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게시물 검색
전체 588건 7 페이지
  • 운씨(雲氏)
    운씨(雲氏)

     운씨(雲氏)는 중국 낭야(中國郎 : 지금의 산동성 기주)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수양제(隋煬帝) 때 사람인 운정흥(雲定興)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운씨(雲氏)의 본관(本貫)은 청주(淸州)와 장흥(長興)을 비롯 함흥(咸興) 등 3본(本)이 문헌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이 미상(未詳)하다.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강화군에 살던 운송복(雲松福)이란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의 조상이 2백 년 전에 육지(陸地)로부터 이주(移住)해 와서 처음 강화도에 정착(定着) 했을 때 벽공(碧空)에 백운(白雲)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것을 보고 성(姓)을 운(雲)이라 했다고 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운씨(雲氏)는 남한에 총 25가구, 1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63
  • 운씨(芸氏)
    운씨(芸氏)

     우리나라 운씨(芸氏)는 전주 단본(單本)이며, 시조(始祖) 이하의 소목(昭穆)을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상고(詳考)하지 못한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함경남도 함주와 안변·함흥 등지에 11가구가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495
  • 목천 우씨(木川于氏)
    목천 우씨(木川于氏)

     목천(木川)은 충정남도 천원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는 목주(木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 태종(太宗) 때 목천(木川)으로 고쳐 1913년에 천원군에 속한 면(面)이 되었다.
     우씨(于氏)는 중국 하남(河南)에서 계출된 성씨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들이 우(于) 땅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땅이름을 성(姓)으로 삼았다가 후에 우(于)로 고쳤다고 한다. 우리나라 우씨(于氏)는 목천(木川) 단본(單本)이며 고려 중엽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우방녕(于邦寧)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후 그의 아들 학유(學儒)가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로부터 난을 일으키고 거사에 가담하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무신이 전권(全權)을 잡아 잘 된 일이 없다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거절했다. 정중부가 집권한 후 그는 신상이 위태로왔으나 집권층인 이의방(李義方)의 누이와 결혼한 인척관계로 무사했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술유(述儒)가 명종(明宗) 때 형부 시랑(刑部侍郞)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으며,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판형부사(判刑部事)를 거쳐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다. 한편 희정(熙宗)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던 승경(承慶)은 권신 최충헌(崔忠獻)을 제거하려다 되말려 유배당했으며, 필흥(必興)은 공민왕(恭愍王) 때 「옥룡기(玉龍記)」의 도참설을 인용하여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의관과 여자들의 옷을 검은색으로 입게하고, 산에 나무를 심게하여 풍토(風土)를 순응케 하라는 소(疏)를 올려 이를 시행케하여 명망을 떨쳤다.
     1985년 경제 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목천 우씨(木川于氏)는 남한에 총 282 가구, 1,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477
  • 우禹
    우禹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440
  • 용龍
    용龍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457
  • 요씨(姚氏)
    요씨(姚氏)

     요씨(姚氏)는 중국(中國) 오흥(吳興)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당(唐)나라 소종(昭宗) 때 사람인 요 계(姚  )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요씨(姚氏)는 고려(高麗) 태조 원년(太祖 元年)에 물장경(物藏卿)에 오른 요인휘(姚仁暉)가 있었으며,「전고대방(典古大方)」등의 문헌에는 수원 요씨(水原姚氏)로 나온다.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성진군(城津郡)에 살던 요재룡(姚在龍)에 의하면, 휘주요씨(徽州姚氏)는 그 당시로 해서 290여년 전에 병란(兵亂)을 피해귀화(歸化)해 온 명(明)나라 유신(遺臣)의 후예인 것으로 밝히고 있다.
     본관은 휘주(徽州)를 비롯하여 수원(水原)·충주(忠州)·서원(西原 : 청주 별호) 등이 있는 것으로「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요씨(姚氏)는 남한(南韓)에 총 64가구, 2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21
  • 왕王
    왕王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424
  • 옹씨(雍氏)
    옹씨(雍氏)

     옹씨(雍氏)는 중국(中國) 경조(京兆)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周)나라 옹백(雍伯)이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
     우리나라 옹씨(雍氏)의 본관(本貫)은 파평(坡平)이 단본(單本)으로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경남 창원군 능남면 안민리(慶南昌原郡能南面安民里)에 8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순창 옹씨(淳昌邕氏)가 그 곳으로 이주(移住)해 살다가 1909년 민적(民籍)에 등재(登載)할 때 잘못 기록되었다고 한다.
     옹씨(雍氏)는 1960년 국세조사 때 50명이었다가 197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는 남한(南韓)에 8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581
  • 옹邕
    옹邕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507
  • 온溫
    온溫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357
  • 의령 옥씨(宜寧玉氏)
    의령 옥씨(宜寧玉氏)

