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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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씨(舜氏)
    순씨(舜氏)

     순씨(舜氏)는 중국 하동(河東:산서성 태원부의 송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전해지는 본관은 임천(林川) 단본(單本)이다.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라도 순천(順天)·광양(光陽)·부안(扶安), 충청도 연기(燕岐) 등지에 8가구가 분포되어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54가구, 1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78
  • 수씨(洙氏)
    수씨(洙氏)

     수씨(洙氏)는 옛 문헌(文獻)에는 나타나지 않는 성씨로서 연원(淵源)과 선계(先系)에 대해서는 고증할 자료가 없어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전해지는 관향(貫鄕)은 강릉(江陵)과 강남(江南) 2본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서울을 비롯한 강원도 등지에 40여명이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22가구, 14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12
  • 수씨(水氏)
    수씨(水氏)

     수씨(水氏)는 중국 오흥(吳興:절강성 전당도의 한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본래 공공씨(共公氏)의 후예(後裔)로 전하며 명(明)나라 때 은현인으로 어사(御史)를 지낸 수가윤(水佳允)이란 사람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수씨(水氏)의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없어 상고(詳考)하지 못하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報)」와「만성보(萬姓譜)」등의 기록에는 수씨의 본관이 운제(雲梯:고산지방)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 강원도 김화(金化)에 2가구, 함북 온성(穩城)에 1가구 등 3가구가 나타났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26가구, 1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50
  • 송씨(松氏)
    송씨(松氏)

     "조선씨족통보"를 보면 松씨는 中國 동완[(東莞):지금의 광동성]에서 계출(系出)되었고, 청나라 덕종때 만주인(滿州人) 송주[字:수천(壽泉)]이 나타난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유리왕~비류왕]때 송 양(松 讓)의 딸이 왕비가 되자 아버지의 松字로 성씨를 삼았다고 한다.
     또한 최근 확인된 것으로 재일동포인 사람이 어머니를 찾아 한국 부산(부산시 중구 충무동 3가 28번지)에 정착하여 호적을 올렸는데, 일본에서 부르던 松씨에 이름 송길만(松吉晩)으로 입적했다. 즉 松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90
  • 송宋
    송宋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55
  • 평해 손씨(平海孫氏)
    시  조 휘(諱): 손 순(孫 順), 문효공(文孝公)
            묘  소: 경북 월성군 건천읍 모량리
     일세조 휘(諱):손익담(孫翼淡), 평해군(平海君)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15
  • 청주 손씨(淸州孫氏)
    시  조 휘(諱): 손 순(孫 順), 문효공(文孝公)
            묘  소: 경북 월성군 건천읍 모량리
     일세조 휘(諱):손필영(孫弼榮), 청성군(淸城君)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18
  • 안동·일직 손씨(安東·一直孫氏)
    시  조 휘(諱): 손 응(孫 凝)
       중시조 휘(諱): 손 간(孫 幹), 장군(將軍)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03
  • 비안,병산 손씨(比安,屛山孫氏)
    비안,병산 손씨(比安,屛山孫氏)

     비안(比安)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군(義城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비옥(比屋)과 안정(安貞) 두 현(縣)의 합명(合名)인데, 비옥현(比屋縣)은 본래 신라(新羅)의 아화옥현(阿火屋縣)을 경덕왕(景德王) 때 비옥현으로 개명하였다. 한편 안정현(安貞縣)은 본래 신라의 아시혜현(阿尸兮縣)을 경덕왕이 안현현(安賢縣)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기에 안정현으로 개칭한 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두 현을 합해서 비안현이라 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그 후 현서면(縣西面)은 예천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의성군에 병합되어 지금은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이 되었다.
     비안 손씨(比安孫氏)는 서라벌(徐羅伐) 육부촌장(六部村長) 구례마(俱禮馬)의 후손(後孫)으로 전하나 고증(考證)할 자료가 없으며, 시조(始祖)는 고려 때 절도사(節度使)를 역임한 손을구(孫乙口)로 보첩(譜牒)에 기록되어 있다.
     「병산손씨세보(屛山孫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때 약관(弱冠)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북변(北邊)에 침입한 외적(外賊)을 토벌(討伐)하는 데 훈공(勳功)을 세워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다고 한다. 그러나 병란(兵亂)으로 인하여 상계(上系)의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조선 세조(世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도총관(都摠管)을 지내고 비안(比安)의 도락촌(道樂村)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한 안무(安懋)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본관(本貫)을 비안(比安)으로 하게 되었다. 그 후 비안 손씨는 도총관 안무의 아들 3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문(家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조선 세조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평시서령(平市署令)을 지낸 상(庠)은 목민관(牧民官)에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대서성 (大司成)을 지낸 식(湜: 일세조 안무의 손자)과 문과에 급제하고 도사(都事)를 역임한 조의 형제가 유명했다.
