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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릉 두씨(杜陵杜氏)
    두릉 두씨(杜陵杜氏)

     두릉(杜陵)은 중국에 있는 지명으로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두씨(杜氏)의 연원(淵源)은 중국 경조(京兆: 협서성 관중도 장안현)에서 시작되었으며, 송(宋)나라 태종(太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낸 두경녕(杜慶寧)을 시조(始祖)로 한다. 「두릉두씨세보(杜陵杜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송(宋) 진종(眞宗)의 왕위 계승(王位繼承) 문제에 관한 상소(上疏)로 직간(直諫)하다가 진종에게 미움을 받아 소주 자사(蘇州刺史)로 좌천되자 아들인 중서사인(中書舍人) 지건(之建)과 우습유(右拾遺) 지방 형제를 데리고 정처없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서 1004년(고려 목종 7) 궁지현(宮池縣:지금의 전북 김제군 만경면)에 표착(漂着)하여 고려에 귀화하였다. 고려 목종(穆宗)은 두경녕(杜慶寧)에게 우사관(右司官)의 벼슬을 내리고 궁지현(宮池縣)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한 후 두릉군(杜陵君)에 봉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두씨(杜氏)의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고, 후손들은 두경녕(杜慶寧)을 시조로 하여 봉군지(封君地)인 두릉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두릉 두씨(杜陵杜氏)는 지건(之建)의 아들 수총(遂寵)이 고려조(高麗朝)에서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대호군(大護軍)에 올랐고, 손자(孫子)인 방(邦)은 1122년(예종 17)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한편 고려 명종(明宗) 때 이름난 무신(武臣)으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여 용맹을 떨친 경승(景升)은 평장사(平章事)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랐으나 권신(權臣) 최충헌(崔忠獻)의 폐왕음모(廢王陰謀)를 탄핵하다가 자연도(紫燕島)로 유배당하자 울분으로 죽었다. 그 외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영(瑛:정승의 맏아들), 문하시중(門下侍中) 현(玹)의 형제와 절도사(節度使) 무지(茂枝), 울산 병사(蔚山兵使) 을지(乙枝)가 고려 시대에 가문을 빛낸 인물이며, 조선조에 와서는 태종(太宗) 때 병마우후(兵馬虞侯)를 지낸 승손(承孫)과 세종(世宗) 때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를 받은 세준(世俊) 부자가 유명했고,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낸 사순(思順)과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첨사(僉使)를 역임한 사근(思謹) 형제는 가선대부(嘉善大夫) 헌(憲)의 아들이다. 사순(思順)의 아들 5형제 중 장남 정란(廷蘭)은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 담(鄭湛), 조방장 백광언(白光彦), 해남 현감 변응정(邊應井), 고경명(高敬命), 조 헌(趙憲)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적과 대전하다가 금산(錦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충절(忠節)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인조(仁祖) 때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양필(良弼:울산 병사 을지의 6세손)과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벽동 군수(碧潼郡守)로 권 율(權慄)을 도와 금산(錦山) 영정곡(永貞谷)에서 대공(大功)을 세운 기문(起文)이 뛰어났으며, 만형(萬馨)은 정조(正祖) 때 문필(文筆)로 이름을 떨쳤다. 두릉 두씨(杜陵杜氏)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2,902명이 있었고, 1975년 조사에서는 802가구였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 총 1,163가구, 4,8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09
  • 장연 변씨(長淵邊氏)
    장연 변씨(長淵邊氏)

