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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섭씨(慶州葉氏)
    경주 섭씨(慶州葉氏)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 )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 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섭씨(葉氏)는 중국(中國) 남양(南陽 : 하남성 여남도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송(宋)나라 고종(高宗) 때 간의대부(諫議大夫)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섭공제(葉公濟)가 장차정란(政亂)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주 잠(朱潛)·조 창(趙昶)·진조순(陳祖舜)·주세현(周世顯 )·유응규(劉應奎)·두행수(杜行秀)·도성하(陶成河) 등 7학사(七學士)와 더불어 동래(東來)하여 전라도 금성(全羅道錦城)으로 들어와 능주(綾州)를 거쳐 담양(潭陽)에 이거(移居)한 것이 우리나라 섭씨(葉氏)의 시초(始初)가 된다. 그후 고려 고종(高宗)이 그에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의 벼슬을 내렸으나 불취했고, 원(元)나라 사신(使臣)이 그의 종적을 탐색하므로 화(禍)를 피하여 경상도 경주 연해(慶尙道 慶州沿海)를 지나 강원도 강릉 인계(江原道江陵仁溪)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진력하니 세인들은 그를 만오선생(晩悟先生)이라 일컬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始祖) 공제(公濟)가 처음 들어온 담양(潭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선조(先祖)들의 직첩(職牒)과  예조(禮曹)에 제출한 입안(立案) 등 모든 문서(文書)에 관향(貫鄕)이 경주(慶州)로 기록되어 있어 본관을 경주(慶州)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섭씨의 본관은 경주 외에도 공촌(公村 : 수원지방)·처인(處仁 : 용인지방)·회미 (澮尾 : 옥구지방)·인의(仁義 : 태인지방)·니파산(泥波山 : 만경지방)·해평(海平 : 선산지방)·충주(忠州) 등 7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경주 섭씨의 세거 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이렇게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섭씨는 시조의 아들 근실(根實)이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지종성군사(知鍾城郡事)를 역임했고, 손자 후춘(後春)은 충선왕(忠宣王) 때 등과(登科)하여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가세(家勢)가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한편 충숙왕조(忠肅王朝)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일장(日長 : 사헌부 규정 후춘의 아들)은 함주 별장(咸州別將)이 되어 말갈(靺鞨)의 침입을 토벌하는 데 선봉장(先鋒將)으로 나아가 성무산(城茂山)에서 대첩(大捷)을 거두고 정순대부 (正順大夫)로 의흥위 대호군(義興衛大護軍)에 올라 정난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의 칭호와 함께 담양(潭陽)과 강양(江陽)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아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민수(敏秀)는 충목왕(忠穆王) 때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려 말에 판전객시사(判典客시事)를 지냈던 기량(起良 : 민수의 맏아들)은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자 이를 개탄하여 김용장(金用莊) 등 7인과 함께 성거산(聖居山)으로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키니 후세 사람들이 그 곳을 <팔판사동(八判事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기량(起良)의 현손 평중(平仲 : 공주 판관 찬의 아들)이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가 단종(端宗)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같이 오대산(五臺山)에 올라가 영월(寧越)을 향해 망배(望拜)하며 통곡했다고 하며, 그의 아들 천지(千枝)는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등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연산군(燕山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大司諫) 겸
    지제교(知製敎)에 특별히 기용되었다. 그 외 문정왕후(文貞王后)의 수렴청정(垂廉聽政)으로 권신들의 전횡이 심해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산수(山水)를 편력했던 죽림거사(竹林居士) 취영(翠永)과 아버지의 병환 때 손가락을 깨물어 간호했던 장권(章權)이 유명했고, 방화(芳華)는 순조(純祖) 때 용양위 부호군(龍 衛副護軍) 겸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여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농기(濃起)·비서원승(秘書院丞) 농환(濃煥) 등과 함께 경주 섭씨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섭씨(葉氏)는 남한(南韓)에 총 152가구,  6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83
  • 경주 설씨(慶州설氏)
    경주 설씨(慶州氏)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 )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설씨( 氏)는 회골계(回 系)의 후예(後裔)가 설련하( 輦河)에 세거(世居)하면서 성(姓)을 설( )로 삼게 되었다고 하며, 원(元)나라 태부(太傅)인 극직(克直)의 6세손 설문질( 文質)이 원조(元朝)에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후 설문질의 손자 설 손(정자(端本堂正字)로 있으면서 황태자(皇太子)에게 「경전(經典)」을 강론했으나 승상(丞相)의 비위에 거슬려 단주 유수(單州留守)로 좌천되었다가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대령(大寧)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홍건적(紅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피하여 1358년(고려 공민왕 7) 고려에 망명하자 공민왕(恭愍王)은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친히 사귄 친구 사이므로 그를 부원후(富原侯)에 봉하고 논과 밭을 내려주어 우대하였다.