     한편 음관(蔭官)으로 부사직(副司直)에 올랐던 승렬(承烈)의 아들 절은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냈으며, 증손 윤업(胤業)이 뛰어났다. 일찍이 고응경(高應擎)의 문하(門下) 에서 학문을 닦았던 윤업은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생인 우 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 준(李 埈)등과 함께 도의(道義)를 교유하며 예학(禮學)을 강론(講論)하여 크게 문명 (文名)을 떨쳤으며, 그의 둘째 아들 계창(啓昌) 이 봉렬대부(奉烈大夫)로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에, 셋째 이창(以昌)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각각 추증되어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그 외 익진(翼振: 극창의 현손)의 아들 흥조(興祖)가 순조(純祖) 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이르러 벼슬을 사임하고 향리(鄕里)로 돌아와 입재(立齋) 정종로 (鄭宗魯), 귀와(龜窩) 김 굉(金 宏) 등과 더불어 예학(禮學)을 강론(講論)하며 여생을 보냈고, 통덕랑(通德郞) 덕항(德恒)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쳐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비안 손씨(比安孫氏)는 남한(南韓)에 총 134가구, 5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50
  • 밀양 손씨(密陽孫氏)
    밀양 손씨(密陽孫氏)

     밀양(密陽)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원래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하였으며,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제23대 왕, 재위 기간 : 514∼ 540) 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때 와서는 995년(성종 16)에 밀주(密州)로 하였고, 1390년(공양왕 2) 밀양부(密陽府)로 승격, 그 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밀양군(密陽郡)으로 개칭하였다.
     밀양 손씨(密陽孫氏)는 서라벌(徐羅伐) 육부촌장(六部村長)의 한 사람인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의 원손(遠 孫)으로 효자보응(孝子報應)의 주인공인 국효(國孝) 손 순(孫 順)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는 신라 모량리(牟梁里: 월 성군 건천읍) 출신으로 아버지 학산(鶴山)이 세상을 떠나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면서 노모(老母)를 봉양했는데, 그의 어린아들이 항상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이를 민망히 여겨 아내에게 말하기를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려우니 아이를 땅에 묻어 버리고 어머님의 배를 부르게 해야 하겠소" 하고는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모량리 서북쪽) 기슭에 가서 땅을 파고 묻으려다가 석종(石鐘)을 얻었다. 그의 아내가 "이 종을 얻음은 이 아이의 복(福)인 듯 하니 묻어서는 안 되겠습니다"하여, 아이를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석종을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두드렸더니 신기하리만큼 은은한 종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 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 멀리 들리니 빨리 이를 알아보오" 하였다. 왕의 사자가 그의 집에 가서 알아보고 자세히 왕에게  아뢰었다. 이 일을 알게 된 흥덕왕은 "옛날 한(漢)나라 곽 거(郭 巨)가 아들을 묻자 하늘이 금솥을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들을 묻자 땅에서 석종이 솟아나왔으니 천세의 효와 후세의 효를 천지가 함께 살피신 것이다"하고는 집 한채를 내리고 해마다 메벼 50석을 주어 지극한 효도(孝道)를 표창했다고 하는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진다. 그 후 시조 순(順)의 손자 익감(翼減)이 신라조(新羅朝)에서 관직을 지내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밀양(密陽)으로 하게 되었으며, 중흥조(中興祖) 긍훈(兢訓 : 시조의 7세손)이 고려 태조(太祖)와 함께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는 데 훈공을 세워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 에 오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특히 긍훈(兢訓)은 추화산성(推火山城)에 거점을 두고 비적(匪賊)을 방어하는 데 많은 위훈을 남겼으며, 신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세운 대작갑사(大鵲岬寺)에서 화랑도(花郞道)의 근본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귀산(貴山)과 추항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전통적인 사상교육을 보위하는 데 앞장섰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고려 때 천안부 판관(天安府判官)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른 변(  : 광리군 긍훈의 9세손)과 평장사(平章事) 효려(孝麗)가 유명했으며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빈은 병부 상서(兵部  尙書)에 올라 변방에 침입한 여진족을 격퇴시켜 온성(穩城)에 전승비(戰勝碑)가 세워졌고, 1340년(충혜왕 복위 1)에 일어난 조 적의 반란 때는 이부 상서(吏部尙書)로 이를 토평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집현전 태학사(集賢殿 太學士)와 정당문학(正堂文學)·상장군(上將軍) 등을 거쳐 사도(司徒)에 오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한편 현감 중견(仲堅)의 증손 책(策)은 고려 말의  절신(節臣)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수주 목사(樹州牧使)에 이르러 조선 개국(開國)에 항거하다가 처형되었으며, 충혜왕(忠惠王)을 원(元)나라에 호종(扈從)했던 수경(守卿)은 추성선력익대정원공신(推誠宣力翊戴定遠功臣)으로 의창부원군(義昌府院君)에 봉해지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와서는 문종(文宗) 때 별시문과(別試文 科)에 급제한 서륜( 倫)이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1457년(세조 3) 순흥(順興)에 유배중인 금성대군(錦城大君) 및 장인인 순흥 부사 (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꾀하는 격문을 돌리다가 죽음을 당했다.