     장연(長淵)은 황해도(黃海道) 서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부터 장연으로 불리워 오다가 1018 년(고려 현종9)에 옹진(甕津)에 속하였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여러 변천을 거친 후 태종(太宗) 때 영강현(永康縣)과 합하여 연강(淵康)으로 개칭하였다.
     1416년에는 전에 왜구(倭寇)로 인하여 청송현(靑松縣:지금의 신천군 용문면)으로 편입시켰던 해안현(海安縣)을 다시 합치고 이름도 장연으로 환원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군(郡)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장연 변씨(長淵邊氏)는 주(朱)나라 문하습비후(門下習秘侯) 대아찬 변 경(邊 鏡)의 증손(曾孫)인 변유영(邊有寧)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장연변씨갑오보(長淵邊氏甲午譜)」에 의하면 그는 1138년( 고려 인종16) 중문지후(中門祗侯)로 연성부원군(淵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장연(長淵)에 정착세거(政着世居)하면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장연(長淵)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으며, 유영의 7세손 영인(永仁:사온동정 용지의 아들)이 고려조에서 판전의사(判典醫事)를 지냈고 , 그의 손자 처후(處厚)는 조선개국(朝鮮開國) 초에 춘장문과(春場文科)에 급제하여 태종(太宗) 때
    소윤(少尹)을 지내고 세종조(世宗朝)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처후의 아들 대해(大海)는 관찰사(觀察使)을 역임하고 슬하에 곤(崑)과 윤(崙)의 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교하 현감(交河縣監)과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을 각각 지내면서 명성을 떨쳤으며, 곤의 증손 사정(士貞)은 임진왜란 때 무공(武功)을 세워 변응정(邊應井:원주 변씨)·변이중(邊以中:황주 변씨)과 더불어 임란의 <삼변충장(三邊忠壯)>으로 일컬어졌다. 당대에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인 일재(一齋) 이 항(李 恒)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한  사정(士貞)은 1592년(선조 25) 임란이 일어나자 순천(順天 )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晋州) 싸움에 파병하고 전라도(全羅道) 산간지방에서 20일 동안에 왜병 2천 명을 사살하는 등 빛나는 전공을 올려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으로 불리웠다. 그외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사형(士亨:사정의 형)과 거제 부사(巨濟府使)로 치적을 쌓았던 윤조(潤祖:통제사 흡의아들),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건중(建中:신천 군수 징의 맏아들) 등이 뛰어났으며, 호군(護軍)을 지낸 광후(光厚:처후의 아우)의 6세손 발(潑)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제용감 직장(濟用監直長) 의(誼), 거제 부사(巨濟府使) 진영(震英), 의금부사(義禁府使) 덕용(德龍) 등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연 변씨(長淵邊氏)는 남한(南韓)에 총 582가구, 2,4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07
  • 국씨(國氏)





     국씨(國氏)

      국씨(國氏)는 중국(中國)  하비(下 )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백제시대(百濟時代)에는 사(沙)·연(燕)·리·해(解)·진(眞)·목(木)·백( )과 더불어 8대성(大姓)으로 손꼽혔다.
     우리 나라 국씨(國氏)의  본관(本貫)은 담양(潭陽)·대명(大明:중국)·금성(金城)·전주(全州)·풍천(豊川)·현풍(玄風)·영양(英陽) 등 7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傳)하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계대(系代)를 상고(詳考)할 수 없다.

     역사상 국씨(國氏)의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서기 611년(백제  무왕 12) 국지모(國智牟)가 수(隨)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들어가 조공(朝貢)을 바치고 고구려(高句麗) 정벌을 위한 출병 기일을 물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고려 태조 원년(太組元年)에 국 현(國 鉉)이 상서상의 정6품 벼슬인 원외랑(員外郞)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대(近代)에 와서 국씨(國氏)는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평남(平南) 강서군(江西郡)에 담양 국씨(潭陽國氏) 4가구와 함남(咸南) 영흥군(永興郡)에 풍천 국씨(豊川國氏) 3가구, 함남 단천군(端川郡)에 전주 국씨(全州國氏) 3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10가구, 97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06
  • 월성·경주(月城·慶州) 박씨朴氏
    월성·경주(月城·慶州) 박씨朴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05
  • 통진通津 이씨(李氏)
    통진通津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03
  • 해평 길씨(海平 吉氏)
      해평(海平) 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선산군(善山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파징(波澄)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신라(新羅) 때의 병정현(竝井懸)을 초려초에 해평군(海平郡고)으로 쳐서 복주(福州:안동의 옛 지명)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상주(尙州)와 선산(善山)으로 이속되었다가 1415년(태종 15)에 해평현(海平縣)으로 강등된 후 선산군(善散郡) 해평면(海平面)이 되었다.

