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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릉김씨(江陵金氏)
    강릉김씨(江陵金氏)

     강릉(江陵)은 본래 예국(濊國 : 1세기 초에 임둔 옛 땅에서 자립한 부족국가)의 도성지(都城地)로서 상고시대에 창해(滄海)와 임둔(臨屯)에 속했으며, 서기 313년(고구려 미천왕 14)에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河瑟羅)라 하였다. 서기 550년(신라 진흥왕 11) 신라(新羅)의 영토가 되어 639년(선덕여왕 8) 2월 소경(小京)으로 삼았다가 685년(태종무열왕 5)하서주(河西州)로 개편, 서기 776년(경덕왕 16) 다시 명주(溟州)로 개편하였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인 936년(태조 19)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臨瀛館)을 세웠다. 그후 우계(羽谿)·연곡의 두 현(縣)을 두었다가,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인 1675년(숙종 1)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강릉김씨(江陵金氏)의 시조(始祖)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1세손 김주원(金周元)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는 신라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6세손으로, 서기 777년(신라 혜공왕 13) 이찬(신라 17등 관계중 두번째 관위)으로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785년 (선덕왕 6) 선덕왕(宣德王)이 죽고 그의 후사(後嗣)가 없어 군신(群臣)들의 회의(會議) 끝에 왕(王)으로 추대되었으나 갑자기 그때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 현재 경주부근의 하천)의 물이 불어나 건널 수 없어 입궐(入闕)을 못하게 되자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며 즉위를 포기하였다 한다. 이에 냇물왕(柰勿王)의 11세손
    경신(敬信: 원성왕)이 왕으로 추대되었고, 비가 개인 후 원성왕(元聖王)은 그에게 즉위를 권유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강릉(江陵)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원성왕 (元聖王)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封)하고 명주(溟州)·익령(翼嶺: 지금의 양양)·근을어(斤乙於: 지금의 평해) 등 다섯 군(郡)을 다스리게 하여 그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강릉(江陵)으로 하게 되었으며, 고려(高麗)와 조선조(朝鮮朝)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이 배출되어 명문(名門)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주원(周元)의 9세손 상기(上琦)가 고려 예종(睿宗: 제16대 왕, 재위기간: 1105 ∼ 1122) 때 평장사(平章事: 내사 문하성의 정2품 벼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인존(仁存)은 문하평장사 상주국(門下平章事上柱國)으로 인종(仁宗) 때 익성
    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에 책록되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중요한 국사(國事)가 있을 때마다 왕이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명문의 전통을 이은 인물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시습(時習)이 대표적이다. 서기 1435년(세종 17) 성균관 부근에서 일성(日省)의 아들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신동(神童), 신재(神才)로 불리워진 그는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은 시(詩)를 읊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無雨雷聲何處動)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黃雲片片四方分)"
     그가 5세 때[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여 이 소식을 접한 세종대왕이 그를 불러 총애했다고 하며, 대사성 김 반(金 泮)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사범지종(師範之宗)으로 일컬어진 윤 상(尹 詳)에게 [예서(禮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웠다. 21세 때인 1455년(단종 3)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내몰고 왕위를 찬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으로 고친 후 방랑의 길을 떠났다. 특히 그는 세조(世祖)의 패륜에 통분하고 저항하여 매서운 절개를 지키며, 고고한 지성으로 불교와 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思想)과 탁월한 문장으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理想)의 세계를 문학(文學)에서 찾으며 외롭게 살다간 불행한 천재였다. 북(北)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東)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南)으로는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 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탕유관동록]·[탕유호남록]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으며, 서기 1463년(세조 9) 책을 구하러 한양(漢陽)에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 태종의 2남, 세종의 형)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경주(慶州)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다시 입산하였다. 
     그후 누차에 걸쳐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금오산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와 1468년(세조 13)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다. 서기 1481년(성종 12) 환속(還俗)하여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2년 뒤 다시 한양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애를 끝마쳤다. 한편 사예(司藝) 충정(忠貞)의 아들 첨경(添慶)은 1549년(명종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어사(御史)·부수찬(副修撰)·지평(持平) 등을 거쳐 1561년(명종 16)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정(僉正)을 지내고 강릉부사(江陵府史)로 나갔다가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그외 감찰(監察) 종윤(宗胤)의 아들 충렬(忠烈)이 중종(中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한성부 판관, 경기 도사를 거쳐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館: 시정을 기록하는 관청의 정3품 벼슬)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국평(國坪)의 아들 행(行)은 선조(宣祖) 때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되어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셋째 아들)의 증도가(證道歌)를 간행하고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
     예조 판서 첨경(添慶)의 현손(玄孫)인 시혁은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랐으며, 시환(始煥)과 시형(始炯)도 예조(禮曹) 및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우참찬(右參贊)·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낸 계락(啓洛)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618 년(광해군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한 기종(起宗)은 철명(哲命)의 아들로 이 괄(李 适)의 난 때 도원수 장 만(張  晩)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무훈을 세워 진무2등공신(振武二等功臣)으로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호조 판서를 지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대사간(大司諫)·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예·호조(吏禮戶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상성(尙星)과 영조(英祖) 때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 조선 때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 들어가서 봉조하(奉朝賀)가 된 상익(尙翼), 예조(禮曹) 및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한 상적(尙迪)이 유명했다. 시현(始炫)의 아들 상중(尙重)은 영조(英祖) 때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러,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상집(尙集)과 학자(學者)로 유명한 홍운(鴻運), 형조 판서(刑曹判書) 화진(華鎭) 등과 함께 명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상철은 1775년(영조 51)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학덕으로 왕의 신임을 받았고, 일찍이 우의정(右議政) 때 편집청을 두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많은 편의를 가져오게 하였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0
  • 강동김씨(江東金氏)
    강동김씨(江東金氏)