     현감 민(敏)의 아들 비장(比長)은 성종(成宗) 때 등과하여 시무사조(時務四條)를 왕(王)에게 상소했으며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監)」을 찬진한 후 공조 참의(工曹 參議)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에 이르렀고, 홍록(弘祿)은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實錄)을 보존케 하여 역사(歷史)의 공신(功臣)으로 유명했다. 석학(碩學) 이퇴계(李退溪)의 문인(門人)으로 학명(學名)을 떨쳤던 영제(英濟)는 선조(宣祖) 때 도산서원(陶山書院) 건립 때 사재(私財)를 털어 조력(助力)했으며, 덕심(德沈)과 덕순(德淳)은 임진왜란 때 영천(永川)의 창암(倉巖) 전투에서 공(功)을 세웠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이순신(李舜臣)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안골포(安骨浦) 전투에서 순절한 응록(應祿)과 광해군(光海君) 때의 난정을 개탄하고 향리로 돌아가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던 성리학자(性理學者) 기양(起提)이 뛰어났으며, 상륭(尙隆)은 숙종(肅宗) 때 학행(學行)과 효성(孝誠)으로 명망이 높았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33인의 민족 대표를 주도하여 3·1운동에 참여했던 병희(秉熙)가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敎主)가 되어 구한말(舊韓末)과 일제의 암흑기로 이어지는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망국(亡國)의 민족혼(民族魂)을 혁신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선교사이자 항일투사인 정도(貞道)는 만주로 건너가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3·1 운동 후에는 상해(上海) 로 망명하여 안창호(安昌浩)의 흥사단 (興士團)에 참여하여 차이석(車利錫)·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흥사단보(興士團報)」를 간행했으며 만주 길림(吉林)에서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바쳐, 1935년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앞장 섰던 일민(一民)과 함께 밀양 손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여 밀양 손씨(密陽孫氏)는 남한(南韓)에 총 58,367가구, 243,4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49
  • 경주 손씨(慶州孫氏)
    경주 손씨(慶州孫氏)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 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 )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호를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경주 손씨(慶州 孫氏)는 신라의 전신(前身 )인 서라벌(徐羅伐)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가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 봄 왕 (王)으로부터 손씨의 성(姓)을 하사(下賜)받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하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신라 흥덕왕(興 德王) 때 살신성효(殺身成孝)의 주인공인 국효(國孝) 손 순(孫 順)을 손씨의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실제 계보상 경원(敬源)의 증손 사성(士晟 : 등의 맏아들)이 조선 세종(世宗) 때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참여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욱(旭)과 소(昭)의 형제(兄弟)가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功)을 세워 가문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1459년(세조 5) 김종직(金宗直)과 함께 문과(文科)에 급제 했던 소(昭)는 주부(主簿)와 병조 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한 후 형인 영북 어사(嶺北御史) 욱(旭)과 함께 이시애의 난 때 평정에 참여하여 욱은 함흥(咸興)에서 순절하였고, 그는 난을 평정한 후 적개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으로 책록되어 내섬시정(內贍寺正)에 특진, 성주 목사(星州牧使)와 공조 참의 (工曹參議)를 거쳐 계천군(鷄川君)에 봉해졌으며, 안동 부사(安東府使)와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역임하며 특히 문장(文章)과 글씨로 명망이 높았다. 탁월한 문장(文章)과 경륜(經倫)에 밝았던 중돈(仲暾)은 소(昭)의 둘째 아들로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고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를 시작으로 여러 청환직 (淸宦職)과 양산 군수(梁山郡守)를 지낸 후 사복시정 (司僕寺正)에 올라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으로 간관(諫官)들이 거의 다 쫓겨날 때 파직당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복직,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주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그의 공덕을 추모했으며, 1517년(중종 12)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공조(工曹)와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도승지(都承旨)를 3번, 대사간(大司諫)을 4번, 경상(慶尙)·전라(全羅)·충청(忠淸)·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를 지내고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 외 정언(正言)을 지낸 회종(會宗), 부사(府使) 만웅(萬雄), 현감(縣 監) 경익(景翼), 감찰(監察) 회경(會慶), 이조 좌랑(吏曹佐郞) 병주(秉周),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상일(相馹)·기영(耆永) 등이 유명했고, 번(蕃)은 전시문과(殿試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지내고 편수사(編修事)가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중종(中宗) 때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다.