     길씨(吉氏)의 중국(中國) 풍익(馮翊)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으며, 당(唐) 나라에서 귀화(歸化) 해온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인 길 당(吉  )이  고려(高麗) 문종(文宗)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져 우리나라 길씨(吉氏)의 본관(本貫)은 해평(海平)과 개성(開城)을 비롯하여 하음(河陰:강화지방)과 여주(驪州)등 28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傳)하나 모두가 해평 길씨(海平 吉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므로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해평(海平) 단본(單本)으로 알려졌다.
     해평 길씨는 해평백(海平伯) 길 당(吉  )의 후손에서 1백여년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래 때의 성균진사(成均進士)인 길시우(吉時遇)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일찌기 낙동강변(洛東江邊)에 터를 잡아 고려말에서부터 충절(忠節)과 도덕가문(道德家門)으로 일컬어진 해평 길씨(海平 吉氏)는 해동(海東)의 절신(絶信) 길 재(吉 再)가 더욱 빛냈다.   고려가 기울기 시작한 1353년(공민왕 2) 지금주사(知錦州事) 원진(元進)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박 분(朴  :상산 박씨)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이 색(李 穡)·정몽주(鄭夢周)·권 근(權 近)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도학(道學)을 밝혔다. 
      그가 여덟 살 때의 일이다. 아버지 원진(元進)이 보성 대판(寶城 大判)으로 임지(任地)에 나갈 때 어머니 김씨(金氏:토산 김씨 희적의 딸)가 따라가면서 박봉으로 생활이 어려우므로 재(再)를 외가에 맡겨두고 갔다. 
      그는 하루종일 어머니를 사모하여 눈물을 흐리며 남계(南溪)에서 놀다가 석별가(石鱉歌)를 지었다. "자라야 자라야 너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느냐, 나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도다. 
     내가 너를 삻아 먹을 줄 알건만. 어머니 잃은 것이 나와 같으므로 너를 놓아 준다"하고 물에다 던져주며 울고 있으니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쫓아와서 끌어안고 감동하여 울었다고 한다.   1386년(우왕 12)에 사마(司馬)에 합격하고 3년 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창왕(昌王) 때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니 향리 사람들이 그 효도를 칭찬하였다. 
      조선(朝鮮)이 개국(開國) 한 후 태종(太宗)은 일찌기 태학관(太學館)에서 시경(詩經)을 읽었던 동문(同門)인 관계로 그를 불러 정종(定宗)에게 아뢰어서 봉상박사(奉常博士)의 벼슬을 주었으나, 그는 사은숙배(謝恩肅拜)하지 않고 말하기를 "옛 정(情)으로 부르시니 왔을 뿐 벼슬하는 것은 재(再)의 뜻이 아닙니다."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자네의 말은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불역지도(不易之道)이니 그 뜻을 빼앗기기 어려우나 자네를 부른 사람은 나요.  
      자네에게 벼슬을 준 분은 상(上:정종)이니 상에게 사의를 표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정종(定宗)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우대하여 보내주고 그 집에 대해서는 납세(納稅)와 부역(賦役)을 면제하여 주었다.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태종(太宗)은 "길 재에게 이들이 있다 하니 불러서 등용 시켜 길 재의 충성을 드러내도록 하라"하니 사순(師舜)을 불러 종묘부승(宗廟副丞)에 제수하였다.
      사순이 조정에 불려갈 적에 재(再)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에게 먼저 예의를 베푸는 것은 삼대(三代:하·은·주나라) 이후에 드문 일이다.
      네가 초야에 있는데 임금이 먼저 부르니 그 은의(恩義)가 범연(泛然)한데 비할 것이 아니다. 네가 마땅히 나의 고려에 향하는 마음을 본받아서 너의 조선임금을 섬겨라." 하였다. 
      특히 그는 김숙자(金叔滋)에게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쳐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 등으로 하여금 학통(學統)을 잇게 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친수를 이루었으며, 「야은집(冶隱集)」을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67살에 임종이 가가와지자 부인 신씨(申氏)가 벼슬을 하고 있는 아들 사순(師舜)을 불러 올 것을 권하자 "아비는 임금과 같은 것이다. 
      임금 옆에 있으면 아비 옆에 있는 것과 같다. 아들은 없어도 있는 것이다."하며 쓸쓸히 일생을 마치고 경북 칠곡군 복삼면 오태동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묻혔다. 
      그의 묘소 앞 강변의 단애(斷崖: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에는 지주비(砥柱碑)가 서있는데, 중국 황하(黃河)의 탁류를 이겨내는 지주비를 탁본떠와 그대로 전면(前面)에 시기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뒷면의 글을 지어 1587년(선조 20)에 세운 것이다. 
      그 외 해평 길시를 빛낸 인물(人物)로는 송당(松當) 박 영(朴 英)의 문인(文人)으로 이름난 면지(勉之)의 아들 겸(謙:현감을 역임)과 회(誨)가 유명했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회(誨)는 임진왜란 때 피난가는 대가(大駕) 앞에 길을 막고 엎드려 변방에 왜적의 염탐군이 있어 해침을 받을가 염려되오니 가마대신 말을 타시도록 진언했고, 뒤에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추록되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3·1운동의 주역인 선주(善宙)가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  평양지부(平壤支部)를 조직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침으로서 충절(忠節)의 가문(家門) 해평 길씨(海平 吉氏)를 더욱 빛냈다.
      오늘날 해평 길씨는 경북(慶北) 선산(善山)과 충남(忠南) 금산(錦山)지방에 집중 세거하며 1985년 인구조사 결과 총 7,360가구에 30,390명으로 전체 성씨 중 73위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02
  • 안동·일직 손씨(安東·一直孫氏)
    시  조 휘(諱): 손 응(孫 凝)
       중시조 휘(諱): 손 간(孫 幹), 장군(將軍)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00
  • 광평-성산(廣平-星山) 이씨(李氏)
    광평-성산(廣平-星山)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00
  • 시호록(諡號錄), 시법(諡法)이란?


