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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간 견씨(黃磵 甄氏)
    황간(黃磵)은 충청북도(忠淸北道) 최남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소라현(召羅縣)이라 불리우다가 경덕왕(景德王 : 제35대 왕,742~765) 때 와서 황간(黃磵)으로 고쳐 영동군(永同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견씨(甄氏)는 중국(中國) 중산(中山 : 광동성 남부의 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한(漢)나라 때 사람인 견풍(甄豊)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견씨(甄氏)는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을 시조(始祖)로 하는 황간견씨(黃磵甄氏)와 아자개(阿慈介)를 시조로하는 상주 견씨(尙州甄氏)가 있으며, 그외에도 남양(南陽), 청양(靑陽), 전주(全州) 등 9본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견훤이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본성(本姓)이 
    이씨(李氏)이며 아자개(阿慈介)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동일혈족(同一血族)이 된다. 
     견훤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뜰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밥을 가져다 주느라고 아이를 숲 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고 하며, 고기(古記)에는 그의 출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 광주(光州) 북촌(北村)에 한 부자(富者)가 살았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자태가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일 밤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저의 침실을 찾아옵니다.”라고 하니 아버지가 딸에게 이르기를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하여 딸은 그 말을 따랐다.
     날이 밝자 실을 따라 찾아가 보니 북쪽 담장 밑의 큰 지렁이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그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甄萱)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오늘날 견씨(甄氏)는 보첩(譜牒)이 전하지 않아 계대(系代)를 상고(詳考)할 수 없고,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 전국에 90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60년 인구조사 때는 446명,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는 남한에 235가구, 990명이 세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20
  • 천녕 견씨(川寧 堅氏)





     천녕 견씨(川寧 堅氏)

     천녕(川寧)은 경기도(京畿道) 여주군(驪州郡)에 속해있던 옛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술천현(述川縣) 또는 성지매(省知買)인데 통일(統一)신라(新羅) 때 기천군(沂川郡)으로 고쳤다가 고려(高麗)초(初)에 천녕현(川寧縣)으로 개칭하여 광주(廣州)에 속하였다. 
     그후 조선(朝鮮) 예종(睿宗 : 제 8대 왕, 재위기간 : 1468 ~ 1469) 때 와서 여주(驪州)로 병합(倂合)하여 그 지역을 직촌(直村)이라 하였다.

     견씨(堅氏)의 본관(本貫)은 천녕(川寧)을 비롯하여 사량(沙梁 : 경기도 수원지방), 김포(金浦), 충주(忠州) 등이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으며,
     모든 견씨(堅氏)의 연원(淵源)은 조선개국공신(朝鮮開國功臣) 견 권(堅 權)에 두고 있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서 두각을 나타낸 견 권(堅 權)은 서기 918 년(태조원년) 태조(太祖 : 왕 건)가 왕위(王位)에 오르는 데 공(功)을 세워 염 상(廉 湘), 김 낙(金 樂) 등과 함께 개국이등공신(開國二等功臣)에 책록되었고, 921년(태조 4) 달고적(達姑狄 ; 말갈 부족의 하나) 170여 명이 함경남도 등주(登州)를 거쳐 신라(新羅)의 북변을 침범하려 할 때 이를 쳐서 크게 패배시켰다. 
     또한 936년(태조 19) 태조(太祖)가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후백제(後百濟)의 신 검(神 劒)을 칠 때 대상(大相 : 고려초 문무관계의 하나)으로 견 훤(甄 萱) 등과 함께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2만을 인솔하여 좌익(左翼)으로 참전, 후백제(後百濟)를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功)을 세웠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견 권(堅 權)을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천녕(川寧)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무신(武臣)들을 배출시켰다.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人物)로는 영군장군(領軍將軍 : 군대를 통령하는 정4품 무관 벼슬)을 지낸 금(金)과 장군(將軍) 일(一)이 대표적이며, 태조 원년에 창부경(倉部卿 : 전곡을 맡아보던 관청의 으뜸 벼슬)에 오른 수(守)와 사과(司果) 성귀(成貴)는 진사(進士) 희복(希福)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견씨(堅氏)는 남한(南韓)에 총 99가구, 4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73
  • 여주 개씨(驪州 介氏)





     여주 개씨(驪州 介氏)

     여주(驪州)는 경기도(京畿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의 골내근현(骨乃斤縣)이었는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 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 ~ 765)이 황효현(黃驍縣)으로 개칭하였고, 고려(高麗)초(初)에 황려현(黃驪縣) 또는 황리(黃利)로 불리우다가 1257년(고종 44)에 영의(永義)라 하였다. 
     그후 충렬왕(忠烈王) 때 와서는 경순왕후 김씨(敬順王后金氏)의 내향(內鄕)이라고 하여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되었고, 1469년(예종 원년)에 여주(驪州)로 개명(改名)하여 목(牧)으로 승격되었다.
     개씨(介氏)는 중국(中國) 태평(太平 : 지금의 산서성 분성현지방)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周 : 무왕이 은을 멸하고 세운 나라)나라 양왕(襄王) 때 진(晋 : 산서성의 약칭) 땅의 사람인 개자추(介子推)의 후손으로 전(傳)해진다. 
     우리나라의 개씨(介氏)는 1930년 국세조사 당시 함북(咸北) 종성군(鍾城郡) 행영면(行營面) 행영동(行營洞)에 개영순(介永順), 개관오(介官五), 개영준(介永俊) 3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그들의 9대조(代祖)가 여주(驪州)에 이거(移居)한 것으로 기록에 전한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57
  • 강씨(剛氏)





     강씨(剛氏)

      강씨(剛氏)는 중국(中國) 청(淸)나라 덕종(德宗 : 제11대 황제, 재위기간 ; 1875 ~ 1908) 때 사람인 강의(剛毅)가 만주(滿洲) 출신으로 공부 상서(工部尙書)와 군기대신(軍機大臣)을 지낸것으로 문헌(文獻)에 나타나 있으며 우리나라에 동래 한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미상(未詳)이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 충북(忠北) 괴산군(槐山郡) 장연면(長延面) 방곡리(方谷里)에 강응룡(剛應龍) 1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30
  • 진주 강씨(晋州 彊氏)