     의령(宜寧)은 경상남도(慶尙南道)의 중앙, 낙동강 하류 서안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장함현(獐含縣)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의령으로 고쳐서 함안군(咸安郡)에 속했으며, 고려(高麗) 때에는 진주(晋州)에 편입되었다가 공양왕(恭讓王) 때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조(朝鮮朝)에 현(縣)으로 승격된 뒤 1895년(고종 32)에 의령군으로 개칭되었다.
     옥씨(玉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우리나라 옥씨(玉氏)의 연원(淵源)은 고구려(高句麗)의 요청에 의해 당(唐) 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八才士) 중의 한 사람인 옥진서(玉眞瑞)가 신라(新羅)에서 국학 교수(國學敎授)를 역임하고, 의춘(宜春 : 의령의 별칭) 군(君)에 봉해져 의령(宜寧)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 할 수 없어 후손들이 고려(高麗) 때 창정(倉正)을 지낸 옥은종(玉恩宗)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옥 여(玉汝)를 일세조로 하는 계통과 갈라져서 본관(本貫)을 의령(宜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에 나타난 옥씨(玉氏)의 본관(本貫)은 17본으로 전하나 이는 세거지명(世居地名)을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이며, 현재는 의령(宜寧) 단본(單本)으로 전한다.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규(珪)가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학문이 깊고 청렴 결백했던 고(沽)는 조선(朝鮮) 정종(定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정언(正言)·교리(校理) 등을 역임했으며 청렴결백하여 사림(士林)에서 명망이 높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령 옥씨(宜寧玉氏)는 남한(南韓)에 총 4,622가구, 18,9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51
  • 오씨(伍氏)
    오씨(伍氏)

     오씨(伍氏)는 본래 중국(中國) 성씨이며, 우리나라에는 배천(白川)·복흥(復興) 2본이 전한다.  배천 오씨(白川伍氏)의 시조(始祖)는 미상(未詳)하고 복흥 오씨(復興伍氏)의 시조는 오윤부(伍允孚)로서 고려(高麗) 충선왕(忠宣王)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그후 국세조사(國勢調査)에는 이 성씨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61
  • 오吳
    오吳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495
  • 부계,의흥 예씨(缶溪,義興芮氏)
    부계,의흥 예씨(缶溪,義興芮氏)

     의흥(義興)은 경상북도(慶尙北道) 군위군(軍威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의흥군(義興郡)을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안동부(安東府)에 속하게 하였고, 공양왕(恭讓王) 때 감무(監務)를 두고 부계현을 예속하였으며, 후에 의성(義城)에 속하였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현(顯)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에 군(郡)으로 승격되었으며, 1914년에 군위군(軍威郡)에 속한 의흥면(義興面)이 되었다. 예씨(芮氏)는 중국(中國)에서 왔다고 하나 정확한 문헌(文獻)이 없어 선계(先系)를 알 수 없다.
     의흥 예씨(義興芮氏)의 시조(始祖) 예락전(芮樂全)은 문장(文章)과 덕망이 뛰어난 석학(碩學)으로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냈으며, 부계(缶溪 : 의흥의 옛지명)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의흥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의 의하면 예씨(芮氏)의 본관(本貫)은 의흥(義興) 외에도 수원(水原), 남양(南洋), 청풍(淸風)등 18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세거지(世居地)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의흥(義興) 단본으로 전한다.
     조선(朝鮮) 초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승석(承錫)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락전(樂全)의 8세손으로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아들 충년(忠年)은 1475년(성종 6)에 문과(文科)에 올라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거쳐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 외에도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역임한 인상(仁祥)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낸 몽진(夢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흥래(興來) 등이 유명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계·의흥 예시(缶溪·義興芮氏)는 남한(南韓)에 총 2,424가구, 9,4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49
  • 영씨(永氏)
    영씨(永氏)

     영씨(永氏)의 본관(本貫)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평해(平海)와 강령(康翎 : 경기도 옹진군 백령면의 고호) 2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원(姓源)과 상계소목(上系昭穆)은 상고(詳考)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당시 서울에 1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 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2가구, 3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42

회원로그인

Copyright © 2001-2016 ITNANU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