     한편 군자감(軍資監)의 봉사(奉事)를 지낸 윤원(潤源)은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창암(倉巖) 전투에서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고 장렬하게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家統)을 세웠으며, 영곤(永坤)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우참찬(右參贊) 중돈(仲暾)의 현손(玄孫) 종로(宗老)는 광해군(光海君) 때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 : 선조의 계비, 영창대군의 어머니)가 서궁(西宮)에 유폐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남포 현감(藍浦縣監)을 지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허 완(許 完)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이천(利川)의 쌍령(雙嶺) 싸움에서 적과  대전하다가 순절하여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추증되었고 정조(正祖) 때 왕명(王命)으로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져서 진해 현감(鎭海縣監) 식(湜), 부사(府使) 종책(鍾策), 군수(郡守) 병수(秉秀) 등과 함께 경주 손씨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 손씨(慶州孫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57가구,  81,55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 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49
  • 평산 소씨(平山邵氏)
    평산 소씨(平山邵氏)

     평산(平山)은 황해도(黃海道)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화실(多和悉) 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영풍(永豊)으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초에 평주(平州)로 하였고 1272년(원종 13) 부흥군(復興郡)에 합쳤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다시 복구하였다. 1413 년(태종 13) 평산으로 바꾸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으며, 고종(高宗) 때 군이 되었다. 소씨(邵氏)는 중국(中國) 박릉(博陵: 산동성 동림도 박평현의 제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주(周)나라 소공(召公)의 후예(後裔)가 소(召)자에다 우부방변(阜)을 붙혀서 성(姓)을 소씨(邵氏)로 삼았다고 전한다. 소씨의 본관(本貫)은 평산(平山)·익산(益山)·전주(全州)·경주(慶州)·서촉(西蜀)·남양(南陽) 등 무려 15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고 있으나 평산을 제외한 나머지 관항(貫鄕)에 대해서는 계대(系代)가 미상(未詳)하다. 평산 소씨(平山邵氏)의 시조(始祖) 소 옹(邵 雍)은 중국에서 영천단련추관(潁川團鍊推官)을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신안백(新安伯)에 봉해졌으며, 그 후 후손 태보(台輔)가 고려 선종(宣宗)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상주국(上柱國)에 이르러 간신 이자의(李資義)가 반란을 일으키자 장사(壯士) 고의화(高義和)를 시켜 그 일당을 주살케 하고 사전에 난을 평정(平定)시킨 공으로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가 되었으며 숙종(肅宗) 때 궤장을 하사(下賜)받았다. 명종(明 宗) 때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를 지낸 광빈(光賓)이 유명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를 역임한 은백(殷伯)과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경휴(敬休)가 뛰어났고, 흥수(興秀)는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낸 한벽(漢璧), 장려원정(掌隷院正) 덕철(德哲)과 함께 평산 소씨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소씨(邵氏)는 남한(南韓)에 총 514가구, 2,3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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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 소씨(晋州蘇氏)
    진주 소씨(晋州蘇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리웠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가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康州)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소씨(蘇氏)는 풍이(風夷)의 후손(後孫) 적제축융(赤帝祝融)이 기원전 4241년 풍주 배곡(風州倍谷)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전국토에 무궁화(蘇:부소나무)를 심어 소(蘇)를 성(姓)으로 삼고,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 그 후 복해(復解)의 61세손 소 풍(蘇 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지금의 길림성)의 하백(河伯:하백)에 봉해졌고, 그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신 유(申 有), 진 기(陳 岐) 등과 더불어 진한(辰韓)을 세웠으며, 백손(伯孫)의 29세손 알천은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 상대등(上大等)을 지내고 660년(태종 무열왕 7) 3월 진주 구시동(九枾洞:지금의 상대동)에 이거(移居), 경(慶)으로 개명(改名)하고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문호(門戶)를 열었다. 소씨(蘇氏)의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남원(南原), 진강(鎭江:강화지방) 등 12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세거 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시조의 손자 복서(福瑞)가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 청주 총관(靑州摠管)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억자(億滋)는 성덕왕(聖德王) 때 한주 총관(漢州摠管)을 역임했고, 11세손 격달(格達)이 고려 초에 대장군(大將軍)에 오르는 등 직계(直系)로 구세구장군(九世九將軍)이 배출되어 크케 무명(武名)을 떨쳤다. 한편 청주 도독(靑州都督)을  지낸 목(穆:시조의 8세손)은 문장이 뛰어나 「역대제왕고(歷代帝王考)」, 「유소국사(有蘇國史)」,  「유당견문기(有唐見聞記)」, 「동이씨족원류(東夷氏族源流)」를 저술(著述)했고, 그의 아들 은(恩)은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웅주 도독(熊州都督)을 지내고 저서(著書)로 「진한세가(辰韓世家)」와  「삼소변설(三蘇辨說)」 등을 남겨 문(汶:은의 아들)과 함께 「소씨삼대문장(蘇氏三代文章)」으로 일컬어졌다. 고려 문종(文宗) 때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과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올랐던 계령(繼 :격달의 현손)은 헌종(獻宗)이 즉위하여 딸이 회순왕후(懷純王后:헌종의 비)로 간택되자 국구(國舅)가 되어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광보(光輔)와 경보(景輔)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했고, 경보의 아들 세린(世麟)은 인종(仁宗)에게 <선무팔조(先務八條)>를 상소하여 백성들에게 충신효제(忠信孝悌)와 예의렴치(禮義廉恥)를 가르치도록 건의했다.
     그 외 고려 때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라 무신정치(武臣政治)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던 경손(慶遜:세린의 손자)과 고종(高宗) 때 몽고병(蒙古兵)과 싸우다가 순절한 함이 뛰어났으며, 정의대부(政議大夫)로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에 올랐던 희철(希哲)과 정당문학(政堂文學) 문철(文哲)의 형제가 유명했다.
