련이 되는 별자리들이 완성을 보고,다음에 한웅천왕시대에 천시원과 천시원과 관련이 되는 별자리가 완성을 보고,마지막으로 단군왕검시대 초기에 자미원과 관련이 되는 별자리가 완성을 보아서, 비로소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마무리했다고 볼 수 있다. 자미원紫微垣은 자미원 안에,태미원과 천시원에 준하여,천추를 중심에 두고 우추와 좌추가 만드는 울타리를 가지고 있다.이 울타리가 조선시대의 천시이자 신시인데, 이 울타리의 모델을 태미원과 천시원으로 볼 수 있다.[노중평 역사천문학회 회장]  [출처] 마고문명 연구소  …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8-24 조회 1259
  • 김정민 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니며, 고조선의 풍속과 제도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도 발견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는 지난 18일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2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고대사 역사인식 공유를 위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 김정민 박사



    이날 김정민 카자흐스탄 까즈구대학 국제관계학 박사는 '한국의 고조선과 카자흐스탄의 공통점과 역사적 연계성'이라는 주제에서 편두풍습과 언어 등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니다. 한단고기에 따르면 고대 한국인들은 자신을 색족(色族)이라고 불렀다. 색족은 황부인(黃部人), 백부인(白部人), 적부인(赤部人), 청부인(靑部人)으로 분류했다.”

    김 박사는 "고대 한국인이 색족이라면 고대 카자흐족 최초의 민족은 '삭족'이었다"며 "카자흐족은 한국의 색족처럼 신분을 색깔로 구별해서 옷을 입었는데, 적색의상은 왕족, 귀족이 입었고, 백색의상은 종교를 담당하는 신관계급들이, 목동은 푸른색, 농민은 황색 옷을 입었다"고 밝혔다.

    『한단고기』에 따르면 적부인과 황부인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피부가 구리색에 코가 낮다. 적부인과 황부인의 차이는 바로 적부인의 경우 이마가 넓고 뒤로 길게 기울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 기록에 대한 의문의 해답은 카자흐족의 삭족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삭족의 지배계급이었던 적색계급은 몽골계 인종으로 이들은 편두를 했었다. 즉 한단고기에서 언급했던 적부인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고대인들은 왜 편두풍습을 만들었을까?

    김정민 박사는 "고대 샤머니즘에서 최고의 신은 태양신이고 불은 바로 태양의 화신 또는 태양의 아들로 인식이 되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번개가 나무에 치면 불이 붙으므로 사람들은 불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따라서 지상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머리 모양을 불의 형상으로 가꾸어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이에 불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머리를 편두로 만들어 길게 한 다음에 곱슬머리를 만들어 머리모양을 불로 만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 높은 관심을 나타낸 청중들



    흥미로운 것은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의 머리 모양도 이와 같다는 주장이다.

     

    "고타마의 출신이 왕족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깨달음을 얻고 얻은 석가모니라는 이름도 의미는 ‘사카족의 승려’라는 뜻으로 고타마의 혈통은 사카족 즉 색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타마도 삭족의 전통을 따라 편두를 하고 곱슬머리를 해서 머리를 불의 형상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한국의 지도자, 국가명, 위성국가, 수도 등에서 언어적 유사성이 제기됐다.

    첫째 한국의 지도자가 ‘단군’이라면 카자흐스탄은 '탱크리'였다. 둘째 국가명에서 우리는 '조선'인데 카자흐스탄은 ‘주스 또는 주잔’ 이라고 했다. 셋째 조선의 수도가 '아사달'인 것에 대해 카자흐스탄은 ‘아스타나’라고 한 점이다. 마지막으로 단군조선이 마한, 진한, 변한이라고 삼조선을 나타낸 것과 마찬가지로 카자흐스탄 또한 오르타, 크스, 울루라는 3개의 위성국가로 나타낸 점이다.

    김 박사는 "조선, 주잔, 주스는 하나의 어원에서 나온 파생어이다"며 "몽골에서는 주잔, 만주족의 주천, 카자흐족의 주스, 헝가리인의 구스, 우즈벡인들의 우즈이라고 했다. 이들 모두 북방민족들이 연방정부를 수립하고 지역을 크게 삼분할하여 통치하고 중대한 사항을 쿠릴타이라는 화백제도를 통해서 결정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유라시아에 ‘대형고분’이 사라진 이유는?

    한편,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펼쳐진 대형 고분을 직접 답사한 연구결과가 발표돼 주목을 받았다.

     




     

     



    ▲ 하야시 토시오 일본 창가대학 교수가 18일 '유라시아초원 북망기마민족의 생성과 발전, 고분문화의 흥망성쇠'를 주제로 발표했다. 