     진주 강씨(晋州 彊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이었는데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리웠으며, 서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 
     그후 청주(菁州)로 개칭하였다가 고려(高麗)초(初)에 강주(康州)로 환원하고, 995년(성종 14)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처음 불리게 된 뒤 조선(朝鮮)조(朝)에 와서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강씨(彊氏)는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 : 중국 후한의 시조, 재위기간 ; 25 ~ 57) 때의 사람인 강 화(彊 華)의 후예로 전하며, 관향(貫鄕)이 진주(晋州) 단본(單本)으로 알려졌고 보첩(譜牒)이 전하지 않아 선계(先系)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 강씨(彊氏)는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 경남(慶南) 통영군(統營郡) 우동리(牛洞里)에 1가구(家口)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427가구, 1,826명으로 전체 274개 성씨(姓氏) 중 174위(位)이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44
  • 충주 강씨(忠州 强氏)





     충주 강씨(忠州 强氏)

     충주(忠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원군(中原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 난장성, 탁장성(託長城)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진흥왕(眞興王 : 제 24대 왕, 재위기간 ; 540~576)이 소경(小京)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때 중원경(中原京)이라 칭하였다.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에 충주(忠州)로 개칭하였으나 995년(성종 14) 창화군(昌化軍)이라 하여 중원도(中原道)라 칭했으며, 1254년(고종 41) 국원경(國原京), 1550년(명종 5) 유신현(維新縣) 등으로 불렸고, 선조(宣祖) 즉위년에 다시 충주(忠州)로 환원하였다. 
     강씨(强氏)는 중국(中國) 천수(天水 : 감숙성 남동부 위수에 면한 상업도시)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진(晋)나라 때 사람인 강 일(强  )이 시조(始祖)가 되며, 
     우리나라 강씨(强氏)는 북송(北宋) 휘종(徽宗) 때의 전당(錢塘) 출신인 강준명(强浚明)의 후손으로 전하나 우리나라에는 언제 동래(東來)하였는지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상세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강씨(强氏)의 본관(本貫)은 충주(忠州) 외에도 괴산(槐山)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충주 강씨(忠州强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오늘날에 와서 충주 강씨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京畿道)와 충청도(忠淸道) 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24가구, 901명으로 전체 성씨(姓氏) 중 163위(位)이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35
  • 신천 강씨(信川 康氏)

    신천(信川)은 황해도(黃海道) 중앙부(中央部)에 위치하며, 단군신화(檀君神話)에 담긴 아사달산(阿斯達山) 당장경(唐藏京)이 있었던 곳으로 한사군(漢四郡)을 거쳐 고구려(高句麗) 시대에는 승산군(升山郡)이었다. 
     그후 고려(高麗) 초(初)에는 신주(信州)로 불리웠고 1413년(태종 13)에 지금의 신천(信川)으로 개칭되었다.
     우리나라 강씨(康氏)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경조(섬서성 남부 장안현 부근 일대를 차지하는 행정구역) 출신인 주(周)나라 왕족(王族) 강 숙(康 叔)이며 그의 둘째 아들 강 후(康 侯)의 67세손 성골장군(聖骨將軍) 강호경(康虎景)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러나 강씨(康氏)의 실질적인 시조(始祖)는 호경(虎景)의 14세 손으로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신성부원군에 봉해진 충렬공(忠烈公) 강지연(康之淵)이다. 
     강씨(康氏)의 본관(本貫)은 신천(信川), 곡산(谷山), 재령(載寧)을 비롯하여 충원(忠原), 진주(晋州) 등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전하나 현존(現存)하는 강씨(康氏)는 신천(信川)과 곡산(谷山), 재령(載寧) 3본(本)이 대종(大宗)을 이룬다. 
     <신천강씨대동보(信川康氏大同譜)>에 의하면 중시조(中始朝) 지연(之淵)은 고려 명종(明宗 : 고려 제19대왕, 재위기간 ; 1170 ~ 1197)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고군의 개경(開京) 침략으로 이듬해 강화도(江華島)로 천도(도읍을 옮김) 할 때 왕(王)을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라 신성(信城 : 신천의 옛 이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신천(信川)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지연(之淵)의 6세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을 파조로 하는곡산파(谷山派)와 13세손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 득룡(得龍)을 파조로 하는 재령파(載寧派)로 크게 갈리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낸 영암공(瀛巖公) 영(永)을 제주 강씨(濟州康氏)의 입도시조(入島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각 파별(派別)로 대표적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중시조(中始朝) 지연(之淵)의 6세손 윤성(允成)이 고려 충혜왕(忠惠王 : 고려 제 28대왕, 재위기간 : 1330 ~ 1332, 복위 1339 ~ 1344)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이부시랑(吏部侍郞)등을 거쳐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 문하부의 정 2품 벼슬)에 올랐으며, 그의 딸이 이성계(李成桂)의 비(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방번, 방석과 경순공주를 낳았음)가 되어 상산(象山 : 곡산의 옛이름)부원군(府院君)에봉해짐으로 후손들이 곡산(谷山)으로 관향(貫鄕)을 삼았다. 

     한편 재령파(재載寧派)의 파조(派朝)인 안정공(安靖公) 득룡(得龍)은 중시조 지연의 8세손으로 고려 공민왕(恭愍王 : 고려 제 31대왕, 재위기간 ; 1351 ~ 1374) 때 삼사우사(三司右使 : 국가 전곡의 출납과 회계를 맡아보던 정 2품 벼슬)를 지내다가 
      1392년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관악산(冠岳山) 
    의상대(義湘臺)에 올라가 송경(松京 : 개성)을 향해 통곡하니 이 때부터 이곳은 연주대(戀主臺)라 불리웠고, 태조(太祖)가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그를  안릉(安陵 : 재령의 옛 이름) 부원군(府院君)에 봉하고 안정공(安靖公)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下賜)했다. 

