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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녕金寧 김씨 金氏
    김녕金寧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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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산錦山 김씨 金氏
    금산錦山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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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하交河 김씨 金氏
    교하交河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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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廣州 김씨 金氏
    광주廣州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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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양光陽 김씨 金氏
    광양光陽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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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산 김씨(光山金氏)
    광산 김씨(光山金氏)

     광산(光山)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북서부(北西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백제(百濟)의 무진주(武珍州)였는데 신라(新羅)에서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서기 757년(경덕왕 16)에 무주(武州)로 고쳤다. 진성여왕(眞聖女王 : 제51대 왕, 재위기간 : 887 ∼ 897 ) 때는 견훤(甄萱)이 이곳에 후백제(後百濟)를 세워 도읍을 정하기도 하였으나 918 년(고려  태조 19) 태조(太祖) 가 신검(神劒)을 토멸(討滅)하고 군현(郡縣)을 정비할 때 처음으로 광주(光州)라 칭하였다.  성종(成宗) 때 와서 해양현(海陽縣)으로 불리우다가 1259년(고종 46) 기주(冀州 : 일명 기양주)로 고쳤으며 충선왕(忠宣王) 때 이르러 화평부(化平府)로 강등되어 공민왕(恭愍王) 때 광주목(光州牧)이 되었다. 조선(朝鮮) 성종조(成宗朝)에 현(縣)으로 강등되어 광산(光山)이라 칭하다가 연산군(燕山君) 때 다시 주(州)로 승격하였고, 1895 년(고종 32) 전국을 23부(府)로 나눌 때 나주부(羅州府) 관할의 광주군(光州郡)이 되었으며 1935년 광주(光州)가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광산군(光山郡)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名門)으로 손꼽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신라왕실(新羅王室)의 후예인 김흥광(金興光)이 장차 국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경주(慶州)를 떠나 광주(光州)의 서일동(西一洞 : 지금의 담양군 평장동)에 은거(隱居)하여 시적(始籍)하게 되었으며, 고려조
    (高麗朝)에서 정2품직인 평장사(平章事)를 많이 배출하여 마을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 불렀다.
     고려초기(高麗初期)부터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한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시조의 10세손 체의 아들 위(位)와 주영(珠永) 형제대(代)에서 크게 두갈래로 나뉘어져 광세(光世)와 광존(光存)의 양대산맥으로 이어진다.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광세(光世)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그의 아들 경량(鏡亮)이 대장군(大將軍)에 올랐고, 손자(孫子) 수(須)는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순절하였으며, 주정(周鼎)은 충렬왕(忠烈王) 때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역임하였다. 수(須)의 손자인 광재(光載 : 문정공 태현의 셋째 아들)는 공민왕(恭愍王) 때 난정이 시작되자 두문불출 하였으며 어머니가 죽자 무덤가에 여막(廬幕)을 짓고 거상(居喪)하니 왕(王)이 그의 효성(孝誠)을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 곳에 <영창방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는 정표(旌表)를 세우게 했다. 세종조(世宗朝)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예몽(禮蒙)의 아들 성원(性源)은 세조(世祖) 때 [동국여지승람(東國與之勝覽)]을 편찬했고, 손자 구(絿)는 중종(中宗) 때 조광조(趙光祖)의 혁신정치에 동조한 소장파로 김 정(金 淨)·김 식(金 湜)·한 충(韓 忠) 등과 더불어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졌으며 뛰어난 필법과 명문장으로 외교문서를 집필했고 그가 살던 인수방(仁壽坊)의 마을 이름을 붙여 인수체(仁壽體)란  필체가 생겨났다. [당적보(黨籍譜)]에 의하면 김 구(金 絿)는 중국(中國) 사람들이 자기의 글씨를 귀중히 안다는 말을 듣고는 글씨를 쓰지 않아 세상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 중종(中宗) 때의 우의정(右議政) 극성(克成)은 30여 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경륜과 계책이 비상하여 조정에서 명성을 날렸다. 다시 광존(光存)의 인맥을 살펴보면 그의 현손(玄孫) 진이 대제학(大提學)에 올랐고, 진의 증손(曾孫) 약채(若采)에서부터 조선조(朝鮮朝)의 명맥(名脈)이 이어졌다. 고려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약채(若采)는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를 지냈고, 그의 아우 약항(若恒)은 공민왕 때 대사성(大司成)으로 사신(使臣)이 되어 명(明)나라에 갔다가 표문(表文)이 공손치 못하다고 하여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양자강변에 유배(流配)되었다가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였다.뒤에 황제의 노여움이 풀려 가족에게 시체를 찾아가라고 하여 늙은 여종이 부인이라고 핑계하고 남경까지 가서 시체를 찾아왔다. [용재총화]에 보면 약항(若恒)의 아들 처(處)는 아버지가 외국에서 죽었으므로 충격을 받아 미친병이 들어 소리내어 울고 밤에는 싯귀(詩句)를 길게 읊으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비틀거리고 다녔으며, 허(虛)는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어머니 상(喪)을 당하자 여막(廬幕) 벽에다가 효경(孝經)의 상친장(喪親章)을 써서 붙이고 날마다 바라보며 읽고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이도록 울기를 3년동안 조금도 쉬지 않았으니 그 비참하게 우는 소리에 듣는 사람이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관찰사 약채(若采)의 증손(曾孫) 국광(國光)은 성종(成宗) 때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좌리일등공신(佐理一等功臣)으로 광산부원군(光山
