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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씨(君氏)





     군씨(君氏)

      군씨(君氏)는 주(周)나라 성왕(成王:무왕의 아들) 때 중국(中國) 안문(上門:산시성  북부를 남북으로 달리는 내장성 연변의 요지)에서  계출(系出)된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傳)해지며,  우리 나라 군씨(君氏)는 동래(東萊)한 연유와 시대를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경남(慶南)  김해군(金海君) 진영읍(進永邑) 진영리(進永里)에 군점득(君鮎得) 1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군씨(君氏)는 남한(南韓)에 49가구, 2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74
  • 국씨(菊氏)





     국씨(菊氏)

      국씨(菊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전(傳)하나  연원(淵源)과 계대(系代)는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상고(詳考)할 수 없다.
     우리 나라 국씨(菊氏)는 196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 처음으로 나타나 경기(京畿)·강원(江原)·충북(忠北)·전북(全北) 등지에 몇 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3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82
  • 국씨(國氏)





     국씨(國氏)

      국씨(國氏)는 중국(中國)  하비(下 )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백제시대(百濟時代)에는 사(沙)·연(燕)·리·해(解)·진(眞)·목(木)·백( )과 더불어 8대성(大姓)으로 손꼽혔다.
     우리 나라 국씨(國氏)의  본관(本貫)은 담양(潭陽)·대명(大明:중국)·금성(金城)·전주(全州)·풍천(豊川)·현풍(玄風)·영양(英陽) 등 7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傳)하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계대(系代)를 상고(詳考)할 수 없다.

     역사상 국씨(國氏)의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서기 611년(백제  무왕 12) 국지모(國智牟)가 수(隨)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들어가 조공(朝貢)을 바치고 고구려(高句麗) 정벌을 위한 출병 기일을 물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고려 태조 원년(太組元年)에 국 현(國 鉉)이 상서상의 정6품 벼슬인 원외랑(員外郞)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대(近代)에 와서 국씨(國氏)는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평남(平南) 강서군(江西郡)에 담양 국씨(潭陽國氏) 4가구와 함남(咸南) 영흥군(永興郡)에 풍천 국씨(豊川國氏) 3가구, 함남 단천군(端川郡)에 전주 국씨(全州國氏) 3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10가구, 97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04
  • 평해 구씨(平海 丘氏)
      평해(平海)는 경상북도 울진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근을어현(斤乙於縣)이었던 것을 고려 초에 평해로 고쳤다.
     구씨(丘氏)는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인 강태공(姜太公)의 후예(後裔)로 산동성(山東省) 창락현(昌樂縣)에 위치한 영구(營丘)라는 지명의 <구(久)> 자(字)를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하남성(河南省)에 연원을 두고 제태공(齊太公)이 봉해진 땅이름 영구의 <구(邱)> 자를 자손들이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나라 구씨(丘氏)는 중국 당나라 사람인 구대림(久大林) 장군이 서기 663년(신라 문무왕 30, 당 고종 용삭 3)에 일본에 사신으로 가다가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의 월송정(月松亭) 부근에 표착(漂着)하여 해안의 남쪽 언덕 미포(美浦)에 터를 잡아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후 600여 년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공민왕조에 이방실(李芳實) 장군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여 공신에 책훈되고 민부 전서(民部典書 : 6부에 속한 정 3품 벼슬)에  오른 구선혁(丘宣赫)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평해로 삼아 계대하여 왔다. 
     평해 구씨는 선혁(宣赫)의 아들 천우(天祐)가 판도판서(版圖判書 : 판도사의 으뜸 벼슬)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였는데 맏아들 춘호(春浩)는 사재지사(司宰寺사)를,  차남 춘경(春景)은 판사(判事)를, 셋째 춘서(春瑞)와 막내 춘보(春甫)는 낭장(郎將)을 지냈으며, 그들의 후손에서 가세가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전서공(典書公) 선혁의 현손(顯孫)인  종직(從直)은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 놓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등준시(登俊試 : 재상  이하의 문관을 시험하던 과거)에도 합격한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주역(周易)과  경학(經學)에 정통하였으며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일화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성종조 명신편(成宗朝名臣編)>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과거에 올라 교서관(校書館)에 입직하다가  경복궁 서쪽 강녕전(康寧殿) 연못 가운데  있는 경회루의 경치가 절승(絶勝)하다는 말을 듣고 밤중에 연못가를 구경하던 중에 남녀(籃輿 : 뚜껑이 없는 작은 승교)를 타고 산책 나온 세조와 마주쳤다. 
     그가 황공하여 길 아래에 엎드리자 왕은 그의 신분과 밤중에 경회루에 나와 있는 까닭을 묻고는 “경전(經典)을 외울 수 있느냐” 하니 “「춘추(春秋)」를 외우겠읍니다.”하고 한 권을 다 외웠다. 
     왕은 크게 감탄하여 술을 내려 주고서 이튿날 부교리(副校理)에 임명하였다.
     하루 아침에 9품직에서 5품직으로 임명하니 삼사(三司 : 사헌부·사간원·홍문관)가 번갈아 글을 올려 극력으로 반대하여 왕은 편전에 나가서 삼사(三司)들을 모두 불러 놓고 「춘추(春秋)」를 외우게 하니 한 사람도 능히 한 구절을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 
     종직을 시켜 외우게 하니 1권을 다 외우고 또 다른 질(帙)에서 뽑아 외우게 하니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왕은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하면서 청직(淸職)에 올라 있는데 종직(從直)과 같은 사람은 어찌 부교리(副校理)에 해당하지 못하느냐”고 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달손(達孫)과 숙손(夙孫) 형제도 과거에 급제하고 직제학(直提學)과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각각 역임하였다.
     1464년(세조 9) 춘시문과(春試文科)에 급제한 치곤(致崑)은  첨절제사(僉節制使) 차숭(次崇)의 아들로 집의(執義)를 거쳐 성종 때  강릉 부사(江陵府使)와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이어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인재등용에 관한 부조리를 진언하고  대사헌(대사헌)을 거쳐 한성 좌윤(漢城佐尹)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치강(致崗)은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올랐다. 
     한편 치강(致崗)의 아들  영안(永安)은 선술(仙術)의 도인(道人)으로  예종조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과 공리에 뜻을 두지 않았고, 복남(福男)은 임진왜란 때 남원성(南原城)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가문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552
  • 창원 구씨(昌原 具氏)





     창원 구씨(昌原 具氏) 

       시  조 휘(諱):구성길(具成吉), 의창군(義昌君)

       일세조 휘(諱):구  설(具  雪), 생원(生員)

       중시조 휘(諱):구종길(具宗吉), 직제학(直提學) 

     





     

     






     창원 구씨(昌原 具氏)