     또한 제주 입도시조(入島始祖)인 영암공(瀛巖公) 영(永)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사촌 오라버니로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냈으며, 왕자의 난(조선 개국 초 태조의 아들 방원과 방간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으킨 두 차례의 난)이 일어나자 피신하여 제주(濟州)에서 일생을 마침으로 제주 강씨(濟州康氏)의 입도시조(入島始祖)가 되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고려의 무신(武臣)인 조(兆)가 도통사(都統使 : 각 도의 군사를 통솔하는 무관직 벼슬)를 지냈으며, 증(拯)은 음보(蔭補)로 벼슬에 등용되어 예종(睿宗 : 고려 제 16대왕, 재위기간 ; 1105 ~ 1122)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후 강령 강씨(康翎康氏)로 분적(分籍)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증손(曾孫) 순(純)이 1453년(단종 1) 회령 부사(會寧府使)를 거쳐 판의주목사(判義州牧使)를 지낸 뒤 1457년(세조 2)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明) 나라에 다녀왔으며, 1467년(세조 12)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홍원(洪原), 북청(北靑), 만령(蔓嶺) 등지에서 공(功)을 세워 난이 평정되자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으로 신천부원군(信川府院君)에 봉해졌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씨(康氏)는 남한(南韓)에 총 16,763가구, 69,77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66
  • 진주·진양 강씨(晋州·晋陽 姜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영남(嶺南)의 고도(古都)로서 백제(百濟) 때에는 거열성(居烈城)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제30대 임금,재위기간;661~681)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고 하였다. 
     그후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 : 통일신라 때 전국의 행정구역을 9주와 5소경으로 구획한 것을 말함)의 실시로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혜공왕(惠恭王:신라 제36대 임금,재위기간;765~780) 때 청주(淸州)로 개칭했으며 고려초에 강주로 환원하였다. 
     서기 995년(고려 성종 14)에 전국(全國)이 10도(道)로 개편되면서 진주(晋州)로 되었으며,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한때 진양(晋陽)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진주 강씨(晋州姜氏)의 시조(始祖)는 고구려(高句麗)의 무장(武將)인 강이식(姜以式) 장군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수(隋 : 중국의 통일왕조, 581 ~ 618) 나라 문제(文帝 : 초대 황제, 재위기간; 541 ∼ 604)가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인 진(陳)을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통일한 후 국경에 상접한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가 실패하자, 양제(陽帝 : 문제의 둘째 아들 2대 황제, 재위기간 ; 604 ~ 618)는 부황(父皇)의 유한(有限)을 풀기 위해 침략의  야욕으로 사신(使臣)을 통하여 
     <수(隋)나라에 지성(至誠)과 충절을 소홀히 한다. 고구려 왕이 친조(親朝)의 예를 하지 않으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치겠다>는 내용을 담은 국서(國書)를 보내왔다. 
      이때 왕이 신하를 모아놓고 회답을 논의하였는데,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있던 강이식(姜以式)장군이“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써 답해야 합니다" 하고 무력대결을 주장하자 왕은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그는 서기 612년(고구려 영양왕 23)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결심하고 113만 대군을 이끌고 재침해 올 때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함께 출정하여 요동성(遼東城 : 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옛 고구려의 요충지)과 살수(薩水 : 평안북도에서 황해로 흐르는 청천강의 옛 이름) 등지에서 수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러 지략과 용맹을 떨쳤다. 
     그후 그의 6세손인 택인(擇仁)이 서기 839년(신라 문성왕 원년) 과거에 급제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 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지낸 후 진안후(晋安侯)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 진(縉)은 헌강왕(憲康王 : 신라 제49대 왕, 재위기간 ; 875 ~ 886) 때 과거에 장원하여 태중대부(太中大夫)와 판내의령(判內議令)을 역임한 후 진양후(晋陽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장군 강이식(姜以式)을 시조(始祖)로 삼고 본관(本貫)을 진주(晋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박사공파(博士公派 : 파조 게용) 소감공파(少監公派 : 파조 위용), 관서공파(關西公派 : 파조 시중 원용의 손자 원로), 은열공파(殷烈公派 : 파조 민첨), 인헌공파(仁憲公派 :  파조 해동의 명장 강감찬) 등 크게 다섯 파로 분파(分派)되었다. 