    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일찍이 익성공(翼成公) 황 희(黃 喜)가 그를 한번 보고 큰 인물로 인정하여 자기 손녀(孫女 : 소윤 황보 신의 딸)로서 아내로 삼아 주었고 "작게 성취할 사람은 아니다"하고 그를 대할 때 반드시 갓을 썼다고 한다. 세조(世祖)가 상정국(詳定局)을 열어 당시의 학문(學問)이 뛰어난 신하를 뽑아 조종(祖宗)의 옛 제도를 참작하고 시대의 사정에 맞게 가려내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할 때 그도 뽑히어 뛰어난 업적을 남겨 세조가 "국광 같은 사람은 참으로 문(文)과 무(武)를 겸비한 재사이다" 하고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친필을 써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어느 날은 편전에 있으면서 손수 자기 밥을 떠 먹여 주었다고 한다. 국광(國光)의 아우 겸광(謙光)은 성종(成宗)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功)을 세워 좌리삼등공신(佐理三等功臣)으로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고, 국광의 아들 극뉴는 대사간(大司諫)을, 극복(克福)은 찬성(贊成)을 역임하였다. 한편 겸광(謙光)의 아들 극핍은 연산군 때 바른 말을 하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고산현(高山縣)으로 유배되었고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을 받아 일생을 귀양지에서 생활했었다. 극뉴의 손자(孫子) 개(鎧)는 명종(明宗) 때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오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증손(曾孫) 계휘(繼輝)는 선조(宣祖)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에 능통하여 국사가 있을 때마다 자문에 응했다. 계휘의 아우 은휘(殷輝)가 일찍이 초야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광해군(光海君)이 세자(世子)로서 동궁(東宮)에 거처하게 되자 세자빈의 아버지인 류자신(柳自新)이 궁중의 서헌(西軒)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러자 은휘(殷輝)는 그의 무례함을 논책(論責)하면서 왕봉(王鳳 : 한나라 성제의 외삼촌으로 정권을 잡아서 무례한 행동으로 임금의 거처인 궁정을 빌린 일이 있었다)의 고사(古事)에 비교하니 깜짝 놀라서 피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송익필(宋翼弼)이 아버지인 송사련(宋祀連)의 잘못으로 세론의 증오를 받아 멸문(滅門)의 궁지에 몰리자 10년 동안이나 먹여 살려 선조(先祖)의 잘못으로 누를 입는 현량(賢良)들을 그늘에서 구원하였다. 조선 예학(禮學)의 종주(宗主)로 가문(家門)에 명문(名門)의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리게 한 사계(沙溪) 장생(長生)은 1548년(명종 3) 대사헌(大司憲)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당대에 8문장가로 이름난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석학(碩學) 이율곡(李栗谷)에게 성리학(性理學)을 전수받아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쌍벽을 이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영수가 되었다. 천성이 겸손하며 어질고 후하여 자연히 도(道)에 가깝고 학문하는 방법은 한결같이 종자(種子)와 주자(朱子)를 법으로 삼아 세상살이의 화려함을 싫어하였으며 당시의 예(禮)에 관한 질문은 모두 그에게로 왔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맨 먼저 장령(掌令)에 임명하면서 안거(安車 : 늙고 병든 사람이 편안하게 탈 수 있는 수레)와 임금의 친서(親書)를 보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병든 몸으로 여러 훈신들에게 글을 보내기를 <시종(始終) 삼가하여 임금의 덕을 잘 보도하며 묵은 폐단을 개혁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며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사로이 가까운 내시, 궁녀 등을 경계하며 염치를 존중하고 검약을 몸소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의 글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지고, 임금이 그의 재능과 덕망을 정치에 이용하고 싶어 초조해 했다고 한다. 벼슬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그쳤으며 83세에 연산(連山)에서 생을 마치며 후손에게 다음 두 가지 유훈(遺訓)을 남겼으니, <첫째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 모습이 아니니 쓰지 말 것, 둘째 내 자손이 수십 대에 이르더라도 의(誼)를 두터이 지낼 것> 이었다. 그가 남긴 [경서변의(經書辯疑)] 8권, [의례문해(疑禮問解)] 8권,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1권, [가례집람(家禮集覽)] 3권, [상례비요(喪禮備要)] 1권 등 총21권의 저서(著書)는 한국(韓國)의 예전(禮典)으로 평가된다. 장생(長生)의 예학은 아들 집(集)에게 이어지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에게 전승되어 조선 예학(禮學)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집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남보다 특이하여 충신효제(忠信孝悌)로서 몸을 세우는 근본을 삼았으며, 이치를 탐구하고 경(敬)를 주장하는 것으로 도학(道學)의 터전을 삼았다. 1646년(인조 24) 산적(山賊) 류 탁(柳 濯) 등이 난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들에게 류 탁이 말하기를 "김승지(金丞旨 : 김 집) 집을 지나가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경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흉악한 무리들도 어진 사람을 두려워 하고 피할 줄은 안다"하였다.  그는 아버지(長生)를 40여 년간 모셨는데 그 부자(父子)의 법도를 지켜 아들이 질문했을 때 아버지는 몸이 앓는 일이 있어도 단정히 앉아서 대답한 것이라든지, 각상(各床)과 각방(各房)에서 밥을 먹을 때 아버지의 젓가락 놓는 소리를 듣지 않고는 미리 밥상을 물리는 법이 없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부인 유씨(兪氏)의 성품이 분명하지 못하여 부부의 도리를 갖출 수가 없어 마침내 이율곡(李栗谷)의 서녀(庶女)를 얻어 첩을 삼았는데 어질고 여공(女工)을 잘하였다. 유(兪)씨 부인이 죽자 그의 아버지 사계(沙溪)는 아들이 상처하였으니 후처를 얻어 아들을 낳아서 선대를 계승할 수 있겠다고 속으로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각각 운명이 있는 법인데 운명이 좋지 않아서 먼저 사람(유씨)과 짝이 되어 평생동안 욕을 보았는데 이제 비록 다시 장가 든다고 하여도 꼭 먼저 사람보다 나을 줄 알겠습니까?" 하며 대(代)를 잇지 못하였다. 한편 이조 참판(吏曹參判) 반(槃 : 사계의 아들, 집의 아우)의 아들 익희(益熙)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론자(斥和論者)로서 화의를 반대했고 왕(王)을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가서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싸웠으며, 그의 아우 익겸(益兼)은 병자호란 때 어머니 서씨(徐氏)를 데리고 강화(江華)에 들어가 성(城)을 사수하다가 함락되기 직전에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남문(南門)에 올라가 자폭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숙종(肅宗)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의 주역인 익훈(益勳 : 반의 아들, 익겸의 아우)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의 정권을 다시 잡자 강계(江界)로 유배되었으며, 현종(顯宗) 때의 예조 참판(禮曹參判) 익경(益炅)은 죽은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다가 양성(陽城)으로 귀양 갔다. 