      이듬해 아들 5형제가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귀화하여 맏아들 장수(長壽)가 1362년(공민왕 11)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공양왕(恭讓王) 때 정난공신(定難功臣)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지공거(知貢擧)를 겸했으며, 정몽주(鄭夢周)가 화(禍)를 입을 때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으나 태조(太祖)에 의해 풀려나와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복직,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지고 계림(鷄林)을 사적(賜籍)받아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경주(慶州)로 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전후 8차례나 사신(使臣)으로 명(明)나라를 다녀왔고 시(詩)·서 (書)에 일가(一家)를 이루어 안렴부사(按廉副使)을 역임한 아우 경수(慶壽), 미수(眉壽)와 함께 가문(家門)을 반석(盤石)위에 올려놓았다.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미수(眉壽)는 태종(太宗) 때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의 전서(典書)를 거쳐 전후 다섯 차례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둔전제(屯田制)의 실시를 건의하여 실시토록 했고, 여러 조(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검교우참찬(檢校右參贊)에 이르렀다. 1408년(태종  8)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순(循 : 경수의 아들)은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로 세종 때 인동 현감(仁同縣監)을 지내고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왕명(王命)으로 「효행록(孝行錄)」을 증수(增修)했으며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수했다. 역사(歷史)에도 정통(精通)하였으며 문장(文章)으로 명망이 높았고, 윤 회(尹淮) 등과 함께 「통감훈의(通監訓義)」를 저술하여 더욱 학명(學名)이 떨쳤다. 그 밖의 인물로는 좌참찬(左參贊) 미수(眉壽)의 아들 유(猷)가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지냈으며, 부승(副丞) 동인(同寅 : 순의 아들)의 아들 침(琛)은 군수(郡守)를 역임하여 장사랑(將仕郞)에 오른 종한(宗漢)·통덕랑(通德郞) 만구(萬 耉) 등과 함께 경주 설씨를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 설씨(慶州 氏)는 남한(南韓)에 총 442가구, 1,9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43
  • 순창,경주 설씨(淳昌,慶州薛氏)
    순창,경주 설씨(淳昌,慶州薛氏)

     순창(淳昌)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쪽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원래 백제(百濟)의 도실군(道實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순화군(淳化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때에는 순창현이 되어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가 1314년(충숙왕 1) 군(郡)으로 승격, 조선(朝鮮) 시대에도 그대로 군으로 삼았다. 설씨(薛氏)의 시조(始祖)는 신라 건국(新羅建國)의 원훈(元勳)으로 지금의 월성군 천북면(月城郡川北面) 화산(花山)·물천(勿川)·동산리(東山里)와 안강읍(安康邑) 일대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을 다스렸던 촌장(村長)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57년 다른 5부(五部 )의 촌장들과 함께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초대 왕(王)으로 추대하여 신라를 세웠다고 하며, 서기 32년 봄 3대 유리왕(儒理王) 때 고야촌이 습비부(習比部)로 개칭되면서 설씨(薛氏)의 성(姓)을 하사(下賜)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설씨는 설거백(薛居伯)을 시조로 받들고 서라벌(徐羅伐) 경주(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36세손 자승(子升)이 고려 인종(仁宗)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순화 백(淳化伯 : 순창의 옛 지명)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을 순창(淳昌)으로 이관(移貫)하게 되었다.신라시대에 불유사상(佛儒思想)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사(思 : 원효대사)와 총(聰 : 본명 설총지)의 부자(父子)는 설씨가 자랑하는 인물(人物)로 민족사에 남긴 찬란한 업적으로 후세에 추앙받고 있다. 아찬군(阿 君) 이금(伊琴)의 아들로 지금의 경북 경산군 자인면(慶北 慶山郡 慈仁面)에서 태어난 원효대사(元曉大師)는 그의 어머니 조씨(趙氏)가 유성(流星)이 품속에 드는 꿈을 주고 배었다고 하며, 그가 태어날 때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그는 32살에 불문(佛門)에 들어가, 661년(문무왕 1) 의상(義湘)과 함께 당(唐)나라로 유학 가는 길에 배를 기다리다가 큰 비를 만나 근처 토굴로 피신하여 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보니 그 곳은 토굴이 아닌 옛 무덤 속으로, 해골 옆에서 잠을 잤고 간밤에 마셨던 물은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만사는 생각하기에 따라 망상이 생기니 차별하는 마음을 버리면 토굴이나 무덤인들 어떠랴, 이 세상 갖가지 현상은 오직 자신의 마음가짐에서 유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요 스승이거늘 어디에 가서 스승을 따로 구하랴" 하며 다시 돌아와 분황사(芬皇寺)에서 불교 보급에 힘써 독자적인 경지를 열었다. 그 후 그는 문무왕(文武王)의 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혼인하여 아들 총(聰)을 낳고 스스로 파계(破戒 )를 선언하여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로 자칭하며 참선과 저술(著述)에만 전념, 한국불교사상(韓國佛敎史上) 가장 위대한 고승(高僧)으로 일컬어졌다.최치원(崔致遠)·강 수(强首)와 함께 <신라 삼문장>으로 손꼽히는 총은 이두(吏讀) 문학의 창시자로도 명성을 떨쳐 민족문학사에 찬란한 금자탑(金字塔)을 세웠다.
