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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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天氏)





    천씨(天氏)

     천씨(千氏)의 연원(淵源)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 연안(延安) 지방에 한 기아(棄兒)가 있어 사람이 거두어 길렀는데, 그의 성(姓)을 알  수가 없으므로 만물지조(萬物之祖)인 천(千)으로써 성(姓)을 삼았다고 하며,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연안(延安)과 우봉(牛峯) 두 본이다.

     역사상에 나타난 인물(人物)로는 1780년(정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천명익(千命翊)이 「사마방목(司馬榜目)」에 기록되어 있으며, 근세에는 193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황해도 봉산(黃海道鳳山)과 서흥(瑞興) 지방에  14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경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97가구, 1,3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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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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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성-사(東城-泗川) 이씨(李氏)
    동성-사천(東城-泗川)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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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陜川 이씨(李氏)
    합천陜川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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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仁川 이씨(李氏)
    인천仁川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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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永川 이씨(李氏)
    영천永川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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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寧川 이씨(李氏)
    영천寧川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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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順天 이씨(李氏)
    순천順天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081
  • 우씨(木川于氏)
    목천 우씨(木川于氏)

     목천(木川)은 충정남도 천원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는 목주(木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 태종(太宗) 때 목천(木川)으로 고쳐 1913년에 천원군에 속한 면(面)이 되었다.
     우씨(于氏)는 중국 하남(河南)에서 계출된 성씨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들이 우(于) 땅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땅이름을 성(姓)으로 삼았다가 후에 우(于)로 고쳤다고 한다. 우리나라 우씨(于氏)는 목천(木川) 단본(單本)이며 고려 중엽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우방녕(于邦寧)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후 그의 아들 학유(學儒)가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로부터 난을 일으키고 거사에 가담하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무신이 전권(全權)을 잡아 잘 된 일이 없다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거절했다. 정중부가 집권한 후 그는 신상이 위태로왔으나 집권층인 이의방(李義方)의 누이와 결혼한 인척관계로 무사했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술유(述儒)가 명종(明宗) 때 형부 시랑(刑部侍郞)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으며,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판형부사(判刑部事)를 거쳐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다. 한편 희정(熙宗)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던 승경(承慶)은 권신 최충헌(崔忠獻)을 제거하려다 되말려 유배당했으며, 필흥(必興)은 공민왕(恭愍王) 때 「옥룡기(玉龍記)」의 도참설을 인용하여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의관과 여자들의 옷을 검은색으로 입게하고, 산에 나무를 심게하여 풍토(風土)를 순응케 하라는 소(疏)를 올려 이를 시행케하여 명망을 떨쳤다.
     1985년 경제 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목천 우씨(木川于氏)는 남한에 총 282 가구, 1,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474
  • 서씨(利川徐氏)
    시  조 휘(諱):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묘 소: 경기도 이천군 부발면 산촌리 효양산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537
  • 상씨(木川尙氏)
    목천 상씨(木川尙氏)