     강동(江東)은 평안남도(平安南道) 중남부(中南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서기 1136년(고려 인종 14)에 서경(西京)을 나누어 육현(六縣)을 만들 때 강동현(江東縣)이 되었다. 강동 김씨(江東金氏)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으로 청도 김씨(淸道金氏)에서 분적된 계통이며, 시조(始祖) 김윤해(金潤海)는 김지대(金之岱: 청도 김씨의 시조)의 20세손 김여용(金汝瑢)의 아들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는 서기 1696년(숙종 2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단천 군수(端川郡守) 등을 역임한 후 북청 도호부사(北靑都護府使)를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적(事蹟)이 전(傳)하지 않아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다. 1985년 경제기획원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동김씨는 남한에 총 52가구, 2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90
  • 간성김씨(杆城金氏)





     간성김씨(杆城金氏)

     간성(杆城)은 강원도(江原道) 북동부(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수성군 또는 가라홀(加羅忽)이라 불리우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 때 수성현(守城縣)이 되었고, 고려조(高麗朝)에 와서 간성군(杆城郡)으로 개칭하였으나 지금은 고성군(高城郡)에 속하게 되었다. 신라(新羅)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後裔)로 전하는 간성김씨(杆城金氏)는 김생명(金生溟)을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으나,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정확(正確)한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12
  • 가흥김씨(嘉興金氏)





     가흥김씨(嘉興金氏)

     가흥(嘉興)은 전라남도(全羅南道) 진도군(珍島郡) 북쪽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백제(百濟) 때에는 도산(徒山) 혹은 원산(猿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 때 와서 노산현(牢山縣)으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때 가흥(嘉興)이 되어 진도(珍島)에 속하게 되었다. 가흥김씨(嘉興金氏)의 선계(先系)는 신라(新羅) 대보공(大輔公)의 후예(後裔)로 전(傳)하고 있으나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정확한 계대(系代)는 알 수 없고, 조선중기 때 사람인 김득선(金得先)의 아들 김윤정(金胤鼎)이 1540년(중종 35)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직강(直講: 성균관의 정5품 벼슬)을 역임하여 후손들이 김윤정(金胤鼎)을 시조(始祖)로 하고 가흥(嘉興)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게 되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33
  • 가평김씨(加平金氏)
    가평김씨(加平金氏)

     가평은 경기도 중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일찍이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근평군 또는 병평군으로 불리웠으며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가평군(加平郡)으로 개칭되었고, 고려(高麗) 현종(顯宗: 제8대 왕, 재위기간: 1009 ∼ 1031)때 가평(嘉平)으로 고쳐 강원도(江原道) 춘주(春州: 춘천의 옛 이름)에 속했다가 서기 1413년(태종 13) 개례(改例)에 따라 강원도(江原道)에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가평 김씨의 시조(始祖) 김계공(金繼恭)은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 강릉 김씨의 시조)의 23세손으로 조선조에서 무과에 등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 성희안·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에 공(功)을 세워 정국사등공신(國四等功臣)으로 가평군(加平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가평(加平)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가평 김씨는 남한에 16가구, 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27
  • 김씨(金氏) 本貫 보기










    김씨(金氏) 本貫 보기 (121)