     고려조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29세손 경(鏡)이 태조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고 39세손 신(愼)은 고종 때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순화백(淳化伯)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공검(公儉)과 인검(仁儉)이 뛰어났다. 고종 때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공검은 예부 낭중(禮部郎中)과 군기감(軍器監)을 거쳐 충렬왕(忠烈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과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를 지내고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하여 청렴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아우 인검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한편 공검의 아들 지충(之沖)은 충숙왕(忠肅王) 때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봉(縫)은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역임하여 충정왕조(忠定王朝)에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손자 안통(安統 :  봉의 아들)과 함께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종(世宗) 때 만경 현령(萬頃縣令)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오른 위(緯)가 시(詩)와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고, 창덕궁 직장(昌德宮直長) 훈( )의 맏아들 효조(孝祖)는 목사(牧使)를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계조(繼祖)는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功)을 세워 정난삼등공신(靖難三等功臣)으로 옥천군(玉川君)에 봉해졌다.그 외 임피 현령(臨陂縣令)을 지낸 주(柱 : 계조의 아들)와 옥구 현감(沃溝縣監) 초(礎)의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후손 우범(禹範)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남원(南原)·거제(巨濟)·옥포(玉浦)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의주(義州)로 피난가는 선조(宣祖)을 호종(扈從)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이르렀다.
     영조(英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창후(昌 )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라, 간성 군수(杆城郡守) 겸 수군 방어사(水軍防禦使)를 지낸 응정(應貞)·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 술남(述男)·호조 정랑(戶曹正郞) 흥범(興範)·부호군(副護軍) 광윤(光潤)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설씨(薛氏)는 남한(南韓)에 총 8,177 가구, 34,2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51
  • 태원 선우씨(太原鮮于氏)
    태원 선우씨(太原鮮于氏)

     태원(太原)은 중국(中國) 산서성(山西省 : 서화현 급군)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기자(箕子)가
    상(商)나라 때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던 땅이다. 우리나라 선우씨(鮮于氏)의 성원(姓源)은 기자가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 동래(東來)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우고 그의 맏아들 송(松)이 2대 장혜왕(莊惠王)으로 즉위하면서 아우인 중(仲)을 우(于) 땅에 봉하여 나라를 세우게 하였으므로 조선의 <선(鮮)>자와 <우(于)>자를 따서 선우씨(鮮于氏)로 삼았다고 하며, 기자가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태원(太原)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41대에 이르러 준(準 : 哀王)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천(南遷)하여 금마군(金馬郡 :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군)에 나라를 세워 마한(馬韓)이라 칭했으나 9대 계왕(稽王)에 이르러 백제(百濟)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 때 8대왕인 원왕(元王)에게 아들 3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양(諒)이 평안남도 용강군(平安南道龍岡郡)이 오석산(烏石山)으로 들어가 성(城:황룡산성)을 쌓고 창도(創都)하여 나라이름을 황룡(黃龍)이라 하며 선우씨의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양(諒)의 10세손 병(柄)이 301년(진나라 혜제 12) 고구려(高句麗) 미천왕(美川王 : 제15대 왕, 재위기간 : 300 ∼331)에게 나라를 빼앗겨 서민(庶民)으로 선우씨의 세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하여 후손들은 고려 고종(高宗) 때 중서주서(中書注書)를 지낸 정(靖)을 일세조(一世祖) 받들어 계세(繼世)하고 있다.  가통(家統)을 지켜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고려 신종(神宗) 때 중직대부(中直大夫)로 서운관정(書雲觀正)을 거쳐 죽주부윤(竹州府尹)을 지낸 석(碩 : 일 세조 정의7세손)과 그의 손자 당(  : 봉익대부로 상호군을 지냄), 증손 수(守 : 안흥부윤을 지냄)가 유명했다. 한편 부윤 수(守)의 아들 적(迪)은 공민왕(恭愍王) 때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소부시윤(小府시尹)을 지내고 태천(泰川)에 정착하여 슬하에 아들 형제를 두었는 데, 장남 경(景)이 조선 태조조(太祖朝)에 신호위 중령별장(神虎衛中領別將)을 지내고 태천파(泰川派)를 이루었으며, 차남 현(賢)은 보승중랑장(保勝中郞將)을 역임한 후 용천(龍川)에 별거(別居)하여 용천파(龍川派)의 파조(派 祖)가 되어, 이들 형제가 태원 선우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특히 조선조에 와서 가세(家勢)를 일으켰던 협(浹)은 1588년(선조 21) 숭인전감(崇仁殿監) 식(寔)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나 22세 때 김태좌(金台佐)에게 시 (詩)·서(書)·역(易)·춘추(春秋) 등을 배우고 학명(學名)을 떨쳤으며,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찾아가 퇴계 이 황(李滉)의 저서(著書)를 열람한 뒤 여헌(旅軒) 장현광 (張顯光)에게 도(道)를 물은 다음 용악산(龍岳山)에 들어가 후학(後學)을 가르치며 <심성이기(心性理氣)>의 묘를 터득했다. 특히 그는 수차에 걸쳐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인조(仁祖) 말에 비로소 사업(司業)이 되어 치심궁리(治心窮理)의 요체와 입현무방(立賢無方)의 도를 상소하여 이를 시행케 했으며, 예학(禮學)의 거두(巨頭) 김 준과 학문을 토론하여 당대에 이름난 학자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아 <관서부자(關西夫子)>로 일컬어졌다.