     목천(木川)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천원군(天原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때는 목주(木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목천(木川)으로 고쳐 1913년에 천원군에 속한 면( 面)이 되었다. 상씨(尙氏)는 본래 중국(中國) 상당(上黨:산서성 기령도 노성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병마사(兵馬使)를 지낸 상가고(尙可孤)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상씨(尙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초에 목천 호장(木川戶長)을 지낸 상국진(尙國珍)이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목천상씨갑자대동보(木川尙氏甲子大同譜)」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太祖) 왕건(王建)이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후 고려를 개국(開國)하자 백제(百濟)의 유민(遺民)들이 목천 상왕산(尙王山)에 웅거(雄據)하여 백제 재건을 위해 수차에 걸쳐 반기를 들자 화가 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가축(家畜)의 이름인 우(牛)·마(馬)·상(象)·돈(豚)·장(獐)으로 사성(賜姓)하였다. 축성(畜姓)으로 사성(賜姓)된 상씨(尙氏)는 국진의 아들 득유(得儒)가 고려 문종(文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최 충(崔 庶)이 설치한 구재(九齋)의 하나인 대빙재(待聘齋)에서 수학(修學)하면서 향역(鄕役)을 면하게 되었고, 본래의 성(姓)인 상씨(尙氏)로 회복(回復)하였다고 한다. 그후 3세손 원(愿)이 급사(給事)를 지내며 임지(任地)를 따라 주거(住居)를 임천(林川)으로 옮겨 10대를 세거하면서 조상(祖上)의 원향지(原鄕地)인 목천(木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후대로 내려와 후손들이 풍덕(豊德)·원주(原州)·부여(扶餘) 등지에 산거(散居)하면서 파(派)를 이루게 되었다.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8세손 천석(天錫)이 고려 말에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효충(孝忠)은 조선 초에 충청도 수군우후(忠淸道水軍虞侯)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에 추증되어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 중기에 명상(名相)으로 이름난  범허재(泛虛齋) 진(震)은 목천 상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의 증조부 영부(英孚)가 임천(林川) 합하동(閤下洞)에서 부자(富者)로 살았는데, 재물을 사람들에게 꾸어주고 이자를 붙여 받아들이다가 만년에 그 문서를 모두 불살라 버리며, "내가 후손이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아버지 보(甫:안기도 찰방을 지냄)가 늙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친히 성주산(聖住山)에서 기도를 드렸더니, 이듬해 그를 낳았다.  그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여덟 살에 아버지마저 잃어서 매부인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의 집에서 자랐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관찰사(觀察使), 4조(四曹)의 판서(判書)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우·좌의정(右·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특히 그는 관후한 인품으로 16년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야의 신망이 두터웠고, 명상(名相)으로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청렴과 구휼(救恤)로 일생을 살았던 그는 창고가 무너져서 노비가 수리할 것을 말하면 웃으면서 "네가 비록 고쳐서 완전하게 만들어 놓아도 무엇으로 채우겠느냐" 하였고, 집에 도둑이 들었다가 잡히면 도리어 불쌍히 여겨 "주리고 떨면서 쪼들리다가 부득이 하였구나"하며 훔친 물건을 도로 내어 주면서 "만약 배고프고 추위에 떨거든 반드시 나에게 와서 고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하였으며, 벌레나 짐승에 이르기까지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 인품이었다. 진의 아들 붕남(鵬南)은 학문(學問)에 깊이가 있어 경사(經史)에 능통했으며 아버지의 음덕(蔭德)으로 높은 벼슬에 오를 수도 있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서(詩書)로 일생을 살았다.
     그외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낸 시손(蓍孫:붕남의 아들)과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한 자산(子産)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진의 9세손 동기(東耆:통덕랑)의 둘째 아들 득용(得容)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거쳐 화량진 첨절제사(花梁津僉節制使)에 이르렀으며 경사(經史)를 비롯한 병서(兵書)·천문(天文)·주수(籌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의 전통 가문인 목천 상씨(木川尙氏)를 더욱 빛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461
  • 복씨(沔川卜氏)
    면천 복씨(沔川卜氏)

