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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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順天 김씨 金氏
    순천順天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64
  • 泗川 김씨 金氏
    사천泗川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52
  • 白川 김씨 金氏
    배천白川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54
  • 권씨(醴泉 權氏)





     예천 권씨(醴泉 權氏) 

       시 조: 휘(諱):권 섬(權 暹), 예빈경(禮賓卿)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98
  • 곡씨(沔川 曲氏)

     면천 곡씨(沔川 曲氏)

      곡씨(曲氏)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하락(河洛:황하강 남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하·은·주나라의 도읍지) 지방(地方)에 연원(淵源)을  두며 당(唐)나라  대종(代宗:당나라의 제 8대  황제, 재위기간:763∼779) 때 협주(陜州) 안읍(安邑) 사람인 곡  환(곡 환) 장군(將軍)의 후예(後裔)로 전(傳)한다. 
     우리나라 곡씨(曲氏)는 고려초기(高麗初期)의 명신(名臣)으로 서기 918 년(태조 1) 내봉사(內奉史)로 있다가 평찰(平察)에 오른 곡긍회(曲矜會)가 최초(最初)의 인물(人物)이 된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문헌(文獻)을  보면 곡씨(曲氏)의 본관(本貫)은 면천(沔川)과 용궁(龍宮)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용궁  곡씨(龍宮曲氏)는 당(唐)나라에서 귀화(歸化)한 것으로 전(傳)한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정확(正確)한 계대(系代)는 상고(詳考)할 수 없고, 서기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에서 16가구(家口) 74명(名)이 나타나 우리나라  전체 성씨(姓氏) 258성(姓) 중 209위(位)였다가 1975년 조사(調査)에서는 249성(姓) 중 210위(位)였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576
  • 녕 견씨(川寧 堅氏)





     천녕 견씨(川寧 堅氏)

     천녕(川寧)은 경기도(京畿道) 여주군(驪州郡)에 속해있던 옛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술천현(述川縣) 또는 성지매(省知買)인데 통일(統一)신라(新羅) 때 기천군(沂川郡)으로 고쳤다가 고려(高麗)초(初)에 천녕현(川寧縣)으로 개칭하여 광주(廣州)에 속하였다. 
     그후 조선(朝鮮) 예종(睿宗 : 제 8대 왕, 재위기간 : 1468 ~ 1469) 때 와서 여주(驪州)로 병합(倂合)하여 그 지역을 직촌(直村)이라 하였다.

     견씨(堅氏)의 본관(本貫)은 천녕(川寧)을 비롯하여 사량(沙梁 : 경기도 수원지방), 김포(金浦), 충주(忠州) 등이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으며,
     모든 견씨(堅氏)의 연원(淵源)은 조선개국공신(朝鮮開國功臣) 견 권(堅 權)에 두고 있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서 두각을 나타낸 견 권(堅 權)은 서기 918 년(태조원년) 태조(太祖 : 왕 건)가 왕위(王位)에 오르는 데 공(功)을 세워 염 상(廉 湘), 김 낙(金 樂) 등과 함께 개국이등공신(開國二等功臣)에 책록되었고, 921년(태조 4) 달고적(達姑狄 ; 말갈 부족의 하나) 170여 명이 함경남도 등주(登州)를 거쳐 신라(新羅)의 북변을 침범하려 할 때 이를 쳐서 크게 패배시켰다. 
     또한 936년(태조 19) 태조(太祖)가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후백제(後百濟)의 신 검(神 劒)을 칠 때 대상(大相 : 고려초 문무관계의 하나)으로 견 훤(甄 萱) 등과 함께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2만을 인솔하여 좌익(左翼)으로 참전, 후백제(後百濟)를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功)을 세웠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견 권(堅 權)을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천녕(川寧)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무신(武臣)들을 배출시켰다.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人物)로는 영군장군(領軍將軍 : 군대를 통령하는 정4품 무관 벼슬)을 지낸 금(金)과 장군(將軍) 일(一)이 대표적이며, 태조 원년에 창부경(倉部卿 : 전곡을 맡아보던 관청의 으뜸 벼슬)에 오른 수(守)와 사과(司果) 성귀(成貴)는 진사(進士) 희복(希福)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견씨(堅氏)는 남한(南韓)에 총 99가구, 4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77
  • 강씨(信川 康氏)