      창원(昌原)은 경상남도 남쪽에 위치한 산업도시이며 도청  소재지로 고대(古代)에는 금관가야(金官伽倻 : 경상남도 김해지방에서 부족국가를 형성하였던 6가야중의 하나)에 속했었다.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에 의하면 창원(昌原)은 본래 의창현(義昌縣)과 회원현(會原縣)의 합명(合名)이다. 의창(義昌)은 신라 때 굴자군(屈自郡) 또는 의안군(義安郡)으로 불리우다가 1282년(충렬왕 8)에 와서 의창으로 개칭되었고, 회원(會原)은 신라 때의  골포현(骨浦縣)을 경덕왕(경덕왕 : 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 이에 이르러서는 두 현(縣)을 합하여  창원부(昌原府)를 설치하였다.
     창원 구씨(昌原具氏)는 본래 중국 남양(南陽 : 중국 하남성 서남부의 도시)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구 목(仇 牧)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창원구씨세보(昌原具氏世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창원 구씨는  원성(原姓)이 구씨(仇氏)로 한나라 명환(名宦) 구  남(仇 覽)의 후손 구성길(仇成吉)이 동래(東來)하여 서기 945년(혜종 2) 서경(西京)에서 공을 세워 의창군(義昌君)에 봉해졌고 벼슬은 찬성사(贊成事 : 문하부의 정2품 관직)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창원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였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생원(生員) 설(雪)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조선 세종 때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역임한 종길(宗吉)을 중시조로 계대하여 오다가 1791년(정조 15) 현재의 구씨(具氏)로 개성(改姓)했다고 한다. 
     특히 창원 구씨는 1797년(정조 21)부터 1924년에 이르도록 127년간 수보(修譜)를 못하여 개성(改姓)한 연유와 수보를 못한 사유를 밝히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정조실록(正祖實錄)」과 「승정 원일기(承政院日記)」에 사성(賜姓)된 기록이 있을 뿐이다. 
     가세를 일으킨 중시조 종길은  1363년(공민왕 12) 경남  의창군 북면 내곡리에서 생원(生員) 설(雪)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천품이 온화하고 어질어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한 그는 주역(周易)에 통달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진력하다가 노모의 뜻에 따라 늦게 벼슬길에 나서 1422년(세종 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그는 슬하에 4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창원 구씨의 4대 산맥(山脈)을 이루어, 맏아들 복한(復漢)은 부사공파(府使公派)로, 둘째 동설(東薛)은 진사공파(進士公派)로, 셋째 동직(東直)은 승지공파(承旨公派)로, 그리고 막내 석훈(錫勳)은 처사공파(處士公派)로 각각 분파되었다.
     그밖에 종길(宗吉)의 7세손(世孫) 응진(應辰)은 임진왜란 때 제포 만호(濟浦萬戶)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김해·노현 등지에서 수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나 부상을 당한 채 포로가 되어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왜군에게 무참히 처형당하였다.
     그의 아우 응삼(應參)도 임진왜란 때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 : 군사의  시재, 무예의 연습, 병서의 강습을 맡은 관아의 종 4품  벼슬)으로 선조를 의주에까지 호종(扈從)하고 전쟁에서 순절하였으므로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한편 진사(進士) 명람(明覽)의 아들 응성(應星)은 응진의 종제(從弟)가 되는데, 임진왜란 때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로서 의병을 모아 권 율(權 慄)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순절하여 선무원종 이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의 훈작을 받았고, 그의 아들 동(棟)은 약관(弱冠)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의령·함안 등지에서 공을 세워 이름을 떨쳤으나 끝내 싸움터에서 순절하였다.
     1967년 <일문4충(一門四忠)>으로 일컬어진 이들 4부자형제(父子兄弟 : 응진·응삼·응성·동)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경남 고성군 거류면 송산리에 사충기적비(四忠紀蹟碑)를 세우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친필로 제목을 써서 그들의 충절을 추모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창원 구씨는  남한에 총 5,056가구, 22,12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28
  • 능성 구씨(綾城 具氏)
    능성 구씨(綾城 具氏) 

       시조 휘(諱):구존유(具存裕),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
             단 소: 전남 화순군 한천면 정리 연주산

     


    능성 구씨(綾城 具氏)

      능성(綾城)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능주(綾州)의 옛 지명으로 백제시대에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 또는 죽수부리군(竹樹夫里郡)·인부리군(仁夫里郡)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 경덕왕(敬德王) 때 능성현이라 개칭되었고, 1913년에 능주면으로서 화순군(和順郡)에 편입되었다.
     구씨(具氏)의 선계(先系)는 중국 진나라 대부(大夫) 구 병(具 丙)으로 전하며, 「동사보유(東史補遺)」와 「주청계공실기(朱淸溪公實記)」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구씨(具氏)는 송나라 출신인 구존유(具存裕)가 1224년(고종 11) 신안주씨(新安朱氏)의  시조(始祖) 청계(淸溪) 주 잠(朱潛)과 함께 고려에 귀화(歸化)한 것이 시초가 된다. 
     「능성구씨세보(綾城具氏世譜)」에는 그가 고려조에서  벼슬이 벽상공신 삼중대광(壁上功臣三重大匡)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에 이르렀고, 전남  능성현(현 능주면 고정리)에  은거하던 주 잠의 딸과 혼인하여 능성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우리나라 구씨(具氏)의 터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고려(高麗) 후반기에 문호(門戶)를 연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조선 영조대(英祖代)에  이르기까지 무맥(武脈)을 이어오면서 권력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시조  존유(存裕)의 7세손 때부터 가세가 크게 번창하여 사재감 판사(司宰監判事) 현좌(賢佐)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사공파(判事公派), 공조 전서(工曹典書) 현로(賢老)를 파조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시랑(侍郞) 영량(英良)을 파조로 하는 시랑공파(侍郞公派)를  비롯하여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판안동공파(判安東公派)·도원수파(都元帥派)·재신파(宰臣派)·낭장공파(郎將公派)·감무공파(監務公派)·임천군사공파(林川郡事公派)·참판공판(參判公派)·문천군사공파(文川郡事公派) 등 10여 파(派)로 크게 갈리었다.
     각 파별 인맥을 살펴보면 판사공 현좌(賢佐)의 아들 인문(人文)이 세종 때 등과하여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로 문종(文宗)의 총애를 받았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을 비관하여  눈뜬 소경으로 행세하며 고향인 봉생(鳳生)에 돌아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고, 그의 아들 효근(孝謹)은 함창 현감(咸昌縣監)을 지냈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의강(義剛)은 현좌의 7세손이며 선공감역(繕工監役) 경서(慶瑞)의 아들로 수찬(修撰)·전적(典籍)  등을 역임하고 강원도  암행어사(江原道暗行御史)로 백성의 억울함을 다스렸으며 이조 좌랑(吏曹佐郞)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시랑중파 영량(英良)의 7세손 환(桓)은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지냈으며 도량이 넓고 준직(峻直)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392년(태조 원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이태조(李太祖)가 누차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불응하고 능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며 절의를 지켰다. 
     그의 7세손 두남(斗南)은 부사정(副司正) 정(綎)의 아들로 중종  때 효행이 뛰어나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특제(特除)되어 경릉 참봉(敬陵參奉)을 거쳐  명종 때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가 되었고, 그의 손자 희(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로 들어가 금산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진주성(晋州城) 수비에 가담, 적과 싸우다가  순절하여 충효의 전통을 지켰다. 
     좌정승파(左政丞派)에서는 파조(派祖) 홍(鴻)의 손자 익수(益壽)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미리 알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사직한 후 은거하였다.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봉령(鳳齡)은 겸(謙)의 아들로 어려서 이퇴계(李退溪)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고 여러 벼슬을 거쳐  당시 동서(東西)의 당쟁에 시작되던 무렵이었으나 중립을 지키기에 힘썼으며, 시(詩)와 문장과 학행의 <삼절(三節)>로  일컬어졌고, 그가 죽은 후 만년에 학도(學徒)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던 집 동쪽에 학도묘(學徒廟)가 세워졌다.
     판안동파 서(緖)는 성량(成亮)의 아들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보조공신(補祚功臣)으로 능성군(綾城君)에 추봉되었으며, 그의 아우 강(綱)은 공주 목사(公州牧使)를 거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역임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능원군(綾原君)에 봉해진 문신(文信)과 문정(文靖 : 은산 현감을 역임)·문로(文老 : 병마절도사를 역임) 3형제는 능성군 서(緖)의 아들로 유명했으며,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오른 신충(信忠)의  손자  수연(壽延)·수복(壽福)· 수담(壽聃)·수팽(壽彭) 4형제가 뛰어났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 8권 <기묘당적(己卯黨籍)>의 기록에  의하면 수복(壽福)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파직되자 갈 곳이  없었다. 그의 장인이 딱하게 여겨 보은(報恩)에 있는 자기 농장에 가서 살도록 했더니 얼마  후에 농장의 종이 그를 싫어해서 장인에게 중상하기를 “구좌랑이 농막을 차지한 후로 종들을 혹사하여 장차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장인은 자세히 알아 보지도 않고 종말만 듣고 그를 쫓아 내었다.  이 때는 겨울철이었는데 수척한 말과 허약한 종 하나를 데리고 길에 나와 갈 곳이 없어 행색이 참으로 비참했다.
     때마침 한 호걸남자가 사냥하러 갔다가  수많은 종을 데리고 사냥개와 매를  이끌고 지나가는데 수복(壽福)이 오랫동안 길에서 방황하여 잠깐동안에 두 번이나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말 위에서 읍하고 묻기를 “당신은 누구이기에 길에서 홀로 머뭇거리고 있소”하였다. 
     수복(壽福)은 그 연유를 대략 말하였던 바 그 호걸남자는 즉시 말에서 내리기를 청하여 눈 위에 털요를 깔고 서로 마주 앉아 담화하면서 꿩을 굽고 술을 부어 권하기를 숙친한 사이같이 하고 그의 집으로 갔다.
     그 호걸남자는 찰방(察訪)을 지내다가 파직되어 보은에 내려온 김태암(金泰岩)이었다. 태암(泰岩)은 수복에게 집과 밭 수십경(頃)을 주어 잘 살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수복은 부인과 아들 3형제를 데리고 편히 살면서 단장과 짚신으로 명산승지를 두루 돌면서 마음껏 탐승(探勝)했는데 속리산의 경치를 가장 좋아 했다고 하며 학풍을 일으켜 많이 배출했다.
     수복의 아우 수담(壽聃)은 일찍이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에게 글을 배우고 1528년(중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박사(博士)를 거쳐 검토관(檢討官 : 이조  때 경연청의 정 6품 벼슬)으로서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유림의 서용을 청했다가 파직되기도  했으며,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러서는 강직한 성품으로 권신(權臣) 이 기를 탄핵하여 갑산에 유배당했다.