인경왕후(仁敬王后 : 숙종의 비)의 아버지인 만기(萬基)와 효자(孝子) 만중(萬重)은 익겸(益兼)의 아들로서 형제가 나란히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명신(名臣)이다. 특히 만중(萬重)은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남을 평생의 한으로 삼고 홀어머니 윤씨(尹氏)의 곁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하며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밤낮으로 어머니와 얘기하며 동물 흉내와 어린이 흉내까지 내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남해(南海)의 유배지에서 쓴 한글소설 [구운몽(九雲夢)]은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란 내용으로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썼다고 한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중종(中宗)의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와 혼인하여 광천위(光川慰)에 봉해진 인경(仁慶:겸광의 증손)과 이 황(李 滉)의 문인(門人)으로 안동(安東)지방의 학문융성 창도자로 알려진 언기(彦璣)가 유명했고, 전적(典籍) 세우(世愚)의 아들 규는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벼슬이 판윤(判尹)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의 명장(名將) 덕령(德齡)은 충절(忠節)로 가문(家門)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人物)이다.  그는 1567년(명종 22) 광주 석지촌에서 붕섭(鵬燮)의 아들로 태어나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인 성 혼(成 渾)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 현감(長城縣監) 이 귀(李 貴)의 천거로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號)를 받고 의병(義兵)을 정돈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권 율(權 慄)의 휘하에서 수차에 걸친 전쟁에 공(功)을 세웠다. 그는 젊어서부터 뛰어난 용맹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일찍이 이 귀(李 貴)가 그를 천거하는 글에 <지혜는 공명(孔明)과 같고 용맹은 관우(關羽)보다 낫다>고 하였다.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신경행(辛景行 : 당시 충청도 순찰사 종사관)의 무고로 국문을 받다가 옥사(獄死)했다. 그가 임전했을 때는 항상 철퇴 두 개를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그 무게가 백 근이나 되어 팔도에서 그를 신장(神將)이라 불렀고, 왜군들도 그의 용맹을 무척 두려워 했다고 한다.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의하면 왜장 기요마사(加藤淸正)는 그 명성을 듣고 몰래 화공(畵工)을 보내어 그 얼굴을 그려다가 보고는 <참으로  훌륭한 장군이다>하고 항상 계엄하였고, 뒤에 덕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술을 마시고 기뻐 날뛰면서 "이제 양호(兩湖)는 걱정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한편 만수(萬壽)·천수(千壽)·백수(百壽)·구수(九壽) 4형제는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유극량(劉克良)의 군대와 장단(長湍)에 합세하여 임진강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광운(光運)과 두남(斗南)은 진주(晋州)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가문을 빛냈고, 선조(宣祖) 때 대북(大北)의 지도자였던 질간(質幹 : 이조 참판을 역임)은[동몽훈설(童蒙訓說)]을 저술한 진우(震羽), 호남(湖南) 8문장의 한 사람인 공선(公善)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외 선조(宣祖) 때 포도시(葡萄詩)로 중국(中國)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영남(潁南)과 숙종(肅宗) 때 예서(隸書)에 능했고 [옥산유고(玉山遺稿)]를 남겼던 우형(宇亨 : 공조판서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감)이 뛰어났으며, 진(搢)은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지내고 볼모로 심양에 갔다가 두문불출하고 학문(學問)에만 진력했다. 영조(英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양택(陽澤)은 부제학(副提學)과 대사성(大司成)·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776년(영조  52)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상복(相福)은 영의정을 역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전임되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금위대장(禁衛大將) 기석(箕錫)과 학문과 덕망이 높아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던 지수(志洙) 등이 가문(家門)의 의맥(義脈)을 이었고, 재풍은 친로파(親露派) 세력에 쥐어 허덕이는 국권(國權)을 회복하는데 앞장서서 한말 풍운에서 고절(古節)있는 대인(大人)으로 추앙받았다. 익현(翼鉉)의 아들인 영덕(永悳)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한말에 죽음으로써 한일합방을 반대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영숙(永肅)과 함께 예의충효(禮義忠孝)의 전통을 이어온 명문 광산 김씨(光山金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결과에 의하면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174,912가구, 750,70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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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 김씨(公州金氏)
    공주 김씨(公州金氏)

     공주(公州)는 충청남도 동부(東部) 중앙에 위치한 고장으로, 백제(百濟)의 옛 도성(都城)이었다. 백제는 서기 475년(문주왕 1)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이 곳에 수도를 옮기고 웅진(熊津)으로 이름하여 538년(성왕 16)에 부여(扶餘)로 천도(遷都)하기까지 약 60여년간 도읍으로 정했었다. 그후 서기 670년(신라 문무왕 10) 신라(新羅)에 속했으며 신문왕(신문왕 : 제 31대 왕, 재위기간 : 681 ∼ 692) 때 웅천주(熊川州)로 고쳤다가, 940년(고려 태조 23) 공주(公州)로
