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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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의全義 이씨(李氏)
    전의全義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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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천鎭川 김씨 金氏
    진천鎭川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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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주 개씨(驪州 介氏)





     여주 개씨(驪州 介氏)

     여주(驪州)는 경기도(京畿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의 골내근현(骨乃斤縣)이었는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 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 ~ 765)이 황효현(黃驍縣)으로 개칭하였고, 고려(高麗)초(初)에 황려현(黃驪縣) 또는 황리(黃利)로 불리우다가 1257년(고종 44)에 영의(永義)라 하였다. 
     그후 충렬왕(忠烈王) 때 와서는 경순왕후 김씨(敬順王后金氏)의 내향(內鄕)이라고 하여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되었고, 1469년(예종 원년)에 여주(驪州)로 개명(改名)하여 목(牧)으로 승격되었다.
     개씨(介氏)는 중국(中國) 태평(太平 : 지금의 산서성 분성현지방)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周 : 무왕이 은을 멸하고 세운 나라)나라 양왕(襄王) 때 진(晋 : 산서성의 약칭) 땅의 사람인 개자추(介子推)의 후손으로 전(傳)해진다. 
     우리나라의 개씨(介氏)는 1930년 국세조사 당시 함북(咸北) 종성군(鍾城郡) 행영면(行營面) 행영동(行營洞)에 개영순(介永順), 개관오(介官五), 개영준(介永俊) 3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그들의 9대조(代祖)가 여주(驪州)에 이거(移居)한 것으로 기록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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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천-영유(豊川-永柔) 김씨 金氏
    풍천-영유(豊川-永柔)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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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안禮安 이씨(李氏)
    예안禮安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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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公州 이씨(李氏)
    공주公州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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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악唐岳 김씨 金氏
    당악唐岳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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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웅천熊川 김씨 金氏
    웅천熊川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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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선旌善 이씨(李氏)
    정선旌善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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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晋州 이씨(李氏)
    진주晋州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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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송靑松 이씨(李氏)
    청송靑松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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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족보(族譜) 보는 법





    1


    파의 이름이다.  파의 명칭은 대부분 파조(派祖)의  관작명, 시호, 아호(雅號)등을 따서 붙이게 마련이다.  이 예시에서는 파조 자전(子詮)이 사과(司果) 벼슬을 지낸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사과공파'라 한 것이다.  이 파를 찾으려면 족보 계보도(系譜圖)외에 세계도(世系圖)를 보아야 한다.  세계도에는 대략 분파 계도를 그려놓고 무슨 파는 몇 권 몇 쪽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이 표시를 과거에는 천자문(千字文)의 순서대로  한 장에 한 장씩 붙였는데 요즘은 대개 숫자 순으로 쓰고 있다.
     




    2


    열(悅)을 기두(起頭)라 한다.  오른쪽의 작은 글씨는 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표시 한 것이다. 그 옆에  큰 글씨로 쓰여져 있는 사첩(四疊)은 가로로 네 번 바뀌었다는 뜻이다. 
     




    3


    18은 열의 상계, 즉 자전이 18쪽에 있다는 표시다.  몇 권이라는 표시가 따로 없는 것은 그 책의 18쪽이라는 뜻이다. 
     




    4


    20세는 시조 또는 1세조로부터의 세수를 표시한 것이다. 
     




    5


    보명(譜名) 또는 관명(冠名)이라 한다. 
     




    6


    양자(養子)의 생부(生父)를 나타낸 것이다. 
     




    7


    누구에게 양자를 갔다는 표시이다. 이를 출계(出系)라고 한다.
     




    8


    자(字)와 관직을 기록한 것이다.  호(號)가 있을 경우는 자 다음에 호를 기록하고 다음에 관직을 기재하게 되어 있다.
     




    9


    출생 연대이다. 요즘은 서기와 간지(干支)를 함께 쓰고 있다. 
     




    10


    생전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11


    사망한 연대와 사망한 나이이다. 
     