     공민왕(恭愍王) 때 개성윤(開城尹)을 지내며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했던 을경(乙卿:희철의 증손, 판도판서 약우의 맏아들)과 정몽주(鄭夢周)의 고제(高弟)로 사재감 소윤(司宰監少尹)을 지낸 천(遷)은 고려말에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손자 현손(玄孫)은 성종(成宗) 때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지냈다. 한편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낸 자파(自坡)의 일곱 아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크게 위세(威勢)를 떨쳤다. 1507년(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둘째 아들 세량(世良)은 용담 현령(龍潭縣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고 이도(吏道)를 쇄신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으며, 삼사(三司)의 벼슬을 두루역임한 후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나 부모(父母)의 봉양을 위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내려갔다. 그의 아우 세양(世讓:자파의 다섯째 아들)은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주서(注書), 정언(正言) 등을 거쳐 수찬(修撰)에 올라 단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하여 현릉(顯陵)에 이장(移葬)케 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이조 정랑(吏曹正郞), 사인(舍人), 교리(校理), 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치고 사성(司成)이 되어 영접사(迎接使) 이 행(李 荇)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명(明)나라 사신(使臣)을 맞아 시문(詩文)으로 응답하여 문명(文名 )을 떨쳤다. 그후 병조(兵曹)와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우찬성(右贊成)이 되어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겸하여 성주(星州)의 사고(史庫)가 불타자 왕명으로 춘추관(春秋館)의 실록(實錄)을 등사해서 봉안했으며, 인종(仁宗)이 즉위하여 대윤(大尹)인 윤 임(尹任) 일파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가 명종(明宗)이 즉위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윤 임 등이 제거된 후 다시 기용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지내다가 전라도 익산(全羅道益山)에 은거했다. 특히 그는 신용개(申用漑), 남 곤(南 袞) 등과 더불어 중종조의 7대 문형(文衡)인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이 높고 율시(律詩)가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상원 군수(祥原郡守)로 부임하여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던 세영(世榮 : 자언의 아들)은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으며, 상진(尙眞)은 임진왜란 때 성주(星州)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진주성(晋州城)에서 순절한 제(濟)와 함께 의절(義節)의 가통(家統)을 세웠고, 행진(行震 : 진산의 이현 싸움에서 순절)의 아들 동(仝)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부제학(副堤學) 봉(逢)의 손자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진력했던 영복(永福)이 천문(天文), 지리(地理), 경사(經史), 병법(兵法), 의약(醫藥) 등에 정통하여 명성(名聲)을 떨쳤으며, 만선(萬善 : 세공의손자) 의 아들 동도(東道)는 청북어사(淸北御史)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효종(孝宗)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순절한 응무(應武)와 함께 이름을 날렸고, 송시열(宋時烈)의 고제(高弟)로 바른말을 잘 했던 두산(斗山)은 권신들의 비위에 거슬려 외직으로만 전전하다가 숙종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나갔으나 기사환국 (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배척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 외 수구(洙 ), 여유(汝由), 휘식(輝植), 휘면(輝冕), 승규(昇奎) 등이 문장과  도학(道學)으로 조선의 학문을 빛냈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는 휘태(輝泰)와 천술(千述), 진형(鎭亨), 진우(鎭佑), 휘옥(輝玉), 병원(秉元) 등이 구국의 충정(忠貞 )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진주 소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소씨(晋州蘇氏)는 남한(南韓)에 총 9,191가구, 38,8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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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씨(星氏)
    성씨(星氏)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 알려진 성씨로 어디에 관향을 두고 계출(系出) 됐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때 당시에는 전남 여수읍 동리에 성명언(星明彦) 1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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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녕 성씨(昌寧成氏)
    창녕 성씨(昌寧成氏)