     

    하야시 토시오 일본 창가대학 교수는 "카라수크 (Karasuk) 시대 동안 기원전 2,000년에서 1,000년 사이 몽골 초원에는 최초로 군사적, 정치적 힘을 가진 집단이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유목민족의 영향력은 몽골초원에서부터 급속도로 유라시아 초원을 지나 우크라이나까지 뻗었다. 유목민족을 하나로 통합한 거대한 부족의 최초 지배자는 그의 권력과 힘을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표현수단으로서 대량의 희생제물을 함께 부장한 거대 고분을 권력의 상징으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하야시 교수는 유목민족의 지도자들이 세운 거대한 고분은 몇 세기 후에 사라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첫째, 초원 지배자들의 막강한 권력과 힘이 이미 전 세계에 알려졌으므로 그 힘을 과시하기 위해 초원에 거대한 고분을 지을 필요가 없어졌고, 둘째로 지도자들은 자신과 조상의 무덤이 도굴꾼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이밖에 나비잔 무카메타눌리 카자흐스탄 까즈구대학 역사학 교수는 "고대 카자흐족과 한민족의 천신관념사상에 대한 공통성에 대한 고찰"을, 주채혁 전 세종대 교수는 "조선, 선비의 선과 스키타이: 순록, 양, 유목의 기원문제"를 발표했다.

     




     

     


    ▲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고대사 역사인식 공유를 위한 국제학술회의 종합토론.




     