     종친(宗親)과  문.무관(文.武官)중에서 정二품 이상의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이 죽으면 시호(諡號)를 주었는데,  뒤에는 범위가 확대되어  제학(提學)이나  유현(儒賢)·절신(節臣) 등은 정二품이 못되어도 시호(諡號)를 주었다. 

     시호(諡號)를 정하는 절차는, 해당자의 자손이나 관계자들이 죽은 이의 행장(行狀)을 적은 시장(諡狀)을 예조(禮曹)에 제출하면  예조(禮曹)에서 이를 심의한 뒤  봉상사(奉常寺)를 거쳐 홍무관(弘文館)에 보내어 시호(諡號)를 정하게 된다. 
     
     시호(諡號)를 정하는 법으로는 『주공시법(周公諡法)』이니 『춘추시법(春秋諡法)』이니 하여 中國古代 이래의 시법(諡法)이 많이 적용되었던 듯하다. 

    [시호(諡號)에 사용된 글자는] 

      문(文)·충(忠)·정(貞)·공(恭)·양(襄)·정(靖)·효(孝)·장(莊)·안(安)·
      경(景)·익(翼)·무(武)·경(敬)  등, 120 자인데,  

     한자 한자마다 정의(定義)가 있어서 생전의 행적(行蹟)에 알맞는 글자를 조합하여 두자(字)로 만들고 시호(諡號)아래 『공(公)』자를 붙이어 부른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97
  • 진위威振 이씨(李氏)
    진위威振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94
  • 보첩(譜牒)의 종류

     가.  대동보(大同譜) 
        같은 시조(始祖) 밑의 중시조(中始祖)마다 각각 다른 본관을 가지고 있는 씨족간에 종합 편찬된 족      보이다.  즉 본관은 각기 다르되, 시조가 같은 여러 종족이 함께 통합해서 만든 보책(譜冊)이다.

      나. 족보(族譜) 
        관향(貫鄕)을 단위로 같은 씨족의 세계(世系)를 수록한 보첩으로, 한 가문의 역사를 표시하고 가계      (家系)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보책(譜冊)이다.

      다. 세보(世譜)와  세지(世誌) 
        한 종파(宗派)이상의 동보(同譜)·합보(合譜)로 편찬되었거나, 어느 한 파속(派屬) 만이 수록되었을      경우이며,  이를  세지(世誌)라고도 한다.

      라. 파보(派譜)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어느 한 파속(派屬)만의 명·휘자(名·諱字 : 이름자)와 사적(事蹟)을 수록한 보     책(譜冊)이다.

      마. 가승보(家乘譜) 
        본인을 중심으로 편찬하되,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의 직계존속(尊屬 :자기의 윗 대)과, 비속(卑      屬 :자기의 아랫 대)에 이르기까지 이름 자와 사적(事蹟)을 기록한 것으로 보첩 편찬의 기본이 되는      문헌이다.

      바. 계보(系譜) 
        한 가문의 혈통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으로 나타내는 도표(圖表)로서, 한 씨족      전체가 수록되었거나 어느 한 부분이 수록된 것이다.

      사. 가보(家譜)와  가첩(家牒) 
        편찬된 형태나 내용의 표현이 아니라 집안에 소장되어 있는 보첩을 말한다.

