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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沔川 박씨朴氏
    면천沔川 박씨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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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씨(泗川睦氏)
    사천 목씨(泗川睦氏)
     사천(泗川)은 경상남도 남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사물현(史勿縣) 또는
    사수현(泗水縣)으로 불리우다가 고려(高麗) 때에는 사주(泗州)라 하였으며, 조선조에 사천현(泗川縣)으로 되었다가 현재 사천군에 이르고 있다.
     목씨(睦氏)는 본래 중국(中國) 조군(趙郡:지금의 직예성 대명도 고대 조나라)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문헌(文獻)에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사천(泗川)을 비롯하여 수원(水原), 계양(桂陽:부천 별호), 옥천(沃川), 전주(全州), 남평(南平), 태인(泰仁), 경주(慶州), 다인(多仁:경북 예천지방) 등 9본이 있으며,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사천(泗川) 단본(單本)으로 알려졌다. 일찌기 고려조에서 낭장(郎將), 동정(同正)을 지낸 목효기(睦孝基)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는 사천목씨(泗川睦氏)는 고려 말기 에서부터 가문(家門)을 융성하여 많지 않은 인구수로서도 대성(大姓)의 지위를 확보했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두드러진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효기(孝基)의 아들 덕창(德昌)이 1269년(원종 10) 교위(校尉)로서 역신 최 탄(崔坦), 한 신(韓愼), 이연령(李延齡) 등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다가 영주성(靈州城: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서 순절하였으며, 덕창(德昌)의 아들 준평(俊平)은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비서윤(秘書尹)을 지내고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진사(進士) 충달(忠達)의 아들 인길(仁吉)은 공민왕(恭愍王)이 원(元)나라에 있을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시종(侍從)하고, 1359년(공민왕 8) 기 철(奇轍)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랐다. 고려조에서 무맥(武脈)을 자랑했던 사천 목씨(泗川睦氏)는 조선조에 와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명문세가(名門勢家)의 기초를 다졌다. 특히 시조의 11세손 세칭(世秤)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인 동천(東泉) 김 제의 고제(高弟)로서 학행(學行)이 뛰어났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정 암(靜唵)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많은 사림(士林)이 화(禍)를 입게 되자 과거의 뜻을 단념하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에만 전력했으며, 그의 아들 첨(詹)은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 使)를 지내고,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의 사청을 거절하였다고 하여 체직(遞職)되었다. 첨(詹)은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서흠, 장흠(長欽), 대흠(大欽)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크게 현달했으며, 효행(孝行)으로 유명했던 수흠(守欽)은 그의 청백(淸白)함이 지금도 일화로 구전되고 있다.
     인조(仁祖) 때의 명신(名臣) 서흠은 1610년 (광해군 2)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인조(仁祖) 초에 함경도 선유어사(咸鏡道 宣諭御史)를 거쳐 사예(司藝), 광주 목사(廣州牧使), 좌승지(左承旨) 등을 지내고 사직했다가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했다
     뒤에 양양 부사(襄陽府使)와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참찬관(參贊官), 좌우승지(左右承旨), 예조 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한 후 1650년(효종 1)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광해군(光海君)이 배다른 아우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南)을 죽이려 할 때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이를 반대하다가 청풍 군수(淸風郡守)로 좌천되었던 장흠(長欽)은 1613년(광해군 5)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향리로 돌아갔다. 그 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재등용된 그는 승지(承旨)와 판결사(判決事),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거쳐 1641년(인조 19)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막내 대흠(大欽)은 1605년(선조 3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으나 광해군이 난정을 개탄하고 벼슬을 버린 후 낙향했다가 1624년(인조 2) 이 괄(李适)의 난에 영의정(領議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워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올랐으며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고, 특히 시문(詩文)에 능했다. 