     인조(仁祖) 때 증광문과에 급제한 봉서(鳳瑞)는 수복의  현손으로 이조랑(吏曹郞)에 올라 인조의 사친추숭(賜親追崇)을 반대했으며, 평안 감사(平安監事)로 재직시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 계가 잠상(潛商 : 법령으로 금하는 물건을 암암리에 팔고 사는 장사)  문제로 청나라에 가서 망군부국(忘君負國)의 고자질로 조선의 조정을 믿고 전횡을 일삼자 이를 잡아 효수(梟首)하여 민심을 통쾌하게 했다. 그가 평양에서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애도의 뜻을 표하였는데 평안도가 생긴이래 가장 큰 상사(喪事)였다고 한다.
     도원수파에서는 목사(牧使) 양(揚)의 아들 치관(致寬)의 형제 대(代)에서부터 크게 현달하여 능성 구씨(綾城具氏)의 중추역할을 담당하였다.
     치관(致寬)은 계유정난(癸酉靖難 :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에 가담하여 재능을 인정받아 일약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 :승정원에 속하였던 정3품의 벼슬)에 올랐고 좌익삼등공신(佐翼三等功臣)으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승진하여 능성부원군(綾城附院君)에 봉해졌다.
     뒤에 우의정(右義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으로 불안정한  북변의 야인대책에 치중하여 세조는 항상 “구치관은 나의 만리장성이다”라고 치하했으며 특히 이조(吏曹)의 인재 등용에 청탁을 배제하는 신풍(新風)을 세운 조선 최초의 판서(判書)였다.
     「필원잡기(筆苑雜記)」의 기록에 어느날 참의(參議) 서거정(徐居正)이 정방(政房)에서 술이 취하여 잠이 들었는데 마침 치관(致寬)이 그를 보고 꾸짖기를 “참의의 생각에는 구치관이 인물을 전형하는데 제멋대로 할 것이라 하여 간섭하지 않으려 하는가 뒷날 사람을 잘못  썼을 때에 참의는 ‘나는 집에 있어서 알지 못했다’고 하겠는가”하였다고 한다.
     치관의 아우 치홍(致洪)은 세조 때 문무겸재(文武兼才)의 인물로 발탁되어 80이 넘어서도 입궁할 때 말을 타지 않고 걸어 들어가 마치 심어 놓은 굽은 소나무처럼 서 있었다고 한다. 
     치홍의 아들이 철원 부사(鐵原府使)를 지낸 수종(壽宗)과 중종 때 정국이등공시(靖國二等功臣)으로 능성부원군에 봉해진 수영(壽永)이며  수영의 손자 한(澣)은  중종의 딸 숙정옹주(淑靜翁主)와 혼인하여 능창위(綾昌尉)에 봉해졌고 명종 때 위사워종공신(衛社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순(淳)의 아들 사맹(思孟)은 지경연사(知經筵事 : 경연청의 정 2품 벼슬)를  지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갈 때까지 청렴결백하여 권세가들과의 접촉을 회피했으며 시문에 뛰어났고, 다섯째 딸이 인헌왕후(仁獻王后 : 원종의 비)가 되었다.
     그밖에 선조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능해군(綾海君)에 봉해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성(宬)과 인조 반정의 공신 굉(宏)은 좌찬성(左贊成) 사맹(思孟)의 아들이다. 
     특히 굉(宏)은 인조조 40년간 벼슬에 있는  동안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세번,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네 번,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두 번 지냈고 별직(別職)으로  도총관(都摠官)을 비롯하여 무신직(武臣職)을 거치면서 치적(治績)을 많이 남긴 명신으로 손꼽히며, 성(宬)의 아들  인후는 인조와 고종사촌간으로 광해군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신경진·김 유 등과 함께 인조 반정을 성사시킨 인물이다.영조 때 부사직(副司職)으로 찬집당상(簒輯堂上)에 올라  「속대전(續大典)」을 찬술하고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을 훈석한 택규(宅奎)와 그의 아들 윤명(允明)은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윤명(允明)은 백부 몽규(夢奎)에게 입양하여 1743년(영조 19) 정시문과에 올라  사관(史官)·장령(掌令)·승지(承旨) 등을 역임했고 봉사손(奉事孫)으로 능은군(綾恩君)을 습봉했다.
     낭장파에서는 병조 참판(兵曹參判) 철경(哲卿)과 전주  판관(全州判官) 승희(承禧), 김제 군수(金提郡守) 승유(承裕) 등이 유명했고,  현록(玄祿)은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거쳐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올라 제주 판관(濟州判官)을 지낸 정현(廷賢), 대구 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 황(滉), 홍원 현감(洪原縣監) 산두(山斗) 등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그 외 감무파의 암(巖 : 현감을 역임)과  임천군사파의 충로(忠老 : 지임천군사를 역임), 참판파) 석린(碩麟 : 동지중추부사를 역임)을 비롯하여  문천군사파의 순(順 : 소강진 수군절도사)과  신동(信童 : 경성 판관을 역임), 대우(大佑 : 예산 현감을 역임), 치용(致用 : 인조 때 학자) 등이  충렬의 전통을 이어 명문의 능성 구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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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풍 곽씨(玄風 郭氏)
    현풍 곽씨(玄風 郭氏) 

       시조 휘(諱): 곽 경(郭 鏡), 포산군(苞山君)
     





     현풍 곽씨(玄風 郭氏)