      아. 만성보(萬姓譜)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고도 하며,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 줄기를 추려내어 집성(集成)한 책으      로 족보의 사전(辭典)구실을 하는 것이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89
  • 청안淸安2 이씨(李氏)
    청안淸安2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81
  • 순천 도씨(順天陶氏)
    순천 도씨(順天陶氏)

     순천(順天)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백제시대(百濟時代)에 함평군이었으나 신라(新羅) 때 승평(昇平)으로 고쳤으며, 996년(고려 성종 15)에  승주(昇州)로 하였다가 정종(靖宗) 때 승평군(昇平郡)이 되고 1309년(충선왕 1) 승주목(昇州牧)으로 승격하였다. 그후 순천부(順天府)로 강등되고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도호부(都護府)가 되었으며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순천군(順天郡)으로 개칭, 1949년 순천읍과 일부 면을 통합하여 순천시가 되고 종래의 순천군은 승주군(昇州郡)으로 개칭되었다.
     도씨(陶氏)는 한(漢)나라 초에 중국 제남(濟南 : 지금의 산동성 역성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 (姓氏)이며, 선계(先系)는 당요(唐堯 : 전설상의 인물인 성왕 요재를 일컫음)의 후예로 전해진다. 우리나라 도씨(陶氏)의 본관 (本貫)은 순천(順天)과 풍양(豊壤)을 비롯하여 청주(淸州), 유곡(楡谷 : 남원지방), 죽청(竹靑), 경주(慶州), 병양(兵陽), 밀양(密陽) 등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순천(順天)을 제외한 나머지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상계(上系)가 미상(未詳)하다. [순천도씨김포세보(順天陶氏金浦世譜)]에 의하면 순천 도씨의 시조(始祖)는 중국 진(晋)나라 사람인 도 단(陶丹)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 도 간(陶侃 : 257-332)이 진(晋)나라 무장(武將)으로 진(晋)왕조가 오(吳)를 평정하여 삼국(三國)을 통일(統一)하는데 훈공을 세웠다. 한편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유명한 진(晋)나라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무장 도 간(陶侃)의 증손(曾孫)이다.도연명의 본명은 도 잠(陶潛)이며 진나라 말기에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에서 출생하여 80여일간의 팽택현령(彭澤縣令)으로 관계(官界)를 사직하고 귀향(歸鄕)하여 전원생활(田園生活)로 유유자적이며, 산천초목(山川草木)과 조수(鳥獸)의 기담(奇談)을 기록한 [산해경(山海經)]을 읽고 밭을 갈기도 했으며 중국 문학사상 특이한 위치를  차지했다. 특히 그는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자처하며 평이하고도 자연스러운 조사(助辭)를 자주 사용하였고, 때로는 속어적(俗語的)인 표현으로 깊은 철학(哲學)을 담아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저술했다.
     순천 도씨(順天陶氏)는 시조 단(丹)으로부터 선계(先系)를 적어오다가 중간 계대(系代)를 실전(失傳)하여, 1296년(충렬왕 22) 원(元)나라 공주(公主)를 배행(陪行)하고 동래(東來)한 도구원(陶球元)이 순천(順天) 죽청리(竹靑里)에 세거(世居)하게 되었으므로 순천(順天)을 관향(貫鄕)으로 하고 구원(球元)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界)를 계대(繼代)하고 있다.
     가문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구원(球元)의 아들 정흠(正欽)이 고려조(高麗朝)에서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내고 개성부원군(開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손자 광세(匡世)는 소부소감(少府少監)을 역임하여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그밖의 인물로는 장령(掌令) 동명(東明)의 아들 천석(天錫)이 조선조에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제만(濟萬)은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로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된 태영(泰英 제만의 증손)과 함께 순천 도씨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근대에 와서 도씨(陶氏)는 1930년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경기도 김포와 개풍군(開豊郡) 일대를 비롯하여 황해도(黃海道)일원에 100여 가구(家口)가 살고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천(順天)외에도 풍양(豊壤), 경주(慶州), 청주(淸州), 남양(南陽)등 8본관의 도씨가 남한에 222가구, 943명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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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족보(族譜)의 의의와 유래





    가. 족보(族譜)의 의의

      족보(族譜)(보첩(譜牒)이라고도 함)는 한 종족 혈통의 가계보(家系譜)로서 부계 중심으로 혈연관계를 도표식으로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으로 동일 혈족의 원류를 밝혀 조상을 숭배하고 혈족의 단결을 도모하며 후손으로 하여금 화목의 미풍을 이루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성족 파벌과 문중 가승을 분명히 하며 항렬 존비와 관련 적서등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족보는 역사와 관련을 맺어 역사 속에 명맥을 한 가문에 받아들여 혈족을 미화하고 있으나 허위나 날조를 금하고 있으니 이는 후손에게 공정한 정도를 교훈시키려는 의도라 할 것이요. 상대에서 기록해 놓은 내용을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지 않고는 추록해서는 안되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 또한 한 가문의 역사가 어떤 특정 개인의 의사에 의한 임의 날조됨을 금하려는 것이요. 그대로의 역사성을 유지 존속시키려는데 있는 것이다.
     