     그 밖의 인물로는 협의 8세손 석(석 : 연의 아들)이 순조(純祖) 때 등과하여 정언(正言)을 거쳐 찰방(察訪)·태안 군수(泰安郡守)·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 등을 지내고 철종(哲宗) 때 군자감정(軍資監正)과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지냈으며, 후손 혁(爀)은 김 구(金九)·여운형(呂運亨)·이광수(李光洙)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교통차관(交通次官)과 임시의정원 의원(臨時議政院議員)을 역임하여 태원 선우씨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태원 선우씨(太原鮮于氏)는 남한(南韓)에 총 766가구, 3,0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17
  • 보성 선씨(寶城宣氏)
    보성 선씨(寶城宣氏)

     보성(寶城)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남부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복홀군(伏忽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보성군(寶城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태조 (太祖)는 삼양군
    (三陽郡)이라 하였으며, 996년(성종 15)에 패주(貝州)로 개칭하였다가 1668년(현종 9) 전라도에 소속되면서 다시 보성군이 되었다. 선씨(宣氏)는 중국(中國) 시평(始平:협서성 관중도 흥평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노(魯)나라 대부(大夫) 선백(宣伯)의 후예로 전한다. 우리나라 선씨는 명(明)나라 때 문연각 학사(文淵閣學士)인 선윤지(宣允祉)가 1382년(고려 우왕 8) 사신(使臣)으로 고려에 왔다가 귀화(歸化)하여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우거(寓居)하는 왜구를 섬멸하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보성(寶城)에 은거(隱居)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 후 선윤지(宣允祉)는 유교(儒敎)의 진흥에 앞장섰고 인재 양성에 진력하며 보성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보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관(本貫)을 같이 하면서 고려 말에 예의 판서(禮儀判書)와 우문각 대제학(右文閣 大提學)을 지낸 선원지(宣元祉)를 시조로 하는 계통(系統)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선천계(宣天桂)를 시조로 주장하는 계통이 있었는데, 모두가 동원(同源)으로 밝혀져서 1978년 합의에 의하여 동행(同行)으로 합보(合譜)를 하였다.조선조에서 충렬(忠烈)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진 보성 선씨는 시조의 아들 안혁(安赫)이 태종(太宗)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했고, 증손 화(和:호조 참판 광유의 아들)는 태종 때 여산 군수(礪山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의 진정(陳情)으로 두 번이나 고을 수령을 지냈다.
     군수(郡守) 화의 아들 형(炯)은 1451년(문종 1) 17세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안주 목사(安州牧使)과 경성 부사(鏡城府使)를 거쳐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올라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하는 데 공(功)을 세워 적개삼등공신(敵愾三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성종(成宗)이 즉위할 때 무공(武功)을 세워 좌리사등공신(左理四等功臣)으로 유성군(楡城君)에 봉해졌다. 뒤에 영안북도 수군절도사(永安北道水軍節度使)로 북면의 야인 정벌에 유공하여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고, 시조를 비롯하여 거이(居怡:형의 증손)·세강(世綱:시조의 9세손)·약해(若海:시조의 10세손)와 더불어 <선씨오충신(宣氏五忠臣)>으로 일컬어졌다. 문종(文宗)때 순무사(巡撫使)를 지낸 청유(淸裕)의 아들 국충(國忠)은 세조(世祖) 때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형(炯)의 증손 거이(居怡:도사 상의 아들)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비장(飛將) >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특히 지략(智略)이 뛰어났던 거이는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녹둔도(鹿屯島)에서 여진족(女眞族)을 격퇴시키는데 무용(武勇)을 떨쳤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에 부원수(副元帥)를 겸하여 도원수(都元帥) 권 율(權慄)과 함께 행주산성(幸州山城)과 운봉(雲峰) 싸움에서 큰 공(功)을 세웠으며, 7도의 병마사(兵馬使)를 겸하여 이순신(李舜臣)의 수군 함대에 종군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울산(蔚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 從功臣)에 책록되고 정문(旌門) 이 세워졌다. 부사(府使) 의문(義問)의 아들 약해(若海)는 선조(宣祖)와 인조대(仁祖代)에 문·무(文·武)양과에 급제하여 사신(使臣)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와  「심양일기(瀋陽日記)」를 남겼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롭게 순절하여 가문을 더욱 빛냈다. 사기(史記)에는 약해(若海)의 마지막 전투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643년(인조 21) 1월 3일 이른 아침에 적의 선봉 33명이 목방패(木防牌)를 가지고 고기 떼와 같이 행진해 오는 것을 보고 아군이 맞이하여 한바탕 쏘아서 적병의 용감한 자가 탄환에 맞아 죽고 탔던 말이 뛰어서 진중에 들어가니 적이 두려워하여 감히 핍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포수가 총을 함부로 쏘아 화약이 이미 다 되었으므로 포수들은 화약을 더 보내라고 연달아 소리쳤다. 적이 이 말을 알아듣고 다시 독전하여 앞으로 나