    개칭하였다. 공주 김씨(公州金氏)의 시조(始祖) 김의손(金義孫)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예 오산군(鰲山君) 김지대(金之岱 : 청도 김씨의 시조)의 9세손이다. 그는 조선 세종(世宗)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거쳐 돈령부사(敦寧府事)에 오른 점(漸)의 아들 3형제중 둘째로, 어려서 사마시(司馬試 : 과거제도의 하나로 진사와 생원을 뽑는 소과)에 합격하고 참판(參判)을 거쳐 공주백(公州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공주(公州)로 삼아 청도 김씨(淸道金氏)에서 분적(分籍)하였는데, 시조(始祖) 의손(義孫)의 아들중 여의(麗義)·일동(逸東)·응동(應東)은 청도 김씨를 계승하였고, 용(龍)은 공주파(公州派)로, 구(龜)는 평양파(平壤派)로, 타는 곽산파(郭山派)로 각각 세계(世系)를 이었다. 역사상 두드러진 인물을 살펴보면 만의(萬義)의 아들 학기(學起)가 조선 세조(世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낸 후 1478년(성종 9) 서거정(徐居正)·최숙정(崔淑精) 등과 함께 [동문선(東文選 : 신라에서부터 조선 숙종 때까지의 시문을 모은 책)] 편찬에 참여하고, 집의(執義)를 거쳐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벼슬)에 올라 크게 명성을 날렸으며, 그의 아우 학익(學益)은 현감(縣監)을 지냈다.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태좌(台佐)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고, 천경(天慶)은 1627년(인조 5)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응참(應參)·응철(應哲)등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능한산성(綾漢山城)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헌종(憲宗)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추증되었다. 그외 덕량(德良)이 1546년(명조 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감찰(監察)과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부호군(副護軍) 언충(彦沖)은 군자감(軍資監) 계로(繼老), 부총관(副摠管) 덕택(德澤), 감찰(監察) 변적(卞赤)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공주 김씨(公州金氏)는 남한에 총 1814가구, 754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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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 김씨(固城金氏)
    고성 김씨(固城金氏)
     
     고성(固城)은 경상남도 남부에 위치하며, 본래 6가야(六伽倻)중 소가야(小伽倻)의 도읍이었고,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에는 고자(古自)로 불리다가 고려(高麗) 때 철성(鐵城)으로 개칭되었으며, 조선(朝鮮) 시대에 와서 고성현(固城縣)이 되었다. 고성 김씨(固城金氏)는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함께 구지봉(龜旨峰)에서 탄강(誕降)한 여섯 동자(童子)중 제일 막내인 김말로왕(金末露王)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삼중대광(三重大匡)·금자광록대부(今紫光祿大夫)에 올라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고령백(固寧伯)에 봉해진 정렬공(貞烈公) 윤화(潤華)와 낙천군(洛川君) 수(隨)가 유명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양평공(良平公) 미(彌)의 맏아들 빈길이 뛰어났다. 그는 김말로왕의 34세손으로 1397년(태조 6)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功)을 세워 삼도수군 도절제사(三道水 軍道節制使)가 되었으며, 이듬해 재침한 왜구를 멸악산(滅惡山 : 황해도 평산군 신암면과 문무면의 경계에 있는 산)에서 대파(大破)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정헌대부(正憲大夫)·검교정승(檢校正丞)에 오르고 뒤에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원량(原亮 : 이조 정랑을 지냄), 희량(希亮 : 수원 부사, 병조 판서를 역임), 문량(文亮 : 호조 판서를 지냄) 3형제도 모두 벼슬에 등용되어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한편 경현(慶賢)은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좌대장 어유소(魚有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功)을 세워 함길도 순무중군(咸吉道巡撫中軍)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 종2품 문무관의 품계)에 올랐으며, 세응(世應)도 이때 북청(北靑)에서 공을 세워 노성 현감(魯城縣監)을 지낸 후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왜적(倭賊)을 대파(大破)하여 수문장(守門將)에 오른 월촌(月村) 사홍(仕弘)과 숙종(肅宗) 때 평해 군수(平海郡守)를 거쳐 순천 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한 우추(遇秋)가 유명했으며, 복광(復光)은 효행(孝行)이 뛰어나 1718 년(숙종 44) 고향에서 효행비(孝行碑)를 세웠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봉섭(鳳燮)이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締結)되자 국운(國運)을 한탄하며 오대산(五臺山)에 은거(隱居)하였고, 중오(重五)는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설립(設立)하여 민족정신(民族精神)을 고취시키다가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격분함을 이기지 못해 애사(哀死)하여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성 김씨(固城金氏)는 남한에 총 3275가구, 148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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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산 김씨(高山金氏)





     고산 김씨(高山金氏)

     고산(高山)은 전라북도(全羅北道) 완주군(完州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일찍이 백제(百濟) 때부터 난등량(難等良) 또는 고산현(高山縣)으로 불리웠고, 신라(新羅)에서 전주(全州)에 예속시켰다. 고려조(高麗朝)에 와서는 감무(監務 : 현령을 둘 수 없는 작은 현의 감독관)를 두어 진동(珍同 : 진산의 옛 이름)과 운제(雲悌 : 운산의 옛 이름)를 겸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1895년(고종 32) 에는 고산군(高山郡)으로 승격되었다가 1945년 전주(全州)가 시(市)로 분리됨에 따라 고산면(高山面)으로 완주군(完州郡)에 속하게 되었다. 신라종성(新羅宗姓)의 후예(後裔)로 전하는 고산 김씨(高山金氏)는 선계(先系)가 실전(失傳)되어 상계(上系)를 정확히 고증(考證)할 수 없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고산 김씨(高山金氏)의 시조(始祖) 김 환(金 紈)은 김윤옥(金潤屋)의 아들로 1510년(중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설(一說)에는 황간 김씨(黃澗金氏)와 동원(同源)으로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산 김씨(高山金氏)는 남한에 총 248가구, 11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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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령 김씨(高靈金氏)
    고령 김씨(高靈金氏)

     고령(高靈)은 경상북도 남서단에 위치한 옛 대가야국(大伽倻國)의 중심지로서 16대 520년 간을 계승해오다가 서기 562년(신라 진흥왕 23)에 신라(新羅)에 병합되었다. 그후 서기 757년(경덕왕 16) 고양(高陽)으로 불리우다가 1018 년(고려 현종 9)에 영천현(靈川縣)이 되었으며,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고양(高陽)의 고(高)자와 영천(靈川)의 영(靈)자를 따서 고령(高靈)으로 칭하게 되었다.