      각 파별(派別)로 대표적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박사공파(博士公派)의 파조(派祖)인 계용(啓庸)이 고려(高麗) 때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어 1274년(원종 15) 통신사(通信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日本)에 다녀왔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감찰어사(監察御史 : 감찰사의 종6품 벼슬) 사첨(師瞻)의 현손(玄孫) 시(蓍)는 공민왕(恭愍王) 때 성균시(成均試)에 올라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했다. 
     한편 박사공파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인 회백(淮伯)과 회중(淮仲) 형제는 찬성사 시(蓍)의 아들로서 맏아들 회백이 고려말에 대사헌(大司憲 : 사헌부의 정2품 으뜸 벼슬)을 역임한 후 조선(朝鮮)이 개국하자 동북면 도순문사를 역임했다. 
     그는 특히 문장(文章)에 능했고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저서(著書)로 <통정집(通亭集)>을 남겼다. 
     서기 1382년(우왕 8) 문과(文科)에 급제한 회중(淮仲)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거쳐 조선이 개국한 후 태조(太祖)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회백(淮伯)은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네째 석덕(碩德)이 세종(世宗) 때의 영의정(領議政) 심 온(沈 溫 : 세종의 장인)의 사위가 되었고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지냈으며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다. 
     한편 1441년(세종 23) 25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희안(希顔)은 돈령부 주부(敦寧府主簿)와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등을 지내고 1455년(단종 3)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458년(세조 3) 호조 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특히 그는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세종(世宗)이 지은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字)에 대한 해석을 달았고 금인(金印) 소신지보(昭信之寶)와 세조(世祖) 때 을해자(乙亥字)의 글씨를 썼다. 
     그의 동생 희맹은 1447년(세종 2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1463년(세조 8) 진헌 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성종(成宗) 때는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문장(文章)이 당대에 으뜸이라 하여 성종(成宗)이 서거정(徐居正)을 시켜 그의 유고(遺稿)를 편집토록 하였다. 
     그의 아들 6형제 중 맏아들 귀손(龜孫)은 음보로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가 되어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사재감정(司宰監正), 좌통례(左通禮) 등을 거쳐 1485년(성종 16)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갔다가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한 후 1497년(연산군 3)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으면서 김일손(金馹孫) 등을 가볍게 벌하도록 주장하였고, 1500년(연산군 6) 진원군(晋原君)에 봉해졌다. 
    그후 좌찬성(左贊成)을 거쳐 1506년(중종 1) 56세로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한편 명종(明宗)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사상(士尙)은 사인(舍人)을 지낸 온(溫)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로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했으며 선조(宣祖) 때는 실록청 동지관사(實錄廳同知館事)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우참찬(右參贊),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1577년(선조 10) 별시문과에 급제한 신(紳)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평정한 공(功)으로 평난3등공신(平難三等功臣)에 오르고 진흥군(晋興君)에 봉해졌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왜군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워 난이 끝나자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병조(兵曹)와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에 이르렀다. 
      소감공파(少監公派)에서는 파조(派祖) 위용(渭庸)의 아들로 검교(檢校)를 지낸 문로(文老)와 군기시사(軍器寺事) 충이 유명했으며, 상장군(上將軍) 희령(希齡)과 좌의정(左議政) 사덕(思德)이 뛰어났다. 
      그외 감찰(監察)을 역임한 중인(重仁), 뢰(賚), 순(洵) 등과 충순위(忠順衛) 육동( 東), 교위(校尉)를 지낸 휴( )가 이름을 날렸다. 
     시중공(侍中公) 원용(遠庸)의 손자(孫子) 원로(元老)를 파조(派祖)로 하는 관서공파(關西公派)에서는 8세손 국흥(國興)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으며,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된 행(行)의 아들 문회(文會)는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여 동생인 문우(文遇 : 장령을 역임)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문회(文會)의 손자(孫子) 언홍(彦弘)은 좌통례(左通禮)를, 별제(別提) 언굉(彦宏)의 아들 필문(弼文)은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하여 현감(縣監) 공운(公雲), 좌승지(左承旨) 칭( ), 감찰(監察) 응황(應 ), 수찬(修撰) 호민(好敏)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의 파조(派祖)인 민첨(民瞻)은 고려조(高麗朝)에서 무훈을 세운 명장(名將)으로 1018 년(고려 현종 9) 거란(契丹)의10만 대군이 침입해오자 강감찬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고 개경(開京)의 싸움에서도 크게 이김으로써 <해동(海東)의 명장(名將)>으로 일컬어졌다. 뒤에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으로 책록되었으며, 지중추사(知中樞事),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추증되었다. 
      은열공파 중에서도 특히 조선조(朝鮮朝)에서 명성을 떨친 후손으로는 백년(栢年 : 문정공)과 현, 세황(世晃)의 3대(三代) 를 들 수 있다. 
      1627년(인조 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백년(栢年)은 부교리(副校理)로 있을 때 강 빈(姜 嬪 : 소현세자빈 강씨)의 억울함을 상소했다가 한때 삭직되기도 했으나, 1646년(인조 24)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이듬해 전국 향교(鄕校) 재흥(再興)을 상소하였고 대사간(大司諫 : 사간원의 정3품 으뜸 벼슬)에 올라 다시 강 빈의 신원(伸寃 : 원통한 일을 풀어 버림)을 상소했다가 청풍군수(淸風郡守)로 좌천되었다.
      현종(顯宗)이 즉위한 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서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淸) 나라에 다녀왔으며,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숙종(肅宗) 때 좌참찬(左參贊 : 의정부의 정2품 문관 벼슬)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1690년(숙종 16)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아들 현(이조 참의를 거쳐 좌참찬, 대제학, 한성판윤 등을 역임) 손자 세황(世晃)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1772년(영조 48) 61세로 늦게 벼슬에 등용된 세황(世晃)은 1776년(영조 52)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으로 기로과(耆老科)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67세 때는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여 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서화(書畵)에 뛰어난 그가 1784년(정조 8)천추부사(千秋副使)로 북경(北京)에 갔을 때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청인들이 많았다 하며, 글씨는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 미 불(米  ) 등의 서체(書體)를 본받아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비롯한 모든 체가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고, 산수(山水), 사군자(四君子) 등에 뛰어나 <난죽도(蘭竹圖)>, <산수도(山水圖)>, <송죽모란도 (松竹牡丹圖)> 등을 남겼다. 
     한편 철종(哲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노( )는 세황(世晃)의 증손(曾孫)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권하자 위유사(慰諭使 : 지방에 천재나 지변이 있을 때 어명으로 백성을 위로하기 위하여 보내던 임시 벼슬)에 중용(重用)되어 병인양요(丙寅洋擾 :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로 피폐해진 강화도(江華島)를 다녀왔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1872년(고종 9)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대원군 탄핵상소를 올린 최익현(崔益鉉)의 처벌을 반대하다 우의정 한계원(韓啓源)과 함께 파직되었다가 1874년(고종 11) 다시 등용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인헌공파(仁憲公派)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오른 궁진(弓珍)의 아들 감찬(邯贊)이 당대에 이름난 명장(名將)으로 유명했다. 
     983년(고려 성종 2)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그는예부 시랑(禮部侍郞)을 거쳐 한림학사(翰林學士), 중추원사(中樞院使), 이부 상서(吏部尙書),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등을 지낸 후 1018 년(현종 9) 그 공(功)으로 검교태위(儉校太尉),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오르고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 3백호(食邑三百戶)를 하사(下賜)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謨安國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급제한 석기(碩期)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子)로 등용되었으나 문란한 정국과 이이첨(李爾瞻)의 폐모론(廢母論 :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이자 자신의 계모인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에 유폐한 일)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인조 반정(仁祖反正) 후에 다시 등용되어 예문관 박사(藝文館博士),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1640년(인조 18) 61세로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한편 1593년(선조 2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항(沆)은 우계(牛溪) 성 혼(成 渾)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여 성리학(性理學)의 원조(元祖)가 되었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남원(南原)에서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군량 보급에 진력하였다. 
     남원이 함락되자 고향인 영광(靈光)으로 돌아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日本)에 끌려가 일본의 학자(學者)들에게 유학(儒學)을 가르쳐 주는 한편 지리(地理)와 군사시설을 비롯한 군사정보를 고국에 전했다. 
     거란(契丹)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할 때 71세의 고령으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크게 격파하고 쫓겨가는 적을 구주(龜州)에서 소탕하여 개선(凱旋)할 때 영파역(迎波驛 : 의흥역)까지 마중나온 왕의 영접을 받았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석빈(碩賓)은 숙종(肅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진선군(晋善君)에 봉해졌으며, 1714년(숙종 40) 절일제(節日製 : 성균관 유생들에게 보이던 시험)에 장원한 박(樸)은 이듬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수찬(修撰)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까지 올랐으나 노론(老論)의 집권으로 벼슬을 내놓고 향리로 돌아갔다. 
     그 외 영조(英祖)의 탕평책(蕩平策 : 영조가 당쟁을 없애기 위해 쓴 정책)을 반대했던 필신(必愼)은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저서(著書)로 <모헌집(慕軒集)>을 남겼고 시인(詩人)으로 유명한 위(瑋)는 <한성순보(漢城旬報)>를 간행하고 김택영(金澤榮), 황 현(黃 玹)과 함께 한말의 3대 시인(詩人)으로 불리웠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씨(姜氏)는 남한(南韓)에 총 227,093가구, 958,16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599
  • 회산 감씨(檜山 甘氏)