      시조 휘(諱): 곽 경(郭 鏡), 포산군(苞山君)
      현풍(玄風)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는 추량화현(推良火縣) 또는 삼량화현(三良火縣)이라 하다가 경덕왕(景德王 : 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이 현효현(玄驍縣)으로 고쳐서 화왕군(火王郡 : 창녕군)에 속하게 하였고, 고려초(高麗初)에 현풍현(玄風縣)으로 개칭(改稱)하여 밀양(密陽)에 이속시켰으나 조선조(朝鮮朝)에서 한때 포산(苞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송(宋)나라 귀화성씨(歸化姓氏)로 알려진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중국(中國) 관서(關西) 홍농(弘農) 출신인 곽 경(郭 鏡)이 고려(高麗) 인종(仁宗 : 제 17대 왕, 재위기간 :  1122~1146)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포산군(苞山郡)에 봉해졌으므로 처음엔 관향(貫鄕)을 포산(苞山)으로 하였으나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러 포산현(苞山縣)이 현풍(玄風)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현풍(玄風)을 본관(本貫)으로 하게 되었다.
     일찍이 영남 내륙(嶺南內陸)에 뿌리를 내린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고려중기(高麗中期)에서 조선조(朝鮮朝)에 이르기까지 충(忠)·효(孝)·열(烈)의  가통(家統)을 이어 우리  나라의 대표적(代表的)인 도덕 가문(道德家門)으로 알려졌다.
     현풍 곽씨(玄風郭氏)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포산군(苞山郡)의 현손(玄孫) 기정(其正)이 고려조(高麗朝)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응(膺)은 충렬왕조(忠烈王朝)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냄으로써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녹훈된 부는 수사도(守司徒)에 올라  포산군(苞山郡)에 봉해졌고, 제학(堤學) 원진(元振)의 9세손(世孫) 안방(安邦)은 세종(世宗) 때 해미 현감(海美縣監)과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지내면서 청렴한 성품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뒤에 청백리(淸白吏 : 청렴한 벼슬아치)에 녹선(錄選)되었으며, 그의 아들 승화(承華)는 어려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김굉필(金宏弼)과 더불어 당대의 양재(兩才)로  불리웠다.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특히 안방(安邦)의 현손대(玄孫代)에서 주(走)자 항렬의 8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현곽8주(玄郭8走)>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중 월(越)·율·준 3형제가 빼어났다.
     1556년(명종 1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한 월(越)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선조조에서 의주 목사(義州牧使)를 지내며 시폐(時弊)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고,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 청송·남원 등지의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한편 율은 일찍이 당대의 석학(碩學) 조 식(曺 植)과 정 구(鄭 逑)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학행으로 벼슬에 등용되어 홍산  현감(鴻山縣監)과 예천 군수(醴川郡守)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초계 군수(草溪郡守)로 있으면서 왜군 방어를 잘하여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으로  특진되었으나 군내(郡內)의 유생들이 유임시켜 달라는 상소로 초계 군수에 재임되어,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이 “팔도고을이 초계(草溪)만 같다면야 ....”하고 개탄했을 만큼 선정(善政)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김 면(金 沔)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 막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고,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과 함께 호남(湖南)의 목구멍이라던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서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무저항으로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 이상(履常)·이후(履厚)도 그 아버지를 안고 적을 꾸짖다가 죽음을 당했고, 딸 이문호(李文虎)의 아내도 남편이 포로가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일문삼강(一門三綱)>의 가문으로 일컬어져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세워 표창하였다.
     목사(牧使) 월(越)의 셋째 아들 재우(再祐)는 현풍 곽씨(玄風郭氏)가 자랑하는  인물로 1552년(명종 7) 의령현(宜寧縣) 세천리 외가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질박(質朴)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일찍이 남명(南溟) 조 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조 식이 자기  외손녀를 재우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재우는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파방되고 나이 40이 넘자 벼슬을 단념,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아버지 월의 무덤을 찾아가 “아버지께서 만약 계셨다면 왜놈들의 창궐이 어찌 걱정되겠습니까?”하고 울며 하직한 후  임진년 4월 27일에 의병을 일으켜  항상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첩리를 입고 스스로  <천강홍의 대장군(天降洪衣大將軍)>이라 칭하면서 의령·삼가·합천·현풍·창녕·영산 등지에서 크게 무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고 관찰사 김 수와의 불화로 대관(臺官) 홍여순(洪汝諄)의 탄핵을 받아 영암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1613년(광해군 5) 광해군이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려 하자 신구(伸求)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혼탁한 조야(朝野)의 기강이 문란함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 비슬산(琵瑟山 : 경상북도 달성군과 청도군 사이에 있는 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솔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밖에 재우(再祐)의 종형(從兄)인 재겸(在謙)은 임진왜란 때 금강 방어에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에는 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에서 의병을 거느리고 싸워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으며, 자방(自防)은 의병장 조 헌(趙 憲)의 휘하에 들어가 금산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현풍 곽씨의 의맥(義脈)을 이었다. 
     고종 때의 거유(巨儒) 종석(鐘錫)은  이 황의 학문을 계승한  스승 이진상(李震相)에게 성리학을 이어받아 이기설(理氣設)을 주장한 학자로 한일합방이 되자 고향에 은거하다가 3·1운동 때는 전국 유림들의 궐기를 호소했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호소하는 장서(長書)를 지어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등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여 충의의 가문인 현풍 곽씨(玄風郭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현풍 곽씨는  남한에 총 30,969가구, 127,32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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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곽씨(淸州 郭氏)
     청주 곽씨(淸州 郭氏) 

       시조 휘(諱): 곽 상(郭 祥), 시중(侍中) 

     

      시조 휘(諱): 곽 상(郭 祥), 시중(侍中) 
      청주(淸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앙(中央)에 위치하는 도청(道廳) 소재지로서  원래는 마한(馬韓)의 땅이었는데 백제 때 상당현(上黨縣)이라  하였고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으로도 불리우다가 서기 685년(신라 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에 서원경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에 청주(淸州)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청주 곽씨의 시조(始祖)인 곽 상(郭 祥)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 제 49대 왕, 재위기간 : 875~886) 때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방의 석학(碩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교분(交分)을 나누었다.
     「청주곽씨대통보(淸州郭氏大統譜)」에 의하면 그의 후손 원(元)은  996년(고려 성종 15) 문과에 급제하고 현종조(顯宗朝)에 사신(使臣)으로 송나라에 가서 거란의 침입을 전하고 돌아와  형부 시랑(刑部侍郞)과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역임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 : 중서문하성의 종 2품의 벼슬)에  이르렀으며, 원(元)의 손자인 상(尙)은 수사공(守司空)에 올랐다.
     한편 여(輿)는 고려 예종(睿宗)과의 세자(世子) 때 친분으로 순복전(純福殿)에 있으면서 왕과  담론을 나누었고,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금주(金州)의  초당(草堂)으로 돌아가자 왕이 성동(城東)의 약두산(若頭山)에  산재(山齋)를 짓게 하고  <허정재(虛靜齋)>로 사액(賜額) 한 후 왕이 산책을 나오면 들러 함께 시(詩)를 읊고 즐겨 세칭 <금문우객(金門羽客)>으로 불리웠다. 
      그가 죽자 왕은 남호(南湖) 정지상(鄭知常)을 시켜 「산재기(産齋記)」를 써 비를 세워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1255년(고종 42) 문과에  급제한 예(預)는 문충공(文忠公)  탄(坦)의 현손(顯孫)으로 충렬왕(忠烈王) 때 좌승지(左承旨)와 국자감(國子監)의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고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성절사(聖節使 :  중국 황제의 탄일을 축하하러  보내던 사절)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오던 길에 병사했으며, 교서랑(校書郞) 운진(雲鎭)의 아들 인(麟)은 문과에 장원하고 문한서(文翰署)에 속하여 문장과 충성심을 인정받아 선유사(宣諭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인(麟)의 손자 충수(忠秀)는 헌납(獻納)을 거쳐 대간(臺諫)에 올라 권신 조일신(趙日新)의 비리를 탄핵했고 뒤에 형부 시랑(刑部侍郞)을 지냈으며, 평장사(平章事) 침의 아들 추(樞)는  조선이 개국된 후 대제학(大提學 : 홍문관, 예문관의 정 2품의 으뜸 벼슬)에 이르렀다.
     조선개국원종공신(朝鮮開國原從功臣) 충보(忠輔)는 장사길(張思吉)과 함께  문화(文化)와 영녕(永寧)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고, 열(說)은 선조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으며 외숙인 김자점(金自點)이 권세를 남용하므로 이를  극간했으나 듣지 않자 원주로  은퇴하였고, 그의 아들 희태(希泰)는 66세에 등과하여 87세까지 벼슬에 머물렀다.
     영조대왕(英祖大王)의 스승이었던 시징(始徵)은 집의(執義)  지흠(之欽)의 아들로 어려서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천거로 참봉(參奉)이 되었다.
     그 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제주도에 안치(安置)되었을 때  그 무고함을 상소했으나 스승이  사사(賜死)되자 태안으로 내려가 두문불출하여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한말에 와서는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抗日運動)에 몸바친 재기(在驥)가 경남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충렬의 가통을 후세에 전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 곽씨(淸州郭氏)는 남한에  총 5,667가구, 24,4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616
  • 김포 공씨(金浦 公氏)
    김포(金浦)는 경기도 서쪽 한강(漢江) 하구에  위치한 지명으로 일찍이 고구려 시대에는  검포현(黔浦縣)이라 불리우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 때 김포(金浦)로 개칭(改稱)되었다.
     공씨(公氏)의 연원(淵源)은 중국 노(魯 : 무왕의 아우 주공  단을 시조로 하는 주나라 때의 열국의 하나) 나라의 왕족에서부터 비롯되는데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공하수(公夏守)의 후손 공윤보(公尹輔)가 당(唐)나라 18학사(學士)의 한 사람으로 서기 755년 (신라 경덕왕 14) 안녹산(安祿山 : 당나라의 장군으로 안사의  난을 일으켰던 사람)의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 김포에 터를 마련한 것이 우리나라 공씨(公氏)의 시초가 된다. 