     우리나라 성씨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대성 (大姓)으로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계통과  신라의 알지(閼智)계통으로 크게 나뉜다.
     가락국 원조(元祖)로 전해오는 수로왕(首露王)은 가락국(駕洛國) 아홉명의 촌장이 서기42(후한 건무18)년에 가락을 통솔할 군왕을 얻고자 하늘을 향해 의식을 거행하였더니 마침내 하늘에서 여섯 개의 황금알을 담은 금합(金盒)이 내려와 이튿날 여섯 알이 동자(童子)로 변하여 제일 먼저 나온 수로를 가락의 왕으로 삼고 나머지 다섯 동자도 5가야의 수장(首長)으로 삼았다고 (삼국유사)와 (가락국기)에 전한다.
      신라의 알지 계통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면 서기 65(신라 탈해왕9)년에 경주 시림(始林)의 나무가지에 걸려있던 금궤에서 태어나 탈해왕이 "하늘에서 내려준 아들"이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金)으로 사성(賜姓 하사)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시작된 김씨의 후손들은 신라의 56왕 중 38명이 왕계를 누리면서 역사의 흐름속에서 명문거족으로 가문의 번성을 이룩하여 이름있는 신하와 대유학자, 석학자들를 배출시키면서 근세를 잇는 역사적인 사건속에 명문의 긍지를 살려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김씨는 280여개 본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대략적으로 121개 본관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 북한을 제외한 남한의 인구수는 약8,981,500名으로 밝혀졌다.
     






    김씨 金氏 121 本貫 (선택하세요)




    가평加平
    가흥嘉興
    간성杆城
    강동江東
    강릉江陵
    강화江華
    개성開城
    경산慶山
    경주慶州
    고령高靈
    고산高山
    고성固城
    공주公州
    광산光山
    광양光陽
    광주廣州
    교하交河
    금릉金陵
    금산錦山
    김녕金寧
    김제金堤


    김포金浦
    김화金化
    나주羅州
    낙안樂安
    남양南陽
    남포藍浦
    당악唐岳
    대구大邱
    덕수德水
    도강道康
    동래東萊
    등주登州
    무장茂長
    무주茂朱
    문화文化
    밀양密陽
    배천白川
    보령保寧
    부평富平
    사천泗川
    삼척三陟


    상원祥原
    서흥瑞興
    설성雪城
    수안遂安
    수원水原
    순천順天
    시흥始興
    신천信川
    안로安老
    안산安山
    안성安城
    안악安岳
    양산梁山
    양주楊州
    언양彦陽
    연기燕岐
    연안延安
    영광靈光
    영암靈岩
    영양英陽
    영월寧越


    영천永川
    영해寧海
    용궁龍宮
    용담龍潭
    우봉牛峰
    울산蔚山
    웅천熊川
    원주原州
    월성月城
    은율殷栗
    의성義城
    익화益和
    전주全州
    정산定山
    정주貞州
    진도珍島
    진잠鎭岑
    진주晋州
    진천鎭川
    창원昌原
    창평昌平


    청도淸道
    청송靑松
    청양靑陽
    청주淸州
    청풍淸風
    충주忠州
    칠원漆原
    태원太原
    파평坡平
    평산平山
    평양平壤
    풍기豊基
    풍산豊山
    하음河陰
    함창咸昌
    해주海州
    해평海平
    해풍海豊
    홍주洪州
    화개花開
    희천熙川


    김해金海①
    김해金海②
    부안-부령(扶安-扶寧)
    상산-상주(商山-商州)
    선산善山①
    선산善山②
    안동安東①
    안동安東②
    야성-영덕(野城-盈德)
    영산-영동(永山-永同)
    예안-선성(禮安-宣城)
    오천-연일(烏川-延日)
    통주-통천(通州-通川)
    풍천-영유(豊川-永柔)
    해남-당악(海南-棠岳)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38
  • 해평 길씨(海平 吉氏)
      해평(海平) 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선산군(善山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파징(波澄)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신라(新羅) 때의 병정현(竝井懸)을 초려초에 해평군(海平郡고)으로 쳐서 복주(福州:안동의 옛 지명)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상주(尙州)와 선산(善山)으로 이속되었다가 1415년(태종 15)에 해평현(海平縣)으로 강등된 후 선산군(善散郡) 해평면(海平面)이 되었다.