장흠의 아들로 숙부(叔父)인 대흠에게 입양(入養)한 행선(行善)은 인조(仁祖) 때 등과하여 병조(兵曹)의 좌랑(佐郞)과 지평(持平), 수찬(修撰) 등을 지내고 응교(應校)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淸)나라를 다녀왔으며,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승지(承旨)를 거쳐 효종(孝宗) 초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서흠의 아들 내선(來善)은 일찍이 미수 허 목(許穆)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효종 초에 문과에 올라 대사헌(大司憲)과 예조(禮曹) 및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1680년(숙종 6)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한때 삭직되기도 했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공을 세워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그외 장흠의 손자 창명(昌明)은 숙부(叔父)인 내선(來善)과 함께 숙종(肅宗) 때 남인(南人)의 중진(重鎭)으로 유명했으며, 조우(祖禹)의 아들 만중(萬中)은 영조(英祖)와 순조(純祖) 대에 걸쳐 대사간(大司諫)과 판서(判書)를 지냈다. 우리나라 목씨(睦氏)의 분포사항은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4167명, 1975년 때는 1192가구, 그리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1721가구, 70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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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흥 마씨(木川,長興馬氏)
    마씨(馬氏)는 삼한시대(三韓時代) 부족국가에서 발원(發源)된 우리나라 토착성씨(土着姓氏)로서 마한(馬韓)의 첫 군주(君 主)인 마 겸(馬謙)이 비조(鼻祖)로 알려져 왔으며, 마씨대동보(馬氏大同譜)에는 백제(百濟) 건국의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좌보(左輔)의 벼슬을 역임한 마 려(馬黎)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소목을 밝힐 수 없으므로 마육침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보(系譜)를 잇고 있다. 그는 서기 660년(백제 의자 왕 20, 신라 무열왕 7)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신라(新羅)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13만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百濟)가 멸망하자 군사(軍士)를 일으켜 옛 목지국(目支國)의 성거산(聖居山:충남 직산)을 근거지로 백제 부흥전(復興戰)을 도모했던 장군(將軍)이다. 그후 마씨는 육침의 10세손 점중(占中)이 고려 문종(文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목성군(木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맏아들 현(鉉:예빈전 태학사를 역임)이 목천파(木川派)로, 둘째 혁인(爀仁:선종 때 개성 윤을 지냄)은 장흥파(長興派)로 분관(分貫)하여 마씨(馬氏)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충청남도 천원군(天原郡)에 속해있는 목천(木川)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을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으며, 고려에서 와서 목주(木 州)로 고쳤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목천으로 개칭하여 1913년 천원군(天原郡)에 속한 면(面)이 되었다. 목천파(木川派)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관조(貫祖) 현(鉉)의 8세손 천린(天麟)이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자 복주 (福州:지금의 안동)로 피난가는 왕(王)을 호종(扈從)하여 보리일등공신(輔理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목안군(木安君)에 봉해졌 으며, 그의 아들 경수(坰秀)는 신안군(新安君)에 봉군되어 고려 말 무신들의 방자함을 견제하다가 미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송도(松都) 선죽교(善竹橋) 옆에 살면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던 희경(羲慶: 경주의 9세손)은 1567년(명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선조(宣祖) 때 이율곡(李栗谷)의 천거로 북부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역학(易學)과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일찍이 서경 유수(西京留守) 윤근수(尹根壽)는 송도를 지날 때 그를 찾아와 <난초는 깊은 계곡에 있어도 향기가 절로 배어난다>고 그의 깊이 있는 학문과 고결한 인품에 감탄했다고 한다.  한편 효렴(孝廉)으로 극찬을 받았던 희상(羲祥: 희경의 형)의 손자(孫子) 상원(尙遠)은 문장(文章)이 뛰어나 당시 <동방문사(東方文士)>로 일컫어진 차천로(車天輅) 형제와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로 불리워졌다. 희경의 손자 사종(嗣宗:덕룡의 맏아들)은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에게 글을 배웠고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서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는 <문학으로는 세상에 사종이 있다.
     이는 서경(西京)의 아유(雅儒)다>라고 칭찬했다고 하며, 주자(朱子)의 가례(家禮)가 현실에 맞지 않는다 하여 당시의 실정에 맞게 오륜통의(五倫通義)와 사례비요(四禮備要)를 저술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예법을 정립(定立), 윤리도덕의 전서(典書)가 되었다.
     그외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른 인호(仁浩:사종의 종숙)와 영조(英祖) 때 직강(直講)을 지낸 지휘(之徽)가 학유(學諭)를 역임한 맹하(孟河)와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고려 선종(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라남도 남쪽 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오차현(烏次縣)을 신라가 오아(烏兒)로 고쳐 보성군에 속하게 하였다가 고려 때 영암에 소속되고, 인종(仁宗) 때 장흥부(長興府)에 이어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으나 충선왕조에 와서 다시 장흥부로 개칭, 여러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에 장흥군이 되었다.