     공씨(公氏)의 본관은 김포와 문천을 비롯하여  창원·개성·인천·풍곡(楓谷 : 영동지방)· 삼계(森溪 : 영광지방)·삼가(三嘉) 등 10 본(本)이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造船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貫鄕)은 김포 공씨(金浦公氏) 단본(單本)이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고, 모두가 공윤보(公允輔)의 동원혈족(同源血族)이 확실하므로 공윤보가 처음 뿌리를  내린 김포를 관향)으로 삼아  벽동파(碧潼派)·문천파(文川派)·창원파(昌原派)로 계통(系統)을 이었다.
     벽동파 명례(明禮)는 1478년 (성종 9) 계공랑(啓功郞  : 종 7품의 문관의 품계)으로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미움을 받아 평안도(平安道) 벽동(碧潼)으로 강제  이거당하여 그 곳에서 살면서 벽동파의 시원(始源)을 이루었고,  문천파(文川派) 보언(普彦)은 조선 세조 때 불복신(不服臣)으로 몰려 함경도(咸鏡道) 문천(文川)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되며, 또다른 한 계통(系統)인 창원파(昌原派)는 정승(政丞) 의(義)의 후손들이 누대(累代)로 함안(咸安)에 살다가 창원)에 이거하면서 일파(一派)를 이루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중종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병년마다 실시하여 문관을 뽑는 과거)에 병과(兵科)로 급제한  규(珪)가 저작(著作)·봉교(奉敎)·정언(正言) 등을 거쳐 전적(典籍 : 성균관의 학생을 지도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 6품 벼슬)에 올랐으며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쳤고, 창준(昌俊)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하다가 만주의 홍범도(洪範圖) 군대와 합류하여 백두산을 근거지로 활약했다.
     그의 아들 진원(震遠)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하여 대장으로서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임시정부의 의정의원(議政議員)을 거쳐 광복군 참모(光復軍參謀) 겸 지대장(支隊長)으로 활약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공씨(公氏)는 남한에 총 420가구, 1,8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19
  • 곡부 공씨(曲阜 孔氏)
     곡부(曲阜)는 중국(中國) 산동성(山東城) 제령도(濟寧道)에 위치한 고을  이름으로 일찍이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우 주공(周公) 단(旦)이 봉해진 나라였다. 
     공씨(孔氏)의 시조(始祖) 공자(孔子 : 본명은 구, 자는 중니)는 중국 노(魯)나라 추읍(곡부현)에서 태어나 세계 4성(四聖)의 한 사람으로 존앙되어 왔으며, 일찍이 인(仁)을 이상(理想)의 도덕(道德)이라 하여 효제(孝悌)와 충서(忠恕)를 이상의 근저(根底)로 삼고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치국(治國)의 도(道)를 설(說)하였고, 육경(六經)을  산술(刪述)하여 유교(儒敎)의 시원(始原)을 이루었다. 그의 언행(언행)을 적은 「논어(論語)」가 전한다.

     공자의 51세손인 공 완(孔 浣)의 아들 형제 중 장자(長子) 사회(思晦)는 중국에서 세거(世居)하였고, 차자(次子)인 소(紹)가 원(元)나라 순제(順帝 : 제 15대 황제, 재위기간 : 1333∼1367)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1351년(공민왕 즉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종(陪從)하고 고려에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文下侍郞平章事 : 내사문하성의 정 2품 벼슬)로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지고  관향(貫鄕)을 창원(昌原)으로 사적(賜籍)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공씨(孔氏)의 문호(門戶)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처음에 사적받은  창원(昌原)을 본관으로 삼았으나 1794년(정조  18) 공자(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개관하게 되었다.
     공씨(孔氏)의 본관은 곡부를 비롯하여 파평(坡平), 수원(水原), 부평(富平), 남양(南陽) 등  45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현존하는 관향(貫鄕)은 곡부 공씨(曲阜孔氏) 단본(單本)이다. 
     곡부 공씨는 소(紹)의 아들  녀가 고려조에서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손자 부는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태학사를 거쳐 조선이 개국(開國)한 후 한성윤(漢城尹)과 보문각 대제학(補文閣大提學 : 경연과 장서를 맡아보던 관청의 종 2품 벼슬)을 지냈으며 글씨에 능했고 당시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전횡을 논척했다.
     그의 아우 은은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교우했던 <명류구일(名流九逸)> 중의 한 사람으로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太宗)의 수차례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  
     한편 부의 손자 성길(成吉)은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봉명(鳳鳴)은 목사(牧使)를 지냈고, 평장사)은의 손자인 전도 참판(參判)을 역임한 사문(斯文), 대사성(大司成 :  성균관의 정 3품 으뜸 벼슬)에 오른 기와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특히 1507년(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한 서린(瑞麟)은  곡부 공씨(曲阜孔氏)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친교를 맺었으며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상소하다가 관직이 삭탈당하기도 했으나, 정권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던 김안로(金安老)가 죽은  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와 대사헌(大司憲 : 사헌부의 종 2품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 외 1794년(정조 18)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낸  윤항(胤恒)과 성균관 대제학(成均館大提學)을 역임한 성학(聖學)이 유명했으며, 한말에 와서는  항일지사 수(洙)가 일제에 항거하여 구국 대열에 앞장섰고, 1947년에  문단에 등장한 중인(仲仁)은 신낭만주의(新浪漫主義)를 표방하여 전통적인 서정을 현대감각으로 포착하는 시(詩)를  썼으며 종군작가단(從軍作家團)의 일원으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많은 작품을 남겨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공씨(孔氏)는 남한에 총 17,207가구, 72,3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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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면천 곡씨(沔川 曲氏)

     면천 곡씨(沔川 曲氏)