    와 아군의 목책(木柵)에 다 가왔다. 이 때 안동 영장(安東營將) 선약해(宣若海)가 홀로 적의  칼날을 감 당하며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방패에 맞았고 화살은 이미 다 되니 자기 자리에 딱 버티고 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약해와 함께 충절(忠節)로 가세(家勢)를 드높인 세강(世綱 : 봉장의아들)은 1603년(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광해군(光海君) 때 경기 중군(京畿中軍)이 되어 영평산성(永平山城)을 감축(監築)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광주 쌍령(廣州雙嶺)에서 적과 대전중 장렬하게 순절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선조 4위와 더불어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그의 9세손 극례(克禮)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무용(武勇 )을 떨쳐 명망이 높았으며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왜군 섬멸에 전공을 세웠으나 잔적을 소탕하다가 아깝게 전사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해수(海壽)는 판관(判官)으로 전장에서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을 계승하였다. 세강의 아우 세휘(世徽)는 문신(文臣)으로 유명했는데, 전적(典籍)과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거쳐 장령(掌令)을 지냈으나 대북파(大北派)에 가담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는 데 가담했다가 화(禍)를 입었다.
      여경은 임진왜란 때 선전관(宣傳官)으로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 였고 평양(平壤) 전투에서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한 여룡(汝龍), 호조 참의(戶曹參議) 중의(仲義 ), 좌랑(佐郞) 경백(敬伯), 군수(郡守) 의경(義卿) 등과 함께 보성 선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선씨(宣氏)는 남한(南韓)에 총 7,754  가구, 33,6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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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성,경주 석씨(月城,慶州昔氏)
    월성,경주 석씨(月城,慶州昔氏)

     월성(月城)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박 혁거세
    (朴赫居世)가 개국하여 사로국(斯盧國), 즉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가 후에 신라로 불려오던 중
    65년(탈해왕 9)에 계림(鷄林)으로 개명되었고, 기림왕(基臨王) 때 다시 신라로 고쳤으나 고려 때 경주(慶州)로 개칭하였다.
     987년(성종 7)에는 동경(東京)이라 하고 목종(穆宗) 때 낙랑군(樂浪郡)으로 강등하였다가 현종(顯宗) 때 다시 경주라 하였으며, 이후 안동대도호부·경주목 등으로 변천해오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고쳐 불렀다.
     1415년(태종 15) 경주부로 다시 고치고 1895년(고종 32)에 경주군(慶州郡)이 되었으며, 1955년 8월 경주시를 설치하면서 종전의 경주군의 나머지 지역을 월성군(月城郡)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월성 석씨(月城昔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제4대왕인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 재위기간 : 57 ~ 80)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記)>에 탈해왕(脫解王)의 탄생(誕生)에 대한 신화(神話)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왜국(倭國)의 동북천리에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 : 삼국사기에는 龍城國이라 함)의 왕이 여왕국(女王國)의 딸을 왕비(王妃)로 맞이했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기도하여 아들을 구했더니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상서롭지 못하니 버림이 좋겠다"고 하여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과 함께 궤속에 넣어서 바다에 띄우고 떠가는 대로 맡겨 두었다. 궤짝을 실은 배는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서 거두지 않자, 배는 다시 계림(鷄林)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下西知村阿珍浦 : 지금의 영일만)에 닿으니 이때가 기원전 19년(신라 혁거세 39)이었다.