     장흥파의 인물로는 관조(貫祖) 혁인의 손자 의유(義裕)가 고려 의종(毅宗) 때 문과(文科)에 오르고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희원(熙願)은 희종(熙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를 지낸 지백(智伯:혁인의 7세손)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태종(太宗) 관산군(冠山君)에 봉해진 치원(致遠)의 아들 영(榮)은 사마봉시경(司馬奉侍卿)을 역임하고 귀향하여 조종(祖宗)이 쌓은 수령산성(遂寧山城)을 보수하여왜구(倭寇)를 막는 한편 후학(後學)에 진력하다가 후에 곡성(谷城) 당상촌(堂上村)으로 이거(移居)하였고, 만년에 수령군(遂寧君)에 추봉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삼등공신(佐命三等功臣)에 책록된 천목(天牧)은 영(榮)의 아들로 1412년(태종 12) 전라도 병마절제사(全羅道兵馬節制使)를 두 번이나 역임하여 당시 해안(海岸)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웠고, 항구적(恒久的)인 왜적방어책 (倭賊防禦策)으로 광주(光州)에 있던 병마본영(兵馬本營)을 도강(道康:강진)의 수인산(修因山)으로 옮겨 장수대(將帥臺)를 만들어 왜구를  방비하니, 그 후부터는 왜구가 접근하지 못했다.
     1419년(세종 원년) 북방육진(北方六鎭) 개척(開拓)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하여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에 대비(對備)토록 하였고 도성수축도감제조(都城修築都監提調)가 되어 현재 서울 성곽(城郭)을 완축(完築)하는데 공을 세워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맏아들 승(勝)은 세종 때 경상도 수사(慶尙道水使)와  판안주목사(判安州牧使),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내며 청백(淸白)한 관리로 유명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일생동안 문의(文義) 와 충절(忠節)을 지켰다.
     승의 아우 전의 6세손 하수(河秀)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비 아들과 함께 향선(鄕船) 10 여 척으로 이순신을 도우고 특전대를 조직하여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려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낸 반(珊)의 6세손 응방(應房)은 진안 현감(鎭安縣監)으로 동생 응허(應虛:병마도위), 응정(應井) 등과 남원성에서 싸우다가 순국하여 남원(南原)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한편 폭군 연산군(燕山君)의 불의(不義)와 패륜(悖倫)에 항거했던 숭조(崇祖)의 5세손 윤(倫 ), 응훈(應勳), 운종(蕓宗), 창종(昌宗) 5종형제(五從兄弟)가 모두 창의(倡義)하여 의병장으로 진주(晋州)의 남강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고, 창종의 아들 인호(仁好)는 남강(南江) 전투에서 순절하여 충의(忠義)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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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씨(廣川董氏)
    광천 동씨(廣川董氏)

     광천(廣川)은 중국 북부지방의 화북성(華北省) 조강현(棗强縣)에 속한 지명으로 지금의 북경(北京)근처이며, 고대 중국의 중요 산업지대로 유명하다. 동씨(董氏)의 연원(淵源)은 기원전 2,250년경 황제(黃帝)의 6세손 류숙안의 아들 보(父)가 순(舜) 임금으로부터 동씨(董氏)의 성(姓)을 하사(下賜)받은 것이 시초가 되며, 계보(系譜)는 전한(前漢)의 대학자(大學者) 동중서(董仲舒)로부터 시작된다. [광천동씨대동보(廣川董氏大同譜)]의 기록에 의하면 대유(大儒) 동중서(董仲舒)는 기원전 179년(한 나라 문제 원년) 중국 화북성(華北省)에서 출생하여 고명(高明)한 학덕(學德)으로 유교일존주의(儒敎一尊主義)를 확립, 한 (漢)나라 유교독립의 기반을 중흥시켜 동양사(東洋史)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으며, 문묘에 배향되어 동씨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우리나라 동씨(董氏)는 동중서(董仲舒)의 43세손인 동승선(董承宣)이 고려 말에 명(明 )나라 접위사(接慰使)로 동래(東來)하여 조선개국(朝鮮開國)과 함께 출사한 후 나라에 공을 세워 영천(榮川: 지금의 경북 영주)군에 봉록되고, 벼슬에서 물러나 함경도(咸鏡道) 북청(北靑)의 이곡(泥谷)에 세거(世居)하면서부터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특히 동씨(董氏)는 처음에 