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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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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1-27 11:31 조회 43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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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

1. 3개 민족의 공동 조상, 치우
현재 치우는 중국과 먀오족, 한국에서 모두 자신의 조상이라 주장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먀오족의 이탈을 막기 위하여 먀오족의 요구를 받아들여 황제, 염제와 함께 중화민족의 조상임을 인정하였다. 먀오족의 경우 묘만(苗蠻) 이전의 역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치우를 자신들의 역사적 조상으로 만들었다. 한국의 경우 재야학자와 일부 학자들이 ‘치우동이족설’을 근거로 치우가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 중국의 치우 인식
상나라시대 갑골문에서 치(蚩)는 라고 쓰는데 ‘재앙’이라는 의미이다. 우(尤)자는 라고 쓰는데 “많은 사람의 몫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갑골문에서 치(蚩)자와 우(尤)자는 모두 ‘재앙’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치우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춘추시대 제작된 문헌인 『상서(尙書)』이다. 『상서』는 요순시대부터 주나라에 이르는 시기 군왕의 공문서, 군신간의 대화, 전승되는 역사적 사건 등을 기록한 책이다. 『상서』 중 「여형(呂刑)」편은 주나라시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치우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여형」 편의 내용을 요약하면 “치우는 묘민(苗民)의 수령으로 난을 일으키고 온갖 잔혹한 형벌로 묘민을 다스려 황제(皇帝)는 치우를 징벌하여 후대가 단절되었다”고 한다. 춘추시대 기록의 특징은 치우는 묘민의 수령이며 치우를 징벌한 존재가 후대 기록에 등장하는 황제(黃帝)가 아니라 황제(皇帝)라는 것이다. 황제(黃帝)는 신화전설적인 인물로 제왕의 시조를 말하며, 황제(皇帝)는 실제로 백성을 다스리는 왕을 의미한다.
춘추 중기에서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진(晉)나라 어정비(魚鼎匕)가 2개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에는 “삼묘(三苗)의 수령은 치우이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춘추시기 치우는 삼묘의 수장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묘는 창강(長江) 중류지역에 거주한 고대민족으로 묘민과 같은 집단을 의미한다.

2010년 산시성(山西省)에서 발견된 발견된 어정비와 명문2010년 산시성(山西省)에서 발견된 발견된 어정비와 명문

전국시대 문헌기록에 보면 “치우는 황제(黃帝) 또는 염제의 신하(『관자·오행(管子·五行)』, 『일주서·상맥해(逸周書·嘗麥解)』)로, 반란을 일으켰는데(『장자·도척(莊子·盗跖)』, 『산해경·대황동경(山海經·大荒東經)』, 『일주서·상맥해(逸周書·嘗麥解)』), 탁록 또는 기주(『산해경·대황동경』, 『일주서·상맥해』, 『시자(屍子)』 『장자·도척』)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문헌기록의 특징은 처음으로 치우와 전쟁을 한 상대로 황제(黃帝)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상서』의 황제(皇帝)는 황제(黃帝)로 바뀌게 되고 이후 모든 문헌에서는 황제(黃帝)를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치우와 전쟁을 한 존재가 확정되지 않아 황제 또는 염제로 나타나고, 전쟁을 한 장소도 기주와 탁록으로 오락가락한다. 전국시대 문헌은 역사작가들이 춘추시대의 신화전설을 기억하는 방법으로 서술한 것으로 아직은 통일된 견해가 성립되지 않았다.
한나라시대 치우 관련 문헌기록의 특징은 “치우의 신분은 황제의 제후로 규정(『사기·오제본기(史記·五帝本紀)』)되고, 치우와 황제가 전쟁을 한 장소가 탁록(『사기·오제본기』『염철론·결화(鹽鐵論·結和)』)으로 고정된다”는 것이다. 사마천이 “황제는 요순우보다 이른 시기 존재한 첫 번째 제왕으로 반란을 일으킨 제후인 치우를 물리치고 세상을 평정하였다”고 서술함으로써 치우는 신화전설의 색채를 버리고 완전한 역사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 시기 또 다른 특징은 치우가 악을 상징하며 증오의 대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후난성(湖南省) 마왕두이(馬王堆)에서 발견된 『황제사경·십륙경·정란(黃帝四經·十六經·正亂)』에서는 “치우는 교만하고 음탕하며 계략을 꾸민다”고 전제하고 치우를 살포한 후에는 “살가죽을 벗겨 과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화살을 쏘도록 하고 많이 맞추는 자에게 상을 주고, 머리카락을 잘라 하늘에 달았는데 치우기(蚩尤旗)라 하며, 위장을 잘라 공을 만들어 사람들이 차게 하였으며, 그의 뼈와 살은 다져 육장(肉酱)을 만들어 씀바귀나물과 섞어 모든 사람들이 먹게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악인형상은 오히려 치우가 전쟁의 신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한나라시대 치우의 역사화와 악인화는 이후 중국인들의 치우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삼재도회(三才圖會)』의 각저도(角抵圖) 치우는 전쟁신의 성격으로 인하여 나례에서 벽사의례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소머리가면을 쓴 두 사람이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치우희(蚩尤戱)를 추고 있다.  명나라시기 제작.『삼재도회(三才圖會)』의 각저도(角抵圖)
치우는 전쟁신의 성격으로 인하여 나례에서 벽사의례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소머리가면을 쓴 두 사람이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치우희(蚩尤戱)를 추고 있다. 
명나라시기 제작.