     회산 감씨(檜山 甘氏)

      회산(檜山)은 지금의 경상남도(慶尙南道) 창원(昌原)의 별칭(別稱)으로,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6가야(伽倻) 중 금관가야(金官伽倻)에 속했었다. 
     그 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제35대 임금,재위기간;742~765) 때 의안군(義安郡)이라 하였으며,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제25대 임금, 재위기간;1275~ 1308) 때는 의창현(義昌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서기 1413년(조선 태종13)에 이웃 회원현(檜原縣)과 합하여 창원부(昌原府)가 되었다.
     감씨(甘氏)는 본래 중국(中國) 발해(渤海) 주왕(周王)의 셋째 아들 숙대(叔帶)가 감후(甘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았으므로, 그 땅 이름을 따서 감씨(甘氏)의 성(姓)을 삼았다고 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감씨(甘氏)의 본관(本貫)은 회산(檜山), 합포(合浦), 거창(居昌), 창녕(昌寧), 충주(忠州), 부령(富寧) 등 6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상고(詳考)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으며 다만 우리나라 감씨(甘氏) 모두가 동원분파(同源分派)임에는 틀림이 없다.
     <회산감씨대동보(檜山甘氏大同譜)>에 시조(始祖) 감 규(甘 揆 : 자는 양원, 호는 연강)는 원(元)나라  성종조(成宗朝 : 서기 1295 ~ 1307)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1351년(충정왕 3) 공민왕(恭愍王)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 원나라 황족 위왕의 딸)를 배행(陪行)하고 고려(高麗)에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 내사문하성의 정2품 벼슬)에 올랐으며, 후에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64
  • 남양 갈씨(南陽 葛氏)





     남양 갈씨(南陽 葛氏)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과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시대의 당성군(唐城郡)이었다. 
     그 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되었으며 서기 1018 년(고려 현종9) 수주(水州 : 수원)와 인주(仁州 : 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년(충선왕 2) 남양부(南陽府)로 되었다. 
     남양 갈씨(南陽葛氏)는 본래 복성(複姓)인 제갈씨(諸葛氏)에서 갈라진 성씨(姓氏)이다.

     <남양제갈세보(南陽諸葛世譜)>에 의하면 제갈씨(諸葛氏)의 시조(始祖) 제갈 규(諸葛珪)는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제갈 량(諸葛亮 : 제갈공명)의 아버지로 전하며, 그의 20대손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興德王:제42대 왕, 재위기간;826~836) 때 귀화(歸化)한 것이 우리나라 제갈씨(諸葛氏)의 시초라고 한다. 
     그 후 고려(高麗) 고종(高宗 : 제 23대 왕, 재위기간 ; 1214 ~ 1259) 때에 이르러 제갈 홍(諸葛泓)과 제갈 형(諸葛瀅)의 두 형제가 복성(複姓)인 제갈씨(諸葛氏)를 한 자(字)씩 나누어 쓰기로 하여, 형인 홍(泓)은 제씨(諸氏)로, 아우 형(瀅)은 갈씨(葛氏)로 분종(分宗)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칠원제씨족보(漆原諸氏族譜)>에는 이들 홍(泓)과 형(瀅)의 형제가 고려 현종(顯宗) 때 사람인 제갈 한(諸葛漢)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갈씨(葛氏)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서원(西原 : 청주의 다른 이름)을 비롯하여 양성(陽城), 양주(楊州), 청풍(淸風), 청산(靑山), 죽장(竹長), 해남(海南), 비안(比安) 등 22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남양(南陽)을 제외한 관향(貫鄕)은 미상이다. 
     역사상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시조(始祖) 형(瀅)의 아들 현(俔)이 고려(高麗)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고, 손자(孫子) 은(隱)은 벼슬을 지내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서성백(西城伯)에 봉해졌다.
     그 외 고려 때 태수(太守)를 지낸 춘(椿)과 희(熙)의 부자(父子),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진 현(顯)이 유명했으며, 대구군(大丘君) 원( )은 부사(府使)를 역임한 지만(芝蔓), 효자(孝子)로 이름난 덕래(德來)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28
  • 가평 간씨(加平 簡氏)
     가평(加平)은 경기도 중동부에 위치한 고장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근평군(斤平郡)이었으나,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부근의 조종현(朝宗縣)과 합하여 가평(加平)으로 개칭하였으며 고려(高麗) 때는 강원도(江原道) 춘천(春川)에 속하였다.

     1507년(중종 2) 이 곳에 중종(中宗)의 태(胎)를 묻은 연유로 군(郡)으로 승격하였고, 1895년(고종 32) 다시 경기도로 이속되면서 한성부(漢城府)에 속하기도 하였다.  가평 간씨(加平簡氏)는 문헌(文獻)에 중국(中國) 범양(范陽) 간 백(簡 伯)의 후손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상계(上系)를 정확하게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어 연원(淵源)을 알 수 없다. 

     간씨(簡氏)의 본관(本貫)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 가평(加平)을 비롯하여 남양(南陽), 서산(瑞山), 경주(慶州), 인동(仁同) 등 9본(本)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가평(加平)을 제외한 관향(貫鄕)은 미상(未詳)이다. 

     <가평간씨세보(加平簡氏世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간 균(簡 筠)은 1164년(고려 의종 18)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역임하고, 1189년(명종 19) 벼슬에서 물러나 경기도 풍덕 백후동(豊德栢後洞)으로 낙향(落鄕)하여 시문(詩文)을 벗삼아 저서(著書)로 일생(一生)을 마쳤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손자(孫子)인 주(住)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민부 전서(民部典書)를 지내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가평군(加平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가평(加平)으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高麗) 때 군기감사(軍器監事)를 지낸 유(有)를 비롯하여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만호(萬戶)를 지낸 홍(弘:호는 금헌)과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통명(通明)이 유명했고,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세종(世宗) 때 통덕랑(通德郞)에 오른 사열(思悅), 공열(恭悅), 통정대부(通政大夫) 충국(忠國),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충기(忠起),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기린(奇麟) 등이 뛰어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68
  • 소주 가씨(蘇州 賈氏)

    소주 가씨(蘇州 賈氏)

     소주(蘇州)는 중국(中國) 강소성(江蘇省) 남동부 태호(太湖) 동안(東岸)에 위치한 고장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며, 일찍이 춘추전국 시대에 오(吳)나라의 국도(國都)로 발전하였고, 역대에 걸쳐 주변지역의 행정중심지로 알려진 곳이다.