     길씨(吉氏)의 중국(中國) 풍익(馮翊)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으며, 당(唐) 나라에서 귀화(歸化) 해온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인 길 당(吉  )이  고려(高麗) 문종(文宗)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져 우리나라 길씨(吉氏)의 본관(本貫)은 해평(海平)과 개성(開城)을 비롯하여 하음(河陰:강화지방)과 여주(驪州)등 28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傳)하나 모두가 해평 길씨(海平 吉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므로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해평(海平) 단본(單本)으로 알려졌다.
     해평 길씨는 해평백(海平伯) 길 당(吉  )의 후손에서 1백여년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래 때의 성균진사(成均進士)인 길시우(吉時遇)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일찌기 낙동강변(洛東江邊)에 터를 잡아 고려말에서부터 충절(忠節)과 도덕가문(道德家門)으로 일컬어진 해평 길씨(海平 吉氏)는 해동(海東)의 절신(絶信) 길 재(吉 再)가 더욱 빛냈다.   고려가 기울기 시작한 1353년(공민왕 2) 지금주사(知錦州事) 원진(元進)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박 분(朴  :상산 박씨)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이 색(李 穡)·정몽주(鄭夢周)·권 근(權 近)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도학(道學)을 밝혔다. 
      그가 여덟 살 때의 일이다. 아버지 원진(元進)이 보성 대판(寶城 大判)으로 임지(任地)에 나갈 때 어머니 김씨(金氏:토산 김씨 희적의 딸)가 따라가면서 박봉으로 생활이 어려우므로 재(再)를 외가에 맡겨두고 갔다. 
      그는 하루종일 어머니를 사모하여 눈물을 흐리며 남계(南溪)에서 놀다가 석별가(石鱉歌)를 지었다. "자라야 자라야 너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느냐, 나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도다. 
     내가 너를 삻아 먹을 줄 알건만. 어머니 잃은 것이 나와 같으므로 너를 놓아 준다"하고 물에다 던져주며 울고 있으니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쫓아와서 끌어안고 감동하여 울었다고 한다.   1386년(우왕 12)에 사마(司馬)에 합격하고 3년 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창왕(昌王) 때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니 향리 사람들이 그 효도를 칭찬하였다. 
      조선(朝鮮)이 개국(開國) 한 후 태종(太宗)은 일찌기 태학관(太學館)에서 시경(詩經)을 읽었던 동문(同門)인 관계로 그를 불러 정종(定宗)에게 아뢰어서 봉상박사(奉常博士)의 벼슬을 주었으나, 그는 사은숙배(謝恩肅拜)하지 않고 말하기를 "옛 정(情)으로 부르시니 왔을 뿐 벼슬하는 것은 재(再)의 뜻이 아닙니다."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자네의 말은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불역지도(不易之道)이니 그 뜻을 빼앗기기 어려우나 자네를 부른 사람은 나요.  
      자네에게 벼슬을 준 분은 상(上:정종)이니 상에게 사의를 표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정종(定宗)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우대하여 보내주고 그 집에 대해서는 납세(納稅)와 부역(賦役)을 면제하여 주었다.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태종(太宗)은 "길 재에게 이들이 있다 하니 불러서 등용 시켜 길 재의 충성을 드러내도록 하라"하니 사순(師舜)을 불러 종묘부승(宗廟副丞)에 제수하였다.
      사순이 조정에 불려갈 적에 재(再)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에게 먼저 예의를 베푸는 것은 삼대(三代:하·은·주나라) 이후에 드문 일이다.
      네가 초야에 있는데 임금이 먼저 부르니 그 은의(恩義)가 범연(泛然)한데 비할 것이 아니다. 네가 마땅히 나의 고려에 향하는 마음을 본받아서 너의 조선임금을 섬겨라." 하였다. 
      특히 그는 김숙자(金叔滋)에게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쳐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 등으로 하여금 학통(學統)을 잇게 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친수를 이루었으며, 「야은집(冶隱集)」을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67살에 임종이 가가와지자 부인 신씨(申氏)가 벼슬을 하고 있는 아들 사순(師舜)을 불러 올 것을 권하자 "아비는 임금과 같은 것이다. 
      임금 옆에 있으면 아비 옆에 있는 것과 같다. 아들은 없어도 있는 것이다."하며 쓸쓸히 일생을 마치고 경북 칠곡군 복삼면 오태동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묻혔다. 
      그의 묘소 앞 강변의 단애(斷崖: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에는 지주비(砥柱碑)가 서있는데, 중국 황하(黃河)의 탁류를 이겨내는 지주비를 탁본떠와 그대로 전면(前面)에 시기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뒷면의 글을 지어 1587년(선조 20)에 세운 것이다. 
      그 외 해평 길시를 빛낸 인물(人物)로는 송당(松當) 박 영(朴 英)의 문인(文人)으로 이름난 면지(勉之)의 아들 겸(謙:현감을 역임)과 회(誨)가 유명했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회(誨)는 임진왜란 때 피난가는 대가(大駕) 앞에 길을 막고 엎드려 변방에 왜적의 염탐군이 있어 해침을 받을가 염려되오니 가마대신 말을 타시도록 진언했고, 뒤에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추록되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3·1운동의 주역인 선주(善宙)가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  평양지부(平壤支部)를 조직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침으로서 충절(忠節)의 가문(家門) 해평 길씨(海平 吉氏)를 더욱 빛냈다.
      오늘날 해평 길씨는 경북(慶北) 선산(善山)과 충남(忠南) 금산(錦山)지방에 집중 세거하며 1985년 인구조사 결과 총 7,360가구에 30,390명으로 전체 성씨 중 73위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98
  • 행주 기씨(幸州 箕氏)
     행주(幸州)는 경기도(京機道) 고양(高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개백현(皆伯縣)을 신라(新羅) 때 우왕(遇王) 또는 왕봉(王逢)으로 고쳤고, 고려초(高麗初)에 행주(幸州)로 개칭하여 성종(成宗) 때는 고봉(高峰) 덕양(德陽) 등으로  불리우다가 1413년(태종 13) 고양군(高陽郡)이 되었다.