당송 정부는 염세를 거둬들이기 위하여 산시성(山西省) 윈청시(運城市)에 있는 소금호수를 대대적으로 개발한다. 송나라에 이르면 치우가 소금호수에서 관우와 전쟁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매우 유행하게 된다. 처음 윈청시의 소금호수와 치우를 연결시킨 것은 한나라시대 문헌인 『공자삼조기(孔子三朝記)』로 “황제가 치우를 중기(中冀)에서 죽이고 팔다리, 머리, 몸을 여러 곳에 버렸는데 피가 소금이 되었다. 윈청시의 염지(鹽池)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송나라에 이르면 “소금호수가 붉게 변하는데 민간에서 치우의 피라고 한다”(『몽계필담(夢溪筆談)』), 윈청시 일대에 ‘치우성(蚩尤城)’이 있다(『노사(路史)』,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윈청시 일대에서 치우와 관우가 전쟁을 하였다(『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遺事)』,『관왕사적(關王事迹)』)와 같은 기록들이 등장한다. 이들 이야기에서 “치우는 인간계의 실존 인물이 아니라 천상에 거주하는 악신으로 사람들이 황제의 사당을 짓는 것에 분노하여 소금호수를 핏빛으로 물들였으나 관우에 의해 진압되었다”고 한다. 송나라 이전의 치우는 전쟁신으로 숭배되기도 하였으나 송나라에 이르면 전쟁신의 자리마저 관우에게 빼앗기고 모든 악의 근원이 되었다.

 치우의 피  산시성(山西省) 윈청시(運城市)에 있는 소금호수는 비가 온 후에 붉은 색으로 변하는데 민간에서는 치우의 몸이 절단되면서 나온 피라고 한다.  치우의 피 
산시성(山西省) 윈청시(運城市)에 있는 소금호수는 비가 온 후에 붉은 색으로 변하는데 민간에서는 치우의 몸이 절단되면서 나온 피라고 한다. 