     일찍이 고려(高麗) 시대에서부터 뿌리를 내린 고령 김씨(高靈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11세손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 錫)의 장손(長孫)으로 고려에서 전리 좌랑(典理佐郞)을 역임한 김 의(金 宜)의 맏아들 김남득(金南得)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본명(本名)이 기지(麒芝)로 서기1340년(고려 충혜왕 복위 1) 진사(進士)가 되어 감찰 집의(監察執義 : 사헌부에 소속된 정3품 벼슬)를 지내고, 공민왕(恭愍王) 때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그후 사은사(謝恩使)로 원(元)나라에 가서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명(命)받고 환국하자, 왕이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하고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라고 사명(賜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름을 김남득(金南得)으로 하였고,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고령(高靈)으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간관(諫官)을 지낸 무(畝 : 시조 남득의 아들)의 아들 4형제가 뛰어났다.
     맏아들 사행(士行)은 조선 세종(世宗) 때 여산(礪山)·홍산(鴻山) 등지의 부사(府使)를 역임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으며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올랐고, 차남 사문(士文)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사충(士忠)은 승지(承旨)를, 막내 사신(士信)은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지냈다. 한편 세종(世宗) 때 학행(學行)으로 형조 참의(形曹參議)에 천거된 자숙(子肅)은 사행(士行)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이며, 그의 장남 형생(荊生)은 성종(成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감찰(監察)을 역임하여, 하양 군수(河陽郡守)를 거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오른 차남 장생(莊生)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서기 1510년(중종 5)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수(銖)는 고성 군수(固城郡守)·진주 목사(晋州牧使)·순천 부사(順天府使) 등을 역임한 후 정3품 당상관직인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올랐으며, 아우 구(鉤)는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하동(河東)·순천(順天)·수원(水原) 등지의 부사(府使)와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명종(明宗) 때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왜구를 대파하여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특진한 양촌(陽村)은 1559년(명종 14)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수차에 걸친 호인(胡人)의 침략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여 뒤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리고 경원 부사(慶源府使) 세문(世文)의 아들 문절공(文節公) 면(沔)은 이 황(李 滉)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마하고 많은 후진을 양성했으며, 뒤에 효렴(孝廉)으로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居昌)·고령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규합, 진주 목사(晋州牧使)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격퇴시켜 그 공(功)으로 합천 군수(陜川郡守)가 되었다. 그외 인물로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천장(千章), 현감(縣監) 충립(忠立), 동지중추부사 춘명(春明), 감찰(監察) 응수(應洙) 등이 유명했고, 현종(顯宗) 때 토산 현감(兎山縣監)을 지낸 초중(楚重)은 어영 별장(御營別將) 자, 칠곡 군수(漆谷郡守) 한주(翰周)와 함께 무신(武臣)으로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고령 김씨(高靈金氏)는 남한에 총 3,712가구, 15,5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40
  • 경주 김씨(慶州金氏)





     경주 김씨(慶州金氏)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村)이 연합하여 고대 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라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여 국명(國名)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 김알지(金謁智)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고쳐 삼았다가 307년(기림왕 10)에 신라(新羅)로 하였으며,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慶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 (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여 지방제도의 개편, 통치 지역의 변동 등으로 명칭의 변화가 많았으나 영남지방(嶺南地方)의 행정중심지로서의 지위에는 변동이 없다가 1413년(태종 13)에 와서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였다. 우리나라 성씨(姓氏) 중에서도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일컬어진 김씨(金氏)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 1 신라본기(新羅本記)에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기 65년(탈해왕 9) 3월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金櫃)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탈해왕(脫解王)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두어 기르니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姓)을 김(金)으로 하사(下賜)하였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이렇게 웅기(雄起)한 김씨(金氏)는 김알지(金閼智)의 7세손 미추(味鄒)가 왕위(王位)에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慶順王 : 알지의 28세손)까지 38명의 왕을 배출하여 587년 동안 신라(新羅)를 지배해 오면서 왕족(王族)의 지위를 지켰으며 경주(慶州)를 비롯한 600여 관향(貫鄕)으로 분적(分籍)되었다.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알지계통(閼智系統)의 김씨(金氏)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혈족으로 경순왕(慶順王)의 셋째 아들인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과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을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系代)하는 계통(系統)이 대표적이며, 상계(上系)는 미상(未詳)하나 경순왕의 후예로 전하는 장유(將有 : 판도판서공파), 인관(仁琯 : 태사공파), 순웅(順雄 : 대장군공파)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 등 크게 5파로 갈라져 후대로 내려오면서 10여 개의 지파(支派)가 생겨났다. 영분공파조(永芬公派祖)인 명종(鳴鍾)은 경순왕(慶順王)이 손국(遜國)한 후 고려조(高麗朝)에서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8세손 의진(義珍)은 유학(儒學)의 종주(宗主)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고, 12세손 인경(仁鏡)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고려의 명신(名臣)으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시(詩)와 글씨로 명성을 떨쳤다. 대안군파조(大安君派祖)인 은열(殷說)은 공부 시랑(工部侍郞)을 거쳐 대안군(大安君)에 봉군되고 그의 후손들이 여러 관향(貫鄕)으로 분적되었으며, 판도판서공파조(版圖判書公派祖) 장유(將有)는 고려말(高麗末)에 정국(政局)이 혼란하자 충청도(忠淸道) 보은(報恩) 땅에 은거(隱居)하여 그곳에서 일생(一生)을 마쳤다. 한편 태사공파조(太師公派祖) 인관(仁琯)은 고려 예종(睿宗)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지내고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에 올랐으며, 대장군파조(大將軍派祖) 순웅(順雄)은 고려 초에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그외 병판공파조(兵判公派祖) 덕재(德載)는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12세손으로 조선(朝鮮) 창업에 공(功)을 세워 보좌공신(補佐功臣)에 책록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후 함경도(咸鏡道)정평(定平)으로 은거(隱居)하였으며, 장사랑공파조(將士郞公派祖) 존일(存一)은 대안군(大安君) 은열의 16세손으로 고려말에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조선창업(朝鮮創業)에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좌명개국공신(佐命開國功臣)에 녹훈된 균은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지내고 계림군(鷄林君)에 봉군되어 계림군파(鷄林君派)의 일문(一門)을 이루었다. 이렇게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가문(家門)의 성세(盛勢)를 지켜온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역사(歷史)의 흐름 속에서 훌륭한 인재(人才)들을 대거 배출시켜 신라(新羅)와 근대(近代)를 잇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김씨(金氏)들의 입김이 닿지 않은 일들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가문(家門)의 기백(氣魄)을 지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영분공 명종(鳴鍾)의 6세손 예겸(禮謙)이 고려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내중령(內中令)을 지냈고, 예겸의 손자(孫子) 의진(義珍)은 고려사학(私學)12공도(公徒)의 하나인 양신공도(良愼公徒)를 육성하였으며 문종조(文宗朝)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여 인재등용에 공헌했다.