     기씨(箕氏)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운 기자(箕子)의 후예로 전하고 있으나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고, 일설(一說)에는 행주 기씨(幸州 奇氏)와의 동원(同源)으로도 전해진다.

     우리나라 기씨(箕氏)는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경북(慶北) 영일(迎日)과 강원도(江原道)  인제(麟蹄),평남(平南) 덕천(德川) 등지에 각각 1가구씩 거주하고 있었고,
     1985년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는 남한(南韓)에 총 99가구,4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88
  • 행주 기씨(幸州 奇氏)
     행주(幸州)는 경기도(京畿道) 고양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을 신라에서 우왕(遇王) 또는 왕봉(王逢)이라 하였고, 고려초에 행주로 개칭하여  성종 때는 고봉(高峰)·덕양(德陽) 등으로 불리우다가 1413년(조선 태종 13) 고양군이 되었다.
     기씨(奇氏)는 중국 하남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고대 기자조선(箕子朝鮮)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다.
     기원전 1122년 중국 3대의 하나인 은나라가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되자 은나라 주왕의 숙부인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건너와 나라를 세운 것이 기자조선인데, 기자의 41세손 기준(箕準)에 이르러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겨, 기준이 배를 타고 금마군(金馬郡 : 지금의  익산군)으로 내려가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개칭한 후 50 여 소국(小國)을 통합하여  다스리며 한왕(韓王)이 되었다. 
     기준의 7세손 기훈(箕勳)은 아들 3현제를  두었는데 우성(友誠)이 덕양(德陽 : 행주)  기씨(奇氏), 우량(友諒)은 상당(上黨 : 청주) 한씨(韓氏), 우평(友平)은 북원(北原 :  평양)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고 한다.
     우성(友誠)은 백제 온조왕조에서 시중(侍中)을 지냈고, 후손들이  백제와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도록 크게 번성하였다. 
      그러나 행주 기씨(幸州奇氏)는  1688년(숙종 14) 「무진보(戊辰譜)」를 시작할 때 득성조(得姓祖) 이하의 계대(系代)를 알 수 없어 고려 인종조에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된 순우(純祐)를 일세조로 하였다. 
      기씨의 본관(本貫)은 행주와  개성을 비롯하여  풍양(豊壤 : 양주지방)·서원(西原 : 청주의  별호)· 단양(丹陽) 등 21 본(本)까지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전하고 있으나 모두가 행주 기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씨(奇氏)는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명문의 기틀을 다지며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역사를 수(繡) 놓았다. 명문의 전통을 이어온 훌륭한 인맥을 살펴보면 중시조 순우의  10 세손 건(虔)이 뛰어났다. 
     공조 전서(工曹典書) 면(勉)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포의(布衣)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발탁되어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어 청렴으로 명망이 높았다. 특히 지방관(地方官)으로 있을 때 치적(治績)이 훌륭해서 이도(吏道 : 관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수범을 보였다.
      그가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 곳에 붕어가 나는 큰 못이 있는데 관리들이 공사간(公私間)에 백성들로 하여금 그 붕어를 잡아 바치라고 하여 민폐가 막심하자 그 못을 붕어 무덤이라고 조롱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가 말하기를 “어찌 내 입맛 때문에 염치를 상할 수 있는가”하며 자신도 먹지 않고 잔치가 아니면 그물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평생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는데, 일찍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  백성들이 전복 상납으로 괴로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제주에는 부모가 죽으면 언덕이나 구렁에 버리는 풍속이 있었는데, 그가 부임하기 전에 먼저 고을에 영을 내려 관(棺)을 갖추고 염습하여 장사지내도록 가르쳤다.
      하루는 꿈 속에 삼백여명이 뜰 아래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공의 은덕으로 해골이 폭록되는 것을 면하였는데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응당 금년에 손자를 보실 것입니다.”하였다. 
      그때까지 그의 아들 3형제가 모두 자식이 없었는데 과연 이 해에 장령(掌令) 축(軸)이 아들 찬을 낳아 뒤에 찬의 벼슬이 응교(應敎)에 이르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의하면 단종조에 수양대군의 야심을 낌새 챈 그가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두문불출하자,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청파 만리현(萬里峴)에 있던 그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아갔으나 청맹(靑盲: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실지는 조금도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핑계대고 나가 맞지도 않았다. 