승선(承宣)의 봉군지였던 영천(榮川)을 관향(貫鄕)으로 쓰게 되었고, 함경북도 명천(明川)지방에 살던 후손들은 원주(原州)로 칭관(稱貫)하는 등 동원(同源)이면서도 관향(貫鄕)을 달리하여 부르다가 조선 단종조(端宗朝)에 이첩(移牒: 관청으로 보내는 통첩)으로 다시 영천이라 하였으나 ,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明)나라 제독(提督)으로 원병(援兵)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건너온 동일원(董一元)의 소장문서를 근거로 하여 시조(始祖) 동중서(董仲舒)의 출생지인 중국의 광천(廣川)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한편 승선의 아우 인선(印宣)은 명(明)나라 홍무년간(洪武年間: 1368-1398)에 아버지 박소(搏 )와 절의지간(節義之間)인 서 달(徐達)의 천거로 태조조(太祖朝)에 지휘사(指揮使)가 되어 전공을 세움으로써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랐다. 그리하여 광천동씨(廣川董氏)는 강도상(江都相 ) 동중서(董仲舒)를 시조(始祖)로 삼고, 영천군(榮川君) 승선(承宣)과 이부상서(吏部尙書) 인선(印宣)을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동씨(董氏)의 본관(本貫)은 광천을 비롯하여 광주(廣州), 영천(榮川), 풍천(豊川)등 25본이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원분파(同源分派)로 추정된다. 동방의 거유(巨孺) 동중서(董仲舒)의 학덕(學德)을 이어받은 광천 동씨(廣川董氏)는 특히 조선조에서 훌륭한 인재(人財)를 많이 배출하여 도덕(道德)의 가문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승선(承宣)의 손자 덕란(德蘭)은 공조시랑(工曹侍郞)을, 현손(玄孫) 보하(寶夏)와 상하(尙夏)는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여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오른 학정(學政: 인선의 현손)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한편 일원(一元)의 아들 창순(昌順)은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으며, 대순(大順)의 맏아들 한필(漢弼)은 인조조(仁祖朝)에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있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淸)나라 와의 굴욕적인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비분강개하며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智異山)에 은거한 후 누차에 걸친 조정의 부름에도 불응하며 자손들이 벼슬길에 나가지 말도록 유언(遺言)했다고 한다. 희방(希芳)의 아들 응란(應蘭)은 1624년(인조 2) 부원수(副元帥) 이 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향병(鄕兵)을 일으켜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우봉 현감(牛峰縣監)을 거쳐 갑산부사(甲山府使)로 나갔다. 그밖의 인물로는 용양위 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지낸 혜진(惠震)과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한 정란(廷蘭)이 유명했으며, 하욱(夏旭)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올라 부호군(副護軍) 희경(禧景), 부사(府使) 기연(基衍), 현감(縣監) 진호(鎭鎬)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천동씨(廣川董氏)는 남한에 총 1,095가구, 4,6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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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씨(木川頓氏)
    목천 돈씨(木川頓氏)

     목천(木川)은 충청남도 천원군(天原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조(高麗朝)에 와서 목주(木州)로 개칭하여 청주(淸州)에 속하였다가 성종(成宗) 때는 별칭(別稱)으로 신정(新定)으로도 불렸다.
     조선 태종조(太宗朝)에 목천(木川)으로 고쳐 현감(縣監)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되어 오다가 1913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이웃 병천군과 합하여 천안군(天安郡)에 속했으며, 1963년 천안군이 천원군으로 개칭됨에 따라 천원군(天原郡) 목천면(木川面)이 되었다.