    의진의 증손(曾孫) 영고(永固)는 무신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을 제거하려 했던 인물이며, 영고(永固)의 아들 인경(仁鏡)은 문무겸재(文武兼才)의 현신(賢臣)으로 고종(高宗) 때 조 충(趙 沖)과 함께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 평정에 공(功)을 세우고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과 예서(隸書)로 명망이 높았다.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8세손 봉모(鳳毛)는 외국어(外國語)에 능하여 사신이 오면 관반사(館伴使 :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한 정3품 벼슬)로 천거되었으며 나라의 큰 일에는 항상 전례(典禮)의 일을 맡아보았다.
     봉모의 아들 태서(台瑞)는 고종(高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특히 그의 아들 약선(若先 : 공부 시랑), 기손(起 孫 : 평장사), 경손(慶孫 : 추밀원 부사) 3형제가 유명했다. 판도판서(版圖判書) 장유(將有)의 후손에서는 정랑(正郞) 효정(孝貞)의 아들인 조선(朝鮮) 중종(中宗) 때의 명신(名臣) 정(淨)이 뛰어났다. 그는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중종조(中宗朝)에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하여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서른 여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졸도하였다. 그에 대한 일화가 [당적보(黨籍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가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정언(正言) 등을 거쳐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나가 있을때 그의 옛 글벗인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 이 항(李 沆)이 청탁편지를 부쳐왔다. 그 편지는 직함을 갖추어 쓰고 도장을 찍었으며 우정(友情)있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마치 높은 자리서 하명하는 듯 한 글투였다. 이에 정(淨)은 거절의 뜻을 밝히고 아래와 같은 시(詩)를 써 넣었다. "서당에서 같이 배우고, 옥당에서 같이 있다가 남녘 시골로 흘러내린 병든 이 한 몸이라 천상에서 화려한 직함인 승지 이씨(李氏)여 편지 쓸 즈음에 옛 벗 생각을 했는가." 이 시(詩)에 앙심을 품은 이 항(李 沆)은 후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정(淨)의 죄를 추론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그외에도 그가 제주도(濟州道)로 귀양가다가 해남(海南) 바닷가 노송(老松) 아래서 회포를 달래며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적은 시가 전하며, 36세로 사사(賜死)당할 때 남긴 절명사(絶命詞)가 유명하다.태사공(太師公) 인관(仁瓘)의 9세손 자수(自粹)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한(恨)을 안고 안동(安東)에 은거(隱居)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왕위(王位)에 올라 그의 둘째 형인 구에게 영결(永訣)하는 시(詩)를 지어 보냈는데 <병오년 8월 10일 아우는 형님과 멀리 하직합니다. 서쪽과 남쪽은 천리 길이어서 양쪽이 모두 연락할 길 없으니 사생간에 뒷 일을 부탁해야 되겠습니다. 장가든지 벌써 스물 두 해인데도 자식이 없는 외로운 몸입니다. 형님은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쓸 만하온 바, 둘째가 벌써 자랐기로 .........(중략)> 하며 형의 둘째 아들 여경(餘慶)을 동서 성공(成公)의 딸과 혼인시켜 양자로 삼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끝부분에 <이 글을 두고 나 본듯이 여기소서. 갈 길이 바빠 여러 말 할 수 없고, 글도 제대로 되지 아니하여 몽땅붓끝 가는 대로 써 올립니다.>라 하였다. 그가 사사(賜死)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세필(世弼)이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옥중에서 입던 피묻은 옷을 가지고 나와서 통곡하며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화를 당하여도 오히려 위에 성군(聖君)이 계셨기 때문에 다행히 살게 되었지만, 지금 임금께서는 나이가 겨우 십여 살이고 간신들이 꼭 너를 죽이려 하니, 네가 어찌 죽음을 면할 것이냐"하였다. 한편 자수(自粹)의 9세손 홍익(弘翼)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쟁에서 순절하였고, 아우 홍욱(弘郁)은 효종(孝宗)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앞서 인조(仁祖) 때 사사(賜死)된 민희빈 강씨(姜氏)와 그녀의 어린 아들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효종(孝宗)의 노여움을 사 친국(親鞠)중에 장사(杖死) 되었다. 홍욱(弘郁)의 손자(孫子) 흥경(興慶)은 영조조(英祖朝)의 상신(相臣)이었고, 흥경의 아들 한신(漢藎)은 영조(英祖)의 부마(駙馬 :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이면서도 겨우 두 칸 집에 살면서 비단은 걸쳐 본 일도 없고 가마를 타는 법도 없이 청빈하게 살다가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인 이주를 양자로 삼았다. 참찬(參贊) 이주의 손자인 정희(正喜)는 학문(學問)에 있어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書藝)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켜 특히 예서(隸書)와 행서(行書)에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호장(戶長) 위영(魏英)의 증손(曾孫) 부필(富弼)·부일(富佾 : 수태위를 역임)·부식(富軾)·부의(富儀 : 지추밀원사를 역임)가 유명했다. 고려 문종(文宗)과 의종대(毅宗代)에 걸쳐 문무(文武)를 겸한 명신(名臣)으로 유명한 부식(富軾)은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왕실외척임을 빙자하여 권세를 쥐고 군신의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일삼던 이자겸(李資謙)의 방자함을 충고하여 이를 시정하게 하였고, 42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1145년(인종 23) 왕명(王命)을 받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완성하여 바치는 등 이름난 문장가(文章家)로 송(宋)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이렇게 역사를 수(繡)놓은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한말(韓末)에 와서도 그 가통(家統)을 이어 훌륭한 인재(人才)가 많이 배출되었다. 고종(高宗) 때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낸 영작(永爵)의 아들 홍집(弘集)은 한말 외세와 개화의 부수 틈에서 처참하게 희생당한 인물(人物)이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정집(鼎集)의 아들 창희(昌熙)는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으며, 철희(喆熙)는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재직중 1885년(고종 22) 황해도(黃海道) 토산(兎山)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을 진압하여 승녕부 종장(承寧府從長)을 지낸 춘희(春熙)와 자산으로 도서관(圖書館)을 설립한 인정(仁貞), 중국 원세개(袁世凱 : 중화민국의 초대 대통령)의 옥새를 새겼던 서예고문(書藝顧問) 태석(台錫),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를 개설한 영제(寧濟), 청성곡(淸聲曲)의 명수 계선(桂善) 등과 함께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이었으며, 용원(庸源)과 도태(道泰)는 조국의 자유수호와 광복을 위하여 몸바쳐 헌신하였으므로 신라 왕성(新羅王姓)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361,189가구, 1,523,4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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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산 김씨(慶山金氏)