     가씨(賈氏)는 소주(蘇州)를 단본으로 하며 중국(中國) 주(周)나라 문무(文武)의 후예(後裔)로서 명(明)나라 신종(神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 겸 계요안찰사를 지낸 가유약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서기 1593년(선조 26)에 신종(神宗)의 명으로 원병을 이끌고 이여송(李如松), 마 귀(麻 貴)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안주(安州) 등지에서 왜군과의 싸움에 공(功)을 세우고 돌아갔다. 

     그후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유격장군(遊擊將軍)인 아들 상(祥)과 병부 종사관(兵部從事官)인 손자(孫子) 침(琛)을 데리고 다시 조선(朝鮮)에 들어와, 소사(素沙 : 지금의 부천), 남원(南原) 등지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부산(釜山) 포구(浦口)의 싸움에서 용전(勇戰)하던 중 아들 상(祥)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손자 침(琛)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고 경남 울산 서생진 도독동(慶南  蔚山 西生鎭 都督洞) 양지 바른 곳에 무덤을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서 명(明)나라 원병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도독(覩督) 마 귀(麻 貴)가 침(琛)에게 함께 귀국할 것을 권유했으나,그는 “조부(祖父)와 부친(父親)의 묘를 두고 어찌 이 곳을 떠나겠느냐”하며 조선에 귀화하여 조상(祖上)의 무덤이 있는 울산(蔚山)에 자리잡아 안동 부사(安東府使) 권 순(權 純)의 딸과 혼인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1647년(인조 25) 침(琛)이 죽자 슬하의 아들 성(晟), 호(昊), 병(昺), 수(遂) 4형제는 충남(忠南) 서산(瑞山)으로 자리를 옮겨 우리나라 가씨(賈氏)의 터전을 이루었으며, 1851년(철종 2)에는 시조(始祖) 유약과 아들 상(祥), 손자 침(琛) <삼대(三代)의 충효(忠孝)>를 기리는 사당(祠堂)과 정문(旌門)이 서산(瑞山) 가씨(賈氏) 마을에 내려졌다. 

     그후 가씨는 서산(瑞山)을 중심으로 한 충남 일대에서 충효(忠孝)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가문(家門)이 크게 번성하였고,시조 유약의 14세손 행건(行健)이 헌종(憲宗) 때 충청도 안흥 양진(忠淸道安興梁鎭)의 수군 병마절제사(水軍兵馬節制使)를 지내며 천성이 어질어 <도덕군자(道德君子)>라는 칭송이 높았다. 
     그의 아들 일영(日永)도 철종(哲宗) 때 울진 현령(蔚珍縣令) 등을 지내며 벼슬이 높았고, 선정을 베풀어 그가 울진을 떠나올 때 군민들이 암벽을 갈아 그의 공적을 새겼다고 하는 <마애비(磨崖碑)>가 지금도 전한다. 일영(日永)의 아우인 중영(中永)은 철종(哲宗) 때 충량과(忠良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종(高宗)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14세손 익건(翊健)은 1866년(고종 3)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했을 때 의병을 일으켰다. 

     그외 한말(韓末)과 일제(日帝) 침략기에 선조(先祖)의 뜻을 이어 나라에 충성한 인물로는 의영(義永)과 병준(秉俊)의 부자(父子)가 유명했다. 
     후덕(後德)하고 자선심(慈善心)이 많기로 이름났던 이들 부자는 사재(私財)를 털어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등 사회사업에 공헌했으며, 호서(湖西) 일대의 한학자(漢學者)로 학명을 떨쳤던 형로(衡魯)는 항일투쟁에 헌신하여 일경(日警)으로부터 주목(注目)받는 대상이 되었다. 
    신, 구(新, 舊) 학문과 사학(史學)에 정통했던 병준(秉峻)은 서산에 농림중학교(農林中學校)를 설립하여 영재교육(英才敎育)을 통한 광복운동과 농사개량 및 산업발전에 이바지한 공이 지대하여 면민(面民)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으며, 시조의 18세손 재연(在衍)은 인천상고 재학시와 은행원 신분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섰다가 옥고로 순국했다. 

     민족계몽 중 일본 헌병의 목을 베려 했던 정로(晶魯:시조의 17세손)와 사재를 털어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재창(在昌)도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가문을 중흥시켰으며, 정로(廷魯)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 예산(禮山), 서산(瑞山), 공주(公州)의 군수(郡守)를 지내며 한국민주행정의 기틀을 마련하여 충절의 정통가문인 소주 가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소주 가씨(蘇州 賈氏)는 남한(南韓)에 총 1,783가구, 7,888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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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 혼례


      가. 맞 선

      맞선의 장점은 상대방의 여러 조건을 이상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한편, 연애는 극히 감정적인 면에 치우쳐 오류를 범하기가 쉽다. 그러나 비교적 상당 기간 동안의 연애는 상대방의 성격과 생활, 감정을 접할 수 있으므로 인간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된다 하겠다. 
     맞선의 장소는 흔히 신부 쪽이 지정하는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 에티켓이다. 가능하다면 식사시간, 야간, 현란한 조명 밑, 등은 피하는 것이 좋다.   맞선의 시간은 두 시간이내에서 마치는 것이 좋다.
     복장은 평소에 입는 옷을 깨끗이 손질하여 다려 입고 잘 다듬은 손톱, 먼지 없는 신발, 평범한 액세서리에 진하지 않은 화장 정도가 적당하다.
     적당한 화제는 인사, 소개와 의례적인 말이 있은 다음 동반인과 중매인이 분위기를 살려가면서자연스러운 일상 생활의 주변에서부터 화제를 찾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는 맞선 당사자 둘만의 기회를 마련하여 주어야 한다. 맞선 이후 양가와 본인들의 혼인 합의가 이루어지면 신랑측은 사성(四星, 사주)을 신부 집에 보내게 된다.
     