      곡씨(曲氏)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하락(河洛:황하강 남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하·은·주나라의 도읍지) 지방(地方)에 연원(淵源)을  두며 당(唐)나라  대종(代宗:당나라의 제 8대  황제, 재위기간:763∼779) 때 협주(陜州) 안읍(安邑) 사람인 곡  환(곡 환) 장군(將軍)의 후예(後裔)로 전(傳)한다. 
     우리나라 곡씨(曲氏)는 고려초기(高麗初期)의 명신(名臣)으로 서기 918 년(태조 1) 내봉사(內奉史)로 있다가 평찰(平察)에 오른 곡긍회(曲矜會)가 최초(最初)의 인물(人物)이 된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문헌(文獻)을  보면 곡씨(曲氏)의 본관(本貫)은 면천(沔川)과 용궁(龍宮)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용궁  곡씨(龍宮曲氏)는 당(唐)나라에서 귀화(歸化)한 것으로 전(傳)한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정확(正確)한 계대(系代)는 상고(詳考)할 수 없고, 서기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에서 16가구(家口) 74명(名)이 나타나 우리나라  전체 성씨(姓氏) 258성(姓) 중 209위(位)였다가 1975년 조사(調査)에서는 249성(姓) 중 210위(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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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고씨(濟州 高氏)

    제주 고씨(濟州 高氏)

      제주(濟州)는 한반도(韓半島)의 남서(南西) 해상(海上)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대의 섬으로 일찍이 신라시대(新羅時代)부터 탐라국(耽羅國) 또는 탁라( 羅), 탐모라(耽牟羅), 주호(州胡), 섭라(涉羅) 등으로 불리우다가 1211년(희종 7) 제주(濟州)로 개칭(改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誌)>와 <영주지(瀛州誌)>의 [탐라개벽설화(耽羅開闢說話)]에 의하면 제주(濟州)에는 태초(太初)에 사람이 없었는데 한라산(漢拏山)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삼신인(三神人)인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가 용출(湧出)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짐승의 고기만을 먹으며 살았는데 하루는 동(東)쪽으로부터 목함(木函)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여 함께 열어 보니 용모(容貌)가 미려(美麗)한 세 여자와 망아지, 송아지, 오곡(五穀)의 종자(種子)가 들어있었다. 
     삼신인(三神人)은 각각 세 미녀(美女)를 배필로 맞이하고 활을 쏘아 고을나(高乙那)가 제일도(第一都)인 제주목(濟州牧)을, 양을나(良乙那)는 제이도(第二都)인 대정현(大靜縣)을 부을나(夫乙那)는 제삼도(第三都)인 정의현(旌義縣)을 차지하여 목축(牧畜)과 농사(農事)를 지으며 살아 비로소 인간세계(人間世界)가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는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世孫)인 고 후(高 厚), 고 청(高淸)고 계(高 季) 등 세 사람이 신라(新羅)에 입조(入朝)하여 신라왕(新羅王)으로 부터 국호(國號)와 벼슬을 받아와서 탐라국(耽羅國)이 개국(開國)된 것으로 전한다. 
     고씨(高氏)는 고을나(高乙那)를 시조(始祖)로 하여 45세손(世孫) 자견왕(自堅王)까지 탐라군주(耽羅郡主)로 세습(世襲)해 오다가 서기 938년(고려 태조 21) 자견왕(自堅王)의 태자(太子) 말로(末老)가 고려(高麗)에 내조(來朝)하여 그가 곧 우리나라 고씨(高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 유(維), 강(綱), 소(紹) 형제가 모두 고려(高麗)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지냄으로써 본토(本土 : 육지)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말로(末老)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시조(始祖)의 발원지(發源地)인 제주(濟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가문(家門)을 크게 번창시켰다. 

     고씨(高氏)의 본관(本貫)은 문헌에 제주(濟州)를 비롯하여 장흥(長興), 개성(開城), 횡성(橫城), 연안(延安), 용담(龍潭), 담양(潭陽), 의령(宜寧), 고봉(高峰), 옥구(沃溝), 상당(上黨), 김화(金花), 면산(免山), 회령(會寧), 안동(安東) 등 122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傳)하고 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오늘날에는 제주(濟州)를 단본(單本)으로 하여 중시조(中始祖) 말로(末老)의 15세손(世孫) 인단(仁旦)을 파조(派祖)로 하는 성주공파(星州公派), 13세손(世孫) 신걸(臣傑)을 파조(派祖)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15세손(世孫) 득종(得宗)을 파조(派祖)로 하는 영곡공파(靈谷公派), 11세손(世孫) 경(慶)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 10세손(世孫) 중연을 파조(派祖)로 하는 장흥백파(長興伯派), 11세손(世孫) 인비(仁庇)를 파조(派祖)로 하는 화전군파(花田君派), 13세손(世孫) 택(澤)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정공파(文禎公派), 4세손(世孫) 공익(恭益)을 파조(派祖)로 하는 상당군파(上黨君派), 4세손(世孫) 영신(令臣)을 파조(派祖)로 하는 양경공파(良敬公派) 등 아홉파(派)로 갈리었다.
     그러나 제주 고씨(濟州高氏)가 내륙(內陸)에 진출(進出)하여 명성(名聲)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성주공(星主公) 말로(末老)의 맏아들 유(維)가 처음이다. 

     유(維)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남성시(南省試)에 장원(壯元)하여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 우복야(右僕射 : 상서도성에 속한 정2품 벼슬)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조기(兆基)는 예종조(睿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인종(仁宗)때 시어사(侍御史)에 올라 이자겸(李資謙)의 일파(一派)로서 환관(宦官)과 결탁하여 권세(權勢)를 누리던 봉우(奉佑)를 탄핵하고 의종(毅宗)이 등극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과 판호부사(判戶府事)를 거쳐 1149년(의종 3)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 중서 문하성의 정2품 벼슬)에 올랐으며 시문(詩文)에 능하여 오언시(五言詩)의 신인(神人)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로부터 제주 고씨(濟州高氏)는 고려조(高麗朝)에서 9상서(尙書) 12한림(翰林)의 명현(名賢)을 배출하였고, 조선조(朝鮮朝)에서도 수많은 인재(人才)를 낳아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또는 학행(學行)과 충효(忠孝), 의열(義烈) 등으로 역사를 수(繡) 놓아 탐라왕족(耽羅王族)으로서의 긍지(矜持)를 세습(世襲)하며 명문(名文)의 기틀을 다져왔다. 

     조선초기(朝鮮初基)에 제주 고씨(濟州高氏)를 빛낸 인물(人物)인 영곡공파조(靈谷公派祖) 득종(得宗)은 전서공(典書公) 신걸(臣傑)의 손자(孫子)이며 상장군(上將軍) 봉지(鳳智)의 아들로 1414년(태종 1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대호군(大護軍)과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 외국사절의 연향과 종실 , 재신의 음식 공괘를 관장하던 종5품 벼슬)을 거쳐 1427년(세종 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올랐다.
     1438(세종 20)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오른 그는 사신(使臣)으로 두차례 명(明)나라에 다녀왔고 통신사(通信使)로 일본(日本)에 가서는 천황의 서계(書契 : 일본 정부와 교섭하던 문서)를 가지고 돌아오는 등 외교적인 공적을 쌓았으며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고 문장(文章)과 서예(書藝)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한편 득종(得宗)의 아들 태필(台弼), 태정(台鼎), 태보(台輔), 태익(台翼) 4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으며, 조선개국공신(朝鮮開國功臣) 여(呂)는 나라에 공(功)을 세워 고성부원군(高城府院君)에 봉해졌고, 화전군(花田君) 인비(仁庇)의 8세손(世孫)이며 사신(思信)의 아들 형산(荊山)은 연산조(燕山朝)에 해주 목사(海州牧使), 와 병마절도사를 거쳐 중종반정 후 형조, 호조,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했으며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국난(國亂)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 가문(家門)의 의맥(義脈)을 살려 충렬(忠烈)로 전쟁에 공을 세운 충렬공(忠烈公) 경명(敬命)은 제주 고씨(濟州高氏)가 자랑하는 인물(人物)이다. 