    이성민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대표는 "최근 중국의 만리장성 부풀리기, 일본의 독도 문제 등 역사 갈등 등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는 일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같은 문명을 지닌 동일한 의식을 찾는 일이다"며 "고대 민족에 대해 연구해온 동북 아시아 역사학자들의 발표가 그 시작이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행사는 동북아역사재단과 서울국학원이 후원했다.  행사를 주최한 '국학운동시민연합'은 지난 2001년에 발족, 2004년에 문화관광부 비영리 민간단체로 승인받았다. 그동안 동북공정 반대 100만 서명운동, 고구려 학술회의, 일본교과서 개악 저지를 위한 일본대사관 앞 집회, 한민족 역사문화 청소년 글짓기 대회 등 공익활동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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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9-09 조회 1245
  • 한자혜례 -세계 최초로 밝힌 한자원리
    https://www.youtube.com/channel/UCG3VkxhQCJabJiDacux2bgw https://www.youtube.com/watch?v=40acKlZ9rXo&list=UUG3VkxhQCJabJiDacux2bgw&index=47 한자해례 …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7-31 조회 1219
  • 마고지나
    고대사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있습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8-27 조회 1211
  • 서라벌, 계림 그리고 신라
    서라벌, 계림 그리고 신라이름이 많은 나라, 신라BC 57년 개국 시: 서라벌, 서나벌, 시라, 신라 등탈해왕 9년: 계림, 서라벌지증왕 4년: 신라德業日新 網羅四方(덕업일신 망라사방)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두루 망라하였다. - 《삼국사기》후세의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아 윤색된 것이라는 학설 우세‘신라’는 무슨 뜻일까?① 새 신(新) + 라(나라) = ‘새로운 나라’ (조선 실학자 한진서)② 신라는 ‘’를 소리 나는 대로 쓴 것 (동쪽) + (땅) = ‘동쪽의 땅’ (국문학자 양주동)③ (솟다) + (땅) = ‘솟터, 높고 신성한 땅’ (역사학자 이병도)동쪽의 신성하고 높은 땅, 신라신라를 해석하는 또 다른 견해구체적 사물 ‘철’과 연관해 해석(쇠, 철) + (땅) = ‘철을 만드는 땅’북방 철기문화 민족이 남하해 金村() 건설지배족의 성씨를 金()으로 표현‘쇠’를 다루는 유이민이 북쪽에서 내려와 신라 건설고조선 유이민이 내려와 신라의 원 집단인 사로6촌을 구성했다. - 《삼국사기》고구려에 관구검이 침입하자 피난한 세력 중 일부가 남쪽으로 내려와 신라를 세웠다. - 《수서 신라전》도깨비의 유래한국 전통의 도깨비 이미지에는 뿔 부재일제강점기, 《혹부리 영감》이 「조선어독본」에 실리며 일본 도깨비 ‘오니’ 이미지 전달도깨비 방망이, 도깨비 불, 금 나와라 뚝딱! 은나와라 뚝딱!, 노래, 밤에 활동이방인의 이미지한국 전통의 도깨비 이미지는 철을 만드는 이방인의 모습- 불을 때고 노동요를 부르며 밤에 일하는 특성- 철의 불순물을 없애는 과정에서 방망이 사용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신라 형성 당시 철을 다루던 유이민들의 모습이 도깨비로 형상화- 일부 민속학자들의 해석신라의 다른 이름, 계림탈해왕 9년의 국호, 계림(鷄林)닭을 신성시하는 닭 토템 반영석탈해가 왕일 때 숲에서 밤새 닭 우는 소리가 났다. 사람을 보내 살피니 나무에 금빛 상자가 있고, 그 위에서 닭이 울고 있었다. 그 상자에서 아이가 나왔는데 그가 김알지다. 그 숲을 ‘계림’이라 부르고 국호도 ‘계림’이라 했다. - 《삼국사기》신라 3성씨 왕 중, 김씨족단의 닭 토템을 반영한 이야기인도인들은 신라를 ‘구구타예설라’라고 부르는데 ‘구구타’는 닭을, ‘예설라’는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다. - 《삼국유사》신라를 ‘닭신을 섬기는 나라’로 표현경주시 황남동 155호 고분천마총 유물함에서 토기에 담긴 달걀 20여 개 발굴(1973년)신라인들은 왜 닭을 귀하게 여겼을까?닭은 풍요와 번성의 상징신라의 3성씨 시조는 모두 난생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는 알에서 태어난 존재 새의 알, 물고기의 알처럼 곡식의 낱알도 알로 표현‘알’은 풍요와 번성의 상징이자, 토착 농경문화의 상징융복합의 나라, 신라국호에 나타난 신라의 특징- 쇠를 만드는 나라- 동쪽의 새로운 나라- 닭 토템으로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문화[네이버 지식백과] 서라벌, 계림 그리고 신라 (SERICEO - 고대사 숨은 이야기) …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8-22 조회 1134
  •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포리 남포마을 천제. 지제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포리 남포마을 천제. 지제제명 : 산신제신격 : 산신, 몽달무자제당 :일시 :신화전해오는 당설화는 없다.천제의 장소는 마을 동쪽 입구 ‘당거리’, ‘최영당’이라 불리는 곳에 있는 사장나무 2그루이다. 지제의 장소는 마을 서쪽에 있는 토석제단이다.제를 지내면서 소지를 할 때 ‘몽달무자’하고 징을 치면서 소지를 하는데 동달무자는 장가를 못가고 총각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들에게 따로 제를 지내줄 자손이 없다 하여 이때에 제를 지내주는 것이다.제가 끝나면 돼지머리의 한쪽 귀와 진설했던 음식들을 입자 없는 무주독귀을 위해 땅 속에 묻어 헌식한다. 예전에는 돼지머리를 땅 속에 묻고 잠시 후에 꺼내서 다시 씻은 후에 음복 때 술안주로 삼았으나 지금은 돼지머리 한쪽만 조금씩 떼어 헌식을 한다.다음 날 마을 사람들은 당집에 모여 천제와 지제에서 장만한 음식을 먹는다. 과거에는 그 해 운수가 나쁘거나 부정한 곳을 다녀왔거나 부정한 음식을 먹었던 사람이 제 음식을 먹으면 ‘증맞아 죽는다’, ‘고혈압이 생긴다’는 등 많은 속신들이 있어 이들에게는 참석이 금지 되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1114
  • 天記 1성 천기 천기별
    天記 1성 천기 천기별천기는 주로 짐승의 수명을 주관하는 별이다. 천기 옆에는 귀수 하늘개 별자리인 천구가 있으니 이 천구의 생명도 함께 주관했을 것이다.문학 : 구전설화 [사슴과 토끼와 두꺼비의 나이]우리나라에 전하는 구전설화 중에 사슴과 토끼, 두꺼비가 서로 자기 나이가 많음을 주장하는 내용이 있다. 천기 별자리가 실제로 짐승의 수명을 주관하므로 연관이 있는 이야기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관련이야기삼신할미별자리가 된 당금애기…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1109
  • 천준 하늘그릇별자리
    천준 하늘그릇별자리천준(天樽)은 하늘그릇 별자리이다. 주로 그릇에 담는 음식과 술 등을 주관해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는 일을 담당한다.역사 : 오윤부와 천준 별자리오윤부는 최지몽과 함께 고려 때의 대표적인 천문학자이다. 그는 충렬왕 때 여러 관직을 거쳐 판관후서사로 승진된 인물로, 천문과 별점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오윤부는 밤에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하늘과 별을 관찰하는 일을 빠뜨린 적이 없었다. 그가 천준 별자리와 관련해서 별점을 친 기록이 고려사 열전 [오윤부]에 남아 있다.스토리 : 오윤부4. 天樽3성 천준 하늘그릇 별자리1. 서성 δ Gem-쌍둥이자리2. 중성 56 Gem-쌍둥이자리3. 동성 63 Gem-쌍둥이자리[조선왕조실록]《 단어 검색 - 天樽星[전체]...3 》명종 12년 1 건(1557년)명종 18년 1 건(1563년)숙종 35년 1 건(1709년)관련이야기북두칠성의 한 별, 베리데기…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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