     이 때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이를 보고 새끼줄로 배를 매어 해안으로 끌어 올린 후 궤를 열어보니 용모가 단정한 사내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는데, 키가 9자나 되고 풍모가 준수하여 지혜가 뛰어났다. 그러나 아이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여 처음 배가 올 때 까치가 울면서 따라 왔으므로 까치 작(鵲)자에서 새조(鳥)를 떼어 버리고 석(昔)을 성으로 삼고, 포장한 궤 속에서 나왔다고 하여 탈해(脫解)라는 이름을 지었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 잡는 것을 업으로 하여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추호도 게으름을 피는 기색이 없었고, 자라면서 학문(學問)과 지리(地理)에 능통하여 지혜가 뛰어났으므로 남해왕(南解王)이 맏공주를 그에게 주고 대보(大輔)로 등용하여 정사(政事)를 돌보게 하였다. 57년 유리왕(儒理王 : 제3대 왕,  재위 기간 : 24 ~ 57)이 임종에 이르자 "아버지 남해왕이 고명(顧命)할 때 '내가 죽은 뒤 아들이나 사위를 논할 것 없이 연장자나 어진자로서 왕위를 계승하라'하여 과인이 왕위에 올랐으니 지금에는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하는 것이 옳다"고 하여 신라 제4대 임금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로부터 석씨(昔氏)는 신라 56대왕 중 4대 탈해왕을 비롯하여 89대 벌휴왕(伐休王), 10대 내해왕(奈解王), 11대 조분왕(助賁王), 12대 첨해왕(沾解王), 14대 유례왕(儒禮王), 15대 기림왕(基臨王), 16대 흘해왕(訖解王)까지 8왕에 걸쳐 171년 간 왕통(王統)을 이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석탈해왕을 시조로 받들고 월성(月城)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그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려조에서 교서랑(校書郞)을 지낸 석재흥(昔載興)을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가통(家統)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때 병부령(兵部令)을 지낸 시종(時宗:재흥의 아들)과 밀직사(密直使) 운니(運尼)의 부자(父子)가 유명했으며, 좌복야(左僕射) 한일(漢一)의 아들 정민(貞敏)은 예의 시랑(禮儀侍郞)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부사(府使) 상률(相律)과 판관(判官) 용진(龍眞), 부호군(副護軍) 광국(光國), 오위장(五衛將) 병권(炳權)이 뛰어났으며, 봉혁(鳳爀)은 감찰(監察)을 지냈고, 건민(鍵民)과 우성(羽盛)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여 월성 석씨를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월성·경주 석씨(月城·慶州昔氏)는 남한(南韓)에 총 1,932가구, 7,9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25
  • 해주 석씨(海州石氏)
    해주 석씨(海州石氏)

     해주(海州)는 황해도(黃海道) 남해안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내미홀(內米忽), 일명 지성(池城)·장지(長池)라 하였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이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海州)로 개명하였다. 성종(成宗) 때 와서는 별호(別號)로 대령(大寧)·서해(西海) 등으로 불리웠고, 현종(顯宗) 때 해주안서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를 두었다가 예종(睿宗)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진(鎭)을 설치하였고,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으로 강등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부(府)가 되어 16군(郡)을 다스렸으며 1913년 군이 되었다가 1938년 부(府)로 승격, 1940년 해주항이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해방과 더불어 시(市)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해주 석씨(海州石氏)의 시조(始祖) 석 성(石 星)은 중국(中國) 위군(魏郡) 동명(東明) 사람으로 명(明)나라 세종(世宗) 때 진사(進士)로 이과(吏科)에 급제하고 급사중(給事中)에 뽑혀 목종(穆宗) 즉위년에 직간(直諫)을 하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신종(神宗) 때 다시 등용되어 호부(戶部)와 공부(工部)의 상서(尙書)를 지내고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다. 1584년(명나라 신종 12, 조선 선조 17) 종계변무(宗系辨誣)에 힘써 성공시켰으며, 임진왜란 때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병(援兵)을 파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선의 은인(恩人)이다. 그 후 명(明)나라 신종(神宗)은 사신(使臣) 심유경(沈惟敬)을 조선에 보내 왜군과의 화의(和議)를 추진했으나 실패하자 막대한 군비 조달로 국운이 쇠하여진 책임을 석 성(石星)에게 물어 투옥(投獄)시켜 옥사(獄死)케 하였다.「해주석씨족보(海州石氏族譜)」에 의하면 석 성의 계부인(繼夫人) 류씨(柳氏)는 남경(南京) 호부 시랑(戶部侍郞)의 딸로서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곤란을 당하던 중 조선의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의 구호를 받은 바 있어 그 보은의 뜻으로 조선의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때의 원병을 지원하게 하는 데 숨은 공적이 컸다고 한다. 석 성의 옥중(獄中)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 형제 중 차남 천은 1597년(만력 25, 조선 선조 30) 배를 타고 요동과 호남을 거쳐 동래하여 가야산(伽倻山) 남쪽 군성산(君聖山) 아래 성주 대명동(星州大明洞)에 정착하여 성주 석씨(星州石氏)가 되었으며, 장남 담(潭)은 뒤에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어머니 류씨(柳氏)를 모시고 해주(海州)에 이르자 왕(王)이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수양산 아래의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여 해주(海 州)로 사적 (賜籍)하였다. 그 후 담(潭)의 작은 아들 귀당(貴棠)과 손자 난(亂 : 귀실의 아들)이 청인(淸人)을피하여 산음현 모호리(山陰縣毛好里 : 지금의 경남  산청군 생초면 평촌 리 추내동)에 이거(移居)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수양군(首陽君) 담의 증손 중립(仲立 : 난의  맏아들)이 영조(英祖)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진번(進繁)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냈다. 한편 천( )의 증손 숭길(崇吉 : 이수의  맏아들)과 선일(善一) 부자가 가선대부로 용양위호군(龍  衛護軍)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으며, 순조(純祖) 때 와서는 후손 준옥(俊玉)이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낸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어 명성을 떨쳤다. 그 외 좌승지(左承旨)을 지낸 재풍(在豊)과 군자감정(軍資監正) 관기(冠琦)가 유명했으며 , 한말(韓末)에는 상룡(祥龍)과 채룡(彩龍)이 항일 투쟁에 공헌하여 해주 석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주 석씨(海州石氏)는 남한(南韓)에 총 580가구, 2,6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41
  • 충주,홍주 석씨(忠州,洪州石氏)
    충주,홍주 석씨(忠州,洪州石氏)

     충주(忠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원군(中原郡)의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완장성( 長城)·탁장성(託長城)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진흥왕(眞興王 : 제24대 왕, 재위기간 : 534 ∼ 576)이 소경(소경)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 충주(忠州)로 개칭되어 성종(成宗) 때 대원(大原)·예성 (蘂城) 등으로 불리웠고, 고종(高宗) 때 국원경(國原京)으로 하였으며, 1550년(명종 5) 유신현(維新縣)으로 부르다가 조선(朝鮮) 선조(宣祖) 즉위년에 다시 충주(忠州)로 환원,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56년 시(市)로 승격되었다.