     중종(中宗) 때 남화풍(南畵風 : 당나라 왕유를 비조로 하는 문인 화파의 화풍)으로 호랑이 그림을 잘 그린 하천(霞川) 운(雲)의 손자(孫子)인 경명(敬命)은 부친(父親) 맹영(孟英)이 명종조(明宗朝)에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가 이 양(李 樑)의 일파로 몰려 유배당하는 불운을 맞고 담양(潭陽)에 옮겨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고 병든 몸으로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나라 운수가 중도에 비색(丕塞)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개떼 덤비듯 한다.”로 시작되는 거의(擧義)의 격문(檄文)을 팔도(八道)에 돌려 구국(救國)의 염원으로 일어난 의병(義兵)을 이끌고 왜병(倭兵)과 싸우다 금산(錦山)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도망가자는 참모의 말을 뿌리치고 차남 인후(因厚)와 함께 의열(義烈)로 죽음을 맞이했다.

     시(詩)와 글씨, 그림에도 뛰어나 <호남파 5대시인(湖南派五代詩人)>으로 손꼽혔던 그의 맏아들 종후(從厚)도 복수군(復讐軍)을 기병(起兵)하여“불행한 때를 만나 집안의 화변이 망극하다. 
     불초고(不肖孤)는 초토(草土)에 앓고 누워 아직까지 이 왜적들과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아있는 것이 참을 수가 없다.(중략)”라는 통문을 돌리면서 여러 갈래로 흐트러진 의병(義兵)을 모아 영남(嶺南)으로 달려가 진주성(晋州城)을 지켰으나 성(城)이 왜병에게 함락당할 때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장사(三壯士)>라 일컬었다. 
     경명(敬命)의 두딸 노씨(盧氏) 부인과 안씨(安氏)부인도 정유재란 때 왜적을 꾸짖으며 칼을 안고 엎드려 순절하였으니 이들 일가(一家)의 절의(節義)는 높이 추앙되었다.
     선조(宣祖)는 경명(敬命) 일가(一家)의 죽음을 슬퍼하며 광주(光州)에 사당(祠堂)을 짓게하여 포충사(褒忠祠)로 사액(賜額)하고 경명(敬命)에게는 충렬공(忠烈公) 종후(從厚)에게는 효열공(孝烈公), 인후(因厚)에게는 의열공(義烈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 외 효륜(孝倫)의 아들로 최경희(崔慶會)의 부장(副將)이 되어 장수(長水), 무주(茂朱), 금산(錦山) 등지에서 왜병(倭兵)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晋州城)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고, 박 진(朴 晋), 황 진(黃 晋), 원 호(元 豪)와 더불어 임진왜란의 4대명장(四大名將)으로 손꼽히는 언백(彦伯)은 1604년(선조 37) 선무2등공신(宣武二等功臣)으로 제흥군(濟興君)에 봉해졌으나 광해군(光海君)에 의해 임해군(臨海君 : 선조의 첫째 서자)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이렇게 충효(忠孝)의 가통(家統)을 이어온 제주 고씨(濟州 高氏)는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뿌리깊은 의열사상(義烈思想)의 본질을 밝혀주었으며, 국난의 갈림길에서 서성거리다가 비겁하게 살다간 우둔한 자(者)들의 지표(指標)가 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씨(高氏)는 남한(南韓)에 총 91,384가구, 384,0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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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안 계씨(遂安 桂氏)

    수안 계씨(遂安 桂氏)

      수안(遂安)은 황해도(黃海道)에 위치한 지명으로 한사군(漢四郡)을 거쳐 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에 장색현(璋塞縣)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 때 와서 유암군(楢巖郡)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고려초(高麗初)에 수안현(遂安縣)이 되었다가 고려(高麗) 현종(제 8대 왕, 재위기간 : 1009~1031) 때 곡주(谷州 : 곡산)에 속하였으며, 서기 1310년(충선왕 2) 수주(遂州)로 승격되었으나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된 후에 다시 수안(遂安)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수안계씨계축보(遂安桂氏癸丑譜)>에 의하면 우리 나라 계씨(桂氏)의 연원(淵源)을 중국(中國) 천수(川水 : 감숙성 남쪽 위하 유역에 있는 지명) 출신인 계석손(桂碩遜)에 두고 있다. 
     그는 명(明)나라에서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고려말(高麗末)에 동래(東來)하여 나라에 공(功)을 세워 수안백(遂安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석손(碩遜)을 시조(始祖)로 학고 관향(貫鄕)을 수안(遂安)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선천장파(宣川長派), 군현파( 賢派), 태산파(台山派) 등 22파로 분파(分派)되었고, 평안도(平安道) 선천(宣川)과  황해도(黃海道) 곡산(谷山)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관서지방(關西地方)의 명문(名門)으로 기틀을 다져왔다.

     특히 수안 계씨(遂安桂氏)는 시조(始祖)  시랑공(侍郞公)의 아들 원우(元祐), 원조(元祚), 원제(元 ), 원겹(元 ), 4형제 대(代)에서 크게 번성하여, 맏아들 원우(元祐)가 합문지후(閤門祗候 : 조회의 의례를 맡아보던 관청의 벼슬)을 지냈고, 그의 아들 문식(文植)은 우대언(右代言)을 역임하며 왕명(王命)으로 궁중의 출납을 맡았다. 
     한편 원조(元祚)의 세째 아들 양춘(陽春)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첨사(僉使)를 지낸 후 강화(江華)로 들어가 강화파(江華派)의 파조(派祖)가 되었으며, 원제(元 )의 후손에서는 강동파(江東派)를 비롯한 영유(永柔), 증산(甑山), 용강(龍岡) 등 7파(派)로 분파(分派) 되었다. 
     그러나 원겹(元 )의 후손들은 평양지방(平壤地方)에 산거(散居)하며 세계(世系)를 이었으나 보첩수단(譜牒收單) 과정에서 선계(先系)를 실전(失傳)하여 12세(世)를 알 수 없다. 