     돈씨(頓氏)는 중국 창오(蒼梧 : 지금의 광서성 창오현, 고대 순제가 죽었다고 전하는 곳)출신으로 한(漢)나라 때 효자로 유명했던 돈기(頓琦)의 후예(後裔)로 전해진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고 고려를 창업하자 목천(木川)지방의 백제 유민들이 순응(順應)하지 않고 자주 소란(騷亂)을 일으켜 태조가 그 곳 사람들에게 동물의 이름으로 돈(頓), 상(象), 우(牛), 장(獐)등의 성(姓)을 가지게 했는데, 그 후손들이 돈(頓), 상(尙), 우(禹), 장씨(張氏)로 개성(改姓)한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돈씨가보(頓氏家譜)]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조의 명성(名姓)인 을씨(乙氏)가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 때부터 을지씨(乙支氏)로 개성(改姓)하였다가, 고려 인종(仁宗) 때 묘청(妙淸)의 난(亂)에 의병장(義兵將)으로 서경(西京)을 수복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을지수(乙支遂).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이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지 고 돈뫼(頓山)를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그 곳에서 누대를 세거(世居)해 오면서 성(姓)을 돈씨(頓氏)로 개성하였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의 조방장(助防將)인 돈정신(頓貞臣)은 을지수(乙支遂)의 17대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묘청(妙淸)의 난(亂) 때 공을 세웠다는 을지수, 을지달. 을지원에 대한 기록이 사기(史記)에 정확하게 전하지 않고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돈뫼(頓山)의 지명이 분명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정확성이 없다고 본다. 근대에 와서 돈씨는 193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평남(平南) 대동(大同)과 강서(江西)를 비롯하여 황해도(黃海道) 안악(安岳), 황주(黃州)에 36가구가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22가구, 1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41
  • 도씨(順天陶氏)
    순천 도씨(順天陶氏)

     순천(順天)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백제시대(百濟時代)에 함평군이었으나 신라(新羅) 때 승평(昇平)으로 고쳤으며, 996년(고려 성종 15)에  승주(昇州)로 하였다가 정종(靖宗) 때 승평군(昇平郡)이 되고 1309년(충선왕 1) 승주목(昇州牧)으로 승격하였다. 그후 순천부(順天府)로 강등되고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도호부(都護府)가 되었으며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순천군(順天郡)으로 개칭, 1949년 순천읍과 일부 면을 통합하여 순천시가 되고 종래의 순천군은 승주군(昇州郡)으로 개칭되었다.
     도씨(陶氏)는 한(漢)나라 초에 중국 제남(濟南 : 지금의 산동성 역성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 (姓氏)이며, 선계(先系)는 당요(唐堯 : 전설상의 인물인 성왕 요재를 일컫음)의 후예로 전해진다. 우리나라 도씨(陶氏)의 본관 (本貫)은 순천(順天)과 풍양(豊壤)을 비롯하여 청주(淸州), 유곡(楡谷 : 남원지방), 죽청(竹靑), 경주(慶州), 병양(兵陽), 밀양(密陽) 등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순천(順天)을 제외한 나머지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상계(上系)가 미상(未詳)하다. [순천도씨김포세보(順天陶氏金浦世譜)]에 의하면 순천 도씨의 시조(始祖)는 중국 진(晋)나라 사람인 도 단(陶丹)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 도 간(陶侃 : 257-332)이 진(晋)나라 무장(武將)으로 진(晋)왕조가 오(吳)를 평정하여 삼국(三國)을 통일(統一)하는데 훈공을 세웠다. 한편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유명한 진(晋)나라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무장 도 간(陶侃)의 증손(曾孫)이다.도연명의 본명은 도 잠(陶潛)이며 진나라 말기에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에서 출생하여 80여일간의 팽택현령(彭澤縣令)으로 관계(官界)를 사직하고 귀향(歸鄕)하여 전원생활(田園生活)로 유유자적이며, 산천초목(山川草木)과 조수(鳥獸)의 기담(奇談)을 기록한 [산해경(山海經)]을 읽고 밭을 갈기도 했으며 중국 문학사상 특이한 위치를  차지했다. 특히 그는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자처하며 평이하고도 자연스러운 조사(助辭)를 자주 사용하였고, 때로는 속어적(俗語的)인 표현으로 깊은 철학(哲學)을 담아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저술했다.
     순천 도씨(順天陶氏)는 시조 단(丹)으로부터 선계(先系)를 적어오다가 중간 계대(系代)를 실전(失傳)하여, 1296년(충렬왕 22) 원(元)나라 공주(公主)를 배행(陪行)하고 동래(東來)한 도구원(陶球元)이 순천(順天) 죽청리(竹靑里)에 세거(世居)하게 되었으므로 순천(順天)을 관향(貫鄕)으로 하고 구원(球元)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界)를 계대(繼代)하고 있다.