    12


    배우자의 성, 본관, 부친, 조부와 증조의 이름 및 관직이다. 
     




    13


    배우자의 외조부의 성과 본관, 이름, 맨 끝으로 묘소의 소재지이다. 
     




    14


    교(嶠)의 하계(下界),  즉 아들 이하는 1294쪽에 나타나 있다는 표시이다.  이럴 경우 1294쪽을 보면 '교'가 기두로 되어 계속된다. 
     




    15


    둘째 아들이다. 
     




    16


    셋째 아들이다. 
     




    17


    출가한 딸의 배우자,  즉 사위의 성명이다.
     




    18


    사위의 본관과 사위의 아들,  즉 외손자의 이름이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32
  • 경주 빙씨(慶州 빙氏)
    경주 빙씨(慶州 氏)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 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우리나라 빙씨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명(明)나라 출신인 빙여경(如鏡)이 1465년(명나라 헌종 성화 13)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연학사(文淵學士)와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내각한림(內閣翰林)에 이르러 1467년(세조 13) 왕명(王命)으로 8학사와 더불어 동래(東來)하여 우리나라에 정착한 이 시초(始初)가 된다.「경주빙씨족보(慶州 氏族譜)」에의하면 세조(世祖)이 그를 국빈(國賓)으로 예우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이조 참의(吏曹參議)의 벼슬을 내린 후 경주부원군(慶州府院君)에 봉했으므로 관향(貫鄕)을 경주(慶州)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경주(慶州)를 단본(單本)으로 하는 빙씨는 그후 시조 여경의 아들 청(淸)이 1507년(중종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거쳐 강동 부사(江東府使)로 나갔다가 선정(善政)을 베풀고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으며, 그의 맏아들 규현(奎鉉)이 중종(中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중화 부사(中和府使)를 거쳐 황해도 수사(黃海道 水使)를 지냈고, 차남 규서는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조선 선조(宣祖) 때 등과(登科)했던 성의(珹儀:시조 여경의 현손)는 교리(校理)와 문천 군수(文川 郡守)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올라 가문(家門)의 전통을 이었으며, 그의 아들로 선조 때 덕원 부사(德源府使)를 지낸 홍일(弘日)과 삼척 부사(三陟府使) 겸 영장(榮將)으로 무명(武名)을 떨쳤던
    황일(璜一)이 유명했다. 한편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에 급제한 신민(信敏:부사 황일의 아들)은 응교(應校)를 시작으로 벼슬에 나가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치적(治績)을 올렸으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한익(漢益)과 예봉(禮鳳) 부자(父子)가 이름났다. 그외 삼척 영장(三陟營將)을 지낸 주서(珠瑞:두익의 아들)과 용양위 부호군(龍양衛副護軍)에 올랐던 여옥(麗玉)이 유명했고, 호조 참판(戶曹參判) 상택(祥澤)은 동부승지(同副承旨) 종문(種汶), 예조 좌랑(禮曹佐郞) 종찬(鍾찬),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종박(鍾박)·병순(炳淳) 등과 함께 경주 빙()씨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 빙씨(慶州氏)는 남한(南韓)에 총 117 가구, 4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25
  • 광산光山 이씨(李氏)
    광산光山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24
  • 온양 방씨(溫陽方氏)
    온양 방씨(溫陽方氏)