       ① 사성 이란 ?
        신랑의 사주(생년월일시)와 편지를 신부 집에 보내어 공식적인 청혼을 하는 것이며, 천    간(天干), 지지(地支)에 의하여 궁합, 택일 등을 하게 하기 위함 인데 이는 형식에 지나    지 않는다. 청혼, 허혼과정에서 약식으로 다 거친 과정이다.

       ② 사성과 봉투
        흔히 사성봉투에는 신랑의 사주외에도 다음과 같은 편지글(청혼서 혹은 강서)을 써넣어   보낸다. 사주를 받아 들이는 것은 약혼을 의미하며, 혼인을 거절하려면 사성을 받지 안    아야 한다.

       ③ 사성 편지글 
        이 내용을 한글로 쓰자면 이런 표현이 될 것이다. 엎드려 편지를 받자오니 매우 감사합   니다. 근간에 존체 만중하십니까. 저의 자식 혼사는 이미 허락하심을 받았사오니 저의    가문의 다행이며 경사이옵니다.가르치심에 따라 사성단자를 보내오니 혼인 일자를 회신    하여 주심이 어떠하오리까".

      나. 약혼  

      약혼은 앞으로 결혼하겠다는 약속이자 결혼의 전주곡이다. 약혼식 당일의 비용은 신부측에서 부담하는 전례가 있었지만 이것은 봉건적 사상에 의한 관습일 뿐 혼사는 양가의 경사이니 신랑측에서도 합당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약혼식장은 신부의 집을 주로 이용했으나 요즘에는 한적한 음식점을 많이 이용한다.

      다. 택일  

      결혼 날짜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부의 신체적 컨디션이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생리일이 예정시일보다 늦거나 빨라지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 점을 고려하여 생리가 끝난 날로 부터 일주일 이내에 식을 올리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연길(涓吉)이란
       사성을 받은 신부 집에서 결혼일자를 택일하여 신랑 집에 택일단자(날받이)를 보내는 의   식이다. 이 때에도 편지글(허혼서)과 함께 보낸다. 연길은 연길봉투에 넣는데 봉투와 편   지는 다음과 같이 쓴다. 위의 연길 편지글에서 장제(章製)란 신랑 옷의 칫수를 말하는데   신부 집에서 신랑의 옷을 만들어 주려고 할 때에 그 치수를 알려 달라는 뜻이다. 위의   내용을 한글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편지를 받자오니 감사한 마음 한량이 없습니다. 근간   에 존체만안 하십니까. 저의 여아 혼사는 이미 사성단자를 받자오니 저희 가문의 경사이   옵니다. 결혼일자를 가려서 삼가 보내오니 신랑의 의복 치수를 알려 주심이 어떠하오리까

      라. 납폐 (함 보내기)

     납폐는 혼인 전날 신랑 집에서 혼인을 허락해 준 감사의 보답으로 홍색 청색 비단 등 신부용 혼수감과 혼서지 및 물목을 신부 집으로 보내는 것을 말하며, 옛날에는 하인이나 심부름꾼(함진아비)에게 함을 져 보냈으나 요즈음은 신랑 친구들이 가방으로 메고 간다.  이 때에 너무 무리한 수고비의 요구로 경사스런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에다 먹칠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신부 집에서는 신부의 어머니 또는 복 많은 여인이 상 위에 함을 받아놓고 북향 재배한다. 그리고 안방으로 바로 가져가 깔고 앉으면서 "복 많이 들었네!" 하고 소리친다.   납폐 편지글(혼서지; 혼인문서)은 길이 36 cm, 폭 60 cm정도로 하여 9칸을 접어 양편 1칸씩 비우고 7칸에다 쓴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18
  • 수연례(壽筵禮)

    가.수연례의 의미

      수연이란 어른의 생신에 아랫사람들이 상을 차리고 술을 올리며 오래 사시기를 비는 의식이다. 고래에는 수연례란 말이 없고 헌수가장례(獻壽家長禮)라 했다.

     나.수연의 종류

      아랫사람이 태어난 날은 생일(生日)이라 하고 웃어른의 생일은 생신(生辰)이라 한다. 웃어른의 생신에 자제(子弟)들이 술을 올리며 장수를 비는 의식이 수연이므로 아랫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수연례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활동을 하는 아들이 부모를 위해 수연의식을 행하려면 아무래도 어른의 나이가 60세는 되어야 할 것이므로 이름있는 생일은 60세부터이고,구태여 종류를 나누면 다음과 같다.

      ①육순(六旬) 60세 때의 생신이다. 육순이란 열(旬)이 여섯(六)이란 말이고, 육십갑자(干支六甲)를 모두 누리는 마지막 나이이다.

      ②회갑·환갑(回甲·還甲) 61세 때의 생신이다. 60갑자를 다 지내고 다시 낳은 해의 간지가 돌아왔다는 의미이다.

      ③진갑(陳·進甲) 다시 60갑자가 펼쳐 져 진행한다는 의미이다. 62세 때의 생신이다.

      ④미수(美壽) 66세 때의 생신이다. 옛날에는 66세의 미수를 별로 의식하지 않았으나 77세 88세 99세와 같이 같은 숫자가 겹치는 생신을 이름 붙였으면서 66세를 지나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현대 직장의 거개가 만 65세를 정년으로 하기 때문에 66세는 모든 사회활동이 성취되어 은퇴하는 나이이면서도 아직은 여력이 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나이이므로 `美壽'라 하고, `美'자는 六十六을 뒤집어 쓰고 바로 쓴 자이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

      ⑤희수·칠순(稀壽·七旬) 70세 때의 생신이다. 옛 글에 “사람이 70세까지 살기는 드물다(人生七十古來稀)”는 데서 희수란 말이 생겼는데 그런 뜻에서 희수라 한다면 “어른이 너무 오래 살았다”는 의미가 되어 자손으로서는 죄송한 표현이다. 열이 일곱이라는 뜻인 `칠순(七旬)'이 더 좋다.

      ⑥희수(喜壽) 77세 때의 생신이다. `喜'자를 초서로 쓰면 七十七이 되는 데서 유래되었다.

      ⑦팔순(八旬) 80세 때의 생신이다. 열이 여덟이라는 말이다.

      ⑧미수(米壽) 88세 때의 생신이다. `米'자가 八十八을 뒤집고 바르게 쓴 데서 유래되었다.