     창녕(昌寧)은 경상남도(慶尙北道) 북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比斯伐)인데 555년(진흥왕 16) 하주(下州)라 칭하고 경덕왕(景德王) 때는 화왕군(火王郡)으로 개칭하였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창녕(昌寧)으로 고치고 1018 년 (현종 9) 밀성군(密城郡)에 귀속되었다가 인조(仁祖) 때 현(縣)으로 복귀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었고, 1914년 영산군(靈山郡)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고려 때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 중윤(戶長中尹)을 역임한 성인보(成仁輔)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명종(明宗) 때 사람으로 고종(高宗 : 추정) 때 창성(創姓)한 것으로 전하며, 창녕읍(昌寧邑)에서 서북쪽으로 15리쯤 떨어진 대지면 모산리 맥산(大地面牟山里麥山)에 위치한 그의 묘(墓)에 대한 일화가 아래와 같이 전한다. 어느 해 정월 초 송경(松京)에서 지방관리의 하례(賀禮)모임이 있어 그 곳에 갔다가 병사(病死)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있던 그의 아들 송국(松國)은 아버지의 시신(屍身)을 등에 엎고 울며 천리 길 고향 창녕으로 내려오다가 현풍현(玄風縣)에 이르러 해가 기울었다. 지친 몸으로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아침이 되었고, 밤사이 많은 눈이 내렸는데, 시신의 주위에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져 있어 발자국을 따라 쫓아가 보니 지금의 묘자리에 이르러 그쳐 있었다. 신통한 것은 온 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혀 있었는데도 묘자리 넓이만큼은 눈이 녹아 있어 그 자리에 묘를 쓰게 되었다. 그후 창녕 성씨는 시조의 손자 공필(公弼)·한필(漢弼) 대(代)에서 크게 두 계통으로 갈라져서 6세에 내려와 기(紀 :  판윤 한충의 아들, 판서를 역임)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를 포함하여 13파로 분파(分派)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가문으로 명성을 떨쳐 영남지방의 명문(名門)으로 일컬어졌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의 현손(玄孫) 여완(汝完 : 충랑 군미의 둘째 아들)이 공민왕(恭愍王) 때 민부 상서(民部尙書)를 거쳐 검열(檢閱)을 지내고 우왕(禑王) 때 정당문학(正堂文學)으로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태조 1)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졌음을 알고 포천(抱川)의 왕방산(王方山) 아래에 은둔하고 스스로 왕방거사(王方居士)로 불렀으며, 조선이 개국(開國)한 후 이태조(李太祖)는 전조(前朝)의 원로(元老)라 하여 벼슬과 품계를 내렸으나 끝내 사양하며 아들 석린(石璘)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임금을 잘 섬겨라 . 나는 왕씨(王氏)의 구신(舊臣)이니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며 절의(節義)를 지켰다. 이성계(李成桂)와 옛 친구로서 조선 창업(創業)에 공(功)을 세웠던 석린(石璘 : 창녕부원군 여완의 맏아들)은 정종(定宗) 때 평양부윤(平壤府尹)을 거쳐 문하 우정승(門下右政丞)이 되고 창녕백(昌寧伯)에봉해졌으며, 태종 때 좌명삼등공신(左命三等功臣)으로 창녕부원군에 진봉되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석린의 아우 석용(石瑢 : 대제학을 역임)·석연(石  : 대사헌·우정승·호조 판서를 역임)·석번(石  : 낭장을 역임) 등도 크게 현달하여 이들이 조선 초기에 명문의 기틀을 마련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석용(石 )의 인맥으로는 그의 아들 달생(達生)이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세종(世宗) 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거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냈다. 그의 아들로 세종 때 무과에 급제한 승(勝)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을 거쳐 단종(端宗) 때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이르렀고 그후 고명(誥命)을 가져 온 명나라 사신의 송별연이 창덕궁(昌德宮) 에서 개최될 때 도총관(都摠管) 유응부(兪應孚)와 함께 운검(雲儉)을 쥐게 되는 기회에 세조(世祖)를 칼로 베고 상왕 단종의 복위를 계획했으나 갑자기 운검을 그만두라는 세조의 명으로 거사가 어렵게 되자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가 김 질(金 質)의 밀고로 복위 음모가 발각되어 아들삼문(三問)·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 손자 등과 더불어 죽음을 당했다.
     승의 맏아들 삼문은 홍주(洪州) 노은동(魯隱洞 : 적동리) 외가(外家)에서 태어났는데, 출생할 때 "났느냐" 하는 소리가 세 번 들렸기 때문에 이름을 삼문(三問)으로 지었다고 한다. 1438년(세종 20)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을 거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급제한 후 집현전(集賢殿)에서 학사(學士)·수찬(修撰) 등을 역임하며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독(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 을 편찬하고, 한글 창제를 앞두고 당시 요동(遼東)에 유배되었던 명(明)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 찬(黃瓚)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音韻)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서리발 같은 절의와 함께 그 공로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 와 황보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1455년(세조 1)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박팽년(朴彭年)·이 개(李 塏)·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원)·유응부 (兪應孚)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거사 전에 탄로가 나서 아버지 승, 3형제의 동생, 아들 원(元)·맹첨(孟瞻)·맹평(孟平)·맹종(孟終) 4형제와 더불어 모두 극형에 처해졌다. 