     세조는 바늘을 가지고 눈을 찌를 것 같이하여 시험하매 그는 눈을 딱 뜨고 보면서도 깜짝하지 않자 세조는 마침내 그를 자신의 정권에 이용하지 못하겠다는 것을 알고 돌아갔다고 한다.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진 준(遵)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건(虔)의 증손이자 응교(應敎) 찬의 아들로서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다가 기묘사화로 아산에 귀양, 온성으로 옮겨져 사사(賜死)되었다,
      준이 어느날 궐내에서 숙직할 때 관외(關外)로 여행하는 꿈을 꾸었는데, 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 등 기구한 노정을 전전하면서 율시(律詩)  한 수를 읊되,
    「낯선 땅  산과 물은 고향과도 같은데, 하늘 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높은 봉우리에 기대었네.  아득한 검은 구름에  강가 관문이 닫히었고, 고목 나무 잎 지는 소리에 빈 성곽이 쓸쓸하다.  들길은 가을 풀 밖으로  가늘게 뻗치었고, 인가는 멀리 석양 속에 있구나. 
     가는 배 만리에 돌아오는 돛대  없으니 망망한 벽해에 소식 통하지 못하네」하였다. 
     홀연히 깨어나 벽에다 꿈 속의 시를 썼다. 얼마  되지 않아서 기묘당적에 관련되어 아산으로 귀양갔다가 온성으로 옮겼는데, 도중에 보이는 것이 모두 시에 읊은 경치  그대로였다. 
     말을 멈추고 전일의 꿈 속의 시를 읊을 때 처량하게 흐느끼니 따라 가던 노비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시는 그가 죽은 후에도 선비들간에 크게 애송되었고, 특히 유배지의 선비들을 무척 감상적으로 달래고 울려주는 명시가 되었다고 한다.
      선조 때의 명현 대승(大升)은  준(遵)의 조카이며 영상(領相) 자헌(自獻)의  삼촌이다. 그는 어릴 때 시골 서당에 나가 글을 읽었다.  
     어느날 손님이 연귀(聯句)로서 그의 재주를  시험하려고 밥식(食)자를 넣어 글을 지으라고 하니 「배부르도록 먹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 (食無求飽君子道)」하니 손님이 “너의 끝의 삼촌이 사림의 영수가 되었으니 가업을 이을 사람은 너로구나”하였다.
      그는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 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히고 이조 정랑과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며 광국삼등공신(光國三等功臣)으로 덕원군(德原君)에 추봉되었다. 
     특히 스승인 퇴계 이 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8년동안이나 서신논쟁(書信論爭)을 벌인 일화가 유명하다.
     그외 응세(應世)의 아들 자헌(自獻 : 광해군 때 영의정을 역임)과  윤헌(允獻 : 안악군수를 역임)이 유명했고, 정묘호란 때 선천  부사(宣川府事)로 남한산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협과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켜 토산(兎山) 전투에서 전사란 효일(孝一)은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진 정진(正鎭)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한말에 와서는 삼연(參衍)이 장성(長城)의 수록산(隨綠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였고, 우만(宇萬)은 조부의 학문을 계승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고종 때 김평묵(金平默)  등과 함꼐 유생을 이끌고 정부의 행정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소수(湖南疏首)」로 일컬어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 오대신(賣國五大臣)을 저격한 산도(山度)는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근섭(近燮)과 함께 충절과 도학을 가통으로 이어온 행주 기씨(幸州奇氏)를 더욱 빛냈다. 
     오늘날 기씨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전남·북(全南北)에 집중세거(集中世居)하며, 1985년 11월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총 22,689명으로 전체 성씨 중 79위가 된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4
  • 봉화 금씨(奉化 琴氏)
     봉화(奉化)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부(北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의 고 사마현(古斯馬縣)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옥마현(玉馬縣)으로 고쳐 내령(奈靈:영주)에  속하게 하였으며,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에 봉성현(奉城縣)이 되었다가 1289년(충렬왕 15)에 지금의 명칭인 봉화현(奉化縣)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금씨(琴氏)는 중국(中國) 위국(衛國:지금의 직예성  대명도지방)에 연원(淵源)을 두고 주(周)나라 경왕(景王:제24대 왕, 재위기간:기원전 544∼520) 때의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금 우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금씨(琴氏)의 선계(先系)는 고대(古代)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함께 건너온 금 응(琴 應)이란 사람이 우리나라 금씨(琴氏)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고 하나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으며, 그의 후손으로 고려 초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태사(太師)를  역임한 금용식(琴容式)을 시조(始祖)로 전하는 기록도 보인다. 