     석씨(石氏)는 본래 중국(中國) 무위(武威 : 감숙성 감량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문헌(文獻)에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85본(本)이다.
     충주 석씨(忠州石氏)의 시조(始祖) 석 린(石  )은 1174년(고려 명종 4) 두경승(杜景升)과 함께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功)을 세워 상장군 (上將軍)에 오르고 동서북면 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석 린(石  )을 시조로 받들고 봉군지(封君地)인 충주(忠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으며, 6세손 양선(良善)은 부인 최씨(崔氏)가 이태조(李太祖)의 이모인 관계로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추봉되고, 양선의 아들 천을(天乙)은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한 후슬하에 아들 수명(壽明)과 여명(汝明)을 두어 이들이 충주 석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천을의 맏아들 수명(壽明)은 조선조에서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홍주(洪州)로 분관(分貫)하였으며, 그의 아우 여명(汝明)은 고려 말에 성균관(成均館)의 생원(生員)으로 문과(文科)에 3등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太宗)이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을 내렸으나 불취하고 학문연구에 전심하니 태종이 그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였다. 특히 조선조에 와서 가세(家勢)를 일으킨 인물로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태천 군수(泰川郡守)를 지낸 관(瓘 : 한성 판윤 수명의 아들)과 증좌찬성(贈左贊成) 여명(汝明)의 아들 문수(文守 : 자헌대부로 예조 참판을 역임)·문현(文賢 : 이천 현감을 역임)·문성(文成 : 직제학을 역임) 3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한편 직제학(直提學) 문성(文成)의 맏아들로 세조(世祖) 때 판서(判書)를 지낸 인정(仁正)은 예원군( 蘂原君)에 봉해지고, 차남 의정(義正)은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여 정산 현감(定山縣監)을 역임한 예정(禮正)·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을 지낸 지정(智正)·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 신정(信正)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의정의 아들 사진(斯珍)은 단종(端宗) 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겸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지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의령(宜寧) 석천동(石川洞)으로 내려갔다. 그 외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옥점(玉 )과 첨정 (僉正)을 역임한 옥진(玉 )이 뛰어났고, 좌부장(左副將) 경하(擎廈)의 아들 지형(之珩)은 인조(仁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형조 정랑(刑曹正郞)과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거쳐 강화 교수(江華敎授)를 지내고 효종(孝宗) 때 「오행귀감(五行龜鑑)」을 편찬하여 왕에게 바쳐 서적과 호피(虎皮)를 하사(下賜)받았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되자 청주(淸州)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성국(成國)과 속리산(俗離山) 전투에서 선봉(先峯)으로 싸웠던 창문(昌文)이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충주 석씨의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충주·홍주 석씨(忠州, 洪州石氏)는 남한(南韓)에 총 8,137가구, 33,4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3
  • 안음 서문씨(安陰西門氏)
    안음 서문씨(安陰西門氏)

     안음(安陰)은 경상남도(慶尙南道) 함양군(咸陽郡)과 거창군(居昌郡)의 일부 지역을 관장하였던 조선 초기(朝鮮初期)의 행정구역명으로, 고려(高麗) 때의 이안현(利安縣)과 감음현(感陰縣)을 1415년(태종 15)에 합쳤다.