     나. 보첩(譜牒)의 유래

      보첩은 원래 중국의 6조(六朝)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제왕연표(帝王年表:왕실의 계통)를 기술한 것이었으며, 조상의 관력과 혼인관계등으로 우족과 관족을 구별하려는 데서 시작되어 발전하여 내려오다가 개인적으로 보첩을 갖게 된 것은 한(漢)나라때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제도를 설치하여 응시생의 내력과 그 선대(先代)의 업적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가 된다. 송대에 와서 한 혈족의 역사를 모두 기록하게 되었고 전 가족을 수록하게 되는 발전을 보게 되었다. 특히 북송(北宋)의 대문장가인 3소-소 순, 소 식, 소 철 - 에 의해서 편찬된 족보는 그 후 모든 족보편찬의 표본이 되어왔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의종(毅宗)때 김관의(金寬毅)가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그 효시(嚆矢)라 할 수 있다. 또한 사대부의 집에서는 가승(家乘)이 전해 내려왔는데, 체계적으로 족보의 형태를 갖춘 것은 조선 성종 7년(成宗 7 : 1476)에 발간된 안동 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이고, 지금과 같이 혈족(血族)전부를 망라한 족보는 조선 명종(明宗)때 편찬된 문화 유씨보(文化柳氏譜)로 알려져 있으며 그 후 각 권문 세가에서 서둘러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여 많은 족보가 이를 전후하여 약 100년사이에 이루어져 지금까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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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녕 견씨(川寧 堅氏)





     천녕 견씨(川寧 堅氏)

     천녕(川寧)은 경기도(京畿道) 여주군(驪州郡)에 속해있던 옛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술천현(述川縣) 또는 성지매(省知買)인데 통일(統一)신라(新羅) 때 기천군(沂川郡)으로 고쳤다가 고려(高麗)초(初)에 천녕현(川寧縣)으로 개칭하여 광주(廣州)에 속하였다. 
     그후 조선(朝鮮) 예종(睿宗 : 제 8대 왕, 재위기간 : 1468 ~ 1469) 때 와서 여주(驪州)로 병합(倂合)하여 그 지역을 직촌(直村)이라 하였다.

     견씨(堅氏)의 본관(本貫)은 천녕(川寧)을 비롯하여 사량(沙梁 : 경기도 수원지방), 김포(金浦), 충주(忠州) 등이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으며,
     모든 견씨(堅氏)의 연원(淵源)은 조선개국공신(朝鮮開國功臣) 견 권(堅 權)에 두고 있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서 두각을 나타낸 견 권(堅 權)은 서기 918 년(태조원년) 태조(太祖 : 왕 건)가 왕위(王位)에 오르는 데 공(功)을 세워 염 상(廉 湘), 김 낙(金 樂) 등과 함께 개국이등공신(開國二等功臣)에 책록되었고, 921년(태조 4) 달고적(達姑狄 ; 말갈 부족의 하나) 170여 명이 함경남도 등주(登州)를 거쳐 신라(新羅)의 북변을 침범하려 할 때 이를 쳐서 크게 패배시켰다. 
     또한 936년(태조 19) 태조(太祖)가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후백제(後百濟)의 신 검(神 劒)을 칠 때 대상(大相 : 고려초 문무관계의 하나)으로 견 훤(甄 萱) 등과 함께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2만을 인솔하여 좌익(左翼)으로 참전, 후백제(後百濟)를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功)을 세웠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견 권(堅 權)을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천녕(川寧)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무신(武臣)들을 배출시켰다.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人物)로는 영군장군(領軍將軍 : 군대를 통령하는 정4품 무관 벼슬)을 지낸 금(金)과 장군(將軍) 일(一)이 대표적이며, 태조 원년에 창부경(倉部卿 : 전곡을 맡아보던 관청의 으뜸 벼슬)에 오른 수(守)와 사과(司果) 성귀(成貴)는 진사(進士) 희복(希福)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견씨(堅氏)는 남한(南韓)에 총 99가구, 4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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