     경산 김씨(慶山金氏)

     경산(慶山)은 경상북도 중앙부(中央部)에 위치하며, 아득한 옛날에는 압량소국(押梁小國) 또는 압독소국(押督小國)으로 불리웠다가 신라(新羅)에 통합되어 서기 750년(신라 경덕왕9)에 장산(獐山)이라 하였다. 그후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 장산(獐山)으로 개칭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 지금의 지명(地名)으로 바뀌었다. 경산 김씨(慶山金氏)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여덟째 아들 일선군(一善君) 김 추(金 錘)의 10세손 김인궤(金仁軌)를 시조(始祖)로 한다. 그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김윤성(金允成)의 아들로 출생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문하시중(門下侍中 : 문하성의 종1품 최고벼슬)을 거쳐 조현대부(朝顯大夫)·전법총 랑(典法摠郞)·호군전객령(護軍典客令) 등을 지냈으며, 그의 후손 육화(育和 : 초명은 숙화)가 금자광록대부, 이부 상서(吏部尙書)·좌복야(左僕射 : 상서도성의 정2품 벼슬)·상장군(上將軍) 등을 역임하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경산(慶山)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1320년(고려 충숙왕 7)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진 김 이(金 怡 : 1265 ∼ 1327)를 시조(始祖)로 기록하는 문헌도 있으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김 한(金 翰)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경산 김씨(慶山金氏)는 시조 인궤(仁軌)로부터 계대(系代)가 불분명하여 경산군(慶山君) 육화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육화의 아들 중전(仲全)이 고려조에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 문하부의 정2품 벼슬)를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경선(敬先)은 예의 판서(禮儀判書 : 예의사의 정3품 으뜸 벼슬)를 지냈으며, 손자(孫子) 영수(英秀)는 평장사(平章事)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 : 고려 때 중서문하성의 종1품 벼슬)에 이르렀다. 한편 영수(英秀)의 아들 익려(益礪)는 삼사 좌윤(三司左尹 : 전곡의 출납과 회계를 맡아보던 관청의 종3품 벼슬)을 지냈으며, 문정공(文貞公) 용(龍 : 익려의 손자)은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하여 남행(南行)할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호종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었고, 사신(使臣)으로 일본(日本)을 다녀와 호조 판서(戶曹判書)와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한 후 경양군(慶陽君)에 봉해져서, 목사(牧使)를 지낸 아들 약수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산 김씨(慶山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1,135가구, 5,1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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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성 김씨(開城金氏)
    개성 김씨(開城金氏)

     개성(開城)은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하며, 고려(高麗)의 수도(首都)로서 처음에는 송악(松岳)·송도(松都)·개경(開京)·부소갑(扶蘇岬)·동비홀(冬比忽)·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웠다. 서기 919년(고려 태조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이곳 송악산(松岳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주(開州)라 불렀고, 처음으로 시전(市廛 : 관설 상점가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점포를 대여, 상업에 종사하게 하고, 점포세와 상세를 받음)을 설치하여 시가를 5부로 나누었으며, 서기 960년(광종 11)에 황도(皇都)로 고쳤다가 995년(성종 14) 개성으로 개칭, 1018 년(현종 9) 거란군의 침략으로 궁궐과 민가가 불에 타서 거의 없어지기도 하였다. 개성 김씨(開城金氏)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 錫)의 후손 충의공(忠毅公) 김용주(金龍珠)가 서기 1035년(정종 1)에 출생하여 1054년(문종 8)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누차 여진정벌(女眞征伐)에 공(功)을 세워 추충공신(推忠功臣)에 책록되고, 개성 부사(開城府使)와 평장사(平章事 : 내사 문하성의 정2품 벼슬)를 거쳐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의성 김씨(義城金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시조 용주(龍珠)의 손자 정신공(貞愼公) 준(晙)이 고려 예종(睿宗 : 제16대 왕, 재위기간 : 1106 ∼ 1122) 때 여진란(女眞亂)을 평정(平定)한 공(功)으로 병부(兵部)·예부(禮部)·이부(吏部) 의 상서(尙書 : 육부에 속한 정3품 벼슬)를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올랐으며, 그의 맏아들 지선(之宣)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을 차남 지경(之慶)은 상서(尙書)를 지냈고, 지선(之宣)의 맏아들 문원공(文元公) 원(源)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원(源)의 손자(孫子) 문민공(文敏公) 남보(南 寶)가 영상(領相 : 영의정의 별칭)에 증직(贈職)되었으며, 현덕(玄德)의 아들 무(茂)는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당대의 이름난 화가(畵家)로 상의원 별제(尙衣院別提)에 이른 응환(應煥)은 1788년(정조 12) 왕명(王命)으로 내·외 금강산(內外金剛山)을 유력(遊歷)하면서 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충장공(忠壯公) 절(節)은 일찍이 조 헌(趙 憲)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익혀 경학(經學)에 밝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 헌을 따라 고향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보은(報恩)·공주(公州)·청주(淸州) 등지의 전투에서 공(功)을 세웠으나 금산(錦山)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과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宣祖) 임금이 시호(諡號 : 경상·유현들이 죽은 뒤 그들의 행적을 칭송하여 임금이 추증하는 이름)와 함께 정려(旌閭)를 내려주어