청나라 말기 치우는 다시 역사무대에 등장한다. 당시 지식인들은 제국주의 침략으로 병탄에 빠진 중국을 구하기 위하여 황제를 중심으로 한족을 응집시키고자 하였다. 특히, 혁명파 지식인인 장타이옌(章太炎)과 류스페이(劉師培)는 “한족만이 황제의 후손”이며, “황제는 한족의 혈연적인 조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 치우는 위대한 한족의 조상인 황제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하여 악인형상으로 재소환된다.
1928년 룽산문화(龍山文化)가 발견되면서 1930년대에 푸쓰녠(傅斯年)은 양사오문화(仰韶文化)는 서부의 하족(夏族)이 건립한 것이고, 룽산문화는 동부의 이인(夷人)이 건립하였다는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을 주장한다. 이하동서설에 영향을 받은 쉬쉬셩(徐旭生)은 고문헌에 등장하는 황제와 치우에 대한 기록을 양사오문화와 룽산문화에 대입시켜 하족은 황하 중류에 거주하였고, 치우는 황하 하류 산둥성(山東省) 지역에 거주한 동이족이라는 설을 새롭게 주장한다.(『中國古史的傳說時代』, 中國出版社, 1943) 기존 문헌기록에 의하면 치우는 묘민이었으나 쉬쉬셩에 이르러 갑자기 동이족으로 바뀌었으며 현재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정부는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이탈하려는 민신을 규합하기 위해 황제와 염제를 중심으로 단합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치우는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악인으로 재조명되었다. 이에 먀오족은 자신들의 조상인 치우도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중국 정부는 먀오족의 요구를 받아들여 황제, 염제와 함께 치우를 중화민족의 3대 조상으로 인정하고, 1997년 허베이성(河北省) 줘루현(涿鹿縣)에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지어 함께 모시고 있다.

3. 먀오족의 치우 인식
『먀오족간사(苗族簡史)』에 의하면 “먀오족은 5,000년 전 부락연맹인 구려(九黎)를 이루었으며 수령은 치우였는데 황제를 수령으로 하는 황하 상류의 부락이 황하 하류로 침입해 탁록에서 패배하였으며, 창강 이남으로 이주해 묘민이 되었다”고 한다. 치우가 먀오족의 조상임을 증명하기 위해 먀오족 학자들은 “치우는 구려의 임금이다”(『국어․초어(國語․楚語)』, 『상서․여형석문(尙書․呂刑釋文)』)와 “삼묘가 구려의 덕을 계승하였다”(『국어․초어하(國語·楚語下)』)는 문장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치우 관련 내용은 원문이 아닌 후대에 주석을 붙인 것으로 신빙성이 떨어지며, 삼묘가 계승한 것은 구려의 악행이지 혈통이 아니므로 위의 문헌자료는 치우가 먀오족의 조상임을 증명하지 못한다.
문헌기록 외에 민간에 전승되는 치우 관련 전설과 신앙도 근거로 들고 있다. 구이저우(貴州) 서북부 허장(赫章)에 거주하는 양 씨의 먀오족 성씨는 ‘치츠유’로 치우와 발음이 비슷하며 이들의 조상은 싸루(한족) 집안과 전쟁을 하여 패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치우가 찼던 차꼬와 수갑이 변해 단풍나무가 되었다”(『산해경․대황남경(山海經․大荒南經)』)고 하는데 구이저우 동남지역 먀오족 사이에는 단풍나무 숭배가 있음으로 치우는 먀오족의 조상이라고 한다. 먀오족 지식인들은 민간의 전설 중 유사한 부분이 있으며 바로 치우 전승이라 하며 연계시켰다. 그리고 “단풍나무는 창강 중하류 지역 사람들이 모두 신앙한 대상”(『남방초목상(南方草木狀)』, 『이아익(爾雅翼)』)으로 치우가 먀오족의 조상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1990년 이후 중국정부는 중화민족은 모두 염제와 황제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염황열(炎黃熱)을 일으켰고, 먀오족 지식인은 치우열(蚩尤熱)로 맞불을 놓았다. 치우열을 이끈 이는 홍군 출신의 노장군 천징(陳靖)이었다. 그는 중국 각지에서 염황상을 세우고 염황사당을 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부의 지도자와 현지 담당자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는 중화민족이기는 하지만 염황의 후손은 아니다.” 이렇게 시작된 염황과 치우의 20세기판 탁록대전은 중국 정부가 치우를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인정하여 중화삼조당에 황제, 염제와 함께 모시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천징 장군은 사석에서 치우를 먀오족의 조상으로 만들고자 한 속내를 밝혔다고 한다. “치우가 진짜 먀오족의 조상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먀오족을 단결시킬 정신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 먀오족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먀오족을 단결시킬 민족영웅이 필요하였고, 치우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만들었다.

