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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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역사를 찾아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남 남해군 미조면 사항마을 최영장군 제사와 당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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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1-27 12:01 조회 511 댓글 0

본문

경남 남해군 미조면 사항마을 최영장군 제사와 당산제

 

 

 

 

 

 

 

 

 

 

 

 

 

제명 : 최영장군제사, 당산제
신격 : 최영장군, 당산, 산신
제당 : 최영장군사당(마을 언덕의 무민사 내), 산신당(최영장군사당 뒤)
일시 : 최영장군제사(음력 4월 20일), 당산제(음력 10월 15일)


개괄

사항마을에서는 최영장군제사와 당산제, 두 개의 제사를 지낸다. 최영장군제사는 음력 4월 20일에 지내고, 당산제는 음력 10월 15일에 지낸다. 사당제사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최영장군의 사당은 제당과 향교가 어우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당산 제사는 미조리 본동 사람들만 참석한다. 당산에는 우물이 있었으나 레이더기지가 생기면서 그곳에 지하수를 만들어 4~5년 전부터 물이 나오지 않는다. 당산나무의 제사는 10월 보름에 지낸다.

제의내용

<최영장군 제사>
최영장군 제사는 마을 전체 주민이 참석하며, 음력 4월 20일에 지낸다. 제관은 3명을 뽑으며, 제사는 초헌-아헌-종헌-고축으로 이루어진다. 보통 제관은 최영장군유적보존회나 미조면 출신 사람 중 덕망 있는 사람들이 한다. 제물도 보존회에서 준비한다. 제물을 구입하는 일부 비용은 사당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다.
사당제사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최영장군의 사당은 제당과 향교가 어우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당 앞의 건물은 향교로서 역할을 하고, 사당 안에는 최영장군의 영정과 칼이 있다. 한편 사당 안에는 돌로 만든 장군상이 있다.

<당산제>
당산 제사는 미조리 본동 사람들만 참석한다. 당산에는 우물이 있었으나 레이더기지가 생기면서 그곳에 지하수를 만들어 4~5년 전부터 물이 나오지 않는다. 당산나무의 제사는 10월 보름에 지낸다. 본래는 깨끗한 사람이 제관이 되었으나, 사람들이 원하지 않자 7~8년 전부터 이장이 제관이 되었다. 본래 스님을 모시고 제를 주관하려 하였으나 경비상의 문제를 들어 그만 두었다. 미조리 본동의 가구수는 120호이며, 집집마다 제사 경비로 3천원을 거둔다. 과거 제관이 되면 1년 동안 바다의 몰을 마을껏 떼어갈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그러나 몰은 1년 중 봄에만 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그리 길지 않다.
제사를 지낼 때마다 제수 그릇을 새로 구입하고, 제사가 끝나면 제관은 그릇을 가지고 간다. 제물은 삼색과일, 흰떡, 돼지머리, 물고기(수어)를 놓으며, 술은 막걸리를 쓴다. 제물을 구입할 때는 값을 깍지 않는다.
제관은 제사지내기 일주일 전에 당산에 올라갔으나, 지금은 집에서 3일동안 정성만 드린다. 당산에는 음식을 만들고 제관이 쉴 수 있도록 조립식 집을 만들어 놓았다. 제사가 끝난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은 이장집에 모여 음복을 한다.

신격

최영장군 : 고려말 장군으로 남해안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은 왜구를 물리진 장군이다. 최영장군의 이미지는 다양하다. 관복을 입고 좌정된 영정도 있고, 석인상을 최영장군이라 하기도 한다. 장군모를 쓰고 손을 앞으로 모아 도포 속에 숨기고 화상도는 화살통을 매고 칼을 옆에 세워 둔 것이다. 또 다른 화상도는 장군모를 쓰고 의자에 앉아 있는데 칼을 세워 들고 있다.
산신 : 호랑이에 올라 앉아 호랑이의 귀를 잡고 왼 손은 앞으로 내밀고 있는 화상도 이다. 옆에 시중을 드는 여인이 연꽃을 그릇에 담아 들고 있다. 구체적인 기능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신화

촌로가 꿈에 최영장군이 학을 타고 내려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런 후 바닷가에 하얀 단지가 흘러 들어왔다. 그 안에 최영장군의 영정이 있었다고 한다. 학이 내린 곳에 최영장군 사당을 짓게 되었다.

제당의 형태

석인(민불, 장군상)
위치 : 미조면 미조초등학교 동편에 있는 무민사의 본당 건물 동쪽 편 축대 아래에 있는 돌부처상으로 투구를 쓰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마치 장군이 칼을 짚고 선 형상을 하고 있다.
형태와 재질 : 투구를 쓰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마치 장군이 칼을 짚고 선 형상을 한 석인(石人)으로 가로 60㎝, 세로 84㎝, 높이 19㎝의 돌 제단 위에 높이 87㎝, 어깨 너비 37㎝의 크기이다.
특징 : 조선조 후기에 와서 불상, 장승, 석인상의 여러 요소를 가미하여 만든 민불(民佛) 제작이 성행하게 되는데, 민속 신앙이 빚은 불상이라 하여 ‘민불’이라고 부른다. 너무나 소박하고 고졸(古拙)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무민사가 조선 성종 때 (1470~1494년) 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무민사 건립 후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며 현지 주민들의 주된 기도처가 되고 있는데, 이는 이 민불 앞에 촛대를 꽂을 수 있도록 아예 못까지 박아둔 사실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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