그가 일찌기 사신(使臣)으로 북경(北京)에 갔다가 절신·백이(伯夷)·숙제(叔劑)의 사당(祠堂)을 참배하고 시(詩)를 쓰기를, 말머리를 두들기며 고르다고 말한 것은 (當年叩馬敢言非) 대의가 당당하여 일월 같이 빛났건만 (大義堂堂日月輝) 풀나무도 주나라의 비 이슬에 자랐는데 (草木亦霑周雨露) 부끄럽다, 그대 어찌 고사리를 먹었는고 (愧君猶食首陽薇) 하여, 그 곳 사람들이 보고 충절이 있는 사람으로 알았다 한다. 거사가 탄로나서 세조가 친국(親鞫)을 할 때 "내 녹(祿)을 먹고 어찌하여 반역을 꾀했느냐"하니, 삼문은 "나으리가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만일 믿지 못하면 나의 집을 적몰(籍沒)하여 따져 보라"고 하였다. 그가 순절한 뒤 세조가 그의 집을 적몰하여 보니 세조가 왕위에 오른 을해년(乙亥年 : 14 55 년) 이후의 녹봉을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날짜를 기록해 두었으며 집에는 남은 것이 없고 침방에는 짚자리만 있었다고 한다. 그가 형장으로 갈 때 좌우 옛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서 태평을 이룩하라. 나는 돌아가 지하에서 옛 임금을 뵙겠다"고 하였고, 수레에 실릴 때에 임하여 시를 짓기를, 북소리는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머리 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回頭日欲斜)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하나 없으려니 (黃泉無一店)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재워줄꼬 (今夜宿誰家) 하였다. 이 시는 <이 몸이 죽어가서∼>의 단가(短歌)와 더불어 그의 절의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尺度)이며, 지금도 숱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명시(名詩)로 알려졌다. 그의 딸이  대여섯 살쯤 되었는데, 수레를 따르며 울고 뛰었다. 삼문이 돌아다 보며 "사내 자식은 다 죽을 것이고,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하였다. 그의 여종이 울며 술을 올리니 구부려서 마시고 시를 지어 이르되, 임이 주신 밥을 먹고, 임 주신 옷 입었으니 (食人之食衣人衣) 일평생 한 마음이 어길 줄 있었으랴 (所一平生莫有違)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알았으니 (一死固知忠義在) 현릉이 송백이 꿈 속에 아른아른(顯陵松栢夢依依) 하였다. (「추강집(秋江集)」에는 성승의 시(詩)라 하였다.) 한편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 사달(士達)의 아들 부(溥)와 승문원 교리 희(熺)의 아들 담수(聃壽)도 절신으로 이름을 떨쳤다. 고려 말에 형부 총랑(刑部摠郞)을 역임했던 부(溥)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개성(開城)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하며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고, 후에 양주(楊州)의 서산(西山)에 숨어 살면서 송산(松山)의 조 견(趙  ), 사천(沙川)의 남을진(南乙珍)과  더불어 <유양삼은(維楊三隱)>으로 일컬어졌으며, 삼문과 재종간인 담수(聃壽)는 사육신(死六臣) 사건에 연좌하여 심한 고문 끝에 김해로 유배되었다가 풀려 나와 선영(先塋)이 있는 파주 문두리(坡州文斗里)에 은거하며 일생을 낚시와 독서로 소일했다. 특히 담수는 높은 가문의 자제이면서도 농사군 같이 살았다. 그의 조카 몽정(夢井:담년의 아들, 몽선의 아우)이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순시도중 그가 사는 고을을 지나다가 만나보려고 찾아보니 고을 사람들이 그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하며,  살고 있는 초가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지경이고 토상(土床)이 겨우 무릎이나 놓을만 하였으며 손님이 앉을 자리가 없었다. 몽정이 탄식하고 집에 돌아가 방석 열 개를 보냈으나 이 물건은 빈천한 집에 적합한 물건이 아니라면서 돌려 보냈다고 한다. 담수의 아우 담년(聃年)과 사촌 담중(聃仲 : 참봉 소의 아들)도 불사담학(不仕聃學)의 가통(家統)을 이어 명망이 높았으며, 담년의 손자 제원(悌元 : 장흥 부사 몽선의 아들)은 초가집에서 죽을 먹어도 기상이 있었다는 학자(學者)로 이지함·서경덕(徐敬德) 등과 더불어 선도(仙道)에 기운 유학추향(儒學趨向)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유명했다. 태종(太宗) 때 대사헌(大司憲)과 우정승(右政丞)을 거쳐 형·호조의 판서를 역임했던 석연(石 )의 후손으로는그의 아들 암( )과 억(抑)의 인맥(人脈)이 두드러진다. 암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염조(念祖)는 세종(世宗) 때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도승지(都承旨)·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판한성부사와 지중추원사를 지내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그의 아우 봉조(奉祖)는 세조와 동서지간으로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참찬·우찬성·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를 지내고 성종(成宗) 때 좌리삼등공신(佐理三等攻臣)으로 창성부원군에 봉해진 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염조의 아들 임(任)과 간(侃)·현(俔) 3형제는 학문으로 대성(大成)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성종 때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을 역임했던 임(任)은 시문(詩文)중에서도 특히 율시(律詩)에 뛰어났고, 글씨는 촉체(蜀體:중국 촉나라 조맹부의 글씨 체)에 능하여 해서(楷書)·초서(草書)·예서(隸書)에 일가를 이루어, 그의 글을 얻고저 하는 이가 중국에까지 치달았다. 고금(古今)의 이문(異聞)을 편집하여 「태평통재(太平通載)」를 저술했고,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여지승람(與地勝覽)」의 편찬에도 참여했으며 「오례(五禮)」를 개수(改修)했다.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박학으로 당세에 문명을 떨쳤던 간(侃)은 누군가가 색다른 책만 갖고 있으면 구해서 통독하여 동료들이 <서음(書淫)>을  한다고까지 말했고, "내가 능하지 못한 것은 음악뿐"이라면서 거문고를 배웠으나 서른 살에 요절했다.