4. 한국의 치우 인식
한국에서 치우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1990년 말로 주로 재야학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위서인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의 기록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여 치우와 황제의 전쟁에서 황제가 승리하였다는 중국 기록은 왜곡된 것이며, 치우가 승리하였다는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의 기록이 옳다고 주장한다. 중국 학자 쉬쉬셩의 ‘치우 동이족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기반으로 “고대 우리 민족은 산둥성 일대에서 활동한 동이족임으로 치우는 우리 조상이고, 동이족이 거주한 산둥성 일대는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였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치우는 동이족과 남방 묘만족의 공동 조상이며, 묘족과 우리 민족은 치우를 공동 조상으로 하는 같은 지류가 된다”(이덕일·김병기,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아침, 2006)는 주장까지 등장한다.
‘치우 동이족’설은 중국에 의해 오히려 역공을 당하여 “치우는 동이족이고, 한국인도 동이족이므로 한국인은 중화민족의 일원이다”라는 주장이 등장하게 된다. 치우가 중국인임으로 당연히 한국인도 중화민족이라는 논리다. 타이완의 유심성교에서는 이러한 논리에 기반하여 단군부터 김정일까지 한국의 역대 제왕을 황제, 염제와 함께 제사하는 행사를 매년 대대적으로 거행하고 있다.

타이완의 유심성교에서 2006년 허베이성 줘루현에 건립한 치우사(蚩尤祠)에 모셔진 한국 역대 제왕의 위패타이완의 유심성교에서 2006년 허베이성 줘루현에 건립한 치우사(蚩尤祠)에 모셔진 한국 역대 제왕의 위패

치우가 한국인의 조상임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증거로는 신라시대 귀면와를 들고 있다. 귀면와는 7세기 후반에 경주지역의 궁궐과 사찰건축물에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귀면와를 수면척두와(獸面脊頭瓦)라 하며 북위시대 처음 등장하여 당나라시대 번성하고 송나라 이후 사라진다. 일본에서는 귀와(鬼瓦) 또는 수면문와(獸面紋瓦)라고 하는데 태재부(太宰府), 평성궁(平城宮) 등 대표적인 궁전건축과 법륭사(法隆寺), 국분사(國分寺), 칠대사(七大寺) 등 많은 사찰에서 발견된다. 현재 학계에서는 일본 수면문와에 포함된 특징이 한반도의 요소가 많은가 아니면 중국 대륙의 영향이 많은가 등에 대해 의견의 차이가 있으나 일본과 한반도의 수면문의 기원이 중국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을 보고 있다.

한국 통일신라 '귀면와' 한국 통일신라 '귀면와' 
중국 당나라 '수면척두와'중국 당나라 '수면척두와'
일본 법륭사 '수면문와'일본 법륭사 '수면문와'

중국의 수면척두와는 상주시기 도철문에서 기원하며, 도철문은 다시 창강 하류의 신석기문화인 량주문화(良渚文化, 기원전 3,200년-2,000년)의 수면문(獸面紋)에서 기원한다.

량주문화의 옥기 상의 수면문 량주문화의 옥기 상의 수면문 

결론적으로 귀면와가 처음 시작된 곳은 중국이며, 그 기원은 창강 하류의 신석기문화인 량주문화에 있음으로 귀면와는 치우가 한국인의 조상임을 증명할 수 없으며, 치우가 동이족이라는 설도 성립할 수 없다.

5. 치우를 활용한 고대사 만들기
위의 내용을 통하여 중국과 먀오족, 한국에서 모두 치우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 한 명인 치우가 3개 민족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각자 자기 민족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집단기억을 강화하거나 구조적 망각을 하는 방법을 통하여 고대사를 재구성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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