     온양(溫陽)은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을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주(州)로 승격시켜 총관(摠管)을두었다가 후에 군(郡)으로 삼았으며, 고려 초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 천안부(天安府)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2) 현(縣)으로 강등되고 조선 태종(太宗) 때 신창현(新昌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다가 다시 온수현(溫水縣)이라 하였으며, 세종(世宗) 때 온양군(溫陽郡)이 되었고, 19 13년 아산군(牙山郡)에 속한 온양면(溫陽面)이 된 후 지금의 온양읍에 이르고 있다. 방씨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주(周)나라 때 대부(大夫) 방 숙(方叔)의 후예로 전한다. 남양 방씨(南陽方氏)는 중국 산동(山東) 사람인 방 지(方智)가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서기 669년(당고종 총장2, 신라 문무왕9)에 나당동맹(羅唐同盟)의 문화사절(文化使節)로 동래(東來)하여 설총(薛聰)과 함께 '구경(九經)'의 <회통(會統)>을 국역하여 불교의 전성시대인 신라에서 유학(儒學)의 체계를 수립하였고, 장씨(張氏)와 혼인하여 가유현(嘉猷縣: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 뿌리를 내렸다. 그후 그의 6세손으로 전하는 방 운(方雲)이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정벌하는데 무공을 떨쳤고, 고려 창업에서부터 성종대(981∼997)에 이르기까지 60여 년 간 6대의 왕을 섬기면서 무훈을 세워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지고 온양(溫陽), 신창(新昌), 아산(牙山) 3읍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으며, 그가 살고 있던 온양군 팔동리(八東里) 과안산(過雁山)은 <방씨를 우러러 본다>는 뜻으로 배방산(裵方山)으로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누대(累代)로 사패지(賜牌地)인 온양지방에 살면서 방지(方 智)를 시조(始祖)로 하고 운(雲)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온양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였다. 방씨의 본관은 온양을 비롯하여 상주(尙州), 군위(軍威), 신창(新昌), 개성(開城), 강화(江華) 등 26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이며 근대에 와서는 온양으로 단일화하고 있다. 그후 온양 방씨는 12세에 이르러 문정공(文定公) 우선(于宣 )과 그의 아우 우번(于番), 목사(牧使) 득세(得世)의 아들 대에서 장암공(壯岩公) 서(曙)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와 간의대부(諫議大夫) 현(縣)을 파조로 하는 간의공파(諫議公派), 안렴사(按廉使) 훤(暄)을 파조로 하는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군위군(軍威君) 적( 迪)을 파조로 하는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 우번(于番)을 파조로 하는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 평장사(平章事) 신제(臣悌)를 파조로 하는 광록대부공파(光祿大夫公派),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신우(臣佑)를 파조로 하는 상락부원군파(上洛府院君派)로 분파되었으나, 안렴사공파 훤(暄)과 상락부원군파 신우(臣佑)는 절손되었고 현재는 다섯 파만 세계가 이어진다.
     방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목종(穆宗) 때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을 지낸 중탁(仲鐸:운의 아들)과 현종(顯宗)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휘하에서 무공을 떨쳐 온양군(溫陽君)에 봉해진 휴(休:운의손자, 중탁의 아들)가 유명했으며, 휴의 증손 유(裕)는 숙종(肅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이르러,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아들 재(宰), 대제학(大提學)에 오른 증손희진(曦進) 등과 함께 가통을 이었다. 조선조의 인물로는 성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한 유영(有寧)이 중종조(中宗朝)에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참판(參判),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우고(祐固)과 옹(翁)은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여러 전투에서 무공을 떨쳤다. 순조조(純祖朝)에서 홍경래(洪景來)가 난을 일으키자 서정군(西征軍)의 좌초관(左哨官)으로 정주성(定州城)함락에 공을 세웠던 우정(禹鼎)이 홍경래의 난을 평정할 때 쓴 '서정일기(西征日記)'는 역사적인 사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기전(基典)은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이주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은양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년 육성에 공헌했다.
     한편 소파(小波) 정환(定煥)은 일제 압정기에 민족사상 혁명의 선구자로서 짧은 일생을 나라를 위해 바쳤다. 특히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신문'을 인쇄하여 빨래 광주리에 숨겨 돌리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고,일본으로 유학하여 아동문학에 전심, '사랑의 선물', '어린이' 등의 잡지를 창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색동회>를 조직하여 아동문학의 정수를 이루었다.그외 윤명(允明)과 천용(天鏞), 한익(漢翼), 건홍(建洪), 무길(戊吉) 등이 서화(書畵)로 명성을 떨쳐  문무의 전통을 이은 온양 방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19,317가구, 81,41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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