     부자문형(父子文衡)으로 유명했던 현(俔)은서거정(徐居正) 이후 사가(四家)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한문학(漢文學)의 대가(大家)이다. 특히 그는 「용재총화( 齋叢話)」의 저자로도 명망이 높았고, 문학보다 그의 소활( 豁)하고 순탄한 성품으로 더욱 추앙을 받았다. 그의 저서(著書)인 「부휴자전(浮休自傳)」의 말미에 <세상에 나서 사는 것이 마치 떠 있는 것 같고, 죽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쉬는 것 같으니 무엇이 영화로우며 쉰들 또 무엇이 슬프리요>라고 적었으며, 죽을 때 유서에 <상례와 장례를 모두 간략히 하도록 하고 문 앞에서 상여를 소가 끌게 하고, 만장(輓章)은 10여 장쯤으로 하여 나의 검소한 뜻을 표하게 하라. 내가 임금의 은혜를 입어 벼슬이 육경(六卿)에 이르렀으되 칭도할 만한 덕이 없으니 다만 표석(表石)이나 세우고 비(碑)를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으며, 연산군의 사랑하는 여인에 관한 일을 논했다고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되었다.
     홍사부(洪士俯)가 그의 아들 세창(世昌)과 친하였다. 어느 정월 눈 내린 밤에 찾아와 동원(東園) 별실에서 밤중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거문고 소리가 나 문틈으로 내다보았더니, 한 노인이 매화나무 밑에서 눈을 쓸고 앉아서 허연 백발을 날리며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세창이 "나의 아버지다" 하였다. 뒷날 홍(洪)은 그날밤의 인상적인 장면을 다음과 같이 써서 남겨 놓았다. <그때, 달빛이 밝아 대낮 같고 매화 꽃이 만개했었는데, 백발은 바람에 날려 나부끼고 맑은 음향이 흐르니 마치 신선이 내려온 듯, 문득 맑고 시원한 기운이 몸에 가득참을 느꼈다. 용재( 齋:현의 아호)는 참으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 할만 하다> 현(俔)의 아들 세창은 중종 때 문형(文衡)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며, 문장과 필법이 묘정에 이르렀고 서화(書畵)와음률(音律)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불리웠다. 염조의 조카 준(俊:순조의 둘째 아들)은 성종이 즉위하자 사간(司諫)이 되어 <시정십칠조(時政十七條)>를 올려 왕의 총애를 받았고 , 연산군 때는 좌의정으로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우의정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시폐십조(時弊十條 )>를 주청, 연산군의 난정을 바로 잡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영의정이 되었을 때 하루는 내연(內宴)이 있어 재상들도 들어갔다. 한참 술이 얼큰할 때 연산군이 요염한 기생을 껴안으니 그 자리에서 "노신이 아직 죽지 않았사오니 전하는 결코 이러하지 못합니다" 하니 연산군이 꺼려서 그만 두었다.  그후부터 연산군은 준을 겉으로는 공경하고 존중하는 체 하였지만 속으로는 꺼려하였다고 하며, 결국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직산(稷山)으로 유배되었다가 교살(絞殺)되었다. 그의 아들 경온(景溫)도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이르렀으나 아버지가 화(禍)를 입고 자손들까지 남겨두지 않겠다는 연산군의 말을 듣고 "나의 생명을 남의 손에 더럽힐 수 없다"고 유언하고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딸이 태종(太宗)의 네째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에게 출가했던 억(抑 : 좌찬 성을 지내고 좌의정에 추증)의 후손에서는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 수침(守 )과 수종(守琮)의 형제가 뛰어났다.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수침은 <도(道)는 앞에 놓인 큰 길만 같고, 성현(聖賢)의 가르침은 해와 달처럼 밝아서 알기가 어렵지 않으나 일월(日月) 밑의 그 밝은 길을 걷느냐 걷지 않느냐에 있다>고 하여 학문으로 크게 현달했고, 그의 아우 수종(守琮)은 문장이 뛰어나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고, 시(詩)도 청아했으며 학문이 깊었으나 청빈하게 살다가 일찍 죽어서 조선조에서 가장 맑게 숨어 산 사람으로 이름 났다. 그 외 선조 때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던 세장(世章)과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일등공신(靖國一等功臣)으로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랐던 희안(希顔:돈령부 판관 찬의 아들)이 뛰어났으며, 수침의 아들 혼(渾)은 유학계(儒學界)의 거목(巨木)으로 문하에서 조 헌(趙憲)·이 귀(李貴)·정 엽(鄭曄) 등 훌륭한 학자를 배출시켜 더욱 명성을 떨쳤다.
     세평(世平)의 아들 영(泳 : 이조 판서를 역임)과 수익(壽益)이 손자 하종(夏宗 : 함경도 관찰사와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지냄), 승지(承旨) 안의(安義)의  아들 이성(以性:부제학에 추증) 등도 수령(守令)으로 고을을 다스리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가문을 더욱 빛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의익(義益)의 아들 기운(岐運)이 주일 공사(駐日公使)와 농상 공부 대신(農商
    工部大臣)·중추원 부의장(中樞院 副議長) 등을 지내고 훈일등 팔괘장(勳一等 八卦章)을 받았으며,
    아산(牙山) 출신인 재한(載翰)은 의병(義兵)을 일으켜 홍주성(洪州城)을 지키다가 일본군(日本軍)의 기습으로 성이 함락될 때 장렬하게 전사하여 학문(學問)과 의절(義節)의 가문인 창녕 성씨의 가통을
    세웠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결과에 의하면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남한(南韓)에 총 37,894가구, 158,33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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