     그 후 1728년(영조 4)에 와서 안의현(安義縣)으로 개칭하였다가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1913년 지방행적구역 개편에 따라 군을 폐하고 함양군(咸陽郡)과 거창군(居昌郡)에 갈라 편입하여 지금은 함양군 안의면(安義面)으로 남아 있다. 서문씨(西門氏)는 본래 중국(中國) 양국(梁國 : 강소성 서해도 갈산)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정(鄭)나라 대부(大夫)가 살고 있던 지명(地名)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
     우리나라 서문씨는 원(元)나라의 하남성(河南省)출신으로 진사(進士)를 지낸 서문 기(西門記)가 1351년(고려 충정왕 3) 공민왕(恭愍王)의 비(妃)인 노국대 장공주(魯國大長公主 : 원나라 황족 위왕의 딸)를 배종(陪從)하고 동래(東來)하여 안음군(安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안음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서문씨의 본관은 안음 외에도 청주(淸州)·감음(感陰: 안음의 옛 지명)·동주(東州 : 철원지방) 등 3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원(同源)으로 추정되며, 안음을 제외한 관향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충남 금산(忠南錦山)과 전북 장수(全北長水)에 대다수가 살고 있는 서문씨는 시조의 아들 존(尊)이 조선조에서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사(師)가 정랑(正郞)을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외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군수(郡守)를 지낸 식(湜 : 시조의 증손, 정랑 사의 아들)과 검상(檢詳) 질(秩)의 부자(父子)가 유명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음 서문씨(安陰西門氏)는 남한(南韓)에 총 588가구, 2,3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66
  • 서씨(西氏)
    서씨(西氏)는 중국(中國)에서 귀화(歸化)한 성씨(姓氏)로 알려졌으나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등의 문헌(文獻)에는 중국 청(淸 : 통일왕조 : 1636 ~ 1912)나라 덕종(德宗 : 제11대 왕, 재위기간 : 1875 ∼ 1908) 때 만주 (滿洲) 사람인 서랍희(西拉希)와 몽고(蒙古) 출신인 서 임(西 林)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국(全國)에 2가구가 있었으며, 1960년도 국세 조사 때는 29명으로 나타났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0가구, 1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492
  • 평당 서씨(平當徐氏)
    평당 서씨(平當徐氏)

     평당(平當)은 경기도(京畿道) 북서부에 위치한 파주(坡州)의 옛 지명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봉성현(峰城縣)이라 하였으며, 고려(高麗) 때 서원현(瑞原縣)으로 개칭하였고 조선(朝鮮) 때 원평군(原平郡 )으로 고쳤다가 그 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파주군(坡州郡)이 되었다.
     평당 서씨(平當 徐氏)의 시조(始祖) 서준방(徐俊邦)은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지내고 외적(外敵)을 격퇴시키는 데 공(功)을 세워 봉성군(峯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약진(若珍)과 손자 숭조(崇祖)에 이르기까지 3대가 봉성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평당(平當)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에 의하면 시조 준방(俊邦)은 서신 일의 5세손으로 이천 서씨에서 분족(分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원(同源)으로 알려진 봉성 서씨(峰城徐氏)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을 역임한 서극후(徐克後)의 후손으로 전한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을 역임한 숭조(崇祖)의 아들 령(  : 시조의 증손)이 승지(承旨)를 지냈으며, 7세손 원경(元敬)은 문하 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조선조에 와서는 정랑(正郞)을 지낸 인기(仁奇 :  8세손)와 목사(牧使) 신(信)의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극일(克一)은 정언(正言)을 역임하여 군수(郡守) 구(矩), 첨지중추부사(僉知中 樞府事) 수(綬), 교리(校理) 륜(倫) 등과 함께 평당 서씨를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당 서씨(平當徐氏)는 남한(南韓)에 총 56가구, 2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570
  • 절강 서씨(浙江徐氏)
    절강 서씨(浙江徐氏)

     절강(浙江)은 중국(中國) 동남부(東南部) 동해(東海) 연안에 위치하여 양자강(陽子江) 하류의 남부를 점하고 있으며 전당강(錢塘江)에 의하여 동서로 나누어져 항주(杭州)를 성도(省都)로 하고 있다.
     절강 서씨(浙江徐氏)는 절강성(浙江省) 출신인 서해룡(徐海龍)의 증손 서 학(徐 鶴)이 1597년(선조 30 )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도총관(都摠管)으로 원병(援兵)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건너와 여러 전투에서 공(功)을 세우고 경북 성주 대동방(慶北星州大同坊)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서해룡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선조(先祖)의 고향(故鄕)인 절강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으며, 학(鶴)의 아들 형제 중 장남 헐세(歇世)가 종6품의 문관(文官) 품계인 승사랑(承仕郞)을 제수(除授)받아 가세(家勢)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학(鶴)의 손자 종길(宗吉:승사랑 헐세의 아들)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고, 겸세(士世)의 맏아들 의필(義必)은 효행(孝行)으로 명성을 떨쳐 훈련원 부장(訓鍊院副將)을 지낸 후손 가행(嘉行), 참봉 (參奉) 응명(應明)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절강 서씨(浙江徐氏)는 남한(南韓)에 총 90가구,
    4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97
  • 장성 서씨(長城徐氏)
    일세조 휘(諱): 서 능(徐 稜), 장성군(長城君)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66
  • 이천 서씨(利川徐氏)
    시  조 휘(諱):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묘 소: 경기도 이천군 부발면 산촌리 효양산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540
  • 연산 서씨(連山徐氏)
    시  조 휘(諱): 서준영(徐俊英)
       일세조 휘(諱): 서의민(徐義敏), 참군(參軍)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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