     가문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구원(球元)의 아들 정흠(正欽)이 고려조(高麗朝)에서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내고 개성부원군(開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손자 광세(匡世)는 소부소감(少府少監)을 역임하여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그밖의 인물로는 장령(掌令) 동명(東明)의 아들 천석(天錫)이 조선조에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제만(濟萬)은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로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된 태영(泰英 제만의 증손)과 함께 순천 도씨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근대에 와서 도씨(陶氏)는 1930년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경기도 김포와 개풍군(開豊郡) 일대를 비롯하여 황해도(黃海道)일원에 100여 가구(家口)가 살고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천(順天)외에도 풍양(豊壤), 경주(慶州), 청주(淸州), 남양(南陽)등 8본관의 도씨가 남한에 222가구, 943명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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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씨(豊川盧氏)
    풍천(豊川)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구을(仇乙) 또는 굴천현(屈遷縣)이었는데, 고려초에 풍주(豊州)로 고쳤으며 성종(成宗) 때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고 1018 년(현종 9)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조선 태조(太祖) 때 처음으로 진(鎭)을 두어 병마사(兵馬使)로써 지주사(知州事)를 겸하게 하였으며, 태종(太宗)이 풍천(豊川)으로 고쳤다. 그후 은율현(慇栗縣)과 합하여 풍율군( 栗郡)으로 개칭하였다가 1895년(고종 32) 송화군(松禾郡)에 합하였고, 별칭(別稱)으로 서하 (西河)라 불리기도 하였다.
     풍천 노씨(豊川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 수(盧 穗)의 셋째 아들 노 지(盧址)가 고려조(高麗朝) 에 출사하여 풍천백(豊川伯)에 봉해졌고, 그의 후손 유(裕)는 국자진사(國子進士)로 풍천( 川)에 세거(世居)한 연유로 후손 들이 유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풍천(豊川)으로 하게 되었다. 풍천 노씨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세종(世宗) 때 「치평요람(治平요覽)」의 편찬에 참여하여 무명을 떨친 숙동(叔仝)이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그의 손자 문명(文明)은 정여창(鄭汝昌)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형 우량(友良), 아우 우영(友英)과 함께 진사시(進士詩)에 합격하여 <삼주(三珠)>로 불리웠고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추천으로 현릉 참봉(顯陵參奉)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었다. 한편우명(友明)의 아들 4형재 중 둘째 진(鎭)은 30여 년 간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청백(淸白)하기로 이름났다.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선조조명신편(宣祖朝名臣編)>에 그에 대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전한다. 들에 밭이 없고 서울에 집이 없었다. 여러 고을의 원을 지냈고, 영호남에서 두번 감사를 역임하였으나 쓸쓸한 객사에서 손(客)이 와도 담요 한 장 없이 지냈으며, 출세를 즐기지 않고, 항상 은퇴의 뜻이 있어 벼슬길에 나온지 30년에 달하였으나 벼슬한 날수는 3년을 차지 못하였다. 특히 그는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었을 때도 남다른 척하지 않고 <인망(人望)이 높았다>고 격찬하였으며, 모나게도 살지 말되 또 시풍에 영합하여 때에 따라 겸하였기로 일찌기 이율곡도 처신하며 살지도 말라는 처세신조로 일생을 보냈다. 함양(咸陽)의 효자로도 8도에 소문 났었고, 당대의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선조(宣祖)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증조부 숙동(叔仝)과 함께 청백리(淸白吏)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그외 임진왜란 때 동래성(東萊城)을 지키다가 순절한 개방(蓋邦:계동의 6세손)과 인조(仁祖) 때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아 <팔미군자(八美君子)>의 별호(別號)가 붙었던 형하(亨夏:진의 증손)가 유명했고, 우 량(友良)의 6세손 전(군수홍기의 세째 아들)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어 군비 확장과 변방경비에 눈부신 업적을 남겨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낸 광두(光斗)와 함께 명문의 전통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천 노씨(豊川盧氏)는 남한에 총 7,978가구, 33,3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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