      금씨의 본관(本貫)은 봉화(奉化)를  비롯하여 계양(桂陽:김포의 별호)·안동(安東)·평해(平海)·봉산(鳳山)·문화(文化) 등 6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하나  모두가 봉화 금씨(奉化琴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정축보(丁丑譜:1937년판)까지 관적(貫籍)을 봉성(鳳城)으로 칭관(稱貫)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지명(地名)이 개칭(改稱)됨에 따라 봉화(奉化)로 통칭하고 있다.
      봉화 금씨(奉化琴氏)는 봉화(奉化)를 중심으로 하는 경북(慶北)지방에 집단세거하며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져 왔다. 
      일세조(一世祖) 의(儀)는 1184년(명종 14)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어사(御史)와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수찬관(修撰官)을 역임하고 누차 승진(陞進)하여 1215년(고종 2)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문관의 종2품 관계)로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에 책록되어 판이부사(判吏府事)에 이르렀으며, 1230년(고종 17) 향년(享年) 78세로 졸하니 왕(王)이 김포(金浦) 봉황산(鳳凰山)에 예장(禮葬)을 명(命)하고 영렬(英烈)이란 시호(諡號)를 하사(下賜)하였다. 
     그러나 묘지(墓地)가 장릉(章陵:고려 원종의 능) 지역인 교산(喬山)의 금표내(禁標內)에 들어간다고 하여 1727년(영조 3)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奉化郡  祥雲面 下訥里)에 설단(設壇)하고 매년 양력 11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고려조(高麗朝)에서 무신정권(武臣政權)의 핵심인물로 권력을 남용하던 최 우(崔 瑀)에게 죽음으로 항거했던 휘(暉)는 의(儀)의 아들로 노지정(盧之正)·김희제(金熙 ) 등과 함께 억울하게  손위 당한 희종(熙宗:제21대 왕, 재위기간:1204∼1211)의 복위를 모의하다 좌절한 절신(節臣)이며,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 규( )의 7세손 훈(薰)은 원종(元宗)  때 원(元)나라에 가서 제주도(濟州道)에 웅거한 삼별초(三別抄)의 토벌을 위해 원병(援兵)을 요청하고 돌아왔다.
      조선조에 와서는 은진 현감(恩津縣監) 회(淮:시조의 12세손)의 셋째 아들 휘(諱)가 세조(世祖) 때문무(文武) 양과(兩科)에 급제하고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으며, 담양 군사(潭陽郡事) 극해(克諧)의 아들 유(柔)는 태조(太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를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특히 그는 4읍(四邑)의 수령(守令)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칭송(稱頌)을 받았는데,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영동(永東)의 신관(新?)에서 그의 사람됨을 칭송하는 시(詩), <금상(琴相)의 은 풍(風)세 일대(一代)의 현인(賢人)일세, 푸른 냇가 누각(樓閣)에서 거문고가  울리도다>를 지었다. 
     선조(宣祖) 때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을 지내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연구에 몰두하던 난수(蘭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투에 공(功)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성주 판관(星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재(梓)의 아들 응협(應夾)도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전심하며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학풍(學風)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첨정(僉正)  원수(元壽)의 아들 보(輔)가  일찍이 당대의 석학(碩學) 이  황(李 滉)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우고 조선 선조조(宣祖朝)에 서화가(書畵家)로  명성을 떨쳤으며, 응석(應石)은 자기 재산을 털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救恤)하는데 앞장서서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이 「적선정(積善亭)」이라는 편액을 써 주어 덕망을 칭송하였다.
     제천 현감(堤川縣監)을 진낸 응훈(應壎)은 창원 부사(昌原府使)  업, 여주 목사(驪州牧使) 개(愷), 예안 현감(禮安縣監) 상현(尙絃) 등과 함께 학문과 도덕의 전통을 지닌 봉화 금씨(奉化琴氏)는 남한에 총 4,693가구, 19,6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71
  • 청주 근씨(淸州 斤氏)
       청주(淸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앙에 위치한 도청소재지로써  원래 마한(馬韓)의 영토였으며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상당현(上黨縣) 또는 낭비성,  낭자곡(娘子谷) 등으로 불리웠다.
      685년(신라 신문왕 5)에는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는데 경덕왕(景德王:제35대  왕, 재위기간:742∼765) 때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되었고, 그후 940년(태조 23)에 청주(淸州)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근씨(斤氏)의 본관(本貫)은 청주 단본(單本)으로  전(傳)하며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상고(詳考)할 수 없다.
     193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세도면(世道面) 청송리(靑松里)에 1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근씨(斤氏)는 남한(南韓)에 110가구, 45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92
  • 예천 권씨(醴泉 權氏)