     가문(家門)을 대표(代表)하는 인물(人物)로는 정원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지낸 빈(斌)과 조방장(助防將)  반(斑)의 형제가 유명했으며, 준(遵)은 문과(文科)에 올라 삼화 현령(縣令)을 지내면서 청렴(淸廉)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한편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김응하(金應河) 장군(將軍)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많은 적을 죽이고 힘이 세어 북관장사(北關壯士)로 불리웠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천상(天祥), 익상(益祥) 두 아들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금도(金島)에 토성(土城)을 쌓고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지문(之文)과 적에게 잡혀가 갖은 고문에도 굽히지 않아 영조(英祖) 때 정문(旌門)이 내려진 천상(天祥)은 충렬(忠烈)로써 가문을 빛냈다.
     조선중기(朝鮮中期)의 학자(學者)로 유명한 태형(泰衡)은 노천(魯川)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후세 교육에 진력하여 선천군 대산(宣川郡臺山)의 목동서원(睦洞書院)에 주자(朱子), 율곡(栗谷)과 함께 동향(同享)되고 있으며, 1768년(영조 44) 문과(文科)에 급제한 덕신(德新)은 예조좌랑(禮曹左郞)을 역임하여 찰방(察訪)을 지낸 덕해(德海)와 함께 계씨가문(桂氏家門)은 예조좌랑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여 계씨(桂氏)는 남한(南韓)에 총 1,501가구, 5,9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32
  • 해주,태인 경씨(海州.泰仁 景氏)
     태인(泰仁)은 전라북도(全羅北道) 정읍군(井邑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의 태산(泰山 : 대산 또는 대시산이라고도 함)과 고려(高麗)의 인의(仁義)를 합한 명칭(名稱)이다.
      우리나라 경씨(景氏)는 중국(中國) 진양(晋陽 : 태원을 달리 일컫는 말)의 초(楚)나라 공족(公族 : 왕공의 동족, 왕족)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으며, 은(殷)나라 현인(賢人) 기자(箕子)를 호종(扈從)하여 동래(東來)해 온 경여송(景汝松)이 평양(平壤)에 정착(定着) 함으로써 문호(門戶)가 열렸다고 한다. 
     경씨(景氏)의 본관(本貫)은 태인(泰仁)과 해주(海州)를 비롯하여 충주(忠州), 경주(慶州), 밀양(密陽), 장연(長淵), 치등(置等 : 전북 순창지방), 능향(綾鄕 : 전북 태인지방), 복흥(福興 : 전북 장수지방)등 10여 개의 관향(貫鄕)이 있는 것으로 전(傳)하나 태인(泰仁)과 해주(海州)를 제외한 본관(本貫)은 미상(未詳)이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조(高麗朝)에서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 왕명의 출납, 숙위, 군기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종2품 벼슬)를 지내고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라  태산군(泰山郡)에 봉해진 경 차(景 磋)를 시조(始祖)로 하고, 사공(司空)을 역임한 상조(祥祖 : 예정의 맏아들)를 태인파(泰仁派)로,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상록(祥祿 : 예정의 차남)을 해주파(海州派)로 하여 가계(家系)를 이어오면서 고려말(高麗末)과 조선전기(朝鮮前期)에 걸쳐 무용(武勇)을 떨침으로써 가문(家門)의 성세(盛勢)를 이루었다. 
     특히 제조(提調 : 각 사, 또는 청의 관제상의 우두머리가 아닌 사람에게 그 관청의 일을 다스리게 하던 동 1, 2품의 관원)를 지낸 훤(喧)의 아들 세정(世貞)은 활을 잘 쏘아 명성을 날렸고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와 경기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면서 나라에 공훈(功勳)을 세워 시산군(詩山君)에 봉해졌으므로 아들 일창(日昌 : 수문전 태학사를 지냄)과 함꼐 이름을 떨쳤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 희(曦)는 벼슬이 태학사(太學士 : 조선 때 홍문관 대제학을 달리 일컫던 말)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한편 응순(應舜)은 통사(通事)로서 임진왜란 때 활동하다가 왜군(倭軍)에게 죽음을 당했고, 기(耆)는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堤學 : 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2품 벼슬)을 서쳐 시산군(詩山君)에 봉해졌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첨의평리(僉議評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한 인(寅)과 현감(縣監)을 지낸 극중(克中), 시행(時行 : 어사 청의 아들), 세성(世誠 : 거륜의 아들) 등이 유명했으며, 흔(昕)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여 판관(判官)을 지낸 덕윤(德潤)과 함께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씨(景氏)는 남한(南韓)에 총 885가구, 3,6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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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경씨(淸州 慶氏)

    청주 경씨(淸州 慶氏)

      청주(淸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앙에 위치한 도청 소재지로써 원래 마한(馬韓)의 영토였으며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상당현(上黨縣) 또는 낭비성(娘臂城), 낭자곡(娘子谷) 등으로 불리웠다. 
      685년(신라 신문왕 5)에는 서원소경(西原少京)을 두었는데 경덕왕(景德王 : 제35대 왕, 재위기간 : 742 ~ 765) 때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고, 그후 940년(태조 23)에 청주(淸州)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고려(高麗) 중기(中期) 때부터 청주지방(淸州地方)에 뿌리를 내려 경씨(慶氏)는 청주(淸州)를 비롯하여 청풍(淸風), 평택(平澤), 남원(南原), 부안(扶安), 보성(寶城), 장수(長水), 경주(慶州), 안동(安東), 상주(尙州), 하동(河東), 경산(慶山), 정주(定州), 경성(慶城) 등 14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청주 경씨(淸州慶氏)에서 분적(分籍)된 것으로 전해진다. 
     청주 경씨의 시조(始祖) 경 진(慶 珍)은 고려 명종(明宗 : 제 19대 왕, 재위기간 : 1170 ~ 1197) 때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원수(元帥) 윤인첨(尹麟瞻)의 막하에서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가 되어 조위총(趙位寵)의 난(亂)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功)을 세우고,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 서무를 총할하고 간쟁을 맡아보던 중서문하성의 종 2품 벼슬)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다. 
     그의 아들 대승(大升)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은 불법으로 모아진 것이라 하여 모두 군부(軍部)에 바치고 청렴하게 살았으며,당시 무신(武臣) 집권자들이 날로 횡포해지자 무인(武人)들의 불법한 행동에 분개하여 정중부(鄭仲夫), 송유인(宋有仁) 등의 무단정치를 꺾어 왕(王)의 두터운 은총(恩寵)을 받았다. 
      특히 그는 1178년(명종 8) 당시 공(功)을 믿고 월권을 자행한 허 승(許 升), 김광립(金光立)의 방자함을 탓하여 그들의 목을 베어 죽임으로써 사사로움을 탐한 것이 아님을 나타내어 명망(名望)이 높았으나, 어느 날 밤에 정중부(鄭仲夫)가 칼을 잡고 크게 꾸짖는 꿈을 꾸고 병을 얻어 아깝게도 30세에 세상과 등졌다. 
     고려 고종대(高宗代)에 와서는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 청주(淸州)에 세거(世居)한 번(蕃 : 일세조)의 증손 복흥(復興)이 선조(先祖)의 의(義)로운 혈통을 이어, 공민왕(恭敏王) 때 원(元)나라 기황후(奇皇后) 족친(族親)임을 빙자하여 세도(勢道)를 남용하던 기 철(寄 轍) 일당을 퇴살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랐다. 
      이어 1363년(공민왕 12) 명장(名將) 최 영(崔 榮) 등과 함께 덕흥군(德興君 : 고려 충선왕의 세째 아들)을 받들고 왕조(王朝)에 반기를 든 최 유(崔 濡)를 물리쳐 문하부(門下府)의 으뜸 벼슬인 좌시중(左侍中)에 올라 다시 신 돈(辛 旽)의 세도를 제거하려다가 발각되어 흥주(興州)로 유배되기도 했으나 진충동덕협보공신(盡忠同德協輔功臣)으로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번(蕃)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청주(淸州)로 삼게 되었다. 
     특히 청주 경씨는 부패한 세도(勢道)에 용기 있는 저항으로 무맥(武脈)을 이어오면서 고려중기에서부터 조선전기에까지 가문(家門)의 성세(盛勢)를 보여왔다.
     복흥(復興)의 아들 3형제중 맏아들 보(補)는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 1388년 랴오뚱정벌에 나섰던 고려의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한 사건)에 참가하여 조선개국(朝鮮開國)에 공을 세우고, 태종(太宗) 때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에  올라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둘째 진(臻)은 정 3품 관계인 정의대부(正議大夫)에 올라 예의 판서(禮議判書)를 역임하였고, 막내 의(儀)는 서북면 병마도절제사(西北面兵馬都節制使)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가문(家門)의 중추(中樞)를 이루었다. 
     그밖에 유선(由善)의 세째 아들 준(俊)이 성종조(成宗朝)에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거쳐 판결사(判決事)와 좌우부승지(左右副承旨)를 역임했고, 
     갑자사화(甲子士禍 : 1504년에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 때 풀려난 세창(世昌)은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호조 참판(戶曹參判) 등을 역임하여 성리학자(性理學者)인 아우 세인(世仁)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 國)의 문인으로 인종 때 집의가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한 혼(渾)은 지평 세청의 아들로 명종조에 직제학·대사간을 거쳐 부제학과 참의를 지내고, 장례원 판결사에 올라 시성의 아들 섬(暹)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섬(暹)은 진주사(陳奏使 : 중국에 주문을 갖고 가는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를 다녀와서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지내고, 교리(校理)로서 통신사(通信使) 여우길(呂祐吉)의 부사(副使)가 되어 일본(日本)에 건너가 임진왜란 후 단절된 국교(國交)를 다시 열게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의 포로 1340명을 데리고 돌아와 외교적인 공적을 쌓았다.
     그외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진(進)과 임실 현감(任實縣監) 종지(宗智), 용천 부사(龍川府使) 형, 군자감 주부 지연, 의금부사 순수 등이 뛰어났고, 양성 현감(陽城縣監) 이는 관찰사(觀察使)와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한 취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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