    그의 충절을 기렸다. 서기 1603년(선조 36)에 태어난 여량(汝亮)은 10세 때부터 김 집(金 集)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1633년(인조 11)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겸 승문원 박사를 거쳐 1640년 음성 현감(陰城縣監)을 시작으로 외직에 나가 1671년(현종 12)까지 32년 동안 해미(海美)·인제·재령·창원·영월 등 12읍의 군수(郡守)·현감·부사(府使) 등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다섯 고을에 <청백송덕동비(淸白頌德銅碑)>가 세워졌으며, 1672년에는 대사간(大司諫 : 사간원의 정3품 으뜸 벼슬)에 오르고 1682년(숙종 8) 승지(承旨)가 되어 3대에 걸쳐 가선대부(嘉善大夫 : 종2품하의 관계)의 영예를 추증받아, 현감(縣監)을 지낸 순룡(舜龍)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조사통계에 의하면 개성 김씨(開城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4,568가구, 18,7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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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 김씨(江華金氏)
    강화 김씨(江華金氏)

     강화(江華)는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우리나라 다섯번째 섬으로, 일찍이 단군신화(檀君神話)에도 등장한 유서깊은 고장이다. 문헌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에는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불리웠다가 고구려 시대에 혈구군(穴口郡)으로, 신라(新羅) 시대에는 해구군(海口郡)으로 하였다. 그후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 현재의 지명인 강화(江華)로 개칭되었으며, 고려(高麗) 시대 몽고의 침입 때와 조선(朝鮮)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임시수도(臨時首都)의 역할을 하였고, 수도의 관문에 위치한 까닭으로 근세(近世)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 1886년)·신미양요(辛未洋擾 : 1871년)·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 1875년) 등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옛날 고려 때부터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강화 김씨(江華金氏)는 동원(同源)인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면서도 계통(系統)을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첫째, 경순왕 김 부(金 傳)의 셋째 아들인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의 7세손 성(晟)이 고려 명종(明宗 :  제 19대 왕, 재위기간 : 1170 ∼ 1197) 때 참지정사(參知政事 : 중서문하성의 종2품 벼슬)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하음(河陰 : 강화의 옛 지명) 백(伯)에 봉해졌으므로,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개성파(開城派)가 있으며, 둘째는 영분공 명종(鳴鍾)의 18세손 광(光)이 조선 때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堤學 : 경적과 문서를 다루고 왕의 고문에 응하던 관청의 정3품 벼슬)을 거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올랐다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화(禍)를 입고 평안남도 숙천(肅川)에 적거(謫居)하게 되자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로 하여 숙천파(肅川派)의 계통을 이었다. 또 다른 한 계통은 광(光)의 증손(曾孫)으로 조선조(朝鮮朝)에서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지낸 송학(松鶴)을 일세조로 하는 의주파(義州派)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성(晟)이 봉군된 하음(河陰)이 강화 (江華)의 옛 지명이므로, 강화(江華)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을 열거하면 개성파(開城派)의 장생(長生)이 고려 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 추밀원의 정3품 벼슬)를 지냈으며, 원벽(元壁)은 문하시중(門下侍中 : 문하성의 최고 벼슬, 종1품)과 찬성사(贊成事)를, 성손(性孫)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조선 때 와서는 상장군 성손(性孫)의 아들로 전라우도 수군우후(全羅右道水軍虞侯)를 지낸 인보(仁輔)와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감찰(監察)을 역임한 의보(義輔), 자인 현감(慈仁縣監) 예보(禮輔),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지보(智輔) 4형제가 유명했다. 그외 삭녕군수(朔寧郡守) 경언(慶彦), 서천 군수(舒川郡守) 경우(慶禹), 통정대부(通政大夫) 경준(慶俊) 등이 뛰어났으며, 성범(成範)은 명천 현감(明川縣監)과 수원 판관(水原判官)을 거쳐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우 성헌(成憲)을 서천 군수(舒川郡守)를 거쳐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나갔다. 숙천파(肅川派)의 인물로는 파조(派祖)인 광(光)의 아들 도순(道淳)이 나라의 의식(儀式)을 맡아보던 관청인 통례원(通禮院)의 우통례(右通禮)를 지냈고, 그의 아들 철손(哲遜)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 중추원의 정2품 무관직 벼슬)를 역임하여, 부호군(副護軍) 구정(九鼎), 참의(參議 : 조선 때 육조에 속해있던 정3품 벼슬)를 지낸 여전(汝銓)·인순(仁淳)·숭흘(崇屹) 등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한편 의주파(義州派)에서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에 등용되었다가 연산군(燕山君) 때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화(禍)를 입은 계후(繼厚)와 정3품 당상관(堂上官) 무관(武官)의 관계인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른 봉원(鳳元)을 비롯하여 사과(司果) 지정(志禎), 부호군(副護軍) 이 순(履 淳) 등이 가문(家門)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화 김씨(江華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1,343 가구 5,7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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