     예천 권씨(醴泉 權氏) 

       시 조: 휘(諱):권 섬(權 暹), 예빈경(禮賓卿)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93
  • 안동 권씨(安東 權氏)
     안동 권씨(安東 權氏) 

       시 조: 휘(諱):권 행(權 幸)
       묘 소: 경북 안동군 서후면 성곡리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35
  • 궉씨(氏)





     궉씨(氏)

      궉씨의 연원(淵源)은 문헌(文獻)이 없어 정확(正確)히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조선중기의 학자(學者)이며 명신(名臣)인  이수광(李수光)이  시문집(詩文集)「지봉유설(芝峰類說)」에<순창에 궉씨가 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고 일설에 의하면 호성이라고도 한다.
    (淳昌有궉氏不知基所 自出或云本胡姓)>하고 기록되어 있고, 
      실학자(實學者) 이덕무(李德懋)의  저서(著書)「앙엽기(앙葉記)」에는 <선산(善山)에 궉씨촌(궉氏村)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에는 경기도(京畿道) 용인(龍仁)과 충남(忠南) 보령(保寧)·청양(靑陽)·예산(禮山)·천안(天安) 등지에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75년 인구조사(人口調査)에서는 전국(全國) 249개(個) 성씨(姓氏) 중 223위(位)였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57가구, 2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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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산 궁씨(兎山 弓氏)





     토산 궁씨(兎山 弓氏)

      토산(兎山)은 황해도(黃海道) 금천군(金川郡)과 신계군(新係郡)에 걸쳐 있었던 옛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 또는 월성현(月城縣)으로 불리우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의 경덕왕(景德王: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 ∼765)이 토산(兎山)으로 고쳤다.
      서기 1018 년(고려 현종 9)에는 장단현(長湍縣)에 속했다가 1062년(문종 16) 개성(開城)의  직할시가 되고, 예종(睿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현감(縣監)을 두어  황해도(黃海道)에 이속하였다.
      1895년(고종 32) 토산군(兎山郡)으로 승격하였으며 1914년 일부는  신계군(新溪郡)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금천군(金川郡)에 편입되었다. 
      궁씨(弓氏)는 본래 중국(中國) 태원(太原:지금의 산서성 기령도에  속한 지명) 숙궁(叔弓)의 후손(後孫)이 이름자(字)를 성(姓)으로 삼았다고 전하며, 우리나라 궁씨(弓氏)는 태원(太原) 출신인  궁 흠(弓 欽)이 은(殷)나라가 망하자 기자(箕子)와 함께 동래(東來)하여 토산에 세거(世居)한 것이 시원(始源)이 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는 궁씨(弓氏)의 본관(本貫)을 토산(兎山)과 순천(順川)이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토산을 제외한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미상(未詳)이다.
      한편「토산궁씨세보(兎山弓氏世譜)」에 의하면 상계(上系)의 실전(失傳)으로 인하여 누대(累代)에 걸쳐 토산에 세거해온 궁계신(弓繼信)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관향(貫鄕)을 토산(兎山)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한다. 
      역사상 두드러진 인물을 살펴보면 계대(系代)를 알 수 없는 인물인 궁 제(弓 濟)가 고려(高麗) 숙종(肅宗:제15대 왕, 재위기간:1095∼1105) 때  우문감(右門監)을 지낸 것으로 전하는 문헌(文獻)이 보이며, 시조(始祖) 계신(繼信)의 현손(玄孫) 인걸(仁傑)은 조선조(朝鮮朝)에서   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외국사절의 연향과 종실, 재실의 음식 공궤를 관장하던  관청의 종4품 벼슬)을 역임하였고, 고종(高宗) 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원일(元一)과 어사(御史) 석암(石岩)이 유명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몸바친 달초(達楚)와 억로(億魯)·현섭(縣燮) 등이 이름 났고, 인성(寅聖)은 독립단(獨立團) 평안남도 지단장으로 활약하면서 조국(祖國)의 광복(光復)을 위해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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