      ⑨졸수(卒壽·九旬) 90세 때의 생신이다. `卒'자를 초서로 쓰면 九十이라 쓰여지는 데서 졸수라 하는데 `卒'이란 끝나다, 마치다의 뜻이므로 그만 살라는 의미가 되어 자손으로서는 입에 담을 수 없다. 오히려 열이 아홉이라는 구순(九旬)이 좋다.

      ⑩백수(白壽) 99세 때의 생신이다. `白'자(字)는 `百'자에서 `一(하나)'를 뺀 글자이기 때문에 99로 의제해서 말하는 것이다.

      다. 나이(年齡)에 관한 호칭

      [해제(孩提)] (2~3세) 어린 아이(兒提)
      [지학(志學)] (15세) 15세가 되어야 학문에 뜻을 둔다는 뜻
      [약관(弱冠)] (20세) 남자는 스무살에 관례(冠禮)를 치루어 성인이 된다는 뜻
      [이립(而立)] (30세) 서른살쯤에 가정과 사회에 모든 기반을 닦는다는 뜻
      [불혹(不惑)] (40세) 공자는 40세가 되어서야 세상일에 미혹함이 없었다는 데서 나온 말
      [지천명(知天命)] (50세) 쉰살에 드디어 천명을 알게 된다는 뜻
      [이순(耳順),육순(六旬)] (60세) 논어에서 나온 말로 나이 예순에는 생각하는 모든 것이                                  원만하여 무슨 일이든 들으면 곧 이해가 된다는 뜻
      [환갑(還甲),회갑(回甲)] (61세) 예순하나가 되는 해의 생일
      [고희(古稀)] (70세)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서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                       古來稀)에서 유래된 말
      [망팔(望八)] (71세) 팔십세를 바라본다는 뜻                                        [희수(喜壽)] (77세) 오래살아 기쁘다는 뜻. 喜字의 略字가 七七로 77을 뜻함에서 온말
      [산수(傘壽)] (80세) 산字가 八十을 의미함
      [미수(米壽)] (88세) 여든 여덟살의 생일. 米字는 八十八의 합성어임
      [백수(白壽)] (99세) 百(100)에서 一을 빼면(99세) 즉, 白字가 됨
      [기이지수(期이之壽)] (100세) 사람의 수명을 100년을 1期로 하므로 기라하고, 이는 양                                (養)과 같은 뜻으로 곧 몸이 늙어 기거를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의탁한다는 뜻 .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51
  • 기제 축문 쓰는 법






      (가) 조부모의 기제축

        조부모의 기제축은 예시와 같으며 , 조부모가 벼슬을 하였으면 '학생'과 '유인' 대신에 벼슬 이름과 봉한 명칭으로 쓴다.
        고조부모는 '현고조고(顯高祖考)', '현고조비(顯高祖妃)'라 하고 중조부모는 '현중조고', '현중조비' 라고 쓴다. 그리고 '감소고우' 앞에는 고조일 때 '효현손(孝玄孫)', 중조일 때 '효중손'이라 쓴다.

      [조부모의 기제축] 










    향饗



    공恭신伸전奠헌獻

    상尙



    불不승勝영永모慕

    근謹이以청淸작酌서庶수羞



    세歲서序천遷역易

    휘諱일日부復림臨

    추追원遠감感시時



    현顯조祖비妃유孺인人

    모某관貫
    모某씨氏

     



    현顯조祖고考학學생生부府군君




    효孝손孫

    모某

    감敢소昭고告우于



    유維세歲차次간干지支

    기幾월月간干지支삭朔

    기幾일日간干지支
     


     




     [풀이] 

       ㅇㅇ년 ㅇㅇ월 ㅇㅇ일 손자 ㅇㅇ은(는) 감히 밝게 아뢰옵니다.

       해가 바뀌어 할아버님(할머님) 돌아 가신 날을 다시 맞아, 사모하는 마음 이기지 못하여 삼가 맑은 술과 약소한 제수를 올리오니 흠향 하옵소서.  










      (나) 부모의 기제축

        부모의 기제축도 조부모의 경우와 같으며 , 다만, '현조고 ...'를 '현고 ...'로 '현조비 ...'를 '현비 ...'로 바꾸며 '불승영모' 대신 '호천망극'을 쓴다.

      [부모의 기제축] 










    향饗



    공恭신伸전奠헌獻

    상尙 



    호昊천天망罔극極

    근謹이以청淸작酌서庶수羞



    세歲서序천遷역易

    휘諱일日부復림臨

    추追원遠감感시時



    현顯비妃유孺인人

    모某관貫
    모某씨氏

     



    현顯고考학學생生부府군君




    효孝자子

    모某

    감敢소昭고告우于



    유維세歲차次간干지支

    기幾월月간干지支삭朔

    기幾일日간干지支
     


     




     [풀이] 

       ㅇㅇ년 ㅇㅇ월 ㅇㅇ일 아들ㅇㅇ은(는) 감히 밝게 아뢰옵니다.

       해가 바뀌어 아버님(어머님) 돌아 가신 날을 다시 맞아, 하늘과 같은 은혜 잊지 못하여 삼가 맑은 술과 제수를 올리오니 흠향 하옵소서.  










      (다) 남편(아내)의 기제축

        남편(아내)의 기제축도 부모의 기제축과 같은데, 다만 '현고 ...'를 '현벽 ...'으로 바꾸며, 호천망극을 '불승영모'로 대신 한다.

      [남편(아내)의 기제축] 










    향饗



    공恭신伸전奠헌獻

    상尙 



    불不승勝영永모慕

    근謹이以청淸작酌서庶수羞



    세歲서序천遷역易

    휘諱일日부復림臨

    추追원遠감感시時



    고故실室유孺인人

    모某관貫
    모某씨氏

     



    현顯벽壁모某관官부府군君



    부夫
    또는
    주主부婦

    모某

    감敢소昭고告우于



    유維세歲차次간干지支

    기幾월月간干지支삭朔

    기幾일日간干지支
     


     




     [풀이] 

       ㅇㅇ년 ㅇㅇ월 ㅇㅇ일 (주부) ㅇㅇ은(는) 감히 밝게 아뢰옵니다.

       해가 바뀌어 당신의 돌아 가신 날을 다시 맞아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맑은 술과 여러가지 음식을 공손히 올리오니 흠향 하소서.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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