    신천(信川)은 황해도(黃海道) 중앙부(中央部)에 위치하며, 단군신화(檀君神話)에 담긴 아사달산(阿斯達山) 당장경(唐藏京)이 있었던 곳으로 한사군(漢四郡)을 거쳐 고구려(高句麗) 시대에는 승산군(升山郡)이었다. 
     그후 고려(高麗) 초(初)에는 신주(信州)로 불리웠고 1413년(태종 13)에 지금의 신천(信川)으로 개칭되었다.
     우리나라 강씨(康氏)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경조(섬서성 남부 장안현 부근 일대를 차지하는 행정구역) 출신인 주(周)나라 왕족(王族) 강 숙(康 叔)이며 그의 둘째 아들 강 후(康 侯)의 67세손 성골장군(聖骨將軍) 강호경(康虎景)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러나 강씨(康氏)의 실질적인 시조(始祖)는 호경(虎景)의 14세 손으로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신성부원군에 봉해진 충렬공(忠烈公) 강지연(康之淵)이다. 
     강씨(康氏)의 본관(本貫)은 신천(信川), 곡산(谷山), 재령(載寧)을 비롯하여 충원(忠原), 진주(晋州) 등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전하나 현존(現存)하는 강씨(康氏)는 신천(信川)과 곡산(谷山), 재령(載寧) 3본(本)이 대종(大宗)을 이룬다. 
     <신천강씨대동보(信川康氏大同譜)>에 의하면 중시조(中始朝) 지연(之淵)은 고려 명종(明宗 : 고려 제19대왕, 재위기간 ; 1170 ~ 1197)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고군의 개경(開京) 침략으로 이듬해 강화도(江華島)로 천도(도읍을 옮김) 할 때 왕(王)을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라 신성(信城 : 신천의 옛 이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신천(信川)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지연(之淵)의 6세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을 파조로 하는곡산파(谷山派)와 13세손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 득룡(得龍)을 파조로 하는 재령파(載寧派)로 크게 갈리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낸 영암공(瀛巖公) 영(永)을 제주 강씨(濟州康氏)의 입도시조(入島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각 파별(派別)로 대표적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중시조(中始朝) 지연(之淵)의 6세손 윤성(允成)이 고려 충혜왕(忠惠王 : 고려 제 28대왕, 재위기간 : 1330 ~ 1332, 복위 1339 ~ 1344)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이부시랑(吏部侍郞)등을 거쳐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 문하부의 정 2품 벼슬)에 올랐으며, 그의 딸이 이성계(李成桂)의 비(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방번, 방석과 경순공주를 낳았음)가 되어 상산(象山 : 곡산의 옛이름)부원군(府院君)에봉해짐으로 후손들이 곡산(谷山)으로 관향(貫鄕)을 삼았다. 

     한편 재령파(재載寧派)의 파조(派朝)인 안정공(安靖公) 득룡(得龍)은 중시조 지연의 8세손으로 고려 공민왕(恭愍王 : 고려 제 31대왕, 재위기간 ; 1351 ~ 1374) 때 삼사우사(三司右使 : 국가 전곡의 출납과 회계를 맡아보던 정 2품 벼슬)를 지내다가 
      1392년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관악산(冠岳山) 
    의상대(義湘臺)에 올라가 송경(松京 : 개성)을 향해 통곡하니 이 때부터 이곳은 연주대(戀主臺)라 불리웠고, 태조(太祖)가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그를  안릉(安陵 : 재령의 옛 이름) 부원군(府院君)에 봉하고 안정공(安靖公)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下賜)했다. 

     또한 제주 입도시조(入島始祖)인 영암공(瀛巖公) 영(永)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사촌 오라버니로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냈으며, 왕자의 난(조선 개국 초 태조의 아들 방원과 방간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으킨 두 차례의 난)이 일어나자 피신하여 제주(濟州)에서 일생을 마침으로 제주 강씨(濟州康氏)의 입도시조(入島始祖)가 되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고려의 무신(武臣)인 조(兆)가 도통사(都統使 : 각 도의 군사를 통솔하는 무관직 벼슬)를 지냈으며, 증(拯)은 음보(蔭補)로 벼슬에 등용되어 예종(睿宗 : 고려 제 16대왕, 재위기간 ; 1105 ~ 1122)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후 강령 강씨(康翎康氏)로 분적(分籍)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증손(曾孫) 순(純)이 1453년(단종 1) 회령 부사(會寧府使)를 거쳐 판의주목사(判義州牧使)를 지낸 뒤 1457년(세조 2)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明) 나라에 다녀왔으며, 1467년(세조 12)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홍원(洪原), 북청(北靑), 만령(蔓嶺) 등지에서 공(功)을 세워 난이 평정되자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으로 신천부원군(信川府院君)에 봉해졌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씨(康氏)는 남한(南韓)에 총 16,763가구, 69,77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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