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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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역사를 찾아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기 화성군 비봉면 유포리 당제와 도당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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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1-27 12:10 조회 44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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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화성군 비봉면 유포리 당제와 도당굿

제명 : 당제(도당굿)
신격 : 12당, 시험당, 서낭
제당 : 마을 앞 당산과 와가 당집
일시 : 음력 11월 2~3일


개괄

이곳의 당제는 뱃고사와 결부된 어업생산의례였는데 대단한 규모로 행해졌다. 그러나 조기잡이가 30여 년 전에 사라지고 중선배와 기계배마저 25년 전에 사라진 후, 당제는 축소되어 나가다가 최근 어장이 없어지면서 끊겨버렸다. 이곳 배들도 한창 때는 ‘임장군이 조기를 몰고 다닌다’고 해서 임장군을 크게 모셨다.

제의내용

유포리는 1리(대장굴, 유지)와 2리(버들무지)로 나뉜다. 1리는 70호,2리는 50호이며 각성받이 마을로 전형적인 어촌이었으나 폐장된 이후에는 대부분 생업을 놓고 있다. 공공시설로 1976년도에 지은 마을회관이 있고, 교통편은 수원 시내버스가 2시간 간격으로 1일 8회 운행하고 있다. 초등학교로는 비봉초등 유포분교가 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비봉중고교나 수원으로 나간다. 생활권은 남양장에서 수원장으로 옮겨졌다. 주산물은 예전에는 갯지렁이, 가리맛 등이었으나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어장이 오염되어 잡히지 않는다. 통혼권은 주로 수원권역이다(1988년?1990년 조사)

① 제명: 당제(도당굿)
② 당명 및 형태
마을입구에 당산과 와가 당집이 있다(大韓光武四年庚子閨八月初日 申午時立柱上梁 西紀1966年 7月17日午前十時立柱上樑). 신격은 12당이었으나 현재 몇 가지만 전승되고 있다. 도당님 두 분이 웃어른이며, 12당 이외에 당의 심부름꾼인 ‘시험당’이 있었다. 그 외, 마을에 장승이 있어 ‘서낭’이라 불렀다. 신체는 종이에 붓글씨로 써서 벽에 부착시켜 놓았다.
③ 제일 및 제주
음력 11월 2일 정일부터 3일까지 지냈다. 제주는 다음과 같다.
?제 관: 1인. 제를 총괄한다.
?당 주: 당을 관리하면서 집에서 음식도 준비한다.
?오가당: 다섯 집에 하나씩 책임자를 정하여 고기를 잡으면 분육하는 일을 담당한다.
?시 험: 3인. 물건을 사고 준비한다.
?문 서: 1인. 돈쓴 내역을 기재하고 관리한다.
?공 원: 1인. 문서를 도와 돈의 지출을 관리한다.
제주들은 제일이 임박했을 때 회의를 통하여 선출한다(혹은 당제 끝나고 난 뒤의 회의에서 당주 등을 새로 뽑음).
④ 제비 및 제물
최근에는 각호마다 갹출하였으나 예전에는 큰 조기잡이배(중선배)가 많았던 관계로 배 임자가 주로 돈을 냈었다. 물건 구입은 수원장, 남양장을 이용하며 ‘시험’이 구입했다(소는 남양 도살장). 제물은 12당마다 각기 차려놓는데 시루떡(팥), 흰떡(가래떡), 소고기(익힌 것), 간(생 것), 호이갓(천엽, 생것)을 놓는다. 소당에는 삼색(배, 사과, 밤, 대추, 산자)을 포개서 놓는다. 소는 반드시 황우로 잡아야한다.
⑤ 제차
마을회의에서 제주들이 선출되면 전체가 금기생활에 들어간다. 그리고 소를 잡아오면 당주 집에서는 제물준비에 들어간다. 제물용 고기는 집, 도당굿, 배로 용도를 삼분한다(당에서 쓸 고기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뱃고사용으로 배로 보냄).제일이 되면 당에서 당주의 주도하에 문서, 공원, 시험 등이 함께 안반고사를 지낸다. 잔을 부어놓고 절하고 당소지를 올리는데 각 호마다, 각 선주마다 올려준다.
안반고사가 끝나면 뱃고사로 들어가는데 배마다 선주가 떡을 해놓고 각기 지낸다. 이때 누군가의 호명 아래 동작 빠른 사람들이 당고기를 잽싸게 들고서 배로 뛰어간다. 이때 1등하는 배가 고기를 많이 잡는다고 한다. 2일차가 되면 그때야 무당이 온다. 주로 수원 무당인 ‘용해’네 패거리나 ‘오필성’ 등이 왔다. 대략 7~8명이 피리, 대금, 깡깽이 등을 잡게 된다. 먼저 당주네 집에서 마당굿을 잠깐 하고나서 당으로 간다. 한바퀴 돌면서 굿거리 12석을 모두 끝내는데 이때 각호마다 꽃반상을 잠깐 하고나서 당으로 간다. 한바퀴 돌면서 굿거리 12석을 모두 끝내는데 이때 각호마다 꽃반상을 들고 올라가 소지도 올리고 비나리도 한다(꽃반을 쌀을 상 위에 펼치거나 말로 놓고 숟가락, 실, 호주 밥그릇을 올림). 이어서 마을우물굿을 올린다. 샘 앞에서 ‘뚫어라 뚫어라’ 하면서 무당이 고사를 지낸 후, 약 1미터 정도 길이의 수숫대를 묶어서 남자무당이 주동이 되어 엉덩이를 찌르면서 논디. 즉, 우물고사와 굿놀이가 이어지는 것이다. 이어서 장승굿을 올린다.
마을입구에 ‘부루백이 서낭’이라는 장승과 ‘비둘기’가 세워져있고(남쪽), 바다로 향한 출구에는 ‘뒷깨서낭’과 ‘비둘기’가 세워져있는데(남은 동방청제대장군, 북은 서방백제대장군이라 쓰여 있었음), 장승굿은 ’수살막이‘로 하였고, 술 한잔과 떡?고기를 간단히 차려놓는 고사형식이었다.
저녁에 동네로 돌아와서는 넓은 마당에서 ‘거리굿’을 놀게 된다. 짚으로 ‘정애비’를 만들어놓고(허수아비의 일종) 먹고 놀고 무감을 섰다. 정애비는 6척 이상의 큰 짚새기로 만들어졌는데 거리굿이 끝나면 불태워버렸다. 이때 판을 크게 벌일 적에는 줄도 타고(무당 오필성씨가 줄타는 사람이었음) 굿놀이도 크게 했다.
뱃고사할 때는 배마다 봉죽기를 당 앞에서 꽂았는데 그 수효가 대단했다. 봉죽기란 말 타고 갑옷 입은 임장군기와 오방색기, 종이꽃, 오색종이발 등으로 장식된 기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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