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김씨(江陵金氏)
강릉김씨(江陵金氏)
강릉(江陵)은 본래 예국(濊國 : 1세기 초에 임둔 옛 땅에서 자립한 부족국가)의 도성지(都城地)로서 상고시대에 창해(滄海)와 임둔(臨屯)에 속했으며, 서기 313년(고구려 미천왕 14)에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河瑟羅)라 하였다. 서기 550년(신라 진흥왕 11) 신라(新羅)의 영토가 되어 639년(선덕여왕 8) 2월 소경(小京)으로 삼았다가 685년(태종무열왕 5)하서주(河西州)로 개편, 서기 776년(경덕왕 16) 다시 명주(溟州)로 개편하였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인 936년(태조 19)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臨瀛館)을 세웠다. 그후 우계(羽谿)·연곡의 두 현(縣)을 두었다가,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인 1675년(숙종 1)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강릉김씨(江陵金氏)의 시조(始祖)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1세손 김주원(金周元)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는 신라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6세손으로, 서기 777년(신라 혜공왕 13) 이찬(신라 17등 관계중 두번째 관위)으로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785년 (선덕왕 6) 선덕왕(宣德王)이 죽고 그의 후사(後嗣)가 없어 군신(群臣)들의 회의(會議) 끝에 왕(王)으로 추대되었으나 갑자기 그때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 현재 경주부근의 하천)의 물이 불어나 건널 수 없어 입궐(入闕)을 못하게 되자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며 즉위를 포기하였다 한다. 이에 냇물왕(柰勿王)의 11세손
경신(敬信: 원성왕)이 왕으로 추대되었고, 비가 개인 후 원성왕(元聖王)은 그에게 즉위를 권유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강릉(江陵)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원성왕 (元聖王)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封)하고 명주(溟州)·익령(翼嶺: 지금의 양양)·근을어(斤乙於: 지금의 평해) 등 다섯 군(郡)을 다스리게 하여 그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강릉(江陵)으로 하게 되었으며, 고려(高麗)와 조선조(朝鮮朝)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이 배출되어 명문(名門)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주원(周元)의 9세손 상기(上琦)가 고려 예종(睿宗: 제16대 왕, 재위기간: 1105 ∼ 1122) 때 평장사(平章事: 내사 문하성의 정2품 벼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인존(仁存)은 문하평장사 상주국(門下平章事上柱國)으로 인종(仁宗) 때 익성
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에 책록되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중요한 국사(國事)가 있을 때마다 왕이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명문의 전통을 이은 인물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시습(時習)이 대표적이다. 서기 1435년(세종 17) 성균관 부근에서 일성(日省)의 아들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신동(神童), 신재(神才)로 불리워진 그는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은 시(詩)를 읊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無雨雷聲何處動)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黃雲片片四方分)"
그가 5세 때[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여 이 소식을 접한 세종대왕이 그를 불러 총애했다고 하며, 대사성 김 반(金 泮)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사범지종(師範之宗)으로 일컬어진 윤 상(尹 詳)에게 [예서(禮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웠다. 21세 때인 1455년(단종 3)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내몰고 왕위를 찬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으로 고친 후 방랑의 길을 떠났다. 특히 그는 세조(世祖)의 패륜에 통분하고 저항하여 매서운 절개를 지키며, 고고한 지성으로 불교와 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思想)과 탁월한 문장으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理想)의 세계를 문학(文學)에서 찾으며 외롭게 살다간 불행한 천재였다. 북(北)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東)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南)으로는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 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탕유관동록]·[탕유호남록]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으며, 서기 1463년(세조 9) 책을 구하러 한양(漢陽)에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 태종의 2남, 세종의 형)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경주(慶州)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다시 입산하였다.
그후 누차에 걸쳐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금오산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와 1468년(세조 13)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다. 서기 1481년(성종 12) 환속(還俗)하여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2년 뒤 다시 한양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애를 끝마쳤다. 한편 사예(司藝) 충정(忠貞)의 아들 첨경(添慶)은 1549년(명종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어사(御史)·부수찬(副修撰)·지평(持平) 등을 거쳐 1561년(명종 16)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정(僉正)을 지내고 강릉부사(江陵府史)로 나갔다가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그외 감찰(監察) 종윤(宗胤)의 아들 충렬(忠烈)이 중종(中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한성부 판관, 경기 도사를 거쳐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館: 시정을 기록하는 관청의 정3품 벼슬)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국평(國坪)의 아들 행(行)은 선조(宣祖) 때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되어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셋째 아들)의 증도가(證道歌)를 간행하고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
예조 판서 첨경(添慶)의 현손(玄孫)인 시혁은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랐으며, 시환(始煥)과 시형(始炯)도 예조(禮曹) 및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우참찬(右參贊)·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낸 계락(啓洛)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618 년(광해군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한 기종(起宗)은 철명(哲命)의 아들로 이 괄(李 适)의 난 때 도원수 장 만(張 晩)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무훈을 세워 진무2등공신(振武二等功臣)으로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호조 판서를 지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대사간(大司諫)·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예·호조(吏禮戶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상성(尙星)과 영조(英祖) 때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 조선 때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 들어가서 봉조하(奉朝賀)가 된 상익(尙翼), 예조(禮曹) 및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한 상적(尙迪)이 유명했다. 시현(始炫)의 아들 상중(尙重)은 영조(英祖) 때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러,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상집(尙集)과 학자(學者)로 유명한 홍운(鴻運), 형조 판서(刑曹判書) 화진(華鎭) 등과 함께 명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상철은 1775년(영조 51)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학덕으로 왕의 신임을 받았고, 일찍이 우의정(右議政) 때 편집청을 두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많은 편의를 가져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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