     면천(沔川)은 충청남도(忠淸南道) 당진군(唐津郡)에 속해있던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 때
    에는 혜군( 郡) 또는 지비(智非)라 부르던 것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혜성군( 城郡)으로 개칭하였고,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운주(運州:홍주의 옛 지명)에 속하였다.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와서 면천군(沔川郡)으로 고쳤으나 1913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진군(唐津郡)에 속한 면천면(沔川面)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복씨(卜氏)의 선계(先系)는 당(唐:후당923∼936) 나라의 학사(學士) 한 분이 신라 말엽에 오계(五季:다섯 왕조에 걸쳐 문란해진 시대를 일컬음)의 난국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동래(東來)하여 면천(沔川)에 정착(定着)한 것이 시초(始初)가 되었다. 복씨의 본관(本貫)은 면천을 비롯하여 홍주(洪州)·오천(烏川)·연주(延州 : 강원도 영월의 고호)·평산(平山)·구성(龜城) 등 10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면천을 제외한 나머지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기록이 없어 상고(詳考)할 수 없다.
     면천 복씨(沔川卜氏)의 시조(始祖) 복지겸(卜智謙)은 고려창업(高麗創業)의 주역(主役)으로 본래는
    태봉국(泰封國)의 마군장수(馬軍將帥)로 있다가 궁 예(弓 裔)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고 민심이 어지러워지자신숭겸(申崇謙:평산 신씨의 시조)·배현경(裵玄慶:경주 배씨의 시조)·홍 유(洪 儒) 등과 함께 왕 건(王 建)을 추대(推戴)하여 고려를 세웠다. 그후 장군 환선길(桓宣吉)과 임춘길(林春吉) 등의 반역 음모를 적발하여 이를 평정(平定)시켰으며,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혜성부원군( 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복지겸(卜智謙)을 시조로 받을고 본관(本貫)을 면천(沔川)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고려조에 10여 명의 평장사(平章事)와 관면잠영(冠冕簪영)이 끊이지 않아 거족(巨族)으로 일컬어졌다.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조에서 무신(武臣)으로 명성을 떨쳤던 규(奎:시조의 12세손)가 1291년(충렬왕17) 원(元)나라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 합단(哈丹)이 침입했을 때 원주 방호별감(原州防護別監)으로 이를 격퇴시켜 크게 무명(武名)을 날렸으며, 그의 아우 기(箕)는 지주사(智州事)을 역임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한편 우부승지(右副承旨) 성진의 아들 위룡(渭龍)이 공양왕(恭讓王) 대 사온서 직장(司 暑直長)으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 색(李 穡) 등과 함께 친교를 맺어 교유했으며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홍주(洪州) 여수동(麗水洞)으로 돌아가 은거(隱居)하며 절의(節義)를 지켰다.
     그의 아들 한( )은 세종조(世宗朝)에서 호조 좌랑(戶曹左郞)에 올라 아버지 상(喪)을 당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3년 동안 여막(廬幕)에서 시묘(시墓)하여 세인들의 칭찬을 받았으며, 맏아들 오(吾)가 임천(林川)과 서천군수(舒川郡守)를 거쳐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올랐고, 막내 여(予)는 고원 군수(高源郡守)와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한편 오(吾)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는데  맏아들 승원(承元)은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으며, 차남 승형(承亨)은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세째 아들 승리(承利)는 제주 목사(濟州牧使)을 각각 역임하여 막내 승정(承貞:예조 참의와 황해 감사를 역임)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승정(承貞)의 현손(玄孫) 응길(應吉:참봉 연의 아들)은 중봉(重峯) 조 헌(趙 憲)의 문인(門人)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을 따라 종사관이 되어 금산(錦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종용사(從容사)에 배향(配享)되었으며, 그의 조카 정웅(廷雄:상길의 아들)은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다.
     그밖에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지낸 태진(台鎭)과 장령(掌令) 태형(台衡)이 유명했으며,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도흠(道欽)은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한 준흠(駿欽)·윤성(潤成)  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복씨(卜氏)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4,264명, 1975년에는 1,116가구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1,794가구, 7,3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789
  • 박씨(泗川朴氏)
    사천박씨(泗川朴氏)

     사천(泗川)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사물현(史勿縣) 또는 사수현(泗水縣)으로 불리다가 고려(高麗)때에는 사주(泗州)로 하였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사천현(泗川縣)으로 되었다가 현재 사천군에 이르고 있다.
     사천 박씨(泗川朴氏)는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의 둘째 아들 남환(男桓: 사수 군주)의 후손 인겸(仁謙)이 고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공부상서(工部尙書)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고 사주군(泗州君)에 추봉(追封)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사천(泗川)으로 하게 되었다.
     그후 인겸의 손자 자문(自文)이 충숙왕(忠肅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 사천군(泗川君)에 봉해졌으며, 우왕(禑王)때 어지러운 정국을 피하여 함경남도 안변(咸鏡南道 安邊)을 둔거(遯居)하였다가 영흥(永興)에 이거(移居)하여 자손들이 자문(自文)을 일세조(一世組)로 받들고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자문의 아들 양준(良俊)이 향직(鄕職)인 창정(倉正)을 역임했고, 손자 수도(守道)는 총경장군(摠京將軍)으로 무명(武名)을 떨쳐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낸 대재(大材: 양준의 현손)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정용낭장(精勇郎將) 인경(仁景: 자문의 10세손)의 아들 용계(龍桂)가 1469(예종 즉위)에 출생하여 장사랑(將仕郞)으로 의릉참봉(義陵參奉)을 지내고 영흥좌수(永興座首)를 자청하여 선원전(璿源殿) 축성 때 도감(都監)으로 공(功)을 세워 용양위부호군에 올랐으며, 함주군 상조양면 상한리(咸州郡上朝陽面上閒里)로 옮겨 살게 되어 후손들이 입함흥중조(入咸興中祖)로 받들어왔다. 그외 판결사(判決事) 창문(昌文)과 효성(孝誠)으로 명망이 높았던 두문(斗文)·원해(元楷)가 유명했고, 창조(昌朝)는 찰방(察訪)을 역임하여 주부(主簿)를 지낸 영주(永胄)와 더불어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사천 박씨(泗川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270가구, 1,1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402
  • 春川 박씨朴氏
    춘천春川 박씨朴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521
  • 順天 박씨朴氏
    순천順天 박씨朴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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